몬머스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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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배경
3. 양측의 전력
3.1. 대륙군
3.2. 영국군
4. 전투 경과
5. 결과



1. 개요[편집]


미국 독립 전쟁 시기인 1778년 6월 28일 뉴저지 주 몬머스에서 대륙군이 뉴욕으로 철수하던 영국군을 공격한 전투. 전투 자체는 무승부로 끝났지만, 이후 영국군의 미 북부에서의 군사 작전이 위축되었기 때문에 대륙군이 전략적 이득을 챙겼다고 볼 수 있다.

2. 배경[편집]


조지 워싱턴과 대륙군은 1777-78년 겨울을 포지 계곡에서 보내면서 밸리 포지의 교훈 사건을 겪는 등 여러 곤경에 시달렸지만, 프로이센 장교 프리드리히 빌헬름 폰 슈토이벤에 의해 체계적인 군사 훈련을 받으면서 점차 프로이센 전투 방식을 습득했다. 한편 영국군은 필라델피아에서 겨울을 보냈고, 윌리엄 하우 소장은 새러토가 전투의 참담한 결과를 초래한 책임을 지고 총사령관 직책에서 물러나 영국으로 귀환했다. 그 뒤를 이어 총사령관이 된 헨리 클린턴 소장은 1778년 6월 영국 정부로부터 원활한 보급을 보장하기 어려우며 뉴욕이 위험하니 필라델피아에서 철수해 뉴욕에 병력을 집중하라는 명령을 접수받았다. 이는 1778년 3월 프랑스가 영국에 선전포고하면서 전선이 급격히 확대된 것에 따른 부득이한 결정이었다.

클린턴은 6월 18일 정부의 지시에 따라 영국군 및 영국 충성파 민병대를 이끌고 필라델피아를 떠나 뉴욕을 향해 북동쪽으로 진군했다. 얼마 후 영국군이 이동 중이라는 소식을 접한 워싱턴은 느릿느릿 움직이는 영국군에게 타격을 입히기 위해 포지 계곡에서 나와 동쪽으로 진군했다. 이윽고 몬머스에 이르렀을 때, 그는 영국군을 따라잡았다. 이리하여 대륙군과 영국군의 전투가 임박했다.

3. 양측의 전력[편집]



3.1. 대륙군[편집]



3.2. 영국군[편집]


  • 총사령관: 헨리 클린턴 소장
  • 부사령관: 찰스 콘월리스 소장
  • 병력: 10,000명

4. 전투 경과[편집]


클린턴은 당초 육로를 따라 뉴욕으로 행진하려 했다. 그러나 행군을 시작한 뒤 첫 주만에 호레이쇼 게이츠 장군이 이끄는 대륙군이 영국군의 퇴로를 막기 위해 허드슨 강 계곡에서 이동 중이라는 정보가 들어오자, 클린턴은 해안으로 우회하여 병사들을 함대에 태우기로 결정했다. 이리하여 영국군은 알렌타운에서 방향을 틀어 몬머스를 향해 북동쪽으로 향했다. 워싱턴은 영국군의 철수를 저지하기 위해 군대를 급히 이동시켰다. 이때 워싱턴은 4천 명 가량의 병력을 찰스 리 소장에게 넘기고 선두에 서서 적을 추격해 측면을 공격해 주력군이 도착할 때까지 최대한 붙들라고 지시했다. 찰스 리 소장은 워싱턴의 계획이 성공할 지에 대해 확신하지 못해 이를 거부했다. 이에 워싱턴이 라파예트에게 5천 명의 병력을 줘서 대신 적의 측면을 공격하라고 지시하자, 찰스 리는 마음을 고쳐먹고 자신이 맡겠다고 나섰다.

6월 28일 새벽 4시, 클린턴은 대륙군이 자신의 군대를 추격할 지도 모른다고 판단하고 크나파우센 장군에게 미들타운으로 가는 북쪽 도로를 따라 행진을 시작하라고 명령했다. 이후 워싱턴은 디킨슨 장군이 이끄는 뉴저지 민병대로부터 클린턴의 군대가 이동중이라는 소식을 전해듣자 찰스 리 소장에게 몬머스 도로를 따라 진군하는 영국군을 공격해 주력군이 도착할 때까지 최대한 붙들고 있으라고 명령했다. 이에 리는 병력을 미들타운 북쪽 도로의 서쪽 방면으로 진군하면서 천천히 이동하는 영국군의 후위대를 따라잡은 뒤 얼마 되지 않을 적을 손쉽게 제압하려 했다. 그러나 리는 부관들에게 제대로 된 세부 지시를 내리지 않고 그들이 적합하다고 생각하는 대로 행동하도록 허용했다.

6월 28일 8시 경, 찰스 리의 대륙군은 몬머스 코트하우스 부근에 이르렀다. 이때 디킨슨으로부터 영국군이 코트하우스에 숨어있을 지도 모른다는 경고를 받은 리는 코트하우스 아래를 흐르는 개울을 가로지르는 다리를 건너 코트하우스 쪽으로 가는 걸 망설였다. 결국 그의 군대는 한 시간 동안 다리에서 지체하다가 라파예트가 나머지 부대와 함께 도착하고 나서야 진군했다. 리는 9시 30분 경에 선봉대를 코트하우스로 보내 적이 얼마나 있는 지 확인하게 했다. 곧 선봉대로부터 적 후위대가 있다는 보고를 받자, 리는 그들이 2천 명이 채 되지 않을 것이라 판단하고 공세를 개시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영국군 4천 명이 대기하고 있었고, 리는 적과 대면해서야 자신이 오판했음을 깨닫고 라파예트와 함께 서둘러 전투 대형을 갖췄다.

이때 좌측면에서 또다른 영국군 2,000~3,000명이 출현하자, 대륙군 좌익은 적에게 측면을 뚫리지 않기 위해 정해진 위치에서 후퇴해 새 대형을 갖췄다. 그러나 그들은 리에게 이 사실을 별도로 알리지 않았고, 이 때문에 리는 아군 좌익이 어디 있는지 알 수 없다는 참모들의 보고에 어안이 벙벙해졌다. 게다가 라파예트가 이끄는 우익군 일부가 적의 포격을 피하기 위해 일시적으로 물러서자, 리는 군대가 통제력을 상실하고 붕괴하고 있다고 오판했다. 결국 그는 전군에 몬머스 코트하우스에서 서쪽으로 약 1마일 지점까지 퇴각하라는 명령을 내린 뒤 몇몇 측근들과 함께 본대 쪽으로 도피했다. 측근 하나가 워싱턴에게 뭐라고 보고할 지를 묻자, 리는 "정말 무슨 말을 해야 할 지 모르겠다."고 답했다. 지휘관이 이렇듯 자신들을 버리고 달아났지만, 병사들은 슈토이벤으로부터 익힌 대로 장교들의 인솔하에 질서정연하게 후퇴했다. 그 과정에서 대륙군의 사상자는 불과 12명 뿐이었다.

한편, 주력군을 이끌고 몬머스 도로를 따라 진군하던 워싱턴은 아군이 후퇴하고 있는 광경을 목격했다. 워싱턴은 자신에게 달려온 찰스 리 소장으로부터 대강의 사정을 전해들은 뒤 리에게 욕설을 퍼붓고는 후방으로 물러가 있으라고 명령했다. 이후 워싱턴은 앞으로 질주해 리가 이끌었던 군대를 집결시켰다. 워싱턴은 웨인 장군에게 제13 펜실베니아 연대와 제3 메릴랜드 연대를 이끌고 영국군의 진군을 저지하라고 명령했다. 그들은 곧바로 명령에 따라 추격해오는 영국군에게 일제사격을 가했고, 영국군의 기세는 곧 꺾였다. 그 사이, 워싱턴은 나머지 아군을 재편성한 뒤 포병대를 언덕에 배치하고 영국군 보병대에게 포격을 가했다. 영국군은 이에 맞서 정면 공격을 가했지만, 대륙군은 슈토이벤이 알려준 대로 끝까지 버티면서 대열을 잘 유지했다.

16시 30분경, 클린턴은 더이상 전투를 지속해봐야 무익하다고 판단하고 철수를 결심했다. 이때 그는 한꺼번에 철수했다간 워싱턴이 눈치채고 추격할 거라고 판단하고 전군에 한 부대씩 단계적으로 철수하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부하들은 그의 명령을 오해하고 제1 근위보병 연대를 제외한 나머지 부대가 일제히 철수했다. 워싱턴은 적이 포격을 중단하고 전면 철수하는 걸 보고 반격의 기회가 왔다고 판단하고 웨인에게 추격 명령을 내렸다. 이에 웨인의 3개 여단은 추격을 개시해 제1 근위보병 연대를 공격하여 650~700명을 사로잡았다. 클린턴은 후에 본국에 보낸 전투 보고서에서 제1 근위 보병대가 "매우 빠르게 무너졌다."고 기술했다. 그후 대륙군과 영국군은 1마일 이내 거리를 둔 채 대치했고, 워싱턴은 다음날 전투를 재개하기로 했다. 그러나 클린턴은 더이상 전투를 벌일 의사가 없었고, 23시에 군대를 철수시켰다. 이리하여 몬머스 전투는 막을 내렸다.

5. 결과[편집]


대륙군은 몬머스 전투에서 약 350명의 사상자를 냈고, 영국군은 약 300명의 사상자를 기록했다. 또한 영국군은 650~700명의 포로를 기록했고 필라델피아에서 행군하는 동안 450명의 헤센 용병대를 비롯해 550명의 병사들이 탈영했다. 이 탈영병들 중 다수는 토지를 분배받는 조건하에 대륙군에 합류했다. 이후 클린턴은 샌디 후크까지 행진한 뒤 함대에 몸을 싣고 뉴욕으로 철수했다. 한편 워싱턴은 그동안 지휘관으로서의 능력을 의심받던 상황을 이 전투를 통해 극복하는 데 성공했다. 워싱턴의 지지자들은 이 전투가 트렌턴 전투보다 훌륭한 전과를 거뒀다고 주장하며 워싱턴을 총사령관 직에서 쫓아내려던 음모가들의 입을 다물게 했다.

특히 그동안 워싱턴의 재능은 분대장도 못된다고 공개적으로 비난했던 찰스 리는 몬머스 전투에서 추태를 보인 바람에 사람들의 비난을 샀다. 그러나 그는 군법회의에서 오히려 자신이 퇴각을 한 것 덕분에 대륙군이 구원받았다면서 자신에게 가해지는 비난은 부당하며 워싱턴을 자신에게 등을 돌린 "더러운 집게벌레"라고 비난했다. 워싱턴은 그의 무례한 태도에 분노해 체포령을 내렸고, 찰스 리에 대한 군법재판이 7월 4일 소집되었다. 이 재판에서 리에게 명령 불복, 무질서하고 부끄러운 후퇴, 총사령관에 대한 무례 등 3가지 혐의가 적용되었지만, 리는 여전히 몬머스 전투에서 워싱턴의 역할을 폄하하면서 워싱턴의 공식 전투 보고서에 대해 "처음부터 끝까지 가장 가증스러운 거짓말"이라고 비난한 뒤 자신의 후퇴는 영국군을 아군 주력군 쪽으로 유인하기 위해 고안된 "능수능란한 기교"였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법정은 리에게 적용된 3가지 혐의에 대해 모두 유죄 판결을 내렸고, 리는 1년 동안 군직이 정지되고 집행유예 2년이 적용되는 처분을 받았다. 리는 이후에도 기회가 될 때마다 워싱턴을 비난했다가 워싱턴의 부하들에게 여러 차례 결투 신청을 받아 죽을 고비를 넘겼고, 사람들에게 외면당한 채 외롭게 살아가다가 1782년 열병으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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