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키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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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키즈의 헌액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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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프라임타임 에미상 시상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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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미디 시리즈 부문
제18회
(1966년)


제19회
(1967년)


제20회
(1968년)

The Dick Van Dyke Show

몽키즈

Get Smart




몽키즈
The Monke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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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성
1966년
미국 캘리포니아 주 로스앤젤레스
전 멤버
미키 돌렌즈[1] (1945~ / 드럼 · 보컬)
피터 토크 (1942~2019 / 베이스)[2]
마이클 네스미스 (1942~2021 / 기타)[3]
데이비 존스[4] (1945~2012 / 보컬)[5]
장르
팝 록, , 버블검 팝, 사이킥델리아
활동
1966년 ~ 1970년
1976년
1986년 ~ 1989년
1996년 ~ 1997년
2001년 ~ 2002년
2010년 ~ 2021년
링크
공식 사이트

1. 개요
2. 역사
3. 평가 및 영향력
4. 기타
5. 디스코그래피
5.1. 앨범
5.2. 싱글
5.2.2. 빌보드 핫 100 2위
5.2.3. 빌보드 핫 100 3위 - 10위
5.2.4. 빌보드 핫 100 11위 - 20위



1. 개요[편집]


미국록밴드. 팝 시장 최초의 기획형 보이밴드다.


2. 역사[편집]


미국의 록밴드, 배우 그룹. 거대 자본의 기획으로 결성한 밴드 형태의 보이그룹의 시초로 평가받는다. 1966년 결성되어 1971년 해체된 이후 몇 차례 재결성과 해체를 반복하고 있다. 60년대 당대 최고의 인기를 누린 밴드 중 하나로 전세계적으로 약 7,500만 장 이상의 음반을 판매했다.

결성 계기는 딱 봐도 알 수 있듯 당연히 비틀즈, 정확히 말해 비틀즈가 출연한 영화 A Hard Day's Night이다. 비틀즈가 출연한 이 영화가 엄청난 히트를 치자 프로듀서 밥 라펠슨과 버트 슈나이더가 [6] 이와 같은 TV 쇼를 만들고자 했던 것이 그 시작이었다. 당시 비틀즈의 인기가 그야말로 하늘을 찔렀기에 '제 2의 비틀즈' 를 만들자는 이들의 기획은 금세 방송국의 관심을 끌었고 1965년부터 NBC에서 본격적으로 제작이 시작되었다.

최초로 낙점된 멤버는 데이비 존스(Davy Jones)로 어린 나이에 이미 브로드웨이 연극의 주연을 맡으면서 가능성을 인정받은 신인 배우였다. 라펠슨과 슈나이더는 기획 단계에서부터 존스를 눈여겨 보고 있었고 존스 역시 제안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여 첫 캐스팅이 이루어진다. 나머지 3인의 자리는 공개 오디션을 통해 캐스팅하게 되었다. 1965년 9월 8일 신문에 '새롭게 기획되는 음악 TV쇼'의 캐스팅 광고가 게재되었고, 17~21세 사이의 437명의 지원자 중 마이클 네스미스(Michael Nesmith), 미키 돌렌즈(Micky Dolenz), 피터 토크(Peter Tork)가 선발된다. 이들 중 네스미스와 토크는 막 음악 활동을 시작한 신인 뮤지션들이었으며 돌렌즈는 TV 시리즈에서 단역을 맡았던 신인 배우였다.

최종 라인업이 확정된 뒤, 1966년 1월 TV 드라마 "몽키즈(The Monkees)"의 파일럿 방송이 제작된다. 비틀즈를 동경해 밴드를 시작했지만 뭔가 2% 부족한 밴드 몽키즈의 이야기를 다룬 코미디 드라마였는데 꽤 좋은 반응을 얻었다. 그 뒤 8월 16일 데뷔곡 "Last Train to Clarksville"을 발표했고, 같은 해 9월 12일 TV 드라마 '몽키즈'의 정식 방영이 시작된다. 그리고 대박이 터진다. 라펠슨과 슈나이거의 예상대로 밴드는 단숨에 폭발적인 반응을 얻었으며 드라마 시청률과 곡의 차트 순위 모두 수직 상승한다. "Last Train to Clarksville"은 단숨에 빌보드 핫 100 1위를 차지했고 곧이어 나온 1집 "The Monkees" 역시 발매와 동시에 차트 1위에 자리잡았다. 데뷔와 동시에 슈퍼스타의 반열에 오른 것이다. 이후 몽키스의 인기는 71년 해체될 때까지 식지 않는다.

물론 이들의 음악은 철저히 외부 작곡가들에 의해 프로듀싱된 음악이었다. 사실 데뷔 앨범에서는 심지어 연주마저 외부 세션이 한 것이었다. 멤버들의 포지션도 실제 연주 가능한 악기가 아닌 이른바 카메라빨이 잘 받는 식으로 배치되었다. 실제로 드럼을 칠 수 있었던 멤버는 존스였지만[7] 키가 작아 드러머 포지션으로 가면 카메라에 잘 안 비친다는 이유로 탈락, 완전 초심자였던 미키 돌렌즈가 드럼을 치게 된다. 이는 드럼은 물론 보컬 쪽으로도 나쁜 선택이었는데, 물론 데이비 존스의 보컬 실력도 나쁘지 않았지만 밴드 내에서 가장 가창력이 뛰어난 멤버가 돌렌즈였기 때문이다. 네스미스와 토크 역시 실제 주력하던 악기가 아니라 서로의 악기를 바꾸어 들게 되었다. 이 처사에 대해 배우 출신의 멤버들은 크게 불만을 갖지 않았지만 음악가 출신의 멤버들, 특히 마이클 네스미스는 큰 충격에 빠지게 된다.

밴드 멤버들의 고민과는 별개로 몽키스의 인기는 나날이 높아져만 갔다. 2집 "More of the Monkees"가 발매되자 그 인기는 절정에 달해 앨범 차트 1위를 18주 동안 유지하고 70주 동안 차트에서 내려가지 않는 기염을 토했다.[8] 이 앨범에서 몽키즈는 직접 악기를 연주하기 시작하고, 마이클 네스미스의 자작곡이 몇 곡 수록되는 등 아티스트로서로도 발돋움을 시작한다. 이 무렵 몽키즈의 음악은 당대의 명 프로듀서 돈 커쉬너에 의해 프로듀싱되고 있었는데, 커쉬너는 몽키즈 멤버들의 음악적 역량을 무시하고 밴드를 철저히 비즈니스적으로 운영해 왔다.[9] 이에 몽키즈의 불만은 점점 커져만 갔고 커쉬너가 멤버들의 동의 없이 스튜디오를 캘리포니아에서 뉴욕으로 옮기자 폭발하게 된다. 이때 그들의 갈등이 얼마나 심각했는지 알려주는 일화가 있는데, 1967년 1월 베벌리힐스의 한 호텔 방에서 커쉬너와 밴드가 말다툼하던 중 분을 이기지 못한 네스미스가 호텔 방의 벽을 마구 후려쳐 구멍을 낸 뒤 "이게 당신 얼굴이 될 수도 있었다!"[10]고 말한 것. 여하튼 이런 격렬한 대립의 끝은 돈 커쉬너가 해고되는 대신 그가 프로듀싱한 곡들의 권리를 몽키즈도 포기하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11]

이후 5월 발매된 "Headquaters" 앨범부터 몽키즈는 진지하게 음악의 주도권을 가지게 된다. 여전히 외부 작곡가들의 곡을 받았지만 밴드의 자작곡도 다수를 수록했으며 음반의 전반적 프로듀싱 역시 몽키즈의 의도대로 기존의 로큰롤 풍이 아닌 좀 더 컨트리 풍으로 되어 있다. 평론적으로도 이전에 비해 좀 더 호의적인 평가를 받았다. "Headquaters"는 아무런 싱글도 발매되지 않았지만 앨범 차트 1위를 기록하며 그들의 건재한 인기를 증명한다.[12] 동시기에 TV 쇼 '몽키즈'의 두 번째 시즌이 방영되어 첫 시즌에 버금가는 인기를 누린다. 그러나 이 시기는 동시에 몽키즈의 분열이 시작되는 시기이기도 했다. 처음으로 음악적 주도권을 쥔 몽키즈의 멤버들은 열의에 가득 차 있었지만 정작 음악적 방향은 4명 모두 달랐다. 미키 돌렌즈는 앨범 녹음 중 연주력의 한계를 실감하며 점차 드럼에 대한 열의를 잃어간다. 무엇보다 그들에 대한 냉소적인 시선이 그들을 괴롭혔다. 1967년은 점차 성숙해가던 록 음악이 그 예술성을 폭발시키던 해로, 당대 뮤지션들과 대중에게 몽키즈는 "거대자본에 영합해 상업적인 곡들이나 받아서 록밴드인 체 하는 광대들"이라며 조롱당하기 일쑤였다. 같은 해 발매된 "Pisces, Aquarius, Capricorn & Jones Ltd."는 전작의 기조를 유지하며 당대 유행하던 사이키델릭 록의 색채를 더한 수작이었지만 당대 음악인들에게는 철저히 무시당했다. 드럼 연주 의욕을 잃은 돌렌즈의 대체와 사운드의 다양화를 위해 많은 세션[13]을 고용한 이 앨범은 일반적으로 몽키즈의 최고작으로 평가받고 상업적으로도 빌보드 싱글/앨범 차트 1위를 차지하며 성공했지만, 동시에 가장 조롱당한 몽키즈의 앨범이기도 하다.[14] 그리고 이 앨범이 몽키스의 마지막 차트 1위 앨범이 된다.

1968년의 앨범 "The Birds, The Bees, The Monkees"는 밴드의 분열이 가시화된 앨범이었다. 여기서 몽키즈는 음반의 프로듀서마저 해고하고 셀프 프로듀싱에 나서 그들답지 않은 이런저런 스튜디오 실험을 시도했다. 그래서 몽키즈 판 화이트 앨범이라 불리는 이 음반은 또한 비틀즈의 그것과 마찬가지로 밴드의 음반이라기보다는 멤버들의 솔로 곡들을 모아놓은 음반에 더 가까웠다. 앨범은 Top 40에 드는 몇 개의 히트곡을 배출했고 빌보드 200 3위를 기록했다. 한편 밴드는 TV 드라마의 유치하고 단조로운 내용에 질려 있었다. 이미 시즌 2에서 프랭크 자파, 팀 버클리 등을 게스트로 초대해 새로운 시도를 해온 몽키즈는 여세를 몰아 쇼의 포맷을 완전히 갈아엎으려 하지만, NBC에 의해 거부당하자 아예 시즌 3를 캔슬해 버린다.

1968년 11월 8일 개봉된 이들을 주인공으로 삼은 밥 라펠슨의 영화 헤드는 그 막나가는 실험성 때문에 아메리칸 뉴웨이브 시네마 시대의 컬트 영화로 꼽힌다. 이 영화의 괴악함은 예술적 의도와 함께 기존의 유치하고 코믹한 드라마 '몽키즈'의 이미지를 깨부수기 위한 의도도 있었다. 당연히 상업적으로는 참패했지만 역시 몽키즈에 의해 제작된 사운드트랙은 팬들에게는 "Pisces, Aquarius, Capricorn & Jones Ltd."과 맞먹는 명반으로 평가받는다.

1969년 초엽 몽키즈 활동에 지친 피터 토크가 밴드를 탈퇴한다. 이 무렵 밴드는 각 멤버가 LP의 한 면씩 채워 총 4면, LP 두 장의 더블 앨범을 발표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멤버의 탈퇴로 인해 로 인해 밴드의 결속이 붕괴될 위기에 처하자, 이들은 초심으로 돌아가 1966년 이전에 녹음된 곡들로만 구성된 앨범을 만들기로 한다. 이 앨범은 1969년 2월 "Inatant Replay"라는 이름으로 발매된다.[15] 초기 몽키즈의 음악을 후기 몽키즈 식으로 연주한 이 앨범은 그러나 차트 32위에 그쳤다. 같은 해 8월부터 시작된 투어는 종반에 들어 티켓 판매 부진으로 연이어 취소되었다.

1969년 10월 "The Monkees Present"가 발매되었다. 이 앨범은 69년 초에 작업하던 더블 앨범 계획의 미완성된 결과물을 갈무리한 앨범이었다. 빌보드 차트에서 100위를 기록했다. 1970년 중엽에 마이클 네스미스는 몽키즈에서 탈퇴한다. 남은 두 멤버들은 "Changes"를 녹음하기 위해 뉴욕으로 향했다. 프로듀서 제프 베리(Jeff Barry)에 의해 제작된 이 앨범은 초기 시절처럼 작곡과 연주 세션 모두 외주 뮤지션들이 전담한 앨범이었다. "Changes"는 평론가들에게 혹평을 받았고 몽키스는 해체되었다. 남은 데이비 존스와 미키 돌렌즈는 이후 듀오로서 활동했다. 이 뒤 1986년의 재결합을 시작으로 수 차례 재결합과 활동 중지를 반복하며 활동하고 있다. 2016년엔 위저의 리버스 쿠오모, 파운틴 오브 웨인즈의 아담 슐레진저, 데스 캡 포 큐티의 벤 기버드, 노엘 갤러거/폴 웰러, XTC의 앤디 파트리지가 제공한 신곡과 기존 커버곡을 합쳐 Good Times!을 냈는데 괜찮은 평을 들었다.

2022년 기준으로 대다수의 멤버가 세상을 떠난 상태라서 [16] 미키 돌렌즈만이 몽키즈 행사 공연을 하는 상황이다.


3. 평가 및 영향력[편집]


몽키즈는 당대의 브리티시 인베이전에 맞서는 미국 음악 산업의 역습이었고 실제로 전성기에는 롤링 스톤즈, 더 후 등을 뛰어넘고 그 비틀즈와 견줄 정도로 큰 인기를 끌었다. 그러나 본인들이 아닌 미국의 거대 미디어가 주축이 되어 만들어진 기획형 밴드라는 사실이 그들의 발목을 잡았다. 기획된 아이돌이라는 사실 때문에 그들은 음악이나 인기와는 별개로 활동 내내 음악인들과 대중들의 조롱을 받아왔고, 전성기의 위상에 비해 현재는 완전히 잊혀지다시피 했다.[17][18] 음악적으로는 아이돌 시절에도 이미 나쁘지 않은 평가를 들었다. 당대 미국 최고의 전문 작사가, 작곡가들이 비틀즈의 히트곡들을 철저히 분석해서 내놓은 곡들이니[19] 스타일 카피는 둘째치더라도 곡이 나쁠 수가 없다. 음악적 주도권을 쥔 이후의 음반들은 더 평가가 높아져서 60년대 사이키델릭 록의 숨겨진 수작으로 평가받는다. 그러나 딱히 혁신적인 시도 같은 걸 한 적도 없고, 동시대의 다른 음악가들에 비해 압도적으로 개성있거나 뛰어난 것도 아니었다. 애초에 커리어 내내 비틀즈의 그림자에서 벗어나지도 못했으니. 그래서 당대의 인기에 비해 음악적으로 후대에 미친 영향력은 한없이 미미하다.

그러나 몽키즈는 음반 마케팅과 기획에 있어서는 큰 분기점을 마련했다. 우선 최초의 보이그룹 중 하나이고, 멤버들의 캐릭터와 포지션을 완전히 구분했고, TV와 연계해서 마케팅을 펼친 최초의 그룹이다. 이들의 전략은 후재 보이그룹들 사이에서 아직도 사용되고 있다. 또한 몽키즈의 해체 과정[20]은 아이돌 그룹의 전형적 해산 과정이라고 할 수 있으며 역시 후대의 그룹들에게 좋은 본보기로 자리했다.

특히 보컬인 데이비 존스는 꽃미남 외모와 날렵한 몸매로 유연하게 율동을 춰서 공식 뮤직비디오에서도 솔로 댄스 샷을 비중있게 보여주는데, 후대 '아이돌의 원조'격이다. 데이비 존스 같은 멤버들로만 구성하여 연주보다 퍼포먼스에 집중하면 BTS가 된다. 그가 사망 전에 남긴 라이브 영상에서는 이미 나이도 들고 배도 많이 나와 20대 초반에 보여줬던 아이돌 포스와는 거리가 있지만, 1분 33초경에는 마지막을 불태우듯 반세기 전 영상에서 보여줬던 멋진 댄스를 보여주며 썩어도 준치임을 보여주고, 2분 50초경에도 흥에 취해 나름 전성기 시절 율동을 보여준다. 그의 마지막 유작처럼 남아 더 이상 그의 유연한 율동을 영상으로밖에 볼 수 없으나 그래도 대단한게 미국을 넘어 아시아까지, 무려 2021년!!에 일본의 3대 편의점인 세븐일레븐 CM송으로 칸쟈니가 'Daydream Believer'를 일본어로 번안하여 부르는 영상이 공개되어 여전한 영향력을 보여주었다.# 1960년대곡임에도 지금 들어도 어색하지 않고 좋을 정도니, 그야말로 시대를 초월한 명곡이다. 심지어 1988년에 일본의 아이돌 조상급 소녀대가 이미 한국공연에서 부르기도 했었다.#






4. 기타[편집]


몽키즈는 음악으로 보나 비주얼로 보나 비틀즈의 카피 밴드에 가까웠고, 언론에서도 비틀즈와 은근한 경쟁 구도를 형성하려 했으나 정작 두 그룹의 사이는 나쁘지 않았다.[21] 몽키즈는 당대 뮤지션들이 대체로 그랬듯 비틀즈를 동경하고 있었고, 비틀즈의 멤버들도 몽키즈의 멤버들과 친분을 어느 정도 쌓았다.[22] 그와 별개로 두 밴드의 팬덤 사이의 마찰은 어느 정도 있었다. 또한 그 지미 헨드릭스조차도 자서전용 구술에서 이들에게 기획형 연예인일 뿐 음악인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멤버들은 좋은 사람들이라고 발언한 바 있다.

이들이 과연 로큰롤 명예의 전당에 들어갈 수 있는가는 로큰롤 명예의 전당 초창기부터 이어지는 유구한 떡밥이다. 몽키즈는 단 한번도 후보 명단에 포함되지 못했는데 이에 대해서 종종 논쟁이 벌어지곤 한다.[23] 팬들은 물론이고 일부 멤버들까지도 공식적으로 불만을 표출했을 정도. 일단 헌액 위원회에서는 몽키즈의 헌액에 대해 어떠한 입장도 표명한 적이 없다.

이들의 노래 Daydream Believer는 일본 애니메이션 영화 낮잠 공주에서 번안되어 사용되었다.


맴버 데이비 존스는 영미권 유명한 괴담인 데비 존스와 이름이 같아서 보글보글 스폰지밥데비 존스로 직접 출연했다. 이외에도 스폰지밥에 몇번 출연하신다.


5. 디스코그래피[편집]



5.1. 앨범[편집]


  • The Monkees (1966)
  • More of The Monkees (1967)
  • Headquarters (1967)
  • Pisces, Aquarius, Capricorn & Jones Ltd.(1967)
  • The Birds, The Bees & The Monkees (1968)
  • Head (1968)
  • Instant Replay (1969)
  • The Monkees Present (1969)
  • Changes (1970)
  • Pool It! (1987)
  • Justus (1996)
  • Good Times! (2016)
  • Christmas Party (2018)


5.2. 싱글[편집]



5.2.1. 빌보드 핫 100 1위[편집]




5.2.2. 빌보드 핫 100 2위[편집]


  • A Little Bit Me, A Little Bit You (1967)


5.2.3. 빌보드 핫 100 3위 - 10위[편집]


  • Pleasant Valley Sunday (1967) - 3위
  • Valleri (1968) - 3위


5.2.4. 빌보드 핫 100 11위 - 20위[편집]


  • Words (1967) - 11위
  • (I'm Not Your) Steppin' Stone (1967) - 20위
  • D. W. Washburn (1968) -19위
  • That Was Then, This is Now (1986) - 20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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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슬로베니아계 미국인이다.[2] 희귀암에 걸려 사망했다.[3] 2021년 12월 10일 아침 자택에서 자연사했다. 향년 78세.[4] 데이비드 보위는 이 사람과의 혼동을 방지하려, 데이비드 존스에서 데이비드 보위로 예명을 바꿨다.[5] 동맥경화증으로 비교적 이른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6] 이들은 당시 BBS라는 제작사를 운영했는데, 아메리칸 뉴웨이브 시네마에서 큰 역할을 담당했다. 주로 잭 니콜슨과 작업을 했으며 이지 라이더마지막 상영 같은 걸작을 제작했다.[7] 전문 음악인은 아니었으나 취미로 드럼을 배웠고 웬만한 곡은 무리없이 연주할 수 있을 정도로 실력도 좋았다.[8] "More of the Monkees"는 가장 많이 팔린 몽키즈 음반이자 60년대에 미국에서 세번째로 많이 팔린 앨범이기도 하다.[9] 몽키즈 멤버들은 녹음된 테이프의 관리, 곡의 후반작업과 앨범의 트랙리스트나 싱글 컷, 앨범 아트 등에 전혀 관여하지 못했으며, 수익도 제대로 분배받지 못했다. 심지어 완성된 앨범도 확인하지 못해 직접 음반을 사 들었을 정도였다.[10] That could have been your face![11] 이때 크게 데인 커쉬너는 이후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애니메이션 속 밴드아치스를 프로듀싱하게 된다. 바로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TV 애니메이션 삽입곡인 Sugar, Sugar를 남긴 그 밴드다.[12] 참고로 이 앨범의 수록곡 중 하나인 'Randy Scouse Git'는 제목이 무례하다는 이유로(해석하자면 리버풀 등신 랜디) 'Alternative Title'(대신할 제목)이라는 다소 황당한 제목으로 바뀐 바 있다.[13] 이 중에는 닐 영, 버즈 등 이후의 유명 뮤지션들도 있었다. 그런데 정작 버즈는 동해 초에 발매한 앨범 'Younger Than Yesterday'의 첫 트랙 'So You Want to Be a Rock 'n' Roll Star'라는 노래로 몽키즈를 깐 적이 있다.(...)[14] 피터 토크는 훗날 이 앨범에 대해 이렇게 회고했다. ""Pisces, Aquarius....." 앨범은 "Headquaters"보다 훨씬 더 나은 앨범이었다. 그래서 더욱 더 고통스러웠다."[15] "I Won't be the Same Without You"에 탈퇴한 피터 토크가 기타로 참여했다.[16] 특히 데이비 존슨은 60대를 넘기지 못했다.[17] 당대에 그들보다 인기가 적은 편이었던 롤링 스톤즈나 후와는 비교할 수도 없고, 철저히 무명이었던 동시대의 벨벳 언더그라운드한테도 위협을 받는 정도가 됐다.[18] 그러나 그들의 대표곡인 I'm a Believer는 웬만한 비틀즈 노래보다 유명하다.[19] 이들의 음반에 참여한 유명 작곡가들로는 닐 세다카, 해리 닐슨, 닐 다이아몬드, 제리 고핀과 솔로로도 대성한 캐롤 킹 커플까지 있었다.[20] 일부 멤버들의 음악적 자의식 강화-프로듀서와의 갈등-멤버 간의 결속력 약화-아이돌로서의 음악적 한계를 깨닫고 탈퇴[21] A Day in the Life의 프로모션 영상에 데이비 존스가 등장하기도 했다.[22] 이는 두 밴드가 해체된 지 한참 뒤에 각 밴드 멤버들끼리 찍은 사진들을 봐도 알 수 있는 사실.[23] 오랫동안 등재되지 않아 물건너갔다고 보기엔 어려운것이 딥 퍼플, 조안 바에즈, 티렉스 등 데뷔 50여년만에 뒤늦게 등재된 사례도 존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