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세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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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세광
Moon Se-gwang | 文世光
[1]

파일:1Is6jCrB.jpg

출생
1951년 12월 26일
[[일본|

일본
display: none; display: 일본"
행정구
]]
오사카부 오사카시 히가시스미요시구
사망
1974년 12월 20일 오전 7시 30분 (향년 22세)[2]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현저동 서울구치소
(現 서대문형무소역사관)
국적
[[대한민국|
대한민국
display: none; display: 대한민국"
행정구
]]

학력
오사카시립 쿠와즈(桑津) 소학교 (졸업)
오사카시립 히가시스미요시(東住吉) 중학교 (졸업)
세이키상업(成器商業)고등학교 (중퇴)[3][4]
본적
경상남도 진양군 대평면 상촌리 775
(現 경상남도 진주시 대평면 상촌리 775)
본관
남평 문씨
가족
부친 문병태(文炳台) (1918 ~ 1969)
모친 육말란(陸末蘭) (1927 ~ ?)
형제자매 3남 1녀 중 3남
배우자 강성숙 (1950년생)
자녀 슬하 1남 (1973년생)

1. 개요
2. 생애
2.1. 초기
2.2. 고등학교 자퇴 후
2.3. 박정희 암살 계획
2.4. 만경봉호 승선과 권총 절취
2.4.1. 번외: 조총련 김호룡과의 관계
3.1. 운명의 그 날
3.2. 체포와 수사
3.2.2. 일본 경찰의 비협조적 태도
3.3. 최후
3.3.1. 재판과 사형 확정
3.3.2. 옥중수기
3.3.3. 나는 바보였습니다
3.4. 공판일지
4. 대중매체에서



1. 개요[편집]


박정희 전 대통령 암살을 시도했던 재일 한국인. 일본식 통명은 난조 세이코(南條世光)이다.

1974년 8월 15일 광복절 기념식장에서 박정희 저격 미수 사건을 일으켰다. 박정희 대통령의 암살은 실패했으나, 영부인 육영수 여사가 총에 맞았고 수술을 받았으나 끝내 사망했다. 문세광은 현장에서 체포되어 재판을 받아 사형을 선고받았고, 1974년 12월 20일에 사형이 집행되어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향년 22세.


2. 생애[편집]



2.1. 초기[편집]


1951년 12월 26일 일본 오사카에서 석면 제조업자인 아버지 문병태와 어머니 육말란 사이에서 3남 1녀 중 3남으로 태어났다. 본적은 경상남도 진양군 대평면 상촌리 3-24다.[5][6]

오사카의 구와즈(桑津) 소학교, 히가시스미요시(東住吉) 중학교를 거쳐 세이키(成器) 상업고등학교에 진학하였으나 아버지의 만류에도 2학년 때 중퇴했다. 고등학교 1학년, 2학년에 걸쳐 학급위원이었고 과외활동, 정치활동, 학교분쟁에 항상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2학년에는 생도회부회장에 당선된 일도 있다. 학원 분규나 정치 활동에는 큰 흥미를 보였다고 한다. 동맹 휴학 등 저항운동을 주도했고 다른 학교의 데모에도 큰 흥미를 보였다.


2.2. 고등학교 자퇴 후[편집]


학교 중퇴 후 활동을 시작한 것은 조총련이 아닌 민단 산하의 청년조직인 "한청"이라는 단체였다. 오사카시내의 민단 관계자의 말에 의하면 1968년에 이쿠노구 지부에 가입했다. 이때부터 한청 일을 도왔으나 두드러진 일은 없었다. 또 초기엔 "말이 적었고 순수한 일면도 있었으나 흥분을 잘하고 성격이 격정적이었다"고 한다. 사물을 두루 생각해서 처리하고 행동하기보다는 무엇인가 한다고 하면 열중하는 편이었다고 한다. 문세광은 활동이 지나면서 활발해지고 말솜씨도 많이 늘었다고 한다. 한청은 민단 내의 청년들을 중심으로 "반 독재 민주화를 외치던 반 박정희 세력"이었다. 반 박정희를 표방한 한청이 본래 박정희를 지지하던 민단의 산하단체였음이 아이러니하다.

1960년대와 70년대 초반은 일본에서 학생운동이 활발하던 시기였는데 문세광은 일본 내 극좌 단체들과 관련이 있었다고 한다. 문세광은 당시 "폭력 혁명 고교생 전선"이라는 일본 내 극좌 고교생 단체 출신이었고 전공투의 재수생 버전인 "전국재수생공투회의"의 멤버이기도 했다. 폭력혁명 고교생 전선은 프롤레타리아 군단 전국 학생위원회의 산하 조직이었고 사건 당시에는 전국재수생공투회의(全国浪人共闘会議. 약칭 "낭공투(浪共闘)", ろうきょうとう)의 오사카지부원이었다.일본어 위키백과 문서[7]

문세광과 관련된 부분만 발췌하면 「프롤레타리아 군단의 고교생 조직이였던 폭력혁명고교생전선출신. 1974년 한국의 광복절 기념식에 참석해 박정희 대통령을 암살을 꾀함.」 일본에서는 아예 박정희 저격 미수사건을 문세광 사건이라고 부르며 20세기 후반 일본 극좌 테러의 한 사건으로 평가하기도 한다. 또 일본의 사상가이자 평론가인 치사카 쿄우지가 "문세광은 오사카 부립 키타노고등학교 폭혁(暴革)의 리더로, 1969년은 나와 친하지는 않았지만, 같은 오사카낭공투일원이였다."고 언급한 것을 보면 제4인터내셔널 일본지부와 연계된 고교생 좌익단체에서 활동한 경력이 있는 등 혁명적 급진 사상을 가진 인물이라는 점에는 대부분의 연구자들이 동의하고 있다.

낭공투에는 분트계의 중앙파, 해방파 계열의 SL파, 아나키스트계의 SL좌파[8]의 주요 3파가 있었고 그 외에 마오주의파, 트로츠키를 위시한 국제주의 제4인터내셔널 파가 있었다고 한다. 북한하고는 큰 관련은 없었던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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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2년 4월 23일 도쿄 시부야 야마테교회에서 열린 한청 주최 4ㆍ19 혁명 12주년 기념식에 참석했던 문세광

구 한청 멤버의 말에 의하면 문세광의 집에 책이 꽤 있었지만 그는 책을 읽는다기보다 장식품으로 보관만 했다. 일본 가택수사 결과에서도 문이 진실로 공산주의마오쩌둥 사상, 김일성 사상을 이해하려 한 것 같지 않고 과시용의 장서였던 것 같다는 의견이 나왔다. 저작에는 글 가운데 체크를 해 놓고 자기 나름대로의 노트를 해 놓은 것도 있었으나 그것은 무시할 만한 극소수였고 모든 선집을 한 번도 읽은 흔적이 없었다고 한다.


파일:문세광11.png

1973년 7월 요코하마(横浜) 시민홀에 참석했던 문세광
1973년 8월 일본 도쿄에서 김대중 납치 사건이 일어났을 때 오사카 한국 총영사관에 인질극을 벌이고 폭발 테러를 벌이자고 한청 중앙본부 부의장인 김군부에게 편지를 보냈다. 그런데 2005년에 방영된 MBC 이제는 말할 수 있다에 따르면 김군부는 이 편지를 받은 적이 없다고 밝혔다. 그리고 1년 후 민단계 언론인 통일일보에서 이 편지가 공개되었다. 한청본부로 보내려던 이 편지가 같은 건물을 쓰고 있던 민단에 보내졌는데 민단은 주일 한국대사관에 이 편지를 보냈고 중앙정보부도 이 편지를 입수해 문세광을 예의주시하게 되었다.



<육영수와 문세광> 1부 - 중앙정보부는 문세광을 알았다
MBC 이제는 말할 수 있다 - 2005년 3월 20일 방영



<육영수와 문세광> 2부 - 문세광을 이용하라
MBC 이제는 말할 수 있다 - 2005년 3월 27일 방영


2.3. 박정희 암살 계획[편집]


문세광은 박정희 암살을 결심한 뒤에도 때때로 마음의 동요가 있었으나 문세광의 배후에게서 공작금 50만 엔+α을 받은 이후에는 약점이 잡혀 물러날 수 없게 되었다.[9][10][11] 1973년 11월 19일부터 22일까지 3박 4일 동안 학창시절 여자친구였던 요시이 미키코(吉井美喜子)[12]와 함께 홍콩을 여행하기도 했다. 암살용 권총을 구입할 겸 요시이 미키코의 남편인 요시이 유키오(吉井 行雄)[13] 명의의 여권으로 외국 출입이 가능한지 실험해 보기 위함이었다. 이후 1974년 2월에는 누군가의[14] 알선으로 도쿄 아카후도(赤不動)병원에 위궤양 환자로 위장해 1달간 입원(2월 12일~3월 11일)했다.[15] 그리고 퇴원 후 「아타미」라는 온천에서 1박을 한 기록이 있다.

1973년 미키코(美喜子)와 홍콩 여행을 다녀오거나 1974년 사건 직전에는 나가노현으로 가족들과 여행을 다녀왔으며 집에 에어컨을 설치하고 승용차를 구입했다는 사실을 볼 때 누군가에게서 받은 돈으로 사용했을 가능성이 높다.

2.4. 만경봉호 승선과 권총 절취[편집]


만경봉호는 북한일본을 왕래하는 북한 선박으로, 1971년 8월 18일 취항했으며 당시의 선적지는 함경북도 청진시였다. 이 배의 취항 목적은 조총련 동포의 조국 방문이라고 내세웠지만 실제 목적은 조총련 간부와 조직원에 대한 선내 정치학습, 기항지를 중심으로 한 지방자치단체와의 접촉을 통한 친북 세력 확대 공작 추진과 불법 활동가에 대한 직접지도 등이었다.

문세광은 만경봉호에 승선하여 북한의 공작지도원과 40분 가량 면담했다. 그 지도원은 문세광의 신원과 과거 투쟁경력 그리고 그가 추진 중인 박정희 암살 계획에 대해 소상히 알고 있었으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식당에서 인삼주를 곁들인 식사를 대접하며 "남조선 인민민주주의 혁명의 완수를 위해서는 남조선의 사회 혼란을 조성해야 하는데, 박정희를 암살하는 방법 이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다. 이 사업은 김일성 주석이 직접 지시한 혁명과업이니 생명을 걸고 성공시켜야 한다."고 당부했다. 문세광은 그 지도원에게 "김일성 주석을 위해 생명을 바쳐 박정희를 기필코 암살하겠노라"고 다짐한 뒤 그날 밤 늦게 하선했다.

문세광은 저격용 권총의 취득 방법을 여러가지로 궁리했는데 결국 일본 경찰의 권총을 훔치기로 했다. 일본 경찰을 골탕먹이는 것이 첫 번째 이유였고, 훗날 자신의 범행이 북한의 배후 조종이 아니라 일본인이 개입된 것으로 위장해 한일관계를 악화시키는 것이 두 번째 이유였다.

7월 초순부터 오사카, 고베, 나라, 교토 등지의 여러 파출소를 대상으로 답사를 시작한 그는 대부분의 파출소가 2층에 위치해 침입이 어려운데 유독 오사카 소재 다카쓰(高津) 파출소만은 단층으로 야간 침입이 용이하다는 것을 파악했다. 문세광은 다카쓰 파출소 교통경찰관들의 권총을 절취하기로 결심하고 실행 후 경찰 수사에 혼선을 주기 위해 사전에 고베에 가서 시내 다방에서 성냥 2갑을 준비했다.

1974년 7월 18일 새벽 4시 경 경찰관들이 파출소로 돌아와 숙면하는 것을 확인한 후 뒷문을 파이프렌치로 헐고 들어가 미리 준비해 간 성냥 2갑을 그곳에 버린 다음 취침 중인 경관 2명의 권총 2정과 실판 10발을 포함해 가죽 벨트에 달린 권총 케이스 2개, 수갑 2개, 경찰봉 1개 등을 절취했다. 그 중 미제 권총 1정과 0.38구경 실탄 5발을 저격용 총기로 선택했다.


파일:문세광이썼던리볼버증거품.png

문세광이 썼던 리볼버 증거품

2.4.1. 번외: 조총련 김호룡과의 관계[편집]


한국 수사결과에 따르면

7.4 남북 공동 성명 직후인 1972년 9월 3일, 오사카 소재 페스티벌 홀에서 민단조총련이 회동에 단합대회를 열었다. 이 때 문세광은 한청 대표로서 김호룡은 조총련 대표로서 각각 참여해 서로 인사를 나누었다. 김호룡은 이 대회 이틀 후 아침 8시경 오사카에 있는 문세광을 찾아와서 조총련 이쿠노구 지부 정치부장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뒤 단합대회에서 문세광이 보여주었던 활약상을 극구 칭송했다. 그는 "같은 핏줄을 받은 같은 민족끼리 서로 간격이 없어야 되겠고, 마침 우리 집도 이 근처에 있으나 정치이념을 초월해서 자주 만나자"고 했다.

이후 김호룡은 매월 평균 2회 정도 문세광의 집을 드나들었다. 명절에는 조총련 대표 한덕수가 보내온 물품이라며 과실주·인삼주 등을 선물해 문세광의 환심을 샀다. 그는 남북정세, 한일관계 등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피력하면서 주로 남한과 일본을 비난하였고 북한 및 조총련에서 발간한 팸플릿과 교육자료를 제공하였다. 특히 1973년 8월 김대중 납치 사건 이후부터는 그전까지 북한의 우월성을 선전하던 것과는 달리 남한에 대한 비난에 중점을 두어 선전했으며 문세광도 이에 완전히 동조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 단계에 이르러 1973년 9월부터 남한에서 공산주의 혁명을 일으키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박정희를 암살해 이를 인민봉기의 기폭제로 삼는 것이 중요하다고 역설했다. 그리고 이런 영웅적 과업을 수행해야 된다고 선동했는데, 문세광은 이에 고무되어 박정희 저격을 결심하게 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2005년에 한국 언론 최초로 MBC 이제는 말할 수 있다에서 김호룡과 인터뷰를 했는데 그는 자신은 문세광과는 그저 인사를 나눌 정도의 사이에 불과했으며 조총련과 박정희 저격 미수 사건과는 무관하다고 주장했다. 1974년 5월 중순에 김호룡이 문세광의 집에 찾아와 "혁명가는 무기를 스스로 조달하여 혁명을 성공시켜야 한다"고 말했다는데 김호룡 본인은 2005년 인터뷰에서 이 말을 듣고 어이없어하며 웃었다.

김호룡 본인이 배후로 지목되자 8월 18일 오후 이쿠노 서지부에서 기자회견을 하였는데 자신이 문세광을 처음 알게 된 것은 1972년 9월경으로 마을 지부관 내에 조선신보(朝鮮新報)를 배포하던 중 문세광이 신문을 자신에게도 달라고 해서 처음 알게 되었으며 2년간 3번밖에 만난 적이 없었다고 한다. 또 문세광을 만났을 때 인권 및 통일 문제 등에 관해 단편적인 이야기만을 주고받았을 뿐이며 지난 7월 중순경 그의 집 현관 앞에서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는 민청학련 사건 등의 팜플렛을 그에게 건네주고 정세는 이렇다고 말했더니 그가 "고맙다"고 하는 정도였다고 말했다. 김호룡은 증거가 없어 한국 정부와 일본 정부에게 수사당국의 수사를 직접 받은 적이 없다. 당시 경시청 경비국장으로 문세광 수사를 전담했던 야마모토 시즈히코도 이제는 말할 수 있다와의 인터뷰에서 조총련과 박정희 저격 미수 사건이 관련 있다는 증거를 찾을 수 없어서 김호룡을 수사하지 않았다고 밝혔다. 심지어 한국 수사당국도 김호룡을 수사하지 않아 이 주장은 사실상 사장되었다.


3. 박정희 저격 미수 사건[편집]




3.1. 운명의 그 날[편집]



파일:문세광 여권사진.png

1974년 7월 요시이 유키오(吉井行雄)의 명의로 발급한 여권 사진

1974년 7월 지인인 요시이 미키코(吉井美喜子)의 남편 요시이 유키오(吉井行雄)의 이름으로 여권을 발급받았다. 8월 6일 오후 1시에 김포공항을 통해 입국해 조선호텔에서 15일까지 투숙하였다.

한 가지 여담으로 여행사 직원의 회고에 따르면 8일 문세광이 야간관광을 하고 싶다고 부탁하였고 확인 후 오후 5시쯤 방에 전화를 걸었는데 한국인 남자가 “잠깐”이란 말하고 문세광에게 바꿔주었다고 언급하였다. "부탁한 야간관광이 없다"고 말하자 "알겠다"며 끊었다고 증언했다. 다른 여직원도 같은 증언을 하였는데 13일 오후 5시 30분쯤 문세광이 투숙하고 있는 방에 전화를 걸었는데 "여보세요"라는 한국어로 대답해서 이상한 생각이 들어 "거기 1030호실 아닌가요?"라고 물었더니 "그렇습니다. 웬일로 그러십니까"라면서 문세광에게 전화를 바꿔주어 일본어로 "대한 여행사 쪽에 시내 야간관광편이 있으니 6시까지 내려오면 된다"고 했더니 "오늘은 바빠서 안 된다"며 황급히 전화를 끊었다고 증언하였다. 목소리는 차분하고 맑은 표준어를 사용하는 30대의 남성 같았다고. 최소한 두 번 이상 한국 남자와 있었으며, 또한 8월 23일 수사 결과를 발표하기 전날 밤 당시 국무총리였던 김종필은 두 여행사 직원과 면대해 사실을 함구하라고 부탁했다고 한다.

8월 15일에는 광복절 기념식이 열렸던 국립극장에 들어가 일본인 초청자임을 빙자하고 잠입하였다.[16][17][18]


파일:저격 당시 찍힌 사진.png

저격 당시 찍힌 사진

박정희 대통령이 기념사를 낭독하던 중 뛰어나오면서 총을 발포하였으나, 대통령의 암살에는 실패했고, 그 와중에 육영수 여사가 총에 맞아 사망했다. 문세광은 현장에서 체포되었다.[19]

3.2. 체포와 수사[편집]



3.2.1. 자칼의 날[편집]


문세광은 즉시 체포되어 중앙정보부 조사실로 압송되었다. 그러나 쏟아지는 구타에도[20] 불구하고 완강히 입을 열지 않아 전혀 수사가 진행되지 못했는데 신직수 중앙정보부장의 법무비서관이던 김기춘 검사가 투입되었다. 사건이 일어나기 전 8월 초순 김기춘은 가족과 함께 대천해수욕장으로 여름 휴가를 가서 막 한국어 번역판이 나온 자칼의 날을 재미있게 읽었다고 한다. 그가 휴가에서 돌아온 지 채 며칠이 지나지 않아 이 사건을 맡게 된 것이다.

임무를 맡은 김기춘은 하루빨리 범행 동기와 배후세력 등을 파악할 수 있을지 고민에 빠졌다고 한다. 8월 16일 김기춘은 일본어를 구사하는 정보부 수사관을 대동하고 문세광을 첫 대면했다. 그 때까지 문세광은 30시간 동안 진술거부권을 행사하고 있었다.

김기춘: 소설 「자칼의 날」을 읽었지요?

문세광: 네, 읽었습니다. 선생님도 읽었습니까?

김기춘: 나도 재미있게 읽었소. 그런데 당신이 바로 자칼이 아니오?

문세광: 그렇습니다. 내가 바로 자칼입니다.

김기춘: 당신의 사상은 무엇입니까?

문세광: 나는 공산주의를 신봉합니다. 나는 공산혁명을 이룩하려는 한 수단으로 여기에 왔습니다.

김기춘: 그렇게 혁명을 하겠다는 사람이 왜 이렇게 비겁하게 입을 다물고 있소이까?


이렇게 김기춘은 회고에서 문세광에게 "'내가 소설 자칼의 날[21]을 읽었는데, 당신이 자칼이 아니냐'고 추켜세우자 문세광이 여기에 감명 받아 술술 불었다"고 주장했다.[22]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저런 방법보다는 고문 등의 강압적 방법으로 불게 했다고 보고 있다.

문세광은 김기춘의 설득으로 조총련 조직의 지령을 받았음을 자백했다고 했지만 문세광은 전혀 공작원 훈련을 받지 않았고 조총련과도 관계가 미약한 재일교포 운동권에 불과했으며 장거리에서 표적을 맞힐 수 있는 권총사격을 포함한 특수공작 훈련은커녕 가벼운 고문에도 쉽게 술술 불 정도로 나약한 인물이고, 문세광 본인이 "잡아당기면 총알이 나가는 것을 아는 정도였다. 나는 사격술에 대해서는 문외한이다."라고 진술했다.

그러나 여기에는 몇 가지 의문점이 있다. 문세광이 사격에 그 정도로 문외한이라면 사격을 아주 잘해도 성공할지 모르는 대통령 암살이라는 엄청난 일을 실행할 계획을 어떻게 세울 수 있었냐는 점이다. 또한 문외한이라면 오히려 그런 일을 꾀했는데도 간단한 연습조차 미리 하지 않았다는 것이 더 말이 되지 않는다. 그리고 문세광이 조총련 조직의 포섭을 당한 것이라면, 이렇게 총도 쏠 줄 모르는 미숙한 그에게 그 엄청난 일을 지령내린 셈이 되므로 이 역시 말이 되지 않는다.[23][24][25][26][27]

그 후, 문세광은 8월 24일 검찰에 송치되었다.

3.2.2. 일본 경찰의 비협조적 태도[편집]


초기엔 일본 경찰도 범인이 일본 파출소에서 훔친 권총으로 외교관계를 맺은 우방국의 국가원수를 암살한 시도였기 때문에 나름대로 수사에 열을 올렸다. 그러나 한국 측이 문세광의 배후 세력으로 조총련을 지목하자 일본 수사당국은 비협조적으로 나오기 시작했다. 김대중 납치 사건 당시 일본 경찰의 수사 협조 의뢰요구에 대하여 한국 경찰과 중앙정보부는 무조건 '잘 알 수 없음'이라는 취지의 회신을 했는데 문세광 사건에서는 반대로 일본 경찰이 중앙정보부의 수사협조의뢰에 대해 극히 비협조적인 태도로 일관했던 것. 예컨대 "문세광이 미키코를 만났다는 OO다방이 오사카의 XX지역에 있다는데 사실인가?"라는 물음에도 "모르겠다"고 일관하는 식이다.


3.3. 최후[편집]




3.3.1. 재판과 사형 확정[편집]


8월 24일에 검찰에 송치되었고 9월 12일에 기소되어 10월 19일 1심에서 사형이 선고되어 즉각 항소했으나 11월 20일 서울고등법원에서 항소가 기각되었으며 12월 17일 대법원에서도 상고가 기각되어 사형이 확정됐다.[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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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4년 8월 24일 구속 송치[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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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4년 10월 7일 첫 공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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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4년 10월 14일 1심 결심 공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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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4년 10월 19일 1심 선고 공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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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4년 11월 13일 2심 재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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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4년 11월 20일 2심 선고 공판[30]

문세광은 수사 초기에는 "바깥은 아무 일도 없느냐"며 민중봉기를 은근히 기대하는 듯한 질문을 던졌다. 그도 그럴 것이, 김호룡을 비롯한 조총련 고위 인사들은 문세광의 저격 이후 남한 민중이 들불처럼 봉기를 일으킬 것이라고 강조했기 때문이다. 또 수감생활을 하며 교도관과 웃으며 이야기도 하고 재판장에서도 여유를 부렸으며 사형을 선고받아도 모범수로 살면 7~8년 뒤 출소가 가능하다고[31] 아내에게 편지를 보냈을 정도다. 재판장에서 "나는 육영수 여사를 겨냥하지 않았다"고 진술하기도 했다.

모범수로 출소될 수도 있다고 진짜로 믿었는지, 문세광 본인은 사형이 집행되리라 전혀 예상하지 못했으며, 사형 집행장에 도착해서야 자신이 속았음을 비로소 깨닫게 된다.

3.3.2. 옥중수기[편집]


『나는 살고싶다』 『암살목적으로 고국의 땅을 밟았을 때 조국의 하늘이 이처럼 푸른 것을 처음 알았다』는 내용의 옥중수기를 8·15 저격범 문세광이 작성, 13일 서울구치소에 냈다. 구치소용 접견내용기재용지 32장으로 된 이 옥중수기는 지난 5일자로 매듭지어진 것으로 문은 첫 머리에서 『태어난 몸으로 마지막 수기마저 우리 글로 쓸 수 없음을 한탄한다』고 토로.「문세광」이라는 세 글자만 한글로 쓰여졌을 뿐 전문이 일본어로 돼있다. 이 수기에서 문은 자신의 성장과정을 상세히 기록, 국민학교 때 일본인 학우들로부터 얻어맞고 또 때려주던 일, 중학교 때 담임선생이 「죠오센징」이라 하여 차별하는 일본인 급우들을 나무라던 일. 고교 때 교사가 말끝마다 「죠오센징·죠오센징」하며 멸시해 가슴아파했던 일들을 회상했다. 문은 이러한 성장환경 때문에 민족적인 소외감을 절실히 느꼈고 『공산주의가 아니면 이 소외감을 벗어 날수 없다』고 생각하게 됐으며 김대중씨 사건이 결정적 계기가 되어 그들과 뗄 수 없는 관계에 빠져들게 된 과정 등을 낱낱이 적었다. 문은 현재의 심정을 적으면서 『저토록 푸른 하늘 아래에서 돌이킬 수 없는 범죄를 저지르게된 내 자신이 더 할 수없이 한스럽다』고 적고 『나는 살고싶다. 나는 살아서 또 다른 인생을 개척하고 싶다』는 등 삶에 대한 지극한 애착을 수기 이곳저곳에서 자주 되뇌고 있다. 문은 자신에게 다시 한번 삶의 기회가 주어진다면 『국군에 들어가 조국의 젊은이들과 삶을 나누고싶다』고 적었다.

1974년 12월 13일 게재된 뉴스


3.3.3. 나는 바보였습니다[편집]


사형이 확정된 후 3일 뒤인 1974년 12월 20일 오전 7시 3분, 문세광이 수감되어있던 서울구치소 감방의 문이 교도관 4~5명에 의해 열렸다. 문세광은 기상시간에 맞춰 막 깨어난 참이었다.

교도관들은 문세광을 오랏줄로 묶고 "나가자"고 말했다. 문세광은 담담한 표정으로 감방을 나와 구치소 건물을 벗어나 구치소 뒷담 밑 15평 남짓한 목조단층 건물로 들어갔다. 교도관들은 방안에 있던 다른 교도관 10명에게 문세광을 인계했다. 문세광은 한쪽 벽밑나무 의자에 앉혀졌는데 이때가 오전 7시 5분 쯤이었다.

문세광은 아직도 잠이 덜 깬 표정으로 왜 이 방으로 왔는지 그 이유를 모르는 듯 했다.[32] 사방벽은 흰색, 3개의 출입구와 창문 몇 개, 문세광의 등 뒤쪽 벽은 큰 흰색 커튼[33]으로 가려져 있었고 정면에는 의자 7~8개가 1열로 놓여 있었다. 언뜻 보기에는 아무렇지 않은 평범한 방 같았다. 몇 분이 지난 후 박도형 서울구치소장을 선두로 조태형 대검검사와 검은 가운을 입은 김치연 목사 등 일행 10여 명이 들어와 문세광의 맞은편 의자에 앉았다. 잠깐 동안 싸늘한 침묵이 흘렀다. 평소대로 푸른 누비등복 수의에 붉은 「4428」 수의번호를 달고 안경을 쓰지 않은 채 검은 고무신을 신은 문세광은 이때쯤 평소와는 다른 분위기의 낌새를 차린 듯했다. 그러나 애써 표정을 감췄다. 집행관인 박 구치소장이 일어나 문세광을 일으켜 세운 후 인정신문을 시작했다.

박 구치소장: 이름은?

문세광: 문세광. (한국어)

박 구치소장: 생년월일은?

문세광: 1951년 12월 26일. (일본어)

박 구치소장: 본적?

문세광: 경남 진양군 대평면 산재리 775. (한국어)


이어 판결문 낭독이 있었다.

박 구치소장: 최후로 할말은 없는가?

문세광: 지금부터 사형을 집행하는 겁니까? (일본어)

박 구치소장: 그렇다.

박 구치소장의 대답에 문세광은 약 10초 동안 침묵을 지키다 알겠다면서 고개를 떨구고 흐느끼기 시작했다. 그는 사형 집행 전 다음과 같이 유언하였다. 진술은 일본어로 했다.

나는 바보였습니다... 참으로 박 대통령육 여사에 대해서 미안하기 짝이 없습니다. 재일동포로서 무엇하나 국가에 도움이 되는 일을 하지 못해서 미안합니다. 대통령에게 깊이 사과 드립니다. 대통령에게 총을 겨냥해서 잘못했습니다. 나는 일본에서 그들에게 속았습니다. 내가 외국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그리 됐습니다. 참으로 대통령에게 미안합니다. 육 여사와 죽은 사람 곁에서 같이 살고 싶습니다.


구치소 측은 집행장 안에 담배와 커피, 그리고 보리차를 준비했으나 문세광은 담배와 커피를 요구하지 않고 두 차례 보리차를 청해 마셨다.

나의 처에게 말씀 전해주십시오. 아직까지 젊은 나이이므로 재혼하여 제2의 인생을 걸어가도록 말씀해주십시오. 장남은 2살이므로 형님 부부가 맡도록 전해주십시오. 어머니께는 자식의 불효와 기대에 어긋난 점에 대해 죄송하다고 전해주십시오. 형제들에게는 참으로 미안하다고 말씀해주십시오. 나는 사실 바보였습니다. 처에게는 나쁜 짓을 했습니다. 그리고 박 대통령과 국민에게 미안합니다. 나는 속았습니다. 미운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내가 만약에 한국에서 커왔다면 그들에게 속을 일도 없었을 것입니다. 나는 참으로 바보였습니다. 사형을 당하여도 할 수 없습니다. 마지막으로 아들과 처 사진을 보여주십시오. 처에게는 될 수 있으면 육 여사 묘소를 참배하도록 말씀해 주십시오...


김치연 목사가 성경 낭독을 한 후 7시 31분 문세광의 목에 올가미가 씌워졌고, 집행 후 7시 56분 의무관이 문세광의 절명을 확인했다. 이후 가족이 시신 인수를 요청하였으나 거절당했다.

3.4. 공판일지[편집]


  • 1974년 8월 15일 - 광복절 기념식장 저격미수
  • 1974년 8월 24일 - 구속송치
  • 1974년 9월 12일 - 구속기소
  • 1974년 10월 7일 - 서울형사지방법원에서 첫 공판
  • 1974년 10월 14일 - 1심서 사형 구형
  • 1974년 10월 19일 - 1심서 사형 선고
  • 1974년 11월 13일 - 항소심서 사형 구형
  • 1974년 11월 20일 - 항소심서 항소 기각(사형선고)
  • 1974년 12월 17일 - 대법원에서 상고기각으로 사형확정
  • 1974년 12월 20일 - 서울구치소에서 사형 집행


4. 대중매체에서[편집]


  • 1975년 개봉한 영화 <조총련>에서는 배우 장학수가 연기했다.

  • 1986년 KBS 드라마 <멀고 먼 사람들>에서는 배우 백찬기가 연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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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일본식 이름은 난조 세이코(南條(なんじょう 世光(せいこう), 분 세이코((ぶん 世光(せいこう).[2] 23세 생일을 엿새 앞두고 1975년 새해를 12일 앞둔 날에 사형이 집행되었다.[3] 일본 사회에서 한국인에 대한 민족차별 때문에 더 이상 고등교육을 받아도 사회 진출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여 2학년 재학 중에 자퇴.[4] 1996년 오사카가쿠게이(大阪学芸)고교로 교명 변경.[5] 現 경상남도 진주시 대평면 상촌리 3[6] 대다수의 재일교포들의 본적은 영호남과 제주도에 집중되어 있다. 이 때문에 재일동포 북송 이후 이들은 북한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고 철저하게 팽당했다. 문세광도 본적이 경남 진주에 있다.[7] 1969년에 도쿄와 오사카의 재수생을 축으로 형성했던 재수생의 학생운동 조직으로 1969년~1970년 당시 전국 각지에 존재하고 있었다.[8] SL은 러시아 혁명의 사회혁명당에서 따 온 것이다.[9] 수사발표에서는 김호룡으로부터 공작금 50만 엔을 받았다고 했지만 50만 엔은 문세광이 어머니에게 사업차 빌린 돈으로 확인되었으며 나중에 사업이 잘 되지 않는다며 남은 20여만 엔을 모친에게 돌려주려 했지만 집 수리 비용에 사용하라고 어머니가 받지 않았다고 한다. +α의 금액은 김호룡이 아닌 다른 누군가에게 받은 것으로 추정된다.[10] 문세광의 주변의 한 사람은 "문세광은 누구에게서인지는 모르겠으나 연상의 인물로부터 교시를 받는 것 같았다. 「한청동」 자료 및 문헌을 한 부씩 누군에겐가 보내고 있었다"라고 언급했다.[11] 문세광의 처 강성숙에 의하면 한국 출국 전 1974년 8월 2일 전화에서 마에다(前田)라는 사람과 "전투 선언을 썼느냐", "썼습니다."라고 대화했고 이 사람은 그 전날에는 문세광에게 15만 엔을 준 바 있다고 언급했다.[12] 1950년 출생. 세이후(誠風) 중학교와 세이카(精華) 여고를 졸업했다. 여고 재학 중 사회과학 연구회에 가입해 재일교포 문제와 부라쿠민 해방운동 등에 관심을 갖고 2학년 때는 클럽의 부장을 맡았다. 이 시절 세이키 상고의 자치회 부회장으로 활동하던 문세광과 알게 되었다. 고교 졸업 후 로스다이어 회사에서 8개월간 근무했으며 이후 여러 직장을 전전했다. 요시이 유키오와 1971년 1월 결혼했고 아들 1명을 두었다. 1975년 1월 합의 이혼.[13] 1950년 8월 오사카시(大阪市) 히가시나리구(東成区)에서 출생했으며 당시 삼공섬유회사에서 근무했다.[14] 수사발표에서는 조총련계 한덕수의 주치의인 이해철이 입원을 알선했다고 했다. 하지만 이해철은 이 보도에 놀라 병원에 이게 어떤 일인지 오히려 되물었고 신문사에 항의하였다.[15] 여담으로 같은 병실에 입원한 환자들의 말에 따르면 "위가 나쁘다면서 매일 너무나 많은 식사를 하고 있어 무엇 때문에 입원했는지 의문이 많았다"고 한다.[16] 당시 중부경찰서 송OO 경감의 말에 따르면 8.15 저격 사건 전날 청와대 경호실 장OO 계장이 중부경찰서로 문세광을 데려와 김OO 중부경찰서장과 최OO 정보과장에게 소개하고 문세광을 검문하지 알고 입장하도록 부탁했다고 한다. 최OO 정보과장은 대통령 경호실 장OO 경호관이 "장관을 만나러 온 사람이다"라고 말해 장OO 경호관과 알고 있는 재일 한국인이라고 생각해 들여보냈다고 진술했다.[17] 문세광이 묵었던 조선호텔에서 국립극장으로 갈 때 호텔택시를 대절해서 가려고 했으나 조선호텔은 호텔택시가 있는 호텔이 아니어서 마침 누군가가 타고와서 조선호텔에 와 있던 호텔택시를 타고 갔다. 그 호텔택시가 바로 영화 택시운전사로 알려진 김사복포드 20M 택시였다. 다만 김사복이 운전한 게 아니라 보조운전사 황수동 씨가 운전했다.[18] 당시 사건 수사에서 황씨는 차에서 내려 문을 열어주고 오른쪽에 있는 주차장을 가리키며 "쿠루마"란 말을 덧붙여 기다리고 있겠다는 의사표시를 했다고 한다. "하차선에서 정문 입구 계단까지는 15m쯤 되지만 계단을 오르기 전에 차머리를 주차장 쪽으로 돌려 어디로 들어갔는지는 자세히 모르겠다. 12시까지 기다리다가 문세광이 나타나지 않아 호텔로 돌아왔다"고 진술했다.[19] 자세한 전말은 박정희 저격 미수 사건 문서를 참고[20] 컬러 사진을 자세히 보면 손에 고문당한 흉터가 많다.[21]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실제로 여러 암살범들이 수법(?)을 배우기 위해 이 책을 필독서로 삼았다.[22] 이 주장과 달리 당시 합동수사본부의 중간 브리핑에 따르면 문세광은 체포된 지 불과 5시간 만(=15일 저녁)에 수사관의 강한 압박에 굴복해 자신이 암살범이며 본명은 문세광이라고 자백한 것으로 나온다. 당시 수사본부장 김일두 변호사에 말에 따르면 중앙정보부에서 이미 입수되고 중앙정보부에서 밝혀진 사실을 신문사가 마치 수사본부에서 발표한 듯이 작성한 것 같다고 했다. 본인은 사건 당일 시골에서 서울로 오후 4~5시에 복귀해 조사하고 발표할 수 있는 시간이 없었다고 한다. 그리고 담당검사는 김영수, 정치근 검사로 나온다.[23] 문세광의 이러한 진술은 체포 후에 책임을 조금이라도 면하기 위한 거짓말일 수도 있다.[24] 케네디 대통령을 암살한 리 하비 오즈월드도 음모론자들에 의해 사격이 미숙하다는 설이 있었지만, 그는 해병대 복무 중에 200야드(183m) 떨어진 거리에서 50발 중 49발을 적중시킬 정도의 사격 솜씨를 가지고 있었다.[25] 유명 인물의 암살 음모설에는 암살범이 사격에 미숙하다는 설이 필수적으로 들어가는 편이다. 즉, 실제 현장에서 잡힌 범인은 총 쏠 줄도 모르는 자이며 보이지 않는 배후에 진짜 암살범이 있다는 식이다.[26] 실제로 문세광이 범인이 아니라는 설 등이 존재한다.[27] 문세광이 급하게 처형되는 바람에 진실은 저 너머로 영원히 사라졌다.[28] 사건 발생 이후 겨우 넉달 정도만에 사형이 확정되었을 정도로 재판 진행 속도가 매우 빨랐다.[29] 얼굴을 가리기 위해 숙이지 않고, 고개를 뻔히 들고 있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이런 모습은 재판 내내 이어진다.[30] 이 날의 사진이 마지막으로 한 달 뒤 12월 20일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31] 당시 문세광의 교육 수준이 그리 높지 않아서인지는 몰라도, 이런 터무니 없는 얘기를 순진하게 믿었다. 이것은 완전한 거짓이자 희망고문이었다. 1997년 12월을 끝으로 사형 집행이 정지된 후에도 사형수는 백날 모범수로 살아도 일말의 가능성이라도 있는 무기수와는 달리 가석방 가능성이 전무하다. 사실상 가석방 없는 종신형과 다를 게 없는데 1970년대 중반은 사형 집행이 매우 활발하던 시기로 사형수가 살아서 나올 가능성은 누명이 아니면 절대 없었다. 더구나 현직 대통령 영부인을 죽게 만든 사형수에게 동정이란 기대조차할 수 없는 일이다. 당시의 대한뉴스를 보면, 민족의 대적이라는 표현까지 할 정도다.[32] 사형 확정 후 겨우 3일이 지난 후라서 집행이 이렇게 빨리 될 거라고는 예상을 전혀 못했을 것이다.[33] 사형대를 가리기 위한 용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