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다비아 왈라키아 연합공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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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다비아 왈라키아 연합공국(1859~1862)
Principatele Unite Moldova și Țara Românească

루마니아 연합공국(1862~1866)
Principatele Unite Române

루마니아(1866~1881)
România

파일:몰다비아 왈라키아 연합공국 국기 (1859-1862).svg
파일:루마니아 국장(1872).svg
국기
국장
Nihil Sine Deo
하느님이 계시지 않는 곳은 없다.

파일:루마니아 왕국(1890).svg
1859년 ~ 1881년
성립 이전
루마니아 선포 이후
몰다비아 공국
루마니아 왕국
왈라키아 공국
위치
동유럽
수도
부쿠레슈티이아시,(1859~1862),
부쿠레슈티(1862~1881)
정치체제
입헌군주제
공용어
루마니아어
민족
루마니아인
통화
레우

1. 개요
2. 역사
3. 관련 문서



1. 개요[편집]


몰다비아 공국왈라키아 공국1859년 연합하여 형성된 공국. 1881년 루마니아 왕국으로 계승되었다.


2. 역사[편집]


1848년 혁명으로 전 유럽에 불어닥친 자유주의민족주의는 루마니아 지역에도 영향을 주었다. 이윽고 오스만 제국의 속국이면서 러시아 제국의 영향권에 속하던 몰다비아 공국왈라키아 공국, 두 공국의 지식인들은 옆동네 오스트리아 제국에르데이 대공국[1]에서 발발한 혁명에 힘입어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독립하기 위해 혁명을 일으켰다.

그러나 이 혁명은 종주국인 오스만 제국의 진압으로 실패하였다. 비록 혁명은 실패로 끝났지만, 이러한 일련의 과정을 통해 귀족 중심의 루마니아 민족주의가 대중으로 전파되면서 같은 민족, 같은 언어, 같은 종교인 두 공국이 하나로 통합해야 한다는 여론이 두 공국에서 대세가 되었다.

1853년 러시아 제국과 오스만 제국 사이에서 벌이진 크림 전쟁에서 오스만 제국이 승리하면서 두 공국은 러시아 제국의 영향력에서 벗어났다. 그리고 1856년 파리조약이 체결되면서 두 공국은 종주국인 오스만과 5개 열강인 영국, 프랑스, 러시아, 오스트리아, 프로이센 그리고 크림 전쟁 참전국인 사르데냐-피에몬테 왕국, 이렇게 7개국의 공동 관리 아래 놓이게 되었는데 오스트리아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열강 관리단은 두 공국을 한 나라로 완전 통합하는 것이 아닌 최소한도의 연합으로 두는 데에는 합의하였다.

1859년 왈라키아와 몰다비아의 군주를 선출하는 선거에서 두 공국 모두 통합파의 대표 정치인인 알렉산드루 이오안 쿠자를 자국의 군주로 선출하였다.[2] 이로서 두 공국은 한 명의 군주를 공동으로 모시는 동군연합으로 사실상의 통합을 달성하였다. 이후 1862년 쿠자는 두 공국의 행정부를 하나로 통합하여 국호를 루마니아 연합공국으로 변경했다.

쿠자의 통치 아래 공국은 근대화를 이룩하였다. 자유주의적이었던 그는 행정, 농업, 교육 등 거의 모든 분야에서 개혁을 실시하였고 특히 민주주의적 가치 아래 농노 해방과 토지개혁을 실시하였다. 그러나 토지개혁으로 손해를 보게 된 지주들의 반대에 부딪혔고, 토지개혁의 성과는 지지부진했다. 결국 자유주의자들과 보수주의자들, 양쪽에서 인망을 잃은 쿠자는 1866년 쿠데타로 퇴위당했다. 쿠자가 퇴위당한 이후에 루마니아는 혼란에 빠졌고 열강은 두 공국의 통합 기한을 쿠자의 통치가 끝날 때까지만으로 정했기 때문에 두 공국의 연합이 해체될 위기에 놓였다. 결국 루마니아 정치인들은 쿠자의 다음 군주로 호엔촐레른 가문[3]의 호엔촐레른지크마링겐 공작 카를을 카롤 1세로 추대했다.[4] 카롤의 즉위와 동시에 헌법이 반포되면서 입헌군주정이 실시되었다.

1875년부터 오스만 제국령 발칸 반도에서 반오스만 반란이 잇달아 터져나왔다. 오스만 반란을 일으킨 기독교인들을 상대로 학살을 저질렀고 이를 빌미로 러시아 제국은 1877년 4월 오스만에 선전포고하면서 제2차 동방전쟁이 벌어졌다. 이 시기까지 명목상 오스만의 속국이던 루마니아에서도 독립을 선언하고 오스만과의 종주관계를 완전히 청산해야 한다는 얘기가 터져나왔고 역시 루마니아의 독립을 지지하던 카롤은 러시아군의 루마니아 영토 통과를 허가하고 같은 해 5월 10일 루마니아의 독립을 선언하였다. 처음에 러시아는 평화 협상에서 루마니아에게 지분을 내어주는 것을 싫어했기 때문에 루마니아의 참전에는 반대했다. 하지만 전쟁이 계속되고 불가리아 플레벤에서 벌어지는 공성전에서 러시아군은 오스만 누리 파샤의 거센 저항으로 피해가 커지자 결국 루마니아에 참전을 요청하였다. 카롤은 참전 요청을 받아들였고 결국 플레벤 공성전에서 오스만군의 항복을 받아내었다. 전쟁은 러시아-루마니아 연합군의 승리로 끝이 났으며 1878년 산 스테파노 조약베를린 회의로 루마니아는 정식으로 독립을 인정받고 북도브루자를 할양받았다.

이후 루마니아는 헌법을 개정하여 1881년 루마니아 왕국을 선포하였고 카롤은 루마니아 국왕으로 즉위하였다.


3. 관련 문서[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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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원래 헝가리인의 국가였으나 합스부르크 가문의 지속적인 헝가리 탄압 정책으로 독일인(오스트리아인) 관료들이 통제했고 인구의 절반은 루마니아인이었다.[2] 파리조약에서 두 공국의 완전 통합은 금지했지만 한 사람이 두 공국의 군주 자리를 동시에 맡는 것은 금지하지 않았기 때문에 가능했다. 일종의 꼼수.[3] 프로이센 왕국의 왕가인 프랑켄계와는 중세 시대에 갈라져서 서로 다른 분파인 슈바벤계로 가톨릭을 믿었다.[4] 처음에는 벨기에 국왕 레오폴드 2세의 동생인 플란데런 백작 필리프를 데려오려고 했으나 나폴레옹 3세의 반대로 무위로 돌아갔다. 나폴레옹 3세는 대신 필리프의 처남인 카를을 제안해 그가 루마니아의 군주로 결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