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목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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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행방
3. 내용



1. 개요[편집]


武穆遺書.

김용이 지은 소설 <사조영웅전>, <신조협려>, <의천도룡기>에 등장하는 가공의 비급.

작중 설정에 따르면 남송의 명장 악비가 자기가 써온 시와 서찰, 상소, 죽으면서 유서로 남긴 병서를 묶은 서적이다. 악비는 후인이 이 책을 보고 금나라를 깨부수길 기대하며 책 이름을 '금나라를 부수는 방법'이란 뜻인 파금요결(破金要訣)이라고 지었지만, 작중에서는 다들 무목유서라고 부른다.

여기서 무목(武穆)이란 1178년 송효종이 악비에게 내린 시호이다.[1] 그래서 무목유서란 '악비가 남긴 책'이라는 뜻으로 부르는 존칭이다.


2. 행방[편집]


악비는 감옥에서 죽으면서 무목유서를 남겼고, 황궁의 폭포 뒤에 있는 밀실에 숨겨두었다.

나중에 철장방의 13대 방주가 된 상관검남(上官劍南)은 본래 악비와 함께 싸우던 장군인 한세충(韓世忠)의 수하 장수로 무목유서의 소문을 듣고 황궁에 들어가 그 책을 훔쳐오게 된다.

그는 은거하고 있던 한세충에게 무목유서를 가져갔으며, 한세충은 악비의 억울한 죽음과 피지 못한 웅지를 한탄하며 그가 가지고 있던 시와 서찰, 상소를 모아 한 권의 책으로 엮어서 상관검남에게 주었다.

또한 상관검남과 한세충은 자신들이 원래 장소에서 무목유서를 옮겨왔기 때문에, 혹시 악비가 자신의 뜻을 남기려던 사람이 찾지 못하게 될까 두려워, 철장방의 본거지인 철장산의 모습을 그리고 '무목유서는 철장산 중지봉 둘째마디에 있다'는 글을 써서 그 두루마리를 본래 무목유서가 있던 폭포 뒤의 밀실에 가져다 놓았다.

상관검남은 무목유서를 읽어보았지만 그 이치를 이해하지 못했다. 얼마 되지 않아 그는 무거운 병에 걸렸는데, 그는 자기 다음으로 방주가 될 구천인이 무공은 뛰어나고 재주가 많지만 병법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없어 무목유서가 쓸모가 없을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두루마리에 써놓은 대로, 임종 시에 철장방의 금지구역인 철장산 중지봉의 동굴로 가지고 들어갔다.

금나라의 조왕 완안열은 나중에 악비가 남긴 시에서 암호를 해독하여 무목유서를 빼앗기 위해 고수들을 데리고 송나라 황궁에 잠입하게 된다.

하지만 그로부터 10여년 전에 이미 황약사의 제자인 곡영풍이 황궁에서 보물을 훔치다가 무목유서의 행방이 적힌 두루마리도 가져와버렸기 때문에 완안열은 빈 석곽만 찾을수 있었다. 곽정황용은 곡영풍의 주막에 있던 밀실에서 두루마리를 얻었으며 철장산의 금지구역에 들어가서 무목유서를 얻게 되었던 것이다.

나중에 곽정은 몽골에서 호라즘 왕국 공략전에 종군하면서, 황용의 도움으로 이 책을 익히게 된다.

<의천도룡기>에서 곽정은 자신이 익힌 몽골군의 전략전술까지 더하고, 황용이 추려낸 요점을 더해서 병법서를 만들어 구음진경과 함께 도화도에 보관하고, 의천검도룡도에 그 위치를 표시했다.

100여 년 뒤, 주지약구음진경과 함께 얻기는 했는데, 주지약에게는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물건이라 빛을 발하지 못하다가 장무기가 손에 넣어서 소림사를 격퇴한 몽골군을 물리치는 데 큰 도움을 주었다. 그리고 장무기는 무목유서의 병법은 자신보다는 몽골군과 싸우는 장군에게 더 필요하다고 생각하여, 소림사를 구원하러 왔던 서달에게 무목유서를 주었다.


3. 내용[편집]


악비의 군사적 역량이 기록된 저술이라 내용 자체가 일반인이 이해하기 쉽지 않다. 하물며 사조영웅전 시대에 손에 넣은 주인이 다름아닌 까막눈 곽정(...). 그 때문에 곽정도 처음 익힐 당시 적지 않게 고생했지만, 황용이 알음알음 도와준 덕분에 어떻게든 병법을 터득했다. 그 덕분에 곽정의 병법이 일취월장해서 칭기즈 칸도 '너는 다른 부분은 맹한데 왜 병법은 그렇게 도통하냐.' 하고 감탄할 정도(...).

군사전략, 공격법, 방어법, 군사 훈련법, 포진법, 야전법 등을 자세히 설명했다. 특히 진법에는 제갈량의 팔진법을 바탕으로 악비가 개량한 천하(天夏), 지재(地載), 풍양(風揚), 운수(云垂), 용비(龍飛), 호익(虎翼), 조상(鳥翔), 사반(蛇蟠) 등 여덟 가지 진법을 포함했다. <사조영웅전>에서 곽정은 이 진법대로 휘하 몽골군을 훈련시켰는데, 병사들은 이게 웬 삽질이냐고 불평했지만 곽정은 이 진법들을 응용해서 칭기즈 칸의 왕자들이 서로 군대를 내어 싸우려는 것을 삽시간에 제압하는 공을 세웠다.

"우두산에서 포위당하여 곤경에 처하다."라는 대목에는 악비가 우두산(牛頭山)에서 금나라 군대에게 포위되어 곤경에 처했으나, 탈출에 성공하고 반대로 매복전을 펼쳐 금나라 대군을 역습하여 패세를 만회한 전투사례에 대해서 그때 사용한 전술방략이 상세하게 기록되었다. <의천도룡기>에서는 장무기소림사에서 몽골군에 포위되어 있을 때 바로 이 부분을 보고 크게 감탄하여, 이 때 악무목의 전술을 응용하여 소림사에 모여 있던 군웅들을 지휘하여 몽골군에 큰 타격을 주었다. 단 몽골군이 정예 중의 정예이고 장무기도 군사 지휘 경험이 없어서 망할 뻔했다가 명교 지원군의 합류로 가까스로 이긴 것에 가깝긴 하다(...). 그래도 절망적인 상황에서 몽골군을 몰아붙이며 기회를 만든 것만으로도 무목유서의 신통함을 평가절하할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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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225년 송이종악비의 시호를 충무(忠武)라고 바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