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정왕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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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조선 중종의 제2계비. 인종의 계모, 명종의 모후. 시호는 '성렬인명문정왕후(聖烈仁明文定王后)'.
2. 생애[편집]
2.1. 중종 치세 - 중전 시기[편집]
파산부원군 윤지임의 딸로서 17세이던 1517년(중종 12), 당시 중종의 왕비이자 문정왕후에게는 9촌인 삼당고모인 장경왕후가 죽자, 원자 이호(훗날의 인종)의 외숙부이자 마찬가지로 9촌 숙부가 되는 윤임의 뒷배로 간택되어 가례를 치르고 중전이 되었다. 중전이 되었으므로 당시 태어난 원자 이호를 잘 돌봐야 할 책무가 있었고 처음에는 성심성의껏 양육했다.
하지만 여기서부터 인간의 욕심이 시작되었다. 당시 중종은 여러 후궁들로부터 많은 서통 왕자들을 얻은 상태였으나 적통 왕자는 장경왕후가 낳은 원자 이호가 유일했다. 한미한 집안 출신인지라 든든한 친정 배경에 왕자들까지 생산한 후궁들보다도 기반이 미약했던[2] 문정왕후는 적통 왕자를 낳아 입지를 다지려 했다.[3] 실제로 문정왕후는 연달아 임신하여 의혜공주(懿惠公主), 효순공주(孝順公主), 경현공주(敬顯公主), 인순공주(仁順公主)[4] 를 낳았다.
문정왕후가 원하던 아들을 좀처럼 낳지 못하고 있는 상태에서 설상가상으로 문정왕후에게 기어 오르던 경빈 박씨는 자신의 아들인 복성군을 내세워 문정왕후의 양자인 세자 이호에게 도전해 왔다. 세자의 또다른 친위 세력인 세자의 누나 효혜공주의 시아버지 김안로가 작서의 변을 조작하여 경빈 박씨를 찍어내고 조정의 가장 큰 세력으로 성장하였으며 문정왕후는 이들과 잠시 한 배를 타기도 했다. 문정왕후가 드라마에서는 군기잡는 연상의 이미지이지만 실제 역사에서는 경빈 박씨보다 훨씬 나이가 어렸다고 한다.[5]
그러다 문정왕후가 34살의 늦은 나이[6] 에 마침내 고명아들[7] 경원대군을 낳으면서 정국에는 소용돌이가 치기 시작했다. 문정왕후가 경원대군을 낳기 3개월 전에 아버지인 윤지임이 사망하여 심신의 상태도 썩 좋지만은 않았을 것이다. 문정왕후뿐만 아니라 늦은 나이에 2번째 적자를 본 중종도 당연히 기뻐했다.
사실 경원대군을 낳기 전까지의 문정왕후는 세자의 편이 되어 세자를 감싸는 입장이었으며 작서의 변 사건 때도 문정왕후는 최대한 힘써서 세자를 지극정성 보호했다. 혹시나 자신이 아들을 낳지 못한 채로 중종이 죽게 된다면 왕으로 즉위한 세자를 등에 업으려고 했던 것이다. 그러나 고대하던 아들을 낳자 문정왕후는 태도를 180도 싹 바꿔 노골적으로 세자를 적대시하기 시작했다. 중종 말년 세자가 있는 동궁 자선당이 불탄 사건(조선왕조실록)의 배후로 문정왕후가 지목받을 정도다.[8]
이 때부터 자신의 남동생들을 불러 당파를 만드는데 그 유명한 윤원로와 윤원형.[9] 이들이 바로 소윤(小尹)의 축이다. 그 후 대윤의 영수이자 세자의 외숙 윤임과 김안로가 짜고 마음에 안 드는 문정왕후를 찍어내려 하나 여기서 실패. 이를 눈치챈 중종은 "김안로가 대역부도하다"며 도리어 그를 찍어내고 사약을 내린다. 이때 또 다른 세자의 보호자 윤임이 김안로 숙청에서 한 몫을 담당하는 바람에 세자를 옹호하는 세력(대윤)들을 때려잡는 데는 실패하고 다만 세력을 엇비슷하게 맞추는 데는 성공했다.
2.2. 인종 치세 - 대비 시기[편집]
1544년(중종 39년), 중종이 죽고 세자가 즉위하여 인종이 되었으니 '소윤'은 사그라들고 '대윤'의 기세가 승승장구했다. 이와 더불어 소윤의 축 윤원로는 유관 등의 주도로 대윤의 탄핵을 당해 귀양살이까지 했다. 자신을 감싸던 윤원로가 사라지자 문정왕후는 자신의 아들인 경원대군과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 인종을 극도로 몰아세우면서 자신의 안위를 철저히 보존하려 했다. 부왕 중종의 장례 때 인종은 장례 의식을 철저히 준수[10] 하며 안 그래도 허약한 몸을 망치고 있었는데 그랬던 인종에게 계모 문정왕후의 계속된 핍박은 더욱 치명타였다는 견해도 있다.[11] 특히 인종이 식음을 전폐하고 장례 의식을 철저히 준수하는걸 본 정승들이 "세종대왕께서도 장례 중에 육선을 드셨습니다."하며 고기 들기를 권했으나 인종은 "대비마마께서 허락하지 않으시면 고기를 먹을 수 없다"고 했고 문정왕후는 정승들 앞에서는 "주상께 고기를 드시라고 허락했는데 주상이 안 드시는걸 나한테 어쩌라고?"하면서 신하들이 "그럼 자전(대비)께서 먼저 고기 반찬을 드시죠. 그러면 주상께서도 드시겠죠."라고 건의하자 "내가 병이 있는 것도 아닌데 어떻게 상중에 고기를 먹니?"하고 정중히 거부했다.[12]
문정왕후가 인종을 몰아세우는 모습만 보인건 아니라서 인종의 환후가 위중하니 명산대천에 기도를 올릴 것을 지시하는 등 친밀한 모습도 많이 보였다. 그러나 사이가 좋았던건 아니고 이러한 행동들이 조정에서 자신의 존재감을 부각시키려 한 연막 작전이었을 뿐이라는 해석이 많다.[13] 결국 인종은 몸이 본래 약한데다가 아버지 중종의 장례를 몸이 상할 정도로 무리하게 치르느라 등극한지 9개월만에 요절했다. 하지만 야사가 일반인들에게 더 유명한데 야사에서는 문정왕후가 환한 얼굴로 인종을 맞으며 떡을 주었는데 문제는 그 떡에 독극물이 있었고 떡을 먹으면서 '계모가 드디어 날 용서하나?' 싶었던 인종은 기쁜 마음에 떡을 먹었다가 그 후 얼마 안 되어 승하했다. 다른 야사에는 인종이 그 떡에 독이 있는걸 알면서도 마음이 너무 착한 나머지 떡을 먹고 죽는 걸 선택했다고도 한다.[14] 그러나 독살 떡밥이 사실이라면 사관들이 그와 관련하여 기록을 안 남았을리가 없다.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차기 왕 명종이 문정왕후의 친아들인데다가 한동안 문정왕후가 수렴청정까지 했었기에 권력의 속성상 그런 의혹이 묻혔을 수 있고 따라서 독살 가능성 역시도 상당하다고도 할 수 있겠다. 이듬해인 1545년(명종 즉위년), 결국 문정왕후의 아들 경원대군이 왕위에 오르니 명종이고 이와 더불어 대왕대비인 문정왕후가[15] 수렴청정을 하였다.
2.3. 명종 치세 - 대왕대비 시기[편집]
"미망인이 박덕하고 박복하여 거듭 큰 변고를 당하니 다만 통곡할 따름이다. 이제 주상이 어린 나이로 보위(寶位)를 계승하였으니 국가의 대사(大事)를 오로지 대신만 믿는 바이다. 또 지난날 근거없는 낭설을 유포하는 무리들이 사특한 말을 조작하여 나라를 어지럽히려 하였으므로 지금까지도 인심이 의구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다시 이런 사특한 말을 하는 자가 있으면 마땅히 엄히 다스릴 것이다. 그러나 이왕의 낭설에 대해서는 위에서 털끝만한 사심(私心)도 없으므로 이를 다 탕척하고 힘써 인심을 안정시켜 조정을 편안하게 하려고 하니, 대신들도 의당 이 뜻을 알아서 인심을 진정시키고 충성을 다하여 나라를 돕도록 하라."
명종 즉위년(1545), 7월 7일 정유년 1번째 기사
명종 2년에 성렬이라는 존호를 받았다. 인종 때는 재위 기간이 짧아 존호를 올릴 겨를이 없었던 모양.
결국 1545년(명종 즉위년) 을사사화를 일으켜 인종을 위시한 윤임과 대윤을 찍어내었고 오히려 자신을 길들이려는 대신들이 윤원로를 귀양보내자 오히려 대대적인 반격에 나서서 유관, 유인숙을 비롯한 대신들을 차례로 죽였고 백인걸, 권벌, 이언적을 비롯한 반대파 대신들도 유배를 보내 조정을 완전히 장악했다. 1547년(명종 2년), 일어난 양재역 벽서 사건[16] 을 빌미로 다시 사림들과 눈엣가시였던 다른 왕족들도 제거하였다. 대윤의 잔당을 뿌리 뽑는다는 명분으로 을사사화보다도 양재역 벽서 사건이 그 여파는 더욱 컸다. 그리고 1549년(명종 4년), 충주에서 이홍윤의 옥사가 터지자 수십 명의 목을 날려버리고 충주를 유신현으로 강등시킴으로써 충청도[17] 를 청홍도[18] 로 바꾸었다. 그런데 이 이홍윤의 옥사가 가관인데 양재역 벽서 사건으로 죽은 유학자 이약빙은 원래 충주의 대유학자로 일대의 선비들이 죄다 그의 문하였다. 그런데 그런 그가 죽자 분노한 그의 아들 이홍윤이 아버지의 장지를 잡으며 친구들과 "좋은 날이 오면 옥사의 결과가 뒤집힐 것"이라는 요지의 '불온한 말'을 주고 받았다. 이홍윤의 이복형 이홍남이 이를 수상쩍게 여겨 고변을 함에 따라 10여 명이 능지되고 그 이상이 고문사하는 초대형 사건으로 커져 버렸다. 그런데 이런 대형 역모를 때려잡았는데도 공신 책봉이 없었다는 것 때문에 조작이 아니냐는 말이 있다. 거기에 초기에 책임자인 이기는 "미친 놈들이 모여서 헛소리 좀 한 사건이니 곤장이나 치고 유배나 보내고 말자"는 생각이었다. 그런데 정언각이라는 자가 "헛소리를 하면서 한 일을 캐내야 한다"고 이기를 꼬드겼고 이에 이기는 난언율 사건을 역모 사건으로 확대하여 버렸다. 추신으로 정언각은 양재역 벽서 사건을 확대 해석하여 사건을 기여코 키운 장본인이기도 하다. 원래 괘서는 범인을 잡을 수도 없으니 보는 족족 태우는 것이 관례인데 정언각은 이를 떼어 갖다바친 것이다. 그런데 이기, 정순붕 등은 "벽서가 붙은 이유는 역적들에게 가볍게 벌을 준 탓이다."라고 전혀 관련도 없는 엉뚱한 종친 봉성군, 송인수, 이약빙, 이언적, 노수신, 정황, 유희춘, 권응정, 이천제, 권벌, 백인걸 등을 처벌할 것을 청한 것이다. 이를 대왕대비였던 문정왕후가 수락함에 따라 일대 피바람이 불었다.
이 정도면 완전히 여왕인데 세간에서도 문정왕후를 여걸이라 칭할 정도였다. 이와 더불어 소윤의 핵심인 남동생 윤원형, 이기, 정순붕, 임백령, 최보한 등에게 주요 요직을 주었고 윤원형의 첩인 정난정은 정경부인으로 올려주기까지 했다. 이와 더불어 문정왕후와 그 딸들인 공주들, 윤원형, 정난정까지 그 권세는 엄청났고 시전을 장악하여 시전 상인으로부터 뇌물을 받아서 드셨다. 한양 각지에 엄청난 사저를 가지고 백성들을 강제로 노역에 동원하여 엄청난 원성을 들었다. 헌데 소윤의 핵심들 중에서 잘나간 이들은 몇 안 된다. 우선 윤원형과 이기는 엄청난 권세를 누렸지만 정언각, 정순붕, 임백령, 최보한, 윤춘년 등은 사화 이후 몇 년도 못가서 죄다 골로 가버렸고 온건파였던 허자는 윤원형과 이기의 성미를 건드렸다가 숙청당했다. 이기 역시 말년에 윤원형과 대립하다가 실권을 다 잃고 1552년에 세상을 떠난다. 이후 권력은 윤원형이 거의 다 가지게 된다. 윤원형의 권력이 최강인 시절에 우의정이 진짜 알짜배기가 있는 권력이었으며 영의정은 정승으로써 별로 실권이 없었다. 병권을 감독하는 자리에 좌의정과 더불어 정승들 중 권력이 쎈 직책이었는데, 이량이 등용되자 윤원형이 그를 우습게 보아서인지 "한직에 머물러도 막후에 권력을 휘두르면 되겠지"라고 해서 1년도 안 되어 사임했는데 문제는 이량 또한 권력에 대한 욕심이 윤원형보다 더 배포가 커서인지 "차라리 우의정 하고 있을걸"이라고 후회막급하였다. 그런데 이량도 권력에 절정에 달했을 때 이조판서였으며 정승에 오르지 못하고 육조의 수장을 끝으로 실각되었다. 문정왕후 시기의 영의정은 윤인경, 홍언필, 심연원[19] 등이다. 윤원형은 심연원의 후임인 상진이 1558년(명종 13년)에서 1563년(명종 18년)까지 재임한 다음인 1563년(명종 18년)이 돼서야 영의정이 되었는데 문정왕후의 섭정이 종료된 다음에 외척 이량이 급부상할 시점에 명종이 외삼촌 윤원형을 안심시키는 차원으로 임명한 것이다.
야사에서 이미지가 너무 강해지자 사람들은 자주 명종을 '마마보이 임금'이라고까지 비하하기도 한다. 굳이 마마보이라고 불릴 만한 이유를 들자면 문정왕후가 수렴청정을 거둔다고 했을 때 울며불며 사양했고 "대신들은 뭐하는가! 어머니를 말리지 않고!"라며 징징거렸던 모습 정도인데 사실 저런 쇼는 수렴청정을 거둘 때 다들 하였다.[20] 하지만 막상 친정을 시작한 후에는 딱히 모후의 간섭을 받지 않고 나름대로의 정치를 펼쳐 나갔다. 20살이 된 명종이 친정을 하자 편전을 내주고 물러난 문정왕후는 여전히 엄청난 영향력을 가지고 윤원형을 이용해 조정의 뜻을 모았다. 실제로 문정왕후의 권한이 막강하기는 했지만 수렴청정을 거두면서까지 정치에 크게 개입은 하지 않았고[21] 명종의 정책에 문정왕후가 크게 제동을 건 기록도 발견되지 않는다. 특히 윤원형을 견제하기 위해 중전 인순왕후의 외삼촌 이량을 크게 중용했는데 이에 대해서도 문정왕후는 이의를 전혀 제기하지 않았다. 야사에서는 문정왕후가 내시와 궁녀들을 이용해 명종을 항상 감시하게 했으며 명종에게 가서 따지고 만약 아들인 명종이 자신의 말을 안 들으면 다 큰 자식, 그것도 임금에게 뺨을 때리거나 회초리를 들었다고 한다. 이러한 일로 명종은 어머니만 보면 겁부터 먹고 쫄며 지냈다 카더라. 어디까지나 야사인 것에 주의. 그러나 이러한 야사도 어느 정도는 실제 상황을 반영하기는 한 모양이다. 다음 기록을 보면 알 수 있다.
“또 스스로 명종(明宗)을 부립(扶立)한 공이 있다 하여 때로 주상에게 ‘주상께서는 내가 아니면 어떻게 이 자리를 소유하실 수 있었겠습니까.’ 하고, 조금만 여의치 않으면 곧 꾸짖고 호통을 쳐서 마치 민가의 어머니가 어린 아들을 대하듯 함이 있었다. 상(上)의 천성이 지극히 효성스러워서 어김없이 받들었으나 때로 후원(後苑)의 외진 곳에서 눈물을 흘리었고 더욱 목놓아 울기까지 하였으니, 상(上)이 심열증(心熱症)을 얻은 것이 또한 이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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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불교 부흥[편집]
숭유억불인 조선에서 승려인 보우를 총애하여 불교의 중흥을 꾀하고 승려들의 과거인 승과[22] 와 도첩제(度牒制)[23] 를 부활시키는 등의 행보를 밟았다. 엄밀하게 따지면 불교를 총애한 것은 거의 전 시기의 조선 왕실의 특징이기도 했다. 애초에 성리학은 종교가 아니기 때문에 왕실 내부, 특히 궁중의 여인들에게는 매력이 없었다. 하지만 문정왕후와 이런 일반적 이들과는 실질적인 권력이 있느냐 없느냐라는 결정적 차이가 있었다. 조선 왕조 500년을 통틀어서 가장 불교에 대해 관심을 기울이고 노력해서 성과를 거둔 시기가 이 문정왕후의 치세이기도 하다. 이런 중흥책은 불교 자체에 대한 문정왕후의 개인적인 독실한 불심도 작용했겠지만 가뜩이나 자신의 말을 안 들어먹는 사림파들을 약화시키기 위한 계책이기도 했다. 이를 안 사림들과 유생들은 노발대발하며 큰 반발을 일으켰다.
하지만 문정왕후의 국정 장악력 자체는 대단한 것이라 얼마 안 있어 사그라들었고 내수사의 권력화로 사대부들은 더이상 절에서 깽판을 칠 수 없게 됐다. 하지만 이건 이거대로 "내시 주제에 사대부를 능멸한다"고 사대부들의 어그로를 더 끌었다. 보우의 경우 사실 땡중으로 알려져 있지만 보우의 악행이 있는가에 대해서는 엄밀하게 따지면 아니라고 봐야 한다. 실제로 보우 비판의 내용을 보면 국정이 문란해지고 재난이 늘고 하는 등의 이유를 보우와 불교에서 찾고 있을 정도이지만 분명한 비리의 증거를 대지 못하고 있다. 문정왕후 생전에 보우가 가장 문제가 되었던 것은 절에서 물건 훔치고 패악질 하던 유생들 중에서 가장 악질적이었던 황언징을 <경국대전>에도 언급되는 유생들이 절에 가지 못하도록 한 '금유생상사지법'을 통해서 처벌하고 유생들이 사찰에 들어가서 횡포를 부리는 것을 막은 것이었다. 이후 보우 처벌 후 과거 무학대사와 이성계가 머물렀을 정도로 대찰이자 조선 왕실의 원찰이었던 양주 회암사가 보우의 거점이었다는 이유로 유생들과 인근 농민들에 의해서 약탈되어서 말 그대로 터만 남을 정도가 될 정도로 불교에 대한 멸시가 강했던 조선시대였기 때문에 "그까짓 절의 물건 좀 가져온 것이 무슨 죄냐, 황언징을 석방하고 보우를 처벌하라"는 상소가 물밀듯이 쏟아졌다. 또한 보우가 문정왕후의 쾌유를 기원하려는 목적으로 부처님오신날에 국가적인 대형 법회를 벌인 것을 두고 "많은 국고를 소모하였다"는 명목의 괘씸죄가 더해졌다. 사실 유생들 입장에서는 숭유억불이 모티브인 조선에서 불교를 부활시키려는 시도를 한 것만으로도 쳐죽일 놈이었다.
2.5. 죽음[편집]
문정왕후의 죽음에 얽힌 재미있는 설화가 하나 있는데 문정왕후가 죽기 전 한강 두모포[24] 에서 거대한 괴 물고기가 낚여 올라왔다. 이 광경을 구경하던 여러 사람들 중 한 사람이 이를 보고 "큰(大) 물고기(魚)가 낚여 올라오니(行), 이는 윤원형의 '형'(衡) 자를 암시하는 것이라 곧 그가 몰락 테크를 타게 될 것이다"라고 점쳤다. 그로부터 3일 후, 과연 점괘대로 문정왕후가 죽음을 맞이하며 그와 동시에 윤원형과 정난정이 몰락하기 시작했다.
문정왕후는 무슨 생각이었는지 유언에서 "주상이 이단(불교)을 박해하려거들랑 신하들 너희들이 좀 막으라"고 했는데 정황상 명종이 불교를 신봉하려 들어도 어림없는 판국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조선왕조실록>의 '사관 논평'에 나온 말이라서 문정왕후를 비하하는 의미가 있다고 해석하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유학자들 입장에서는 일단 대왕대비가 지나치게 전횡을 부린다는 것에 불만이 많았고[25] 무엇보다도 숭유억불 원칙을 가진 조선에서 공식적으로 국가 차원[26] 에서 불교를 중흥시키려는 시도를 한 것은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1565년(명종 20년), 창덕궁 소덕당에서 문정왕후는 65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하필이면 이것이 불교 행사를 위해 목욕재계하다 한기가 들어 중병[27] 에 걸린 것이라[28] 가뜩이나 사대부들의 미움을 받으며 '적승'이니 '요승'이니 하는 오명은 다 듣던 보우는 완전히 죽일 놈이 됐다.
문정왕후의 죽음 이후로 윤원형과 정난정도 몰락하여 집에 처박혀 있다가 부부가 잇달아 요단강을 건너고, 보우는 한때 친했지만 살기 위해 배신한 윤원형까지 가세한 신하들의 처형 요구에 승적을 박탈당하고 제주도로 귀양갔다. 그리고 불교 중흥을 못마땅하게 여기던 제주목사 변협에게 곤장을 맞다가 이내 참수당한다. 사실 보우의 죽음은 엽기 그 자체였다. 엄밀하게 따지면 이런 식의 참수는 지방관이 함부로 내릴 수 없고 한양으로 올려서 처형해야 하는 것이 조선시대의 법률 체계였다.[29] 그런데 보우는 일개 제주목사의 선에서 죽은 것이다.
보우가 제주도로 유배를 떠난 것이 6월 말에서 7월이었는데, 보우의 죽음이 도성에 알려진 것은 10월 중순이었다. 더욱 엽기적인 것은 실제 보우가 죽은 다음에도 유생들은 "보우를 죽이라"는 상소를 올렸고, 명종은 "이미 보우의 죄가 정해졌다"는 이유로 "더 이상 논죄하지 말라"고 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논쟁이 마지막으로 언급되는 것이 바로 10월 14일, 보우의 죽음이 전해지기 바로 하루 전이었다. 여러모로 법률 체계를 무시한 처벌이었으나 그냥 저냥 넘어간 듯하다.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에서는 변협의 입을 빌려 "모후를 생각하면 죽이라는 명을 내릴 수 없었을 것"이라는 추측을 했는데 꽤 그럴듯해 보이기는 한다. 사실 변협이 목을 쳐버리든 말든 보우가 발 붙이고 살아갈 수 있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봐야겠지만, 명종 입장에서는 그래도 어머니가 총애한 승려의 목을 날리라는 명령을 내리기에도 껄끄러울테니 이런 절충점이 생겨났을지도 모른다.
또한 승과와 도첩제 등 문정왕후가 추진한 불교 융성책들은 모두 휴지통에 들어갔다. 그나마 살아남은 것은, 능침의 사찰이나 고찰의 경우는 잡인들이 함부로 출입하는 것을 막고 무뢰배가 유생인 척하고 절에 들어가서 행패를 부리지 못하도록 단속하라고 한 것이었다. 하지만 실제로 출입한 것은 유생들이었으니 이런 명목상의 지시가 지켜질 리가 없었다. 이는 앞서 언급한 양주 회암사의 파괴로 단적으로 드러난다.
문정왕후의 죽음은 아들 명종에게 호기가 되었으나, 명종은 2년 뒤에 34세를 일기로 승하했다. 명종의 유일한 후사였던 아들 순회세자도 일찍이 요절한 상태라, 명종 사후 왕통은 조선 개국(1392) 이래 처음으로 방계 서자 혈통인 하성군(선조)에게 이어지게 된다. 선조는 중종의 후궁인 창빈 안씨의 손자로, 조선의 첫 방계 계승은 이방원이 둘째형 이방과의 뒤를 이어 즉위한 것이다. 다만 이전까지 방계 계승을 이은 왕들은 아버지가 왕이었기 때문에 직계 계승으로도 볼 수 있고, 선조는 아버지인 덕흥대원군이 중종의 서자이기 때문에 '첫 방계 서자 혈통의 왕'이 된다.
2.6. 무덤[편집]
능은 서울특별시 노원구 공릉동에 위치한 태릉(泰陵). 유명한 태릉선수촌[30] 바로 근처에 있다. 왕비의 무덤인데 능호가 '클 태(泰)' 자인 것을 보면 문정왕후의 권세가 얼마나 컸는지 알 수 있는데 크기도 웬만한 왕의 무덤보다도 더 크다.
본래 중종의 능은 장경왕후의 무덤 옆인 지금의 예릉 위치에 조성되었으나, 문정왕후가 중종의 옆에 묻히고 싶었는지, 당시 광주군 언주리의 선릉(宣陵, 중종의 아버지 성종의 능) 근처로 이장시키고, 자신의 자리도 그 옆으로 예비해뒀었다. 그러나 정릉 근처가 지대가 낮아[31] 여름에 비만 오면 침수되었다 하여 결국 현재 자리에 묻혔다. 침수가 잦자 다시 묏자리를 옮기려고 하였으나 "거듭해서 묏자리를 옮기는 것은 불가하다"는 이유로 상소가 쏟아져서 중단되었을 정도로 당시에도 그런 이야기는 별로 먹히지도 않았다. 풍수지리가 맞건 틀리건 생전에 그만큼 문정왕후가 아들을 죽도록 들볶아 댔던 탓도 크다.
그런데 이 자리는 풍수지리상으로 무후지지(無後之地)라고 하며 후손이 끊기는 자리라는 것인데 당시에도 이 자리가 무후지지라는 소문이 파다했었나보다.[32]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명종은 윤원형과 총호사 심통원에게 대방동[33] 과 경기도 장단군 이 2곳을 두고 의견을 물었는데 윤원형이 술관의 이야기를 듣고 대방동에 묻힌 사람의 후손을 비교해본 결과 풍수지리설이 별 신빙성이 없다고 여겨 결국 대방동이 묏자리로 전해졌다고 한다.[34]
하지만 남편 곁에 묻혔으면 시아버지와 남편처럼 능이 도굴되어 시신도 못찾는 지경이 되었을지도 모르니 그나마 다행이라면 다행이랄까.
조선왕릉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면서 태릉 내부에 조선왕릉 전시관을 지어 놓았다. 태릉선수촌을 사이에 두고 아들 명종의 능인 강릉이 위치하고 있다. 조선시대의 왕릉 중 유일하게 왕비릉이 왕릉을 앞장 선 형태라고 한다. 물론 왕의 어머니이기도 해서 그렇지만 묘의 위치 자체가 어머니 치맛바람에 치여 살던 명종의 삶을 사후에도 보여주고 있는 꼴이라 그저 지못미. 왕후답지 않게 큰 규모의 능역을 가진 덕분인지 현대에 들어서는 서울 노원구 시민들의 나들이 장소로 애용되고 있다. 정작 바로 옆에 붙은 강릉은 제한된 비공개 능역이라 사람도 별로 안 온다.[35] 문정왕후의 능인 태릉은 태조의 건원릉이 있는 동구릉, 세조의 광릉, 성종의 선릉, 중종의 정릉, 신덕왕후의 정릉, 명성황후의 홍릉 등과 더불어 지명화된 왕릉들 중 하나이다.
3. 평가[편집]
평가가 분분한 왕비인데, 8년간 섭정하며 사림들을 죽이고 권세를 이용하여 외척들을 비호한 부정부패의 온상이라는 것과 불교를 숭상한 여걸이라는 평가가 유명하다. 전자는 사림을 싫어한 나머지 윤원형으로 대표되는 척신세력과 자신을 따른 소윤을 전적으로 신임했는데 문제는 그들의 부패가 극심해(…) 국정이 심각하게 문란해졌다. 황해도에서 임꺽정이 활동하던 시기가 이 시대였으니 당시 일반 백성들에게는 분명 수탈과 고통의 시기이다.[36] 거기다 문정왕후가 죽고 나서 개선되었냐면 그건 또 아니었으니 좋은 평가를 받기 어려운 게 당연하고, 후자는 사실 지나치게 커진 사림파의 권한을 약화시킬 목적에서 한 거라 사대부 입장에서야 못마땅하겠지만 국가가 무너질 정도로 무리하게 힘을 실어준 것도 아니고 유생들의 행패를 저지하고 문정왕후가 시행한 승과는 세종대왕도 시행했던 거라서 객관적으로 봤을 땐 좀 지나치게 까인 분야다.[37](상략) "사신은 논한다...... 그의 아우 윤원형(尹元衡)과 중외에서 권력을 전천(專擅)하매 20년 사이에 조정의 정사가 탁란(濁亂)하고 염치가 땅을 쓸어낸 듯 없어지며 생민(生民)이 곤궁하고 국맥(國脈)이 끊어졌으니, 종사가 망하지 않은 것이 다행일 뿐이다....... 윤씨는 천성이 강한(剛狠)하고 문자(文字)를 알았다. (중략) 윤비(尹妃)는 사직의 죄인이라고 할 만하다. 《서경(書經)》 목서(牧誓)에 ‘암탉이 새벽에 우는 것은 집안의 다함이다.’ 하였으니, 윤씨(尹氏)를 이르는 말이라 하겠다.”
사실 문정왕후를 까는 이유 중에 가장 큰 건 역시 명종을 왕위에 올리기 위해, 효심을 다하던 인종을 견제해 죽게 만든 원흉 중 하나라는 것[38] 과 명종에게 매를 때렸다는 기록이 남아있다는 것, 인종에게 독을 탄 떡을 먹여 죽였다는 야사가 있을 정도로 문정왕후가 인종을 견제하고 괴롭혔다는 거. [39]
조선왕조가 세워진 지 100년 넘어가면서 생긴 중기적 문제들을 그냥 문정왕후의 책임으로 돌리고 본다는 의견도 있다. 가령 불교 문제만 해도 한때 땡중으로 매도되던 보우의 행보를 보면 딱히 땡중으로 부를 이유도 없고, 승과도 고려 때 하던 걸 조선 초기에도 계속하다가 연산군 때 폐지했다가 다시 부활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당시 승과, 즉 정식으로 스님이 되는 과정이 없는 관계로 가짜 중(무뢰배)들이 판을 치고 돈을 내지 못한 이들이 몰래 절에 들어가 중이 되는 경우도 있어 호구 파악에 어려움이 컸다는 것이다. 하지만 조선 중기 이후로 성리학이 뿌리내리고, 유학자들의 입김이 강해지는데, 고려시대 폐단의 원흉인 불교가 다시 고개를 드는 게 당연히 불안했을 것이다. 그냥 폐지했다고 부활한 게 아니라, 폭군의 힘까지 빌려 간신히 폐지시켜 한시름 놓았는데, 그걸 문정왕후가 떡하니 다시 살려놓은 셈이니, 사림파 성리학자들의 입장에선 눈에 가시가 따로 없었던 것. 나라에서 시험을 친다는 것은 불교와 승려를 공식적으로 인정한다는 메시지나 다름이 없었으니까.
국방력의 약화도 연산군의 폭정과 중종의 실정으로 인해 꾸준히 보고가 올라오면서 수면 위로 올라오던 것이 문정왕후 치세에 이르러서 폭발한 것인데, 왜 하필 그 시대에서 폭발했는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왕과 왕실의 권위가 높고, 정치를 잘했다면 억누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야사에 따르면 문정왕후는 인종에게 떡을 먹인 후 독살한 간악한 인간으로 알려질 정도로 이미지가 최악이었으며, 그녀의 남동생들도 폐단이 많았다. 즉, 왕과 왕실의 권위가 떨어진 것이다. ( ...) 그리고 방납의 폐단으로 대표되는 수취 제도의 문란은 문정왕후 대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무오사화 이후 연산군 시절과 중종 시절부터 있었고 문정왕후가 죽은 후에도 조선 및 대한제국이 멸망되기 전까지 계속 이어져가던 문제다. 하지만 왕과 왕실의 권위가 살아있고, 정치를 잘하려고 노력하고 있는 상황이라면, 권신이나 지방의 유력자들도 어느 정도 왕실의 눈치를 봐야 한다. 하지만 문정왕후와 외척들 때문에 왕실부터 막장이라 그들의 눈치를 전혀 볼 필요가 없는 상황이라면? 폐단의 급이 달라져도 이상할 게 없다. 이전부터 있었다란 변명으론 안 되는 것이다.
윤원형, 이기로 대표되는 소윤 측근들의 비리는 심각한 수준이었고 이걸 잡지 못했다. 아무리 이전부터 존재했던 문제점이라고는 하지만, 문정왕후 섭정 연간의 조선 조정은 갑자사화 이후 폭정을 일삼던 연산군이나 옥사로 인해 정국이 혼란에 빠진 중종 시대와 못지 않게 대형 옥사를 벌였다. 결국에는 명종의 친정 시기가 되어야 이러한 대형 옥사도 끝이 나게 되었다.[40]
어쨌거나 부모로서 사랑을 베풀지 못하고, 인종을 견제하고 죽음으로 몰아간 죄와 불교를 개인적으로 숭상하지 않고 공식적으로 인정하려고 한 죄, 그리고 외척으로서 폐단을 일으키고 정치에 관여한 죄 때문에 사림들에 의해 까인 것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왕실에 관한 문제만큼은 제대로 못 까는 체제의 엄연한 한계에도 불구하고 열심히 까였다. 훗날 숙종의 어머니 명성왕후 김씨[41] 가 아버지 청풍부원군 김우명을 구하기 위해 왕이 신하들과 면대하고 있는 상황에서 발 뒤에서 울면서 왕을 은근히 압박하고 대신들에게 손가락질하고 욕을 하자, 한 신하는 명성왕후를 '문정왕후가 돌아온 건가여?'라며 까기도 하였다.
본 단락의 처음에 인용된 조선왕조실록의 사관의 논평은 문정왕후 사망 기사에 기록된 것이다. 후세의 인물들이 평가한 것도 아니고 당대의 평가가 종사가 망하지 않은 것이 다행이고, 윤씨는 사직의 죄인이라는 것이었다. 아무리 조선의 사관들에게 표현의 자유가 보장되었다 해도 저런 고인드립성의 멘트를 사망 기사에 적는 경우는 없었을뿐더러, 문정왕후의 전이나 후나 사망 기사에 저런 심한 사론이 적힌 왕비는 더더욱 없었다. 21세기 기준으로 생각해봐도 누군가의 사망 기사에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고 논평하면 고인드립 수준이다. "문정왕후의 숭불 정책에 대한 유림들의 반발심으로 저런 심한 사론이 적혔다"는 견해도 있으나,[42] 문정왕후는 섭정 기간에는 연산군이나 중종 못지않게 대형 옥사를 저지른 인물이었고 이와 함께 이에 대한 폐단도 그대로 이어받았다.
그러나, 원균이란 희대의 종자의 아버지면서 아들에 못지 않은 막장인 원준량의 을묘왜변 참사를 비호한 주범이란 점은 저 비아냥들도 문제 희석이란 지적과 그 비난이 최소화되었다는 평가를 지울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