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하마드 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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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하마드 알리의 주요 수훈 및 수상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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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하마드 알리
Muhammad Ali | محمد على


파일:GettyImages-480090748-2.jpg

개명 전 이름
캐시어스 마셀러스 클레이 주니어
Cassius Marcellus Clay Jr.
[1]
출생
1942년 1월 17일
미국 켄터키루이빌
사망
2016년 6월 3일 (향년 74세)
미국 애리조나피닉스[2]
국적
[[미국|

미국
display: none; display: 미국"
행정구
]]

신체
191cm, 107kg[3], 198cm(윙스팬)
체급
라이트헤비급[아마추어]
헤비급[프로]
아마추어 경력
1960 로마 올림픽 라이트헤비급 금메달
1959, 1960 US 내셔널 챔피언쉽[4] 금메달
1959, 1960 인터시티 골든 글러브[5] 금메달
1959, 1960 시카고 골든 글러브[6] 금메달
프로 전적
61전 56승(37KO) 5패
프로 경력
WBA 헤비급 챔피언 4회
WBC 헤비급 챔피언 2회
The Ring[7] 헤비급 챔피언 3회
NABF[8] 헤비급 챔피언 3회
종교
기독교(개신교, 침례회)이슬람(NOI수니파)
서명
파일:무하마드 알리 서명.svg
링크
파일:인스타그램 아이콘.svg

1. 개요
2. 유년 시절
3. 선수 경력
3.1. 아마추어 경력
3.2. 프로 경력
4. 평가
6. 어록
7. 가족 관계
8. 여담



1. 개요[편집]


"내가 흑인이라는 이유로 내 조국에서도 자유를 누리지 못하는데 남의 자유를 위해서 싸우라고요? 적어도 베트콩들은 흑인이라는 이유로 우릴 무시한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내가 왜 지구 반대편의 이름 모를 사람에게 총부리를 겨눠야 합니까?"


미국의 前 권투 선수. 선수 생활 이외에도 흑인 민권 운동에 몸담았으며 공개적으로 베트남 전쟁의 징집을 거부하는 등 사회 정의에 관해 목소리를 낸 사회 운동가이기도 했다.


2. 유년 시절[편집]


1942년 1월 17일, 알리는 미국 켄터키 주 루이빌의 비교적 부유한 흑인 중산층 집안에서 태어났다. 하지만 알리가 살던 곳은 인종차별이 심하기로 유명한 곳이었고, 알리는 온갖 무시와 놀림을 받으면서 성장했다. 이러한 성장 배경으로 인해 알리는 당당하고 자존심 넘치는 성격을 갖게 되었다.

12살이 된 알리는 친구와 자전거를 타다 비가 와 잠시 자전거를 세워뒀는데, 극장에 들어갔다 나오자 자전거가 없어졌다. 화가 잔뜩 난 알리는 경찰에 분실 신고를 하고 형사에게 "도둑을 잡으면 혼내줄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러자 그 형사는 "그러면 권투를 배워봐라."라고 농담을 했고, 이것이 알리가 권투에 입문하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당시 헤비급 세계 챔피언이었던 록키 마르시아노의 경기 라디오 중계방송을 듣고 자신 역시 세계 챔피언이 되겠다는 집념을 가졌다.


3. 선수 경력[편집]



3.1. 아마추어 경력[편집]


알리는 18살에 아마추어 복서로 180승이란 커리어를 쌓고, 1960 로마 올림픽 국가대표 선수로 발탁되어 라이트헤비급으로 출전해 금메달을 땄다. 이 후 프로로 전향, 헤비급으로 월장했다.[9]


3.2. 프로 경력[편집]


1960년에 프로로 데뷔하여 1981년에 선수 생활을 완전히 은퇴했다. 선수 생활 21년 간 복싱 역사상 최고의 선수로 활약하며 60-70년대 세계 권투의 황금기를 이끌었다. 데뷔 이후 34연승 가도를 달렸다. 통산 19차례 타이틀 방어에 성공했고, 복싱 헤비급 역사상 유일하게 3차례 챔피언에 등극했다.


3.2.1. VS 브라이언 런던[편집]




브라이언 런던과의 경기 영상
파일:external/4.bp.blogspot.com/%EB%AC%B4%ED%95%98%EB%A7%88%EB%93%9C_%EC%95%8C%EB%A6%AC.gif.gif
무하마드 알리의 속도
이 경기는 알리의 명경기들에 비해 유명한 경기는 아니지만 10분 21초부터 현실판 북두백렬권을 연상시키는 3초에 12방[10]의 펀치세례로 KO를 얻어내는 장면은 지금도 회자되는 알리의 퍼포먼스다. 프로 복싱에서 일방적인 페이스와 빠른 펀치 세례, KO승리를 하는 것도 대단한데 알리는 헤비급에서 그런 움직임을 선보였다. 그 외에도 특유의 노 가드 오픈 스탠스와 무빙도 확인 가능. 또한 알리만의 풋워크인 알리스텝과 셔플을 이용해서 다양한 펀치 콤보를 넣는 모습도 볼 수 있다.


3.2.2. VS 조지 포먼[편집]


알리의 가장 유명한 경기는 조지 포먼과 맞붙은 "The Rumble in the Jungle" 이다. 당시 조지 포먼은 24세의 압도적인 챔피언이었고 지금까지도 헤비급 역사상 최고의 핵주먹으로 평가받는 강타자였다. 게다가 알리와 싸우기 직전에도 헤비급 역사에 꼽히는 인파이터인 조 프레이저를 상대로 한 경기에 6번이나 다운시키며 2라운드 KO 승리를 거두며 기량이 절정에 달한 상태였다. 반면에 32세의 알리는 이전에 베트남 전쟁 징병 거부로 인해 선수 자격을 박탈당해 신체적 최전성기인 25세부터 29세까지 4년 동안 선수 생활을 전혀 하지 못했다. 게다가 알리는 전성기에도 강펀치 스타일은 아니었으며 주무기였던 순발력과 민첩성도 노쇠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알리는 이토록 온갖 불리한 조건에 처했음에도 불구하고 여느 때처럼 경기를 앞두고 도발과 언론플레이를 하기 시작했다.

"난 저번 주에 돌을 죽여버리고 바위를 박살내고 벽돌을 병원으로 보내버렸어!"

"난 너무 빨라서, 어제는 스위치를 내리고 불이 꺼지기도 전에 침대에 들어갔지."

"난 너무 빨라! 링 위에서 댄스를 보여주마. 포먼은 날 볼 수도 때릴 수도 없을 거라고!"

"너희들 모두 포먼이 이길 거라고 생각하는 거 다 알아. 하지만 두고봐라, 내가 얼마나 위대한지!"

1974년, 포먼과의 경기를 앞두고 월도프 아스토리아 호텔에서의 기자 회견에서 알리가 한 말들.

물론 알리의 이런 도발에도 불구하고 세상 그 누구도 알리에게 승산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고, 이번에도 알리가 늘 해오던 자신감 과시라고 여겼다. 하지만 이것은 평소 알리가 해오던 언론 플레이와는 차원이 다른 작전이었으며, 완벽하게 성공하였다. 알리는 자신이 "댄스를 보여주겠다"라며 순발력과 민첩성으로 포먼을 제압할 것이라고 말했지만, '진짜 속셈'은 따로 있었다.[11]



경기 시작은 21분 11초부터. 하이라이트는 51분 30초부터.

1974년 10월 30일, 알리는 WBC·WBA 챔피언 조지 포먼과 자이르(현 콩고민주공화국) 킨샤사에서 맞붙었다. 오직 이 경기만을 위해서 야외 특별링을 만들었으며, 현지 시각으로 새벽 네시에 진행됐다. 그 이유는 미국인들이 보기 편한 시간에 방송되기 위함이다.[12] 이런 기이한 상황에서 당시 이 경기에 대한 미국에 대한 관심을 볼 수가 있다. 당연히 도박사들은 전부 챔피언 포먼의 승리를 점쳤고, 세상 사람들도 그렇게 믿었다. 그런데 막상 뚜껑을 열고 보니, 사람들의 예상과는 다르게 오히려 알리가 포먼을 상대로 우세한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알리는 경기가 시작되자 특유의 경쾌한 몸놀림과 빠른 펀치 스피드로 조지 포먼에게 공격을 적중시켰다. 알리가 무기력하게 제압당할 것이라 여겼던 관중들은 알리가 본인의 말대로 현란한 스피드로 포먼과 팽팽히 맞서자 혼란과 동시에 열광의 도가니에 빠졌다.

그런데 2라운드에 돌입하자,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상황이 펼쳐졌다. 알리의 '진짜 속셈'이자, 가디언지 '스포츠 역사상 가장 거대한 도박' 이라고 일컬은, 'Rope-a-dope' 전술이 실행된 것이다. (무하마드 알리의 전략 중 하나인 ‘Rope-a-dope’ 를 타이슨 퓨리도 사용하였다.)



Rope-a-dope
로프에 몸을 기대고 로프의 신축력과 반동을 이용해 상대의 타격을 흡수하는 전술로, 알리가 바로 이 포먼 전에서 최초로 창시한 전술이다.


시작부터 날쌔게 스텝을 밟던 1라운드의 모습은 어디 가고, 갑자기 알리가 계속 후진을 하며 로프에 몸을 기대는 것이었다. 당시는 물론이고 지금까지도 복싱 역사상 최강의 슬러거로 꼽히는 조지 포먼을 상대로 펀치를 피하기는커녕 로프에 몸을 기대고 펀치를 받아낸다? 관중들을 비롯, 이 경기를 지켜보던 사람들은 전부 알리가 미쳤다고 생각했다. 심지어 몇몇은 알리의 자살행위라고 생각하기도 했다.[13] 그리고 포먼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알리에게 펀치를 날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때부터가 포먼의 패배가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보통 같았으면 어지간한 복서들은 버티기 힘겨울 포먼의 펀치였으나, 이번엔 달랐다. 포먼의 강펀치들이 모두 로프의 신축력으로 인해 대미지 전달이 되지 않았고, 맞고 있는 알리보다도 때리고 있는 포먼이 더욱 지쳐가는 상황이었다. 오히려 펀치를 흡수하며 버티던 알리가 순간적인 역공을 펼치는 상황이 자주 펼쳐졌다. 포먼은 이를 제대로 방어하지 못했고, 관중들은 알리가 공격을 할 때마다 환호성을 지르는 상황이었다.

이후로 상황이 경기 전 예상과는 완전히 다르게 흘러가기 시작했다. 알리는 포먼의 펀치를 모두 흡수하며 자신의 공격을 모조리 성공시켰고, 4라운드에서 펀치를 주고 받으며 살짝 비등한 모습을 보였으나 5라운드에서는 포먼에게 맞으면서도 미소를 짓는 여유를 보였다. 반대로 포먼은 경기 내내 알리의 전술과 운영에 완벽히 말려들어 효과적인 타격을 주지 못했다. 포먼이 아예 가까이 들이대면 알리는 클린치를 걸어 공격을 차단했다. 젊고 패기 넘치는 왕을 상대로 백전노장 도전자는 노련한 모습을 보이며 8라운드까지도 밀리지 않는 모습을 보였다.


파일:알리 포먼.jpg

조지 포먼에게 펀치를 적중시키는 무하마드 알리.

6라운드부터 눈에 띄게 지친 모습을 보였던 조지 포먼은 8라운드에 들어와서는 탈진에 가까운 모습을 보였다.[14] 라운드 종료까지 32초 남은 상황에서 캐스터는 마치 예언과도 같은 한 마디를 남긴다.

"...아마도 이게 알리의 작전인가 봐요. 자기 펀치에 자기가 나가떨어지도록 말이지요!"


라운드 종료 20초 전, 코너에 몰린 듯한 알리의 오른손이 포먼에 적중한다. 이후 몇 번의 잽에 이어 라이트 펀치가 포먼에게 한번 더 적중한 순간 알리는 코너에서 빠져나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라운드 종료 15초를 남긴 순간, 포먼이 그로기 상태가 된 것을 확신하자[15] 알리는 재빠르게 공격하기 시작했고 종료 13초 전 눈 깜짝할 사이에 2차례의 펀치를 포먼의 턱에 정확하게 꽂아넣었다. 그리고 포먼은 그대로 무너져 내렸고, 라운드 종료 10초에 카운트에 들어가서 라운드가 끝나는 정확히 00:00초에 KO 선언이 나왔다. 이로서 싸움은 전설이 되었다.

전성기 때 3초에 12번의 펀치를 날린 시절과는 비교할 수 없고, 1초 내에 주먹 두 번은 보통 사람도 할 수 있다. 비록 경기 내내 우세한 모습을 보여주긴 했지만 이때 알리는 32세의 나이, 8라운드 24분 가까이 뛴 상태, 그리고 헤비급 사상 손꼽히는 24세의 젊은 돌주먹 챔피언의 펀치를 계속 몸으로 받았다. 아무리 로프를 이용하며 가드로 받아낸다고 해도 누적되는 피해와 피로는 적지 않았을 것이다. 게다가 애초에 로프에 등을 기댄다는 것 자체가 사실상 회피는 상체로만 하겠다는 것인데, 이 경기에서만 보자면 회피는 거의 포기하고 그냥 가드와 맷집으로만 버틴 것.[16] 알리는 그 상태에서 찰나의 순간에 안면에 그림 같은 펀치 콤비네이션을 모두 정확히 적중시켰다.

이 경기는 지금까지도 복싱 역사상 가장 위대한 경기로 평가받는다. 단순히 알리와 포먼이라는 뛰어난 선수들이 맞붙었다는 것 이상으로 알리의 두뇌와 끈기가 빛을 발한 경기였다. 시합 전 기자 회견부터 경기가 KO로 끝나는 순간까지 알리가 완벽하게 구상하고 연출한 전략적 걸작이었고, 본인만의 주무기를 잃은 노장이 최강의 젊은 챔피언을 꺾은 기적이었으며, 승리를 위해 유례없던 도전을 과감히 행한 용기와, 그것을 견뎌내고 끝내 이겨낸 위대한 끈기였다. 그리고 팬들은 복싱 역사상 가장 강력한 주먹을 상대로 스스로를 로프에 고립시킨 알리의 용기에 열광했고, 자신의 신념을 위해 왕좌에서 내려왔던 알리가 스스로의 힘으로 정상을 탈환한 것에 환호했다.[17]

그야말로 경기가 있기 전 양 선수의 배경과 상황, 서로 간의 치열한 신경전, 경기의 진행, 전술적 완성도, 해설진의 코멘트까지 스포츠 만화보다도 더 만화 같은 극적인 결과를 낳으면서 복싱 역사에 영원히 남을 명경기가 되었다. 알리가 GOAT로 인정받은 이유 중 하나인 명경기다.

사실 엄밀히 따지면 로프 어 도프 전술에도 파훼법은 존재한다. 로프에 기댄 선수를 클린치를 통해 떨어 뜨리거나, 굳이 무리해서 때리지 않는 것이다. 다만 로프 어 도프 전술은 이 경기에서 최초로 등장한 전술이었다. 더군다나 이 당시의 포먼은 무뚝뚝하게 힘으로 몰아붙이며 별 다른 전략을 잘 쓰지 않던 일명 "첫번째 포먼" 시절이라 미처 이 방식을 떠올리지 못하고 강펀치만 날리다가 패배하고 말았다. 포먼 본인도 "경기 내내 내가 이길 것이라고 생각했다"고 말 할 정도로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전술이었다. 이 경기 뒤에도 알리는 론 라일이나 어니 세이버스 같은 슬러거들도 로프 어 도프 전술로 상대해 승리했다.

3.2.3. VS 조 프레이저[편집]




경기 시작은 17분 20초부터.

알리와 포먼의 경기가 역사적 의미에서 최고의 명경기라면, 내용의 치열함에 있어서는 조 프레이저와의 3차전이 권투 사상 최고의 명경기로 꼽힌다. 이 경기는 경기 전 신경전도 치열했고 경기 내용도 대단했는데, 경기장 냉방 시설마저 고장나서 선수들 뿐 아니라 보는 사람들마저 지칠 대로 지쳤던 경기다. (다양한 풋워크, 다양한 연계 기술 및 콤보, 콩콩이스텝을 통한 스텐스 변환 및 카운터콤보, 알리스텝, 알리셔플, Rope-a-dope 등 알리의 모든 것을 불태운 경기이기도 하다, 말그대로 마닐라의 전율!!!)

이 둘은 세 차례나 맞붙으며 복싱 역사상 가장 강력한 라이벌 구도를 형성했다. 프레이저와 알리의 1차전, 15라운드까지 가는 혈투 속에서 결과는 프레이저의 판정승. 알리의 생애 첫 패배였다. 그런데 얼마 가지 않아 프레이저가 조지 포먼에게 2라운드에만 6번의 다운을 당한 끝에 KO 패배로 챔피언 타이틀을 빼앗기고, 이후 알리가 그 포먼을 무너뜨리며 다시 챔피언이 된다. 이후 알리는 프레이저를 상대로 두 번의 타이틀 방어전을 치뤘고, 모두 승리한다. 2차전은 알리의 만장일치 판정승이었고, 3차전에선 알리의 14라운드 TKO승. 전적 2승1패로 완벽하게 설욕한 것이다.

대중과 언론앞에 나서서 흥미 유발을 즐겼던 알리와 달리 프레이저는 별 다른 마케팅을 내세우지 않았다. 그리고 프레이저는 1975년 10월 1일 필리핀 마닐라에서 열린 알리와 경기를 앞두고 이처럼 기도했다. "신이시여, 저 녀석을 때려눕힐 힘과 방법을 알려 주십시오." 덤으로 프레이저가 챔피언이 된 후 알리가 베트남 전쟁 참전 거부로 인해 선수 자격을 박탈당하자 프레이저는 리처드 닉슨 대통령과의 면담[18]에서 알리의 라이선스를 다시 발급해달라고 직접적으로 요구하며 여러 방면으로 그를 도우기도 했다. 허나 알리는 프레이저를 '백인에게 굴종적인 흑인'이라고 말하며 그를 탐탁스럽지 않게 여겼다.[19] 이로 인해 둘의 관계는 선수 생활 내내 나빴고, 둘 다 은퇴 후 노인이 되어서야 화해했다.

이들의 혈투는 '마닐라의 전율'(Thrilla in Manila)라는 이름의 다큐멘터리로 제작되기도 했다. 알리가 프레이저와의 3차전을 앞두고 "이 경기는 마닐라의 전율이 될 것이다"라며 '스릴라' + '마닐라'로 라임을 맞추는 입담을 선보였고, 이것이 사람들에게 큰 반향을 일으켜 경기 이름을 '스릴러 인 마닐라'로 부르게 되었다.


3.2.4. 은퇴 후[편집]


나 때문에 울지 마라. 난 곧 알라와 함께하게 될 거야. 난 괜찮단다.

- 세상을 뜨기 직전 가족들에게 남긴 유언


파일:_71571755_71571754.jpg

2005년 5월 12일, 뉴욕에서 넬슨 만델라와 만난 무하마드 알리.


그의 권투 신화는 1978년 2월 15일 레온 스핑크스[20]에게 패하면서 저물기 시작했다. 이때 상실한 WBC, WBA 헤비급 타이틀 중 WBA 타이틀은 같은 해 9월 15일 다시 레온 스핑크스와의 설욕전 끝에 탈환했으나[21] WBC 타이틀은 탈환하지 못했고 1981년 은퇴했다.

은퇴한지 3년밖에 되지 않은 1984년, 병원을 찾은 알리는 의사로부터 파킨슨병 진단을 받는다. 파킨슨 병은 근육 움직임이 제대로 제어가 안 되고 손발을 떠는 등 이상 증세가 나타나다가 점차 몸이 마비되는 병이다. 알리의 파킨슨병 진단은 공식적으론 1984년이지만, 선수 말년 시절의 영상들을 보면 이미 움직임과 언행이 예전과는 확연히 다르게 느껴질 정도로 어눌해지고 느려지고 부자연스러워졌기 때문에 이미 1970년대 말부터 파킨슨병 증상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전성기 때 엄청나게 떠벌이였던 그가 더듬거리며 말도 잘 못하게 되었으니 권투 관련 인물들을 비롯 많은 이들이 안타까워 했다. 이와 관련하여 가장 잘 알려진 모습이 1996 애틀랜타 올림픽에서의 성화 점화 장면. 한쪽 손이 덜덜 떨리며 걸음이 부자연스러움에도 성화 점화자로써 의지를 보이는 모습은 전세계에 큰 감동을 안겼다. 그리고 1960 로마 올림픽 이후 36년 만에 또 다른 금메달을 증정받았다.

선수 생활을 하며 펀치를 많이 맞은 게 누적되었기 때문에 파킨슨병이 생긴 거라고 생각하는 이들이 많지만, 이는 의학적 견해가 아니라 대중적으로 널리 퍼진 근거 없는 오해일 뿐이다. 파킨슨 병이란 게 구체적으로 어떤건지 잘 모르는 일반 대중들은 어쨌든 뇌에 이상이 생긴 거니까 파킨슨 병이나 펀치드렁크 증후군이나 다 비슷한 병이겠거니 하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런 오해가 퍼진 건데, 실은 파킨슨 병과 펀치드렁크 증후군은 전혀 다른 종류의 질환이다. 펀치로 인한 뇌의 충격이 누적되어 생기는 펀치드렁크와는 달리 파킨슨병은 발생 원인 자체가 아직도 밝혀지지 않았다. 다만 의학 통계 조사에 따르면 복싱, 미식축구, 럭비 등과 같이 뇌에 타격을 많이 받는 종목의 선수 출신들이 일반인에 비해 파킨슨 병에 걸릴 확률이 더 높지도 않은 걸로 보아 파킨슨 병의 발병과 뇌에 대한 물리적 타격과는 별 상관이 없다고 한다. 즉 알리가 복싱 선수 활동을 한 것과 파킨슨 병의 발병은 별 관계가 없는 것일 가능성이 큰 것이다.

알리는 은퇴와 투병의 시기 차이가 별로 나지 않아서 은퇴 이후에는 사회 운동에 적극적인 참여는 어려워졌지만, 오히려 참여 영역은 현역 때보다도 다양해졌다. 가장 대표적인 예가 파킨슨병 연구 재단 설립과 사담 후세인을 직접 설득해 인질을 석방한 것.

2016년 6월 3일 앓고 있던 파킨슨병의 합병증인 호흡기 질환으로 생을 마감했다. 그날 조지 포먼, 마이크 타이슨, 플로이드 메이웨더, 매니 파퀴아오 등 수많은 복싱계 인물들이 애도의 뜻을 전했다. 알리의 관을 운구할 때 마이크 타이슨윌 스미스도 직접 운구했다. 알리가 살아생전에 마지막으로 믿었던 종교가 이슬람수니파였기 때문에 그의 장례식은 수니파식으로 치러졌다.


4. 평가[편집]


그는 단순한 무슬림도, 흑인도, 루이빌의 아이도 아니었습니다. 그는 그저 "The Greatest of All Time"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부분의 합보다 더 큰, 무하마드 알리였습니다. 그 누구보다 더 크고, 더 밝고, 더 독창적이고 영향력이 있었습니다.

그는 마틴 루터 킹넬슨 만델라와 함께 섰고, 어려운 시절에 함께 했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꺼릴 때 나서서 말을 하며 행동했습니다. 세상을 뒤흔들었고, 그로 인해 세상은 더 좋아졌습니다.

..그리고 재미있는 이름을 가진 어린 혼혈아가 자신이 무엇이든 될 수 있다고 믿는 대담함을 갖도록, 영감을 갖도록 도와줬습니다. 심지어 미국 대통령도 될 수 있도록 말입니다.

Muhammad Ali was America. He will always be America. What a man. What a spirit. What a joyous, Mighty Champion.

God bless, The Greatest of All Time

- 버락 오바마, 알리를 추모하며


저도 어떤 면에서는 제가 대단하다는 걸 알아요. 하지만 알리가 지금까지 가장 위대한 선수였다는 건 우리 모두가 인정해야만 합니다. 알리는 저보다도 펀치가 강한 조지 포먼이나 어니 세이버스를 상대로도 승리한 위대한 챔피언입니다.

- 마이크 타이슨 출처[22]


"...무하마드 알리의 위대함은 그저 훌륭한 선수라는 점이 아닙니다. 그것은 바로 그의 존재감이었습니다. 알리와 함께 링에 들어선다는 것은 그저 '훌륭한 복서', '훌륭한 싸움꾼'을 상대하는 게 아니었어요. 이제껏 만난 사람 중에서도 가장 위대한 사람(The Greatest)과 경합을 벌여야 한다는 것이지요. 정말로 위대한 사람이었습니다.

대체 어떻게 해야 '위대한 사람'을 상대할 수 있을까요? 위대한 사람은 잽이니 라이트니 하는 것으로는 상대할 수 없습니다. 스스로가 그에 걸맞는 위대한 사람이 될 수 있어야만 상대할 수 있습니다.

가장 훌륭한 복서, 훌륭한 펀쳐를 찾는다면 알리를 찾지 마십시오.

하지만 사상 최고의 압도적인 존재감을 발휘한 사람이 누구였는가 궁금하다면, 그가 바로 무하마드 알리입니다."

- 조지 포먼, 알리를 추모하며

알리의 커리어는 복서가 어떻게 진화하고 노화에 대처해야 하는지 잘 보여준 사례로 꼽힌다. 알리 이전 세대의 복서들은 자신만의 장기를 극대화하여 난타전에서의 우위를 점하는 전략을 주로 택했다. 현대 복싱의 근간을 다진 선수인 슈거 레이 로빈슨은 이 전략의 정점에 서있었다. 하지만 알리는 아웃복싱인파이팅을 모두 적절히 구사할 줄 알았고, 본인이 아마추어 복싱부터 다져진 풍부한 경험에 의해 상대의 우위에 있다는 점을 잘 이용했다.

알리 이전에 활동한 슈거 레이 로빈슨이 풋워크 사용과 아웃 복싱으로 대성공을 거뒀으나, 로빈슨 이후에도 당시의 아웃 복싱은 비주류 스타일이었고 선수들의 파이팅 스타일도 각자만의 한 가지 스타일에 고착되어 있었다. 더불어 풋워크의 중요성도 일깨워지지 않았던 시기였다.

알리는 당시에 보기 드문 아웃 복싱을 구사하는 선수였다. 알리의 하이라이트 영상 등에 잘 나오지만 초창기 알리는 빠른 풋워크와 레프트를 이용해서 상대를 제압하고 순간적인 콤비네이션으로 다운을 따냈다. 알리는 체력 소모, 힘싸움, 움직임의 둔함이 가장 심한 헤비급에서 경량급 선수처럼 현란한 풋워크와 좌우를 가리지 않는 자유로운 펀치 구사, 또 그것을 가능하게끔 하는 기력으로 수많은 승리를 거두며 오랜 기간 챔피언으로 군림했다. (오소독스가 주였으나 오소독스와 사우스포 모두 완벽히 구사하였다.) 이런 알리의 '탈(脫)헤비급' 퍼포먼스와 업적은 당대 복싱계에 큰 센세이션을 불러일으켰다.

그리고 알리는 아웃 복싱에서 그치지 않고 다양한 스타일 변화를 시도했다. 몇몇 경기에서는 카운터 복서, 스워머 스타일 역시 잘 구사했다. 어니 터렐, 클리브랜드 윌리엄스, 론 라일 등과의 경기에서 아웃복서임에도 불구하고 적극적인 인파이팅을 여러번 선보였고, 레온 스핑크스, 조라 폴리 등과의 경기에서 보여준 'Right-Hand Lead' 전략이나, 풋워크가 노쇠한 후에 조지 포먼, 조 프레이저, 어니 세이버스 등과의 경기에서 보여준 'Rope-a-Dope' 전략 등 고정적인 스타일로는 소화할 수 없는 다양한 전략을 구사했다. 또한 '알리 스텝'으로 불리우는 본인만의 독자적인 풋워크를 개발했고, 이는 현대 격투기에서도 중요하게 취급받는 풋워크로 안착했다. 또한 복싱의 노가드 전술도 알리를 통해 널리 알려졌다.

이렇듯 복싱 역사에서 알리의 위치가 높은 이유가 바로 완성형 복서의 프로토 타입을 성공적으로 제시했다는 점이다. 전성기에는 압도적인 아웃복싱과 인파이팅을 구사하면서 챔피언으로 군림했고, 나이를 먹고 신체 능력이 저하된 뒤에는 퇴보하는 게 아닌 경험과 전략을 바탕으로 진화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폼은 일시적이지만 클래스는 영원하다를 보여준 셈) 이러한 알리의 퍼포먼스와 커리어는 복싱 전반계에 엄청난 영향을 끼쳤고, 이것은 현대 복싱에서 아웃 복싱이나 인파이팅 등 한 가지 파이팅 스타일에 매몰되는 '반쪽짜리' 복서가 존재하지 않을 정도로 복싱의 기술적 완성도가 높아지는 결과물로 이어졌다. 슈거 레이 로빈슨이 아웃 복싱을 완성해 복싱의 기초를 다졌다면, 무하마드 알리는 그 완성된 아웃 복싱을 기반으로 복싱의 전반적인 완성도를 올려놓았다고 할 수 있다. 때문에 알리는 현대 복싱의 선구자이자 복싱 역사상 최고의 선수로 평가받는다.[23]

이 외에도 알리는 복싱을 당대 최고의 인기 스포츠로 발돋움시키고, 더 나아가 스포츠 업계와 팬들의 관계 및 접근법에 대한 패러다임을 전환시켰다는 점에서도 큰 의미를 지닌 인물이다. 실력과 결과가 전부라고 여겨지는 스포츠, 그것도 그런 경향이 가장 심한 격투기에서 알리는 챔피언이 되기도 전인 신인 시절부터 자신을 '위대한 사람'으로 지칭하며 즉흥적이고 재치있는 발언 등을 통해 대중들에게 적극적으로 다가갔다. '과묵함이 미덕'이던 격투기의 암묵의 룰을 깨고 과감하게 자기표현을 행한 것이다. 이 때문에 알리는 당시에 '입만 산 떠벌이'라는 등의 비난을 받기도 했으나, 모두가 알다시피 알리가 등장한 이후로 격투기는 물론 타 스포츠 종목에서도 선수 본인을 적극적으로 어필하여 마케팅을 펼치는 선수들이 굉장히 많아졌고 현대에 와서는 일종의 문화처럼 자리매김했다.

더 나아가 알리는 자기 표현에서 그치지 않고 복싱을 통해 대중들과의 소통을 시도했다. 그 대상은 경기장 안에 들어선 관객들이 되기도 했고, 경기장 밖에서 살아가는 시민들이 되기도 했다. 상대 선수와의 대결을 단순히 '스포츠 선수'로서의 대결로서 놔두지 않고, 알리 개인의 정체성 혹은 사회적 가치가 내재된 대립 구도로 전환시켰다. '사회 운동가' 문단에 설명된 플로이드 패터슨, 어니 테럴과의 대결이 그 대표적 예시다. 또한 언론에게 '입만 산 떠버리'라고 공격받자 자신의 입에 자물쇠가 걸린 테이프를 붙인 사진을 공개하나, 라커룸 칠판 위에 '다음 상대는 4라운드 만에 제압할 것'이라고 적거나, 자신이 질 것이라고 이야기하는 시민들 앞에서 즉석으로 시를 낭송하거나, 흑인 사회의 부흥을 위해 포먼과의 경기 장소를 킨샤사로 택하는 등, 알리 본인이 "복싱은 그저 세상에 날 소개하기 위한 도구"라고 말했듯이 알리는 복싱을 소통 수단이자 사회 참여의 도구로써 적극 활용했다. 이는 알리 이전에는 스포츠계에서 좀처럼 찾아볼 수 없는 사회 현상이었다.

심지어 알리는 경기 도중 링 위의 상대 선수에게도 말을 걸었다. 소니 리스턴에게 경기 도중 계속 말을 걸고도[24] 그를 KO시킨 뒤에 일어나라고 포효하거나, 자신의 이름을 조롱한 어니 터렐을 링 위에서 일방적으로 몰아붙이며 자신의 이름을 다시 불러보라고 압박하거나, 조지 포먼의 펀치를 받아내는 도중에도 '그게 다냐, 우리가 팝콘이나 튀기려 지금 링 위에 있는 거냐'라고 도발한 것이 그 예다.

때때로 알리는 아예 비언어적인 표현, 몸짓으로도 소통을 시도했다. 순간적인 움직임 하나하나가 중요하게 작용하는 링 위에서도, 말로 그치지 않고 이런 불필요한 행동(?)을 이어나갔다. 펀치를 맞으면 다리를 휘청거리는 척 능청을 떨거나, 클린치 상황에서 별 거 아니라는 듯 고개를 가로 젓는 등의 제스처를 취하고, 상대에게 더 해보라며 손을 까딱까딱 거리거나, 쉬는 시간에 팔을 흔들며 관중들에게 자신의 이름을 연호하게 하기도 했다. 반대로 자신이 유리한 상황에서는 양 팔을 만세하듯 들어올려 자신감을 표현하는 등 일종의 연극처럼 과장된 움직임을 선보이기도 하고, 페이크 모션이나 셔플스텝 등을 사용하여 심리전과 시각적 재미를 모두 이끌어냈다.


언제나 전설로 회자되는 '노가드(No Guard)' 회피 장면.[25]
그리고 자신의 복싱 스타일을 "나비처럼 날아서 벌처럼 쏜다"라고 시적으로 표현하며 정의하거나, 복싱의 풋워크를 '춤'이라는 단어로 대체하여 사용하는 등의 어휘 구사를 통해 복싱의 경직된 이미지와 관념을 허물어 접근성을 낮추기도 했다. 이렇듯 알리는 승패 여부와 경기 상황의 유불리를 넘어, 링 안에서나 링 밖에서나 자신을 주인공으로 만드는 '분위기'를 형성하고 '존재감'을 드러내는 데에도 천부적인 재능이 있었다.[26]

그리고 현란한 풋워크와 노가드 전술 등 알리의 복싱 스타일이 주는 시각적 효과도 일종의 자기표현이자 관객들과의 소통 수단으로 작용했다고 보는 시각도 있다. 상술했듯이 알리 이전의 복싱은 풋워크에 대한 개념이 체계적으로 자리잡기 전이라서 난타전 등의 힘싸움을 통해 경기를 지배하는 방식이 주류였다. 그런데 알리는 당시에는 파격적이게도, 가드를 내린 채 링 전체를 쉴 새 없이 누비고 다니다가 예상치 못한 각도에서 펀치를 꽂아 넣고는 상대의 공격을 부드럽게 회피하곤 했다. 이렇듯 유연한 움직임이 강조되는 알리의 스타일은 경직성과 힘싸움으로부터 벗어나 시야와 각도 등의 유리함을 선점하여 상대에게 비대칭성을 강요했다. 독일의 사회과학자 얀 필립 렘츠마는 이러한 알리의 스타일에서 오는 '비대칭성'이 그가 상대를 압도하는 지배력의 근원이라고 보았다. 그리고 스포츠 철학자 정계화 씨는 이에 덧붙여 "우아함은 파괴성을 배제하고 파괴력은 우아함을 거부하는 게 상례이지만, 이 상례는 알리의 움직임에서 깨진다"라고 설명하며 그의 복싱 스타일이 '문명에 반하는 야만적인 폭력 행위'였던 권투를 '미학적 감흥을 불러일으키는 우아한 행위'의 경지로 이끌었다고 이야기한다.# 즉 알리가 행해온 직간접적인 커뮤니케이션 외에도, 그가 복싱을 하는 방식과 움직임 자체가 복싱에 일종의 감성을 부여하여 관객들을 동요시키고, 그로 하여금 복싱이 당시 최고의 인기 스포츠이자 즐거움을 공유할 수 있는 문화가 되는데 암시적인 영향을 끼쳤다고 볼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알리의 퍼포먼스와 커리어는 복싱의 기술적 발전에 대한 공로 외에도, 이렇게 대내외적으로 행해온 직간접적인 의사소통을 통해 관중들을 제3자로써 지켜보기만 하는 '관찰자'가 아닌 적극적으로 끼어들고 영향을 끼치는 참여자로 이끌어냈다는 점에서도 큰 의미가 있다. 즉 스포츠가 단순히 선수 개개인이 육체를 효율적으로 사용하여 그 결과물을 보여주는 행위에서 그치지 않고, 대중들이 참여함으로써 즐거움을 공유할 수 있는 엔터테인먼트의 영역으로 확대되는 데에도 영향을 끼친 것이다. 이것은 알리를 평가를 할 때 그의 신체적 퍼포먼스와 커리어만으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그의 카리스마, 존재감이라는 키워드와도 맥락을 같이하는 요소이다. 문서 상단에 위치한 조지 포먼의 추모사에 적혀있는 '압도적인 존재감', '가장 위대한 사람'이라는 수식어는 그가 복싱 선수로서의 기본에 충실하여 뛰어난 기량과 성적을 남겼음은 물론, 복싱을 통해 대중들에게 즐거움을 선사함과 더불어 그들의 참여를 이끌어내기 위해 노력을 아끼지 않은 것에 대한 존경과, 그것이 사회 현상으로 확대된 성과에 대한 찬사를 담은 평가로 볼 수 있다.

더불어 알리가 '뛰어난 복싱 선수', '영향력 있는 스포츠맨'을 넘어서 범사회적으로 '위인'으로까지 여겨지는 것은 복싱을 넘어 사회적 부당함에도 물러서지 않고 당당히 맞선 그의 위대한 도전 정신과 끝내 굴하지 않고 승리한 업적에 따르는 존경이다. 알리는 수많은 챔피언들을 상대로 언더독 판정을 수두룩하게 받으면서도 그들과 겨뤄 챔피언 자리를 쟁취하였고, 백인 사회의 부당한 차별에 맞서며 챔피언 타이틀을 박탈 당하고 재판까지 받는데도 저항 정신을 굽히지 않는 등 흑인 사회의 대표로서 숱한 투쟁을 거쳐왔으며, 미국 흑인 사회를 넘어 제 3세계와 장애인 등 사회적 약자들을 위한 활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며 자신의 영향력을 긍정적 방향으로 활용했다. 대표적인 예로 조지 포먼과의 챔피언 타이틀 전이 이뤄진 장소가 킨샤사인 것도, 아프리카계와 흑인 사회의 부흥에 보탬이 되겠다는 알리의 생각에서 비롯된 결정이었다. 또한 전성기가 지난 노쇠한 몸으로도 전략과 전술을 개발하고 성공시키며 끝없이 발전했다. 전성기가 지난 뒤 맞붙은 역대 최강의 챔피언 조지 포먼을 꺾었고, 오랜 라이벌로 비교되던 조 프레이저와의 정면 대결에서도 전적 2대1로 승리하며 자신의 우위를 증명했다. 또한 은퇴 후 몸과 언어의 자유를 앗아간 파킨슨병을 앓았음에도 불구하고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꾸준히 사회운동가로서 활동을 하고 부당한 현실에 비판의 목소리를 내는 등 외적으로는 사회적 부조리와, 내적으로는 병마와 맞서 싸우며 평생을 자신감과 도전 정신, 투쟁 정신의 화신과 같이 살았다.

정리하자면 알리는 권투 실력과 시대 정신, 인간적 매력을 모두를 갖춘 완전체에 가까웠다. 시와도 같이 아름답고 거침없는 언변, 인종차별같은 사회 부조리에 당당히 맞서는 투쟁 정신, 맨주먹으로 보란 듯이 때려 눕혔으며, 스포츠 선수로도 역대 최고의 권투 실력 등 권투라는 스포츠의 전투적인 이미지와 무하마드 알리라는 한 인간의 이미지가 당시 사회 상황과 완벽하게 맞아 떨어지며 당대 최고의 슈퍼스타임은 물론이고, 현재까지도 흑인 사회의 영웅이자 아이콘으로, 복싱을 넘어 인류 스포츠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인물 중 한 명으로 존경받고 있다. 항상 외치던 말인 “I’m the Greatest” 를 말 그대로 실현시킨 셈. 알리의 시대와 후대인 지금까지도 모든 사람이 그를 GOAT (The Greatest Of All Time) (이)라 평가한다, 즉 알리는 항상 외치던 말이 현실로 되게 만든 것이다. GOAT 그 자체다!!!

5. 사회운동가[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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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이션 오브 이슬람에서 함께 활동했던 말콤 엑스와 함께. 여자아이들은 모두 말콤 엑스의 딸들이다.

알리는 권투선수로서도 엄청난 업적을 이뤘지만, 사회 운동가로서 남긴 영향력 또한 상당하다. 사담 후세인을 직접 만나서 설득해 인질로 붙잡힌 미국인 15명을 석방할 수 있도록 했고, 베트남 전쟁 징병 거부를 통해 미국 사회의 인식에 계몽을 가져왔으며, 흑인민권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또한 자살하려는 사람을 설득해서 구해내기도 했다.

알리는 강경주의의 흑인 인권 운동가였으며, 인종차별인권침해를 일삼는 백인들과 사회적으로 분리되기를 주장하는, '흑인민족주의에 기반한 흑백분리주의자'였다.[27] 이런 강경한 사회적 노선과 알리 본인의 굳센 자존심 때문에 복싱계에서나, 사회적으로나, 심지어 같은 흑인 복서들과도 크고 작은 마찰이 자주 생겼다.

1965년 소니 리스턴과의 2차전에서 1라운드 KO로 승리한 이후, 같은 해 헤비급 챔피언 출신인 플로이드 패터슨이 '알리로부터 챔피언 벨트를 되찾아 미국에 바치는 것이 내 의무다'라며 알리를 비난했다. 심지어 알리를 두고 알리가 개명하기 전 이름인 '캐시어스 클레이'라고 부르며 거세게 비난했다. 결국 이에 화가 난 알리는 "패터슨을 줘패겠다"라고 호언했다. 당시 이슬람 신자, 흑백분리주의자, 강경파였던 알리와 반대로 패터슨은 기독교 신자, 흑백통합주의자, 온건파였다. 그리고 결국 두 선수 간의 매치가 성사됐고, 결과는 알리의 TKO승리였다. 하지만 당시 미국 주류 언론들은 온건파이자 기독교 신자인 패터슨을 옹호했고, 강경파에 이슬람신자였던 알리를 '고의적으로 경기를 질질 끈 후 잔인하게 징벌했다'고 비난했다. 몇 년 후 알리는 패터슨과 한 번 더 붙게 되는데 그때도 승자는 알리였다. 흑표당 대변인을 지냈던 엘드리지 클리버는 알리와 패터슨의 이러한 대립을 두고 "이 싸움은 사상적 측면에서 흑인 혁명의 정신적 성취를 반영하는 전환점이 됐다. '독립적인 흑인'이 '굴종적인 흑인'을 징벌하는 상징적인 승리였다."라고 평한다.[28]

이와 같은 상황은 2년후인 1967년 어니 테럴과의 매치에서도 반복된다. 어니 테럴은 계체량 측정 도중 알리를 '캐시어스 클레이'라는 이름으로 불러 알리를 도발했다. 그리고 이에 따른 알리의 분노는 당연한 것이었다. 알리가 '캐시어스 클레이'라는 이름을 버리고 이슬람 식 이름인 '무하마드 알리'라는 이름으로 살아가게 된 이유가 인종차별에 시달리던 도중 흑인 인권 운동의 중심에 서있던 말콤 엑스와 그가 속한 '네이선 오브 이슬람'이란 조직을 접하며 흑인 인권 운동과 이슬람에 경도됐기 때문인데, 인종차별이 극심한 그 당시에, 그것도 자신과 같은 흑인에게, 자신이 살아온 삶과 사회가 직접적으로 연관된 현재의 이름을 무시당하고 개명 전의 이름으로 불리는 모욕을 당한 것이다. 그렇게 분노한 알리는 경기 당일, 링 위에서 테럴에게 펀치를 꽂아 넣으며 "내 이름이 뭐라고? 어!? 내 이름이 뭐라고!?"(What's my name? huh? what's my name?)라고 소리쳤다. 어니 테럴 역시 "캐시어스 클레이"라고 응수했다. (나중엔 “무하마드 알리.. 무하마드 알리”(“Muhammad Ali.. Muhammad Ali”) 라고 떨면서 말하였다.) 경기 내용은 처음부터 끝까지 알리가 테럴을 완전히 압도하여 알리의 만장일치 판정승. 하지만 이슬람 개종 선언과 개명으로 인해 주류 언론에게 미운 털이 단단히 박힌 알리는 패터슨 전에서도 그랬듯 KO 시킬 수 있음에도 경기를 끌고 갔다며 비난 받았다.[29] 사족으로 테럴은 경기 내내 알리에게 쉴새없이 맞은 탓에 눈 위가 찢어져 피가 줄줄 흘렀고 두 눈을 제대로 뜰 수 없을 정도로 심하게 부어올랐다. 알리와 경기가 끝난 후 테럴의 모습

권투 이외에도 1960년대 말부터 불기 시작한 흑인민권운동에 동참하여 미국 흑인들의 권익 향상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런 이유로 일부러 1974년 조지 포먼과의 대결 때는 아프리카 콩고킨샤사에서 경기를 벌이기도 했다. 끝내 그의 선택이 옳았다는 것이 증명된 현재는 야구재키 로빈슨 등과 함께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스포츠맨으로 불리기도 한다.[30]

1960년대, 베트남 전쟁에 반대하여 징병 거부를 하다가 챔피언 자리를 박탈당하고 무려 3년 5개월 간 경기를 치르지 못했다. 옥살이를 했다는 것은 법정 싸움에 대한 와전. 당시엔 주류 미국 사회로부터 엄청난 공격을 받았으나, 법정 공판에서

"내가 흑인이라는 이유로 내 조국에서도 자유를 누리지 못하는데 남의 자유를 위해서 싸우라고요? 적어도 베트콩들은 흑인이라는 이유로 우릴 무시한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내가 왜 지구 반대편의 이름 모를 사람에게 총부리를 겨눠야 합니까?"

라고 변론하며 무죄를 선고받고 풀려났다. 당시 이미 흑인 사회에서는 당연히 '병역을 통해 의무를 다 하면 우리에게도 권리가 오겠지' 같은 순진한 생각은 더 이상 먹히지 않았다. 이는 1965년 2월 18일 앨라배마 주의 흑인 인권 운동가이자 마틴 루터 킹 목사에게 경도되어 있던 26살의 젊은이 지미 리 잭슨이 시위 도중 경찰의 폭행으로부터 모친을 보호하려다 총에 맞아 사망한 사건이 발생하였는데, 바로 그 지미 리 잭슨은 육군 참전 용사 출신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알리가 징병 거부를 시작한 1967년은 구정 공세 이전이었고 당시까지만 해도 주류 백인 사회에서는 병역 거부는 파렴치한 반국가적 행위로 치부되었다. 그러나 이후 미국에서 베트남전 자체에 대한 회의론이 일면서 알리의 징병 거부가 재평가되기 시작한 것이다.

무죄를 선고받긴 했으나 긴 법정싸움 이후 전성기의 나이가 지나 육체적으로 노쇠하였다. 법정싸움 기간 동안 링 위에 서지 못한 그는 주무기였던 경쾌한 스텝을 이용해 반사신경만으로 주먹을 회피하던 노 가드 전술의 비중을 줄이게 되었다. 그가 전성기를 벗어나 경력 중반기에 대결한 선수들은 조 프레이저, 조지 포먼, 어니 세이버스, 켄 너턴, 척 휴프너 등 모두 시대를 초월해 최고로 인정받는 돌주먹들이었다. 하지만 알리는 이른바 'Rope-a-dope' 전술을 고안, 로프의 신축력을 이용해 펀치의 충격을 흡수하는 전술로 이들을 모조리 쓰러뜨린다.

또한 알리는 사회 운동가뿐만이 아닌 평화주의자이자 인문주의자였다. 알리는 언젠가 한 인터뷰에서 "세계 헤비급 챔피언의 역할이 무엇이냐"라는 질문에 "신의 발가락"이라고 대답한 적이 있다. "신을 등에 업고 세계의 모든 어두운 곳을 뛰어야 한다"라는 것이 그가 내린 정의의 이유였다. 이러한 업적 덕분에 은퇴 이후 미국 대통령 자유 훈장 수여[31], 오토 한 평화 메달 수여, UN 평화의 메신저 임명, 프린스턴 대학교 명예 박사학위 수여, 할리우드 명예의 거리에 입성되는 등 그 공로를 인정받았다.

알리는 때로는 저항자로서 흑인들의 권리가 법대로 실행되지 않는 것에 항의하여 금메달을 강에 던져버렸으며,[32] 때로는 지식인처럼 부정의한 전쟁을 고발하기 위해 내로라하는 엘리트들 앞에서 미국의 명문대에 강연을 다녔고, 때로는 광대처럼 브로드웨이에서 <백인들의 희망>이라는 연극에 주인공으로 출연해 많은 사람들에게 웃음을 선사했고, 때로는 외교관이 되어 사담 후세인을 만나 억류되어 있던 인질들을 석방하도록 설득했으며, 정치 지도자처럼 미국의 공립 학교와 병원을 찾아다니며 교육과 의료 체계의 중요성을 일깨우고 다녔고, 또 파킨슨병을 연구하는 재단을 창립하기도 했다.[33]

6. 어록[편집]


나비처럼 날아서 처럼 쏜다.[34]

(Float like a butterfly, and sting like a bee.)


그게 다냐?[35]


내가 분명히 말했지, 내가 진정한 챔피언이라고!

내가 분명히 말했지, 내가 세계 챔피언이라고![36]


절대로 누가 나를 막아설지에 대해 떠들어대지 마! 아무도 날 막을 수 없어!


나는 세상을 뒤흔들었어![37]


이 경기를 위해 악어와 레슬링을 했지. 고래와 몸싸움을 하고, 번개에 수갑을 채웠고, 벼락을 감옥에 집어넣었어. 난 그만큼 강하다고(bad). 저번 주에는 바위를 죽였고, 돌에 부상을 입혔고, 벽돌을 입원시켰지. 너무 사나운 나머지 약을 병들게 한다고. 강하고, 빠르지. 어젯밤에는 스위치를 내리고 불이 꺼지기도 전에 침대에 들어갔지. 링 위에서 댄스를 보여주마. 포먼은 날 볼 수도 때릴 수도 없을 거야. 너희들 모두 포먼이 이길 거라고 생각하는 거 다 알아. 하지만 두고 봐라, 내가 얼마나 위대한지![38]


난 윗몸 일으키기를 몇 회나 하는지 세지 않아. 힘들기 시작할 때부터 세지.

내가 고통을 느끼기 시작할 때, 그때가 내가 숫자를 세기 시작할 때야.

그때부터가 진짜니까. 그게 당신을 챔피언으로 만들어주는 거야.[39]


알지도 못하는 유색인종한테 총을 쏘라고? 왜 쏴야 하는가? 날 깜둥이라고 부른 적도 없고, 날 줘팬 적도 없고, 기르는 개를 시켜서 날 물게 한 적도 없고, 내 국적을 박탈한 적도 없는데?[40]


나는 당신들이 아니라 내가 원하는 챔피언이 되겠다.

베트콩들은 우리를 깜둥이라고 욕하지 않는다.

베트콩과 싸우느니 흑인을 억압하는 세상과 싸우겠다.


국내에서 흑인들은 개만도 못한 취급을 받고 있다.

그들은 왜 내가 군복을 입고 베트남까지 가서 싸우기를 원하는가?

만약 내가 입대해서 베트콩과 싸우는 것이 2200만 명이나 되는 미국 흑인의 자유와 평등을 보장할 수 있다면,

미국 정부는 나를 징집할 필요도 없다.

그렇게만 된다면, 나는 내일 당장 내 발로 입대하겠다.


나는 알라의 법에 복종해야 한다.

내 신념을 지키는 한, 나는 잃을 게 없다.

우리 흑인들은 이미 노예로 끌려온 지 400년이 지나도록 여전히 감옥에 갇혀 있는 거나 마찬가지다.


나는 백인들이 결코 마음대로 할 수 없는 한 명의 '검둥이'가 되기로 결심했다.

한 명의 '검둥이', 백인들이 어찌할 수 없는 '검둥이' 말이다.[41]


나는 이슬람교의 성직자로서 미국 육군 입대를 거부한다.[42]


'캐시어스 클레이'는 백인들이 내 노예주에게 준 이름이다.

지금부터 난 자유롭고 누구에게도 속하지 않으므로, 난 노예가 아니므로,

백인들의 이름을 반납하고 아름다운 아프리칸의 이름을 선택한다.


사람들은 나에게 영화 속 록키의 백인 이미지를 덧칠했다. 예수, 원더우먼, 타잔, 록키. 미국은 늘 그렇게 백인 이미지를 만들어 왔다.[43]


나는 미국이다.

나는 당신이 모르는 한 부분이다.

흑인이고, 자신감 넘치고, 건방지다.

내 이름도, 내 신앙도 당신과 다르다.

내 목표는 나만의 것이다.

내게 익숙해져라.


그저 직업일 뿐이다.

풀들이 자라나고,

새들이 날아다니고,

파도가 모래를 덮치고,

나는 그들을 때려 눕힌다.


기자 : "왜 원투 펀치만으로 얼굴을 때리는 플레이만 하는 거죠?"

알리 :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니까요."


권투란 수많은 백인들이 두 흑인끼리 서로 때리는 걸 지켜보는 것이다.


위험을 감수하지 못할 정도로 용감하지 않은 사람은 인생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사람들이 도전을 두려워하는 이유는 믿음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나는 나 자신을 믿는다.


나는 나 자신을 믿었고, 이제는 다른 이들의 선함을 믿는다.


타인에 대한 봉사는 이 지구에 세 들어 사는 것에 대해 내는 임대료다.


나는 당신이 원하는 대로 될 필요가 없다. 나는 내가 원하는 대로 될 자유가 있다.


만약 당신의 꿈이 당신을 두렵게 하지 않는다면, 그 꿈은 충분히 크지 않은 것이다.


상상력이 없는 사람에게는 날개가 없다.


사람을 지치게 하는 건 눈앞의 산이 아니라 신발에 스며드는 모래알이다.


내 마음이 그것을 상상할 수 있고, 내 마음이 그것을 믿을 수 있다면, 나는 그것을 성취할 수 있다.


50살이 되어서도 20살 때와 똑같이 세상을 바라본다면 30년 삶을 헛 산 것이다.


나이는 당신이 생각하는 만큼이다. 당신은 당신이 생각하는 만큼 나이 먹었다.


곰팡이가 핀 빵에서 페니실린이 나올 수 있었다면 당신에게서도 뭔가 나올 수 있을 것이다.


내가 농담하는 방식은 진실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그게 세상에서 가장 웃긴 농담이다.


멋진 답이 떠오르지 않을 때에는 침묵이 금이다.


국가 간의 전쟁은 지도를 바꾸기 위한 것이다.

그러나 가난과의 전쟁은 세상을 바꾸기 위한 것이다.

(Wars of nations are fought to change maps. But wars of poverty are fought to map change.)[44]


우정은 학교에서 가르쳐주지 않는다. 그러나 우정의 참 뜻을 모른다면 아무것도 안 배운 거나 다름없다.


우리에겐 모두 똑같은 신이 있다. 우린 그저 그를 다른 방식으로 대했을 뿐이다.


강, 연못, 호수, 개울. 이름은 다 다르지만 모두 물을 담고 있다. 종교도 똑같다. 모든 종교는 진실을 담고 있다.


자유란 자신의 종교를 따를 수 있다는 뜻일 뿐만 아니라 옳고 그름을 선택할 책임을 진다는 뜻이다.[45]


챔피언은 체육관에서 만들어지지 않는다. 챔피언은 욕망, 꿈, 식견과 같이 그 사람의 내면 깊은 곳에서 만들어진다.


내가 한 모든 일은 목적이 있고, 모든 신은 목적이 있어 존재한다.

다른 사람들은 기쁨을 알지도 모르지만, 기쁨이 행복은 아니다.

인간을 쫓는 그림자에 불과하다.


나는 링 위에 오르기 전 마음속으로 수십, 수백번을 되뇌었다.

하지만 패배한 상대는 언론과 내게 입으로 수십, 수백번을 떠벌렸다.


패배하는 것이 어떤 건지 아는 사람만이 영혼의 바닥까지 닿을 수 있으며, 승부에서 승리하기 위해 필요한 여분의 힘을 낼 수 있다.


나는 훈련의 매 순간을 싫어했지만, 난 그때마다 되뇌었다. "지금 열심히 하면, 챔피언으로서 남은 생애를 보낼 수 있어."


당신은 죽을 만큼의 노력을 해야만 한다. 당신은 다른 사람들보다 더 빨라야 하고, 더 뛰어난 기술과 더 뜨거운 열정이 있어야 한다.

기술보다 열정이 더 중요하다. 열정이 있는 자는 전진하게 되어 있다.


불빛 아래서 춤을 추기 전까지, 나는 길을 달린다.


남들의 말을 들을 것인가, 자신만의 목소리를 들을 것인가?

사람들은 그것을 '할 수 없다'고 말하지만, 당신은 그것을 '할 수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자기 내면의 목소리를 들으라. 자신을 믿는 사람들이 해낸 것은 '불가능이란 없다'는 것이다.


당신이 나만큼 위대하다면 겸손해지기 힘들다.


나는 가장 위대한 자다. 때려눕혔을 뿐 아니라, 경기를 선택했다.


나는 가장 위대한 자다. 내가 깨닫기도 전에, 내가 말했다.


나는 권투보다 위대하다.


나의 유일한 실패는 내가 진정으로 얼마나 위대한지 깨닫지 못한 것이다.


가장 위대한 사람도 한 때는 초보였다. 그 첫걸음을 내딛는 걸 두려워하지 마라.


한 마리의 파리가 쇠쟁기를 끌 수 있다고,

그대에게 말하는 나는 좋은 사람.

그게 어떻게 가능하느냐고 내게 묻지 말고,

파리에게 쟁기를 매어줘라.[46]


불가능이란 단지 세상을 변화시킬 힘 대신 쉽게 안주하며 살아갈 길을 찾는 소인배들이 내뱉는 핑계일 뿐이다.

불가능이란 사실이 아니라 의견이다.

불가능이란 단정될 것이 아니라 도전의 대상이다.

불가능이란 잠재력을 이끌어 내는 것이다.

불가능이란 영원한 것이 아닌 일시적인 것이다.

불가능이란 아무것도 아니다.(Nothing is impossible.)[47]


내가 링 위에 오르면 전 세계에서 수천만 명, 수억 명의 시청자가 TV로 보게 될 것이다.

이 얼마나 큰 에너지 낭비인가?

1초 만에 끝내고 돌아오겠다.


챔피언이 되면, 나는 낡은 청바지와 낡은 모자를 쓰고 수염을 덥수룩하게 기른 채로 아무도 날 알아보지 못하는 시골로 갈 것이다.

거기서 내 이름조차 알지 못하는, 날 있는 그대로 사랑하는 작고 귀여운 여우 같은 여자를 한 명 찾아낼 것이다.

난 그녀를 백만 달러가 넘는 대지 위에 세워진 25만 달러 짜리 내 집으로 데려가서 내 캐딜락과 수영장을 보여 줄 것이다.

비가 내릴 경우를 대비해서 만든 실내 수영장까지도.

그런 다음 그녀에게 말하리라.

"이건 모두 네 거야. 왜냐면 넌 날 있는 그대로 사랑하니까."


알리 : "제리[48]

, 전 링 위에 발을 올려놓은 사람 중 가장 위대한 파이터로 남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그날 밤 엄청난 돈을 잃을 것이고요. 이번 경기는 20세기 권투 역사상 가장 큰 이변으로 남게 될 것입니다."

제리 : "자네는 말로만 떠드는 것 같소. 역사상 최고의 파이터가 아니라, 최고의 허풍쟁이가 아니오?"

- 1964년 소니 리스턴과의 경기[49]

전 인터뷰에서. 알리는 이후로 자신이 한 말을 그대로 지킨다.


어린 시절에는, 누군가에게 "난 챔피언이 될 거야"라고 말하는 건 아주 쉬운 일입니다.

"그리고 내가 챔피언이 된다면, 내가 돌아와서 너네들이 틀렸다는 걸 알려줄게."

"난 언젠가 위대한 의사, 치과의사가 될 거야. 나는 과학자가 될 거야. 난 대통령이 될 거야."

하지만 아주 극소수의 사람들만이 그 말을 이루고 집에 돌아가서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내가 말했지?"


지나간 날에 가치를 매기지 말고, 남은 날을 가치 있게 만들어라.

(Don't count the days. Make the days count.)[50]


나는 모든 이의 권리를 존중하는 유머 있는 흑인으로, 자유와 정의, 그리고 평등을 위해 싸운 사람으로 기억되길 바란다. 흑인이면서 장애인인 내가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싸워온 것처럼, 사회의 그늘진 곳에서 소외받는 많은 사람들이 세상과 맞서 승리했으면 좋겠다. '포기하지 않는다면 성공은 가까운 곳에 있다'는 것을 당신들에게 주었다면... 나, 알리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


7. 가족 관계[편집]


  • 존 클레이(증조부)
    • 허먼 H. 클레이(조부)
      • 캐시어스 마셀러스 클레이 시니어(父)
        • 루돌프 발렌티노 '라만 알리' 클레이(남동생)
      • 네테니얼 클레이
      • 이바 클레이
      • 이외에 이름이 안 알려진 고종 형제들 3명이 있다.
  • 샐리 앤-클레이(증조모)
  • 에디스 그리츠하우스(조모)

  • 에이브 오'그레이디(외증조부)
    • 존 르위스 그레이디(외조부)
      • 오데사 그레이디(母)
      •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남매 5명이 있다.
  • 버디 B. 모어헤드(외조모)

  • 손지 로이 (1처)

  • 벨린다 '칼릴라 알리' 보이드(2처)
    • 메리윰 알리(장녀): 미국에서 방영된 감옥 언더커버 다큐멘터리인 A&E의 "60 days in"에 출연한 바 있다. 국내에서는 히스토리 채널에서 방영되었다. 직업은 사회복지사이며 주 업무는 갱단 가입 방지이다.
    • 자밀라 알리 & 라셰다 알리(차녀 쌍둥이)
    • 무하마드 주니어(장남)

  • ?
    • 미야 알리(3녀)
    • 칼릴라 알리(4녀)

  • 베로니카 포르쉐(3처)
    • 하나 알리(5녀)
    • 레일라 알리(6녀): 아래 문단에서 나오듯 여성 권투 선수로 활동했다. WBC, WIBA, IWBF, IBA 수퍼 미들급 챔피언, IWBF 라이트 헤비급 챔피언을 지냈다. 1999년 데뷔하여 2007년 은퇴 까지 총 전적 24전 24승 무패, 21KO의 완벽한 커리어를 자랑했었다. 아버지의 압도적인 위상에 밀릴 뿐이지 본인 스스로도 여성 프로 복싱에서 살아 있는 전설이라 불릴 만한 선수였다.
      • 커티스 무하마드 콘웨이 주니어(외손)
      • 시드니 주르딘 콘웨이(외손녀)

  • 욜란다 윌리엄스(4처): '로니 알리'라는 이름으로 더 알려져 있다. 1986년 11월 19일에 결혼하여 알리가 세상을 떠날 때 까지 곁을 함께한 마지막 부인이며, 현재 무하마드 알리 재단에서 활동 중이다.
    • 아사드 아민 알리(차남/양자)

  • 밥 월시(2사위)
    • 비아지오 알리 월시(외손. 라셰다의 장남)
    • 니코 알리 월시(외손. 라셰다의 차남)

  • 커티스 콘웨이(4사위)
    • 카메론 콘웨이 & 켈튼 콘웨이
    • 레일라니 콘웨이


8. 여담[편집]


  • || {{{#!wiki style="margin: -5px -10p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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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당 사진은 1965년 소니 리스턴과의 2차전에서 KO승을 거둔 뒤 그에게 포효하는 모습. 이 당시 신인 선수였던 알리는 당대 최강의 복서 중 한명이었던 리스턴을 상대로 압도적인 언더독 판정을 받고도 1차전에서 TKO승, 2차전에서 KO승을 거두며 복싱의 새로운 시대를 열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또한 이 경기는 그가 '캐시어스 클레이'가 아닌 ‘무하마드 알리’라는 이름으로 출전한 첫번째 경기다. 이 사진에는 비하인드 스토리가 있는데, 현재는 알리를 대표하는 상징적인 사진이지만 이 사진을 찍은 사진 기자는 당시 인턴 기자였다. 사진 찍기 좋은 자리에서 경기를 보길 원했지만 상사가 그 자리를 차지하고 면박을 주었다고 한다. 그렇게 인턴 기자는 밀려난 자리에서 최고의 사진을 찍어냈고, 그 상사는 알리의 가랑이 사이에 놀란 표정으로 남게 되었다.

  • 상대를 교묘하게 비웃고 도발하는 트래시 토크와 거침없고 화려한 언변으로도 유명했으며, 단순히 거칠고 조롱적인 발언뿐만이 아니라 언변 속에 녹아있는 뛰어난 라임 구성과 적인 문장 구성이 탁월했고 대중들이 자신을 지지하게끔 하는 '정치적인 시'(Political poetry)에 가까운 발언을 잘 구사했다. 이를 바탕으로 경기 전 선수간의 언쟁을 일으켜 대중들에게 흥미를 유발시키는 걸 즐겼다. 무하마드 알리의 언변은 단순히 마케팅에 국한되는 흥미 유발과 상대방에 대한 도발만이 아니라 이외의 영역에서도 잘 나타난다. 위의 어록 문단만 봐도 그렇다. 상기한 베트남 전쟁 징집 반대로 인한 법정 공판에서의 항변과, '나비처럼 날아서 벌처럼 쏜다'라는 말도 그의 언변 능력을 잘 나타내는 사례이다. 또한 알리는 '스포큰 워드'[51]의 달인이었다. 혹자는 무하마드 알리의 이런 언어 구사가 힙합에 영향을 줬다고도 한다.#

  • 스포츠계에서 최고의 선수에게 붙이는 'Greatest Of All-Time', 줄여서 'GOAT'라고 하는 수식어는 무하마드 알리로부터 시작됐다. 알리가 스스로 'I am the Greatest!'(나는 가장 위대한 사람이야!)라는 말을 현역 시절 자주 하고 다녔고, 실제로 알리가 역대 최고의 권투 선수로 평가되며 이러한 수식어가 안착됐다. (자신이 한 말을 현실로 만든 GOAT 그 자체다!! 2.7초 만에 헤비급의 몸으로 12 ~ 13번의 펀치를 날린 것, 지금까지도 복싱은 물론 MMA에서도 쓰이는 풋워크인 알리스텝을 만든 것, 알리셔플을 통해 진짜로 나비처럼 날아서 벌처럼 쏘는 것을 보여준 것, 아웃복서 말고도 스워머 스타일, 카운터 복서 등의 다양한 스타일을 완벽히 구사 한 것, Rope-a-dope 같은 엄청난 전략들을 선보인 것과 춤을 추듯 풋워크를 밞으며 링을 지배한 것 등의 복서로서의 업적과 사회운동가로서의 업적 모두 엄청난 평가를 받아서 역대 최고로 평가되게 되었고 알리 스스로가 자주 한 말인 ‘I am the Greatest!’를 현실로 만들게 되었고 GOAT로 평가되며 GOAT 그 자체가 되었다!!) 조지 포먼: 무하마드 알리는 복싱보다 거대하고 위대하다!, 알리는 GOAT다! 조지 포먼의 평가 말고도 다양한 사람들의 평가에서도 GOAT로 평가받는다. (포먼은 특히 알리를 높게 평가하고 존경했다.)

  • 알리를 상징하는 말인 "나비처럼 날아서 벌처럼 쏜다"라는 말은 원래 경기 전의 두려움을 없애기 위한 허세이자 상대를 압도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표출하는 도발이었으며, 그는 정말 본인의 말대로 알리스텝과 알리셔플을 이용하여 다양한 콤비를 넣거나 다양한 전략을 보여주는 플레이하며 수많은 승리를 거두었고 이와 같은 경기 전 도발을 통한 마케팅은 스포츠 계에서 하나의 전술이 되었다. 알리의 이런 언행일치는 마케팅과 캐릭터를 일치시킨 모범적인 사례로 유명하며 특히 빠른 스텝과 디펜스, 펀치 콤비네이션은 후배 선수들에게 귀감이 되었다. 2006년에 개봉한 애니메이션 에서는 "캐딜락처럼 날아서 BMW처럼 쏜다"로 패러디되었다.[52] 지코의 '천둥벌거숭이'에서 Jvcki Wai의 벌스 중에도 '알리처럼 날아서 나비효과'라는 가사로 인용되었다.

  • 현란한 풋워크로도 유명한데 아예 '알리 스텝'이란 풋워크도 따로 있다. 다른 스텝에 비해 빠른 속도를 자랑하여 복싱은 물론이고 종합격투기에서도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는 기술이다.(복서 중에선 파퀴아오, MMA선수 중에선 도미닉 크루즈, 이스라엘 아데산야, 맥스 할로웨이가 알리 스텝을 쓰는 선수로 유명하다.)'알리 스텝'에 대한 설명 조 루이스에 의하면 이소룡도 알리를 존경하여 격투기 트레이닝의 90% 이상을 이 풋워크 연습에 투자하였다고 한다. 슈거 레이 로빈슨이 스텝의 중요성을 일깨운 이후, 스텝의 발전과 활용도를 확장 시킨 것이 알리라고 할 수 있다.

  • 프로 데뷔 이후 강제 공백기를 맞이하기까지인 1960년부터 1967년까지의 알리는 30전 전승,[53] 타이틀 9차 방어에 성공하여 복싱 역사상 가장 압도적인 선수로 평가 받는다. 그중에서도 1966년 3월부터 1967년 3월까지가 가장 압도적이었는데, 알리는 그 1년 사이에만 무려 7번의 경기를 치뤘고 모두 승리했다. 단순 경기수만 놓고 본다면 1961년에 8번, 1962년에 6번의 경기를 치른 적이 있긴 하다. 하지만 66~67년도의 기록이 대단한 점은, 이 시기가 바로 알리가 베트남전 징병을 거부하면서 FBI에게 일거수일투족을 감시 당하는 등 미국 정부에게 가장 심한 압박을 받는 동시에 법정 싸움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시기였다는 점이다. 거기다 신인 시절이었던 61~62년과 달리 이 당시의 알리는 헤비급 챔피언으로서 매 경기가 타이틀 방어전이었기에 대중들의 관심도 엄청나게 높았던, 그야말로 정신적 고통이 가장 심할 때였다. 그리고 알리는 이 '1년 간 7경기 전승'이라는 대기록을 마지막으로 징병 거부에 대해 유죄 판결을 받아 선수 자격과 챔피언 타이틀을 박탈 당하고, 1967년 1심에서의 유죄 판결이 1970년 2심에서의 무죄 판결로 뒤집어질 때까지 선수 생활을 아예 하지 못했다. 즉 멀쩡히 유지 중이던 챔피언 타이틀을 강제로 빼앗긴 것인데, 이 때문에 일각에서는 알리가 '강제 공백기'만 겪지 않았더라면 우리가 아는 지금의 알리보다 훨씬 더 압도적인 모습과 대단한 기록을 써내려 갈 수도 있었을 거라며 아쉬워 하기도 한다. 이후 복귀는 1967년 3월 22일 조라 폴리와 치른 방어전 이후로 약 3년 7개월이 지난 1970년 10월 26일 제리 쿼리와의 경기였다.

  • 은퇴 후 토크쇼에서 마이크 타이슨, 슈거 레이 레너드와 함께 출연한 바 있다. 토크쇼 진행 중 최근 주목하는 복서가 누구냐는 질문에 알리는 타이슨을 뽑았는데, 이 후 타이슨과 레너드가 깜짝 게스트로 등장한다. 이 당시 알리는 파킨슨병을 앓아 건강이 좋지 않았는데도 이 두명이 스테이지로 걸어오자 예상 외의 등장에 깜짝 놀랐는지 벌떡 일어난다. 진행자가 알리에게 "당신의 전성기 때 이 친구(타이슨)과 싸우면 누가 이길 것 같나요?"라고 하자 알리가 말대신 손으로 타이슨을 가리키며 "난 주먹이 세진 않았지만 빨랐어요. 만약 저 친구가 날 쳤다면..."이라고 말하며 뒤로 넘어지는 액션을 취해 웃음을 주기도 했다. 그러자 타이슨이 손사래를 치며 "전 알리의 말을 안믿어요. 왜냐하면 저분은 저보다도 강한 펀쳐인 조지 포먼, 어니 세이버스[54]에게 맞고도 이겨낸 위대한 챔피언이에요. 저도 제가 대단한 걸 알지만, 모두의 머리가 고개 숙이고, 모두의 혀가 진실되게 말해야하는 가장 위대한 사람은 여기 이 분입니다."라고 답했고, 방청객들은 환호했다.# 여기서 타이슨이 뒷붙혀서 하는 말이, "오히려 꼬맹이었던 저야 말로 알리의 모습을 지켜보면서, 그의 행동을 따라하면서 '나는 무적이다, 나는 누구와 싸워도 이길수 있다'라는 자신감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알리는 제가 강해질수 있게 된 힘이었어요" 단순한 기술적인 측면뿐만 아니라 쇼맨십이나, 자신감이나, 선수로서 마음가짐 같은 당장 피지컬 외, 그리고 경기 외 사회적인 면으로도 알리가 후대 복서들에게 남긴 족적을 느낄 수 있다.

  • 1976년 6월 27일 한국에 온 적이 있다. 이준구의 초청으로 인해 온 것인데, 사실 당시 유신 독재 체제와 사회적 문제 및 사건들로 인한 국가 분위기를 환기시키기 위한 정권의 이벤트에 가까웠다. 이준구의 친구인 중앙정보부 요원이 이준구에게 "알리를 한국에 데려올 수 있느냐"라고 물어본 것이 발단. 당시 박정희 대통령이 알리의 팬이기도 했다. 알리와 한국간의 금전 거래는 하나 없는 무대가성 방문이었다고. 알리는 한국에서 3박4일 간 머물렀으며, 신세계조선호텔에서 묵었고 MBC의 특집 방송에 출연, 육영수 묘역 방문, 공장 방문, 군 부대 방문 등의 일정을 소화하고 갔다. MBC에서 특집 쇼를 방송하면서 여자 연예인들이 알리와 껴안거나 함께 춤을 췄다는 이유로 당시 방송심의위원회의 경고를 받아서 그 다음 주에 경고받은 내용을 방송 전에 내보냈다. 알리의 출국일이 돼서야 청와대 측의 접근이 있었으나 비행기 시간 때문에 박정희와 만나진 않았다. 입국 직후 서울 시내에서 3시간 동안 카 퍼레이드를 벌였는데 200만 명의 인파가 몰렸다. 당시 서울 인구가 725만 명인 것을 생각하면 당시 알리의 인기가 얼마나 드높았는지 알 수 있다. 이 카 퍼레이드는 MBC가 생중계했다.참고

  • 자살하려는 사람을 설득해서 구해낸 적이 있다. 자살을 시도하려는 남자는 알리와 같은 흑인 남성이며 당시 나이는 21세였다. 1981년 1월 19일, 이 청년은 투신자살을 하려고 LA의 한 건물 9층 난간에 올라가 있었고, 현장에는 경찰이 출동한 상태였으며 시민들도 몰려들어 있었다. 그런데 마침 그곳 근처를 알리가 지나가고 있었다. 이런 자살시도 소동이 벌어진 것을 목격한 알리는 사태를 파악하자마자 그 청년이 있는 건물 9층으로 뛰어 올라갔다. 그 청년은 건물의 실내가 아닌 건물 바깥쪽에 위치한 계단의 난간에 있었고, 알리는 우선 계단쪽으로 직접 들어가진 않고 건물 실내의 창문으로 몸을 내밀어 그 청년을 바라보며 설득을 하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청년이 "세상 사람들 그 누구도 내가 죽는다 한들 관심조차 없을 텐데, 왜 당신은 나한테 관심을 주는 거죠?"라고 묻자 알리는 "당신은 제 형제니까요. 전 당신을 사랑합니다. 전 그저 당신을 도와주고 싶어요."라고 대답했다. 이후 알리는 청년이 걸터앉아 있는 난간으로 직접 다가가서 그 청년을 따뜻하게 안아주며 등을 두드려줬고, 청년은 스스로 난간에서 내려와 알리와 함께 건물 바깥까지 내려왔다. 건물 1층에서 알리와 청년이 함께 나오자 현장에서 이 광경을 목격한 시민들은 알리를 연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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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80년대 WWF에 출연하며 락 앤 레슬링 커넥션의 주축으로 WWE 전설의 시작을 알리는데 큰 공헌을 했으며 WWF 레슬매니아 I의 호스트로 초대받았다.

  • 1996 애틀랜타 올림픽 때는 최종 성화 점화자로 등장하여 손을 떨면서 성화대에 불을 붙였다. 당시 파킨슨병으로 투병중이던 알리가 쉽게 불을 붙이게 하기 위해 이미 완성되어있던 성화대의 설계를 변경했다고 한다.

  • 그의 딸 라일라 알리도 여자 프로 권투선수로 활약했고 세계 챔피언 자리를 오랫동안 지키며 그 아버지에 그 딸임을 보여주었으며 라일라는 2007년 이후 은퇴한 상태. 방송 진행자 등의 일을 하는 듯하다.[55] 여담으로 라일라는 무하마드 알리의 세번째 부인이었던 베로니카 포셔 알리와의 사이에서 얻은 딸이며, 어머니의 외모를 이어받아서 아름답게 생겼다.라일라 알리의 최근 모습, 무하마드 알리와 베로니카. 또한 아디다스 광고에 아버지와 함께 출연해서 카리스마를 뽐내기도 했다.

  • 2012 런던 올림픽 개막식 때는 딸과 함께 휠체어를 타고 등장. 원래는 올림픽 오륜기 게양식에 같이 참가하려고 했지만 건강상 문제로 오륜기를 만져보는 것으로 대신했다.

  • 마이클 만 감독의 영화 <알리>에서 윌 스미스가 맡아서 알리의 일대기를 다루었다. 작품성은 좋았으나 흥행은 실패했고 이 영화는 한국에서 개봉 당시 상영시간이 길다고 30분 가까이 삭제하고 개봉했다가 언론에 보도되면서 더더욱 극장에서 외면당했다. 극장 수익으론 해외 수익까지 다 합쳐도 제작비도 못 건졌고 그나마 DVD 같은 2차 판권 시장은 꽤 괜찮게 팔려 수익을 거둬들였다.

  • 위 영화의 주제곡인 R. Kelly - The World's Greatest 또한 무하마드 알리로부터 영감을 받은 곡이다.

  • 이 사람을 바탕으로 만든 캐릭터가 바로 록키의 라이벌 아폴로 크리드다. 당시 영화를 찍을 때 스타 중의 스타였던 알리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을까 많은 사람들이 걱정했는데 실제 그는 록키를 보고 침이 마르도록 칭찬을 했으며 심지어 스탤론에게 헌정하는 시를 써서 바치기까지 했다. 또한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내가 진짜 아폴로 크리드다!!" 라면서 뛰쳐나와 스탤론과 스파링을 벌이기까지 했다고.보러 가기 여담으로 록키에는 그의 라이벌 조프레이져도 까메오로 잠깐 출연한다. 생각해보면 록키에서 아폴로 크리드는 챔피언 자리에 만족하지 않고 무명 복서였던 록키에게 도전할 기회를 준 대인배에 록키와 명승부를 펼친 훌륭한 복서였으니 무하마드 알리의 신경을 크게 거슬리게 할 것도 없었다. 딱히 있다면 영화 초반에 록키와의 경기를 계획하면서 엄청 거만한 모습을 보였다던가, 록키와의 경기에서 초반에 방심했다가 훅 갈 뻔한 장면 정도?

  • ebs 지식채널 e에서 무하마드 알리를 주제로 해 방영한 적이 있으며 5분 짜리 영상에 무하마드 알리의 생애를 감동적으로 요약해 놓았다.

  • 1977년 개봉한 알리의 생애를 다룬 전기 영화 The Greatest(더 그레이티스트)에서 나온 주제가 The Greatest love of all이 유명하다. 부른 가수는 조지 벤슨.[56]

  • 이탈리아의 기자 오리아나 팔라치와 인터뷰를 가진 적이 있었는데 알리가 수박을 퍼먹으면서 연신 트림을 하는 등 매우 무례한 태도로 팔라치를 맞았다고 한다. 팔라치는 두번째 트림을 하는 것까진 참았으나 알리가 세번째 트림을 하자 그에게 마이크를 집어 던지면서 "이런 무식한 촌놈이 챔피언이라니!"라고 욕했다고 한다.

  • 많은 1세대 미국 무슬림이 그랬듯이 흑인우월주의를 지향하는 신흥종교였던 네이션 오브 이슬람에 입교하였고 후에 교단과 함께 정통 수니 이슬람으로 전향하였다. 이후 알리 개인은 이슬람 신비주의인 수피즘에 깊게 심취했다.

  • 2015년 12월에 미국 공화당의 대선주자 도널드 트럼프가 대통령이 되면 무슬림들을 입국금지 시킬 것이라는 발언으로 논란이 되자, 알리는 즉각 성명을 내고 "나는 무슬림이다."라고 말문을 열며 "우리 무슬림들은 이슬람을 자신의 개인적인 이해를 위해 쓰는 사람에 맞서 싸워야 한다" 라고 강조하는 동시에 "파리나 샌 버나디노, 그밖의 세계 어디에서도 무고한 사람을 죽이는 것은 결코 이슬람이 아니다." 하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는 알리가 언어능력을 잃기 전 공식석상에서 행한 마지막 발언으로 알려지며 주목을 받았다. 과연 그답게 마지막 말 역시 피부색과 종교, 성별, 빈부 할 것 없이 차별로 점철된 이 세상에 철권을 날린 셈이다.

  • 이탈리아 출신의 싱어송라이터인 마르코 멘고니의 2018년 노래 중 Muhammad Ali(무하마드 알리)가 있다.

  • 알리의 개명 전 이름 '캐시어스 클레이'를 본딴 '카시우스(Cassius)'라는 바다악어가 있다. 지구상에 현존하는 가장 거대한 파충류인 바다악어 중에서도 손에 꼽힐 정도의 덩치를 자랑하는 악어다.

  • 미국뿐만 아니라 1960,70년대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 여러 나라들에서도 인지도가 높은 흑인 스포츠 스타여서 가끔씩 아프리카의 여러 나라들로부터 초청을 받거나 방문하기도 했었다.

  • 마이클 조던 같은 다른스포츠의 GOAT들이나 유명인들과의 만남등 다양한 활동이 있다.

  • 복싱과 관련된 웹툰, 영화, 만화, 애니 등 다양한 콘텐츠의 캐릭터들에 영향을 주었고 복싱과 관련이 없더라도 그와 관련된 콘텐츠도 많고 영향을 주었다. (광고에도 많이 나왔다.)


  • 콜드플레이의 7집 앨범 수록곡 중 Everglow의 Single버전에서 노래 후반부에 알리의 연설이 나온다.


  • 알리셔플(ali shuffle)



노가드 회피 비슷하게 상대방을 농락하면서 상대의 시선과 타이밍을 빼앗는 기술.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에도 쇼맨십 기술이라는 얘기를 많이 들었지만 알리는 이 기술이 단순히 광대놀음이 아닌 실용성을 가진 기술이라고 설명했고 또 실제 시합에서 여러번 사용하기도 했다. 대표적으로 클리블랜드 윌리엄스와의 경기, 브라이언 런던과의 경기, 조지 포먼과의 경기 초반, 조 프레이저와의 3차전인 Thrilla In Manila 경기에서 사용하였다. 현재까지도 쓰이며 복싱은 물론 MMA에서도 쓰인다.

알리의 설명


  • 1978년 영화 천국의 사도(Heaven Can Wait) 제작 당시 주연으로 맡기를 제안받았지만, 선수생활 집중 이유로 거절하였다.


[1] 원래 침례회 신자였으나 1964년 말콤 엑스가 이끄는 네이션 오브 이슬람에 가입하면서 이슬람으로 개종함과 동시에 '무하마드 알리'라는 이름으로 개명했다. 이후 그는 1965년 소니 리스턴과의 2차전부터 무하마드 알리라는 이름으로 출전하였다.[2] 현지 시각으로는 6월 3일, 한국 시간으로는 6월 4일 1시 40분경에 세상을 떴다.[3] 전성기 시절 시합 체중은 90kg대 초중반. 커리어가 갈수록 체중이 점점 늘었다.[아마추어] [프로] [4] 전미 아마추어 복싱 선수권[5] 미국의 3대 아마추어 복싱대회 중 하나.[6] 미국의 3대 아마추어 복싱대회 중 하나.[7] 세계적인 복싱 매거진 The Ring에서 수여하는 타이틀로, 4대 메이저기구 다음 순위의 타이틀이다. 당시에는 IBF와 WBO가 창설되기 전으로, 양대 메이저기구 다음 순위의 타이틀.[8] North American Boxing Federation[9] 떠도는 이야기 중에 식당에서 밥을 먹다가 인종차별을 당해 로마 올림픽 때 받은 금메달을 오하이오 강에 던졌다는 이야기는 거짓이다. 이른바 강에 금메달을 던졌다는 건 책과 영화를 통해 허구가 가미된 이야기라는 것이다. 다음은 미국 켄터키 주 루이빌의 무하마드 알리 센터의 설명. "His resentment was dramatized in the 1970s book and movie, The Greatest. In this symbolic tale, Cassius Clay and his buddy sat down at a restaurant counter and heard a man's voice boom, "I done told you, we don't serve no niggers." Hurt and humiliated, Clay was described as passionately flinging his gold medal into the depths of the Ohio River. The story was fiction, but the pain is fact."[10] 정확히는 2.7 ~ 2.8초 정도인데 2.8초 보단 2.7초에 가깝고 2.7초 보단 2.6초에 가깝다. 즉 2.6 ~ 2.7초 라는 시간에 헤비급의 몸으로 12 ~ 13대의 펀치를 날린 셈이다.[11] 때문에 이 기자 회견은 '스포츠 역사상 최고의 언론 플레이'로 불리며, 높은 전략적 가치를 담고 있다.[12] 콩고와 미국은 6시간(미 동부)-9시간(미 서부) 시차가 나므로 미국인들은 7시에서 10시 사이에 이 경기를 관람하게 된다.[13] 마이클 만 감독의 영화 알리를 보면 이 점이 잘 묘사되어 있다. 기세 좋던 알리가 로프에만 기대자 사람들은 다들 그가 기세가 죽어 밀린다고 생각하고 알리 측 사람들은 "로프에서 떨어져!!"라고 소리를 지른다. 그러나 알리는 맞아가면서도 집요하게 포먼을 도발하고, 겉으로 보기엔 밀리면서도 움직임이 크게 느려지지 않는다. 그러나 포먼은 때리면서도 점점 지쳐가고 나중엔 눈까지 풀리는데, 이때 알리의 반격이 시작된다. 비장한 OST와 알리의 결의에 찬 표정, 포먼의 기죽은 듯한 표정까지 영화의 하이라이트를 장식하는 장면.[14] 포먼은 이 경기 직전 3년간 치른 12경기 중 11경기를 2회 이내에 KO로 끝냈고, 다른 한경기조차 5회 KO로 끝냈다. 즉 6라운드 이상의 장기전은 거의 경험해본 적이 없었다.[15] 알리의 펀치 직전을 보면 포먼이 가드는커녕 아예 두 팔을 축 늘어뜨리고 있다. 체력적으로 완전히 나가떨어진 것이다.[16] 실제로 경기가 끝난 후 알리는 자신의 승리를 축하해주는 사람들에 둘러싸인 채 잠시 바닥에 주저앉았다.[17] 인용 및 편집 발췌[18] 당시 복싱 헤비급 세계 챔피언의 위상은 엄청났기 때문에 대통령과의 일대일 면담도 그렇게 크게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고 한다. 닉슨도 프레이저의 요청에 당연히 그렇게 되어야 하는 일이며, 곧 알리가 복귀할 수 있을거라고 긍정적인 대답을 줬다.[19] 베트남 전쟁 거부로 인해 선수 자격이 박탈된 것이 백인 권력에 의해서인데 그 선수 자격을 다시 발급받는 것도 백인 권력에 의해서라는 점이 자존심이 상했던 것으로 보인다.[20] 2021년 2월 7일 암 투병 중 사망.[21] WBC 타이틀은 레온 스핑크스가 챔피언 타이틀 획득 이후 다음 경기를 지명 도전자인 켄 노턴이 아니라 무하마드 알리와 다시 붙겠다고 선언하면서 규정위반으로 박탈되었다.[22] 12분 27초[23] 일반적으로 슈거 레이 로빈슨과 함께 복싱 역사상 최고의 선수로 손꼽힌다!!![24] 보통 KO당한 리스턴을 내려다보며 포효하는 사진이 유명하기에 알리가 KO승을 거두고 나서야 감정을 비로소 폭발시킨 것으로 느껴질 수도 있지만, 알리는 경기 내내 소니 리스턴에게 계속 말을 걸었다고 한다. 때문에 리스턴은 생전에 알리와의 경기를 회상하며 "미친 사람과 싸우는 줄 알았다"라고 말하기도 했다.[25] 많은 사람들이 간과하는 게 알리는 이런 쇼맨십을 역으로 상대방을 심리적으로 몰아붙이기 위해 치밀하게 계산된 행동을 한다는 것. 즉 "너한테는 가드 따위도 필요없다"라고 표현한다. 그리고 이런 행동이 계속 되면 상대는 점점 심적으로 몰리게 될 수밖에 없다. 심지어 전성기의 알리는 상대방의 펀치를 물 흐르듯 최소한의 동작만으로 슥슥 피해버리는 괴물이었다.[26] 이렇게 보면 게임스맨십과 능글맞음으로 똘똘 뭉친 것 같은 알리도 악감정이 실린 과격한 행동을 하거나 사생활에서 도덕적 문제를 일으키지는 않았다. 즉 유머를 추구하고 자기 표현이 풍부했을 뿐, 그로 인해 남에게 피해를 주거나 독선적이고 이기적인 행동 등의 '선넘는 짓'은 절대로 하지 않은 것이다. 알리는 실제로 다운되는 상대에겐 절대로 불필요한 추가타를 넣지 않았고, 상대가 그로기 상태에 빠졌을 땐 공세를 낮추며 심판에게 레프리 스탑을 요청하는 등 스포츠맨십을 지키는 면모도 보여줬다. 이는 링 밖에서의 과묵한 이미지와 달리 링 위에서는 다운된 상대에게도 추가타를 넣는 등의 과격한 모습을 보여준 조지 포먼과는 완전히 반대되는 부분. 재미있는 점은 알리가 포먼을 8라운드 KO로 잡아낼 때, 다운되는 포먼에게 충분히 추가타를 넣을 수 있는 상황이었는데도 알리는 시선과 몸의 방향만 따라갔을 뿐 공격을 하진 않았다. 은퇴 후 포먼은 이 순간을 이야기하며 자신이 넘어지는데도 때리지 않은 알리가 존경스러웠다고 말했다.[27] 훗날 알리도 점차 온건한 스탠스로 변화해 갔다. 사회적인 차별과 불공정함에 비판의 목소리를 내는 점은 한결 같았지만.[28] #[29] 알리와 테럴의 경기[30] 안타깝게도 두 선수의 또다른 공통점이 있다면 희소질환을 앓았다는 점이다. 로빈슨의 경우 1형 당뇨병을 앓았다.[31] 자유 훈장과 시민 훈장 두 개를 모두 수여받았다.[32] 상술했듯 알리 재단에서는 금메달을 버렸다는 얘기를 부인하고 있다.[33] '어쩌면 무하마드 알리는 천사였다'[34] 무하마드 알리의 가장 유명한 어록이다.[35] 조지 포먼을 상대로 6라운드 진행 중에 클린치 상태에서 포먼의 귀에 대고 한 말. 이에 덧붙여 "이거 실망인데? 사람들이 네가 좀 친다고 하던데, 완전 헛소문이구만! 지금 우리가 팝콘이나 튀기려고 링 위에 올라왔냐?"라고 도발한다. 포먼은 이때까지만 해도 자신이 이길 것이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그리고 이 말을 한 알리는 포먼을 8라운드 KO로 꺾고 챔피언 타이틀을 되찾는다.[36] 조지 포먼을 상대로 8라운드 KO 승리를 거둔 후 인터뷰에서 한 말.[37] 소니 리스턴을 상대로 승리를 거둔 후 인터뷰에서 한 말. 당시에 알리가 이긴 것 자체가 엄청난 센세이션이었다. 도박사들 사이에서도 배당율이 리스턴 7, 알리 1 수준이었고 알리는 데뷔한 지 얼마 안 된 신인에다가 리스턴은 당대 최고의 하드펀처로 손꼽히는 강자였다.[38] 조지 포먼과의 경기를 앞두고 월도프 아스토리아 호텔에서 열린 기자 회견에서 한 말이다.[39] 윗몸 일으키기를 몇 개나 하느냐는 질문에 답하며.[40] 1968년 2월 26일 베트남 전 징병거부의사를 밝히면서 한 말.[41] 이 발언과 위의 4개 발언 모두 베트남 전 징병을 거부하며 한 말이다.[42] 알리가 징병 거부에 대한 이유서에 작성한 내용이다.[43] 알리가 속한 이슬람교는 예수를 블랙 인디언으로 묘사한다. 대부분의 성인은 백인으로만 묘사되는 유럽계 기독교와 차별되는 부분.[44] 'change maps'와 'map change'로 두 문장의 대비를 이뤄 시적인 효과를 줬다.[45] 베트남 전쟁 징병을 거부하며. 알리는 종교적 신념을 이유로 징병 거부와 개명을 했다. 베트남 전쟁 당시 입대식에서 이름이 호명되면 한 발자국 앞으로 나가서 선서를 하면 입대식을 통과하는 것이었는데, 장교가 '캐시어스 클레이'라는 개명 전 이름으로 알리를 호명하자 알리는 나가지 않았다.[46] 소니 리스턴과의 1차 타이틀 매치를 하루 앞두고 알리가 질 것이라고 말하는 대중들 앞에서 즉석으로 낭송한 시라고 한다.[47] 아디다스 광고에서 쓰였던 대사로 유명하다.[48] 인터뷰어의 이름이다.[49] 당시 배당률이 7:1일 정도로 그 누구도 알리가 이길 것이라 생각지 않은 경기였다.[50] "count"란 단어가 "계산하다"와 "중요하다"라는 두 뜻이 있음을 재치 있게 활용한 말이다.[51] 한문으로는 '口語'. 말로 하는 시, 혹은 글을 뜻한다. 즉석에서 워드 플레이와 운율 구성에 초점을 맞춰 재치있게 언변을 구사하는 일종의 언어 예술이다.[52] 미국 VIP 의전차의 상징이 캐딜락이고, 독일 스포츠카의 대명사가 BMW다. 백악관에서 에스컬레이드를 개조한 방탄차량을 이용하고, BMW는 BMW M이라는 고성능 디비전으로 스포츠 세단의 역량을 극대화했다. 당시에는 8시리즈가 없었다.[53] 공백기 이후까지 합치면 1970년 10월의 제리 쿼리 전과 같은 해 12월의 오스카 보나베나 전까지 2연승을 추가하여 데뷔 이후 32연승이다. 보나베나 전의 다음 경기인 1971년 조 프레이저 전에서 프로 데뷔 이후 처음 패배했다.[54] 조지 포먼 못지 않은 권투 역사상 최고의 핵주먹 중 한 명으로, 이 토크쇼에서 알리가 자신이 겪어봤던 가장 강했던 펀처라고 말한 선수이기도 하다.[55] 2014년 팔콘 라이징 이라는 액션 영화에서 주인공의 누나로 나왔다. 애석하게도 액션 담당은 아니다.[56] 1986년 휘트니 휴스턴이 리메이크했으며, 해외에선 이 버전으로 잘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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