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동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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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동환의 수상 경력 / 역대 등번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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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 KBO 리그 승률왕

{{{#000000 [[롯데 자이언츠|롯데 자이언츠]] 등번호 75번}}}
권두조
(1990~1996)

문동환
(1997)


권두조
(1999)
{{{#ffffff [[롯데 자이언츠|롯데 자이언츠]] 등번호 29번}}}
윤학길
(1987~1997)

문동환
(1998~2003)


김수화
(2004)
{{{#ffffff [[한화 이글스|한화 이글스]] 등번호 16번}}}
송지만
(1999~2003)

문동환
(2004~2009)


신주영
(2010)
{{{#ffffff [[한화 이글스|한화 이글스]] 등번호 75번}}}
손지환
(2010)

문동환
(2011~2012)


이대진
(2013)
{{{#ffffff [[두산 베어스|두산 베어스]] 등번호 71번}}}
이명수
(2012)

문동환
(2013~2016)


이강철
(2017~2018)


A대표팀 참가 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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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2020_더그아웃매거진_111호_mdh_.jpg

상우고등학교 야구부 No.77
문동환
文東煥 | Mun Donghwan

출생
1972년 6월 18일[1] (51세)
경상북도 경산시
국적
[[대한민국|

대한민국
display: none; display: 대한민국"
행정구
]]

학력
대연초 - 대천중 - 동래고 - 연세대
포지션
투수
투타
우투우타
프로입단
1995년 1차 지명 (롯데)
소속팀
현대 피닉스 (1995~1996)
롯데 자이언츠 (1997~2003)
두산 베어스 (2004)
한화 이글스 (2004~2009)
지도자
포항제철고등학교 야구부 투수코치 (2009~2010)
한화 이글스 2군 재활코치 (2011)[2]
한화 이글스 1군 불펜코치 (2011)[3]
한화 이글스 잔류군 투수코치 (2012)[4]
한화 이글스 1군 불펜코치 (2012)[5]
두산 베어스 2군 재활코치 (2013~2014)
두산 베어스 2군 투수코치 (2015)[6]
두산 베어스 1군 불펜코치 (2015)[7]
두산 베어스 2군 투수코치 (2015~2016)[8]
구리인창고등학교 야구부 투수코치 (2018)
상우고등학교 야구부 감독 (2019~)
종교
불교

1. 개요
2. 선수 경력
2.1. 아마추어 시절
2.4. 국가대표 경력
3. 지도자 경력
4. 연도별 주요 성적
5. 관련 문서



1. 개요[편집]


대한민국의 前 야구 선수.


2. 선수 경력[편집]



2.1. 아마추어 시절[편집]


동래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연세대학교로 진학했다. 아마추어 시절 제 2의 선동열이라는 수식어로 묘사되며 최고의 우완으로 평가받았다.[9][10]

연세대 시절 1992년과 1993년 회장기 전국대학야구 춘계리그 우수투수상을,19930512 관련기사. 1994년에는 대학야구 춘계리그 MVP + 아마야구 MVP를 수상하는 기염을 토했다.19941201 관련기사. 150Km는 우습게 찍는 구위에 제구력까지 갖춘 완성형 투수로, 국가대표 1선발을 도맡아하다시피 했다. 심지어 아마추어 최강 쿠바 선수들이 한국투수들 중 유일하게 기억하는 선수가 문동환이었을 정도.

졸업 후에는 연고팀 롯데 자이언츠가 아닌, 실업야구팀이었던 현대 피닉스에 계약금 3억원이라는 당시 최고 대우로 입단하였다.[11][12] 당시 현대 피닉스의 아마추어 선수 싹쓸이의 화룡점정.[13] 심지어 여기다 자사 아파트 분양권까지 줬다. 그럼에도 연고팀 롯데는 문동환의 현대 피닉스행이 사실상 확정된 시점이었음에도 1차 지명권을 문동환에게 행사했다. 한마디로 언제 입단할 지도 모르는 선수에게 1차 지명권을 쓴 셈인데, 반대로 생각하자면 그만큼 문동환의 아마추어 시절 활약이 엄청났다는 것.

그러나 1995년 현대그룹에서 태평양 돌핀스를 인수해 현대 유니콘스로 프로야구에 뛰어들면서, 현대 피닉스는 애매하게 붕 뜨게 되었다. 문동환은 1996년 애틀랜타 올림픽에 출전하지만 대표팀이 최하위를 거두어 병역특례를 받는 데 실패하고, 그 후 공익근무요원으로 입대하지만 몸 이상으로 귀향 조치된데 이어 최종적으로 병역면제를 받게 된다.[14] 현대 유니콘스는 프로 첫 시즌을 마치고 2년차가 되던 시점 전력보강을 위해 롯데 자이언츠전준호를 영입하고자 문동환을 카드로 내세웠다. 현대 피닉스는 문동환과 입단 계약시 '계약을 해지할 경우 수령한 계약금과 연봉을 상회하는 액수의 위약금을 물어야 한다'를 조건으로 족쇄를 채워놨기 때문에[15] 문동환으로선 롯데로 가기 힘든 상황이었는데, 롯데가 전준호를 현대와 현금 5억에 트레이드를 하고 → 이 5억을 문동환에게 계약금으로 지급해서 → 문동환이 그 계약금으로 현대 피닉스에 위약금을 지불하고 계약을 해지하는, 매우 편법스러운 방법으로 이 문제를 해결하였다.

롯데 입장에선 매년 연봉협상 때마다 전준호가 골치거리였던데다 마침 1996 시즌에 부진한 성적을 기록한 터라[16], 신인으로서 데뷔시즌을 잘 치른 김대익의 성장을 믿고 전준호를 기꺼이 포기했다. 게다가 좀 막장스러운게 전준호를 현대로 현금 트레이드 시킨 게 시즌 개막을 불과 나흘(!) 앞둔 시점이었다. 실제로 전준호는 충격 탓인지 현대 유니콘스에서의 첫 시즌을 .247의 타율과 23개의 도루로 부진하며 롯데가 옳은 판단을 했다...는 평가를 받을 뻔 했으나, 이듬해부터 다시 리그 최강의 톱타자로 거듭나며 그 뒤의 결과는 다들 알듯이 전준호의 완승.

어찌됐건 이 현금 트레이드(....)로 문동환은 롯데 자이언츠에 입단하게 되었다.


2.2. 롯데 자이언츠 시절[편집]



데뷔 해였던 1997년에는 선발로는 나오지 않고 마무리 투수 보직으로 활약했다. 그러나 기대치만큼의 성적은 거두지 못하면서 최종 성적은 2승 5패 8세이브 39이닝 ERA 4.85.

하지만 1998년과 1999년 12승과 17승을 기록하며 명실상부한 롯데 자이언츠의 에이스로 거듭나게 된다. 참고로 1999년에는 189⅓이닝 동안 17승 4패 141탈삼진 ERA 3.28을 찍는데, 이 해는 역대급 타고투저 시즌이었다는 것을 감안하면 매우 뛰어난 성적이었다.[17] 다만 포스트시즌에는 매우 부진하였고, 결국 롯데 자이언츠는 한화 이글스에게 맥없이 무너져버렸다. 실제 한국시리즈 최종 5차전에서 결승타를 내준 선수가 문동환이었다. [18] 참고로 경기는 삼성쪽으로 기울고로 유명한 플레이오프 7차전의 선발투수이기도 했다.

하지만 2000년의 선수협 파동 당시 선수협을 지지하다가 구단에게 제대로 찍혔다. 게다가 선수협 사태 동안 구단 단체 훈련에서 제외되고 훈련을 제대로 할 수 없었기 때문에, 몸이 제대로 만들어지지 않은 상태로 투구 내용이 좋을리가 없었다. 그나마 2000년은 3점대 평균자책점으로 7승 3패의 성적[19]을 거두고 있었으나 결국 오른팔꿈치 부상을 당하면서 시즌 아웃되었고, 이후 2001~2002년 동안 고작 4승 11패 2세이브의 성적에 그쳤다.

기나긴 부상과의 사투, 그리고 재활을 거쳤지만 상황은 전혀 나아지지 않았으며 2003년은 아예 시즌을 날려버렸다. 팔꿈치 뼛가락 수술과 인대접합수술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구위는 좀처럼 회복되지 않았다. 그리고 결국 2004년 정수근FA 영입 당시 보상 선수로 선택되며 두산 베어스로 이적하게 된다. 아이러니하게도 롯데 자이언츠는 톱타자를 버리면서 투수를 데려왔지만 다시 그 투수를 톱타자를 위해 버리는 모습을 보여줬다. 그리고 하루 만에 한화 이글스채상병과 트레이드되어 한화 이글스 유니폼을 입게 된다.[20]

여담으로 한화에서 뛸 당시 자신의 야구인생에서 가장 기억하기 싫은 시절은 롯데에서 뛰던 시절이라고 회고했다. 본인의 고향팀인데다 나름대로 선수 생활에서는 전성기를 보냈던 팀을 이렇게 대놓고 디스했으니 당시 롯데의 막장성은 두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21][22]


2.3. 한화 이글스 시절[편집]



파일:external/photo.isportskorea.com/20040424221919462.jpg
(출처 : 포토로)
파일:/image/109/2006/10/23/200610231958151101_1.jpg
2006년 한국시리즈 2차전에서 두 번째 투수로 등판하여 역투하는 모습
파일:/image/109/2007/08/23/200708232006031101_1.jpg
한화 이글스 시절

유승안 감독 하에서 2004년 다시 선발로 돌아왔으나 성적은 처참했다. 120⅔이닝 4승 15패 ERA 5.37. 더 이상 선발로는 뛸 수 없을 것이라 다들 생각했다.

그러나 2005년에는 173⅔이닝 동안 10승 9패 103K ERA 3.47, 2006년에는 189이닝 동안 16승 9패 85K ERA 3.05로 완벽히 부활하여 돌아왔다. 2006년에는 특히 동산고등학교 출신의 신인 류현진과 함께 원투펀치로 활약했으며 팀의 준우승에 기여한다. 이때 문에이스로 불리우며 한화 이글스 마운드의 든든한 선발로서 묵묵히 자기가 할 일을 해왔다.[23] 2005년도 PS에서는 준PO 1차전에서 완투승을 기록하는 등 선전하였다.

하지만 이 당시 김인식 감독의 말도 안되는 혹사[24]로 인해 2007 시즌 이후 다시 부상이 재발해 버렸다.[25] 게다가 2007년 포스트시즌에서는 허리부상을 안고도 강행한 피칭이 장딴지-고관절-허리-종아리에까지 영향을 미쳤고, 이는 이후 더 이상 1군 마운드에 올라올 수 없는 결과로 이어졌다. 가뜩이나 부상이 완치되지도 않은 상황에서 무리하게 2군 경기를 치루려고 했기에, 그 부상은 더욱 악화되어 더 이상 선수 생활을 유지하기 어려운 정도까지 치닫고 말았다.

결국 2009년 7월 8일 최상덕과 함께 웨이버 공시되어 방출되었다. 이후에도 개인 훈련을 하면서 팀을 모색해봤지만 불발되었다.

한화 시절 세운 특이한 기록이 좀 있다. 2006년 7월 6일 선발투수로 나선 경기에서는 5회말 종료 후 0:0 스코어에서 폭우로 강우 콜드 처리되어 상대 선발투수였던 김회권과 함께 동반 무실점 완봉 ND를 기록한 적이 있고, 같은 해 8월 20일에는 고작 88구만 던져 10피안타 5실점을 허용했음에도 불구하고 완투승을 거두기도 했다. 두 경기 모두 상대는 LG 트윈스.


2.4. 국가대표 경력[편집]


1993년 호주 퍼스 아시아야구선수권대회
  • 예선 일본전 선발등판 패전투수.기사.

1994년 니카라과 세계야구선수권대회
  • 예선 네덜란드전 구원등판.기사.
  • 예선 이탈리아전 선발등판 승리투수.기사.
  • 준결승 일본전 선발등판 완봉승.기사1.기사2.

1994년 히로시마 아시안게임
  • 결승 일본전 선발등판.

1995년 일본 구라시키 아시아야구선수권대회

1996년 애틀랜타 올림픽
  • 예선 이탈리아전 선발등판 8이닝 2실점 완투패.영상 2분 52초부터.
  • 예선 니카라과전 구원등판 2이닝 4실점.
  • 예선 일본전 구원등판.기사.

1999년 한국 서울 아시아야구선수권대회


3. 지도자 경력[편집]


이후에는 포철공고 박정환 감독의 제의를 받고 포철공고 투수 코치로 부임했다.

2011년에는 한화 이글스 재활코치를 맡다 동년 1군 불펜코치로 보직전환, 2012년 시즌까지 해당 보직을 담당했다.

2012년 시즌 종료 이후 강성우, 김민재와 함께 두산 베어스 투수코치로 자리를 옮겼다. 이후 보직이 두산 베어스 2군 재활코치로 변경되어 2016년까지 재직했다.

파일:external/photo.isportskorea.com/2012120218021562727.jpg
관련 글1 관련 글2

파일:external/file.osen.co.kr/201301091412772026_50ecfc8e2add8.jpg
두산 베어스 2군 코치 시절.

2018년에는 구리 인창고등학교 야구부 투수코치로 있었으며 2019년에 상우고등학교 야구부 감독을 맡았다.


4. 연도별 주요 성적[편집]


역대기록
연도

경기
이닝




승률
ERA
피안타
피홈런
볼넷
사구
탈삼진
실점
자책점
WHIP
1997
롯데
22
39
2
5
8
0
0.286
4.85
40
2
15
1
23
21
21
1.410
1998
31
136⅔
12
5
6
0
0.706
3.16
121
7
39
1
86
50
48
1.171
1999
30
189⅓
(4위)
17
(3위)
4
0
0
0.810
(1위)
3.28
(4위)
171
12
67
9
141
75
69
1.257
2000
12
72
7
3
0
0
0.700
3.88
71
6
24
1
58
33
31
1.319
2001
13
37
2
4
0
0
0.333
6.57
44
4
22
0
21
29
27
1.784
2002
17
67
2
7
2
0
0.222
5.10
83
8
22
3
49
46
38
1.567
2003
1군 기록 없음
연도

경기
이닝




승률
ERA
피안타
피홈런
볼넷
사구
탈삼진
실점
자책점
WHIP
2004
한화
25
120⅔
4
15
0
0
0.211
5.37
147
20
45
5
56
88
72
1.591
2005
26
173⅔
(3위)
10
9
0
0
0.526
3.47
174
12
57
3
103
74
67
1.330
2006
31
189
(4위)
16
(2위)
9
1
0
0.640
3.05
186
10
67
11
85
78
64
1.339
2007
21
84
5
3
0
1
0.625
3.11
87
8
37
3
37
32
29
1.476
2008
1군 기록 없음
2009
KBO 리그 통산
(13시즌)

228
1108⅓
77
64
17
1
0.546
3.78
1124
89
395
37
659
526
466
1.371

5. 관련 문서[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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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음력 5월 8일[2] ~5월 5일[3] 5월 6일~[4] ~5월 11일[5] 5월 12일~[6] ~6월 2일[7] 6월 3일~6월 7일[8] 6월 8일~[9] 그러나 바로 1년후 92년 졸업생으로 휘문고 임선동, 신일고 조성민, 공주고 박찬호가 쏟아지면서 약간 묻힌 감이 있다. 이때는 대전고 정민철도 앞의 3인방에 밀려서 언급도 안되던 시절이었고 박재홍은 투수로서도 괜찮았지만 타자 쪽 재능을 더 높이 평가받았다. 그야말로 꿈의 92학번. 게다가 그의 소속 팀이었던 동래고는 지역 예선 통과도 못하는 만년 약체로 메이저 대회라고는 전국 모든 팀이 지역예선 없이 모두 출전하는 봉황대기 전국고교야구대회만 간신히 출전했을 정도였다.[10] 또한 고교 시절에는 같은 학번으로 대학 동료이기도 한 대전고안희봉, 인하대로 진학한 동산고위재영이 있기 때문에 독보적이라고 할 수는 없었다. 이후 안희봉은 고교 시절 겪었던 교통사고 후유증으로 투수로서의 가치가 완전히 사라져 버렸지만.[11] 프로 팀으로 한정할 경우 같은 해 LG에 입단한 심재학과 삼성에 입단한 김재걸이 각각 2억 1000만원씩 받은 게 신인 계약금 최고 기록이었다.[12] 지금도 신인 계약금 3억 이상이면 보통보다 살짝 많은 편이지만, 이 때는 무려 1995년이다. 당시 물가를 감안해보면 지금의 약 6억~7억 원에 해당되는 큰 돈이다.[13] 여담이지만 이 해 롯데는 2차 2라운드에서 지명한 고려대 조경환까지 현대 피닉스로 가버리면서 본의아니게 자신들이 지명해놓은 선수 두 명을 현대 피닉스에 빼앗긴 셈이 됐다.[14] 후술하는 바와 같이 이는 비슷한 상황을 겪은 주형광과 마찬가지로 문동환의 향후 커리어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15] 사실 이런 노예계약은 피닉스 쪽 선수들 상당수가 걸려있는 문제였다. 김재걸도 그래서 계약금이 2억 1천이었지만 실질적으로 피닉스에 지급한 위약금 때문에 받은 돈은 절반조차 되지 않는다.[16] 전준호의 장기인 도루가 95년 69개에서 96년 23개로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17] 이 당시 2점대 ERA 투수는 정민태임창용을 제외하면 없었다.[18] 워낙 플레이오프에서 피말리는 접전을 펼친 끝에 겨우 올라온 처지라 비단 문동환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롯데선수들이 체력 저하가 극심했다[19] 이중 5승이 최약체 SK 상대였다.[20] 그리고 13년뒤 여자배구계에서도 이러한 비슷한 상황이 벌어젔다.[21] 물론 한화라고 크게 다르지는 않았다. 단적인 예로 임재철은 롯데에 있다가 삼성을 거쳐 한화로 갔는데 자신의 고향 팀인데다 한화 성골인 북일고 출신인데도 한화의 열악한 환경에 학을 뗐다고 말했을 정도. 실제로 이 당시 한화는 야구단에 대한 모기업의 관심과 투자가 미비했기 때문에 제대로 된 2군 홈구장이나 연습장조차 없어 1군 홈 경기가 없는 대전구장, 청주구장 등을 돌거나 인근 아마추어 야구장을 빌려 훈련했을 정도로 시설이 상당히 열악했다.[22] 실제로 한화의 환경이 개선된 시기는 아이러니하게도 김성근 감독 전후부터였는데 선수를 죽어라 굴려야 하기 때문에 선수를 굴린 만큼 대우를 해줘야 한다는 신조가 강한 김성근이 훈련 중 부상을 줄이고 빠른 재활을 위해 시설 개선을 요구했다는 말이 있다. 선수들이 지옥의 펑고를 몇 차례나 죽어라 했는데도 별 부상이 없었던 걸 보면 맞는 말인지도.[23] 만약 팀이 한화만 아니었다면 맏형이 되었을 수도... 최영필한화의 영건 소리를 듣던 바로 그 시절이다.[24] 2006년도에는 31경기(29선발), 2007년에는 11번 선발 출장에 10번 구원 출장을 기록했다. 이 당시 몸이 성치 않았다는 걸 감안하면 이건 완전히 선수를 보내 버리는 기용이었다. 사족으로 경기당 평균 투구수조차도 동년배였던 정민철과 비교하면 더 많이 던졌다. 거의 100개를 넘기는 투구수가 그의 선발 등판시 강판의 기준이였고, 완봉, 완투도 나이에 비해 많았다.[25] 정확히는 시즌 중반부터 허리에 이상이 생겼고 병원 검진 결과 허리 디스크였다. 그런 상황에서도 던지게 한 김인식 감독님의 용단에 경의를 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