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골-내몽골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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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내몽골 관계 관련 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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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단순 비교
3. 북방공정
4. 막북공정
5. 문화
6. 중국과 몽골 정부의 대응
7. 여담
8. 관련 문서



1. 개요[편집]


몽골(외몽골)과 중국 내몽골 자치구의 관계를 정리한 문서. 외몽골과 내몽골 민족의 관계는 유목민족들이 대개 그렇듯이 부족주의, 지역 감정에 따라 갈등을 빚을 때도 있으나, 지역감정과는 별개로 거리도 가깝고 언어·문화적으로도 가깝기 때문에 내외몽골 사이에 인적·물적 교류는 많다. 하지만 내몽골이 오늘날 중국의 일부가 되면서 외몽골의 할하 몽골인과 내몽골의 차하르 몽골인 사이의 관계는 다소 복잡해졌다.

내몽골(중국)은 자신들이 북원의 진정한 계승자라고 자부했다. 당시 칭기즈 칸의 씨족인 보르지긴만 해도 청나라 때 내몽골 씨족 중 최강이 되었을 정도였고 지금도 방계 후손들이 내몽골에 있다.[1] 이는 청나라 황제가 몽골 대칸의 지위를 이양받음으로써 정통성을 얻기 위해 보르지긴 귀족들을 지원해 준 탓도 있다.[2] 반대로 외몽골에서는 완전히 중국화 되어버린 내몽골을 중국에 굴복한 변절자, 매국노로 여기기도 한다. 반작용으로 중소결렬 이후 내몽골 측에서는 외몽골(몽골)을 소련식민지로 간주해 인정하지 않고 자신들이 정통 몽골이라는 인식을 가지기도 했다.

중국에서는 청나라 붕괴 이후 쑨원의 오족공화 이론이 민간에 "몽골의 역사는 즉 중국의 역사의 일부"라는 인식으로 이어졌으며, 오늘날에는 "내몽골은 중국의 일부이므로 내몽골의 역사는 중화민족 즉 중국의 역사이고 따라서 외몽골의 역사 역시 중국의 역사"라는 인식 역시 나타나게 되었다. 이는 중국의 한국 문화 예속화 시도에서 분청우마오당들이 주장하는 논리 즉 조선족 문화는 중국 문화이므로 한국 문화는 중국 문화라는 논리와도 유사하다. 이러한 배경 하에서, 오늘날 중국에서는 몽골어와 몽골 전통 문화에 대한 말살 조치가 취해짐과 동시에 "시진핑이 칭기스 칸과 맞먹는 중화영웅"이라는 이중사고가 강요되는 것이다.

국내 학계와 언론에서는 중국 관제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동북공정에 대응하는 과정에서, 외몽골을 겨냥한 중국의 역사 왜곡은 막북공정,[3] 외몽골과 내몽골 전반을 아우르는 역사왜곡은 북방공정으로 지칭하고 있다.


2. 단순 비교[편집]


항목
몽골
내몽골 자치구
인구
3,353,470
24,049,155
GDP
$137억
$2,500억
1인당 GDP
$4,151
$10,747
민족 구성
몽골인 (95%), 카자흐인 (4%),
기타 (1%)
한족 (80%), 몽골인 (17%),
기타 (3%)
종교
몽골 불교 (52%), 무교 (41%),
이슬람 (3%), 기타 (4%)
중국 불교/토속 종교 (80%),
티베트 불교 (12%), 무교 (2.5%),
기타 (5.5%)

3. 북방공정[편집]


북방공정이라는 용어는 대개 내몽골과 외몽골 역사 전반을 중국 역사의 일부로 간주하려는 역사공정을 지칭할 때 사용된다. 전근대 한족 지식인들은 전통적인 중화사상에 입각하여 몽골족의 원나라를 오랑캐들이 중원을 어지럽힌 흑역사 정도로 치부하였다면,[4] 중국이 서구 열강에 침략을 당하는 청나라 말기 들어서는 "칭기스 칸이 러시아를 무릎 꿇리고", "쿠빌라이 칸이 대리국을 정복해 오늘날의 윈난성으로 편입시키며" 영토를 확장한 역사가 중국인의 자랑스런 역사의 일부분으로 여겨지기 시작했다.

오늘날 중국, 대만 할 것 없이 "중국은 단 한 점이라도 작아질 수 없다."며 사실상 과거 청나라 영토 전 지역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하는 상황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중국에서 내몽골 역사 외에도 한 때 청나라에 귀속되었던 외몽골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하는 것 역시 당연한 수순이었다.

중국의 북방공정을 뒷받침하는 논리는 중앙민족대학 비효통교수의 중화민족다원일체론과 통일적 다민족 국가론에 근거하고 있다. 북방공정은 통일적 다민족 국가론을 중국 북방의 몽골 역사에 적용하려는 작업이다. 몽골의 역사에 대한 중국의 기존 관점은 한족 민족주의에 기초하여 원제국의 역사를 부정적으로 다루었다. 즉 전통적인 중화사상화이관(華夷觀)에 입각하여 오랑캐의 역사는 중국의 역사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나 중화인민공화국 수립이후 만주족의 청나라와 몽골족이 세운 원제국의 역사를 중국 역사에 편입하면서부터 다민족국가의 구성원으로서 중화민족의 범주에 포함시켰다. 특히 북방공정은 쿠빌라이가 세운 원나라는 중국이라는 논리를 내세움으로서 원제국이 세운 왕조까지도 중국 역사로 주장하고 있다. 이러한 역사관은 현재 몽골도도 중국의 영토로서 회복되어야할 대상이라는 주장이다.

KCI 등재논문 : 삼몽통일론(三蒙統一論)과 중국의 북방공정에 관한 연구


후금이 발흥하던 당시 몽골이 주요 지도자인 차하르부의 릭단 칸은 후금과 대치하던 상황이었다. 칭기스 칸의 마지막 후손인 그는 원나라의 옥새를 가지고 있었으며, 자신을 몽골 제국 전통의 적법한 대표자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1628년과 1632년 만주족과의 전투에서 옥새를 잃어버렸으며, 만주족이 원의 옥새를 획득하고 동몽골족 전체를 팔기 체계로 편입시켰다. 릭단 칸이 청해호에서 천연두로 죽은 후 그의 아들은 만주족 공주와 결혼했다. 이 최종적인 승리 후에야 홍타이지는 진정한 삼민족 제국을 선포할 수 있었는데, 1636년 제국의 이름을 대청이라 하였다. 만주족은 더 이상 12세기 지역 국가 금나라의 여진족 선조들을 떠올릴 필요가 없었다.(그리하여 후금이라는 국명을 청으로 교체하였다.) 그들은 이제 정당하게 새로운 세계 제국을 세우고 있다고 주장할 수 있었다.

중국의 서진 / 피터 C. 퍼듀


일단 청나라의 중원 진출 때 내몽골에 해당되는 차하르 족은 만주족과 혼인동맹을 맺었고, 팔기군에 편입되었으며 만몽연합정권을 세웠다. 외몽골에 해당되는 할하족 등은 강희제 치세 당시 티베트 불교 우대정책 등에 힘입어 청나라에 복속되었다.

마오쩌둥은 칭기스 칸이나 몽골 역사를 중국 역사로 편입하는데 그렇게 관심은 두지 않은 듯 하다. 마오쩌둥은 칭기스 칸을 두고 "독수리를 향해 활을 겨누는 것밖에 모르는 자"라면서 다소 비판적인 시각을 드러내었었다. 하지만 스탈린 사후 일어난 중소결렬 이후 중국은 당시 소련위성 국가였던 몽골 인민 공화국이 내몽골인들을 선동하지 않을까 걱정하였다. 이러한 중국 공산당의 우려는 내몽골 인민혁명당 숙청 사건이라 하여, 내몽골 민족주의자들을 색출, 탄압하는 사태로 이어졌다. 문화대혁명 과정에서 조선족들의 한민족 귀속의식이 크게 약화된 것과 같은 맥락에서 내몽골 인민혁명당 숙청 사건은 중국 내 소수민족 입장이 된 내몽골인들의 입지를 더욱 약화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오늘날 중국의 북방공정은 시진핑 정권 하에서 더욱 노골화되고 있다.# "시진핑이 칭기스 칸과 맞먹는 중화영웅"이라는 가사의 시진핑 찬양가까지 배포될 지경이다.(시진핑 찬양가 가사 참조)

4. 막북공정[편집]


상술한 것처럼 내몽골을 이용한 중국의 몽골 역사 예속화 시도는 자국 내 조선족 자치주의 존재를 이용한 중국의 한국 문화 예속화 시도와 다소 유사하다. '한국 문화 = 조선족 문화', 즉 '한국 문화 = 중국 소수민족 문화 = 중국의 문화'라는 주객전도 논리와 마찬가지로 '몽골 역사 = 내몽골 역사' 즉 '몽골 역사 = 중국 소수민족 역사 = 중국의 역사'라는 논리가 통용되는 것이다. 내몽골인들은 한족보다 할하 외몽골인들과 더 갈등할 때도 적지 않은데다가, 몽골이 한국과 비교해서 국력이 많이 쳐지기 때문에 외몽골 역사를 중국 자국 역사로 편입하려는 시도에 제대로 대응하기 힘들다.

막북공정의 대표적인 사례로는 칭기스 칸 중국인설이 있다.

몽골국립대 바트투르교수는 동북아역사재단 학술회의에 참가하여 “중국은 몽골이 중국 땅이라고 주장하는 것에서 더 나아가 몽골제국을 일으킨 징기즈칸마저도 중국 사람이라고 교과서에 기술하는 등 몽골 역사를 크게 왜곡하고 있습니다.” “중국은 역사학자들을 동원해 공공연히 ‘몽골을 되찾자.’고 주장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에 따르면 중국은 ‘몽골의 중국화’를 중요한 과제로 다루고 있다. 몽골 학계에서 몽골사를 3권으로 정리해 출간하자 중국측은 곧이어 8권짜리 몽골사로 정리했고, 다시 몽골측이 5권을 발간하자 지난해 중국 측은 15권을 펴내 물량공세도 서슴지 않고 있다. 바트투르 교수는 “당시 중국 학계 및 언론은 몽골 역사의 연구중심이 중국이 됐다고 선전했다.”고 전했다. 바트투르 교수는 교과서 왜곡에 대해서도 분개했다. 중국의 초·중·고 역사교과서에 ‘원나라=중국 국가’라고 기술돼 있는데 바트투르 교수는 “원나라를 세워 중국을 정복한 쿠빌라이칸 이후 명나라 설립 전까지 중국을 통치했다.”면서 중국의 교과서 왜곡을 비판했다. 바트투르 교수는 2007년 5월 동북아역사재단(이사장 김용덕)에서 열린 국내 전문가들과의 비공개 간담회에서 ‘중국 역사학자들의 역사인식’을 주제로 강연하면서 이같이 밝혔다.

KCI 등재논문 : 삼몽통일론(三蒙統一論)과 중국의 북방공정에 관한 연구



참고로 중국은 같은 맥락에서 돌궐 제국의 귀속 관련하여 튀르키예와도 갈등을 겪고 있다.

5. 문화[편집]


종교는 몽골과 내몽골 자치구 모두 티베트 불교를 믿는다. 다만, 몽골 문자는 몽골 내에선 소련의 영향으로 많이 안 쓰이는 반면, 내몽골 자치구에선 몽골 문자가 계속 쓰이고 있다. 물론 몽골 내에서도 중세 몽골어를 연구할 때 몽골어의 몽골 문자 표기에 대해 알아두는 경우가 많다. 현재는 몽골에서도 교육과정에 몽골 전통 문자를 넣었고, 몽골 정부차원에서 키릴 문자와 전통 문자를 함께 표기하는 정책을 진행 중에 있다.


6. 중국과 몽골 정부의 대응[편집]


2011년 내몽골에서 한족몽골족 간 마찰로 폭동이 벌어지자 연합뉴스 기사한겨례 신문 기사 중국 정부에서 한족 가해자를 사형시켜서 내몽골인들의 민심을 달랬던 바 있다.# 반한족 감정이 격해져서 내몽골인들과 외몽골인들 사이의 과격한 반중 감정을 공유할 것을 우려한 경우로 보인다.


하지만 시진핑 정권 들어서 내몽골 민족주의 말살 정책이 더욱 가속화되었다. 2020년 9월부터 중국 공산당이 내몽골 지역에서 중국어 교육을 강화하는 조치를 취하면서 내몽골 몽골족들이 반발하였다.# 몽골에서도 내몽골에 대한 협력 목소리가 어느정도 나왔지만[5] 당시 몽골 정부는 이에 대해서 침묵을 유지했으며, 오히려 몽골에 망명한 반정부 내몽골 인사를 중국에 송환하고 있다.#


7. 여담[편집]


2021년 대한민국 국내 언론사에서 황사가 중국발이라고 언급하자, 중국 환경 당국이 '중국발'이 아니라 '몽골발'이라며 반박하기도 했다. 세계기상기구는 2021년 황사가 "강력한 몽골 저기압이 몽골의 고비 사막과 중국 네이멍구 중서부 사막 지역의 모래 먼지를 끌어 올렸다"고 분석했다.# 칭기즈 칸은 중국인이라 주장하면서 황사는 몽골에서 기원한다고 주장하는 바는 일종의 체리피킹으로 비판할 수 있다.


8. 관련 문서[편집]



[1] 청나라 보르지긴 귀족들은 정확히는 칭기즈 칸의 동생인 카사르의 후손들이다.[2] 그렇다고 내몽골에만 칭기즈 칸의 후손들이 있던 것은 아니다. 몽골 티벳 불교 지도자에 해당하는 "젭춘담바 후툭투" 중 초대 지도자는 "자나바자르(Занабазар)"로, 그의 아버지이자 할하 몽골의 수장 "압타이 샌 칸"은 칭기즈 칸의 후예이다.[3] 막북은 고비 사막 이북을 지칭하는 용어이다.[4] 내몽골과 중국 사이의 경계 사이에는 명대 신축된 만리장성이 있었고, 전통적인 화이관에서는 만리장성 이북은 중원 이북이었다.[5] 치하아긴 엘벡도르지 전 대통령이 시진핑 주석에게 공개서한 형식으로 항의를 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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