모리 토모노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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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Mori_Tomonobu.jpg
母里友信
1556-1615

1. 개요
2. 생애
3. 일화



1. 개요[편집]


모리 토모노부는 센고쿠 시대의 무장으로 구로다 요시타카, 구로다 나가마사를 섬겼다. 모리 타헤에라는 일명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2. 생애[편집]


모리 토모노부의 모리 가문은 구로다 가문을 섬기던 하리마의 코쿠진 출신의 가문이다.[1] 본래 토모노부는 구로다 요시타카의 아버지 구로다 모토나가을 섬기던 하리마의 코쿠진 소가 카즈노부의 아들로 태어났으나 어머니 쪽 가문인 모리 가문이 구로다 가문과 아카마츠 가문과의 전투에서 많은 일족을 잃었고, 이로 인해 토모노부가 모리 성을 받게 되었다.

그 후 구로다 가문을 계속 섬기면서 항상 선봉을 맡아 활약했고, 오다 노부나가의 대항하여 아라키 무라시게가 반란을 일으켰을때 구로다 요시타카가 설득을 위해 그를 찾아갔다가 감금당해 주군이 사라졌음에도 충성을 맹세한 가신들의 서약서에도 이름을 올렸다. 또한 아라키 무라시게의 성에 몰래 잠입하여 그의 안부를 확인하기도 하였다.

그 후 요시타카가 풀려나온 뒤로는 그를 따라 주고쿠에서 활약했고, 도요토미 히데요시시마즈 정벌에서도 활약해 6천석을 받게 되었다. 임진왜란에는 구로다 요시타카의 아들 구로다 나가마사를 따라 참전했다.

이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는 규슈에서 구로다 요시타카를 따라 매형인 오토모 요시무네를 항복시키는 등 활약하였고, 전투 이후 나가마사가 치쿠젠 52만석으로 전봉됨에 따라 1만 8천석의 엄청난 석고를 가지게 되었고,[2] 고토 모토츠구가 가문에서 나감에 따라 그 영지였던 곳으로 전봉되었다. 이후 에도 성 축성 등 내정 방면에서 활약하다 1615년 사망했다.

3. 일화[편집]


파일:200px-Mori_Tahee_statue.jpg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사이에 있었던 일이다. 교토 후시미에 머물던 후쿠시마 마사노리에게 사자로 가게 되었는데, 술을 좋아하던 마사노리가 그에게 거듭 술을 권하였다. 토모노부는 대단한 술꾼이었으나 사자로 다른 다이묘를 만나러 간 자리이므로 이를 계속 거절하였다. 그러자 마사노리가 큰 대접에 담긴 술을 다 마시면 원하는 상을 내릴 것이라며 설득하고, 구로다 가문의 무사들은 모두 술에 약하며 취하면 아무 쓸모 없는 자들이라며 도발하였다. 이에 그 술을 단숨에 마셔버리고는 마사노리가 가지고 있던 명창이자 지금도 일본의 국보니혼고를 달라고 하였고, 무사가 한입으로 두 말을 할 수는 없다며 마사노리는 결국 창을 줬다고 한다.

이 일화 때문인지 그의 동상도 큰 술잔을 들고 있는 모습이며, 구로다 가문이 다스리던 하카타 지역의 명물이 인형인데, 그 인형의 소재로 창과 술잔을 든 모리 토모노부가 많이 채용된다고 한다. 또한 이를 소재로 한 후쿠오카 지방의 민요도 있다.


酒は呑め呑め 呑むならば 日本一のこの槍を 呑み取るほどに呑むならば これぞ真の黒田武士

술을 마셔라 마셔 마신다면은 일본 제일의 이 창을 삼킬 정도로 마신다면은 그야말로 참된 구로다 무사


그 밖에도 참근교대를 위해 에도로 가던 중 후지산이 보였는데, 어떤 사람이 후지산을 높고 아름답다며 일본 제일의 산이라고 칭송하자 토모노부가 후쿠치산[3]이 더 높고 아름답다며 우기기 시작했고, 한 번 우기면 끝까지 우기는 그의 성격을 알고 있던 사람들이 그를 인정해 토모노부는 죽을 때까지 이를 우기면서 살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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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모리 모토나리 등으로 유명한 모리 가문과는 상관이 없고 한자도 다르다.[2] 1만석 이상이면 다이묘 급이다.[3] 후쿠오카현 후쿠츠시에 있는 산으로 구로다 가문의 영지 내에 있던 산이다. 실제로는 해발 900m 정도의 높이를 가진 산으로 후지산이 훨씬 높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