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라타 슈이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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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blewidth=100%><tablebgcolor=#ffffff,#191919><bgcolor=#323232> 감독 || 21 요시이 마사토 ||
||<bgcolor=#323232> 1군 || 70 후쿠우라 카즈야(1군 수석코치 겸 타격코치)
71 무라타 슈이치(1군 타격코치)
73 카나자와 타케시(1군 베터리코치)
74 코사카 마코토(1군 내야수비 겸 주루코치)
80 오츠카 아키라(외야수비 겸 주루코치)
82 오노 신고(투수코치)
84 구로키 토모히로(투수코치)
88 가네코 마코토(1군 작전코치)
90 미츠야마 히데카즈(1•2군 총괄코치 겸 총괄코디네이터) ||
||<bgcolor=#323232> 2군 || 86 오오무라 사부로(감독)
75 호리 코이치(2군 타격코치)
77 구리하라 켄타(2군 타격코치)
78 오토나리 켄지(투수코치)
79 마츠나가 타카히로(육성 투수 코치 겸 2군 투수 코치)
81 이시미네 쇼타(육성 야수 코치 겸 2군 주루 코치)
83
모로즈미 켄지(외야수비 겸 주루코치)
85 오타니 토모히사(투수코치)
87 네모토 슌이치(내야수비 겸 주루코치)
89 후쿠자와 요이치(베터리코치)
97 키쿠치 다이스케(트레이닝코치)
98 네모토 준페이(트레이닝코치) ||
||<-2><bgcolor=#cccccc,#323232> 코칭스태프투수포수내야수외야수육성선수 ||
||<bgcolor=#ffffff,#1f2023><:><-3>틀:치바 롯데 마린즈로 돌아가기 ||
||<-2><height=30><bgcolor=#ffffff,#1f2023> 다른 NPB 팀 명단 보기 ||


무라타 슈이치의 수상 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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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센트럴 리그 로고.svg 2007~2008년 센트럴리그 최다 홈런
2006년
타이론 우즈
(주니치 드래곤즈)
47홈런

무라타 슈이치
(요코하마 베이스타즈)
36홈런(2007년)
46홈런(2008년)


2009년
토니 블랑코
(주니치 드래곤즈)
39홈런



치바 롯데 마린즈 No.71
무라타 슈이치
村田 修一 | Murata Shuichi

생년월일
1980년 12월 28일 (43세)
국적
[[일본|

일본
display: none; display: 일본"
행정구
]]

출신지
후쿠오카카스야 군 사사구리 정
포지션
내야수
투타
우투우타
체격
177cm 92kg
학력
히가시 후쿠오카 고교 - 니혼대학
프로입단
2002년 자유획득제도[1] (요코하마)
소속팀
요코하마 베이스타즈 (2003~2011)
요미우리 자이언츠 (2012~2017)
-
도치기 골든 브레이브스 (2018)
지도자
요미우리 자이언츠 2군 타격·내야수비코치 (2019)
요미우리 자이언츠 1군 타격코치 (2019)
요미우리 자이언츠 2군 야수종합코치 (2020)
요미우리 자이언츠 1군 야수종합코치 (2021)
요미우리 자이언츠 1군 타격·내야수비코치 (2022)
치바 롯데 마린즈 1군 타격코치 (2023~)

1. 개요
2. 선수 경력
2.3. 독립리그 시절, 그리고 은퇴
3. 지도자 경력
4. 연도별 성적
5. 은퇴경기 파괴자?
6. 여담



1. 개요[편집]


일본프로야구 선수.

10여 년간 요코하마 베이스타즈의 주력 타자로 활약하다가, 2011년 오프 시즌에 FA로 요미우리 자이언츠로 이적해서 2017 시즌까지 7시즌 동안 뛰었다.


2. 선수 경력[편집]



2.1. 요코하마 베이스타즈 시절[편집]


고교 시절에는 팀의 에이스 투수이자 고교 통산 30홈런을 기록한 강타자였다. 하지만 1998년 봄 고시엔 대회에서는 대회를 씹어먹던 초고교급 괴물 마쓰자카 다이스케에게 투수전 끝에 패배[2]했고, 본인 말로는 이 경험이 타자에 전념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니혼대학 경식야구부[3]를 졸업하고 2002년 자유획득제도로 요코하마 베이스타즈에 입단한다. 입단 첫 해인 2003년에는 본 포지션인 3루수가 아닌 2루수로 출발했는데, 3루 자리에는 팀에서 밀어주는 또다른 거포 유망주인 후루키 카츠아키[4]가 있었기 때문이다. 타율은 낮았지만 장타력을 앞세워 가능성을 보여줬고, 올스타 브레이크 이후에는 후루키를 외야로 밀어내고 주전 3루수 자리를 차지하게 된다. 첫 해 성적은 0.224 25홈런 56타점으로 후루키보다 홈런과 타율은 조금 앞섰고 타점은 상당히 앞섰다...[5]

하지만 이후에는 공수 양면에서 부침을 겪으며 발전이 없는 모습을 보이다가 2006년부터 본격적으로 각성, 이 해 0.266 34홈런 114타점의 호성적을 거두며 리그 정상급 3루수로 거듭나게 된다. 2007년에는 36개의 홈런을 쏘아올리며[6] 아론 가이엘, 타카하시 요시노부, 타이론 우즈(이상 35홈런)를 제치고 첫 센트럴리그 홈런왕에 올랐고, 2008년에는 구단 신기록인 46개의 홈런을 때려내며[7] 2년 연속 센트럴리그 홈런왕에 등극했다. 이 해에 홈런과 더불어 타율(0.323), 출루율(.397), 장타율(.667), OPS(1.062) 모두 커리어 하이를 찍으며 말 그대로 최고의 전성기를 보냈다.

2009년에는 부상에 신음하며 규정타석을 채우지 못하는 와중에도 팀 내 최다인 25개의 홈런을 기록했지만, 2010년과 2011년에는 풀타임을 소화하고도 각각 26홈런, 20홈런으로 기대에 못 미치는 성적을 냈다. 2011년 시즌이 끝난 후 무라타는 FA를 선언했는데, 이미 1년 전 우치카와 세이이치를 놓친 요코하마는 무라타만큼은 어떻게든 잔류시키려 애를 썼지만 결국 무라타는 요코하마에서 활동하며 5할 승률이 넘은 적도 없었으며 우승을 원한다는 말과 함께 2년 5억 엔에 요미우리 자이언츠와 FA 계약을 맺고 팀을 떠나게 된다.

사실 무라타는 전년도인 2010년에 FA 자격을 얻었으나 당시 본인의 성적이 그다지 좋지 못한 것도 있었고 아직 팀에 대한 애정이 남아있었기에 잔류를 택했으나 불과 1년 만에 마음을 바꿔 FA 선언으로 타 구단 이적을 택했는데, 2011년 시즌 최종전[8]이 끝난 직후 무라타와 팀의 계속되는 부진에 분노한 몇몇 요코하마 극성 팬들이 무라타의 차량을 습격하여 계란을 던지는 등 난동을 부렸던 사건으로 팀에 대한 정나미가 완전히 떨어진 것이 FA를 선언하는 쪽으로 마음을 바꾸게 된 원인으로 추정된다. 이후 요코하마는 무라타가 떠난 6년 후에야 2017년에야 5할 승률을 넘겼다.[9]


2.2. 요미우리 자이언츠 시절[편집]


30홈런 100타점을 노린다는 포부를 밝혔으나 이적 첫 해인 2012년 성적은 0.252 12홈런 58타점의 저조한 성적을 냈는데, 특히 12홈런은 데뷔 이후 가장 적은 숫자였다. 통일구 반발계수 논란 등으로 인해 극심한 투고타저 시즌이었다는 것을 감안해도 기대 이하의 성적. 대신 리그의 3루수 경쟁자들도 싸그리 망하는 바람에(...) 어부지리로 3루수 부문 베스트나인을 수상했고, 팀이 일본시리즈에서 우승하면서 이적 첫 해에 그토록 원하던 우승반지도 득템했다.

2013년에는 전년도 부진을 털어내고 0.316 25홈런 87타점의 좋은 성적을 거두며 모처럼 이름값을 했고, 2년 연속 베스트나인 수상과 더불어 생애 첫 골든글러브도 수상하게 된다. 그리고 시즌 종료 후 요미우리와 3년 10억 엔에 연장 계약을 맺었다.

2014년에는 통산 300홈런을 달성하기도 했지만 정규시즌 성적은 0.256 21홈런 68타점으로 기대 이하였고, 리그 최다인 22개의 병살타를 기록하는 등 중심타자로서 제몫을 하지 못했다. 2015년에도 부상 때문에 규정타석도 채우지 못하고 0.236 12홈런 39타점으로 사실상 커리어 로우를 찍었다.

2016년에는 0.302에 25홈런 81타점에 센트럴 리그 최다 2루타인 32개의 2루타를 기록하는 모습을 보이며 부활의 조짐을 보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2017년에는 용병 케이시 맥게히에게 3루 주전을 뺏기고 시작해, 맥기가 2루수로 자리를 옮기고 3루 주전으로 나오기 시작해 본모습을 보여주는 듯 했으나 다시 주춤하더니 0.262 14홈런 58타점이라는 초라한 성적을 남기고 말았다. 나중에는 조금 살아나는 모습을 보이긴 했지만 안타까운 모습을 보여준 것은 사실이다. 시즌 종료 후 전력외 통보를 받아 2017년을 끝으로 요미우리에서 활약을 마치게 되었는데, 나이를 먹었다고 해도 아직 타격에서의 기량이 죽은 것은 아닌지라 라쿠텐 등 우타자 보강을 원하는 팀들이 노리고 있다는 루머가 돌았...으나.

정작 비시즌을 까보니 낙동강 오리알 신세. 라쿠텐은 물론 작년에 바닥을 쳤던 야쿠르트나 거포가 부족한 치바 롯데[10], 작년 주전 3루수였던 코야노 에이이치가 WAR 마이너스를 찍은 오릭스 등 누구도 별다른 영입 의사가 없는 상태이다. 사실 팬들이 원하는 그림은 아라이 타카히로처럼 친정팀에 복귀해 대타자원으로 나와서 중요할 때 한방 날려주는 모습이지만 친정 요코하마 또한 3루수에 수위타자인 미야자키 토시로가 완전히 자리를 잡았고 젊고 유망한 선수들을 많이 긁어모은 터라 영입의사가 없음을 확실히 했다. 스프링캠프가 막바지에 접어든 상황에서도 영입 소식이 없었다.


2.3. 독립리그 시절, 그리고 은퇴[편집]


결국 3월 5일, 독립리그베이스볼 챌린지 리그에 속해있는 팀인 도치기 골든 브레이브스와 계약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일단 이곳에서 뛰면서 7월 말까지[11] NPB 복귀를 노릴 전망이다.

하지만 결국 신규선수 영입 기한인 7월 말까지 오퍼가 들어오지 않자 현역 은퇴를 선언했다. 9월 9일 은퇴식[12]을 끝으로 현역 선수 생활을 마감했다.


3. 지도자 경력[편집]


2019 시즌부터 요미우리의 2군 타격코치로 부임하며 본격적인 지도자 생활을 시작했다. 그러다 10월 16일 일본시리즈 개막 직전에 1군 코치였던 스즈키 타카히로가 일신상의 이유로 사퇴하면서 급히 1군 코치로 배치전환되었다. 그리고 2020년에는 모토키 다이스케 수석코치가 맹장염에 걸려 드르렁하자 2군감독인 아베 신노스케가 수석코치대행으로 옮기면서 2군 감독대행을 맡았고, 2021년부터 1군 야수종합코치로 영전한 데 이어 2022년부터는 내야수비 및 타격코치를 겸하면서 1군에서 타격만을 전담하게 된 김기태를 보좌하게 되었다.

2022 시즌 종료 후에 요미우리 코치직에서 퇴임하게 되었다. 고토 코지 코치와 함께 코치진 개편에 나선 두산의 코치로 부임한다는 썰이 돌았다. 하지만 이 썰은 진짜로 뜬금없어서 두산 베어스와 국내 일본야구 팬들의 반응은 형이 왜 거기서 나와?라는 반응과 알바로 모라타 아니냐 하고 있다(...). 그러나 결국 썰이었던 수비코치는 한화 1군수비코치인 조성환을 영입을 하게됨으로서 두산행썰은 사실상 썰이었음을 밝혀젔고 이후에 치바 롯데 1군 타격코치로 부임했다.


4. 연도별 성적[편집]


역대 성적
연도
소속팀
경기
타석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득점
타점
도루
볼넷
삼진
타율
출루율
장타율
OPS
WAR
2003
요코하마
104
373
74
11
0
25
48
56
3
26
111
.224
.303
.485
.788
1.1
2004
116
369
79
17
0
15
43
38
2
30
84
.242
.325
.433
.758
0.1
2005
136
539
120
32
2
24
60
82
1
44
124
.252
.326
.478
.804
1.2
2006
145
611
145
30
3
34
83
115
1
39
153
.266
.325
.519
.844
3.5
2007
144
615
151
30
1
36
94
101
1
65
117
.287
.376
.553
.929
4.6
2008
132
554
158
25
2
46
89
114
0
55
113
.323
.397
.665
1.062
7.5
2009
93
369
94
16
1
25
45
69
0
21
80
.274
.325
.545
.870
2.5
2010
144
617
145
30
0
26
75
88
0
45
124
.257
.314
.448
.762
0.7
2011
144
592
134
28
0
20
65
70
0
44
103
.253
.321
.423
.744
3.0
연도
소속팀
경기
타석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득점
타점
도루
볼넷
삼진
타율
출루율
장타율
OPS
WAR[13]
2012
요미우리
144
575
130
27
0
12
49
58
1
36
85
.252
.316
.374
.690
1.3
2013
144
595
164
26
0
25
76
87
1
50
74
.316
.385
.511
.896
4.8
2014
143
575
133
17
0
21
49
68
2
39
83
.256
.322
.410
.732
-0.3
2015
103
370
78
9
0
12
33
39
1
28
65
.236
.310
.373
.683
-0.3
2016
143
576
160
32
0
25
58
81
1
38
83
.302
.354
.505
.858
2.2
2017
118
424
100
19
0
14
41
58
0
34
63
.262
.331
.423
.754
0.2
NPB 통산
(15시즌)

1953
7754
1865
349
10
360
908
1123
14
594
1462
.269
.337
.479
.816
32.1


5. 은퇴경기 파괴자?[편집]


특히 무라타가 유명한 건 바로 명선수들의 은퇴경기를 망친 전력 때문(...). 2007년 히로시마 도요 카프의 전 에이스 사사오카 신지의 은퇴 시합 원포인트 등판에서 본인의 단독 홈런왕 타이틀을 확정짓는 홈런을 쳤고[14], 2010년 한신 타이거스의 주전 포수였던 야노 아키히로의 은퇴경기에서 후지카와 큐지에게 역전 홈런을 때려내며 은퇴경기의 당사자인 야노가 출전조차 하지 못하는 사태를 만들어냈다.[15]

보통 이런 경기에서는 보기 좋은 장면을 만들어주기 위해 약간은 설렁설렁 플레이하는 것이 일본프로야구의 불문율과 같은데, 본인은 마지막 순간까지도 진검승부를 함으로서 그들의 마지막길에 예우를 표하는 자세로 시합에 임한 것이라지만 유종의 미를 볼 것을 기대하고 경기를 보던 해당 선수들의 팬들에게는 그저 멘탈붕괴를...이건 뭐 강커태도 아니고

무라타는 은퇴 후 방송에서 사사오카, 야노 두 선수의 은퇴시합 당시 상황에 대해 다음과 같이 술회했다.

사사오카의 은퇴시합에 관해선 당시 개인 타이틀 수상 경력이 없었던 무라타는 어떻게 해서든 홈런왕을 타고 싶었지만 그 해 무라타와 타카하시 요시노부, 타이론 우즈 등 무려 4명이 치열하게 홈런왕 쟁탈전을 벌이는 상황이 되는 바람에 타이틀을 못 탈까봐 다소 걱정이 심했었는데 코치가 "너의 홈런왕 타이틀도 걸려있고, 사사오카가 진심으로 승부하고 싶다고 하니 마음껏 쳐라!" 라고 격려해서 마음을 다잡고 사사오카의 은퇴시합 때 전력으로 승부했고, 마침 사사오카가 "마지막 공은 직구" 라고 신문에 공언해 놨었기 때문에 직구를 노려쳐서 홈런으로 만든 덕에 무라타는 이 해 개인 첫 홈런왕 수상에 성공했다. 사사오카도 시합 후 "이것으로 미련 없이 그만둘 수 있다" 라고 말하기도.

야노의 은퇴시합에 관해선 당시 마지막으로 야노를 보고 싶은 팬들의 분위기도 있고, 그 전의 사건(...) 때문에 본인도 "야 이거 이번엔 치면 안되겠다" 라고 생각해서 적당히 삼진으로 물러나려고 했는데, 가볍게 휘두른 스윙이 당시 등판해 있던 후지카와 큐지의 강속구를 제대로 쳐버리는 바람에 그만 홈런이 되어버렸다고 한다. 결론은 후지카와의 잘못? 당시 이 경기를 중계하던 선 텔레비전의 캐스터가 "가지마! 가지마! 넘어가지마!" 라고 대놓고 한신 쪽 편파해설을 하다가 빈축을 샀는데, 무라타 본인도 치고 나서 "가지마! 위험해! 위험해!" 라고 생각했다고(...)

다만 이런 무시무시한 일화만 있는 건 아니고, 2007년 세이부 라이온즈,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즈에서 활약한 스즈키 켄의 은퇴시합 때 스즈키의 현역 마지막 타석에서 평범한 3루 파울플라이를 일부러 흘리며 계속 타격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모습을 보여줬다. 스즈키 켄은 결국 15구까지 가는 명승부 끝에 중전 안타를 만들어 내며 은퇴 경기에서 유종의 미를 거뒀다. 다만 저때 3루 플라이를 일부러 흘렸다가 너무 안일했다고 욕을 먹기도.. 그래서 흑화(?)했나


6. 여담[편집]


  • 동기였던 요시무라 유키와 함께 실황 파워풀 프로야구를 할 때, 요시무라가 게임 속 무라타의 절망스런 수비력에 빡친 나머지 옆에 장본인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좀 움직여라 이 돼지야(動けデブ, 우고케 데부)!"라는 폭언을 날렸다는 일화가 있다. 이 일화에서 유래한 으로, 일본 야구 커뮤니티에선 무라타를 우고 케데부(ウゴ·ケデブ)라는 정체불명의 외국인 선수로 취급하는 경우도 있다(...)

  • 2005년 시즌 도중 심한 부진으로 타순이 점점 내려가면서 교류전퍼시픽리그 원정경기 때는 9번 타자로 기용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는데, 당시 요코하마 감독이었던 우시지마 카즈히코[16]는 치바 롯데 원정 시합 전에 무라타를 불러 "9번 타자의 다음은 뭐냐?" 라는 질문을 했다. 이 때 무라타는 별 생각 없이 "1번 타자입니다"라고 대답했는데, 이 답변에 우시지마는 무라타에게 "멍청아! 그 다음은 없어! (アホか、次はないんじゃ!)"라고 일갈을 날렸다. 9번에서도 못치면[17] 그땐 주전 자리는 없다는 뜻. 이것을 계기로 그날 승리를 결정짓는 홈런을 치면서 무라타의 타격이 살아났다고 한다. 우시지마의 일갈이 얼마나 무서웠는지(?) 시합 종료 후 무라타는 생사를 걸고 쳤다고까지 할 정도였고, 이에 대한 우시지마의 답변은 "계속 9번에 둘까"였다고 한다(...)
    • 위 일화의 후일담으로, 다음 해에 앞서 나온 요시무라 유키가 무라타처럼 9번 타순에 나오게 되자 무라타가 요시무라에게 우시지마 감독과 같은 질문을 했고, 요시무라가 당시의 무라타와 똑같은 답변을 하자 무라타가 "쟤 바보에요. 9번 다음이 1번이래요ㅋㅋ"라고 우시지마한테 고자질을 했는데, 우시지마는 오히려 "아니, 쟨 발이 빨라서 1번도 가능해. 근데 넌 안돼"라고 무라타를 극딜했다고 한다(...) 너나 잘하세요

  • 조지마 겐지처럼 호탕함을 어필하는 규슈 사나이. 인터뷰 등에서도 스스로 "사나이 무라타"(男村田)라고 칭하면서 각오를 다질 때가 많다. 그리고 부진하면 "소녀 무라타"(乙女村田)라고 까인다[18]

  • 2008 베이징 올림픽 때는 충분히 잡을 수 있던 이종욱의 기습번트 타구를 낙구지점 파악 실패로 놓치면서 한국의 추가득점을 허용하는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1] 상위지명후보 선수가 희망팀을 선언, 우선 교섭을 할 수 있었던 제도. 2006년에 폐지되었다.[2] 1998년 여름 고시엔 대회에서 마쓰자카는 가고시마 실고의 스기우치 도시야와의 맞대결에서도 승리를 거뒀다.[3] 동기로 다테야마 쇼헤이 등이 있다.[4] 무라타와 동갑(80년생)이지만 이쪽은 고교 졸업 후 바로 프로에 입단했다. 일본프로야구의 대표적인 2군 본즈. 뛰어난 장타력을 갖고 있었지만 막장 컨택과 선구안, 수비의 종합선물세트도 가지고 있었기에 프로에서 자리잡지 못하였다. 2003년 기록한 유일한 풀타임 성적이 .208 22홈런 37타점이었으니 말 다했다.(...) 그것도 규정타석 미달. 나중엔 격투기 선수로 전향해 경기를 가진 적도 있는 기인.[5] 이 시기 요코하마는 내야를 중심으로 우치카와 세이이치, 요시무라 유키, 무라타, 후루키 등 양질의 타자 유망주들이 존재했다. 다만 이들은 공통적으로 수비능력이 완성되지 않았기에, 내야수비의 축이었던 베테랑 유격수 이시이 타쿠로만 죽어라 고생했다는 후문이 존재한다.(...)[6] 단독 홈런왕을 차지하게 된 데는 여담이 있다. 밑의 은퇴 시합 관련 항목을 볼 것.[7] 이렇게 4번 무라타가 활약했음에도 요코하마는 무라타의 홈런 수보다 단 2승이 많은 48승 94패 2무 승률 .338의 처참한 성적을 찍으며 폭망, 이후 5년 연속 센트럴리그 꼴찌라는 독보적인 약체팀의 행보를 걷는다. 저 승률은 같은 해 우타자 역대 최고 타율을 찍으며 리그 수위타자를 수상한 우치카와 세이이치타율(.378)보다 낮은 것이었다.[8] 이날 경기에서 요코하마는 상대팀 주니치 드래곤즈가 사상 첫 센트럴리그 2연패를 결정지으며 오치아이 히로미츠 감독을 헹가래시키는 광경을 바라봐야 했다.[9] 대신 이 해 요코하마는 클라이맥스 시리즈에서 한신, 히로시마를 연달아 꺾으며 센트럴리그 사상 초유의 일본시리즈 진출을 달성했고, 일본시리즈에선 최강 전력을 보유한 소프트뱅크에게 아쉽게 우승을 내줬지만 6차전까지 가는 분전을 보여주며 최고의 포스트시즌을 보냈다.[10] 이쪽은 나카무라 쇼고, 스즈키 다이치 등 수비력이 좋은 3루수가 가능한 자원이 많은데다가 워낙 홈구장이 홈런이 잘 안 나오다보니 구장의 불리함을 극복할 수 있는 리그 정상급 파워히터가 아닌 이상 오히려 발 빠르고 수비 좋은 똑딱이를 선호해서 그런 거 같다. 실제로 어중간한 거포 유망주들과 타자들이 롯데에서 많이 폭망한다. 거기다가 명구회 문제 때문에 강제로 출장 기회를 꾸준히 줘야 하는 베테랑 선수가 있다보니 베테랑이 딱히 필요한 것도 아니고...[11] NPB 트레이드, 신규선수(외국인선수 포함) 영입 기한은 7월 31일까지다.[12] 당시 토치기에 있었던 LG 트윈스 한선태 선수가 무라타의 은퇴식에 참석하였는데, 아이러니하게도 그 다음날 한선태는 KBO 리그 최초 비선수 출신 드래프트 지명자가 되었다. 누군가에게는 끝이 다른 누군가에겐 시작이 될 수 있음을 알려주는 케이스.[13] 2013년까지는 http://blog.naver.com/ever_17의 자료, 2014년부턴 http://1point02.jp/op/gnav/leaders/pl/pbs_dashboard.aspx?sn=2015&lg=0&tm=0&ps=0&sl=1&sr=0&pn=-1 이용[14] 사사오카는 다음날 진구구장에서 열린 드래프트 동기 후루타 아츠야의 은퇴경기인 야쿠르트 원정경기에서 후루타와의 맞대결을 위해 한 번 더 깜짝 등판하기도 했다. 뭐 그 날의 주인공은 사사오카가 아닌 후루타였지만 말이다.[15] 심지어 한신은 이 경기를 지는 바람에 역으로 당시 아슬아슬하게 1위를 달리던 주니치에게 매직넘버 1을 점타시켜 주는 사태가 발생했고, 끝내 다음날 경기마저 패하며 주니치에게 우승을 내주고 말았다(...)[16] 주니치 드래곤즈, 롯데 오리온즈에서 활약한 투수 출신.[17] 보통 센트럴리그에서는 투수가, 지명타자제가 있는 퍼시픽리그에선 발이 빠른 대신 타격 성적이 나쁜 리드오프 등 타격 실력이 가장 낮은 타자가 들어선다. 즉 9번에 나선다는 건 팀내 주전들 중 가장 타격이 별로라는 것.[18] 男은 오토코, 乙女는 오토메라 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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