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함마드 무르시

덤프버전 :




이집트 제12대 대통령
무함마드 무르시
محمد مرسي | Muhammad Mursi


파일:무함마드 무르시.jpg

이름
무함마드 무함마드 무르시 이사 알 아이야트
محمد محمد مرسي عيسى العياط
출생
1951년 8월 8일
이집트 왕국 샤르키야 주 엘아드와
사망
2019년 6월 17일 (향년 67세)
이집트 카이로주
재임기간
제12대 대통령
2012년 6월 30일 ~ 2013년 7월 3일


1. 개요
2. 생애
3. 1년의 재임기간과 군부쿠데타
4. 사망
5. 평가



1. 개요[편집]


이집트의 전 대통령. 이집트 아랍 공화국 사상 최초의 민선 대통령이다. 범아랍 정당 무슬림 형제단의 당수를 겸임했고 이집트 시민혁명에 막대한 지분을 차지하는 세력이자 본인의 강경 지지기반인 이슬람 근본주의자의 목소리에 합치하는 국정운영을 펼쳤다. 하지만 혁명에서의 지분이나 정파의 강경함, 선명성과는 별개로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은 이집트 내에서 자신들의 강경함만큼 강력한 힘이 없었다.

게다가 지지세력의 요구에 부응하는 무르시의 정치행보는 민주주의가 아닌 근본, 원리, 극단주의적 독재로 변질되었고 사회전이 및 혁명변질을 우려하는 범국민적인 반발을 초래했다. 무르시 민선정부는 이를 타개할 국정장악력을 공포정치에서 찾는 우를 범한 끝에 민선정부의 부족한 정치력, 세속주의자 및 민주화 지지계층을 포함한 사회 전반의 민심이반, 정적과 청산되지 않은 군부 세력의 쿠데타로 1년 만에 무너졌다.


2. 생애[편집]


1951년 8월 20일에 이집트 북부의 아드와에서 태어났다. 1975년에 카이로 대학교 재료공학과를 졸업하고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 미국 남 캘리포니아 대학교에서 재료공학 전공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이후 1985년 이집트로 돌아와 자가지크대에서 교수를 지냈다. 학력과 이때까지의 경력만 보면 전형적인 이공계 엘리트출신으로 1991년 무슬림 형제단에 입당해서 정치인으로 변신했다. 이후 2000년부터 2005년까지 무슬림 형제단 소속으로 국회의원을 지냈다.

2010년 무함마드 엘바라데이IAEA 사무총장과 함께 "변화를 위한 국민행동"을 조직해 활동했으며, 2011년 이집트 혁명 이후에는 원외정당 무슬림 형제단을 모체로 '자유정의당'을 창당하고 얼마 못 가 열린 대통령 선거에서 뒤늦게 후보가 되었다. 무슬림 형제단은 당초 카이라트 샤티르를 후보로 선정했으나 샤티르가 테러 사주 혐의로 체포되어 대선 출마가 불가능해지자 부랴부랴 무르시가 대체 후보로 선정되었고 2012년 6월에 열린 대선에서 51.1%를 득표하며 48.9%를 득표한 군부 출신의 이슬람 세속주의자 샤피크 후보를 제치고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3. 1년의 재임기간과 군부쿠데타[편집]


재임 이전 후보 당시부터 친이슬람주의 성향을 노골적으로 표명한 무르시의 취임 후 종파갈등 및 각종 사회문제 표출은 격렬한 논란과 혼돈을 불러왔다. 하지만 더 큰 혼란은 국회를 장악한 살라피스트, 무슬림 형제단이 행정부 출범 6개월 뒤 신헌법 초안을 발표하면서 일어난다.

문제가 된 초안 내용은 대통령령+선언이 최종적 권한을 지니고 어떤 기관도 대통령령을 폐지할 수 없으며 사법부의 의회 해산권을 폐지하는 동시에 이슬람 율법 샤리아를 국가의 원칙으로 한다는 것이다. 이는 대통령에게 입법기능을 부여하고 사법부 기능을 제한한 뒤 사우디, 이란처럼 이집트를 신정국가로 만들려 했던 것이다. 결국 무르시는 전대의 이집트 독재자들과 다를게 없었고 이는 "네가 무슨 파라오냐"는 반대 세력의 격렬한 반발을 초래했지만 국민투표에서 63% 득표율을 획득해, 2012년 12월 26일에 이 신헌법은 최종 승인된다. # 하지만 이 국민투표가 실제론 부정선거를 한 결과물로 드러났고, 실제 득표율은 45% 정도로 추정된다고 한다.

샤리아가 국가 법률의 기본 원칙이 되어서 어떤 일이 발생했느냐 하면, 이집트에 방문하는 모든 이교도 및 외국인 여성들도 히잡을 강제로 쓰게 만들었고 실제로 단속이 시행되었다. 샤리아에 따르면 모든 기독교 건물들은 반드시 지역 모스크 이맘들의 허락하에 수리 및 개축이 가능하며[1] 동시에 허가를 받아도 교회의 문은 높이가 1미터 20센티미터 이상을 넘어서는 안된다. 기독교도들이 엎드려 기어 교회로 들어가게 만듦으로써 이슬람교인들보다 열등한걸 자각하게 하고 모욕하기 위해 있는 원칙인데 어지간한 중동국가에서도 거의 사문화되어있던 이 율법을 근거로 콥트교 교회 47곳에 1840년 이후 개축한 모든 것들에 대해 원상복귀명령을 내렸으며 신축된 21곳의 교회를 철거하도록 명령했다.[2]기사 급기야 평화협정을 맺었던 이스라엘에 대해 유대인을 죽이고 알라가 그들을 심판하게 해야한다고 공개적인 TV 방송에서 거론해서 사다트 이후 안정적으로 관리되던 이스라엘과의 관계가 거의 단교 상태로 몰리게 되었다. 히잡을 쓰지 않으면 체포된다는 뉴스가 뜬 이후 서방관광객들이 관광을 모두 취소해서 국가 고용의 10% 이상을 차지하던 관광업 관련 종사자들의 극단적인 반발을 샀다. 거기다 이집트는 이스라엘과의 대외 교역에 국가 경제의 40% 이상을 의존하고 있었는데 이게 막히면서 급격히 경제위기에 빠졌다. 그 결과 무르시의 지지율은 76%에서 32%까지 급격히 떨어졌다. 결국 100만명 이상이 반무르시 시위에 나서면서 급격히 민심을 잃게 되었고 카이로는 무정부 상태가 되었다.

결국 3일 뒤인 7월 3일에 국방부/군수부 장관 겸 군 총사령관 압델 파타 엘 시시 주도의 군부 쿠데타가 발생해 무르시 행정부는 붕괴되었고, 대통령 본인은 연금된 직후 검찰에 기소됐다. 이후 2015년 5월 16일에 "2011년 혁명 당시 무르시가 1월 28일 체포되어 수감되었으나 이틀 만에 교도소를 탈출해 혁명에 가담하는 와중 탈옥의 배후에 팔레스타인 무장단체 하마스가 있고 이와 공모해 경찰서를 습격하는 등의 내란행위를 일으켰다"는 이유로 사형 선고를 받으나 2016년 6월 18일에 종신형으로 감형된 후 최종적으론 최고법원의 반려를 거쳐 # 간첩 혐의로 25년형을 선고받았다. #

무르시의 간첩혐의는 이집트의 내밀한 군사정보를 무슬림 형제단을 통해 카타르, 팔레스타인, 헤즈볼라로 누출시켰다는 것인데 특히 쿠데타 당시 하마스의 군사조직을 이용하여 쿠테타를 진압하기 위해 이집트군을 공격하도록 지시한게 결정적이었다. 이후 엘시시 정부는 약 3년간에 걸친 무슬림 형제단 박멸운동을 펼쳤는데 무슬림 형제단의 팔레스타인 지부인 하마스는 당연히 이집트군과 적대적인 관계를 유지하며 팔레스타인의 난민촌을 근거로 끈질기게 무장투쟁을 벌였다. 2021년 벌어진 토벌작전에서는 6개월동안 이집트군이 600명이 사망했으며, 이후에도 끊임없는 테러와 반란이 있었지만 2023년에 이르러서는 정리가 되었다.

무르시의 행적 때문에 무슬림 형제단과 하마스가 이집트 정부의 확실한 적이 되면서 2023년 하마스-이스라엘 전쟁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는 중이다. 이집트는 팔레스타인 난민을 단호히 거부하고 있는데 이집트를 이끄는 세속주의 군부는 이스라엘과 척을 지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으며, 오히려 주적으로 무슬림 형제단과 하마스를 지목하고 있기 때문에 하마스 지지자 비중이 높은 팔레스타인 난민을 받아들일 마음이 전혀 없다.

4. 사망[편집]


2019년 6월 18일 재판을 받던 중에 기절했고 결국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 수감기간 도중 무르시가 학대 수준의 처우 및 고문을 받았다는 많은 증거가 나오면서 이집트 국내·국제여론에서 묘한 반응을 끌어냈다. 쉽게 표현하자면 "아 무르시가 좋은 사람은 아니지만, 이건 좀 심한데..."에 가까운 정도.

게다가 심정지 후 단 1시간 만에 시신을 매장한 이집트 정부의 졸속 대응에 UN은 독립진상조사단 구성을 주문했다.

5. 평가[편집]


무르시 전 대통령 본인이 이슬람주의자에 지지기반도 이슬람 근본주의 세력이고 정치기반이 범아랍 정당 겸 준군사조직, 미국에서 차후 테러집단으로 지정한 무슬림 형제단이란 점은 많은 유럽과 이슬람의 민주화 세력을 실망스럽게 했다. 특히 이집트의 정치 기득권 세력들도 무르시의 문제점에 대해서는 명확히 인식하고 있으며 이는 무르시가 사망한 2019년에도 그렇다.

그러나 동시에 민선 문민정부를 1년 만에 전복한 군부세력, 군사독재정부는 역시 국민과 국제사회가 당면한 실상이다. 이렇기에 무르시 축출 직전까지 고조된 경제 위기가 비교적 해소되었다는 점에서 이집트 군부가 무르시를 축출하고자 경제에 사보타주를 가했단 음모론도 나오고 있으며[3] 하마스와 무르시의 관계에서 본 바와 같이 이스라엘이 이집트 군부를 도와서 장난질에 가세한 게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되기도 하였다.

미국과 유럽을 비롯한 서방국가에서엔 무함마드 무르시가 이집트 사상 최초의 민선대통령이란 사실에서 비판적 입장과 동정론이 공존하며 ISIS가 사실상 망한 2019년에 무르시가 옥중에서 의문사하자 동정론의 우세가 강화되었다. 이슬람주의자들이 혁명에 중도탑승하여 강경행동으로 그 주도권을 장악하고 혁명을 변질시켰다는 비난을 받아도, 이집트 사회는 군부독재도 환영하지 않는다.

무르시 축출과 무르시 본인에 대해선 견해가 이렇게 대립된다. 하지만 이집트 사회에 무엇이 필요하냐는 질문에는 대부분의 견해가 일치한다. "제3의 길"이 필요하다는 점에서 국제사회 주류와 이집트 시민사회 사이의 이론은 크지 않다.

2012년래 무르시의 극력지지를 받은 하마스는 무르시가 사망하자 어느 정도 종교차원을 떠난 애도반응을 내놨다. 다른 한편으로 무함마드 무르시의 실정은 이집트 내 혐팔레스타인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한가지 시선을 끄는 성명이 있다면 이렇다. 대표를 역임했던 무슬림 형제단, 그리고 터키의 에르도안 대통령[4]은 무함마드 무르시 전 대통령을 추도하며 그를 순교자로 칭하였다. 이는 무르시가 정치인으로서 무능하기는 해도 개인적으로는 도덕적이고 선량한 인물 이미지가 남았기 때문이다.[5] 분명 이슬람주의자들에게 무르시가 동류로 분류되는 사실은 확실해보인다.

세속주의적 독재정권(호스니 무바라크 정권/팔라비 왕조)을 무너뜨리고 새로운 독재자가 되어 이슬람 근본주의에 입각한 신정체제를 세우려 했다는 점에서 이란의 전 최고지도자(라흐바르) 아야톨라 루홀라 호메이니와 비슷해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두 사람 사이에는 상당한 차이점이 있다. 호메이니는 외교는 개판으로 했지만 내치 능력은 상당한 수준이라 자신의 주요 지지 기반이던 근본주의 성향의 수구 율법학자들[6]을 적당히 컨트롤하고 소수민족에 대한 배려를 강화하는 등 국민 여론을 반영하여 결과적으로 국가원수 신분으로 세상을 떠났고, 호메이니가 세운 이란 이슬람 공화국의 신정체제가 호메이니 사후 지금까지도 계속 이어지고 있으며 호메이니 본인 또한 이란 국민들에게 국부로 추앙받는다.[7] 반면 무르시 정권은 외교적으로 다른 나라들의 지지를 받는 유리한 상황에서도 무르시 본인의 무능으로 스스로를 몰락시켰는데, 집권 이후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의 폐단을 물렁하게 방치하다 그의 정권이 1년 천하로 막을 내렸고, 무르시 본인 또한 꼴통 독재자 취급을 받으면서 추앙이 아닌 경멸의 대상이 되었으며, 호메이니와 달리 국가원수가 아니라 재판을 받는 피고인의 신분으로 몰락했다가 지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따라서 무르시에게는 실패한 호메이니라는 표현이 적합할 것이다.


파일: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__CC.png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2023-11-28 12:51:33에 나무위키 무함마드 무르시 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

[1] 단순한 수리에도 막대한 기부금을 요구하며, 그런 돈을 받아먹어놓고서도 신축과 증축은 절대 허가권을 주지 않는다.[2] 해당명령은 쿠데타 이후 철회되었지만 무르시가 내린 명령 때문에 사문화된 이 율법을 지키라는 여론이 강해져 수리 및 신개축은 모두 정지되어 있었다. 엘시시 대통령이 모스크에 비례해 인구비례적으로 신축허가한다는 법을 만들었는데 이슬람주의 정당은 여전히 극렬 반발중이다.[3] 혁명 직전에도 이집트 경제는 건전한 상태가 아니었다.[4] 터키는 2013년에 이집트와의 국교를 단절했다.[5] 정치 능력은 개판이지만 인간 개인으로 보면 도덕적이고 선량한 사람이라는 점에 있어서 조지 W. 부시와도 흡사했다.[6] 문맹 퇴치 운동을 결사 반대하다가 잘 안 되니까 여성의 학교 교육 완전 금지 등을 주장했는데, 호메이니가 이들을 설득시켰다.[7] 하지만 이란 혁명으로 국외로 도주한 이란의 구 지배층과 상류층 출신 인사들, 호메이니 정권 치하에서 가족·친척·지인 등 주변 사람들이 정치범으로 몰려 죽임을 당했거나 연좌제의 고초를 겪었던 일부 이란 국민들은 호메이니를 국부로 존경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