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성군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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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광해군의 왕비
문성군부인 | 文城郡夫人


파일:attachment/광해군묘/Example.jpg

광해군묘 전경
출생
1576년 8월 25일(음력 7월 21일)
조선 한성부 류자신 사저
(現 서울특별시 중구 일대)
사망
1623년 10월 21일(음력 10월 8일)
(향년 48세)
조선 경기도 강화도호부 유배지
(現 인천광역시 강화군 내가면 외포리 60)[1]
능묘
광해군묘(光海君墓)
재위기간
조선 왕세자빈
1592년 5월 29일 ~ 1608년 3월 7일
조선 왕비
1608년 3월 7일 ~ 1623년 4월 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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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
문화 류씨

□영(□英)[1]
부모
부친 문양부원군 류자신[2][3]
(文陽府院君 柳自新, 1541 ~ 1612)
모친 봉원부부인 정양정[4][5]
(蓬原府夫人 鄭楊貞, 1541 ~ 1620)
형제자매
6남 4녀 중 3녀
배우자
광해군
자녀
슬하 3남 [ 펼치기 · 접기 ]
성별 미상(1592 ~ ?)
장남 - 왕자(1596 ~ 1596) 요절
차남 - 폐세자 이지(廢世子 李祬, 1598 ~ 1623)
3남 - 왕자(1601 ~ 1603) 요절

종교
유교 (성리학)
작호
문성군부인(文城郡夫人)
존호
장렬정성명숙경휘현신정순왕비
(章烈貞聖明淑敬徽顯愼靜順王妃)[6]



1. 소개
2. 생애
3. 가계
4. 여담
5. 대중매체
6. 관련 문서




1. 소개[편집]


조선의 제15대 왕인 광해군정비. 폐비 류씨로 알려져있는 인물이다. 류자신(柳自新)의 딸이며, 본관은 문화(文化)이다.


2. 생애[편집]


1576년(선조 9년) 음력 7월 21일(양력 8월 15일) 판윤 류자신과 부부인 동래 정씨의 6남 4녀 중 3녀로 태어났다. 형제자매도 왕실과 혼맥으로 얽혀있었는데, 장남 류희갱은 성종의 아들인 봉안군의 증손녀와 결혼했다. 또 4남 류희발은 당시 대비였던 인순왕후의 조카사위였고,[2] 5남 류희량은 중종의 딸 숙정옹주의 손녀사위였으며, 6남 류희안의 장모는 역시 중종의 딸인 의혜공주의 손녀였다.

1587년(선조 20년)에 광해군의 신붓감으로 간택되어 가례를 올리고 문성군부인(文城郡夫人)[3]으로 봉작되었다. 그 뒤 1592년(선조 25년), 남편 광해군전란 도중에 긴급히 세자에 책봉되자 왕세자빈이 되었고, 1608년(선조 41년), 광해군으로 즉위하자 왕비로 진봉되었다.[4]

1623년(광해군 15년) 음력 3월 12일 남편 광해군인조반정으로 왕위에서 폐위되어 '군(君)'으로 격하되면서, 그녀 역시 왕비에서 다시 '군부인(郡夫人)'으로 격하되어 강화도유배, 위리안치되었다.

그 해 6월, 아들 폐세자 이지와 며느리 폐빈 박씨가 유배지에서 탈출 실패 후 목을 매 자결하는 사건이 있었으며, 결국 같은 해 10월 31일(음력 10월 8일), 아들 부부의 뒤를 따라 사망하였다. 유배된 지 7개월 만의 일이었다.[5] 경기도 양주목 적성동[6]에 장사지냈으며, 공식적으로 일개 왕자의 아내인 까닭에 은 조성되지 않았다.

폐비가 강화도에서 죽으니, 해조에 하교하여 물자를 속히 내려보내게 하다.

문성 군부인(文城郡夫人) 유씨(柳氏)강화도 위리(圍籬)에서 죽으니, (上)이 해조에 하교하기를,

“폐비가 병으로 죽었다니 내가 매우 놀랍고 슬프다. 염빈(斂殯)할 때 쓸 의금(衣衾) 및 관판(棺板) 등의 물자를 속히 내려보내도록 하라.”

하였다. 예조가 아뢰기를,

“이번 초상은 폐빈의 초상과는 다른 데가 있습니다. 시행해야 할 상례를 유신(儒臣)으로 하여금 널리 상고하도록 하는 한편, 춘추관으로 하여금 실록을 상고해 보아서 예법대로 시행하여 미진한 데가 없도록 하소서. 그리고 초상에 쓸 의금 등의 제구를 해사로 하여금 밤낮을 가리지 말고 속히 내려보내게 하소서. 또 내일부터 조시(朝市)를 정지하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하니, (上)이 따랐다.

《인조실록》 3권, 인조 1년(1623년, 명 천계(天啓) 3년) 10월 8일 을축 1번째기사



3. 가계[편집]


  • 친정(문화 류씨)
    • 아버지 : 문양부원군(文陽府院君) 류자신(柳自新)[7]
    • 어머니 : 봉원부부인 정양정(蓬原府夫人 鄭楊貞)[8]
    • 형제들
      • 류희갱
      • 문창군 류희분




  • 배우자 / 자녀
    • 남편 : 광해군(光海君) 이혼(李琿)
      • 장남 : 왕자 - 조졸(早卒)
      • 차남 : 폐세자(廢世子) 이지(李祬)
        • 며느리 : 폐세자빈 박씨(廢世子嬪 朴氏)[9]
          • 손녀 : 군주(郡主, 1613~1614)
      • 3남 : 왕자 - 졸서(卒逝)[10]


4. 여담[편집]


야사에 따르면 광해군중립외교를 반대하고 친명배금을 주장했으며, 성리학이 아닌 불교를 신봉했고 다음 생에는 "왕가의 며느리가 되지 않게 해달라"고 유달리 빌었다고 한다.

당연하게도 명목상 시어머니였던 인목왕후와도 사이가 좋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조선왕조실록의 기록[11]에 '역적(광해군) 부부가 내인을 동원해 흉측한 술책을 행하였다'며 관련 내인들을 극형에 처할 것을 요구한 인목왕후의 전교가 있다. 이를 볼 때 실제로 술책이 있었는지는 차치하더라도, 문성군부인에게도 상당한 적대감을 가지고 있던 것으로 보인다.

2002년 11월 15일, 사이버 조선왕조라는 사이트에서 인터넷 논객들은 광해군을 '혜종 경렬성평민무헌문대왕(惠宗 景烈成平愍武獻文大王)'으로 추숭 복위하고, 폐비 류씨를 '소온사헌혜장왕후(昭溫思獻惠章王后)', 능호를 열릉(烈陵)으로하여 추숭하였다. 그러나 이는 말 그대로 가상 사회에서 있었던 일이라 어떠한 공적인 권위도 없으며, 전주 이씨왕실종친회인 대동종약원과도 아무 관계가 없으니 당연히 정식으로 인정받지 못한다.


5. 대중매체[편집]


















  • 원작 영화와 달리 드라마에서는 가상 인물임을 확실히 명시하고 있기 때문에 문성군부인이 모티브인 별개의 캐릭터이다.



6. 관련 문서[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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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광해군의 유배지는 강화도인 것만 알려졌고 그 자세한 위치는 몰랐으나 최근에 연구와 현장조사를 통해 강화도 내가면 외포리 정포마을 어귀에 유배지가 있었음이 확인되었다.문서 참고.[2] 류희발의 처조카인 심엄은 정원군동서간이다. 인목왕후 문서에서도 확인할 수 있지만 인목왕후친정 집안과도 인척관계다.[3] 본관 문화 류씨의 유래인 황해도 문화군(이후 신천군 문화면)에서 따왔다.[4] 광해군과도 공통조상으로 엮이는데 광해군의 외조모는 정인지의 3남 정경조의 손녀고, 문성군부인 류씨의 조모는 정인지의 2남 정숭조의 손녀다. (외)조모들끼리는 6촌간이며 광해군 부부는 10촌인 셈이다. 더 나아가 정인지의 4남 정상조의 손녀는 덕흥대원군과 결혼하여 선조를 낳는다. 선조와 공빈 김씨 역시 8촌이었던 셈.[5] 야사에 따르면 인조반정으로 폐출된 후 남편 광해군을 원망하여 이로 인한 화병으로 유명을 달리하였다는 설, 스스로 음식을 거부해 아사했다는 등이 있다.[6]경기도 남양주시 진건읍 송능리.[7] 류자신은 조선 2대 왕인 정종의 외6대손이다. 순서는 정종선성군 → 이씨부인 → 정숭조(鄭崇祖)의 처 조씨 → 정승염(鄭承廉) → 정씨부인 → 류자신 순이다.[8] 정양정은 조선 2대 왕인 정종의 외5대손이다. 순서는 정종정석군 → 이겸(李慊) → 이씨 부인 → 원대은개(元大隱介) → 정양정 순이다.[9] 당시 쫓겨난 광해군문성군부인(폐비 류씨)의 아들 부부 또한 죽기 전까지 불행한 삶을 살았다. 1623년(광해군 15년), 인조반정이 일어나면서 할아버지 박승종과 아버지 박자흥은 반정 이튿날 자결하였고, 외조부 이이첨, 외삼촌들, 어머니는 반정군에 붙잡혀서 연좌제 명목으로 저잣거리에서 공개 참수되었다. 한편 폐세자 부부는 단식을 하거나 목을 매는 등 수 차례 거듭하여 자결을 시도하다 유배 2개월 후인 음력 5월, 남편 폐세자 이지가 땅굴을 파고 도망치려다가 발각되었고 폐세자빈 박씨는 희망도 운명도 끝났다며 스스로 목을 매 목숨을 끊었다. 향년 26세이다.[10] 유시(17~19시)에 왕세자의 둘째 아들(원래는 셋째지만 첫째가 태어나자마자 죽었기 때문에 둘째 아들로 표기된 듯 하다.)이 졸서하였다. 【마마를 앓았다. 】 - 선조실록》 168권, 선조 36년(1603년 명 만력(萬曆) 31년) 11월 11일 (계해)[11] 인조 1년(1623년,계해) 3월 17일 기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