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호의 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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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호의 난
牧胡의 亂

날짜
1374년 8월 28일 ~ 9월 22일
장소
제주도

교전국1
교전국2
교전국
<white,#191919> 고려
<white,#191919> 원나라 목호, 탐라
지휘관
<white,#191919> 최영
염흥방
임견미
이희필
변안열
목인길
지윤
나세
김유
정룡
임난수[1]
<white,#191919> 석질리필사(石迭里必思) †
초고독불화(肖古禿不花) †
관음보(觀音保) †
석나리보개(石那里甫介)[2]
석다시만(石多時萬)[3]
조장홀고손(趙莊忽古孫) †
병력
<white,#191919> 고려군 25,605명
(전함 314척)
<white,#191919> 자세한 수치 불명[4]
피해 규모
<white,#191919> 불명
결과
<white,#191919> 고려의 승리. 제주의 완벽한 고려 귀속
기타
<white,#191919> 고려 내에서의 원나라 잔당 소멸.


1. 개요
2. 배경
2.1. 목장으로 변모한 제주도
2.2. 관리들의 수탈
2.3. 공민왕의 반원 정책
2.4. 원의 몰락과 명의 압박
3. 과정
4. 영향
5. 창작물



1. 개요[편집]


고려 공민왕 23년(1374년)에 이루어진, 제주도에서 버티는 원나라 잔당들에 대한 최후의 진압. 전투 자체는 최영이 이끄는 고려군이 1374년 8월 28일에 제주에 도착해 9월 22일에 평정을 완료하고 제주도를 떠났을 정도로 단기전이었고 현행 한국사 교과서에선 공민왕의 반원 정책을 설명하면서 간단하게 언급하는 정도지만, 후술하듯 제주 향토사는 물론 한국사 전체에 걸쳐 사건 자체가 가지는 의의는 결코 작지 않다.

일방적인 국가주의, 민족주의나 본토 중심적 시각에서 벗어나면, 4.3 사건 이전 최대 제주도 민중에 대한 학살로 이해할 수도 있는 사건이다.[5] 내막이 대중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제주도민에 대한 억압과 학살은 이 외에도 공물 수탈, 이재수의 난, 그리고 4.3 사건등 많다. 그래서 목호의 난은 향토사학계에서 관심이 많다.

2. 배경[편집]



2.1. 목장으로 변모한 제주도[편집]


목호(牧胡)[6]들은 다른 이름으로는 하치(哈赤, 합적)라고 해서,[7] 대체로 기르는 전문 기술자로 해석된다. 제주도로 도망쳤던 삼별초 잔당들이 진압된 뒤 원에서는 제주도에 탐라총관부를 설치하고, 일본원정에 조달할 군마를 기를 목장을 두었다. 이때 원나라에서 말을 관리하기 위해서 보낸 사람들이 목호였다. 물론 말만 기른 것은 아니고 소나 양, 낙타 등의 가축도 풀어 길렀다.

충렬왕 2년(1276년)에 탐라로 온 다루가치 타라치가 처음 말을 방목한 곳은 제주도 동쪽의 수산평(水山平)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듬해에는 제주 서쪽으로 목장이 확장되었고, 이들을 통들어 동서도(道) 아막(阿莫)[8]이라 부르며 충렬왕 21년(1295년)에 제주도가 고려에 반환된 뒤에도 계속해서 몽골의 목장으로 쓰였다.[9]

제주에 온 몽골인들은 삼별초 진압 뒤의 주둔군 병사 뿐 아니라 몽골 본국에서 이송된 죄인도 포함되었고, 목자들 가운데에도 몽골인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고려에서 죄를 지어 목자로 충원된 이들도 있었다. 타라치가 온 충렬왕 2년 이후 탐라가 몽골의 목장으로 개발되면서 말 기르는 기술이 뛰어난 하치들이 탐라로 보내졌다. 이들은 탐라에서 눌러 살면서 제주 사람들과 섞여 살게 되는데, 오늘날 제주도 중산간 지역이 이들에 의해 개발되었다고 보고 있다. 봄이나 여름, 가을에는 제주 중산간 지역 한라산 가까운 초원에 말들을 방목했다가 겨울이 되면 다소 따스한 아막으로 말들을 거두어 들이는 방식으로 말들을 길렀다고.


2.2. 관리들의 수탈[편집]


익어 거꾸러진 보리이삭 내버려두고
무성하게 가지 생긴 삼도 내버려두고
청자와 흰쌀 가득 싣고
북풍 타고 올 배만 기다리노라.[10]

제주로 파견되는 고려의 관리들은 대부분 탐라에 대한 가혹한 수탈로 악명이 높았다. 도민들이 선정을 베푼 관리들의 이름을 기억해두었다가 반란을 일으킬 때 그 사람을 다시 보내주면 반란을 무르겠다고 했을 정도.[11] 고종 때의 제주판관 김구는 제주의 논밭마다 돌담을 쌓게 해서 사람들의 땅의 경계를 분정해주었다는 칭송을 받았으며, 제주부사 김지석은 그때까지 바치던 세금을 줄여 없애게 했고 그 후임으로 온 경세봉까지는 그래도, 고려에서 온 관리로서 괜찮은 대접을 받고 좋은 평가도 많았지만 탐라가 몽골에 예속되고부터는 지방관이랍시고 부임한 인간들이라는 게 하나같이 돈에 눈이 멀어서...[12]

충숙왕 10년(1323년)에는 제주만호로 가 있던 임숙이라는 자의 이름이 고려사에 등장한다.[13] 고려 조정에서 보낸 관리였던 임숙은 제주에서 가혹한 수탈로 악명이 높았는데(해먹은 것만 1만 단이 넘었다고), 좌우사낭 중 오적에게 뇌물을 바치고 풀려나 다시 제주에 부임하게 되자 빡친 제주 사람들이 단체로 개경까지 상경해 저자에 투서를 붙였다. “우리가 무슨 죄를 지었다고 임숙을 다시 부임시키냐? 성부(정동행중서성 즉 육지부 고려 조정)에서 가만있겠다면 원의 상성(상서성)까지라도 가서 호소한다!"는 내용이었다고. 이렇게 된 이상 원나라로 간다 고려 조정은 결국 임숙을 파직하고 박순인을 대신 제주 만호로 보냈다고 한다.

이렇듯 제주도의 여론은 고려 관리들의 잦은 수탈을 겪으며 고려 관리들에게 반감이 컸고, 목호 세력에 기울기 쉬웠지만[14] 목호나 원나라 세력들이라고 제주도민들에게 딱히 우호적이었던 것도 아니다. 제주도에 남아 있는 속담 가운데 '호첩(胡妾) 앞인가 기어다니게'라는 말이 있는데, 매사에 굽실거리고 줏대 없이 설설 기기만 하는 사람을 얕잡아 부르는 말로 여기서 호첩의 호는 몽골인 목호를 가리킨다는 설이 있다. 이는 제주도에서 목호들의 위세가 대단했음을 암시한다.

원나라의 제주 경영은 초창기부터 '물자 수탈'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고[15], 그것의 강화는 곧 노동력 수탈의 심화를 의미했다. 《원사(元史)》 권178 왕약열전에는 충렬왕 29년(1303년)에 원에서 고려로 파견된 왕약이 고려에 설치된 수역(水驛) 13곳과 통하지 않는 것을 파하고 탐라(제주)의 공물 가운데 토산품이 아닌 것은 면제해주니 동쪽 지역의 백성이 크게 기뻐하였다는 기록이 있는데, 뒤집어서 이야기하면 그때까지[16] 제주에서 나지 않던 것까지 공물로 부과하고 있었다는 뜻이다.[17]

그리고 이러한 물자 수탈은 지역 사정을 알고 노동력 동원 능력과 경험을 갖춘 자, 즉 제주를 오래 전부터 지배해온 성주, 왕자 등 탐라 속관층이 그 실무를 맡았는데, 총괄 지시는 몽골의 다루가치가 하면서도 실무는 속관인 성주, 왕자들이 이행하는 와중에 제주 내부 사회의 갈등은 나날이 깊어졌고, 여기에 고려에서 보낸 관리인 대호군 장공윤과 제주부사 장윤화의 탐욕과 행패가 발단이 되어 충숙왕 5년(1318년) 엽호(獵戶)[18] 금성과 사용, 엄복이 반란을 일으켰고, 이때 반란군이 가장 먼저 제주에서 내쫓은 것이 탐라의 성주와 왕자였다.[19] 이들 성주, 왕자는 탐라의 토착 세력으로써 원의 (물자 수탈적인) 징세 업무를 수행하면서 제주도민의 원성을 사기도 하는 한편으로 제주의 고려 환속을 바라거나 이를 대비하는 행동을 취하는 이중적인 모습을 가지고 있었고(아이러니하게도 원에 요청해 제주를 고려에 귀속시킨 것도 이들의 노력이었다.) 여기에는 지방관이 세금을 빙자해 사리를 채우고, 왕위 유지를 위해서도 물자를 거두어 원나라 황실과 고위 관료에게 바쳐야 했던 고려 조정과, 이러한 갈등을 이용해 다루가치를 파견해 제주를 오래 오래 해먹으려 한 원이 있었다.


2.3. 공민왕의 반원 정책[편집]


공민왕 즉위 직전까지도 제주도에서 목호들은 강한 세력을 행사하고 있었는데, 원나라의 고려에 대한 간섭기 만큼이나 제주에 살았던 시간도 길었고 제주에 살면서 제주 사람들과 혼인해 자식을 두기도 하는 등 반은 제주, 반은 몽골 혈통을 지닌 사람들도 많았고, 이들은 자신들이 사는 제주도를 낙토(樂土)라고 불렀다고 한다.[20] 또한 이들은 마침 고려에서 보낸 관리들의 수탈에 허덕이던 제주도민들을 교묘하게 선동해서 고려 조정에 반란을 일으키게 하는가 하면, 고려 조정에서 보낸 관리들을 살해하기도 했다. 고려 조정도 이들의 횡포에 분노했으나 원의 비호가 있었기에 어찌할수가 없었다. 하지만 이것도 원이 쇠퇴하면서 달라졌다.

공민왕 4년(1355년)에 이르러, 원에서 장사성 등이 일으킨 반란을 평정하는데 실패한 사실이 귀환한 고려군에 의해 보고되고[21] 이듬해 공민왕은 기황후의 오빠로 고려에서 위세를 부리던 기철 일파를 제거하고, 정동행성 이문소를 철폐하고 압록강 너머 8참과 동북면의 쌍성총관부를 공격하는 등 반원 정책을 추진해 나갔는데, 제주에도 탐라만호부 소속 목호들이 기철 일파와 가담했다는 혐의를 조사한다는 명목으로 도순문사(都巡問使)[22] 윤시우를 보냈다. 이때 목호들은 반란을 일으켜 윤시우를 죽였지만 얼마 안 가서 다시 고려에 사신을 보내 사죄하는데, 이후 원나라 탐라만호부의 수장인 탐라만호의 인사권 자체가 고려에 넘어갔다. 제주의 탐라 만호는 한반도 육지부의 만호처럼 원의 관리가 아니라 이름 뿐인 군사 책임자에 불과했으며 아예 고려에서 온 제주목사가 만호를 겸임하는 경우도 생겼다.

홍건적의 난 이후 원과의 연합 필요성을 느낀 고려가 반원정책을 일부 후퇴시키면서 탐라 목호들은 다시 기세가 등등해졌고, 공민왕 11년(1362년) 8월에 목호 고독불화(古禿不花)[23]와 석질리필사(石迭里必思)가 탐라의 성주 고복수(高福壽)를 끼고 반란을 일으켜 고려의 만호 박도손을 죽이고[24] 10월에 본국인 원에 그들을 예속시켜 달라는 요청을 한다. 원에서는 목호들의 요청대로 부추(副樞) 문아단불화(文阿但不花)를 만호로 삼아 탐라에 보냈고, 이에 맞서 고려 조정은 12월에 밀직부사 유방계를 접반사로, 다시 성준덕을 제주목사로 임명해 제주로 보내 그들을 진압하려 했다. 그러나 고려의 우려와는 달리 원에서 보내 온 만호 문아단불화는 공민왕 12년(1363년) 6월에 아우 인부를 고려 육지부로 보내 말을 바치며, 자신들은 고려 조정에 거스를 의사가 없음을 밝혔다.

공민왕 15년(1366년) 10월에 고려의 전라도도순문사 김유가 선단 1백 척을 거느리고 목호 토벌을 시도했지만 실패했다. 원에서 이를 문제삼자 고려 조정은 왜구 토벌 때문에 어쩌다 제주 해안에 닿았다가 목호와 충돌한 것 뿐이라고 잡아뗐다. 이를 계기로 탐라의 목호들은 원나라에 누차 탐라만호부 설치를 요청했지만, 공민왕 16년(1367년) 2월 계해(17일) 원나라에서 사신으로 온 고대비는 제주를 예전대로 고려 본국에 속하게 내버려 둘 것과 목사, 만호를 고려에서 보내고 목호들이 기르던 말도 전대로 원에 바치겠다고 제의한 고려 조정의 손을 들어주었고, 고려 조정에서는 제주에 안무사로 임박을 파견했다.[25] 이에 대해서는 원에서 제주를 원나라 황제의 피난처로 점찍어 두고 있었기 때문으로, 농민반란이 일어나고 명(明)이 흥기해 원을 위협하는 등 원에서 고려의 눈치를 살핀 것으로 볼 수 있다.

공민왕 18년(1369년) 9월에 제주목사 박윤청이 임기를 마치고 제주를 떠날 때 탐라에서 원혜종의 피난용 궁전을 짓고 있던 원의 목수 원세를 개경의 노국대장공주의 영전을 짓기 위한 명목으로 육지부로 데리고 갔다고 한다.


2.4. 원의 몰락과 명의 압박[편집]


공민왕 17년(1368년)에 원이 명에 의해 수도 대도를 잃고 북쪽으로 쫓겨났다. 공민왕 19년(1370년)에 고려에서는 탐라계품표(耽羅計稟表)를 명에 올려 과거의 연고(제주는 원래 고려의 땅이고 원은 탐라의 목초지만 썼을 뿐이라는 것)를 내세워 탐라를 고려가 관할하고 탐라에 사는 목호와 그들의 말은 고려에서 보낸 관리들이 맡아 기르겠다고 했지만, 명에서는 이를 바로 인정하거나 공식적으로 부인하는 입장을 밝히지 않았는데, 훗날 고려가 차지한 철령 이북의 땅에 대해서 한 것처럼 기회를 봐서 탐라에 대한 연고권(원나라가 지배한 땅이니 당연히 명나라의 땅이라는)을 주장하려는 움직임이었다.

목호들은 이미 원이 북쪽으로 쫓겨난 뒤(북원)인 공민왕 18년(1369년)에도 반란을 일으켜 고려 관리를 죽였고, 고려가 명나라에 탐라계품표를 올려 탐라의 연고권을 주장한 뒤인 공민왕 21년(1372년) 3월과 4월에도 다시 반란을 일으켜, 박윤청의 후임으로 온 고려의 제주목사 겸 만호 이용장과 권만호 안방언, 그리고 그들과 함께 제주의 말을 가지러 온 비서감 유경원 등이 고려 병사 300명과 함께 살해되었다. 이 4월부터 목호 석가을비[26]와 초고도보개[27] 등이 동서 하치를 자칭하고 “몽골 황제의 명이 아니고서는 명에 말을 보내려는 간택에 응할 수 없다"고 하였다고 했다(탐라기년).

하지만 두 달 만인 6월에 제주에서는 앞서 이용장과 함께 오다 목숨을 건진 고려의 판관 문서봉을 권지목사로 추대하여 고려 조정에 대한 사죄의 뜻을 보였고, 고려에서는 안무사 이하생을 보내온다. 그때는 이미 제주에서도 원나라가 거의 다 망했다는 것을 알았기에 두 달만에 탐라 주민들이 나서서 목호를 진압해버렸던 것이다. 다만 반란의 주체인 석질리필사와 초고독불화는 죽지 않았다. 11월에야 고려는 명나라에 바칠 탐라 말 50필을 거둘 수 있었다.

옛날에 하치 초고독불화(肖古禿不花)와 석가을비(石加乙非) 등이 권력을 휘둘러 반란을 일으켜, 배가 통하지 못한 것이 30여 년이나 되었습니다. 그때 어찌 장사를 하여 생계를 도모하였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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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실록》권4, 세종 원년 7월 병진조


고려시대의 탐라사를 연구한 김일우는 목호가 난을 일으켰을 때부터 그들이 평정되는 공민왕 23년(1374년)까지 탐라(제주)와 한반도 육지부를 오가는 상인의 발길마저 끊어진 상태였음을 지적한다. 이것이 상당수 제주 도민들이 실은 반(反)목호 성향을 지니면서 이를 적극적으로 거부하는 활동까지 벌였던 근래의 동향은 외부에 잘 알려지지도 않은 채 막연하게 "탐라(제주) 사람들이 모두 목호에게 붙었다"는 추측만 무성하게 만드는 결과를 낳았고, 더욱이 두 차례에 걸쳐서 목호 세력이 육지부로부터의 고려군을 상대로 거의 '몰살'에 가까운 전과를 거두며 고려 조정에 반발했던 과거와 함께 고려 조정이 제주를 '몽골화된 섬'으로 여기게 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그것이 목호의 난으로 이어졌을 거라는 분석이다. [28] 더구나 당시 고려 및 명의 해안을 약탈하던 일본의 왜구들과 제주도 목호들이 서로 연계하고 있는 것이 아니냐는 의심까지 샀는데, 이 무렵 명나라의 홍무제가 공민왕에게 이런 말을 전하기도 했다.

이전 너희 나라에서 탐라의 목자(牧子)에 관한 일을 아뢰기 위해 표문을 가지고 왔다. 내가 생각해보니 탐라의 목자들은 원나라 몽고인으로 당초 가축 기르는 일을 가업으로 삼을 뿐 농사 지을 줄도 모를 것이다. 더욱이 오랜 세월 동안 탐라에서 나고 자라 그곳을 고향으로 여기면서 살아온 무리들이다. 그놈들은 지난번 너희 나라에서 목사로 파견한 윤재상(尹宰相)[29]

을 살해했다. 하지만 너희들의 국왕은 만약 그놈들을 다른 곳으로 이주시키면 그들이 자신의 호의를 알지 못한 채 딴 마음을 품고 공연한 사단을 저지를까 우려한 나머지 그들을 다른 곳으로 이주시키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그놈들이 어찌 이 같은 반란을 일으켰단 말인가? 내가 지금 국왕에게 편지를 보내니 너희들도 국왕에게 상세히 나의 말을 전하라. 절대로 그놈들을 얕보지 말고 대대적으로 군사를 동원해 깡그리 소탕하라!

듣건대 너희들 나라에서는 왜적들이 마구 날뛰며 바닷가 고을들을 약탈하는 바람에 백성들이 피난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너희들은 적들을 막아내지 못한다고 한다. 그 해적들이 바다를 건너와 우리 땅까지 노략질하기에 나는 바닷가 고을의 수어관(守御官)에게 명령을 내려 왜적의 배 13척을 나포하게 했다. 만일 탐라의 목자들이 이 왜적 무리들과 합세한다면 토벌하기가 다소 어려울 것으로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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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려사》 공민왕 21년(1372년) 9월 임인


공민왕 21년(1372년) 11월에 제주에 갔던 고려의 관리들은 이듬해 정월 9일 목호 초홀독불화(肖忽禿不花)가 가진 말 가운데 잡색마 50필을 뽑아 3월 12일에 출항했지만, 나주에서 말 아홉 필과 배를 왜적에게 뺏기고 한 필은 배 안에서 병들어 죽었다. 안렴사가 결손된 만큼 자기 돈으로 사서 채우기는 했는데 7월 3일에 또 말 두 필이 죽어버리는 바람에 10일에 다시 제주로 와서 결손량을 메워야 했고, 제주에 있던 안무사 이하생과 목호 관음보가 말 두 필을 내주어서 50필을 간신히 채우고 한 필을 더 주어 도중에 결손을 채우게 했다고 한다. 김갑우가 이 말을 명까지 운반할 임무를 띠고 8월 24일에 제주에서 곧장 명나라로 갔는데 (9월 10일 명의 영주부 정해현에 도착하여 말을 본) 명나라에서는 고려에서 진상품이랍시고 보낸 말들이 숫자도 적은 주제에 비리비리해서 탈 수도 없었다고 트집을 잡았다.[30]

공민왕 23년(1374년)에는 임밀과 채빈 두 사람을 사신으로 보내 북원을 치는데 필요하니 2천 필을 뽑아 보내라고 요구한다. 이에 고려 조정은 한방언을 제주로 보내 말을 거두려 했지만, 목호들은 "이 말들은 세조 황제(쿠빌라이 칸)께서 풀어 기른 말이다. 적국인 명나라에는 줄 수 없다."라며 3백 필밖에 보내지 않았고, 명의 사신들도 "2천 필을 못 채워서 가면 우리는 우리 황제께 죽을 텐데 여기서 죽으나 저기서 죽으나"라며 뻗댄다.(…)[31] 이에 공민왕은 신하들을 모아 회의를 열고 제주도 목호에 대한 무력 진압을 결정한다.


3. 과정[편집]


목호 진압을 위해 편성된 고려군의 수는 25,605명으로 이들이 타고 갈 전함 314척은 모두 왜구에게서 빼앗은 전함이었다. 진압군 지휘관으로 임명된 사람들도 하나같이 고려의 고위 관료들이자 동시에 무장으로서의 경력도 되는 사람들이었다.

  • 양광전라경상도통사(楊廣全羅慶尙都統使) - 최영(당시 문하찬성사)
  • 도병마사(都兵馬使) - 염흥방(당시 밀직제학)
  • 양광도원수(楊廣道元帥) - 이희필(상원수, 당시 삼사좌사), 변안열(부원수, 당시 판밀직사사)
  • 전라도원수(全羅道元帥) - 목인길(상원수, 당시 찬성사), 임견미(부원수, 당시 밀직)
  • 경상도원수(慶尙道元帥) - 지윤(상원수, 당시 판숭경부사), 나세(부원수, 당시 동지밀직사사)
  • 삼도조전원수(三道助戰元帥) 겸 서해도순문사(西海都巡問使) - 김유(당시 지문하사)

최영을 총사령관으로 한 고려의 토벌군은 공민왕 앞에서 출정식을 치렀는데 최영을 제외하고는 모두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8월에 나주(羅州)의 영산포(榮山浦)에서 군사들의 규율을 정했는데, 여기에는 제주 사람으로서 하치에 가담해 관군에 맞서는 자들은 가차없이 쳐 죽인다는 것도 포함되어 있었다. 진도(珍島)를 출발한 뒤 추자도(楸子島)에 이르기까지 보름 사이에 역풍이 부는 등 기상 여건도 안 좋고 서해도순문사 김유의 할당 전함 1백 척이 오지 않았다는 이유로 최영은 벽파진의 검산곶에서 대기하려 했지만 다른 장수들이 보길도에서 배를 띄워 추자도로 향하는 바람에 최영도 뒤따라 출발할 수 밖에 없었고, 결국 추자도 인근에서 풍랑을 만나 함선 상당수가 크게 파손되는 피해를 입었다.

8월 28일에 고려군은 명월포(明月浦)[32]에 도착했고, 이곳에는 목호 지도자 석질리필사가 이끄는 기병 3천이 진을 치고 있었다. 사실 최영은 우선 전임 제주목사 박윤청[33]을 보내 탐라의 성주와 왕자를 회유하는 한편 목호들에게도 말을 바치는 일은 어쩔 수 없다고 달래려고 했다. 하지만 목호들이 최영이 보낸 공민왕의 교지를 찢어버리고 앞서 제주에 와서 머무르고 있던 이하생을 죽이는 것은 물론, 최영이 상륙시킨 배 11척에 타고 있던 고려군도 몰살시켜서 저항하자 최영도 별수없이 협상을 포기하고 진압에 나선다.

이때 군사들이 진군하지 않으려 하자, 최영은 마지막 수단으로 휘하 비장(裨將) 한 명을 병사들이 보는 앞에서 본보기로 목을 베어 조리돌려 보였고 그제서야 군사들이 해안에 상륙해 목호와 전투를 치렀다. 30리까지 추격해 들어간 고려군은 목호들의 말을 모두 빼앗아 기병대를 양성했으며, 명월포를 시작으로 어름비[34], 밝은오름,[35] 검은데기오름[36] 방면에서 밤낮으로 전투를 치르고 일단 명월포로 돌아왔다.

이때 석질리필사, 초고독불화, 관음보 등 목호 지도자들은 고려군을 상대로 도전하면서 새별오름 방면으로 도망쳤는데, 이것이 유인책임을 간파한 최영은 군사를 몰아 급히 추격했고 수세에 몰린 목호들은 연래(延來)와 홍로(烘爐)를 거쳐 서귀포(西歸浦) 남쪽의 범섬[37]으로 달아났다.

파일:서귀포범섬사진.png
범섬 전경

이에 최영은 빠른 배 40척을 모아 범섬을 포위하게 한 뒤 정병을 거느리고 범섬으로 들어갔다. 제주 올레길 7코스에는 또 배염줄이라고 불리는 지명이 붙은 곳이 있는데 지명의 유래에 대해 범섬으로 달아난 목호를 진압할 당시 최영이 배를 모아서 쇠사슬로 잇고 범섬까지 닿는 배다리를 놓도록 한 데서 유래한 이름이라고 적고 있다. 이 밖에 최영이 군을 주둔시킨 법환포구에는 막숙이라는 지명도 남아 있다.

궁지에 몰린 석질리필사는 자신의 세 아들과 부하들을 데리고 고려군에 항복했고, 다른 목호 지도자 초고독불화와 관음보는 저항하다가 벼랑에 뛰어내려 자결하였다. 최영은 항복한 석질리필사와 그의 세 아들을 모두 허리를 베어 처형하고, 벼랑에서 자결한 나머지 두 목호 지도자의 시신도 찾아내 목을 베어서[38] 지병마사 정룡을 시켜 수급을 개경으로 보냈다. 남은 무리들은 초무해서 양민으로 편입시키려 했는데, 최영에게 포로로 잡혔다가 달아난 목호 석다시만(石多時萬) · 조장홀고손(趙莊忽古孫) 등 105명이 다시 동아막을 거점으로 농성하였다. 하지만 최영은 이들마저도 격파하고 도망치는 목호 무리를 샅샅이 찾아내 모두 죽였는데, 이때 죽은 시체가 들을 덮었다고 한다.

그 다음 최영은 목호들을 쳐부수고 거둔 전리품 가운데 말 1,700필 중 774필은 현지 관인에게 맡겨서 기르게 하고, 금패(金牌)와 은패(銀牌), 인신(印信)은 제주의 고려 관원과 탐라의 성주, 왕자들에게 나눠주었다. 나머지 말을 가지고 9월 22일에 명월포를 출발한 고려군은 화탈도(火脫島)에서 역풍이 불어서 명월포로 회항, 다음날 다시 출항해서 추자도에 도착했으나 풍랑 때문에 10월 5일에야 추자도를 출발해 소안도, 보길도, 진도 등지를 거쳐 11월 3일에야 목포 해안에 도착할 수 있었는데, 그 와중에 배에 실은 말 가운데 93필이 풍랑으로 죽었다.


4. 영향[편집]


其在高麗之季 治御無方 徵求不厭. 且 雜以 非我族類 以致甲寅之變 兵戈蓋海 肝腦塗地 言之於悒!

고려의 끝에는 다스리고 다루는데 막 나갔고 거둬들임도 한이 없었다. 또 우리 족류(族類)[39]

[40] 가 아닌 게 섞여서 갑인의 변을 불러들이니 꺾창이 바다를 덮고 간과 뇌수로 땅을 발랐다. 그걸 말하지니 목이 매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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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증동국여지승람 Vol. 38』, 「전라도」, <대정현> 출처


우선 목호의 난 진압 이후 제주도는 완벽하게 고려에 귀속되었다. 더불어 제주도에서 명에 조공으로 바치는 말의 양 역시 늘어났는데(...) 우왕(禑王) 5년(1379년)부터 공양왕(恭讓王) 4년(1392년)까지 고려에서 명에 바친 약 3만 필의 말 가운데 2만 필 이상이 탐라산 말이었다.

제주 진압이 워낙 단기간에 이루어진 일이었기에 최영이 제주도에서 철수한 뒤 제주에서는 바로 다시 마적(馬賊) 차현유라는 인물이 난을 일으켜서 고려의 관리와 탐라 성주 등을 습격해 관아를 불지르고 최영이 거두어 두었던 말과 소를 잡아먹다가 제주의 성주, 왕자 등 토착 세력들에게 진압되었다. 이후 강백언이라는 사람이 난을 일으켰을 때도 난은 손쉽게 진압되었고, 강백언 및 난을 주도한 자들은 그 식솔들까지 육지부로 옮겨졌다.

한편 제주에 살고 있던 몽골인들은[41] 조선 중기까지 대원(大元)이라는 본관을 유지했다고 하지만 현재는 대원이라는 본관을 찾아볼 수 없다. 일부는 19세기까지 존재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후 본관을 제주로 바꾸거나[42] 한반도 육지부로부터 온 집안의 족보를 자처하는 등[43] 족보 위조를 통해 자신이 몽골계라는 것을 애써 지워버리려고 했던 집안도 있다고. 목호의 난 이후 제주 안에서의 몽골 세력은 차츰 약해지면서 제주도민들은 차츰 자신들이 몽골인과 어우러져 살았던 과거를 부정하게 되었다. 현재 제주어에 남아 있는 욕설 가운데 '몽근놈'(몽골놈)이라는 욕설이 있을 정도다. 다만 목축에 관해서는 몽골어의 잔재가 그래도 많이 남아 있다. 검은데기오름이 있는 금악리에는 목호의 후손들이 여기저기 떠도는 것을 제주 사람들이 일자리를 마련해주고 호적이 없으면 양자로 들이거나 집에서 거두어 키워주는 일도 있었다고 한다.

단기간에 끝난 전쟁이기는 하지만 고려 말의 역사에서 중요한 변수라고 할 만한 게 우선 목호의 난 진압이 이루어지던 와중에 공민왕이 개경에서 시해되었고, 말을 가지고 돌아가던 명의 사신 임밀과 채빈이 개주참에서 호송을 맡은 고려의 관리 김의(金義)[44]에게 피살되는 바람에 한동안 고려와 명의 관계가 악화되었다. 김의는 사건 직후 북원으로 도주해 개경에서 공민왕이 피살되었음을 북원에 알렸고, 1375년 북원에서 심왕의 손자인 탈탈불화가 고려왕위를 잇기 위해 군사를 몰고 고려로 온다는[45] 소식이 알려지면서 고려에서는 북방에 군사를 배치하고 공민왕 시기 반원 개혁으로 눌려 있던 부원 세력이 다시금 북원에 유화적인 제스처를 취하려 하면서 이를 공민왕이 등용한 신진사대부 사이에 충돌이 벌어졌다. 여기서 이인임 등의 부원 세력이 승리해 한동안 고려에서는 명의 홍무 연호 대신 북원의 선광 연호를 쓰기도 했다.

이로써 악화된 명과의 관계가 철령위 문제로 비화되자, 요동 정벌을 계획한 최영이 팔도 도통사로서 출정하려는 것을 우왕이 최영을 굳이 옆에 잡아두려고 했던 이유도 "선왕(공민왕)이 시해를 당하신 것은 경이 남쪽(탐라)을 정벌하러 개경을 비워서 개경에 아무도 없었기 때문"이라며 굳이 최영을 가지 말라고 잡았고, 최영 대신 일선에서 군사를 지휘하게 된 이성계가 군사를 돌림으로써 최영은 죽고 우왕도 폐위, 얼마 뒤 피살당한다. 그야말로 왕조 자체를 갈아치운 나비효과. 여기서 재미있는 것은 이성계가 위화도 회군 당시 타고 있었던 말인 응상백(凝霜白) 역시 제주도산 말이었다는 것.

야사에는 최영이 갈대 씨앗을 에 묶어 날려보내 심은 후 몇 개월을 기다렸다가 그 갈대가 무성히 자라자 이를 이용해 화공법을 써서 반란군을 토벌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서귀포의 명승지인 외돌개와 관련된 설화도 있다. 목호들이 범섬에서 저항하자 최영은 고심을 하다가 외돌개를 장수처럼 꾸며놓았다. 목호들이 이를 보고 놀라서 싸울 의지를 잃고 자결했다는 이야기.

추자도에 있는 최영장군사당은 최영이 목호를 진압하러 제주를 오가는 길에 추자도에 머무르면서 섬 주민들에게 그물을 만들어 고기 잡이 하는 방법을 알려주었다는 전설에서 최영을 기리기 위해 세운 사당이다. KBS 대하드라마 정도전 12화 말미의 미니 다큐멘터리에서도 추자도의 최영대장신사(최영 사당)이 소개되었다. 사당은 현재 제주도 기념물 제11호.


5. 창작물[편집]


만화가 정용연이 해당 사건을 제주도민의 입장에서 그린 만화 <목호>가 있다. 도서출판(주)휴머니스트에서 펴낸 만화 잡지 <보고> 창간호부터 5호까지 실렸다. 도해라는 작가가 그린 '하치의 난'이라는 웹툰도 있다.

KBS 사극 <정도전> 2화에서 공민왕과 명나라 사신 사이의 대화 속에서 목호들이 반발해 명에 바칠 말을 바치지 못하고 있다는 대사를 통해 목호의 난이 암시, 언급된다. 성균관 말단 관리 정도전으로부터 그의 목숨을 건 뼈저린 간언을 듣고 난 공민왕이 제정신을 차린 것을 시작으로 이후 경복흥으로부터 제주로 간 최영의 진압군이 목호들과의 전투에서 큰 승리를 거두었고 잔당들은 이제 범섬으로 도망쳐 진압은 시간 문제라는 승전보를 전해듣고 감격하지만 바로 그 뒤에 이인임의 충동을 받은 홍륜 등의 자제위에게 시해당하고, 3화에 첫 등장한 최영은 탐라에서 임견미를 통해 이 소식을 전해듣고 대노한다.

"출정식에서 이 부월을 하사하신 전하께 아뢰었었소. 소장은 명나라에 말을 바치기 위해 탐라에 가는 것이 아니라고... 황제국 고려의 영광을 되찾기 위한 남정 북벌의 첫 발을 떼는 것이라고... 이제 시작이거늘... 대체 도당의 중신이라는 작자들은 무엇을 했단 말인가?!"

그리고는 공민왕에게서 받은 부월을 그대로 상 위에 찍어버리며 "오는 것이 아니었다. 내가 전하 곁을 지켰어야 했어!"라며 한탄하고, 군사를 어찌 해야겠느냐는 지윤의 말에 무주공산을 틈타 간신들이 어떤 짓을 벌일지 모른다며 전군의 탐라 출군을 명한다. 그때 개경에서는 누구를 새로운 왕으로 세울 지에 대해 논의중이었는데, 강령부원대군을 세워야 한다는 이인임에 맞서 왕실의 인물을 세워야 한다는 명덕태후였지만(명덕태후는 강령부원대군이 공민왕의 씨가 아닐 수도 있다며 그를 염두에도 두지 않았다) 고려의 왕을 자신의 개로 만들 것이라고 왕의 시신 앞에서 단언했던 이인임이 나서서 최영이 무장도 풀지 않고 군권도 그대로 가진 채 빠른 속도로 상경 중이라는 말과 함께 "충신도 따를 군왕이 있을 때 이야기. 지금은 그 자에게 군권을 내놓으라 명할 임금이 아니계시지 않습니까?"[46]라며, 최영이 군권을 가진 지금 자신이 조종하기 쉬운 군주를 옹립할지도 모른다고 하고는, 앞서 최영이 소금에 절여 보낸 탐라 적장(목호 지도자)들의 수급을 보여준다.[47][48]

이인임이 지적한 최영의 과격한 성격, 여기에 최영을 의심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그가 정말 역심을 품은 것은 아닌지 확인하려고 태후가 보낸 판삼사사가 "도성은 별일이 없다. 일단 군사를 쉬게 하고 태후의 명을 기다리라"라는 말에 "도성이 지척인데[49] 여기서 군사를 쉬게 하라는 저의가 뭐냐?"라는 최영의 물음에 판삼사사가 우물쭈물하며 제대로 대답하지 못하자 바로 "이놈을 당장 포박하라!"고 하고는 그대로 진군을 강행하고, 최영의 모습에 질린 명덕태후와, "이러다 이인임의 말대로 제2의 무신정변이 벌어질지도 모른다"며 두려워한 경복흥은 결국 강녕부원대군을 왕으로 옹립해야 한다는 이인임의 주장을 받아들이게 된다.

요동 정벌을 위한 공요군을 직접 지휘하려는 최영에게 "선왕이 시해당하신 것은 경이 탐라를 정벌하느라 개경을 비워 아무도 없었기 때문이다."[50]라고 우왕이 말렸다는 고려사의 기록 또한 25화에서 그대로 묘사되었다. 요즘에 부왕의 시신을 꿈에서 자주 본다며, 심지어 자객이 난입해 자신을 죽이는 꿈을 꾸고 나서는 더욱 최영에게 요동으로 가지 말고 내 옆에 있으라고 하는 등 자신의 목숨에 대한 공포에 떠는 모습을 보였다고 한다.

2015년에 소설가 이성준이 목호의 난을 주제로 한 소설 <탐라, 노을 속에 지다> (전2권)를 발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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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부안 임씨 전서공파의 파조(1342~1407.6.21)로 송시열이 지은 신도비나 성해응의 나려유신전에 실린 열전에 그가 '고려 말에 탐라를 치는' 데에 공을 세웠다고 기록되어 있다. 목호와의 전투 중에 한쪽 팔이 잘렸는데 그 팔을 주워 화살통에 꽂고 다시 싸우러 나갔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2]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나오는 인물. 제주도에서 정씨 처녀와 혼인했는데, 목호의 난 이후 죽었다고 되어 있다. 고려인 관리들이 정씨를 범하려 하자 정씨는 죽음으로 거절하면서 평생 수절했고, 훗날 열녀로 칭송받아서 열녀비까지 세워졌다고.[3] 다시만은 답실만(答失蠻)으로도 쓰는데, 이란어로 현자를 뜻하는 다니슈멘드의 음차다. 송나라에서는 이란무슬림을 가리키는 용어였다.[4] 다만 기병 3천 이상은 확실하다. 탐라총관부 설치 후 제주도를 서아막,동아막으로 나누고 연1500명 가량 군대를 주둔 시켰다고 나온다. 그리고 목호의 난때 초기 상륙한 고려군은 관음보 등이 이끄는 기병 3천기에 살육당했다고 기록된다. 아마 약 1백 년 동안을 제주도에 주둔하며 현지 주민들과 섞여 살면서 말 기르는 기술을 전수하는가 하면 탐라 여인과 혼인해 자식을 두기도 했기에, 적지 않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목호의 수장으로 기록된 석질리필사나 초고독불화도 몽골 이름을 가진 몽골인과 제주인의 혼혈로 추정되기도 한다.[5] 제주 향토사학자 이영권은 제주 역사 다시보기에서 목호의 난을 두고 '고려판 4.3 사건'이라고 기록했다. [6] 가축을 치는 오랑캐라는 의미[7] 때문에 합적의 난이라 불리기도 한다.[8] 몽골어로 '부족'을 가리키는 단어 '아이막(ᠠᠢᠢᠮᠠᠭ)'의 한자 음차이다. '아이막'이란 단어는 지금도 몽골내몽골의 최상위 행정구역명으로 쓰이는데 내몽골에서는 '아이마커(艾马克)'로 음차를 하거나 또는 '맹(盟)'으로 번역해서 쓰인다.[9] 동서도 아막은 지금의 서귀포시 성산읍 수산리와 한경면 고산리에 있었는데, 조선 시대에는 대정현과 정의현이 각각 가까운 곳에 세워진다.[10] 고려의 문신 이제현의 소악부에 한문으로 번역되어 실려 있는 당시 제주 백성들이 부른 노래. 이제현은 그 무렵의 제주의 모습에 대해서 "지금 관가와 민간의 우마가 들에 가득하지마는 밭 가는 곳은 없고 관인의 행차가 베틀북마냥 뻔질나게 오가느라 전송과 영접에 고달프니 탐라민의 불행이다. 그래서 여러 차례 변이 생겼던 것이다."라고 적고 있다.[11] 최척경은 반란군이 최척경을 다시 보내주면 우리가 반란을 물리겠다고까지 할 정도로 선정을 베풀었고, 이백겸이나 송영 역시 충숙왕 5년(1318년) 2월 반란군이 올린 “이백겸이나 송영이 다시 와서 달래준다면 우리가 어찌 반란을 일으키겠는가?”라는 탄원이 받아들여져 송영이 제주목사로 다시 부임했다. 이들의 반란은 송영이 도착하기 직전에 토인(즉 제주인) 문공제에 의해 진압되었다.[12] 물론 고종 31년(1244년) 2월에 전임 제주부사 노효정과 판관 이각이 임기 중에 파선된 일본 상선에서 고가품을 훔친 죄를 들켜서 유배되기도 한 경우도 있기는 해서 단순히 원 간섭기의 문제로만 보기는 어렵겠지만.[13] 《고려사》에서는 이때 임숙이 무슨 이유에서인지 임지를 이탈해 있었다고 했는데 며칠 동안이었는지는 알 수 없다.[14] 고려사 임박열전에서도 이 점을 지적하고 있다. [15] 제주도한반도에서 보기 힘든 드넓은 목초지가 있는 이유가 이것이다. 원래는 섬 전체가 숲이 우거진 곳이었는데, 원나라의 식민지가 된 이후로 을 키울 목초지를 마련하기 위해 숲들을 대거 벌목한 것이다.[16] 제주도의 삼별초 잔당이 진압된 것은 1273년의 일이다. 원사의 해당 기록과 대조하면 거의 40년이나 된다.[17] 김일우, <고려 시대 탐라사 연구> 신서원, p.295[18] 일정한 만큼의 사냥감을 할당받아서 그것을 공납하는 역할을 맡았던 관직으로 추정.[19] 김일우, <고려 시대 탐라사 연구>, p.304.[20] 원은 제주에 대해 상당히 집착하는 모습을 보여주는데, 제주에 목장을 설치한 것도 군사적인 목적 외에 제주를 방성(房星, 목축의 신)의 땅으로 여겼던 것도 있었고, 명나라와의 전황이 악화될 때는 원나라 황실의 보물들을 제주에 쌓아두거나 심지어 제주에 원혜종의 피난용 행궁을 지으려고까지 했다.[21] 이때 고려는 원의 요청으로 장사성을 진압할 원군을 보냈는데 여기에 최영이 포함되어 있었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22] 고려에서 도순문사는 도와 양계 외에는 제주에만 보내졌고, 이 직책의 이후 조선의 병마 절도사로 이어진다.[23] 초고독불화(肖古禿不花)와 동일인물인듯 하다.[24] 고려사절요의 기록이다. 고려사 지리지에는 고려의 전 시중 윤환의 집 종이었던 김장로가 제주에 와서 만호 박도손을 때려 죽이고 시신을 바다에 던졌다고 되어 있다.[25] 임박은 제주로 갈 때 제주에서 마실 물도 백성의 것이라며 함부로 마시지 않겠다고 육지에서 떠갔는데, 이러한 임박의 행동에 대해 청렴하다고 칭찬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제주 물은 더러워서 입에도 대기 싫냐고 비웃는 사람도 있었다고 한다. 임박은 목호의 난 이후 우왕이 즉위하고 1375년 4월에 이인임 등이 심왕의 고려 왕위 계승을 금지해달라는 글을 고려 관료들이 서명해 북원 중서성에 보내기로 한 것에 공민왕 때 이미 원과 단교했다는 이유로 서명을 반대했다가 역적으로 몰려 장을 맞고 객사했다.[26] 목호 지도자 가운데 한 명이었던 석질리필사를 가리킨다.[27] 초고독불화와 동일인물이다.[28] 574년 뒤 '육지'의 미군정남로당이 발호하던 제주도에 대해 비슷한 오해를 했고, 서북청년회 등 육지측 반공 극우단체의 개입 및 남로당 무장 반란이 겹치며 제주도는 유혈사태를 겪었다.[29] 공민왕 5년(1356년)에 제주도순문사를 겸해 제주에 파견되었다가 살해된 윤시우를 말한다.[30] 목호들이 일부러 명에 말을 바치기 싫어서 안 좋은 것만 내놓는 꼼수를 부린 것일 수도 있다.[31] 참고로 홍무제 주원장은 한고제 유방 이상의 토사구팽 끝판 왕이다. 신하가 조그마한 실수만 해도 가차없이 죽였던 주원장이 만일 속국으로 간 사신이 임무에 실패했음을 보고받았을 시 이 사신들의 운명은…[32] 지금의 한림해수욕장 부근. 과거 삼별초의 이문경 부대나 삼별초를 진압하기 위해 파견한 여몽 연합군의 좌군도 모두 이 곳에 상륙했다.[33] 앞서 제주목사로 왔을 때 선정을 펼쳐서 제주도민들에게도 나름 신망이 높았다.[34] 지금의 애월읍 어음리. 새별오름에 올라서 서북쪽 방면으로 내려다 보이는 너른 벌판이다.[35] 한림읍 상명리 북서쪽에 있는 오름. 근처에 느지리오름이 가까이 있으며 검은데기오름이 있는 금악리에서 조금 내려가다 보면 보인다. 느지리오름과는 달리 밝은오름 자체는 사유지라 들어가 볼 수는 없다고.[36] 지금의 한림읍 금악리 뒤쪽에 있는 오름. 멀지 않은 곳에 이시돌 목장이 위치해 있다. 간간이 오름에서 말을 방목하거나 패러글라이딩 하는 사람들도 볼 수 있다.[37] 지금의 제주 올레길 7코스를 따라 걷다 보면 바다 한가운데에 떠 있는 각진 모양의 섬이 범섬이다. 낚시하는 사람들이 주로 찾는 듯. 서귀포항에서 섬 가까이 가는 유람선도 운영한다.범섬에서 멀지 않은 곳에 강정마을이 있다.[38] 고려사 최영 전의 기록. 다만 이문에서는 석질리필사와 초고독불화, 관음보 세 사람 모두 자결했다고 되어 있다.[39] 민족이 근대에 서유럽에서 만들어져 수입된 개념을 번역하려고 만들어진 한자어가 맞지만 문헌에서는 몽골인색목인이 고려사람 또는 조선사람과 다르고 제주사람은 고려사람 또는 조선사람과 같음을 인식하고 이걸 족류란 낱말로 나타냈다. 민족이 근대에 수입된 개념이지만 근대 이전에 이런 관념이 분명했던 사실까지 애써 부인해서는 안 된다. 족류로 나타내려는 개념은 민족이 아니더라도 분명히 있었다.[40] 이 기록은 조선 태조 때 제주 판관을 지낸 하담이라는 인물이 탐라 주민들로부터 당시 상황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기록한 것인데 본토의 중앙정부에서 임명하여 부임한 그의 시각에서 볼 때 탐라 주민들의 본토에 대한 시각이 어땠는지와는 별개로 탐라가 고려 때 부터 복속되었고 지방관까지 보낼 정도로 본토에 편입시키려는 모습까지 보였기 때문에 그러한 인식에서 족류(族類)라고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41] 1382년 7월에 명의 전우덕이 운남을 평정한 뒤 원의 황족으로 명에 항복한 위순왕 콘츠부카(원세조 쿠빌라이 칸의 증손자)의 아들 바이바이(佰伯)와 양왕(梁王) 바자라오르미(원세조의 다섯째 아들 우케치의 후손)의 가속을 제주로 옮겨 살게 했다는 기록도 있다. 바이바이의 아들 육십노와 내시 복리는 1389년에 다시 명으로 소환되었다가 제주로 돌아왔고 1년 뒤에 사망하였다. 1392년에 명나라는 다시 양왕 바자라오르미의 자손인 아얀테무르 등 4명을 다시 제주로 보내 살게 했다.[42] 예를 들어 제주 초씨, 제주 좌씨 등은 모두 그 시조가 원나라에서 왔다고 되어 있다.[43] 대원 강씨 가운데는 대원이라는 본관을 진주로 바꿔서 진주 강씨를 자처하거나 했다.[44] 몽골식 이름은 예르케(야열가)이다.[45] 다만 탈탈불화는 고려로 오던 중인 1376년 2월에 요동에서 사망했다. 탈탈불화를 따라 고려로 오려던 김의도 고려측의 요구로 북원에서 압송되어 죽었다고 전한다.[46] 작중 경복흥의 대사에서도 언급되는 것이지만 고려 왕실은 정중부, 이의방, 최충헌 등 무신들이 국왕을 멋대로 옹립하고 폐위했던 무신정권 시절의 기억에 대해 히스테리 같은 거부감을 갖고 있었다. 이인임은 "지금 고려 군사의 8할이 최영의 손에 있다"며 이 점을 교묘하게 파고들었고, 명덕태후도 경복흥도 이 점에서는 당연히 넘어갈 수밖에 없다.[47] 당연히 탐라 적장들의 수급을 보낸 최영의 뜻이야 자신이 승리했다는 증거이자 전리품으로써 보낸 것이지만 이인임은 이것을 최영이 그만큼 난폭하고 과격해서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모를 위험 인물임을 보여주기 위해 내놓았던 것. 다만 최영의 상경 과정에서 "지친 병사와 은 버리면서"라는 대사는 애초에 목호를 진압하러 군사를 보낸 이유가 (명나라에 바칠) 제주의 말을 거두기 위해서였다는 점을 생각하면 다소 의아한 부분이다.[48] 다만 이 말을 버렸다는 부분은 위의 공민왕이 황제국 고려의 영광을 되찾겠다, 남정 북벌의 첫 발이다. 라는 대사를 했다고 생각하면 어느정도 설명은 된다. 작중 남벌은 명에게 보낼 공마 문제도 있지만 진정한 목적은 아직 반항하는 탐라를 토벌하며, 힘을 기르고 충분해지면 명을 상대로도 저조한 자세를 보이지 않겠다는 것이었으니, 그 대의를 품은 공민왕이 죽었다고 하면 최영에게 있어서 말들은 중요한 문제가 아닌 것이다.[49] 최영은 당시 남경(지금의 서울)까지 와 있었다. 서울과 개성은 오늘날에도 그렇게 먼 거리는 아니다.[50] 이미 3화에서 "왕이 되면 아버지처럼 목숨을 잃을까 무섭다"고 이인임에게 말했다. 이에 이인임은 "왕이 안 되시면 마마께서는 죽습니다."라고 대답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