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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 Muscat
아랍어: مسقط Masqaṭ[2]
무스카트 (오만)




1. 개요
2. 상세
3. 역사
3.1. 포르투갈의 지배 (1507 ~ 1650년)
3.1.1. 오스만-포르투갈 전쟁
3.1.2. 야루바-포르투갈 전쟁
3.2.1. 알 부 사이드 왕조
3.3. 근현대 오만
4. 교통
4.1. 버스
4.2. 철도
4.3. 항공
5. 갤러리
6. 미디어에서 등장




1. 개요[편집]


오만수도이자 항구 도시로 영어로는 머스캣이라고도 한다. 위치는 북위 23° 36′, 동경 58° 35′이다. 무스카트 주에 속하며, 무스카트 주의 주도는 시브[3]이다. 인구2010년 당시 734,697명. 면적은 368㎢이고, 수도권은 3,500㎢으로 서울의 6배이며 전체 인구의 약 1/3인 172만명이 거주한다. 아랍어가 공용어다.

2. 상세[편집]


아랍계 오만 인[3] 이외에 아프리카계 오만인[4], 인도인, 파키스탄인, 방글라데시인도 다수 거주하기 때문에 스와힐리어, 영어, 힌디어말라얄람어 벵갈어도 사용된다. 이는 옛날부터 무스카트가 걸프와 인도양을 잇는 국제적인 무역항이었던 영향이다.

이곳은 다른 아랍 지역과는 다르게 주민의 75%가 이슬람교의 종파인 이바디파를 믿는다. 이바디파는 비교적 다른 종교에 대해 관용적이기 때문에[5] 힌두교와 기독교 신자도 다수이며 이들을 위한 교회와 힌두교사원도 있다. 구시가지에는 술탄[6] 궁전과 근대화 이전의 건물들, 박물관, 포르투갈 지배 당시의 건물들이 많다. 신시가지에는 오페라하우스(술탄의 취미가 클래식 음악감상이라고[7])를 비롯한 문화시설과 대 모스크(한때 세계 최대의 모스크), 정부청사, 각국 대사관, 비즈니스 건물들이 있다. 단 고도제한이 심해 이웃 사우디아라비아의 리야드나 아랍에미리트의 아부다비 같이 마천루에 해당하는 건물은 없다. 옆나라 아랍에미리트두바이에서 멀지 않기 때문에 두바이 관광객들이 육상 국경을 넘어 여기까지 오기도 한다.

6월에는 평균 온도가 30.6도이고, 7월 최대 온도는 49.2도이다. 1월 최저 온도도 11.5도로 한국에서 가장 더운 서귀포시의 3월 평균온도인 10.6도 보다도 높다. 겨울(12월-2월)날씨는 온화하고 지내기 좋다는 말이나 가끔씩 집중호우가 내려 큰 피해를 주기도 한다. 여름(3월-11월)에는 두바이처럼 바닷가라는 특성상 사막기후임에도 습도가 꽤 된다. 즉 그늘에 들어가면 버틸 수 있는 사막기후가 아니라 여름에는 동남아에 가까운 날씨이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인정사정없는 땡볕에 40도가 넘는 기온, 습도는 80 퍼센트 이상인데다 비는 오지 않고 먼지만 많다. 이 때문인지는 몰라도 오만은 서늘한 고원지대가 있는 옆동네 예멘보다 인구가 훨씬 적다. 무스카트 국제공항은 무스카트 옆의 대도시 시브에 있다.

3. 역사[편집]


파일:Muscat-Old-Town.jpg
구도심의 전경. 항구의 쌍둥이 성채인 알 미라니 & 알 잘랄리 요새가 보인다

무스카트는 아랍어로 '닻을 내리는 곳' 혹은 고대 페르시아어로 '향이 강한'이란 뜻으로 풀이된다. 무스카트의 신도심과 구도심 사이에 위치한 라스 알 하므라에선 기원전 6천년대의 어부들의 묘지가 발견되었다. 도시 남쪽에선 하라파 양식의 도자기 파편이 발견되어, 인더스 문명과의 교역상을 증언하고 있다.7백미터의 해안을 지닌 옛 항구는 바다 쪽은 바위 섬들로, 육지 방면은 험준한 바위 산맥으로 둘러진 덕에 폭풍이나 외세의 침공으로부터 안전한 천연항이다. 그러한 지형 조건은 기원전 1세기 프톨레마이오스 지도에 크립투스 포르투스, 즉 숨겨진 항구로 묘사되었다. 혹은 아라비아 부분의 다른 지명인 모스카 포르투스가 무스카트를 지칭하는 것이라고도 한다. 도시는 3세기 사산 제국에게 점령되었고, 이후 4세기에 잠깐 예멘의 힘야르 왕국의 세력권에 든 것을 제외하면 이란의 지배를 받았다. 그러던 7세기 오만은 다른 아라비아 반도와 함께 이슬람화되었다.

현지 아즈드 우만 아랍인들은 바다 건너 파르스를 침공하는 등 이슬람 정복의 대열에 참가하였다. 고대부터 인도와 교역한 덕에 인도양에 익숙하던 그들은 이란을 넘어 현재 파키스탄인 마크란과 신드 정복도 주도하였다. 8세기 중반에 오만에는 마그레브를 제외한 이슬람권의 첫 지역 왕조인 이바디 이맘국이 세워졌다. 이는 분산되어 있던 오만 부족들을 통합하는 첫 시도였으나, 9세기 말엽 내분이 발생한 틈에 압바스 조의 바레인 총독 무함마드 이븐 누르가 오만을 정복하였다. (893년) 이후 그는 관개 시설을 파괴하는 등 오만을 피폐하게 만들었고, 930년대에는 카르마트의 침공을 받는 등 침체기는 지속되었다. 11세기가 되어서야 현지 아즈드 계열의 얌하드 부족이 집권한 후 오만은 안정을 되찾았다. 무스카트 등의 해안 도시들은 인도와의 무역으로 번성하였는데, 이로써 내륙의 동족들과 괴리감이 생기기 시작하였다. 이는 후에 무스카트 술탄국과 오만 이맘국 간의 분리에서 표면화된다.[8]

3.1. 포르투갈의 지배 (1507 ~ 1650년)[편집]


무스카트는 크고 번성한 마을이다. 양옆이 모두 높은 산으로 둘러싸여 있으며 정면은 물가와 가깝다. 시내에는 리스본의 광장만큼 큰 평지가 있으며, 염전으로 덮여 있다. 또한 그곳에는 우물의 수차를 통해 물이 공급되는 과수원, 정원, 대추나무들이 있다. 그 항구는 작고, 말굽처럼 생겼는데 모든 바람으로부터 안전하다.

아폰수 드 알부케르크, 1507년 무스카트 함락 후


15세기 초엽 무스카트는 선박들이 식수 공급을 위해 들르던 작은 항구였는데, 1500년 무렵까지 중요한 교역항으로 성장하였다. 당시 오만의 내륙은 이맘과 나흐바니 왕조가, 해안은 바다 건너 이란의 호르무즈 왕국이 지배하고 있었다. 한편 같은 시기 대항해시대를 맞은 포르투갈 인들은 1497년 바스코 다 가마의 항해 이후 인도양 무역의 독점을 위해 기존 이슬람 상인들과의 경쟁에 나섰다. 그들은 홍해걸프를 장악함으로써 아랍 상인들의 아라비아 만 진출 자체를 억제하고자 하였고, 이를 위해 1507년 4월 아라비아 반도 앞의 소코트라 섬에 기지를 세웠다. 8월 10일, 제독 아폰수 데 알부케르크 휘하 6척의 함대가 소코트라에서 발진하여 걸프 무역의 중심인 호르무즈 점령을 위해 북상하였다. 무슬림 선박을 보이는대로 격파하고 마을들을 약탈하며 항해하던 포르투갈 선단은 8월 22일 칼하트[9]를 지나, 무스카트 남쪽 80km 지점 쿠라야트에 이르러 처음으로 강력한 저항에 직면하였다.

쿠라야트는 결국 점령되었고, 포르투갈 인들은 완강히 저항한 대가로 포로들의 코와 귀를 자르고 주민들을 남녀노소 모두 학살한 후 시가지를 불태워버리는 잔인함을 보였다. 이후 포르투갈 함대는 무스카트 앞에 모습을 드러내었다. 당시 무스카트는 호르무즈 국왕의 전 환관이 통치하고 있었는데, 그는 쿠라야트와 같은 운명을 피하기 위해 아폰수에게 무조건 항복하였다. 하지만 도시의 수비대는 원군이 당도함과 함께 항복을 번복하고 저항에 나섰다. 격렬한 전투 끝에 무스카트는 점령당하였다. 대부분의 주민이 학살되었고 도시는 약탈당한 후 불태워졌다. 그 효과는 금방 드러났다. 잿더미로 변한 무스카트를 떠나 계속 항해하는 포르투갈 함대에 대해 오만 북부의 소하르 총독은 그들이 나타난 즉시 곧바로 복속하고 연공 납부를 약속하였다. 이후 아폰수의 함대는 당초 목적대로 호르무즈로 향하여 전투 끝에 도시를 장악하였으나 내분으로 철수하였다.[10]

1509년 디우 해전의 승리로 포르투갈의 인도양 패권은 공고해졌다. 무스카트는 포르투갈의 여러 거점 중 하나가 되었고, 1512년 지오구 지 베자가 연공을 거두러 방문하기도 하였다. 한편 1510년 고아, 1511년 믈라카를 점령한 아폰수는 1515년 재차 호르무즈 원정에 나섰고, 도중 무스카트를 경유하였다. 마침내 호르무즈를 속국화한 아폰수는 이듬해 인도로 돌아가던 중 사망한다. 그후 1520년 지오구 로페스 휘하 23척의 포르투갈 함대가 홍해 원정을 마치고 돌아오며 무스카트에 들르기도 하였다. 1521년 11월, 포르투갈의 호르무즈 지배에 대항한 현지 반란 시에 무스카트는 걸프에서 유일하게 포르투갈 인들이 공격당하지 않은 항구였다. 이후 1527년 장기 지배를 염두에 두게 된 포르투갈은 도시에 병영, 창고, 예배당 건설을 시작해 4년 후 완성하며 장기적인 지배에 나섰다. 이로써 무스카트는 호르무즈, 바레인과 함께 포르투갈의 걸프 경영에 있어 핵심 도시 중 하나로 부상하였다.

3.1.1. 오스만-포르투갈 전쟁[편집]


파일:오만 무스카트.png
파일:무스카트 해전.png
포르투갈 시대의 무스카트 삽화
1554년 오스만-포르투갈 해전

포르투갈의 인도양 장악을 아니꼽게 여기던 오스만 제국은 1538년 디우 공방전과 아덴 & 바스라 정복을 시작으로 패권 경쟁에 나섰다. 아라비아 만의 통제권을 얻기 위해 오스만 해군은 종종 무스카트를 공격하였다. 1546년 4척의 오스만 갤리선이 무스카트에 입항하여 도시를 폭격했으나 상륙하진 않고 귀환하였다. 이에 경각심을 느낀 포르투갈 당국은 본국에서 기술자를 불러와 무스카트 항구 서쪽에 포르치 두 알미란테 (알 미라니 성채)를 건설하였고, 이는 1550년 완공되어 총독의 거처가 되었다.[11] 오스만 술탄 쉴레이만 1세의 명으로 1552년 4월 대제독 피리 레이스는 24척의 갤리선과 4척의 보급선을 이끌고 걸프에서 포르투갈 세력을 일소하기 위해 수에즈를 출항하였다. 그해 7월 약 15척의 선발대가 무스카트에 상륙하여 알 미라니 성채를 포위하였다. 오스만 포병대가 능선에 배치되어 포격을 가하는 등 18일의 포위 끝에 식수와 양곡이 바닥난 포르투갈 수비대는 협상을 통해 항복하였다.

수비대장 주앙 지 리즈보아 휘하 60명의 수비대를 포함한 128명의 포르투갈 인들은 포로가 되었고, 선발대와 합류한 피리 레이스는 요새를 파괴한 후 여정을 이어갔다. 다만 당초 목적이던 호르무즈 점령에는 실패하였고, 이듬해 오스만 함대는 무스카트 부근 알 파흘[12]에서 포르투갈 함대에 패배하였다. 이로써 1554년 4월 무스카트는 포르투갈 령으로 회복되었다.[13] 같은 해 15척의[14] 오스만 함대는 세이디 알리 레이스의 지휘 하에 걸프에서 수에즈로의 귀환 여정에 나서 8월 초엽 오만 만에 다다랐다. 걸프에서의 수월한 여정과 달리 세이디 알리 레이스는 두 차례에 걸쳐 포르투갈 함대와 교전을 벌여야 했다. 그 두번째는 무스카트 총독의 아들 쿠야가 이끄는 34척의 함대와의 전투였고, 각각 5척을 잃은 무승부로 귀결되었다.[15]

일련의 실패 후 호르무즈 대신 바레인을 우선 목표로 삼은 오스만 조는 1559년 최근에 정복된 알 하사[16]에서 진군하였다. 구원 요청을 접수한 호르무즈 총독 동 안토니우는 휘하 병력을 급파한 후, 무스카트 총독 알바루 다 실베이라에게 직접 구원에 나서게 하였다. 알바루는 바레인 섬을 우회해 서쪽에서 기습하여 오스만 군의 격퇴에 크게 기여하였다. 하지만 알바루 자신도 원정 중 전사하였다. 이후 20여년의 평화 시기 후 1581년 미르 알리 베이[17]가 이끄는 3척의 오스만 함대가 무스카트를 기습 점령, 주민들을 소개시켰다. 이듬해 도시를 수복한 포르투갈 당국은 방어력 보강을 위해 1586년 항구 서쪽의 알 미라니 성채 건너편에 새로운 성채의 건설에 나섰고, 이를 위해 1587년 제독 벨초르 칼라차가 파견되었다. 바위산의 표면을 평탄하게 다진 후 그 돌로 축성하여 세워진 포르치 지 상 주앙 (알 자랄리 성채)[18]은 1588년 완공되자 알 미라니 성채와 대칭을 이루며 경외를 자아내었다.

3.1.2. 야루바-포르투갈 전쟁[편집]


파일:오만 잘랄리 성채.jpg
자랄리 성채. 최근까지도 요새는 항구 쪽에서만, 그것도 가파른 돌계단을 통해 접근 가능했다

17세기 들어 포르투갈은 이베리아 연합기의 소외로 쇠퇴하였고, 신흥 해상 세력인 네덜란드와 잉글랜드의 도전에 직면하였다. 1622년 잉글랜드 함대는 사파비 조를 도와 포르투갈의 걸프 경영의 중심이던 호르무즈를 점령하였다. 이에 포르투갈은 무스카트를 새로운 총독부로 삼고, 오만 해안을 따라 요새들을 건설하여 걸프에서의 영향력을 유지하려 하였다. 무스카트에는, 이미 쌍둥이 성채들로 강력한 방어력을 자랑하던 그 항구에 더하여, 1624-5년 배후의 시가지 자체에도 탑을 갖춘 성벽이 둘러졌다. 그외에 도시 서쪽에 무트라 성채, 배후 산지에 감시탑이 세워졌다. 다만 이렇게 확장된 방어 시설을 유지하기 위해 포르투갈은 큰 규모의 육/해군 병력을 배치해야 했는데, 그러한 지출에 비해 무스카트는 주 교역 상대인 페르시아가 1630년까지 포르투갈 보이콧을 유지한 결과 본국에 그에 상응할 만한 수익을 안겨주지 못하였다. 걸프 무역 자체도 이미 네덜란드와 잉글랜드가 주도권을 지니게 된 상태에서 무스카트는 포르투갈에 있어 재정상 부담으로 작용하였다.

한편 그 무렵 1624년 오만인들의 이맘으로 선출된 나시르 빈 무르쉬드 알 야루비는 포르투갈 축출이라는 대의 하에 이합집산을 반복하던 부족들을 통합하였다. 재정 위기와 네덜란드, 영국 및 야루바 군대의 압박까지 더해진 결과 1633-34년 포르투갈 당국은 오만 해안도 대부분 포기하고 무스카트 방어에 남은 영향력을 집중하였다. 무스카트를 제외하고 오만의 포르투갈 세력을 일소한 이맘 나시르는 1640년의 시도에 이어 1648년 도시에 대한 단계적인 공격에 나섰다. 8월 16일 야루바 군대는 무스카트 산지의 감시탑들을 점령, 파괴하며 도시의 방어력을 악화시켰다. 1649년, 최후의 공세를 준비하던 나시르가 사망하자 그의 사촌 술탄 빈 사이드가 과업을 계승하였다. 1649년 12월 소수의 야루바 정예병이 밤을 틈탄 기습으로 무스카트 도시를 점령하였다. 6백여 포르투갈 거주민들은 해상으로 도주하였고, 나머지는 알 미라니 성채로 도주했다가 이듬해 1월 23일[19] 항복하였다. 이로써 한세기 반에 걸친 포르투갈의 무스카트 지배가 막을 내렸고, 도시는 포르투갈을 제물 삼아 인도양 제국을 구축하게 되는 오만 제국의 중심이 되었다.

3.2. 오만 제국[편집]


파일:오만 무스카트 9.jpg
오만 제국기에 증축된 미라니 / 자랄리 성채

무스카트 정복 이후 그를 중심으로 활발히 인도양 패권 장악에 나선 야루바 왕조는 18세기 초까지 스와힐리 해안에서 포르투갈을 축출하고 해상 제국을 세웠다. 한편 포르투갈의 경쟁자 네덜란드와는 우호를 유지하여, 1670년 무스카트에는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의 공장이 세워졌다. 하지만 해안 지역에 집중된 번영은 내륙과의 괴리감 및 후자의 소외감으로 이어졌고, 1718년 이맘 술탄 빈 사이프 2세의 죽음 이후 야루바 왕조는 내전에 돌입하였다. 그 와중에 무스카트의 알 자랄리 성채가 파괴되는 등 10년의 싸움 끝에, 1728년 오만은 사이프가 통치하는 해안과 그 사촌인 발아랍 빈 힘야르가 통치하는 내륙으로 나뉘어졌다. 그후 점차 기세가 기운다고 느낀 전자는 이란의 나디르 샤에게 군사 원조를 청하였고, 1737년 파르스 총독 무함마드 타키 칸이 이끄는 페르시아 군의 도움으로 오만을 통일할 수 있었다. 이후 페르시아 군은 약탈물과 이란으로 돌아갔다.

그러던 1742년, 결국 폐위된 사이프가 소하르 할양을 조건으로 재차 이란에 도움을 청하였다. 그해 10월 무함마드 타키 칸의 페르시아 군이 줄파르 (라스 알 카이마)에 당도, 소하르와 무스카트를 공격했으나 그 어느 곳도 점령할 수 없었다. 1743년 초엽 병력을 지원받은 페르시아 군은 무스카트로 진격하였다. 그 근교인 무트라에 주둔하던 이맘 술탄 빈 무르쉬드는 의도적으로 무스카트를 내어주었고, 이에 페르시아 군이 입성하여 약탈에 전념하던 때에 무트라 및 무스카트의 수비대와 함께 공격하여 대승을 거두었다. 하지만 재차 파견된 페르시아 군이 무트라를 점령하자 술탄 빈 무르쉬드는 소하르로 향하였고, 그곳에서 싸우다가 부상을 입고 사망하였다. 그후 폐위되었던 발아랍이 이맘으로 복위하였다. 한편 페르시아 군은 무스카트를 점령하였으나 쌍둥이 성채의 수비대는 맹렬히 항전하였다. 이에 무함마드 타키 칸은 동행한 사이프에게 성채들의 항복을 명하게 했으나 수용되지 않았다. 이에 그는 사이프를 선상 연회에 초대하고 술로 취하게 한 후[20], 이맘의 인장을 빼앗어 위조한 명령으로 성채들의 항복을 얻어내었다.

3.2.1. 알 부 사이드 왕조[편집]


그후 이용가치가 없어진 사이프는 죽었고 페르시아 군은 소하르 공격에 집중하였다. 그 총독인 아흐마드 빈 사이드 알 부사이디는 용감히 저항하였으나 그의 유명세를 시기한 이맘 발아랍의 지원을 받지 못한 탓에 9개월 간의 포위 끝에 조건부 항복하였다. 1744년 아흐마드는 이맘으로 선출되었다. 이듬해 무스카트를 공격했으나 실패한 발아랍은 소하르로 북상, 아흐마드를 격파하였다. 이후 본거지 바르카에 웅거하던 아흐마드는 1747년 나디르 샤의 사후 분열된 페르시아 수비대를 연회에 초대해 학살하며 오만 북부에 세력을 구축하였다. 1749년 아흐마드는 발아랍을 전사시키며 단독 이맘이 되었고, 동시에 술탄을 칭하였다. 같은해 그는 무스카트를 봉쇄, 쌍둥이 성채를 점령하며 오만을 통일하였다. (알 부사이드 왕조) 그는 성채들 중 알 자랄리의 보수에 치중하여 완연한 군사 기지로 변모시켰고, 이후로도 중앙 건물과 성탑 등을 추가하였다. 다만 아흐마드의 치세 후반부는 두 아들인 술탄과 사이프의 반란으로 얼룩졌다. 1781년 그들은 쌍둥이 성채를 장악하였고, 이에 무스카트 총독이 수복하려 하자 시가지를 폭격하였다.

반군이 수도까지 진군해오자 아흐마드는 형제를 사면하고 쌍둥이 성채의 소유를 허가했으나 이내 변심하여 알 미라니를 점령하였다. 형제들은 알 자랄리에서 버티며 동생 사이드를 인질로 잡았다. 1782년 1월, 무스카트에 당도한 아흐마드는 알 미라니의 지휘관에게 알 자랄리에 폭격을 지시하였다. 동시에 그의 함대가 성채 동쪽에서 공격해오고 인질이던 사이드가 간수를 매수해 탈출하자, 남은 형제는 항복하였다. 반란을 진압한 이듬해 아흐마드가 사망하고 사이드가 계승하였다. 하지만 사이드는 인기가 없었고, 1786년 무스카트 총독이 그의 아들을 자랄리 성채에 감금하였다. 이에 다른 아들 하마드가 협상을 위해 파견되었는데, 그는 쌍둥이 성채에 이어 무스카트를 장악하였고 다른 도시들도 뒤따랐다. 같은해 하마드는 셰이크를 칭하였고, 무스카트를 수도로 삼았다. 사실상 퇴위한 사이드는 옛 수도 루스타크에서 이맘 칭호만을 유지하다가 17년 후 사망하였다.

한편 하마드의 뒤를 이은 술탄 빈 아흐마드의 치세에 1803년 그가 핫즈 (메카 순례)로 부재한 틈에 조카 바드르 빈 사이프가 알 자랄리 성채를 장악하려 하였다. 바드르는 큰 상자를 통해 성채 내부로 몰래 들어가려 했으나, 성공하려던 참에 인도인 상인에게 들켜 카타르로 도주하였다. 1800년대 초의 내전으로 잠깐 쇠퇴했던 오만의 해상권은 1806년 즉위한 사이드 빈 술탄에 의해 재건되었다. 그는 무려 반세기간 재위하며, 미국에 사절을 보내 수교하고 무스카트에 바이트 알 팔라즈 성채를 세우는 등 다양한 업적을 남겼다. 스와힐리 해안에 관심을 기울이던 그는 1840년 잔지바르로 천도하였다. 다만 1856년 사이드가 사망한 후 제국은 무스카트에서 즉위한 삼남 수와니와 잔지바르에서 즉위한 6남 마지드 간에 분열되었다. '무스카트와 오만 술탄국'으로 불린 전자의 수도는 당연 무스카트였다. 한편 19세기 중반부터 알 자랄리 성채는 오만의 대표적인 감옥으로 쓰이기 시작하였다.[21]

3.3. 근현대 오만[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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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완공된 술탄 카부스 모스크

19세기 후반 알 부 사이드 왕가의 세력은 쇠퇴하였고 내륙 이맘과의 갈등이 커졌다. 1890년 사이클론이 무스카트를 덮쳤다. 1895년, 그리고 다시 1915년에 무스카트와 무트라는 내륙 베두인들의 습격을 당하였다. 전자의 경우 술탄 파이잘 빈 투르키는 알 미라니 성채의 동생이 도시를 수복할 때까지 알 자랄리 성채에 피신해 있을 정도였다. 영국의 중재로 내륙에 더 많은 자치를 부여하는 일시적인 휴전이 성사되었지만, 내륙의 이질적인 부족들 간의, 그리고 무스카트 오만 술탄국과의 분쟁은 계속되었고 마침내 1962년 도파르 반란으로 고조되었다. 반란은 술탄 사이드 빈 타이무르로 하여금 내부의 반란 진압에 있어 영국의 도움을 구하게 하였다. 1966년 4월 26일 사이드 빈 타이무르에 대한 암살 기도는 술탄의 더 큰 고립으로 이어졌고, 민간 무장 갈등 속에 그는 거처를 무스카트에서 살랄라로 옮겼다.

1970년 7월 23일, 술탄의 아들인 카부스 빈 사이드가 영국의 도움으로 살랄라의 궁전에서 무혈 쿠데타를 일으켜 군주로 집권하였다. 영국의 도움과 함께 카부스는 도파르 반란을 진압하고 이질적인 부족 영토를 통합하였다. 그는 무스카트로부터 내륙의 소외를 근절하려는 시도로 국명을 오만 술탄국으로 재명명했다. 카부스는 능력 있는 오만인들을 오만 석유 개발사 (PDO)와 같은 회사들로 이끄는 등 그의 새 정부의 직위를 맡도록 고용했다. 보건과 교육과 같은 공공 복지를 위한 부처들이 설립되었다. 카부스의 치세 초기에 사이드 이븐 타이무르에 의해 구상되었던 새 항구인 미나 카부스가 세워졌다. 유사하게, 새 국제 공항이 무스카트의 시브 지구에 세워졌다. 관청, 창고, 상점, 가옥들이 무트라에 있는 루위의 옛 시가지를 사업 지구로 변모시켰다. 1976년 첫번째 5개년 개발 계획은 무스카트의 인프라 개발에 치중하였고, 1980-90년대에 무역과 관광에 있어 새 기회들을 제공해주었다. 2007년 6월 6일 사이클론 고누가 무스카트를 강타, 많은 재산과 인프라와 상업 활동에 피해를 끼쳤다.


4. 교통[편집]



4.1. 버스[편집]



4.2. 철도[편집]



4.3. 항공[편집]


무스카트 국제공항이 있으며 오만 항공이 허브로 사용하고 있다.

5. 갤러리[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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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항의 야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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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트라 성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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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둥이 성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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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 잘랄리 요새 (상 주앙 성채)

항구와 섬을 잇는 바위산의 옛 성채의 기반에 포르투갈 인들인 조성한 성채. 다만 오늘날에는 포르투갈 시대의 흔적은 몇몇 포르투갈어 명문을 제외하곤 적다. 20세기까지 감옥으로 쓰이다가 오만 문화사 박물관으로 전환되었는데. 이는 대중들이 아닌 오만을 방문한 국빈들에게만 개방된다. 성채는 두 개의 성탑들과 그들을 잇는 성벽으로 구성되어 있다. 20세기 말의 '디즈니화'를 거쳐 내부는 분수, 수영장, 정원 등으로 꾸며져 있고 그 중정을 조망할 수 있는 만찬장은 국빈들과의 식사 장소로 쓰인다. 중정을 두른 여러 방들은 과거 외침에 대비하기 위해 육중한 철문과 복잡한 계단들로 이어져 있다. 현재는 전시관으로 쓰이는데, 대포와 포탄, 줄과 발사 장비들, 옛 머스켓과 매치락 (화승총), 지도들과 많은 역시 기록물, 무스카트 만의 풍랑과 조류들을 묘사하는 명판 등이 있다. 그중 야자수 원목으로 만든 천장을 지닌 한 방은 오만의 문화 유물들로 가득함하고 사각의 중앙 성탑은 카펫, 도자기, 보석, 무기, 가정 용기, 향료 받침대 등 박물관의 주요 전시품들을 수용한다. 왕실 다우 (선박)와 요트가 공식적으로 (정식으로) 항구를 통해 항해하는 특별 행사 시에 성채는 폭죽이 터지고 악사들이 파이프를 연주하는 등의 역할을 수행한다.

6. 미디어에서 등장[편집]



6.1. 게임[편집]



6.1.1. 도미네이션즈[편집]


부두 원정 목적지 중 하나로 등장한다.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무스카트(도미네이션즈)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6.1.2. 대항해시대 4[편집]


아브라함 이븐 웃딘 시나리오에서 초반부터 웃딘이 점유하고 있는 항구로 나온다. 웃딘 시나리오가 초보 시나리오인데다가 나갈플이 워낙 바보인데다가 인도에서만 놀기 때문에 웃딘의 독점항이나 마찬가지이다.


6.1.3. 문명 시리즈[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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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건물의 벽 색깔이 흰색 및 베이지 계열로 통일되어 있는데 햇볕 차단이라는 목적도 있으나 법령으로 외벽의 색을 제한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른색, 예를들어 원색으로 벽을 도색할 경우 엄청나게 까다로운 승인절차를 거쳐야 한다[2] 마스까-뜨 로 읽는다[3] 무스카트 서쪽에 있으며 무스카트 국제공항이 위치해 있다[3] 지리적으로 이란, 파키스탄과 가깝기 때문에 이란계, 파키스탄계 혈통의 가문이 상당히 많다. 흔한 성씨 가운데 하나인 Al Balushi 는 파키스탄의 발루치스탄에서 왔다' 는 뜻이다[4] 19세기 까지 지금의 탄자니아인 잔지바르와 연합왕국이었던 이유로 아프리카계 오만인이 상당히 많다[5] 종교행사와 신앙의 자유는 인정되지만 다른 이슬람국가 처럼 선교는 불법이다[6] 이슬람 국가들 중 오만과 브루네이의 국가원수 칭호가 술탄[7] 특히 브루크너의 팬이라고 한다[8] 이미 12세기 나흐바니 왕조 때부터 이맘들은 상징적인 존재로 격하되었다[9] 그곳의 총독은 과일과 인질을 제공하는 등 저자세로 임하여 참극을 모면하였다[10] 그후 1508년 호르무즈를 정찰했는데 도중 저번 방문 시에 썩은 과일을 주었던 칼하트를 습격하였다. 이로써 소하르를 제외한 오만의 모든 항구들이 다 습격당한 것[11] 혹은 여름 더위 중의 거처, 즉 일종의 피서지였다고도[12] 현재는 무스카트 광역권 속에 신도심과 구도심 사이에 위치함[13] 오스만에 맞서기 위해 파견된 동 페르난두 지 메네세스 휘하의 함대가 몬순 지나가길 기다리기 위해 들름[14] 긴 여정과 전투로 절반에 가까운 선박을 상실, 나머지를 바스라에서 보수하고 신형 대포를 장착하여 출항함[15] 그후 풍랑을 피해 동쪽으로 향하던 세이디 알리 레이스는 구자라트에 이르러 심하게 파손된 선박을 현지 군주에게 팔고 신드, 펀자브, 카불, 부하라, 호라즘, 호라산, 이라크를 거쳐 코스탄티니예로 돌아가는 육로 여정에 나선다. 강제 실크로드 대탐험[16] 사우디 동해안 지역. 오스만 조정에서는 라흐사로 불렀다[17] 이후 그는 스와힐리 해안에서 포르투갈과 싸웠으나 1589년 몸바사에서 사로잡혀 리스본으로 압송된 후 기독교로 개종한다[18] 혹은 동쪽에 위치했기에 앗 샤르키야 성채로도 불림. 카라차는 수비대를 위해 물 저장고를 만들고 대포를 배치하였다. 한편 일설에 의하면 성채는 기존 아랍 요새 위에 지어진 것이라고 한다. 포르투갈 인들에 의해 더해진 주요 보완점은 함대를 굽어보는 포대였다. 17세기 들어 포르투갈 당국은 알 자랄리 서애를 더욱 개발해 중심 성채로 삼으려 했으나 1650년 축출되며 이를 완수하지 못하였고, 끝까지 총독 관저는 알 미라니에 있었다[19] 혹은 28일[20] 이맘이란 직위에 걸맞지 않게 시라즈산 와인을 즐겼다고 한다[21] 이는 1970년대까지 약 2백여명을 수용하는 왕실 감옥으로 유지되었다. 일례로 1849년 6월 소하르 총독이 영국인 거주민과 노예 무역 금한다는 조약 체결. 이는 죵교 계층의 반란을 유발하여 총독이 살해되고 그 부친인 하마드가 총독이 됨. 당시 잔지바르에 머물던 오만의 술탄은 하마드를 체포해 알 잘랄리의 감옥에 투옥되도록 지시함. 하마드는 1850년 4월 23일 굶주림 혹은 독살로 인해 사망함. 20세기의 죄수들 중 대부분은 전쟁이나 반란의 포로들이었다. 제벨 아크다르 전쟁 (1954-59) 도중 혹은 그 후에 사로잡힌 내륙의 오만인들이었음. 다른 죄수들은 도파르 반란 (1962-76) 도중 사로잡힘. 그는 오만에서 가장 악명 높은 감옥이었고, 그 끔찍한 (열악한) 환경 (상태)으로 유명했음. 무스카트의 술탄 군대 지휘관인 대령 데이비드 스마일리는 그 감옥을 '진정한 지옥 구덩이'로 불렸음. 1963년 44명의 죄수들이 치밀히 계획된 탈출을 감행했으나 그들의 약화된 건강 상태로 인해 신속히 붙잡혀 수갑이 채워짐. 1969년 한 간수가 2명의 왕실 가문원 2명의 탈출을 도왔으나 며칠 만에 붙잡힘. 감옥은 오만이 완전히 통합된 후 70년대에 폐쇄됨. 1983년 복원된 후 오만 문화사 박물관으로 전환됨. 이는 대중들이 아닌 오만을 방문한 국가 수장과 같은 주요 인사들에게만 개방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