묘청의 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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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진행
2.1. 배경
2.2. 대위국 건국
2.3. 중앙의 대응
2.4. 묘청의 최후, 계속되는 반란
2.5. 공방전
2.6. 지구전
2.7. 결말
3. 영향
3.1. 서경의 지위 격하
3.3. 역사 계승 의식의 변화



1. 개요[편집]


1135년 고려의 승려 묘청개경에서 서경#평양으로 천도를 추진하며 대위국을 선포하며 일으킨 난. 재밌는 점은 묘청이 난을 일으킨 지 고작 17일 만에 조광에게 암살당했고 이후 1년 넘게 조광이 항전하면서 버텼기 때문에 실질적으로는 조광이 주도한 기간이 더 길다는 점이다.


2. 진행[편집]



2.1. 배경[편집]


묘청은 서경 출신으로 인종왕실 고문 자리까지 올랐다. 이 시기에는 금나라요나라멸망시키고 기세를 이어 송나라까지 강남으로 쫓아버리면서 새로이 중원의 패권을 잠식함에 따라 동북아시아가 요동치는 격동의 시기였는데 묘청은 금나라에 맞서 대항하자는 명분과 함께 개경은 지덕이 쇠하였으므로 수도를 서경으로 옮기자고 주장했다. 이른바 서경 천도 운동이다. 아마도 묘청은 대외적인 명분 이외에도 개경을 중심으로 하고 있는 김부식 일파를 몰아내려는 의도도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 때문에 묘청이 살아있는 동안 개경 세력과 서경 세력은 매번 충돌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결국 묘청의 서경 천도 운동은 실패로 돌아가게 된다.


2.2. 대위국 건국[편집]


결국 기상 이변 등을 포함한 여러가지 사건들이 터지면서 서경 천도가 실패로 돌아가자 이러한 모든 것을 기득권의 훼방으로 여긴 묘청은 서경에 틀어박힌 채 개경의 귀족 세력을 타도하겠다는 것을 명분으로 나라를 세우고 국호를 대위국(大爲國)이라고 선포하였다. 원래 한자 문화권에서 천자의 나라는 격식을 갖춰 표기할 때 大+국호 또는 大+국호+國 등으로 적었다. 예를 들어 한(漢)나라는 大漢(國) 식으로 적는 식이다. 중국의 경우 천자국은 한 글자를 쓰는 게 정석으로 간주됐고 제후의 작위를 줄 때도 한 글자를 쓰는 것이 두 글자를 쓰는 것보다 높은 것으로 간주됐다. 묘청의 반란군은 '위(爲)나라'라는 천자국을 선포한 셈이다. 실제로 묘청은 인종에게 서경을 천도하라고 권하며 칭제하고 연호를 선포하자고 했으니 국호를 이런 식으로 지은 것이다.[1]

결국 묘청 등 서경 세력은 광종을 뛰어넘어서 국호 또한 한 글자로 고치겠다는 대단한 결정을 내린 셈이었다. 연호를 '하늘을 열었다' 또는 '하늘이 열렸다'는 뜻의 천개(天開)로 정하고 자신의 군대를 천견충의군(天遣忠義軍. 하늘이 보낸 충성스럽고 의로운 군대)이라 명명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반란군은 나라를 선포했음에도 불구하고 황제를 추대하지 않았다.[2] 만약 난이 성공하여 인종의 신변을 확보하게 된다면 그를 대위국의 황제로 모시려고 했던 듯 보인다. 애당초 서경 세력은 서경 천도와 인종의 칭제건원을 추진하다가 반대파에 의해 좌절되어서 반란을 일으켰던 것이니 인종 외 다른 사람을 추대하지 않은 것은 당연하다고 볼 수 있다.


2.3. 중앙의 대응[편집]


서경 세력은 반란과 동시에 가짜 어사를 동북면으로 파견하여 지방 관원들을 체포하고 행정권을 접수하기 시작하였다. 들키지 않으면서 세력 확장을 도모했던 것인데 때마침 휴가를 받아 고향으로 돌아가던 개경 군인 2명이 광경을 목격하고 즉시 복귀해서 반란 사실을 알렸다.

중앙에서는 이들을 진압하기 위해 토벌대를 파견하기로 했고, 김부식, 임원애를 중군수(中軍帥)로 삼았다.(우군만 2천명이라고 알려져 있으며 좌군과 중군의 규모는 알 수 없다.)

출병 전 김부식은 "서경의 반역에 정지상ㆍ김안ㆍ백수한 등이 가담하고 있으니, 이들을 제거해야 한다."고 말했는데, 대신들은 이에 동조하여 정지상 등 3명을 불러 목을 벤 후 그 사실을 보고하였다. 이로 인해 '김부식이 문인으로서의 명성이 자신과 비슷했던 정지상을 반란을 핑계로 죽였다.'는 소문이 돌았다.[3] 인종은 임원애로 하여금 도성을 지키게 하고, 김부식에게 부월을 하사하여 출전시켰다.

이 당시 반란군은 세력을 확장하기 위해 왕명을 거짓으로 꾸며 각지에 병력을 파견한 상태였다. 하지만 몇몇 지역에서 주민들에게 가짜라는 걸 들켜서 역으로 격퇴당했다. 인종은 반군을 몰아낸 이들에게 포상을 내렸는데, 그 소식을 들은 다른 성에서도 서경에서 온 병력을 공격하였고, 그 결과 1천2백여 명의 반란군이 죽었다.

김부식의 중군은 보산역(寶山驛)에 당도한 후, 앞으로의 전략에 대해 의논했다. 장수들은 "서경의 방어가 갖춰지기 전에 서둘러 공격하자."며 속전속결을 주장했으나, 김부식은 "적이 오래 전부터 치밀하게 계획을 세워 거사하였을 테니 이미 상황이 늦었다. 무작정 진격한다면, 복병이나 기습에 당하거나 혹은 반군에 호응한 다른 군세에 의해 길이 막힐 수 있다. 적의 배후를 우회하여 주변의 여러 성들을 장악하여 서경을 고립시킨 후 압박하여야 한다."며 장수들의 의견에 반대했다. 이에 따라 중군은 좌우군을 이끌고 평주-관산역(管山驛)-사암역(射嵒驛)-신성부곡(新城部曲)을 거쳐 성주(成州)에 당도하였으며, 격문을 모든 성에 보내 반란을 진압할 것임을 선언했다. 중앙에서도 수군을 징발하여 순화현(順化縣) 남강(南江)으로 보내 적의 배를 막도록 하였다.

김부식은 군리 노인해를 서경으로 보내 투항을 권유하는 한편, 연주(漣州)를 거쳐 안북부(安北府)에 당도했다. 이때 동계에서 진숙과 이주연 등이 와서 김부식에 합세하였다. 그 전까지 상황을 관망하고만 있던 각 지방은 김부식이 대군을 이끌고 오는 것을 확인하고는 굴복하여 관군을 맞아들였다.

정리하면, 우군은 서경에서 동북면으로 향하는 통로를 차단하고, 좌군은 서경과 개경을 잇는 도로를 점하여 서경의 남쪽을, 중군은 (우군이 점거한 지역을 통해 우회하여) 서경의 북쪽을 점거했다. 그리고 중앙에서 징발한 수군은 대동강 하구를 차단하여 서경의 서쪽을 점거하였다. 반란군은 완전히 포위된 것이다.

(전략)

○ 무신일에 묘청과 유감(柳旵)이 분사 시랑 조광(趙匡) 등과 더불어 서경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중략) 신해일에 군인 최언(崔彦)과 한선(韓善) 등이 황주(黃州)로부터 와서 아뢰기를, “서경 사람이 군병을 거느리고 동선역(洞仙驛)에 이르러 사록 고보정(高甫正)을 잡아 가고, 또 역에 있는 말을 빼앗아 서경으로 보냈으며, 사람들이 서울로 왕래하는 것을 금하고 있습니다. 저희들이 낮에는 숨고 밤에 걸어 사잇길로 온 것입니다." 하였다. 왕이 재신과 추신들을 불러 의논하고 평장사 김부식, 참지정사 임원애, 추밀원 승선 김정순(金正純)에게 명하여 병부에 앉아 군사를 동원하여 적을 토벌할 계획을 하였다. 이에 조서를 내려 김부식ㆍ임원애를 중군수(中軍帥)로, 김정순ㆍ정정숙(鄭旌淑)ㆍ노영거(盧令琚)ㆍ임영(林英)ㆍ윤언이(尹彦頤)ㆍ이진(李瑱)ㆍ고당유(高唐愈)ㆍ유영(劉英)을 그 좌(佐)로, 이부 상서 김부의를 좌군수로, 김단(金旦)ㆍ이유(李愈)ㆍ이유개(李有開)ㆍ윤언민 (尹彦旼)을 그 좌(佐)로, 지어사대사(知御史臺事) 이주연(李周衍)을 우군수(右軍帥)로, 진숙(陳淑)ㆍ양우충(梁祐忠)ㆍ진경보(陳景甫)ㆍ왕수(王洙)를 그 좌로 삼았다. (중략)

○ (중략) 갑인일에 양부의 대신을 불러서 묻고 그날 장차 출병하려 하니, 김부식 등 여러 장수가 대궐로 나아가 명을 기다렸다. 김안(金安) 등이 출병의 시기를 늦추어 반역을 도모하려고 아뢰기를, “금 나라의 사신을 인견하고 조서를 받으신 후에 장수를 보내도 오히려 늦지 않을 것입니다." 하였다. 어떤 사람이 고하기를, “김안 등이 몰래 병장기를 모으고 가만히 서로 소곤거리니 그 음모가 헤아릴 수 없습니다." 하였다. 부식이 여러 재상과 상의하기를, “서경의 반역에 정지상ㆍ김안ㆍ백수한 등이 가담하고 있으니, 이 사람들을 제거하지 않고는 서경을 평정시킬 수 없다." 하니, 여러 재상들이 그렇게 여기고, 지상 등 3명을 불러서 그들이 이르자 은밀히 김정순에게 말하여 무사로 하여금 3명을 끌어내어 궁문 밖에서 목을 벤 뒤에 비로소 위에 아뢰었다. 사람들이 말하기를, “부식은 평소 지상과 같이 문인으로서 명성이 비슷하였는데, 문자 관계로 불평이 쌓여, 이에 이르러 ‘지상이 내응한다’ 핑계하고 죽인 것이다." 하였다. 왕이 임원애에게 명하여 도성에 머물러 호위하라 하고, 김부식에게 부월(鈇鉞)을 하사하고 보내며 이르기를, “도성문 밖의 일은 장군이 처결하라. 그러나 서경의 적도 모두 나의 적자(赤子)이다. 그 괴수만을 죽이고 부디 많이 죽이지 말라." 하였다. 을묘일에 묘청의 무리인 최봉심(崔逢深)ㆍ음중인(陰仲寅)ㆍ이순무(李純茂)ㆍ오원사(吳元師)를 먼 섬으로 귀양보냈다. 김부식의 중군이 금교역(金郊驛)에 이르자 때마침 눈이 내려 군사와 말이 얼고 굶주려 군사들의 마음이 해이해졌다. 부식이 위무하고 또 먹을 것을 나누어 주니 군대의 상황이 비로소 안정되었다. 순찰하던 기병이 서경의 첩자 전원직(田元稷)을 잡아 왔다. 부식이 결박한 것을 풀어 주고 위로하여 돌려 보내며 말하기를, “네가 돌아가서 성안의 사람에게 말하되, '대군이 이미 출동하였으니, 스스로 뉘우치고 귀순하는 자는 생명을 보전할 것이다.'고 하라." 하였다. 이날 서경의 장군 일맹(一孟)이 와서 적의 실정을 자세히 고하니, 왕이 벼슬로 상 주고 주택을 하사하였다.

병진일에 홍이서와 이중부가 서경으로부터 돌아오니, 부식이 이서는 직접 조서를 전하지 않고 역리를 보내어 조서를 전했다는 것으로 평주(平州)에 가두고, 중부는 백령진(白翎鎭)으로 귀양보냈다. 서경의 적이 성주(成州)에 이르러 왕명을 거짓으로 꾸며 방어사의 관료를 잡아 결박하고 민가에 난입하여 음식을 마구 토색하였다. 고을 사람들이 거짓임을 알고 5, 6명을 쳐서 죽이고, 20여 명을 가두고는 말을 달려 보고하니, 왕이 조서를 내려 권장하고 관료에게 약 한 은합(銀合)을 각각 하사하고, 장리(長吏 지위가 비교적 높은 관원)와 장교에게는 폐백을 차등 있게 주었다. 또 연주(漣州)의 호장(戶長) 강안세(康安世)와 중랑장 김인감(金仁鑑)은 위병마 부사(僞兵馬副使) 이자기(李子奇), 장군 이영(李英) 등과 군졸 6백여 명을 잡으니, 교서를 내려 권장하고, 위로하며 비단과 채백(彩帛)을 하사하였다. 여러 성에서 듣고 서경의 적 1천 2백여 명을 잡아 죽였다. 정사일에 (중략) 부식이 말하기를, “그렇지 않다. 서경의 적도가 반란을 꾀한 지 이미 5, 6년이니 그 음모를 주도면밀하였을 것이며, 반드시 싸움과 수비를 충분히 대비한 뒤에 거사하였을 것이니, 이제 그 대비하지 않는 틈을 타서 엄습한다는 것은 너무나 늦지 않은가. 또 아군이 적을 경솔히 보는 마음이 있고 병기도 정비되지 못한 터에, 갑자기 복병의 기습을 당한다면 이것이 첫째 위태한 일이요, 견고한 성 아래로 군사를 끌고 가서 날은 춥고 땅은 얼어 진터도 이루기 전에 불시에 적이 틈을 탄다면 이것이 둘째로 위태한 것이다. 또 들으니, 적도가 조서를 위조하여 양계에서 징병을 한다 하니 여러 성에서는 의심하여 진위를 분별하지 못하고 있는 터에, 만일 간사한 이들이 적도에 호응하여 안팎으로 서로 연결하여 도로가 막힌다면 이보다 더 큰 화가 없게 된다. 지금의 정세로는 군사를 끌고 사잇길을 따라 적의 배후로 우회하여 여러 성의 군량을 빼앗아서 대군을 먹이고, 순과 역으로써 잘 타일러서 서경의 적들과 절교하게 한 연후에 병력을 증강하고 휴식시키며 나라의 위업을 선양하고, 적진에 격서를 보내고는 서서히 대군을 몰아 위압하는 것이 만전(萬全)한 계책이 될 것이다." 하였다.

을축일에 중군이 군사를 인솔하고 평주를 거쳐 관산역(管山驛)으로 향하고, 좌우군이 서로 차례대로 이어 진군하였다. 중군은 사암역(射嵒驛) 신성부곡(新城部曲)을 경유하여 지름길로 성주(成州)에 이르러 하루 동안 군사를 쉬게 하고, 격문을 모든 성에 보내어 명을 받들어 적을 치는 뜻을 고하였다. 이날 조서를 내리기를, (중략) 내시지후(內侍祗候) 정습명(鄭襲明), 제위보 부사 허순(許純), 잡직서령 왕식(王軾)에게 명하여 서경의 서남해도(西南海島)에 가서 수군 4천 6백여 명과 전함 1백 40척을 징발하여 순화현(順化縣) 남강(南江)으로 들어가서 적의 배를 막도록 하였다. (중략)

○ (중략) 부식이 군리(軍吏) 노인해(盧仁諧)를 시켜 서경에 가서 투항을 권유하고, 또 성안의 허실을 엿보게 하고 드디어 대군을 인솔하고 연주(漣州)로 길을 잡아 안북부(安北府)에 다다르니, 진숙과 이주연 등이 동계로부터 와서 합세하였다. 앞서 녹사(錄事) 김자호(金子浩) 등을 보내어 칙서를 품고 사잇길로 양계의 성과 진을 돌면서 서경 적도의 모반한 실정을 효유하였는데, 지방의 인심이 오히려 관망하는 태도이더니, 대군이 이르니 비로소 모든 성과 진에서 떨고 두려워하여 관군을 맞아들였다. (후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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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사절요 제10권 / 인종 공효대왕 2(仁宗恭孝大王二) / 을묘 13년(1135)



2.4. 묘청의 최후, 계속되는 반란[편집]


묘청은 수세에 몰린 끝에 어처구니없게도 반란을 일으킨지 불과 17일 만에 서경에서 본격적인 전투를 벌이기도 전에 부하인 조광(趙匡)에 의해 병부상서 유참(柳旵), 유참의 아들인 유호(柳浩)와 함께 살해되었다. 조광은 이들의 목을 분사대부경(分司大府卿) 윤첨(尹瞻)을 통해 개경으로 보내는 한편, 김부식의 진영에도 글을 보냈다. 항복 협상을 시도한 것이었다.

김부식은 녹사 백녹진을 중앙에 보내 그간의 일을 보고하고, "윤첨을 후대하여 서경 세력이 항복할 수 있게 해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문공인을 비롯한 중앙의 대신들은 김부식의 말을 듣지 않았으며, 결국 윤첨은 옥에 갇히고 묘청 등 3명의 목은 저자거리 한가운데에 매달렸다. 윤첨의 소식을 들은 조광은 분노하여 다시 반란을 일으켰다.

이에 놀란 중앙에서는 김부, 황문상, 윤첨을 서경에 보냈으나, 김부의 위압적인 태도에 분노한 서경 세력은 그들을 죽이고 농성에 들어갔다. 김부식이 녹사 이덕경을 서경에 보내서 항복을 유도했으나, 이덕경 또한 죽임을 당했다. 한마디로 조광이 항복을 거부하고 결사항전을 선포한것이다. 결국 이제 남은 것은 전쟁뿐이었다.

(전략)

○ (중략) 부식이 또 막료와 군리를 서경으로 보내어 7, 8차에 걸쳐 효유하니, 조광(趙匡) 등은 대항하지 못할 것을 알고 속으로는 나와서 항복하려 하나, 자신의 죄가 중하여 주저하고 있었다. 평주 판관 김순부(金淳夫)사 조서를 가지고 성에 들어가니, 적도들이 드디어 묘청과 유감(柳旵) 및 감의 아들 호(浩) 등 3명의 머리를 베어 분사대부경(分司大府卿) 윤첨(尹瞻), 소감 조창언(趙昌言), 대장군 곽응소(郭應素), 낭장 서정(徐挺) 등을 시켜 순부와 함께 조정에 가서 죄를 청하게 하고, 또 글을 중군에 보내기를, “양(羊)과 술로 군사를 위로해 드리고자 하니 기일을 청합니다." 하므로, 부식도 녹사 백녹진(白祿珍)을 보내어 보고하고 또 양부에 글을 보내기를, “서경의 적이 장차 항복을 청하려고 하니, 마땅히 윤첨 등을 후대하여 스스로 뉘우치는 길을 열어 주도록 하시오." 하였다. 재상 문공인ㆍ최유(崔濡)ㆍ한유충(韓惟忠)이 녹진에게 말하기를, “너희 원수는 바로 서경으로 가지 않고 먼 길을 우회하여 안북(安北)으로 갔다. 우리가 왕께 아뢰어 단 한 사람의 사신을 보내어 조서를 가지고 항복하도록 효유한 것이지 너희 원수의 공이 아닌데, 네가 무엇 때문에 왔느냐." 하였다.[4]

김순부가 윤첨 등을 손을 뒤로 결박짓고 교외에 이르니 양부에서 법관을 보내어 목에 큰 칼[枷]을 씌우고 쇠사슬을 채운 뒤에 들어와 하옥을 청하고, 대간도 역시 극형에 처할 것을 청하였다. 왕은 허락하지 않고 결박을 풀고 들어와 뵙도록 명하고 술과 음식을 주어 위로하였다. 얼마 안 되어 옥에 가두고 묘청 등 3명의 목을 저자 가운데에 매달았다. 부식에게 조서를 내려 권장하고 곧 은약합(銀藥合)을 하사하여 그 공로를 포상하였다. 조광 등은 윤첨 등이 옥에 갇혔다는 것을 듣고 반드시 면치 못할 것이라 짐작하고 다시 반역하였다. 전중시어사 김부(金阜), 내시 황문상(黃文裳)과 윤첨을 보내어 서경에 조서를 반포하였는데, 김부 등이 은혜로 무마하고 위로하지 않고 위엄으로 억압하니 서경의 적들이 원망하고 노하였다.

○ 2월에 서경의 적이 난병을 선동하여 김부와 황문상과 그의 추종자를 죽이니, 윤첨이 태조의 영정을 받들고 탈출하다가 잡혀 죽었고, 적은 성을 굳게 지키고 있었다.

○ 김부식이 녹사 이덕경(李德卿)을 보내어 서경의 적을 타일렀는데 또 그를 죽였다. (후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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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사절요 제10권 / 인종 공효대왕 2(仁宗恭孝大王二) / 을묘 13년(1135)



2.5. 공방전[편집]


협상이 실패로 돌아가자 김부식은 진압에 나섰는데 군을 다섯으로 나누어 성 아래로 진군했다. 중군은 천덕부(川德部), 좌군은 흥복사(興福寺), 우군은 중흥사(重興寺) 서쪽, 전군(前軍)은 중흥사 동쪽, 후군은 대동강에 배치했다. 또한 산골짜기로 도망쳐 숨은 서경의 백성들을 용서하겠다고 회유하여 서경의 반군에 가담하지 않게 방지했다.

이에 서경에서는 선요문(宣耀門)으로부터 다경루(多景樓)까지 강을 따라 성을 쌓아 관군의 공격에 대비했다.

중앙에서는 상장군 이녹천 등으로 하여금 서해로부터 병선 50척을 이끌고 서경 토벌에 지원하게 하였다. 철도(鐵島)에 도달한 이녹천은 곧장 서경으로 향하려 했는데, 날이 저물어 조수(潮水)가 물러간 참이었다. 병선판관 정습명은 "수로가 좁고 얕으니 조수가 밀려올 때를 기다려 출발하자."며 진군을 멈출 것을 조언했다. 그러나 이녹천은 그 말을 듣지 않고 계속 배를 이끌고 이동했는데, 과연 도중에 물이 얕아 배가 땅바닥에 눌러앉고 말았다. 그 틈을 타 반군이 작은 배 10여 척에 섶을 싣고 기름을 뿌리고 불을 질러 조수를 따라 놓아 보내고, 미리 수풀에 숨겨두었던 궁수들로 하여금 화살을 쏘아 협공하게 했다. 결국 이녹천은 본인 목숨만 간신히 건져 도망쳤으며, 그가 이끌고 가던 군세는 괴멸되었다. 이로 인해 서경군은 관군을 우습게 보게 되었다.

그러나 김부식은 보병과 기병 1천 명을 후군으로 보내 병력을 증강시켰다. 날이 밝을 무렵 반군이 후군을 습격했는데, 관군으로 종군하고 있던 승려 관선이 큰 도끼를 들고 앞으로 나아가 10여 명의 적을 쳐죽였다. 관군은 그 기세를 몰아 대대적인 반격에 나서 반군을 대파했고, 이로 인해 서경군의 기세는 크게 꺾였다.

(전략)

○ 김부식이 모든 장수와 더불어 황천후토(皇天后土)와 산천신기(山川神祇)에 맹세하고 고하기를, (중략) “서경은 북으로는 산을 등지고 3면이 물로 막혔으며, 성이 높고 또 험하여 쉽사리 함락시키기 어려우니 마땅히 군영을 나열하여 핍박해야 할 것이다. 또 대동강은 왕래하는 요충이 되고 있으니, 우리가 마땅히 먼저 점거해야 한다." 하고, 5개 군으로 나누어 성 아래로 진군하여 중군은 천덕부(川德部)에 둔치고, 좌군은 흥복사(興福寺)에 둔치고, 우군은 중흥사(重興寺) 서쪽에 둔치고, 전군(前軍)은 중흥사 동쪽에 둔치고, 후군은 대동강에 둔을 쳤다. 또 성 밖의 백성으로서 산골짜기에 도망해 숨은 자들이 서로 불러 모여 적의 응원군이 되지나 않을까 염려하여 군리를 나누어 파견하여 위로하고 타이르니, 도망해 숨었던 자들이 모두 나와서 군량도 운반하며 혹은 군비를 돕기를 원하는 자가 끊어지지 않으므로, 모두 옷과 음식을 공급하여 편안히 살게 하였다. (중략)

○ 윤달에 서경의 적이 선요문(宣耀門)으로부터 다경루(多景樓)까지 강을 따라 1천 7백 30칸(間)의 성을 쌓았다. (중략)

○ 상장군 이녹천(李祿千), 대장군 김태수(金台壽), 녹사 정준(鄭俊)ㆍ윤유한(尹惟翰), 군후(軍候) 위통원(魏通元) 등을 보내어 서해(西海)의 해도로부터 병선 50척을 영솔하여 서경의 적들을 토벌하는 데 돕게 하였다. 녹천이 철도(鐵島)에 이르러 곧장 서경으로 향하려고 하였는데 때마침 날은 저물고 조수(潮水)도 물러갔다. 병선판관 정습명(鄭襲明)이 말하기를, “수로가 좁고 얕으니 조수를 타고 출발하는 것이 옳다." 하였다. 녹천이 듣지 않고 가다가 중간에 이르러 물이 얕아 배가 바닥에 붙고 말았다. 서경의 적이 작은 배 10여 척에 섶[薪]을 싣고는 기름을 뿌리고 불을 질러 조수를 따라 놓아 보내고, 먼저 길가의 수풀 속에 궁노수(弓弩手) 수백 명을 매복시키고, 불이 일어나면 때를 같이하여 일제히 활을 쏘기로 약속했던 것이다. 불을 실은 배가 전함과 서로 맞닿자 전함은 연소되고 매복한 궁노수의 화살이 함께 날아오니, 녹천이 크게 낭패하여 어찌할 바를 몰랐다. 병선과 병장기가 모두 불에 타고, 군사들은 거의 다 물에 익사하였으며 김태수와 정준도 모두 전사하였다. 녹천은 쌓인 시체를 밟고 언덕에 올라 겨우 자기 몸만 빠져 나왔다. 이로 말미암아 서경의 적들이 비로소 관군을 경시하게 되었다. (중략)

○ 부식이 후군의 수효가 적고 약함을 염려하여 밤에 은밀히 보병과 기병 1천 명을 보내어 병력을 증강시켰다. 날이 밝을 무렵에 적이 마탄(馬灘), 자포(紫浦)를 건너 곧장 후군의 진영에 돌격하여 진영을 불사르고 돌진해 왔다. 중 관선(冠宣)이 모집에 호응하여 종군하였는데, 큰 도끼를 들고 앞장서서 적을 쳐 10여 명을 죽이니, 관군이 승세를 타서 크게 격파하여 머리를 벤 것이 3백여 급(級)이나 되었고, 적은 모두 짓밟혀 강으로 달려가 익사하였다. 병선과 병장기 등 노획한 것이 매우 많았으며, 적의 기세는 크게 꺾이게 되었다. (후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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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사절요 제10권 / 인종 공효대왕 2(仁宗恭孝大王二) / 을묘 13년(1135)



2.6. 지구전[편집]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광의 항전은 끝나지 않고 지속되었다. 이는 당시 서경이 워낙 견고한 요새이기에 쉽게 함락시킬 수 없었기 때문이다.[5] 여름이 다가오는 시기에 이르자, 김부식은 장마를 틈탄 적의 기습을 염려하여, 서경 주변에 여러 개의 성을 증축하고 교전을 피했으며, 주진의 병사들은 돌아가며 농사를 짓도록 했다.

그리하여 관군은 병장기를 모으고 양곡을 쌓고 병사들을 쉬게 하는 등 장기전에 돌입했다. 간혹 반군이 습격해오는 교전이 있었으나 전세에 유의미한 수준의 영향은 없었다. 인종은 김부식에게 조서를 보내 적을 귀순시킬 것을 당부했으므로, 김부식은 반군의 간첩을 잡더라도 옷과 음식을 주어 돌려보내는 등 반군의 회유에 신경썼다.

이에 서경에서는 고려로 오는 금나라 사절을 살해하여 고려와 금 간의 불화를 일으킴으로써, 상황을 반전시키고자 했다.[6][7] 그러나 관군이 이미 예측하고 대비하고 있었으므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또한 서경군은 관군의 문서를 위조해 사람들에게 보이며, "포로와 항복한 사람들 모두 관군에게 죽임을 당하였다."고 거짓 선전하여 내부를 단속하려 했지만, '항복한 자는 후대한다.'는 사실이 널리 알려졌기 때문에 이마저도 통하지 않았다.

한편 조정에서는 "북방의 금나라를 비롯한 적들이 겉으로는 화친하고 있지만 언제 우리를 공격할지 알 수 없다. 이토록 전쟁을 오래 끌다가 다른 변란이 발생하면 막아낼 방도가 없으니, 피해를 감수하고라도 적을 공격하여야 한다."는 의견이 나왔다. 인종으로부터 그 글을 받은 김부식은 "서경은 험준하고 수비도 여전히 탄탄하여 점령하기 어렵다. 수만 명의 병력을 오랜시간 부렸음에도 어떤 성과를 내지 못한 것은 나의 잘못이 맞으니 그 책임을 피할 수 없다. 그러나 정말로 변방의 경비와 변란을 염려한다면, 병졸이 상하지 않는 방법을 강구해야 할 것이다."라고 반박했다. 인종은 그의 말이 옳다고 여기고 지휘권을 계속 김부식에게 위임하였다.

그렇게 서경 포위전은 예상외로 길어졌으며 해를 넘겨 2년을 끌게 되었다. 이즈음 바다 건너 송나라에서도 묘청의 난에 대한 소식을 듣고는 적공랑(迪功郞) 오돈례(吳敦禮)를 사신으로 보내 "서경에서 난동을 일어났다는데 진압하기 어렵다면 10만 대군을 보내 도와주겠다."는 제안을 하기도 했다.(물론 예의상 던진 제안이었을 것이다.) 이에 인종은 "서경의 적은 고립되어 형세가 나날이 곤궁해져가고 있으므로, 무너지는 것은 시간 문제이다. 배려는 고맙지만, 굳이 신경쓸 필요는 없다."며 거절했다.

(전략)

○ (중략) 이때 군대가 야영한 지 수개월이 되었는데 김부식은 바야흐로 봄과 여름이 바뀌는 시기이므로, 혹시 장마가 지며 적의 습격을 받을 것이라 우려하여 성을 쌓아 교전을 피하고, 주ㆍ진의 병사는 윤번으로 휴가하여 농사에 종사하도록 하여 지구전을 펴면서 기회를 엿보고자 하였다. (중략) 북계(北界)의 주ㆍ진과 남ㆍ서 근방의 군인들을 5개 군에 나누어 예속시켜 각각 한 성을 쌓게 하고, 또 순화현(順化縣)과 왕성강(王城江)에 각각 작은 성을 쌓게 하여 수일 만에 역사를 마쳤다. 병장기를 모으고, 양곡을 쌓고 성문을 닫아 사병들을 쉬게 하였다. 비록 혹시 적과 더불어 교전을 하여도 큰 승패가 없었으며, 혹 길을 나누어 성을 공격하였으나 성이 높고 참호가 깊어서 비록 화살과 돌이 미치는 곳에 살상도 많이 하였으나 관군도 역시 부상자가 났다.

왕이 근신 최부항(崔褒抗)과 원외랑 조석(趙碩) 등을 보내어 조서를 내려 적을 불러 귀순하라고 타일렀다. 부식도 또한 녹사 조서영(趙諝榮)ㆍ김자호(金子浩)ㆍ강우(康羽) 및 중 품선(品先) 등을 보내어 백방으로 타이르고 죽이지 않을 것을 허락하였다. 매양 적의 간첩이나 나무꾼ㆍ풀꾼을 잡았을 때마다 모두 옷과 음식을 주어서 돌려 보냈다. 조광 등은 스스로 죄가 중함을 알기 때문에 조금도 항복할 의사는 없고, 국외에서 오는 환란이나 있어 관군이 스스로 물러나는 요행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때 금 나라의 사절이 마침 왔는데 적은 길을 막고 사절을 살해하여 두 나라의 불화를 조성하려 하였다. 그러나 관군이 이를 알고 경비를 매우 엄밀히 하였기 때문에 적은 감히 발동하지 못하였다. 적은 또 그의 도당이 투항할까 염려하여 우리 중군의 문서를 거짓으로 꾸며서 군중에게 보이며 말하기를, “모든 군병에게 포로된 자와 항복한 사람은 노소를 가리지 않고 모두 살해되었다." 하니, 서경의 적들이 매우 깊게 믿었으나, 얼마 후에 항복한 자를 매우 후하게 위무한다는 사실을 들었기 때문에 적들이 점점 귀순하게 되었다.

이때 조정 신하가 헌의하기를, “예로부터 군사를 쓸 때에는 마땅히 형세를 관찰할 것이요, 어찌 일시의 손실만을 계교하겠습니까. 국가에서 비록 금 나라와 화친하고 있으나 그들의 의중을 헤아리기 어려운데 이제 수만의 군사를 일으켜 해가 차도록 결단을 내지 못하고 있으니, 만약 이웃의 적이 틈을 타서 발동하거나 도적들의 뜻하지 않은 우환이 가중한다면 어찌 제어하겠습니까. 중신을 보내어 사상(死傷)을 고려하지 말고, 기일을 엄중히 정하여 적을 격파하게 하고, 감히 피하거나 관망하는 자가 있으면 군법으로 죄를 논하도록 하소서." 하였다. 왕이 이것을 부식에게 이 글을 보이니 부식이 아뢰기를, “북쪽 변경의 경계와 도적의 변란을 우려하지 않을 수 없음은 진실로 건의한 자의 말과 같습니다. 그러나 사상자의 수를 계교하지 않고, 기일을 정하여 적을 격파해야 한다는 말은 이 어찌 오늘의 이해를 이같이 생각지 않는단 말입니까. 신이 서경을 보니 천연의 험고한 지대로 쉽사리 격파해 취하기도 어렵거니와, 더욱이 성중에는 병력도 많고 수비도 엄하여 매양 장사들이 먼저 올라가서 겨우 성 밑에 이르러서는 성첩(城堞)을 뛰어 넘는 자가 없으며 높은 사다리[雲梯]나 충거(衝車)가 모두 소용이 없고, 어린애와 부녀자들도 벽돌과 기와를 던져 역시 완강한 적이 되기에 설사 5군이 모두 성에 붙어 공격한다 해도, 수일이 못 가서 용맹 있는 장수와 정예병이 모두 적의 화살과 돌에 죽을 것입니다. 적이 우리의 힘이 꺾임을 알고 북을 울리며 고함치고 나온다면, 그 예봉을 당할 수 없을 것이니, 어느 겨를에 밖으로부터 오는 의외의 우환에 대비하겠습니까. 지금 수만의 병대를 연합하여 해가 차도록 결단을 내지 못한 것은 신이 마땅히 그 책임을 지겠습니다. 그러나 변방의 경비와 도적의 변란을 염려하지 않을 수 없으므로, 온전한 계책으로 이겨 사졸도 상하지 않고 국가의 위엄도 꺾이지 않게 하려는 것뿐입니다. 전쟁이란 본래 빠른 승리를 기약하지 않는 것도 있습니다. 이제 종묘사직의 신령과 명철하신 주상의 위엄으로 요망한 적의 배은망덕쯤은 곧 멸망해 없어질 것입니다. 원하옵건대, 적의 토벌은 신에게 맡겨 신으로 하여금 편의대로 일을 수행케 하시면 반드시 적을 격파하여 보답하겠습니다." 하였다. 왕도 역시 그렇게 여겼기 때문에 마침내 여러 사람의 논의를 물리치고 위임하였던 것이다. (중략)

○ 5군이 모여 서경의 성을 공격하였으나 이기지 못하였다. (중략)

○ 6월에 송 나라에서 적공랑(迪功郞) 오돈례(吳敦禮)를 보내와서 말하기를, “근래에 들으니 서경에서 난동을 일으키고 있다 하니 혹시 잡기가 어렵다면 10만의 병력을 내어 돕고자 한다." 하였다. (중략)

○ 9월에 오돈례가 돌아가는데 왕이 주문(奏文)에 첨부하기를, “서경의 적은 이미 그 원흉을 섬멸하였으나, 남은 적당이 서로 집합하여 험한 곳을 점거하고는 굳게 막고 있어 빨리 공격하여 격파하려면 살상이 많을 것이 우려되어 군사를 안정시키고 성을 포위하여 항복을 기다리고 있으니 적의 형세는 날로 곤궁하여 격파되는 것은 조석에 있습니다. 삼가 생각하옵건대, 해외의 조그마한 나라의 변방에서 일어난 세세한 사고는 족히 존위(尊威)를 번거롭게 할 것이 못 되므로 감히 고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제 특별히 사절을 보내어 원병을 보낼 가부를 물으시니, 비록 위로 대조(大朝)에서 작은 나라를 사랑하시는 뜻에는 감격하나 다만 사리상 불편한 바 있어 감당하기 어려우며, 더욱이 해양 만리 길에 험난을 헤아릴 수 없으니, 천병이 동으로 온다는 것은 아마도 편의한 일이 아니니, 내리신 지휘를 중지하심을 바랍니다." 하였다. (후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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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사절요 제10권 / 인종 공효대왕 2(仁宗恭孝大王二) / 을묘 13년(1135)



2.7. 결말[편집]


관군의 견고한 포위망을 뚫지 못한 서경의 군세는 물자가 차단당하여 군량 부족에 시달리고 탈주자가 늘어나는 등 점차 힘을 잃어갔다. 이를 알게 된 김부식은 전군(前軍)을 양명포(楊命浦)의 산 위로 옮겨 군영을 세우게 한 뒤, 2만이 넘는 인력을 동원해 토산을 쌓기 시작했다. 토산은 전군(前軍)의 군영이 있는 곳에 쌓았는데, 그렇게 양명포를 걸쳐 적의 성 서남 모퉁이에 닿도록 공사가 진행되었다. 또한 장군 의보 등 부장 4명에게 관군의 정예와 북계 주진의 전투병을 주어 유격부대를 편성하여, 반군이 토산을 뺏으러 오는 것을 대비하게 했다.

서경군은 공사를 막기 위해 병력을 내보내 싸웠지만, 방어에 나선 관군이 역으로 격퇴하면서 오히려 성을 공격하는 모습을 보이니, 전력을 분산시킬 수밖에 없어 제대로 된 성과를 낼 수 없었다. 성머리에 궁노와 포석을[8] 설치하여 항전하기도 했으나, 당시 외국에서 와 관군에 종군 중이던 조언헌이 포기(砲機)를 설계 및 제작하여 토산에 배치하고 돌과 화구(火毬)를 던져 대응하니, 마찬가지로 실패했다. 그렇게 공사는 순조롭게 진행되었고, 마침내는 서경성과의 거리를 두어 발(丈) 정도 남긴 수준까지 토산이 쌓였다.

이에 조광은 토산에 대한 대응책으로 성 안에 이중성벽을 쌓기 시작했다. 그러자 윤언이와 지석숭이 김부식에게 "대치가 오래되었으므로 사변을 예측하기가 어려우니 은밀히 군사를 내어 돌격해 겹성을 파괴하면 성공할 것이다."라며 성을 급습할 것을 요청했다. 김부식은 처음에는 아직 때가 아니라며 반대했지만 윤언이가 거듭 요청하자 승낙했다. 그래서 관군은 병력을 세 갈래로 나누어 서경을 대대적으로 공격하게 하는 한편, 여러 부대로 하여금 다시 길을 나누어 성을 공격하게 하여 반군의 방어 전력이 쪼개지게 하였다.

반군은 당시 토산이 아직 완성되지 않았으므로 관군이 공격해올 것이라는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다. 때문에 허를 찔려 관군의 공격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해 큰 피해를 입고 말았다. 해가 지고 비가 내리기 시작하자 관군은 도로 퇴각했지만, 돌이킬 수 없는 타격을 받은 반군의 동요는 가라앉지 않았다. 결국 더는 승산이 없다는것을 알게 된 조광을 비롯한 반란군 수뇌부 대부분은 밤 사이 자결했으며, 성 안의 나머지 무리들은 다음 날 우두머리인 최영을 사로잡아 성문을 열고 항복하였다. 조정에서는 그간의 행적에 따라 적들을 벌하거나 사면하였으며, 그렇게 수년에 걸쳐 이어진 묘청의 난은 진압되었다.

(전략)

○ 서경 성안의 군량이 다 떨어져 노약자를 추려서 몰아 내니, 병졸들도 가끔씩 나와서 항복하였다. 부식이 공격해 취할 수 있음을 알고 여러 장수에게 명하여 장차 토산(土山)을 쌓도록 하고, 먼저 양명포(楊命浦)의 산 위에 목책을 세워 군영을 배열하여 전군(前軍)을 옮겨 근거지로 삼고, 각 고을의 군졸 2만 3천 2백 명과 중 5백 5십 명을 징발하여 토산을 쌓게 하고, 장군 의보(義甫) 등 4명에게 나누어 명하여 정예병 4천 2백 명과 북계 주ㆍ진의 전투병 3천 9백 명으로 유격부대를 만들어 적의 표략에 대비케 하였다. (중략)

○ 5군이 전군(前軍)의 둔친 곳에 토산을 쌓았는데, 양명포를 걸쳐서 적의 성 서남 모퉁이에 닿도록 하여 주야로 공사를 독려하니, 적이 크게 놀라 날마다 정예병을 내보내어 싸우고, 또 성 머리에 궁노(弓弩)와 포석(砲石)을 설치하고 힘을 다하여 항거하였다. 관군은 적절히 방어하면서 북을 울리고 함성을 치며 성을 공격하여 적의 세력을 분산시키고, 또 외국에서 온 교인(僑人) 조언헌(趙彦獻)이 포기(砲機)를 설계해 만들어 토산 위에 놓으니, 그 제도가 높고 커서 나는 돌의 무게가 수백 근이나 되어 성루를 여지없이 부수고, 이어 화구(火毬)를 던져 성루를 불태워 버리니, 적이 감히 가까이하지 못하였다. 토산은 높이가 8길[丈]이요, 길이는 70여 길이었으며, 넓이가 18길로 적의 성과의 거리가 두어 발[丈] 정도 였다. 5군이 성을 공격하였으나, 이기지 못하고 녹사 박광유(朴光儒)가 죽었다. (중략)

○ 서경의 적이 밤에 군병을 3부대로 나누어 전군의 진영을 공격해 왔다. 부식이 중 상숭 (尙崇)을 시켜 도끼를 들고 반격하게 하여 10여 명을 죽이니, 적병이 달아나 무너졌다. 장군 우방재(于邦宰) 등 5명이 병졸을 인솔하고 추격하니, 적은 병장기를 버리고 성으로 들어갔다. (후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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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사절요 제10권 / 인종 공효대왕 2(仁宗恭孝大王二) / 을묘 13년(1135)


(전략)

○ 조광 등이, 우리가 토산을 쌓아서 핍박한다 하여, 성안에 겹성[重城]을 쌓으려고 하였다. 부식이 듣고 말하기를, “적이 비록 성을 쌓은들 무슨 소용이 있으랴." 하니, 윤언이와 지석숭(池錫崇)이 말하기를, “대군이 출동한 지 지금 벌써 2년인데, 오랫동안 서로 버티고 있으니 사변을 예측하기 어렵다. 은밀히 군사를 내어 돌격해 겹성을 파괴하면 성공할 것이다." 하였으나, 부식이 듣지 않다가 언이가 굳이 청하니, 이에 정예병을 세 길로 나누어 진경보(陳景甫) 등이 3천 명을 거느려 중도(中道)가 되고, 지석숭 등이 2천 명을 거느려 좌도가 되고, 이유(李愈) 등이 2천 명을 거느려 우도가 되었으며, 장군 공직(公直)은 영솔한 군병으로써 석포(石浦) 방면으로 들어가고, 장군 양맹(良孟) 역시 영솔한 군병으로써 당포(唐浦) 방면으로 들어가게 하였고, 또 여러 부대로 하여금 길을 나누어 성을 공격하여 적의 세력을 분산하게 하였다. 부서를 배정한 뒤에 군사들에게 상을 후하게 내리고, 부식은 다시 중군으로 돌아갔다가 밤 사경에 이르러 날쌘 기병을 데리고 빨리 전군(前軍)으로 달려가서 모든 장수를 통솔하고, 총출동을 하였다. 정사일 날이 밝을 무렵에 경보의 군사는 양명문(楊命門)으로 들어가 적의 목책을 무너뜨리고 연정문(延正門)으로 진격하고, 석숭의 군대는 성을 넘어 들어가 함원문(含元門)을 공격하고, 이유의 군대도 역시 성을 넘어 흥례문(興禮門)을 공격하였고, 부식은 아병(衙兵)을 거느리고 광덕문(廣德門)을 쳤다.

적의 무리가 우리의 토산이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고 방비를 하지 않고 있다가, 여러 군대가 돌연히 진격하니, 황급하고 두려워 어찌할 바를 몰랐다. 부식이 김정순과 함께 싸움을 독려하니, 장병들이 모두 다투어 분발하고, 모든 군사가 또한 북을 울리고 함성을 울리며 불을 놓아 성안의 집을 불사르니, 적병은 크게 무너지고 관군은 승세를 타고서 마구 적의 목을 베었다. 부식이 영을 내리기를, “적을 사로잡는 자는 상을 주고, 항복하는 자를 죽이거나 약탈하는 자는 사형에 처한다." 하니, 사병이 모두 칼날을 거두고 진격해 나갔는데, 마침 날이 저물고 비가 내려 군사를 거두어 퇴각하고 생포된 자와 항복한 자는 순화현(順化縣)으로 보내어 음식을 먹였다.

이날 밤에 성중이 요란하여 조광이 어찌할 바를 몰라 온 가족이 스스로 불을 질러 타 죽고, 낭중 유위후(維偉侯), 팽숙(彭淑)ㆍ김현근(金賢瑾)은 모두 목매어 죽었고, 정선(鄭璇)ㆍ유한후(維漢侯)ㆍ정극승(鄭克升)ㆍ최공필(崔公泌)ㆍ조선(趙瑄)ㆍ김택승(金澤升)은 모두 스스로 목찔러 죽었다.

적이 그의 괴수 최영(崔永) 등을 잡아서 나와 항복하니, 부식이 받아서 관리에게 회부시키고, 군사와 백성을 위무하고, 늙은이, 어린아이와 부녀자들에게는 성에 들어가서 각기 집을 보존하도록 하였다. 군사를 나누어 여러 문을 지키게 하고, 어사잡단(御史雜端) 이인실(李仁實), 시어사 이식(李軾), 어사 최자영(崔子英)으로 하여금 성에 들어가 부고를 봉하게 하였다. 또 김정순을 시켜 윤언이와 김정황(金鼎黃)과 함께 군사 3천 명을 거느리고 성에 들어가 관풍전(觀風殿)을 정돈하고 성중에 호령하여 약탈을 금하고, 낭중 신지충(申至冲)을 수습병장사(收拾兵仗使)로, 내급사 이후(李侯)를 백성화유안거사(百姓和諭安居使)로, 원외랑(員外郞) 박정명(朴正明)을 창고감검사(倉庫監檢使)로, 합문지후 이약눌(李若訥)을 객관수영사(客館修營使)로, 녹사 최유칭(崔褎偁)과 백사청(白思淸)을 성내좌우순검사로 삼았다. 신유일에 부식이 성에 들어가서 백성을 위로하고, 사람을 보내어 여러 성황과 신묘(神廟)에 제사를 지내며, 병마판관 노수(魯洙)를 보내어 표를 받들어 전승 보고를 드렸다.

왕명을 받아, 적의 괴수 최영(崔永)과 대장군 황인(黃麟), 장군 덕선(德宣), 판관 윤주형(尹周衡), 주부 김지(金智)와 조의부(趙義夫), 장사(長史) 나손언(羅孫彦)의 목을 베어 3일 동안 높이 매달았으며, 분사(分司) 호부 상서 송선유(宋先宥)는 병란이 일어났을 때부터 병을 칭탁하여 두문불출하였고, 장서기 오선각(吳先覺)은 거짓으로 어리석은 체하여 적에게 가담하지 않았으며, 또 태창승(大倉丞) 정총(鄭聰)은 효행으로 알려져 모두 그 마을 앞에다 정표하였다. 의학박사 김공정(金公鼎)이, 부식이 보낸 좌랑 노영거(盧令琚)를 조광이 살해하려는 것을 알고 비밀리 알려 피하게 하였다. 소감 위근영(韋瑾英)은 늙은 모친이 있었으므로 겉으로는 적에 위배하지 못하고, 한유관(韓儒琯)ㆍ안덕칭(安德偁)ㆍ김영년(金永年)과 함께 거짓으로 상여를 꾸며 장사를 지내는 것같이 하여 성문을 나오려다가, 일이 누설되어 근영ㆍ유관은 잡혀가 매질을 당하고 낙형(烙刑)을 입었으나, 죽을 때까지 끝내 공모자를 대지 않았기 때문에 덕칭과 영년 등은 해를 면하였다.

김공정 이하 여러 사람과 윤첨(尹瞻)의 친속과 늙은이와 어린이 및 병이 중한 환자는 모두 용서하였다. 그 나머지의 양반은 모두 서울로 압송하여 옥에 가두고, 용맹 있고 사납게 항거한 자는 서경역적(西京逆賊) 네 글자를 자자(刺字 살에 먹물로 글자를 넣는 것)하여 먼 섬으로 귀양보내고, 그 다음가는 자는 서경 두 글자를 자자하여 향(鄕)ㆍ부곡(部曲)으로 나누어 귀양보냈으며, 그 나머지는 여러 주ㆍ부ㆍ군ㆍ현에 나누어 거주하게 하고 그 처자는 편의에 맡겨 거주하도록 허락하고, 양민되기를 허하였다. 조광ㆍ최영 등 7명과 정선ㆍ김신(金信)과 신의 아우 김치(金致)와 정지상ㆍ이자기(李子奇)ㆍ백수한ㆍ조간(趙簡)ㆍ묘청ㆍ유감과 감의 아들 호ㆍ정덕환(鄭德桓) 등의 처자는 모두 동북 여러 성의 노비로 삼았다. 간관이, “문공인이 묘청 등을 천거하여 국사를 그르치게 하고 생민에게 해독을 끼쳤다."고 탄핵하니, 문공인을 수태위 판국자감사로 좌천시켰다.

사신이 말하기를, “문공인이 재상이 되어서 먼저 소인을 추천하여 나라 일을 그르치고, 또 부식의 말을 따르지 않고 윤첨(尹瞻)을 박하게 대접하여, 마침내 거의 항복하려던 적으로 하여금 다시 반역하게 했으니, 그 죄가 진실로 크거늘 좌천으로 그치니 벌이 너무도 경하다." 하였다.[9]

(후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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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사절요 제10권 / 인종 공효대왕 2(仁宗恭孝大王二) / 병진 14년(1136)



3. 영향[편집]



3.1. 서경의 지위 격하[편집]


서경은 본래 태조훈요 10조에 언급할 정도로 고려에서 중시되었다. 그래서 고려는 분사(分司)를 설치하여 운영하는 등, 서경을 제 2의 수도로까지 취급했다.[10]

그러나 묘청의 난 이후, 조정에서는 분사어사대와 감군을 제외한 서경의 모든 관서를 혁파하였다. 분사제도가 붕괴되기 시작한 것이다. 이는 개경에 버금가던 서경의 지위가 대폭 추락하였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설상가상으로, 명종 대에는 서경유수 조위총이 무신정권에 반발하여 서경에서 반란을 일으켰다가 진압되자, 그 결과 서경의 모든 관서가 6조(六曹)에 분속되고 각 조의 사(史) 가운데 1인은 중앙정부에서 직접 파견하게 되었다.(명종 8년) 서경이 중앙정부의 강한 통제 아래 일원적인 행정체계에 편입되어, 명목상으로나마 지니고 있던 독립적인 지위마저 상실하고 만 것이다.


3.2. 문벌귀족사회의 병폐 심화[편집]


본래 서경 세력은 개경 세력과 함께 고려 권력의 양대 축을 형성하고 있었다. 그러나 서경을 기반으로 한 귀족들이 묘청의 난으로 크게 몰락하면서, 이 같은 권력 구도가 깨지고 말았다. 견제 세력이 사라진 개경의 문신 귀족 세력은 폭주하기 시작했고, 이로 인해 문신귀족사회가 안고 있던 정치적·사회경제적 모순과 폐단은 더욱 심화되었다.

특히 묘청의 난은 무신(武臣)의 중요성이 부각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여진 정벌, 이자겸의 난, 묘청의 난 등 연이은 전쟁으로 공을 세운 무신들이 많아지면서, 무신들의 입지는 이전보다 더욱 강해졌다. 그러나 숭문천무 정책에서 비롯된 문신들의 무신 멸시는 여전했고 계속해서 무신을 견제했다. 이 때문에 무신들의 불만은 점점 커져갔으며, 종국에는 무신정변이 벌어지게 된다.


3.3. 역사 계승 의식의 변화[편집]


고려의 정체성에 대한 인식에도 변화가 생겼다. '고구려를 계승하여 후삼국을 통일하였다.'에서 '삼한을 통일한 신라의 뒤를 이어 후삼국을 통일하였다.'로. 즉, 고려는 고구려의 계승국이 아니라 신라의 계승국이라 여기게 된 것이다.

다만 고려 초에 집필된 삼국사는 물론이고 묘청의 난 이후의 저작인 삼국사기도 고구려, 백제, 신라의 역사를 함께 다루고 있기 때문에, 이들 삼국에 대한 고려의 인식은 묘청의 난 이전이든 이후든 그리 편파적이지는 않았던 듯하다. 무신정권기의 반란들을 보면, '고려 이전에는 삼한이란 별개의 나라로 살지 않았느냐.'는 분립적 의식 또한 여전히 잔존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물론 가장 큰 원인은 먹고 살기 팍팍했던 당시 세태였을 것이다.)

이러한 고려의 역사 의식은, 대몽항쟁기에 이르러 '삼한은 본래 한 나라였다가 갈라졌으나 다시 합쳐졌다.'는 고조선 계승 의식으로 확대되었다.

[1] 고려의 국왕들도 외제내제(밖으로도 황제, 안으로도 황제)를 칭했는데 나라 이름은 고려국으로 지었다. 그리고 한반도 국가들은 중원과는 다른 기원을 갖고 시작한 것 때문에 원래는 그런 전통이 없어서 굳이 그것을 따르지 않기도 했다. 일본의 경우도 칭제를 하면서 오히려 한자표기상 1자 국호인 야마토(大和)에서 일본(日本)으로 글자수가 늘어난다. 다만 후세 한국사의 천자국인 대한제국은 대한국이라고도 했는데, 이는 大++國이라는 천자국 국호 격식에 충실한 것이다. 그냥 國이 아니라 '帝國'인 것은 유럽의 영향.[2] 나중에 벌어지는 삼별초의 난에서는 삼별초왕족 중 1명인 승화후를 왕으로 추대하면서 반란을 일으켰다. 상황 자체는 다른 편이었지만 묘청 세력은 이렇게라도 하지 않고 군주가 공석인 채로 반란을 일으킨 셈이었다.[3] 다른 일도 아니고 처형을 왕에게 묻지도 않고 자기들끼리 결정해서 실행했다. 진실은 알 수 없지만, 당시 사람들로서는 김부식의 이런 행태에 의혹을 품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4] “너(백녹진)랑 김부식은 명령받은 대로 반란이나 제대로 진압해라. 윤첨의 처우는 중앙에서 처리할 일이지, 너희들이 왈가왈부할 문제가 아니다.” 정도의 의미로 보면 된다.[5] 무엇보다 서경은 고려의 주적인 북방 유목민들을 막아내는데 중요한 지역이기 때문에 고려에서 성을 견고하게 만들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여요전쟁 때도 요나라군이 서경 공략만은 피할 정도.[6] 칭제건원, 금국정벌 등을 주장했다는 이유 때문에, 서경 세력은 개경 세력과 달리 자주적이고 진취적인 성향을 지녔다고 평가한다. 하지만 이처럼 외세를 이용해 나라에 해악을 끼치려 한 자들에게 그런 평가를 내리는 것이 올바른 것인지 의문이다.[7] 한국사를 배우다 보면, 이처럼 이분법적 사고로 점철된 시각으로 역사를 재단한 내용을 보는 경우가 간혹 있다.(예를 들면, 훈구파와 사림파를 비교할 때, '사림파가 기자를 숭배하는 등 사대주의적 성향을 지닌 것과 달리 훈구파는 단군을 중시하는 자주적인 성향을 지니고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알다시피 훈구파는 세조와 결탁하여 쿠데타를 일으키고 부정부패를 저지르던 공신 세력에서 비롯되었고, 사림파는 그런 기득권층을 비판하며 정계에 진출한 이들이다. 조선의 기자 숭배가 중국에 대한 맹목적인 복종을 의미하는 것이 아님을 감안하면, 사림파를 사대주의자라 몰아붙이는 것은 지나친 처사라 할 수 있다. 해방 후 친일파가 반공을 외친 것을 생각하면, 훈구파의 성향이 자주적이라는 말 역시 제대로 된 평가라고 보기는 힘들다.) 역사, 아니 어느 분야에서든, 어떠한 사건이나 인물 등을 흑백논리에 따라 섣불리 판단해서는 안 될 것이다.[8] 투석기이다.[9] 위에서도 보았듯이, 문공인은 윤첨을 후대해야 한다는 김부식의 건의를 반대했다. 그리고 윤첨이 옥에 갇혔다는 소식을 듣고 조광이 다시 반란을 일으키는 바람에, 고려는 이를 진압하기 위해 2년여의 세월을 허비해야 했다. 조기에 해결할 수 있었던 사태를 파국으로 치닫게 만들었으니, 문공인이 비판을 받는 것은 필연적이었다.[10] 고려는 개경의 관청을 서경에도 설치했는데 이를 분사제도(分司制度)라고 한다.(태조 때 시작되어서 예종 때 완성됐다.) 여요전쟁 당시 "요나라는 고구려 땅을 가졌으니, 고구려를 계승한 국가이다."라는 소손녕의 발언에, 서희는 "고구려의 도읍이었던 평양(서경)을 수도로 삼았으니, 고려야말로 진정한 고구려의 계승국이다."라고 반박했는데, 이 같은 서희의 발언은 전술한 분사 제도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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