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본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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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고구려의 제5대 군주. 민중왕과 마찬가지로 해씨 고구려설 떡밥에 포함된다."왕은 날이 갈수록 난폭해지고 학대하니, 사람을 깔고 앉고 누울 땐 사람을 베고 누웠다. 사람이 혹시나 움직이면 바로 죽였다. 신하 중 간언하는 자가 있으면 활을 쏴 죽였다."
王日增暴虐, 居常坐人 臥則枕人. 人或動搖 殺無赦. 臣有諫者 彎弓射之.
《삼국사기》
일단 《삼국사기》에는 대무신왕(대주류왕)의 아들로 되어 있다[3] . 고구려의 역사를 기록한 정사인 《삼국사기》는 그를 대무신왕의 아들로 칭하고 있으니 이것이 현재까지의 정설이다. 어머니는 호동왕자를 시기하여 음모를 꾸며 죽게 만들었다고 알려진 대무신왕의 첫째 왕후다. 다만 장남임에도 불구하고[4] 태자 책봉은 차비 해씨 소생인 호동왕자가 죽은 뒤에나 이뤄졌다.
2. 내정[편집]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의 모본왕 기록에는 재위 2년에 군사를 동원했다고 나오고 그 뒤 관련 내용은 없이 후일의 폭정만 말한다.
모본왕 2년에 고구려가 중국을 공격한 일이 있는데 사서에 따라서 기록에 약간씩 차이가 있다.
- 《후한서》 〈광무제본기〉: 요동 변방의 맥인이 우북평(右北平), 어양(漁陽), 상곡(上谷)[5] , 태원(太原)을 침략했다.
- 《후한서》 〈동이열전〉: 구려(句麗)와 선비가 북평, 어양, 상곡, 태원 등지를 침략하다가 제융이 은신(恩信)으로 부르니 다시 항복하였다.
-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모본왕조': 재위 2년, 장수를 보내 후한(後漢)의 북평(北平)[6] , 어양(漁陽), 상곡(上谷), 태원(太原)을 습격하였다. 이에 후한의 요동 태수 제융(祭肜)이 화친을 청해와 화친하였다.
《삼국사기》와 《후한서》의 내용을 종합하면 고구려는 선비족과 연합하여 군사를 일으켜 후한 제국의 동북방 지역에 위협을 주었으며, 고구려의 내부 사정으로 전쟁을 잇기 어려워 화친을 맺었다고 볼 수 있다. 다음 왕인 태조대왕 때부터 한나라와 승패를 거듭하여 피터지게 싸우는데 《후한서》 〈광무제본기〉에는 주체를 고구려가 아니라 맥인으로 적고 있다. 이때 고구려가 침공한 지역은 지금의 탕산 일대와 산시성의 타이위안 지역이다.
차년조(此年條)의 기재(記載)는 《후한서》(後漢書) 〈동이전〉 '고구려조'(東夷傳 高句麗條)에 '(建武) 二十五年春, 句麗寇右北平·漁陽·上谷·太源. 而遼東太守祭彤, 以恩信招之, 皆復款塞'라 한 것을 몇 자(字) 윤색하여 옮겨놓은 것이지만, 동서(同書) 〈광무 본기(光武 本紀)〉 동년조(同年條)에 의하면 거기에는 '(春正月), 遼東徼外貊人寇……云云'이라 하였다. 이 맥인(貊人)이 과연 (전(傳)에 보임과 같이) 구려(句麗)를 가리킨 것인지 혹은 구려(句麗) 이외의 다른 맥인(예여부여)(貊人(例如夫餘)), 다른 새외족(塞外族)의 일컬음인지 자세치 않다. 동서(同書){권 50 〈채동전〉(祭彤傳)}[7]
을 보면 당시 요동(遼東) 방면의 변해(邊害)는 흉노(匈奴)·선비(鮮卑)·오환(烏桓) 등이 가장 심하였고 고구려(高句麗)에 대하여는 다만 '高句麗之屬, 遂駱驛款塞'[8] 라 하였을 뿐이다. 실제 이 때 구려(句麗)의 세력은 능히 그렇게 중국(中國) 방면에까지 침략(侵略)의 발을 내키었을까가 무엇보다 문제이다. 그러므로 위의 기재(記載)의 사실(事實)은 구려(句麗)에 관한 것이 아니라고 봄이 타당할 것 같다.
을유문화사판 이병도역 《삼국사기》 번역본 해당 기사에 달린 주석.
역사학자 이병도는 역주한 《삼국사기》 번역본의 주석에서 《후한서》 〈광무제본기〉에는 우북평·어양·상곡·태원을 공격한 주체가 '맥인'(貊人)이라고 달리 나오는데, 이 맥인이 정말 고구려를 가리키는지 확실하지 않고 《후한서》 〈채동전〉에 고구려의 침공에 대한 기사가 존재하지 않음을 들어 모본왕 2년의 기사가 고구려와 관련된 기사가 아니라고 추측하였다. 실제 '맥인'이란 단어는 고구려뿐만 아니라 오환이나 선비 등의 북방 유목민족을 지칭할 때 쓰는 단어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과거에는 이 기사의 내용을 부정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하지만 현재 학계에서는 고구려가 후한을 공격한 것이 사실이라고 보는 것이 다수설이다. 다만 고구려의 단독 행동이 아니고 오환이나 선비의 협조가 있었다고 추정하는 연구자들이 많다. 이 주장에 따르면 고구려는 요동군을 통과해서 후한 깊숙히 침공한 것이 아니라 오환이나 선비의 협조로 다른 루트를 이용해 침공했을 것이라 추측한다.[출처필요]
《삼국사기》에 따르면 모본왕이 중국을 공격한 그 해에 폭풍이 불고 서리와 우박이 내리는 등 악천후가 있어 음력 8월에 사신을 보내 굶주린 백성들을 진휼하였다고 한다.
3. 폭군[편집]
모본왕은 인간 베개[9] 였던 두로가 못 참고 휘두르는 칼에 시해당했으며 이후에 신하들이 불초하다며 태자를 폐하고 종실에서 고궁이라는 아이를 왕으로 세우니 이 사람이 태조대왕이었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어떤 사람이 두로에게 말하길
두로는 이를 듣고 왕을 시해했다고 한다."대장부가 왜 우느냐? 옛 사람이 말하기를 '나를 쓰다듬으면 임금이요, 나를 학대하면 원수로다.'[10]
라고 했다. 지금 왕의 행함이 잔학하여 사람을 죽이니 백성의 원수다. 네가 그를 죽여라."
한때 후한의 동북방 일대를 위협할 만큼 군사적인 능력이 있었으나, 내부적으로는 학정을 일삼다 암살을 겪은 폭군이라고 할 수 있다.
3.1. 역사의 피해자?[편집]
다만 실제 폭군인지의 여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이런 주장을 하는 이들의 근거는 다음과 같다.
- 1번째로 모본왕의 재위 기간 도중 고구려에 기근이 들어 아사하는 사람이 생기자 사신을 보내 굶주리는 백성들을 구제하도록 했다는 기록이 있다. 굶주린 백성들을 돌보았던 임금이 과연 폭군이었을지 의문이 가는 것이다. 물론 연산군이나 콤모두스처럼 어떤 사건 이후로 비뚤어졌을 수도 있으며 실제로 기록에 의하면 즉위 4년차에 이유를 알 수 없이 미치광이 폭군이 되었단 기록이 나온 점을 봐서 이 4년 차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 2번째로 모본왕을 암살한 두로라는 인물이 사건 이후로 기록상에서 완벽하게 사라져 버렸다는 점이다. 어쨌든 폭군이라고는 하나 임금을 시해한 대역죄를 저질렀기에 어떤 처벌을 받았다든지 하다못해 폭군을 몰아내고 정사를 바로잡은 반정을 성공시킨 데 대한 정상 참작으로서 그에 따른 보상을 받았다든가 하는 기록이 남아있어야 할 것인데 그런 기록이 전혀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두로가 단독으로 모본왕을 암살한 것이 아니라 배후 세력이 존재했을 가능성이 있으며 배후 세력이 태조대왕 일파였을 것이라는 설이 있다. 이 암살을 정당화하기 위해서는 모본왕은 악마가 되어야 했고 결국 모본왕은 만들어진 폭군이라는 것이다. 게다가 모본왕의 친모가 호동왕자를 질투하여 자살하게 만든 악녀라는 것이 빼도박도 못하는 사실이라 아들인 모본왕 또한 자연스럽게 어머니의 악독한 성격을 빼닮은 폭군으로 만들 수 있었을 것이다.
- 3번째로 모본왕은 마침 후한과 전쟁 중이었으며, 두로에게 암살을 사주한 인물은 중국의 고전 서경을 인용할 정도로 중국 문화에 조예가 깊은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고구려 조정 내 친중국파, 또는 아예 후한 측이 암살의 배후일 가능성이 높다.
4. 《삼국사기》 기록[편집]
《삼국사기》 〈모본왕 본기〉
一年 모본왕이 즉위하다
一年秋八月 홍수가 나다
一年冬十月 왕자 익을 태자로 삼다
二年春 장수를 보내 후한의 북평, 어양, 상곡, 태원을 습격하였다가 요동태수의 요청으로 후한과 화해하다
二年春三月 거센 폭풍이 불다
二年夏四月 여름에 서리가 내리고 우박이 떨어지다
二年秋八月 굶주린 백성을 구제하다
四年 모본왕이 사납고 잔인해지다
六年冬十一月 두로가 모본왕을 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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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출생년도가 32년이라는 위키 백과발 주장이 존재하나(지금은 위키 백과에서도 출생년도가 미상으로 나온다.), 그가 32년 12월에 태자가 됐음을 고려하면 신빙성이 없고, 실제로는 32년 12월에 태자가 되었다는 기록이 있으니 모본왕은 32년 12월 이전에 태어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2] 마선구 2381호 추정[3] 『광개토대왕릉비』를 근거로 대주류왕의 아들이 아니라 손자나 증손자로 추측하기도 하지만 일반적으로 계보상 계승 순위로 본다.[4]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모본왕조'에 모본왕이 대무신왕의 맏아들(元子)이라는 기록이 있다.[5] 현재의 톈진, 베이징 지역이다. 고구려가 요동을 넘어 요서를 공략한 기록은 그 후의 태조대왕에도 나와서, 요동의 정확한 위치를 비롯해 역사학자들을 골치아프게 한다.[6] 현대 기준으로는 북평하면 베이징이지만, 당시 기준으로 북경은 연경, 계, 광양군으로 불렸고, 오히려 한나라의 '우북평군'이 조위 시절 '북평군'으로 개칭되는 등(《진서》 14권), 우북평=북평이었다. 베이징 일대를 북평으로 부르기 시작한 것은 남경만을 수도로 인정하느라 '북경'이란 호칭을 피한 중화민국 시기에나 들어서이다. 이 북평/우북평 지역은 현재의 탕산시唐山市 일대이다.[7] 실제 〈채동전〉은 《후한서》 〈열전〉 제10권에 실려있다. 〈채옹전〉과 혼동한 듯.[8] 고구려의 무리들이 마침내 국경으로 나왔다는 뜻. 전문은 다음과 같다. 그 다른 종족 만리(滿離)와 고구려의 무리가 마침내 국경으로 나와 담비 갖옷과 좋은 말을 바치니 황제가 항상 그 배로 상을 내렸다. (其異種滿離、高句驪之屬, 遂駱驛款塞, 上貂裘好馬, 帝輒倍其賞賜。) 해석[출처필요] [9] 《삼국사기》에서 "왕은 날이 갈수록 포악해져 앉을 때는 언제나 사람을 깔고 앉았으며 누울 때는 언제나 사람을 베고 누웠는데 그 사람이 움직이면 용서없이 죽였다. 신하 중에 잘못을 간하는 자가 있으면 활을 당겨 죽였다." 라고 했으니 두로는 모본왕이 베고 잤던 사람이다.[10] 撫我則后 虐我則讎. 《서경》(書經) 〈주서〉(周書) '태서편'(泰誓篇)에 있는 문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