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골-만주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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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몽골족의 기원은 북만주 지역
3. 거란발해 그리고 말갈(여진)
4. 원나라의 만주 지배
5. 만몽연합정권 청나라
5.1. 만주와 외몽골
6. 현대
7. 관련 문서



1. 개요[편집]


몽골만주, 몽골인만주족(퉁구스 제족들 포함) 사이의 역사적 관계를 다루는 문서이다. 오늘날 만주라고 분류되는 지역은 다양한 식생을 가지고 있다. 서쪽 초원지대에는 몽골어족, 동쪽 삼림지대에는 퉁구스 제족에 속하는 여러 민족들이 거주하였으며, 남쪽으로는 한민족이 거주하고 있었다. 한민족이 만주를 상실한 이후에는 한족들이 남만주 일대를 서서히 장악하게 되었다. 이러한 지리적 배경 하에서 만주와 몽골 사이에는 서로 활발한 교류가 이루어질 수 밖에 없었다.

동쪽으로 조선을 정벌하고 현도낙랑을 세워 흉노의 왼팔을 끊었다. 서쪽으로 대완을 정벌하고 36국을 아우르며 오손과 관계를 맺고 돈황(敦煌) · 주천(酒泉) · 장액(張掖)을 세워 야강을 막아 흉노의 오른팔을 찢었다. 선우는 홀로 고립되어 멀리 막북으로 돌아갔다.

- 『사기』 위현전


상술된 사기 위현전의 기록을 보면 고대부터 몽골 고원과 만주 지역 사이의 상당한 수준의 교류가 이루어졌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고조선과 부여, 고구려의 예맥족은 만주족의 직계 기원이라고 보기 어렵고,[1] 후술하듯 몽골족, 몽골이라는 정체성은 중세 칭기스 칸이 몽골 고원을 통일한 이후에 성립되는 개념이다. 굳이 만몽 관계 관련하여 고대사를 무리하게 소급하는 것은 일제의 만선사관, 만몽사관에 부합한다는 비판을 받을 소지가 있다.

2. 몽골족의 기원은 북만주 지역[편집]


고대부터 흉노, 돌궐, 위구르를 포함한 몽골 고원 지대의 유목민들은 기회가 되는데로 인구 부양력이 더 높은 중앙아시아 지역으로 서진하거나 혹은 중국으로 남하하였고, 시베리아 일대의 원주민들이 남하하거나 혹은 만주 일대의 유목민들이 서진하여 그 빈 자리를 채우는 상황이 이어졌다. 고대 흉노인들의 유골을 조사해보면 코카소이드 인종 혼혈 유전자가 오늘날 몽골인에 비해 훨씬 더 빈번하게 나타난다. 흉노가 멸망한 이후 유연, 돌궐이 서진하고 같은 시기에 중앙아시아를 거쳐 온 사르마티아인이 나타나면서 이들 사이에 서로 밀접한 교류가 일어났다. 서기 6~7세기 무렵이 되면 위구르키르기스가 차례로 몽골 고원 일대로 남하하는데, 이들 역시 서쪽 중앙아시아 방향으로 이주하고 빈 자리는 북방에서 내려온 다른 민족들이 차지하게 되었다.

오늘날 몽골 고원 주민들 사이에서 현대 동아시아인과 비슷한 유전적 특성이 형성된 것은 지금부터 약 800년 전인 13세기 초에 이 지역에 몽골 제국이 세워진 이후였다. 다시 동쪽 유라시아인 유전자가 많이 섞여들면서 서유라시아인의 유전자 비중은 줄었고, 그 결과 비로소 현재의 몽골인과 유전적 특성이 비슷한 인류가 나타났다. 몽골 지역은 5000년에 걸쳐 낙농업이 유행했고 지금도 다량의 유제품을 섭취하고 있다. 하지만 다른 낙농업지역과 달리 이 지역에 살던 사람들에게선 유당(락토스)을 분해하는 유전자가 없다는 사실이 확인됐다. 연구팀은 장내미생물 등에 의한 다른 적응을 통해 유제품 소화가 가능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실위(室韋)는 거란(契丹)의 별종으로 동호(東胡)의 북변에 [살았으며] 대개 정령(丁零)의 후예이다. [그들이 살던] 땅은 황룡(黃龍) 북쪽에 있고 노월하(峱越河)의 옆이고 [당의] 경사에서 동북쪽으로 칠천 리 [떨어져] 있으며 동으로는 흑수말갈(黑水靺鞨), 서로는 돌궐(突厥), 남으로는 거란(契丹), 북으로는 바다에 면해 있었다. 그들[의] 나라에는 군장(君長)은 없고 오직 대추(大酋)만 있었는데 모두 ‘막하돌(莫賀咄)’이라 불렀고 그들의 부락을 다스렸으나 [결국에는] 돌궐에 의탁했다. 적게는 천 호, 많게는 수천 호가 하천[川]과 산곡[谷]에 임해서 흩어져 있었고 물과 풀을 쫓아다니며 머물러 세금을 거두지 않았다. 매번 사냥을 할 때에는 곧 서로 휘파람 등으로 신호를 보내 모였다가 일이 끝나면 떠나갔고 서로가 지배하지 않았던 까닭에 비록 사납고 용맹하고 전쟁을 즐겨 했지만 마침내 강국이 될 수는 없었다.

나무를 베어 쟁기를 만들고 사람들은 [그것을] 끌어 농사를 지었는데 밭에서 거두어들이는 것이 상당히 적었다. 그 땅의 기후는 추운 날이 많고 여름에는 안개가 끼고 비가 내렸고 겨울에는 서리와 싸라기눈이 내렸다. ... [그들이 살던] 땅에는 금과 철이 적어 고려(高麗)에 의지해 [그것들을] 취했다. [그들이 사용하던] 병기[器]에는 각궁(角弓)과 고시(楛矢)가 있었고 사람들은 활쏘기를 특히 잘했다. 매 년 더운 여름에는 서쪽의 특괄(貣勃)·차대(次對) 두 산(山)에서 의지하여 살았다. 산에는 풀과 나무와 날짐승과 짐승이 많았는데 만약 날아다니는 모기 [때문에] 고생하게 되면 나무 위에 집을 지어[巢居] 피했다. ... 그들이 [소유한] 가축 중에는 양은 없고 말은 [그 수가] 적었으며 소는 있어도 이용하지 않았고 커다란 돼지가 있으면 그것을 [잡아] 먹었고 그 가죽을 부드럽게 만들어 깔개처럼 [사용]할 수 있었다. 그[들의] 언어는 말갈[과 같]았다.

신당서


신당서의 기록을 참조한다면 실위족은 몽골 고원의 전통적인 기마유목민들처럼 양고기와 양젖을 주식으로 삼는 유목 생활을 한 것이 아니라, 만주 동부의 반농반렵민들과 유사한 방식으로 생계를 유지했음을 알 수 있다. 대흥안령 산맥소흥안령 산맥 일대에 살고 있던 몽올실위는 위구르 제국이 멸망한 후 현재의 몽골 고원으로 이주하였고, 요나라의 지배 때 맹고국이라 불렸다. 이들은 몽골 제국의 전신인 카마그 몽골을 형성했다.

달단(達靼)은 말갈(靺鞨)의 유종(遺種)으로 본래 (奚)와 거란(契丹)의 동북쪽에 [살고] 있었는데, 후에 거란의 공격을 받아 부족이 뿔뿔이 흩어져 혹은 거란에 복속하고, 혹은 발해(渤海)에 복속하였으며, 또 다른 부족으로 음산(陰山)에 흩어 살던 자들이 [있어] 스스로 달단이라 불렀다.

구오대사신오대사에 나오는 달단에 대한 기록 번역출처1번역출처2


[1] 알렉산더 보빈고구려어와 부여어 연구 결과에 따르면 한국어족퉁구스어족은 별개의 어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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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거란발해 그리고 말갈(여진)[편집]


고구려 멸망 이후 만주 서부의 거란족이 당나라와 대치하는 사이에 고구려 유민들과 말갈족들이 합쳐 발해를 건국하였다. 이후 발해는 10세기에 거란에 의해 멸망당할 때까지 만주 일대를 지배하였다. 한편 몽골은 거란 역사를 두고 '몽골의 역사이기도 하다'라고 주장하는데, 혈통과 언어적으로 몽골과 같은 몽골계에 속했기 때문이다.

발해의 역사 귀속 관련해서 남북한과 중국이 서로 자국의 역사라고 주장하는 한편, 제3자에 해당하는 서구 그리고 러시아의 역사학자들은 발해가 퉁구스-만주계 민족 역사상 최초의 고도로 체계적인 국가라는 점에 주목하고 있다.[2][3] 소련과 러시아 학계에서는 발해의 신민 중에는 고구려인과 말갈인 이외에도, 아이누어와 니브흐어를 구사하는 고대 민족 및 튀르크계 민족들이 있었을 것이라는 견해를 제시한 바 있다. 발해의 영토 상당지역은 농경에 부적합했고, 필요한 생필품들을 충당하기 위해 국가 경제의 상당부분을 무역에 의지하였다. 안록산의 난 이전 안록산은 거란족을 통해 발해 솔빈부에서 사육한 말을 수입하는 무역업으로 부를 축적하였으며, 동시에 발해는 실위를 사이에 두고 몽골 고원의 위구르 제국과 교역하였다.

발해 멸망 이후에도 발해 유민들은 요나라와 금나라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였고, 이들 정복왕조들이 체계적인 관료제를 성립하는데 상당한 기여를 하게 되었다. 거란은 발해 유민들로부터 선진 기술과 문화를 받아들였고, 귀주대첩에서 전사한 고청명의 사례처럼 발해인들도 장군, 관리인으로 등용하기도 했었다. 거란족의 요나라는 여진족의 금나라에게 무너지는데, 발해인들은 금나라에서도 중용되었다. 발해 유민 출신이었던 고경예[4]는 중국어와 여진어를 통역일을 보며 완안아골타의 신임을 받던 관료로, 여진족 병사들이 공자의 묘를 불태우려 하자 제지했던 야사로도 알려져 있다.

만주 동부에서 발흥한 금나라는 만주 서부 지역에서 발흥한 요나라와 달리 몽골 고원 초원 지대를 직접 통제하려는 시도를 일찌감치 포기했다. 대신 복속해 오는 일부 유목민 족장을 지원하여 유목민끼리 서로 맞서도록 함으로써 위협을 제거했다. 그러나 이러한 정책은 금나라를 멸망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금나라가 칭기즈 칸의 경쟁자를 지원하자, 칭기즈 칸은 1206년 카마그 몽골을 통일하고 1209년부터 금나라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금나라 군대는 야호령 전투에서 대패하였으며, 1215년 북방의 도읍인 중도를 잃고 말았다. 1235년 몽골군이 개봉을 함락하면서 금나라는 멸망하고 말았다. 금나라 멸망 이후 중국을 재패한 원나라는 야율초재 등 한화된 거란족 관료들을 중용하면서 금나라의 행정 체계 상당부분을 흡수하였다.


4. 원나라의 만주 지배[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동방 3왕가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5. 만몽연합정권 청나라 [편집]


여진과 퉁구스 제족들은 몽골의 지배를 받은 영향으로 우량카이 등 다른 몽골계 민족들과 튀르크계 민족들과도 혼혈되었고, 문화적으로도 몽골의 영향을 받게 된다.

후금이 발흥하던 당시 몽골이 주요 지도자인 차하르부의 릭단 칸은 후금과 대치하던 상황이었다. 칭기스 칸의 마지막 후손인 그는 원나라의 옥새를 가지고 있었으며, 자신을 몽골 제국 전통의 적법한 대표자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1628년과 1632년 만주족과의 전투에서 옥새를 잃어버렸으며, 만주족이 원의 옥새를 획득하고 동몽골족 전체를 팔기 체계로 편입시켰다. 릭단 칸이 청해호에서 천연두로 죽은 후 그의 아들은 만주족 공주와 결혼했다. 이 최종적인 승리 후에야 홍타이지는 진정한 삼민족 제국을 선포할 수 있었는데, 1636년 제국의 이름을 대청이라 하였다. 만주족은 더 이상 12세기 지역 국가 금나라의 여진족 선조들을 떠올릴 필요가 없었다.(그리하여 후금이라는 국명을 청으로 교체하였다.) 그들은 이제 정당하게 새로운 세계 제국을 세우고 있다고 주장할 수 있었다.

...

릭단 칸은 만주족들에게 또 하나의 중요한 기여를 남겼다. 그는 자신의 치세 동안 방대한 티베트 불교 경전들을 티베트어에서 몽골어로 번역하는 사업을 후원하였던 것이다. 이를 통해 만주족들에게 티베트 불교가 소개되었고, 1652년 달라이 라마가 북경을 방문할 수 있는 토대가 마련되었다.

중국의 서진 / 피터 C. 퍼듀


1616년 누루하치를 중심으로 여진족들은 다시 통합되었고, 후금을 세워 민족 이름도 "만주"로 바꾸었다. 여진족 외에 내몽골의 몽골족, 몽골계 민족들도 점령하여 복속했으며, 동맹을 맺으면서 만주족 황제가 동시에 몽골의 칸이 되기도 하는 등 반쯤 동군연합에 준하는 성격도 띄었다. 또한 팔기군도 형성해 처음에는 만주족만 구성되다가 훗날 몽골족과 그 외 민족들도 편입되어 24기로 늘어났다. 1636년에는 ""으로 바꾸고 주변 나라들을 제압하거나 정복하여 영토를 넓혔다.

만주족과 몽골 귀족 가문과의 통혼은 두 민족 간의 결합을 굳혔다. 이러한 만주-몽골 동맹은 청이 중국의 다른 지역을 점령한 후 더욱 체계화되었고 정례화된다. 매년 특별 하사품으로 비단과 은을 주고, 만주족 여성과 통혼한 몽골족 남성들에게 높은 작위를 내림으로써 통혼이 더욱 고무되었다. 다른 한편으로 몽골족들의 북경 방문을 제한함으로써 몽골 귀족들을 통제 아래 두었다. 몽골인들과 결혼한 만주 여인들은 고향인 수도로 단지 10년에 한 번 밖에 올 수 없었고, 단 6일만 머무를 수 있었다. 그러나 젊은 몽골 소년들을 공주의 배우자로 선발해 도성으로 데리고 와서는, 만주와 중국의 문화를 가르친 후 출신 부족으로 돌려보냈다. ... 동시에 양쪽의 평민들은 엄격하게 분리해 통혼을 금했다.

Ibid


5.1. 만주와 외몽골[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청나라 치하 몽골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강희제의 몽골 정책은 각 부족들이 스스로 치안을 유지하도록 고무함으로써 변경에 대한 청의 간섭을 자제하는 방식이었다. 1681년 삼번의 난을 진압한 후 강희제는 몽골 사절들을 연회에 초청하고는 그델에게 몽골 정책의 기본 노선을 알려주었다. 그들에게 황제의 명령과 하사품을 들려 보내, 몽골족들로 하여금 서로 평화를 유지하도록 채찍질할 생각이었다. 몽골어를 할 줄 모르는 모든 관료들에게 그 토론을 통역해 들려주고, 모든 토론 내용을 기록했다. 관료들은 몽골 관습을 존중해야 했으며, 중국 관습을 따르는 것에 과도하게 신경 쓰지 않아야 했다. 그들은 몽골인들 간에 분쟁이 생기지 않도록 사절단을 엄격하게 통제해야 했다. 이것은 상호 이해의 바탕 위에 모든 몽골 칸들과의 관계를 확립하고자 했던 청의 통치자의 포괄적인 노력이었다.

Ibid


강희제는 여러 몽골 부족들을 회유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으나, 오이라트계 준가르의 갈단 칸이 외몽골을 병합하려 시도하면서 도전을 받게 되었다. 갈단 칸이 세력을 확장하자 갈단 칸에게 패배한 여러 서몽골 부족장들이 생존을 위해 중국 변경을 약탈할 수 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강희제 치세부터 건륭제 치세까지, 갈단 칸 치세부터 체왕 랍탄, 갈단 체렝을 거쳐 아무르사나 치세까지 청나라와 준가르 칸국 사이에서 대대적인 전쟁이 벌어졌다.

갈단 칸은 달라이 라마 5세를 지원하면서 티베트 불교의 수호자라는 명망을 얻었고, 이를 바탕으로 외몽골의 할하 몽골인들을 공격하였다. 1677년에는 갈단 칸에게 패배한 할하 몽골 수령들이 정해진 구역을 넘어 이동하여 한족 주민들을 살육하고 약탈하였다. 강희제는 할하 몽골인들이 절망적인 상황에 내몰렸다는 점을 이해하고 변방 수비대에게 경계를 넘어온 할하 몽골인들을 죽이지 말고 몰아만 내라고 명령했다. 같은 시기 갈단은 티베트 고원과 코코노르호 일대를 지배하던 호쇼트 칸국의 수장이자 자신의 장인이었던 오치르투 칸을 죽였다. 호쇼트 칸국의 패잔병들은 갈단 칸의 군대를 피해 오르도스 고원 일대로 몰려와 청나라의 몽골인들을 공격하였다. 강희제는 패닉에 빠진 호쇼트 몽골족들과 할하 몽골족들을 진정시키기 위해 이들을 팔기 체계에 편입시키고, 할하 몽골 부족장들 사이에 자주 벌어지는 전쟁을 예방하기 위해 부족장들 사이에 엄격한 서열을 규정하였다. 강희제 치세에 550명이 넘는 할하 몽골 귀족들이 정해진 서열을 받았다.

강희제가 어렵사리 갈단 칸을 격퇴하는데 성공하면서, 청나라와 준가르 사이의 전쟁은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었다. 갈단 칸이 사망한 이후 갈단 칸의 조카 체왕 랍탄의 지령을 받은 준가르 군대가 티베트를 공격하여 포탈라궁을 불을 질렀다. 강희제가 보낸 청나라 군은 준가르 군에게 대패하였으나, 대신 티베트인들의 민심을 얻는데는 성공하였고 강희제가 달라이 라마와 손을 잡을 수 있었다. 달라이 라마가 준가르 대신 청나라 측으로 기울어지자, 티베트 불교를 믿는 외몽골과 코코노르 일대의 몽골인들의 민심은 청나라 쪽으로 기울게 되었다.

옹정제 치세이던 1734년 9월에는 청나라와 준가르 홍타이지국 사이에에서 할하 몽골과 준가르의 영역을 구분하는 평화 협상이 진행되었다. 체왕 랍탄의 뒤를 이은 준가르의 지도자 갈단 체렝은 항가이 산맥을 경계로 정할 것을 요청하였고 청나라의 사절들은 알타이와 이르티시 강을 따라 경계를 지을 것을 요구하여 협상은 타결되지 못하였다. 옹정제 치하에서도 역시 청 제국은 준가르와의 전쟁에 5~6천만 냥을 소비했지만, 그들을 멸망시키지는 못했다. 전쟁으로 중국 서북지역의 경제는 심각하게 손상되었다

청나라는 건륭제 치세에 준가르를 완전 멸망, 멸족시켜 외몽골에 대한 위협을 일소하였다. 이후 러시아 제국에서 오이라트계 칼미크인들이 귀순하자 받아들이기도 했다.

한 편 청나라의 귀족 계층인 만주족과 몽골족은 둔전 농사를 불법적으로 한족에게 맡기는 일이 많았는데, 이런 경향은 특히 내몽골과 코코노르 호수 일대에서 심했다. 한족 농민들이 팔기군의 둔전을 일구고, 한족, 후이족 상인들이 팔기군 기지의 물자를 보급하면서 내몽골과 코코노르 일대의 한족 인구는 급격히 증가하게 되었다. 청나라는 베이징 조약으로 연해주를 러시아에 넘겨주면서, 만주 전체가 러시아 제국에 넘어갈 지 모른다는 위기의식을 가지게 되었고 봉금령을 해제하는데 이를 계기로 한족들이 만주 이민 러시가 시작되면서, 만주 인구 대다수는 한족이 차지하게 되었다. 결국 청나라 말기 혼란기를 계기로 만주와 내몽골은 모두 한족들이 주로 거주하는 지역이 되었고, 농경이 어려운 외몽골 일대만이 남게 되었다.


6. 현대[편집]


청나라 멸망 이후 일본 제국이 만주와 내몽골 일대에 마수를 뻗치고 이를 이른바 만몽 독립운동이라는 핑계로 정당화하면서, 만주와 내몽골에 각각 만주국몽강국이라는 괴뢰국을 세웠다. 괴뢰국답게 모든 특권은 일본인에게 집중되었고, 당연하다면 당연하게도 만주인들과 몽골족들은 일제의 탄압을 받았다. 만주국의 인구 중 만주족 인구가 소수였던 것과 같은 맥락에서, 몽강국 역시 일부러 한족 인구가 밀집한 지역을 고의로 편입시켰고 몽강국의 인구 중 95%는 한족이었다.

다른 한편으로 외몽골이 소련의 지원에 힘입어 몽골 인민 공화국으로 독립하여 중국의 식민지배에서 벗어난 것과 반대로 일제의 괴뢰국이었던 만주국, 몽강국은 2차대전에서 일본이 패전하면서 붕괴되었고, 그 결과 만주와 내몽골은 중국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7. 관련 문서[편집]


[2]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서는 말갈족의 전신에 되는 읍루에 대해서 "옷을 입는 대신에 몸에 돼지기름을 바르고, 움막집 한 가운데에 변소를 만들어놓는다"는 묘사가 그리고 신당서에는 발해 이북의 흑수말갈을 두고 "오줌으로 세수를 해서 여러 동방과 북방 오랑캐 중에서 가장 더럽다."라는 서술이 나온다. 이런 기록이 실제였는지 과장이었는지에 관련해서는 논란이 있지만, 해당 기록을 통해서 말갈족의 전신인 숙신과 읍루가 이웃 민족들에게 미개인이라고 멸시당했다는 점을 파악할 수 있다.[3] 만주의 식생은 크게 동부의 삼림 지대, 서부의 건조한 초원 지대 그리고 농경에 적합한 남부로 나뉜다. 고구려의 중심지가 한반도 북부에서 만주 남부에 해당하는 지역이었다면, 발해의 중심지는 수렵채집민들이 주로 거주하였던 동부의 삼림 지대에 치우쳐 있었다.[4] 송막기문에 발해인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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