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정창

덤프버전 :

文定昌
1899년 ~ 1980년

1. 개요
2. 행적
2.1. 친일 행적
2.2. 8.15 광복 이후 행적
3. 영향력
4. 매체


1. 개요[편집]


한국의 유사역사학자이자,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의 친일인명사전에 오른 친일반민족행위자다.

일제강점기 당시에는 전형적인 친일파 관료의 삶을 살았으나, 광복 이후에는 극렬민족주의를 부르짖는 유사역사학 신봉자로 변신하여 말년까지도 해괴한 주장을 일삼았다. 일본을 극렬히 증오하는 환빠들은 문정창에 대해서만큼은 도리어 그의 신뢰할 수 없는 주장을 그대로 되풀이할 뿐 아니라 그 이중적인 행적을 옹호하고 존경을 표하는 등 모순적인 면모를 보이고 있다.


2. 행적[편집]



2.1. 친일 행적[편집]


문정창은 일제강점기 시절 이사관과 군수를 하였다. 이 경력으로 친일인명사전에 올랐다.

1937년부터 조선총독부 농림국 농정과 속으로 근무하다가 1942년 6월부터 충청북도 내무부 사회과 사회주사(고등관 7등)로 근무했다. 1943년 3월 군수로 승진하여 황해도 은율군수에 임명되었다. 1945년 6월 이사관으로 승진하여 황해도 내무부 사회과장에 임명되어 해방될 때까지 재직했다. 관직생활을 하면서 '산업조합 설립까지, 1932.11', '조선의 시장, 1941.7', '조선농총단체사,1942.12' 등을 저술했다. -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 친일문제연구총서 인명편1 (ㄱ~ㅂ) 친일인명사전, 796



2.2. 8.15 광복 이후 행적[편집]


광복 후엔 유사역사학을 하여 책을 썼으며 1976년에는 이유립, 안호상, 임승국 같은 유사역사학자들과 ‘국사찾기협의회’를 결성하여 ‘국사 바로잡기 운동’이란 것을 하였다.

해방 후 월남하여 1946년 조선농회 기획부 기획과장등을 지내다가 1947년 이후 사업체를 경영하면서 일제 침략사 및 한국고대사 연구와 관련한 저술활동에 종사했다. 주요 저서로 '근세일본의 조선침탈사, 1964', '(군국일본)조선강점36년사 상 중 하,1965~1967', '단군조서사기연구'(1968), '고조선사연구'(1969), '일본상고사'(1970), '한국고대사'(1971), 가야사(1978) 등이 있다. 1980년에 사망했다. -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 친일문제연구총서 인명편1 (ㄱ~ㅂ) 친일인명사전, 796쪽


광복 후 월남하여 미군정 하에서 잠시 조선농회(朝鮮農會) 총무부장을 지내기도 하였다. 1947년 공직에서 은퇴하고 개인 사업을 하면서 재야 역사가로 활동, 여러 권의 책을 냈다. 1976년에는 이유립(李裕岦), 안호상(安浩相), 유봉영, 임승국(林承國), 박창암(朴蒼岩), 박시인(朴時仁) 등과 ‘국사찾기협의회’를 결성하여 ‘국사 바로잡기 운동’을 전개하였다. 1980년 2월 18일 세상을 떠났다. -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 문정창



2.3. 유사역사학 활동[편집]


광복 후엔 유사역사학 책들을 내었는데 대륙백제설을 주장하거나 가야수메르 문명의 유사성을 주장했다. 또한 자신의 책을 '일본인으로부터 받은 피해 계산서'라는 앞 뒤가 맞지 않은 주장을 하였다.

광복 후 문정창의 한국사 연구는 일제 침략사와 한국 고대사 연구에 치우쳐 있었다. 이는 일제 식민사학에 대한 기성 사학계의 도전이 불충분하다는 비판의 차원에서 시도된 것이다. 예를 들어 일제가 날조한 ‘반도 사관’을 극복하기 위해 한사군이 한반도 내에 없었다거나, 백제의 활동 무대가 중국 대륙이었다고 주장하였고, 심지어 가야와 수메르 문명의 유사성을 내세우는 등 한국사의 외연 확대에 주력하였다. 그리고 일제의 침략상에 침묵하는 사학계의 풍토를 강도 높게 비판하면서, 이를 소상히 밝힌 자신의 저서가 ‘일본인으로부터 받은 피해 계산서’라고 주장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문정창의 한국사 연구의 뿌리는 일제 관료 시절 수집한 자료에 바탕을 두고 있는 만큼 이런 비판은 극히 모순적인 것이라 하겠다. -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 문정창



3. 영향력 [편집]


이 인간 이래로 수메르가 소머리 혹은 수밀이래서 기원이 한국이다 이런 식의 소리가 환빠들만의 상식으로 통용되었다.


3.1. 두산백과[편집]


두산백과에서는 문정창의 유사역사학 행위를 "일제가 식민지 정책을 정당화하기 위해 왜곡해 놓은 우리나라의 역사를 바로 잡는데 힘"쓴 행동이라 미화했다.

1976년에는 안호상(安浩相)·박창암(朴蒼巖)·이유립(李裕岦)·유봉영(劉鳳榮) 등과 국사찾기협의회를 결성하여 일제가 식민지 정책을 정당화하기 위해 왜곡해 놓은 우리나라의 역사를 바로잡는 데 힘썼다. 두산백과 - 문정창



3.2. 윤정모[편집]


주간한국에선 "인류 최초의 수메르 문명은 한민족 역사"라는 기사가 올라왔다. 윤정모가 쓴 소설에 대한 것인데, 문정창 의 유사역사학 책을 사실로 받아들인 것이다.

"1984년에 '교육신문' 여기자가 가져다 준 <수메르 역사>(문정창 저)라는 책을 읽고 처음엔 너무 엉뚱하고 놀랍다는 생각을 했어요. 잊고 지내다 1998년 영국박물관의 수메르 특별관을 관람하게 됐는데 숨이 멎을 듯이 강한 인상을 주면서 옛날 일이 생각났어요. 귀국하자마자 다시 책을 보고, 지인들을 통해 수메르와 관련된 책을 구해 읽었어요." - - "인류 최초의 수메르 문명은 한민족 역사"


그는 1984년 겨울 우연히 ‘수메르 역사’라는 책을 접한다. 역사학자 문정창씨가 쓴 책으로, 수메르 문명은 고대 동이족이 건설했다는 것이 이 책의 요지다. 그는 이때는 그러려니 하고 무심코 넘겼으나 14년이 흐른 1998년 봄 대영박물관 수메르관(館)을 지나다가 전시된 두개골을 보고 목덜미가 서늘해지면서 예전에 읽었던 책 내용이 떠올랐다.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에 수메르어와 한국어는 동일한 교착어로 그 어근이 같다고 명백히 밝혔음에도 우리나라 제도권 학자들은 이것을 거론한 적이 없다.” - 반미작가서 한민족 뿌리 캐는 역사작가 변신




3.3. 이덕일[편집]


이덕일은 문정창선생이라 하며[1] 동북아역사재단이 이걸 무시한다면 세금 운운했다.

그러나 이미 1963년에 북한의 리지린은 <고조선연구>에서 한사군은 한반도에 없었다는 사실을 논증했다. 남한에서도 문정창 선생이 1969년에 간행한 <고조선사연구>를 통해, 그리고 윤내현 교수도 <한국고대사신론>(1986)을 통해, 필자 등도 <고조선은 대륙의 지배자였다>(2006) 등의 저서를 통해 한사군이 한반도 내에 있지 않았다고 논증했다. 그럼에도 국민 세금으로 운영되는 국가 연구기관들은 동북공정에 맞서는 이런 이론을 완전히 묵살한 채 한사군이 한반도 내에 있었다는 것이다. - 이덕일, 현재진행형 역사 왜곡 뒤엔 ‘쓰다·이병도 짙은 그림자’



4. 매체[편집]


[1] 이것이 이덕일의 심각한 자기 부정인 것이, 그동안 반대 세력을 모두 친일 식민사학자로 몰던 이덕일이 친일반민족행위자에게 선생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였기 때문이다. 결국 여기서도 이덕일이 친일, 식민사관 프레임을 자기가 필요할 때만 이용해 먹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파일: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__CC.png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2023-11-28 19:18:05에 나무위키 문정창 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