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명왕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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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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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무열왕의 왕비
문명왕후 | 文明王后

출생
(음력)

610년?[1]
신라
사망
(음력)

681년
신라 금성
능묘
영경사(永敬寺) 북쪽 무열왕릉(武烈王陵)
재위기간
신라 왕비
654년 3월 ~ 661년 6월 (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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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
김해 김씨

문희(文姬) / 아지(阿之)
부모
부친 김서현
모친 만명부인
형제자매
형제 김유신, 김흠순
자매 김보희
부군
태종 무열왕 김춘추
자녀
태자 김법민
왕자 김인문, 김문왕, 김노차, 김인태, 김지경, 김개원
왕녀 고타소[1], 딸[2], 김지소[3], 딸[4], 딸
종교
불교
시호
문명왕후(文明王后)
별호
훈제부인(訓帝夫人)
문명황후(文明皇后)[5]

1. 개요
2. 생애
2.1. 김춘추와의 만남
2.2. 오빠의 꾀로 맺어진 인연
3. 삼국사기에서의 기록
4. 평가
5. 기타
6. 대중매체에서



1. 개요[편집]


신라의 왕비. 삼국유사에는 훈제부인(訓帝夫人), 문명황후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름은 문희(文姬)이고 삼국유사에 의하면 어릴 때 이름은 '아지(阿之)'였다고 한다.[2] 일반적으로 문명왕후라는 시호보다는 본명인 '문희'가 더 잘 알려져 있다.[3]

신라명장, 명재상인 김유신의 둘째 누이이며 태종 무열왕 김춘추의 정비(正妃)이자 문무왕 김법민의 모후. 즉, 흔히 말하는 신라 삼국통일의 3주역과 모두 연관된 여인이자 세 사람을 하나로 묶은 구심점이다.


2. 생애[편집]



2.1. 김춘추와의 만남[편집]


그녀가 김춘추의 아내가 된 일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한다. 이는 삼국유사에 기록된 버전.

어느 날 언니인 김보희가 김문희에게 자신이 꾼 꿈을 얘기했다. 즉 보희가 서라벌서악에 올라가서 소변을 보았는데 그 소변이 서라벌 시내에 가득 찼다고 한다. 문희는 그 얘기를 듣고 언니에게 비단 치마를 꿈값으로 주며 그 꿈을 샀다. 며칠 뒤에 오라비 김유신이 왕족인 김춘추를 집에 데리고 와서 같이 축국을 하다가 그의 옷고름을 밟는 바람에 춘추가 입은 옷의 솔기가 터졌다. 이에 유신은 보희를 불러 옷고름을 꿰매어 주라고 시켰는데[4][5] 보희는 몸이 불편하다는 핑계[6][7]로 나서지 않았다. 그래서 문희에게 바느질 소임이 돌아갔는데 이후에도 김춘추가 올 때마다 김유신이 문희를 불러서 그에게 보였다는 것이다.


2.2. 오빠의 꾀로 맺어진 인연[편집]


그래서 기어코 눈이 맞은 춘추와 문희가 정을 통하여 아이를 가졌는데, 김유신은 김춘추의 아기인 것을 모른 척하고 화를 내면서, 아버지를 알 수 없는 아기를 밴 문희는 가문의 수치니 불태워 죽이겠다고 문희를 기둥에 묶고 장작을 쌓은 채 불을 질렀다. 그런데 그날이 하필 덕만공주[8]가 산에 올라가서 서라벌을 관망하는 날이었다. 단 판본에 따라서는 아예 김유신이 날짜를 미리 확인한 뒤, 젖은 장작을 써서 연기를 피웠다는 말도 있으니 하필이 아니라 계획대로에 가까울지도.

덕만공주가 연기를 보고 그 연유를 물으니 주위에서는 김유신의 누이가 외간남자의 아이를 가졌으며, 이에 분노한 김유신이 누이를 태워 죽이겠다고 저런다는 얘기를 일러바쳤다. 덕만공주가 그 아이의 아버지가 누구냐고 묻자 옆에 있던 김춘추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서 자신이라고 자백했다(...). 이에 덕만공주가 얼른 가서 여인을 구하라고 명하여 김춘추가 급히 말을 달려 문희를 구하고 그녀에게 장가들었다는 것이다.[9] 후에 둘 사이에서 태어난 딸이 외숙부인 김유신에게 시집갔고 후에 지소부인(智炤夫人)이라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고대판 키잡인가. 여동생을 주고 조카와 결혼한다.[10]

부부 클리닉 사랑과 전쟁스러운 요소가 많은 설화인데 이런 과정이 구체적 사건으로서는 역사적인 신빙성은 사실상 매우 낮으며 다만 여러모로 금관가야계와 신라 진골귀족의 혈통이 섞여 있었던 김유신의 혈통 때문에 신라 왕실의 성골에 매우 가까운 진골인 김춘추에게 문희가 시집가는 과정이 매우 어려웠을 거라는 추측을 가능하게 해 주는 이야기이다.[11]

문희의 도 혼전임신으로(...) 그녀의 오빠를 낳았으니 집안 내력이라는 것이 있기는 있는 듯하다...가문 종특인가... 그것도 같은 금관국 왕가 출신 김씨신라 왕가 김씨 사이에서(...).[12] 유전이라기 보다는 김유신이 바로 자기의 탄생 관련 일화에서 발안해 문희를 춘추에게 확실히 꽂기 위한 계략이었을 수도 있다.


3. 삼국사기에서의 기록[편집]


삼국사기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삼국유사와 비슷하지만 좀 더 간략하게 기록되어 있다. 선덕여왕의 개입이나 김유신의 불쇼(…)가 적혀 있지 않은 것이 포인트. 특히 삼국유사에는 선덕여왕이 이를 해결해 주지만, 문무대왕비의 기록을 토대로 역산한 문무왕의 생년은 626년인데 626년은 진평왕 재위기.

어머니는 김씨 문명왕후(文明王后)로, 소판(蘇判) 서현(舒玄)의 막내딸이며 유신(庾信)의 누이이다. 언니가 서형산(西兄山) 꼭대기에 올라가 앉고는 오줌을 누어 온 나라 안에 가득 퍼진 꿈을 꾸었다. 꿈에서 깨어나 동생에게 꿈을 말하니, 동생은 웃으면서 "내가 언니의 이 꿈을 사고 싶다."고 말하였다. 그래서 비단 치마를 주고서 꿈 값을 치뤘다. 며칠 뒤 유신이 춘추공과 축국(蹴鞠)을 하다가 춘추의 옷고름을 밟아 떨어뜨렸다. 유신은 "우리 집이 다행히 가까이 있으니 가서 옷고름을 꿰맵시다."라 청하고는 함께 집으로 갔다. 술상을 차려 놓고 조용히 보희(寶姬)를 불러서 바늘과 실을 가지고 (옷고름을) 꿰매게 하였다. 언니는 일이 있어 나오지 못하고, 동생이 나와서 그 앞에서 꿰매어 주었다. 옅은 화장과 가벼운 옷차림을 하였는데, 빛이 곱게 사람을 비추는 모습이었다. 춘추가 보고 기뻐하여 바로 혼인하자고 요청하고는 곧 예식을 치렀다. 임신하여 아들을 낳았는데, 그가 법민(法敏)이다.

삼국사기> 권6, 문무왕 본기 문무왕 1년(661년) 여름 6월



4. 평가[편집]


어쨌든 그렇게 맺어진 후 김춘추와의 사이에서 여섯 아들을 두었다. 우선 장남은 모두가 잘 아는 신라 30대 국왕 문무왕 김법민이고 차남은 삼국통일에 일익을 담당했고 대당 외교의 핵심 인물이었던 김인문. 그 밑으로는 김문왕, 김노차, 김지경, 김개원이 있다[13]. 또한 딸도 장녀는 대야성김품석에게 시집갔으나 대야성이 함락될 때 죽음을 당한 고타소였고[14][15] 그리고 차녀는 김유신에게 시집가는 지소부인. 일단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서 김춘추는 7남 5녀에 서자가 3명 있었다고 한다.[16] 어찌 보면 신분에 차이가 있는 상대와 사랑을 나눈 집안 내력(?)을 똑같이 따라한 여성이다. 먼저 아버지 김서현은 금관가야의 후손이면서 진흥왕의 조카딸인 어머니 만명부인과 맺어진 사이였고,[17] 큰오빠 김유신도 기녀인 천관녀를 사랑했다가 집안의 격렬한 반대로 마음을 접었던 경력이 있었던 것을 생각하면 아버지와 오빠의 행동을 보고 배운 것일지도 모른다. 그래도 결국 그의 남편은 삼국통일의 기반을 닦은 태종무열왕이 되었고 둘 사이에서 난 아들 문무왕이 삼국 통일을 완수하여 그 후손들이 신라의 왕위를 이어가게 되니 사실상 이 집안에서 가장 행복한 인물인 셈.


5. 기타[편집]


  • 후세 사람인 왕건의 조부 작제건의 탄생 설화도 문희와 김춘추가 결혼한 이야기와 완전히 똑같다. "산에 올라 오줌을 쌌는데 사방이 은빛으로 변하더라"는 꿈을 작제건의 어머니가 그 언니에게서 샀는데 당숙종이 집을 찾아와 옷을 꿰매달라고 청했고 언니가 코피가 난 탓에 작제건의 어머니가 옷을 꿰매주어 둘이 눈이 맞아 작제건을 낳았다고 한다. 당연히 진짜일리가 없는데 변방 중의 변방인 송악의 성주 가문에 불과했던 왕건이 왕위에 올라 경주 김씨 같은 통일신라기 명문가들을 발 아래 두게 되자 정통성 강화를 위해 선대 족보를 윤색할 필요가 있었고 그 과정에서 신라의 일화를 복붙한 것.


6. 대중매체에서[편집]


  • 2005년 EBS 드라마 <점프> 시즌 1에서 주역으로 등장해 김춘추와의 사랑을 다루는데 언니 보희의 방해를 굴하지 않고 결국 고백했다는 에피소드. 시즌 2 김유신 편에서도 등장하지만 비중이 별로 없다.


  • 드라마 선덕여왕에서는 그렇게 가야계와 신라계의 갈등을 다루는데도 등장조차 없다. 사실 문명왕후와 김춘추를 통해서 절반은 가야계인 왕이 차후에 등장하게 되지만 월야와 복야회가 원한건 가야계와 신라계의 통합이 아닌 신라 중심에 서있는 가야이기에 김유신이 아니면 안되었다. 결국 선덕여왕과 김춘추가 김춘추를 해결책으로 제시함으로 가야계를 비로소 설득하는데 가야계가 설득당할 방법은 가야 출신의 왕이기에 김춘추가 혼인 동맹을 제안했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18] 그래서 직접 언급은 없지만 아마 김춘추와 문명왕후가 혼인하여 가야계와 신라계가 섞인 것을 에둘러 표현했다.

[1] 김춘추와 만나 아이를 임신했을 당시 미혼이었던 것으로 보아 10대 중반의 혼인적령기였을 것이다. 언니 보희와는 비슷한 나이지만 오빠 김유신과는 나이 차이가 많이 난다.[2] 언니 보희의 어릴 때 이름은 '아해(阿海)'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보희와 문희의 아명은 오늘날의 '아기', '아이'와 비슷한 의미의 아명이었던 것 같다.[3] 문명왕후의 남편인 김춘추도 왕명보다는 본명이 더 유명하다.[4] 사실상 처음부터 밤시중을 들라고 시킨 것을 애둘러 표현하거나 말한 거라는 설도 있다. 옷고름을 꿰매라고 보낸게 아니라 옷고름을 풀라고 보낸 거 하긴 옷은 잠시 갈아입고 따로 꿰매서 보내면 될 일을 굳이 대면해서 꿰맬 이유는 없으니 밤시중에 대한 비유일수도. 기록에도 '술상을 차려놓고 바늘과 실을 가지고 들여보냈다'고 되어 있는데 옷고름 꿰매는 거 보는 일에 술상을 차려놓을 이유도 없고 최상위 귀족이 직접 바느질을 해야 할 이유도 없는데다 바늘과 실도 사실 성관계에 자주 비유되는 거라....삼국사기 기록 보면 옅은 화장에 옷차림도 가벼웠다고 한다[5] 문명왕후의 이야기도 있고, 훗날 김춘추가 무열왕으로 등극할때 치세인 원효 역시도 자신의 딸을 소개시켜준다는 말에 일부로 연못에 몸을 던져, 내가 물에 빠져서 옷이 모두 젖었으니 새 옷이 필요합니다.라는 이유로 김춘추의 딸 요석공주가 원효의 옷을 세탁하게 하고, 말리는중에 성관계를 해서 설총을 낳았다고 한다.[6] 혹은 그런 사소한 일로 귀공자와 대면하는게 부담스러웠다고. 월경 때문이었다는 설도 있고, 방으로 들어오다 별안간(혹은 문지방에 걸려 넘어지는 바람에) 코피가 나서 돌아가야 했다고 나오는 버전도 있다. 결국은 전부 설화이니, 보희가 오빠의 뜻을 눈치없이 못 알아듣고 튕긴 건지, 알아들었지만 운 없이 상황이 안 따라준 건지, 혹은 알아들었는데 본인이 싫어서 거절한 건지 현재로서는 알 수 없는 일.[7] 만약 김유신의 뜻이 처음부터 밤시중을 들라는 것이었다면 월경중이라 몸이 불편하다고 거절하거나 혹은 그 핑계로, 혹은 부끄러워서 거절한 것은 어떻게 보면 충분히 자연스런 일이긴 하다. 둘이 결혼한 게 큰 역사적 스캔들로 남을 정도로 신분의 격차 때문에 결혼하기 힘든 상대인데, 상대가 그 엄청난 모험을 무릅써 준다는 보장도 없고(아닌 게 아니라 후술할 문희의 화형쇼도 김춘추가 문희를 모른 체해서 김유신과 문희가 벌인 일종의 시위라는 가설도 있다) 무릅쓴다고 결혼할 수 있을지도 알 수 없으니 잘못하면 신세만 망치고 혼삿길만 막힐 수 있는 큰 도박이니 말이다.[8] 김춘추와 문희 사이에서 태어난 문무왕이 아직 진평왕 치세였던 626년생이므로 당시 선덕여왕은 왕이 아니라 공주 신분이었을 것이다. 참고로 김춘추는 덕만공주의 자매인 천명공주(언니인지 동생인지는 사서마다 기록이 달라 가설이 여럿 있다)의 아들이라, 김춘추에게는 이모이기도 하다.[9] 사극 대왕의 꿈에서는 김춘추 역의 최수종이 거의 매트릭스 수준의 액션을 연출하며 문희를 구하러 뛰어드는 모습으로 그려진다.[10] 애시당초 신라는 왕족간의 근친상간, 족내혼이 흔했던 국가이다. 김춘추도 자기 모친인 천명공주하고 6촌 남매간이였으며 따지고 보면 김문희는 김숙흘종의 외손녀, 김춘추는 김숙흘종의 형 진흥왕의 증손자이자 현손자니 이 부부도 조카-7촌 고모이자 조카손자-이모할머니 관계이다.[11] 다만 김유신이 둘 사이에 다리를 놓아주고, 결혼 전 성관계임신은 있었고 이로 인해 결혼했다는 것은 사실일 가능성은 있다.[12] 다만 부모 세대에 남녀는 남자가 김해 김씨, 여자가 경주 김씨로 반대였다.[13] 태종 무열왕에겐 김인태라는 아들도 있는데, 삼국유사 태종 춘추공에는 언급되어 있지 않지만 삼국사기 태종 무열왕 2년조에서 존재가 확인된다. 일반적으로 김인문과 동일인으로 비정되며, 위서로 추정되는 화랑세기 필사본에서는 보희의 아들인 것으로 나온다.[14] 고타소는 화랑세기 필사본에서는 보라궁주의 딸로 나오나, 삼국사기에는 분명히 문희의 소생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각종 매체에선 어쩐 일인지 문무왕의 누나로 묘사되는데, 삼국사기에 문무왕이 부여융에게 침을 뱉으며 모욕을 주는 기록에서 분명히 여동생(妹)이라고 언급하고 있다. 애시당초 춘추와 문희가 혼전임신으로 낳은 (즉, 필연적으로 첫 자식이 되는) 자식이 문무왕이니 고타소가 문명왕후의 소생이라면 문무왕의 동생일 수밖에 없다.[15] 참고로 사위인 김품석 역시 자기의 가문인 김해 김씨였다. 김유신이 얼마나 두 가문의 통합을 이루려고 노력했는지 잘 알수 있는 부분.[16] 정사에선 그의 아내로 문희만 나오지만, 화랑세기 필사본에선 김춘추의 첫 부인이 보라궁주이고, 문희와 혼인한 뒤에 보희를 첩으로 삼아 그녀와의 사이에서 아들 둘을 두었으며 아들들의 이름이 각각 김개지문, 김차득, 김마득이라고 나온다. 그리고 유명한 요석공주의 모친도 보희부인이라고 저술되었다. 요석공주는 김흠운에게 시집갔는데 둘 사이의 딸이 신문왕의 후비 신목왕후효소왕성덕왕을 낳았다. 김흠운 사후에 요석공주가 원효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이 설총. [17] 이 쪽도 아버지 숙흘종이 딸을 집안에 가두면서까지 연애를 막았는데 만명이 창문으로 탈출해서 김서현과 사랑의 도피를 했고 만노군에서 김유신을 낳았다.[18] 그래야만 가야의 피가 섞인 왕이 나올 수가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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