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라비트 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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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랍어: المرابطون, 알 무라비뚠
베르베르어: ⵉⵎⵕⴰⴱⴹⴻⵏ, Imṛabḍen
스페인어[1]: Los almorávides
영어: Almoravid Dynas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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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기원
3. 서북아프리카 정복
4. 전성기
5. 몰락
5.1. 안달루스의 반란과 멸망
5.2. 부흥 운동
5.2.1. 알리 이븐 이샤크
5.2.2. 압둘라 & 야흐야 빈 이샤크
5.2.3. 대장정
6. 특징과 의의
7. 대중 매체에서 등장
8. 역대 군주


1. 개요[편집]


1040년 발흥하여 1147년 멸망한 북아프리카베르베르인 왕조. 최초 발상지는 현대의 세네갈 지역이지만 거대한 영토를 지배하게 되면서 모로코가 실질적인 중심지가 되었다. 남북으로 3,000km에 이르는 넓은 판도를 자랑하였고, 타이파 시대를 종식시키며, 이베리아 반도 내 이슬람 세력의 패권을 재확립했지만 100여 년 만에 또 다른 베르베르인 왕조인 무와히드 왕조에게 멸망당했다.

아랍어로는 알-무라비뚠(Al-Murābiṭūn)이라고 하기 때문에 무라비트 왕조라고 하는 편이 적절하지만 대개 영어스페인어 표기를 따라서 알모라비드 왕조 혹은 알모라비데 왕조라고 부르는 경우가 많다. 모로코의 첫 베르베르계 통일 왕조로, 모로코의 어원이 되기도 한 왕성 도시 마라케쉬를 건설하여 수도로 삼은 것으로 유명하다.


2. 기원[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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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라비트 왕조의 핵심 세력은 현재 세네갈 지역에 살고 있던 베르베르계 부족인 람투나(Lamtuna)족이었다. 람투나 족은 대략 9세기경에 이슬람으로 개종했는데, 모로코의 첫 이슬람 왕조였던 이드리스 왕조가 해체된 이후 북서아프리카 지역에는 눈에 띄는 강자가 없었으므로 다른 베르베르계 부족들과 비슷한 고만고만한 세력을 가지고 있었다. 1040년경 구달라의 부족장인 야히야 이븐 이브라힘이 메카 순례길에 올랐다. 그는 돌아오는 길에 이프리키야에 있는 카이루안에 들렀는데, 그곳에서 페스 출신의 수니 말리키 학파의 법학자 겸 학자인 아부 임란 알 파시를 만났다. 지리드 왕조의 통치자 알 무이즈 이븐 바디스는 시아파 파티마 왕조와 결별하는 것을 공공연히 생각하고 있었고, 카이루안의 법학자들은 그가 그렇게 하도록 선동하고 있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야히아와 아부 임란은 서부의 신앙 상태에 관한 대화에 빠졌고, 야히아는 그가 사는 곳의 종교 교육이 부족하며, 이슬람법의 태만함에 대해 실망하게 되었다. 아부 임란의 권유로 야히야 이븐 이브라힘은 모로코 남부 수스 계곡에 있는 왁가그 이븐 잘루 알-람티 에게로 가서 백성들을 위한 말리키 학파 출신의 학자를 찾아 나섰다. 왁가그는 그에게 압달라 이븐 야신을 추천했다. 이븐 야신은 사람들에게 호의적인 반응을 얻었고, 그들은 엄격한 종교적 교조주의에 입각한 교단을 만들었으며, 수년에 걸친 포교와 세력 확장 끝에 강력한 규율을 가진 신정국가를 이뤄냈다. 야히야 이븐 이브라힘은 강력한 교단 조직 외에도 새로운 군대 체제를 만들었다. 그때까지 베르베르계 부족들의 전투방식은 대개 창과 방패를 들고 밀집하여 힘싸움을 벌이는 고대 그리스식 팔랑크스와 유사하였던 반면, 야히야의 새로운 군대는 마케도니아사리사를 연상시키는 긴 장창과 함께 투창을 도입하였으며, 측면 공격과 섬멸전을 위해 낙타병과 기병을 적극 활용하기 시작하였다.

3. 서북아프리카 정복[편집]


1053년부터 무라비트 왕조는 사하라 사막의 베르베르 지역과 사막 남쪽 지역으로 그들의 종교를 전파하기 시작했다. 여러 베르베르계 부족들을 이기고 난 후 그들은 재빨리 사하라 사막 무역로 전체를 장악하여 1054년 북쪽 끝의 시질마사, 1055년 남쪽 끝의 아우다호스트를 정복하였다. 람투나 부족의 족장인 야히야 이븐 우마르는 1057년 전투에서 전사했지만 종교 교사로서의 영향력이 무엇보다 컸던 압달라 이븐 야신은 형 아부 바크르 이븐 우마르를 추장으로 임명했다. 그의 휘하에 알모라비드족은 곧 사막 너머로 세력을 뻗치기 시작했고, 아틀라스 산맥의 부족들을 정복했다. 그 후 그들은 베르베르계 부족 연합인 바르가와타와 접촉하게 되었다. 바르가와타는 강력하게 저항하였고, 압달라 이븐 야신은 1059년 모로코 롬마니 인근 마을인 크리플라에서 그들과 전투를 벌이다가 전사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르가와타는 아부 바크르 이븐 우마르에게 완전히 정복되어 순니 이슬람교로 개종할 수밖에 없었다. 1061년 아부 바크르 이븐 우마르는 자신이 수립한 권력을 나누어 사촌 유수프 이븐 타슈핀에게 주고, 또한 그가 가장 좋아하는 아내 자이나브를 배속시켰다. 이븐 우마르는 무라비트 왕조의 근거지인 사막에서 일어난 반란을 진압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그가 다시 통치를 재개하기 위해 돌아왔을 때, 그는 사촌의 세력이 너무 강력해져서 대체될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1087년 11월, 아부 바크르는 모리타니아에서 싸우다가 화살에 맞아 전사했다. 그 동안 유수프 이븐 타슈핀은 현재 모로코, 서사하라, 모리타니아를 완전히 굴복시켰다. 1062년에 그는 마라케시를 건설하여 수도로 삼았고,1080년에는 틀렘센을 정복했다. 한편 남쪽에서는 1076년경 가나 제국을 공격했다. 무라비트 왕조는 가나 지배자들의 권위가 약화될 정도로 가나를 약화시키고 어마어마한 양의 조공을 받은 뒤 물러났다.

4. 전성기[편집]


1086년 유수프 이븐 타슈핀은 이베리아 반도 알-안달루스의 타이파[2]들의 요청을 받아 레온과 카스티아의 침탈로부터 그들의 영토를 방어했다. 그 해 이븐 타슈핀은 지브롤터 해협을 건너 알헤시라스(카디스)로 향했고, 사그라자스 전투에서 카스티아-아라곤 연합군을 격파했다. 그후 유수프는 타이파 세력들의 실태를 보고 '큰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그 "충격"의 정체는 4년 후 밝혀지는데, 유수프는 타이파 지도자들이 종교적으로 해이해졌으며, 사치와 방종에 빠졌다고 주장하며[3] 그 휘하의 교조적인 종교학자들의 지지를 명분삼아 1090년에 이베리아 반도로 돌아와 그라나다 (1090년), 세비야 & 알메리야 (1091년), 알리칸테 (1092년), 바다호스 (1094년) 등의 순서로 정복했다. 이 와중에 엘 시드가 발렌시아를 차지하였다. 이렇게 하여 1094년까지 유수프는 사라고사를 제외한 모든 타이파 세력을 병합하는데 성공하였다. 사라고사의 타이파 알 무타미드는 저항하였으나 나중에 정복되었다. 이후 무라비트 왕조는 콘세그라운드 전투에서도 승리하여 알 안달루스의 지배를 확고히 했다. 유수프는 1106년 죽었는데, 이때가 무라비트 왕조의 전성기였다. 수니파로써 압바스 왕조 칼리파의 종주권을 인정하였으나, 칼리파의 다른 칭호였던 아미르 알 무미닌, 즉 "신자들의 사령관"을 칭하며 권위를 세우기도 했다. 칼리파인 듯 칼리파 아닌 듯

5. 몰락[편집]


유수프 이븐 타슈핀 사후 무라비트 왕조에 가장 먼저 도전한 것은 이베리아 반도의 기독교 세력이었다. 1108년 타밈 알 유수프는 카스티야 왕국을 다시 한번 격파하였다. 무라비트 왕조는 1119년과 1121년에 다시금 이베리아 반도를 침공하였으나, 1119년 프랑스 왕국의 도움을 받은 아라곤이 사라고사를 점령하여 전세가 역전되었다. 1134년 파가 전투에서 무라비트 왕조는 승리를 거두었고, 아라곤알폰소 1세를 살해하기까지 하는 등 치열한 전투가 게속되었지만, 알리 이븐 유수프의 무라비트군이 1138년 레온-카스티야의 알폰소 7세포르투갈의 알폰소 1세에게 연달아 패배하며 이베리아 반도 내의 입지가 크게 위축되었다. 또한 1139년에 벌어진 우리크 전투에서도 패배하였다. 모로코의 아틀라스 산맥 근처에서 발흥한 무와히드 왕조가 세력을 확장하기 시작하면서 북아프리카의 입지도 크게 위험해지기 시작했으며, 결국 알리 이븐 유수프가 사망한 1143년 이후 무라비트 왕조의 영역은 빠르게 무와히드 왕조에게 정복당했다. 알리 이븐 유수프의 후계자들이 몇 년간 저항하긴 했지만 대세를 막지는 못했다. 특히 1145년 6월 이브라힘이 죽은 이후로 빠르게 붕괴하였다. 리스본은 1147년 포르투갈 왕국에게 정복되었다.

5.1. 안달루스의 반란과 멸망[편집]



무라비트 왕조의 아미르 알리 이븐 유수프는 아들들 중 아부 무함마드 시르를 후계자로 선정하고, 다른 아들들인 타슈핀과 이븐 가니야를 각각 세비야와 발렌시아의 총독으로 임명하여 알 안달루스를 맡겼다. 하지만 1143년 1월 27일 알리가 사망한 직후 시르는 살해되었고, 이에 타슈핀이 계승하여 마라케쉬로 향하였다. 따라서 알 안달루스 전체는 이븐 가니야에게 맡겨졌다. 그러던 1144년 여름, 알 안달루스 서남부에서 수피의 일파인 무리둔이 지도자 아불 카심 아흐마드 이븐 알 카시와 함께 봉기하였다. 이븐 알 문드히르가 호응하여 실베스를 장악하였고, 베자의 총독 시드라이 이븐 와지르가 이븐 알 카시에게 복속하였다. 그들은 몬시크 요새의 무라비트 주둔군을 학살하였고, 70여명의 특공대가 메르톨라를 장악하였다. (1144년 8월 12일) 이로써 이븐 알 카시의 메르톨라 토후국이 세워졌고, 알가르베 (현 포르투갈 남부) 일대는 반란의 불길에 휩쌓였다.

니에블라의 유수프 이븐 알 비트루지 역시 이븐 알 카시에 가담하여 세비야로 진격하였으나 이븐 가니야는 그를 격퇴하였고, 반란의 대열에서 이탈시켰다. 하지만 그러는 동안 코르도바에서 반란이 일어났고 1144년 말 겨우 진압하나 싶었더니 이번엔 말라가, 무르시아, 그라나다가 자립하였다. 1145년 1월, 코르도바에선 재차 카디 함딘 이븐 함마드가 아미르가 되어 독립하였다. 3월엔 발렌시아의 카디 마르완 이븐 압둘 아지즈가 아미르로 추대되었는데, 군대에게 줄 돈이 없자 반란군은 자신들의 지도자인 이븐 이야드를 추대하였다. 같은 달 무라비트 왕조의 아미르 타슈핀은 무와히드군에게 포위된 오랑에서 사망하였고, 카스티야 궁정에 망명 중이던 사라고사의 왕자 자파돌라 (사이프 앗 다울라)가 남하하여 일시적으로 코르도바를 점령했으나 민중에 의해 쫓겨났다. 이후 함딘이 복귀하였고, 자파돌라는 그라나다를 장악하였다.

이렇듯 반란 세력이 분열되자 이븐 가니야는 반격을 가하여 둘 모두를 패배시키고, 코르도바와 그라나다를 수복하였다. 이후 자파돌라는 알폰소 7세에게 도움을 청했는데 그 지원군과 사이가 틀어져 그들과 싸우다 친칠라 전투에서 전사하였다. (1146년 2월 5일) 이에 알폰소 7세가 남하하자 메르톨라의 이븐 알 카시가 무와히드 왕조에 복속하며 원군을 청하자 그쪽 역시 알헤시라스에 상륙하였다. (1146년 5월) 한편 발렌시아의 이븐 이야드는 알 무스탄시르에게 아미르 직을 양보했다. 하지만 그는 알바세테 전투에서 카스티야-아라곤 군대에 패해 전사하였고, 이에 이븐 이야드가 복위하였지만 무르시아의 아미르인 무함마드 이븐 마르다니쉬에게 패배하고 죽었다. 알 안달루스 동부는 무르시아 타이파의 주도로 통합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무와히드 군대와 카스티야 군대의 진격을 마주한 세비야의 이븐 가니야는 왕조의 적인 무와히드 대신 알폰소 7세에게 복속하였다.

이븐 가니야는 카스티야에게 우베다와 바에자를 할양하였고, 이에 알폰소 7세는 톨레도로 회군하였다. 하지만 같은 시기인 1147년 초 무와히드 군대가 세비야에 입성하였고 이븐 가니야는 항복하였다. 이로써 알 안달루스에서의 무라비트 왕조의 지배는 끝이 났고, 같은 해 말엽 마라케시가 함락되며 왕조 역시 멸망하였다. 하지만 무라비트 왕조가 알 안달루스에서 가장 마지막으로 점령한 발레아레스 제도에는 여전히 그 왕족들이 다스리고 있었다. 다만 1146년 그들은 멸망 직전의 무라비트 왕조로부터 독립을 선포했기에 부흥운동으로 치기 애매한 면이 있다. 그럼에도 다른 세력들이 이들을 무라비트로 칭하였고, 실제로도 그 왕실의 일원이었기에 후무라비트 왕조 혹은 무함마드 이븐 알리 (혹은 이븐 가니야)의 모친 이름을 따서 가니야 왕조로 칭하기도 한다.


5.2. 부흥 운동[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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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로코판 정씨 왕조 (대만)

한편 1126년 무라비트 왕조의 아미르 알리 이븐 유수프는 아들 무함마드에게 발레아레스 제도의 통치를 맡겼다. 무함마드[4]의 아들 이샤크는 카르모나의 왈리 직을 맡고 있었는데 무라비트의 패권이 무너지던 1145년, 마요르카로 돌아왔다. 그리곤 1155년 궁정 쿠데타를 일으켜 부친 무함마드와 형 압둘라를 죽이고, 정권을 장악하였다. 그의 치세에 발레아레스 제도는 무역과 해적질로 번영하였고 섬들은 엄청난 부와 포로들, 그리고 알 안달루스의 난민[5]들로 붐볐다. 이샤크는 본인이 직접 약탈에 동참하기도 했는데, 일례로 1178년 그는 프랑스 남부 프로방스의 툴롱을 점령하고, 마르세유 남작을 포함한 많은 포로들을 잡아왔다. 동시에 그는 이탈리아 해상 세력들과는 우호 관계를 유지하였다. 피사 공화국과는 세 차례 (1171, 1173, 1174년)에 걸쳐, 제노바 공화국과는 1181년, 그리고 루카 공화국과는 차남 알리의 치세인 1184년 6월 1일 통상 조약이 체결되었다.

제노바, 루카와의 조약을 통해 마요르카는 그들과 불가침, 그리고 표류자 보호 및 반환 등을 합의하였다. 이탈리아인들은 마디나 마유르카 (현재의 팔마)에 교회를 지을 수 있었다. 다만 전제 정치로 불만을 샀던 이샤크는 해군 제독 이븐 마이문이 무와히드 왕조측에 망명하는 등 왕권이 불안해지자 무와히드 칼리파 유수프 1세와 협상하였고 참모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약탈물의 일부를 그에게 보냈다. 한편 협상이 완료되기 전에 기독교도 포로들이 궁전을 장악하고 그를 죽였다. (1183년) 폭동은 진압되었고 이샤크의 여섯 아들인 무함마드, 알리, 탈하, 타슈핀, 압둘라, 야흐야 중 처음엔 무함마드가 계승하였다. 역시 왕권이 불안정했던 그는 무와히드 왕조에 복속하였다. 따라서 아불 하산 알리 이븐 레베르테르[6]가 이끄는 무와히드 함대가 진주하였는데 이듬해인 1184년 민중 봉기가 일어나 아불 하산이 사로잡히고 반무와히드 강경파인 알리가 아미르로 추대되었다.


5.2.1. 알리 이븐 이샤크[편집]


1184년 봄 유수프 1세가 포르투갈 원정 중 사망하자 알리는 무라비트 왕조의 복원을 꿈꾸며 동생 탈하에게 본국을 맡기고 나머지 동생들과 함께 32척의 함대를 이끌고 북아프리카로 출정, 베자이아를 점령하였다. (11월 12일) 베자이아에 야흐야와 압둘라를 남겨둔채 알리는 동맹으로 삼은 힐랄, 리야 부족과 함께 알제, 무자야, 밀리아나 등을 점령하였다. 이후 동쪽으로 향한 알리와 동맹군은 바니 함마드 요새를 함락하고, 콩스탕틴을 포위하였다. 이에 반격에 나선 유수프 1세의 후계자 야쿱은 1185년 초 알제를 점령하였고, 이에 야흐야와 압둘라는 베자이아를 포기하며 튀니지를 가로질러 제르바 섬에 새로운 거점을 마련하였다. 한편 알리 역시 콩스탕틴을 포기하고 남하, 현지 부족들을 포섭하여 토주르와 가프사를 점령하였다. 그곳에서 알리는 스스로 통치자임을 선언하고 압바스 칼리파의 이름으로 쿠트바 (금요 설교)를 낭송하게 하였다.

한편 알리와 주력군이 원정에 오른 틈에 감옥에서 탈출한 무함마드와 아불 하산은 민중을 선동, 반란을 일으켜 탈하를 축출하고 재집권하였다. (1185년) 그러자 무와히드 왕조측은 아불 압바스 알 시킬리를 마요르카 총독으로 파견하였다. 이에 권력을 빼앗긴 무함마드는 가족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아라곤의 알폰소 2세에 도움을 청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이로써 그는 민중의 지지를 잃어버렸고 동생 타슈핀이 정권을 장악하였다. 그동안 알리는 가프사에서 나와 트리폴리에서 오우즈 튀르크인으로 구성된 용병대를 이끄는 아르메니아인 카라쿠쉬[7]와 연대하였다. 그리고 동생 압둘라와 야흐야에게 본토를 회복하게 하였다. 트리폴리에서 출항한 형제는 무와히드 왕조와의 앙금이 남아있던 굴리에모 2세의 시칠리아에서 군대를 지원받은 후 알 마유르카 (마요르카)로 향하였다. 그곳에서 무와히드 왕조에 항거하던 나자흐가 이끄는 왕당파와 합세한 압둘라는 민심의 지지를 얻어 적군을 몰아내었다. (1187년)

이후 압둘라는 알리 대신 본국을 통치하였다. 그동안 알리는 1186년부터 카라쿠쉬와 힐랄, 술라임 등의 베두인 부족들과 무와히드 영토를 약탈하였고, 1187년 알 마디야와 튀니스를 공격하였다. 이때 마요르카에서 탈출한 아불 하산과 무함마드가 도달하였는데 전자는 처형되었고 후자는 용서를 빌은 후 동생 알리와 함께 반무와히드 전선에 동참하였다. 하지만 이내 무와히드 칼리파 야쿱의 군대가 다가오자 형제는 남쪽으로 철수했는데 6,000명의 무와히드 기병대가 추격해 왔다. 그리고 알 움므라 회전에서 형 무함마드는 전사하였다. 알리는 6월 24일 추격대를 격파하였는데, 이에 칼리파 야쿱이 직접 추격대를 지휘하였고 10월 14일 가베스 근처의 알 함마에서 알리를 패배시켰다. 이후 가프사와 토주르를 점령한 야쿱은 두 도시의 성벽을 허물었다. 알리와 카라쿠쉬는 페잔의 사막지대로 도주하였다.

한편 발레아레스 제도에선 야흐야가 형 타슈핀을 축출, 마요르카를 장악하고 아미르를 자처하였다. 본래 마요르카 수복 작전을 맡았던 압둘라는 메노르카로 만족하였다. 이러한 형제간의 내전을 틈타 알리의 공격에 대한 무와히드 왕조의 보복을 두려워 했던 일부 주민들의 요청으로 무와히드 함대가 재차 발레아레스 제도로 파견되었고 이비자 섬을 점령하였다. 여담으로 마요르카 원정 후 북아프리카 전선에 파견된 아불 하산은 알리 측에 포로로 잡혀 처형되었다. (1187년) 그러나 이듬해인 1188년 알리가 사망하자 야흐야는 마요르카를 압둘라에게 맡기곤 리비아로 돌아와 무와히드 왕조와의 전쟁을 이어받았다. 그리고 압둘라가 발레아레스 제도의 통치권을 얻기 위해 마요르카로 향하자 그틈에 무와히드 군대가 남겨진 메노르카 섬을 점령해버렸다. 이제 발레아레스 군도의 섬 3개 중 2개가 무와히드 왕조의 수중에 있었다.


5.2.2. 압둘라 & 야흐야 빈 이샤크[편집]


야흐야가 떠난 이후 마요르카의 압둘라는 이비자와 메노르카를 장악한 무와히드 왕조의 위협에 대비하기 위해 아라곤 왕국의 페드로 2세 및 제노바 공화국과의 친교를 유지하였다. 특히 후자의 해군력을 이용하기 위해 1188년 체결된 제노바와의 통상 조약에서 압둘라는 마요르카의 외국 상인들을 위한 교회와 상관 건립을 허가하였다. 이후 (아라곤과 경쟁하는) 프로방스 및 무와히드령 알 안달루스 해안을 습격하였다. 한편 콩스탕틴에 위치한 무와히드 군사령부는 알리의 죽음 직후 두 차례 원정군을 파견하였고 이에 야흐야는 내륙으로 철수, 그곳에서 카라쿠쉬와 함께 이프리키야의 무와히드 거점들을 공격하였다. 카라쿠쉬가 함께 정복한 트리폴리 및 가베스를 내놓지 않으려 하자 1195년 야흐야는 베두인 계열의 바누 술라임[8]과 연합하여 그 도시들을 공격하였다. 본국의 압둘라로부터 2척의 함대를 지원받은 야흐야는 트리폴리를 점령하였다.

이후 가베스를 취한 야흐야는 북쪽으로 진격하며 마사킨, 카이로완을 점령하였고 북쪽 해안으로 이동하여 베자안나바까지 정복하는 기염을 토하였다. 1195년의 알라르코스 전투 이후 레콘키스타를 좌절시킬 절호의 기회를 잡았던 무와히드 칼리파 야쿱 알 만수르가 무라비트 측에 대처하기 위해 기독교 국가들에 대한 적극적인 공세를 펴지 못하고 1197년 카스티야의 알폰소 8세와 평화 조약을 맺을 정도였다. 한편 야흐야가 엄청난 성과를 거두는 동안 마요르카의 압둘라는 1200년 겨울 무와히드군으로부터 이비자 섬 탈환을 시도했으나 실패하였다. 이듬해 그는 메노르카를 포위, 몇달간의 봉쇄로 주민들이 식인을 하기까지에 이른 후에야 섬을 수복하였다. 하지만 1203년, 1만 5천의 보병과 1천 2백의 기병, 7백의 궁병을 실은 무와히드 함대가 아부 알 울라와 아부 사이드 우스만 이븐 아비 하프스의 지휘 하에 발레아레스 제도에 진입였다.

압둘라의 함대는 격파되었고 무와히드 군대는 손쉽게 메노르카를 점령하였다. 이후 그들은 마요르카를 포위하였고 두 달간의 공성전 끝에 도시는 함락되었다. (1203년 9월) 압둘라는 마요르카가 함락된 후 처형되었다. 이로써 발레아레스 제도는 무와히드 왕조에게 정복되었다. 하지만 그 지배는 길지 않았다. 1208년 마요르카 총독으로 봉해진 아부 야흐야 무함마드 이븐 알리 이븐 아비 이므란은 이후 사실상 독립 군주가 되었고 1229년 아라곤 왕국의 하이메 1세가 마요르카를 정복하였다.[9] 한편 본국이라 할 수 있던 마요르카가 함락되었음에도 1203년 12월 14일, 야흐야는 튀니스를 점령하며 알제리 동부에서 리비아 서부에 이르는 제국을 건설하였다. [10] 무와히드 왕조의 행정력은 콩스탕틴 바깥으로 미치지 못하였다. 1204년 내륙의 카와리지파 베르베르 인들이 봉기하였는데 야흐야는 그들을 나푸사 산에서 패배시켰고 배상금을 받아낸 후 튀니스로 개선하였다.


5.2.3. 대장정[편집]


마침내 1204년 가을, 무와히드 칼리파 무함마드 앗 나시르는 대군을 소집하여 이프리키야로 향하였다. 이에 야흐야는 튀니스를 포기하고 제르바 섬으로 향하였는데, 10월 테드자 평원에서 무와히드 대군에게 따라잡혀 대패를 당하였다. 이후 튀니스와 알 마디야가 항복하였고, 앗 나시르는 마디야의 총독으로 하프스 왕조의 선조인 압둘 와히드 이븐 아비 하프스를 선임하였다. 이후 칼리파는 압둘 와히드에게 이프리키야 정복을 일임하고 회군하였는데 야흐야는 타헤르트 인근의 츨레프에서 그 대열을 습격하였으나 역시 패배하고 사막으로 도주하였다. 야흐야는 연이은 패배에도 불구하고 그곳에서 동지들을 모아 테베사 인근을 습격하였으나 압둘 와히드에게 패배하였다. 이에 좌절하지 않고 야흐야는 서남쪽으로 향하여 타필랄트를 거점으로 삼고 사하라 무역의 중심지인 시질마사 지역을 약탈하였다. 1년에 걸쳐 아틀라스 산맥을 따라 이루어진 야흐야의 대장정은 역사에 길이 남았다.

시질마사에서 부를 축적한 야흐야는 다시 동북쪽 틀렘센으로 향하여 그곳의 무와히드 왕조 총독을 패배시켰고 그곳을 거점으로 마그렙 중부 지방을 무자비하게 약탈하였다. 튀니지에서 쫓겨난 이후 그는 무와히드 왕조를 내륙으로부터 초토화시키려고 마음 먹은 듯 하다. 그러던 1207년 10월, 게라프 전투에서 야흐야가 이끈 친무라비트 연합 군대는 보급품 부족으로 패배하였다. 그후 야흐야는 마그렙을 떠나 다시 이프리키야의 내륙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1209년, 나푸사 산에서 압둘 와히드의 군대와 재차 격돌한 야흐야는 대패하였고 수년간 함께한 정예 병력을 대부분 상실하였다. 그럼에도 좌절하지 않은 야흐야는 현재 리비아 중남부에 속하는 와단으로 향하였고 자신에게 패한 후 그곳에 피신해 있던 카라쿠쉬를 포위하였다. 1212년 그가 항복하자 야흐야는 그를 처형한 후 그 세력을 흡수하였고 바누 무트루[11]가 지배하던 트리폴타니아를 약탈하였다.

한편 무와히드 당국은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해가던 압둘 와히드 대신 아불 알라를 이프리키야 총독으로 임명하였다. 어느 정도 세력을 회복한 야흐야는 사막을 가로질러 비스카라를 점령하고, 기습적으로 튀니스에 입성했는데 인근의 마드줄 전투에서 아불 알라에게 대패하였다. 이에 야흐야는 재차 와단으로 피신할 수밖에 없었다. (1223년) 불사신처럼 다시 베두인족들로 군대를 구성한 야흐야는 1224년 마그레브로 돌아와 베자이아와 델레스 등의 항구 도시들을 점령하고 미티자에서 마그라와 부족을 격파하였다. 그는 이어서 알제를 점령하고 1226년에는 틀렘센의 민중 봉기를 유도해내었다. 이렇듯 알제리 북부에서의 성공이 목전에 있을 때 튀니지의 무와히드 대군이 진격해왔고 야흐야는 다시 서쪽의 타필랄트 (시질마사)로 피신하였다. 그후 야흐야는 잘 방비된 이프리키야 쪽은 건드리지 않은채 10여 년간 마그레브 중부를 약탈하였다.

이미 1220년대에 이르면 무와히드 왕조는 내전에 카스티야 기사들을 데려와 쓸 정도로 약화되어 있었다. 1229년 칼리파 알 무민이 이븐 투마르트에 대한 존중을 금하고 많은 고관들을 제거하자 압둘 와히드의 아들 아부 자카리야 야흐야가 튀니스를 거점으로 독립해버렸다. (하프스 왕조) 그는 1230년 콩스탕틴과 베자이아를, 1234년엔 트리폴리를 병합하였다. 그리고 1236년엔 틀렘센에 자얀 왕조가 세워지며 무와히드 왕조는 모로코 일대로 축소되었다. 그리고 1237년, 야흐야는 츨레프 협곡의 밀리아나란 곳에서 현지인들과 싸우다 중상을 입고 사망하였다. 임종 전 야흐야는 자신의 세 딸들을 하프스 왕조 측에 맡겼다. 아부 자카리야는 그녀들에게 한 성채를 내어주었는데, 이후 카스르 알 바나트 (여인의 성채)라 불리게 되었고, 튀니지의 성문 중 밥 바나트의 유래가 되었다. 야흐야 이븐 이샤크의 죽음과 함께 무라비트 왕조는 무와히드 왕조의 쇠퇴와 함께 역사속으로 사라졌다.

6. 특징과 의의[편집]


무라비트 왕조가 이전의 마그리브(북아프리카)와 알 안달루스(이슬람 치하 이베리아)의 예전 왕조들과 대비되는 가장 큰 특징은 베르베르인이 주도 세력이자 통치 세력으로 자리잡았다는 점이다. 베르베르인들은 이슬람의 확산 과정에서 아랍인들에게 패배하고 그 휘하로 들어갔지만, 무라비트 왕조가 발흥하던 시대까지도 아랍인과 동화되지 않았으며 서로 감정도 험악한 편이었다. 특히 알 안달루스의 후우마이야 왕조의 아랍인들은 베르베르인들을 야만인취급하였으며[12], 이후 타이파 시대에도 아랍계 타이파와 베르베르계 타이파는 격렬히 대립하였다. 하지만 베르베르계 왕조인 무라비트 왕조가 알 안달루스와 마그리브를 아우르는 대제국을 이루면서 양자가 점차 베르베르인 주도로 동화되기 시작하였다. 물론 무라비트 왕조는 비교적 단명했지만, 다른 베르베르 세력인 무와히드 왕조, 그 다음에는 마린 왕조가 뒤를 이으면서 이 추세가 계속 이어졌다.

한편 상술하였다시피 무라비트 왕조의 주도세력은 상당히 교조적이고 광신적인 종교 집단이었는데, 이는 기독교 세력과 계속 접촉하면서 세속화가 되었고, 이교도 문화에 대해 관대한 편이었던 알 안달루스 지역의 문화와 대비되는 것이었다. 하지만 무라비트 왕조는 알 안달루스를 지배하면서 특별히 그런 문화를 억압하거나 제거하려 들지는 않았다. 이런 종교적 교조주의는 무와히드 왕조 시대에도 이어지지만, 알 안달루스 지역에 대한 마그리브의 영향력은 빠르게 약화되었기 때문에 큰 문화적 충돌이 발생하거나 하지는 않았다.


7. 대중 매체에서 등장[편집]


에이지 오브 엠파이어 2: 정복자에서 엘 시드 캠페인 중후반부에 등장하는 사라센(베르베르족) 흑위대는 바로 이 무라비트 왕조를 지칭하는 것이며, 여기서 등장하는 흑위대의 수장 유서프는 유수프 이븐 타쉬핀을 말하는 것이다. 이후 에이지 오브 엠파이어 2: 아프리칸 킹덤에서 베르베르족이 플레이 가능 문명으로 등장했다.

문명 5의 시나리오에서 등장하는 알모하드 왕조가 바로 무라비트 왕조이다.


8. 역대 군주[편집]



대수
이름
재위기간
비고
1대
압달라 이븐 야신
1040~1059
무라비트 왕조가 창건 되었다.
2대
야하 이븐 이브라힘
1048~1048

3대
이히야 이븐 우마르 알 람투니
1048~1056

4대
아부 바크르 이븐 우마르
1056~1087[13]

5대
유수프 이븐 타슈핀
1072~1106
모로코가 정복되었다.가나 제국을 공격하였다.알 안달루스가 정복되었다.마라케시가 건설되었다.
6대
알리 이븐 유수프
1106~1143
기독교 왕국들의 도전이 시작되었다.
7대
타슈핀 이븐 알리
1143~1145

8대
이브라힘 이븐 타슈핀
1145~1147

9대
이스하크 이븐 알리
1147~1147
알 안달루스에서 반란이 일어났다.무라비트 왕조가 멸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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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재미있게도 스페인어에서는 아랍어 정관사 al까지도 고유명사화하고 그 앞에 다시 정관사를 붙였다. 스페인어에서 변형된 아랍어 단어들은 이러한 경우가 매우 많은데, 이를테면 el alcázar(요새화된 성), el arroz (쌀) 같은 단어들이 있다. 각자 원형은 al-qaçr, ar-ruz.[2] 후우마이야 왕조가 멸망한 후 난립한 이슬람 국가들로, 대부분의 타이파들은 1,000명 이상의 병력을 동원하지 못할 정도로 약했다.[3] 영화 엘 시드에서도 시작부터 유수프가 타이파의 지도자들을 불러 모으고는 이를 크게 질타한다.[4] 1146년 무라비트 왕조로부터의 독립을 선포[5] 종교적으로 엄격한 무와히드 왕조의 지배를 피해 많은 기독교도와 유대인뿐만 아니라 무슬림들 역시 섞여 있었다[6] 기독교도로서 무라비트 군대를 이끌던 용병대장 레베르테르 (바르셀로나 남작의 아들)의 아들. 1147년 마라케시가 함락되자 이슬람으로 개종하고 무와히드 군대의 사령관이 되었다[7] 살라딘이 리비아 정복을 위해 파견한 조카 알 무자파르 타키 앗 딘의 맘루크였다가 해방 노예가 되어 자립[8] 파티마 조가 지리 왕조를 응징하기 위해 보냈던 부족 중 하나. 이후 이프리키야 정착[9] 4달간의 포위 끝에 아부 야흐야는 하이메와 협상하여 도시의 온전한 항복과 무슬림 지도자들의 북아프리카 송환을 대가로 1인당 닭4마리 값을 지불하기로 합의하였으나 약탈을 원했던 아라곤 병사들이 이를 거부함. 이에 아부 야흐야는 남은 함대로 최후의 공격을 펼쳤으나 실패하고 중상을 입음. (12월 31일) 이듬해인 1230년 2월 상처가 도져 사망. 남은 10대 아들은 1234년 세례를 받고 귀족 작위를 받아 고토르 가문의 시조가 됨[10] 이 영토에는 알제리의 무와히드 총독부인 콩스탕틴보다 남쪽에 위치한 비스크라테베사가 포함되어 있었다[11] 이집트 서북부의 항구 도시 메르사마트루 지명의 기원이다[12] 지금도 중동과 북아프리카의 아랍인은 베르베르인을 멸시하는 경향이 있다.[13] 1072년부터는 분할통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