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명세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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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방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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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명세자 관련 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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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순조조 왕세자
효명세자 | 孝明世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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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추존 국왕
익종 | 翼宗


대한제국 추존 황제
문조 익황제 | 文祖 翼皇帝



파일:attachment/hwomyung123.jpg

면류관 곤복 어진
출생
1809년 9월 18일
(음력 순조 9년 8월 9일)
한성부 창덕궁 대조전
(現 서울특별시 종로구 율곡로 99)
책봉
1812년 8월 12일
(음력 순조 12년 7월 6일)
한성부 창덕궁 인정전
(現 서울특별시 종로구 율곡로 99)
사망
1830년 6월 25일 (향년 20세)
(음력 순조 30년 5월 6일)
한성부 창덕궁 희정당 서협실
(現 서울특별시 종로구 율곡로 99)
능묘
연경묘(延慶墓) → 수릉(綏陵)
재위기간
조선 왕세자
1812년 8월 12일 ~ 1830년 6월 25일
(음력 순조 12년 7월 6일 ~ 순조 30년 5월 6일)
조선 왕세자 | 조선 국왕 대리청정
1827년 3월 15일 ~ 1830년 6월 25일
(음력 순조 27년 2월 18일 ~ 순조 30년 5월 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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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
전주 이씨

영(旲)
부모
부왕 순조,(순조 숙황제),
모후 순원왕후,(순원숙황후),
형제자매
1남 4녀 중 장남
배우자
왕세자빈 조씨,(신정익황후),
자녀
1남 (양자 1남)[* 효명세자는 신정왕후 조씨로부터 아들 헌종만 얻었으나, 추후 헌종이 자식없이 단명하고 철종 연간을 지나서서 철종도 후사 없이 30대에 사망하자, 대를 잇기 위해 당시 왕실의 제일 최고어른인 신정대왕대비가 흥선군의 차남 이명복을 다음 왕위을 잇도록 하기 위해, 효명세자의 아들로 양자 입적하고 왕위 계승을 하도록 정식 지명하게 되는데 바로 고종이다. 그렇기에 법적으로 고종은 헌종과 더불어 효명세자의[아들이다.]
종교
유교 (성리학)

덕인(德寅)

경헌(敬軒), 학석(鶴石), 담여헌(淡如軒)
전호
효화전(孝和殿)
묘호
익종(翼宗) → 문조(文祖)
존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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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원찬화석극정명성헌영철예성연경
(體元贊化錫極定命聖憲英哲睿誠淵敬)
융덕순공독휴홍경홍운성렬선광준상
(隆德純功篤休弘慶洪運盛烈宣光濬祥)
요흠순공우근탕정계천건통신훈숙모
(堯欽舜恭禹勤湯正啓天建通神勳肅謨)
건대곤후광업영조장의창륜행건배녕
(乾大坤厚廣業永祚莊義彰倫行健配寧)
기태수유희범창희입경형도성헌소장
(基泰垂裕熙範昌禧立經亨道成獻昭章)

시호
조선: 효명세자(孝明世子)
→ 돈문현무인의효명대왕
(敦文顯武仁懿孝明大王)

대한제국: 돈문현무인의효명익황제
(敦文顯武仁懿孝明翼皇帝)

: 강목(康穆)

1. 개요
2. 생애
2.1. 출생
2.2. 세자 책봉
3. 여담
4. 어진
5. 가계
5.4. 배우자 / 자녀
6. 저서 / 문화재
6.1. 관련 저서
6.2. 관련 문화재
7. 대중매체
8. 관련 문서



1. 개요[편집]




조선의 왕세자 및 추존 왕, 대한제국의 추존 황제. 조선 제23대 국왕 순조의 하나뿐인 아들이자, 제24대 국왕 헌종의 아버지. 대한제국 고종 때 1대조의 양아버지로서 묘호조(祖)로 격상되고 황제로 재추존됐다. 아들 헌종이 아버지 효명세자를 국왕으로 추존하면서 올린 묘호는 익종(翼宗)이었는데, 고종이 국왕으로 즉위할 때 '익성군(翼城君)'으로 봉해지고 익종과 효유대왕대비(신정왕후 조씨)의 법적 양자로 입적했기 때문에 아들 자격으로 1899년(광무 2년), 황제로 재추존하면서 문조(文祖)로 묘호를 바꿨다.[1]


2. 생애[편집]



2.1. 출생[편집]


효명세자의 이름은 영(旲)이며, 1809년(순조 9년) 8월 9일[2], 창덕궁 대조전에서 순조순원왕후적장자로 태어났다.

왕비원자 탄생은 명성왕후숙종을 낳은 이래 150년만의 일로, 창덕궁 인정전에서 백관이 모여 원자의 탄생을 하례하였다. 이때 순조는 할머니인 혜경궁 홍씨와 모후인 효의왕후, 생모인 수빈 박씨에게 치사(致詞)와 전문(箋文), 표리(表裏)를 올렸으며, 생모인 수빈에게 세자세손에게만 쓰는 '저하(邸下)'의 경칭을 사용하여 부르도록 하유하였다.[3] 또한 원자의 탄생을 축하하며 구환과 증렬미, 요역 등을 탕감하라고 하교하였다.[4]


2.2. 세자 책봉[편집]


1812년(순조 12년) 7월 6일, 왕세자에 정식 책봉되었으며[5], 이 때 나이가 만 3세였는데 만 1세 전후로 세자에 책봉된 사도세자 못지 않은 많은 기대를 받으며 자라났다. 효명세자는 정말 오랜만에 세자로 책봉된 정실 왕비 소생 원자였으며, 왕비 소생 세자숙종 이후 처음.[6]

1819년(순조 19년) 3월, 경희궁 경현당에서 관례[7]를 치르고 그해 10월 풍양 조씨 세력이었던 조만영의 딸을 세자빈으로 맞이하여 가례[8]를 올렸는데, 이 사람이 후에 고종대왕대비로서 수렴청정을 하는 신정왕후 조씨이다.

외모도 출중했고 재능이 뛰어난 인물(한마디로 금수저면서 엄친아)로 안동 김씨의 세도에 눌려지내던 아버지 순조도 적장자 아들이던 효명세자에게 정말 기대를 많이 걸었다. 창덕궁창경궁을 그린 동궐도(東闕圖) 제작에 직접 관여했다고 하는데 학자들은 효명세자가 동궐도를 그리게 한 데에는 왕권 강화책과 연관이 있지 않나 해석한다.


2.3. 대리청정[편집]


신미년 이후부터는 정섭(靜攝)하는 중에 있던 때가 많았고, 비록 혹 약간 편안하다고는 하나 때로는 항상 기무(機務)에 정체(停滯)됨이 많았으니, 국인(國人)이 근심하는 것은 곧 내가 스스로 근심하는 바이다. 세자는 총명(聰明)하고 영리(怜悧)하며 나이가 점차 장성하여 가니 요즘 시좌(侍坐, 참관)하거나 섭향(攝享)하게 하는 것은 뜻이 있어서이다. 멀리는 당나라를 상고하고 가까이는 열성조(列聖祖)의 대리청정(代理聽政)하는 일을 본받아 내 마음이 이미 정하여졌다. 한편으로는 노고(勞苦)를 분담하여 조양(調養)을 편하게 하는 것을 돕게 하고, 한편으로는 밝게 익혀서 치도(治道)를 통달하게 하는 것이니, 이는 (宗社)와 생민(生民)의 복이다. 조정에 나와 있는 여러 사람들에게 이에 대계(大計)를 고하니, 왕세자청정(廳政)은 한결같이 을미년의 절목(節目)[9]

에 의하여 거행하게 하라.

- 순조실록》 28권, 1827년(순조 27년, 청 도광(道光) 7년) 2월 9일 (을묘) 3번째기사.[10]


순조건강이 날로 나빠지자 1827년(순조 27년) 2월, 순조는 아들 효명세자에게 대리청정(代理廳政)을 명했고, 이후 4년간 효명세자가 대리청정을 하면서 직접 국사를 주관하였다. 대리청정의 명을 내리자 신하들은 크게 기뻐하며 환영하였을 정도로 매우 기대받았다. 과거에는 임금세자에게 대리청정의 명을 내리면 신하들이 벌떼같이 들고 일어나서 대리청정하라는 전교를 걷어달라고 반대하는 경우가 많았다. 세종문종에게 대리청정을 명하자 신하들이 반대했는데 세종이 "아파 죽겠다"고 일갈하고 나서야 간신히 집행될 수 있었다. 숙종 때는 세자경종에게 대리청정이 명해지자 소론에서는 윤지완 등이 도끼 상소까지 하며 반대하는 등 분위기가 너무 험악했었다.[11] 영조세손 정조에게 대리청정을 명하자 세손의 반대파 홍인한,[12] 정후겸은 물론 김상철, 한익모 등 당시의 대신들이 모조리 들고 일어나 결사 반대했다.

그런데 효명세자의 대리청정 때는 남공철, 김재찬, 한용귀, 김사목, 이상황, 심상규 등 당시의 중신들이 전부 두 팔을 벌려 환영하며 비망기(왕의 서무 명령)를 그야말로 찬양했다고 《조선왕조실록》에 표현될 정도였다.[13] 이에 효명세자는 이전의 많은 사례에서 그랬듯이 의례적으로 몇 차례 거절을 했으나[15] 아버지 순조대리청정으로 장난치려는 게 아닌 정말로 진심이었고 전폭 믿고 신뢰했기 때문에, 빠르게 대리청정이 아들 효명세자에 의해 시행되었다.

효명세자는 20살도 안 된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단호한 일처리로 조정의 공직 기강을 잡았다. 효명세자가 대리청정을 맡기 전 아버지 순조 통치 시기는 순조가 잦은 병환으로 정사를 제대로 돌보지 못했기 때문에 기강이 상당히 해이해져 있었다. 실제로 이 시기 실록 기사를 보면 직전까지와는 다르게 파직, 탄핵, 유배, 국문, 해임 등의 처벌과 관직 제수 및 시상 등 상벌과 관련된 기사가 쏟아진다. 관리들을 감시하고 부정부패를 감독해야 할 이 정무를 제대로 돌보지 못했기 때문에 조정 내부의 여러 곳들이 고여서 썩어있었던 것. 효명세자는 "어느 수령백성들을 괴롭혔다."는 소리가 들리자 엄한 벌을 내리며 철저히 단속하기도 하였고 심지어 정승도 직급의 상하고하를 막론하고 직접 제수하여 단순히 권한대행을 넘어서 인사권 문제도 다루는 등 실질적인 군주의 역할을 도맡아 진행했는데 이 때 기용된 인물 중 대표적 인물이 바로 실학자 박지원의 손자이자 개화파의 시조로 불리는 박규수다.

순조는 이러한 효명세자의 대리청정월권이라고 언짢아하기는커녕 적극적으로 세자를 지원하면서 뒤에서 힘을 바짝 실어줬다.[16] 정치적 파벌 문제가 있었던 것도 아니고 순조정치적인 의도가 있어 대리청정을 실시했던 게 아니라, 정말로 몸이 안 좋아서 아들에게 전적으로 믿고 맡긴 것이었기 때문이다.

효명세자도 이에 질세라 부모님에 대한 지극한 효심을 표현하고 아버지 순조의 권위를 드높이며 왕권을 강화하기 위한 방책으로 순조의 '탄신 진연(誕身陳延)' 등의 주요 연회들을 조선 왕실의 권위를 드높이는 것과 더불어 성대하게 개최했다. 이 연회들의 핵심에는 '정재'라고 불리는 궁중 무용이 있었는데 효명세자는 정재의 대부분을 직접 수정하거나 다듬는 등 예술에도 더욱 재능을 드러냈다. 그래서 효명세자를 직접 발레 공연에까지도 나섰던 프랑스루이 14세와 견주어 '조선의 태양왕(太陽王)'으로 부르기도 한다. 검무(劒武)에 쓰이는 칼날과 손잡이가 따로 노는 독특한 구조의 칼을 도입한 사람도 바로 효명세자. 이처럼 아버지 순조와 아들 효명세자의 관계는 "권력은 부자 간에도 나눌 수 없다"는 격언을 비웃기라도 하듯 대리청정 시기에도 전혀 잡음이 나오지 않았으며, 부자 간의 돈독한 관계 덕분에 조정에도 모처럼 활력이 찾아오는 듯 했다. 그러나 잘될 것만 같았던 효명세자의 대리청정은 얼마 가지 않아 너무나도 허망하게 끝나버리고 만다.


2.4. 이른 죽음[편집]


아버지 순조와 여럿 신하들의 여러 기대 속에 대리청정을 잘 하던 효명세자는 갑자기 병에 걸렸고 불과 22살의 젊디 젊은 나이로 1830년(순조 30년) 5월 6일,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17] 이덕일안동 김씨들의 독살설을 제기했지만, 이 사람이 제기한 수많은 독살설이 그렇듯 근거는 전혀 없다. 이덕일이 퍼뜨린 인식과 달리 세자가 대리청정 기간 동안 세도 안동 김씨들을 견제하는 모습을 보인 적도 없고 가문간 싸움을 회피했던 김조순(1832년 卒)이 아직 살아있었으며 각혈(刻血) 후 어의들이 갖은 방도를 쓰다가 재야에 있던 정약용[18]까지 부르려고 노력했다. 그 때문인지 과로설이 제기되기도 한다. 워낙 창창한 나이에 급작스럽게 사망했기 때문에 사헌부, 사간원, 옥당, 춘방 등에서 왕세자 치료를 담당했던 의관들을 엄하게 처벌하고 사망 원인을 정확히 조사하라는 상소가 빗발쳤지만, 순조는 자식의 죽음으로 슬픈 마당에 그런 일까지 벌이고 싶지 않았는지 거절한다. 순조는 아내 순원왕후와 더불어 아들 효명세자의 죽음을 크게 슬퍼했는데, 다음은 순조가 친히 직접 쓴 '지문(誌文)'과 '제문(諸文)'으로 자식을 잃은 부모의 한(恨)이 절절이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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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명세자 지문(孝明世子誌文)》

경인(庚寅, 1830년) 5월 6일 임술일에 왕세자가 병으로

희정당의 서협실(西夾室)에서 훙서하였으니, 춘추가 22세였다.

성상(聖上) 및 왕비가 통곡하고 운절하면서 하늘에 호소하였으나 어쩔 길이 없었으며,

경사대부(卿士大夫)와 진신장보(搢紳章甫)[1]

가 가슴을 어루만지며 통곡하지 않은 이가 없었고,

울먹이며 서로 세자의 죽음을 슬퍼하기를,

‘하늘이 우리 국가를 망하게 하려고 하는가?

저성(儲聖, 세자)이 돌아갔으니, 국가를 어떻게 해야 하겠는가?’라고 하였으며,

궁중의 위사(衛史)와 모든 부서의 관료들이며 도성에 가득한 군인과 백성, 천한 이들,

부녀자와 아이들도 모두 머리를 들고 애처롭게 울기를,

‘우리 (兩聖)의 인자함과 성덕(盛德)으로도 이런 일이 있는가?

하늘이 어찌 차마 이렇게 하는가?’

하면서 며칠 사이에 슬퍼하며 원통해 하는 소리가 온 나라에 사무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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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명세자 제문(孝明世子諸文)》

아! 하늘에서 너를 빼앗아 감이 어찌 그렇게도 빠른가. 앞으로 네가 상제(上帝)를 잘 섬길 것이라고 여겨서 그런 것인가, 장차 우리나라를 두드려서 망하게 하려고 그러는 것인가, 아니면 착하지 못하고 어질지 못하며 덕(德)스럽지 못하여 신명(神明)에게 죄를 얻어 혹독한 처벌이 먼저 윤사(胤嗣)에게 미쳐서 그런 것인가. 내가 장차 누구를 원망(怨亡)하고 누구를 허물하며 어디에 의지하고 어디에 호소할까. 말을 하려고 하면 기운이 먼저 맺히고 생각을 하려고 하면 마음이 먼저 막히며 곡(哭)을 하려고 하면 목이 먼저 메니, 천하(天下)와 고금(古今)에 혹시라도 국가를 소유(燒有, 즉위)하고서 나의 정경(情景)과 같은 자가 있겠는가. 슬프고 슬프다. 내가 눈으로 네 얼굴을 보지 못하고 귀로 네 음성(音聖, 목소리)을 듣지 못한 지 이미 60일이 지나고 두 절서(節序, 계절)가 바뀌었다. 그런데 너는 아직까지 잠이 들어 아침도 없고 저녁도 없이 명명(冥冥)하고 막막(漠漠)하기만 한 것인가, 아니면 내가 미련하여 참으면서 먹고 호흡(呼吸)하기를 태연히 하며 유유범범(悠悠泛泛)하게 여겨서인가. 네가 정말로 알고 있는가 모르는가, 내가 과연 바야흐로 꿈을 꾸면서 깨지 않고 있는가. 네가 정말로 훌쩍 떠나버렸는가, 아니면 네가 장차 벌떡 일어나 돌아올 것인가. (父母)·(妻子)의 은혜가 여기에 있고 종묘(宗廟)·사직(社稷)의 중대함이 여기에 있으며 성궐(城闕)과 궁전(宮殿)의 거처가 여기에 있는데, 가기는 어디로 가며 가서는 누구와 친할 것인가. 해와 달은 그 운행(運行)이 변함이 없고 한 해가 가고 한 해가 오는 그 까닭도 변함이 없으며, 하늘은 높고 땅이 두터운 그 지극함도 변함이 없는데, 돌아온다는 기약은 언제이며 기약은 누구와 같이 알겠는가. 천하의 슬픔 가운데 어버이와 떨어져 있는 것보다 더 큰 것이 없는데, 네가 성효(誠孝)하면서 3년 동안 어버이 품에서 사랑받은 것을 생각지 아니하고 어찌 이와 같이 근심(謹心)이 없을 수 있겠으며, 천하의 슬픔 가운데 자식이 없는 것보다 더 심한 것이 없는데, 나의 기구하고 험한 운명으로 갑자기 네 가지 곤궁(困躬)한 것에서 첫 번째 입장이 되었으니, 어찌 이와 같이 독(毒)하게 하는가. 슬프고 더 슬프다.

옛날 내가 10살 겨우 넘어서 황고(皇考)를 여의었는데 어렵고 큰 기업(基業)이 산처럼 자신을 누르는 듯하였으며 자신의 외로움과 나라의 위태로움이 마치 아침 저녁을 보전하지 못할 듯하였지만, 1년, 2년 지나면서 많은 백성들 위에서 의탁할 수 있었던 것은 나에게 무엇이 있어서이겠는가. 특별히 황천(皇天)과 조종(祖宗)께서 말없이 도와주신 힘뿐이었다. 그러다가 네가 태어나면서부터 내 마음에 즐거움은 남의 아비가 되는 데에 그칠 뿐만이 아니고 나라의 근본이 튼튼해져 황고(皇考)와 열성(列聖)의 유업(遺業)을 의뢰하여 펼칠 수 있어서였다. 네가 또 이미 관례(冠禮)를 치르고 이미 장가를 들어 또한 이미 자식을 두었는데, 어질고 효성(孝性)스러우며 총명(聰明)하고 타고난 자질이 일찍 성취가 되었으므로, 마침내 내가 하던 정치를 섭행(攝行)하게 하였더니, 팔방(八方)에서 (백성들이) 목을 빼어 ‘은(殷)나라 때의 치도(治道)를 다시 창성(昌誠)하게 할 수 있으며, 주(周)나라 때의 천명(天命)을 새롭게 할 수 있다.’고들 하였으니, 어찌 나 한 마음의 즐거움이며 한 몸의 경사(慶事)라고 말하겠는가. 자못 천하 국가에서 드물게 있고 드물게 보는 일이었기에 내가 망령(妄靈)되이 근심(謹心)이 없는 사람이라고 스스로 믿었었는데, 하루아침에 재앙(災殃)을 내려 만사(萬事)가 기왓장처럼 깨어질 줄을 누가 생각이나 하였으랴. 종팽(宗祊)에 대한 우려와 나 자신에 대한 슬픔이 도리어 황고(皇考)를 여의고 가 태어나기 전보다 더 심함이 있다고나 할까. 슬프고 슬프다.

너의 청명(淸明)하고 수미(秀美)한 자질과 길선(吉善)하고 상화(祥和)한 기질은 하늘에서 태어나게 한 바가 쉽지 않은데, 그것을 꺾어버리는 데에 이르러서는 갑자기 위급한 병(病)에 걸린 데다 또 괴잡(乖雜)한 증세가 겹쳐 물이 흘러간 구덩이 같고 불에 타고 남은 재와 같으니, 이치의 믿기 어려움이 어찌 더 갑작스러울 수 없을 정도로 빨랐는가. 어떻게 이른바 비자(丕子)[1]

의 책임은 하늘에 달려 있다는 것인가. 진실인가 거짓인가. 누구를 좇아서 바로잡겠으며, 귀신의 짓인가, 사람의 짓인가. 누가 이를 주장하는가. 슬프고 슬프다. 고고(呱呱)하게 우는 세손(世孫)이 장차 할아버지아비같이 여길 터이며, 근심스러운 나의 여생은 장차 나라를 운명(運命)으로 삼아야 할 것인가. 네가 혹시라도 앎이 있다면 나의 이 말을 듣고서 틀림없이 저승이승 사이에서 얼굴을 가리고 억울(抑鬱)해 할 것이다. 지금 나의 슬픔은 너로 인한 슬픔일 뿐만이 아니고 의 어질지 못하고 덕(德)스럽지 못하여 죄를 자신에게 쌓아 나의 훌륭한 자식을 잘 보전(保傳)하지 못하여 4백 년의 종묘사직으로 하여금 위태롭기가 하나의 털끝 같지만 어떻게 할 수 없게 하였음을 슬퍼하는 것이니, 오히려 다시 무슨 말을 하겠는가. 슬프고 슬프다. 아! 애통하도다.



안 그래도 이미 중전 순원왕후 소생의 왕자[19]후궁 소생의 영온옹주[20]가 죽었던터라 순조의 병은 깊어지고 있었다. 설상가상으로 순조는 효명세자의 죽음에 이어 2년 후 두 딸 명온공주복온공주까지 자신보다 먼저 요절하자 이로 인한 극심한 스트레스를 이기지 못하고 끝내 2년 뒤인 1834년(순조 34년), 세상을 뜨게 된다. 훗날 효명세자의 아들 헌종까지 요절하면서 정조로부터 이어진 직계혈통은 사실상 단절되고 만다. 그나마 사도세자의 자손인 철종순조양자로 입적(입승대통)하여 뒤를 이었지만 그마저 죽으면서 효종으로부터 이어진 모든 혈통이 완전히 단절되고 그의 양자로 지정된 고종이 뒤를 이었다. 그러나 고종법적으로는 사도세자후손이지만 혈통상으로는 인조의 3남 인평대군의 직계 후손으로 무려 선왕 철종과는 17촌의 차이가 난다.

추존(追尊) 문조(文祖), 문조의 능은 경기도 구리시 동구릉(東九陵) 내에 동원이강릉 형식의 '수릉(綏陵)'. 본래 효명세자는 죽고 나서 오늘날의 서울특별시 성북구 석관동에 있는 경종의릉(懿陵) 왼쪽 언덕 언저리에 장사 지냈었지만, 풍수에 관한 논의가 있어서 철종 때인 1855년(철종 6년) 오늘날의 자리로 이장했으며 1890년(고종 27년) 4월, 대왕대비였던 아내 신정왕후 조씨승하하자 함께 합장(合葬)되어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동구릉을 방문하면 팸플릿(지도 약도)을 하나 주는데 팸플릿에 적혀 있는 추천 관람 코스대로 동구릉을 관람하게 되면 가장 먼저 보는 능이 수릉이다. 사실 동구릉은 팸플릿의 추천 코스대로 수릉부터 걸어가서 관람하는게 오히려 집에 돌아갈 때 편하다.


3. 여담[편집]


  • 효명세자가 안동 김씨 세력들을 견제하기 위해 풍양 조씨를 적극 기용했다는 말이 있으나 대리청정 기간 동안 그가 안동 김씨들을 견제하는 모습은 보인 적이 없다. 김조순의 아내(효명세자의 외할머니)가 죽자 직접 찾아가 문상(問喪)하는 등 최고의 예우와 존중을 보여주었고 김조순의 장남 김유근이 부임지에 을 데려가다가 난리난 적이 있었는데[21] 신하들이 김유근을 탄핵하자 오히려 버럭 화를 내며 탄핵한 신하들을 유배보내 버렸다.[22] 물론 왕권 강화를 꿈꿨던 효명세자였기에 안동 김씨를 마냥 호의적으로 보지는 않았을 수 있으며 오히려 방심하게 했다가 동시에 제거할 타이밍만 잡으려 했을 가능성도 있다. 안동 김씨를 견제할 마음이 있었을지는 몰라도 행하지는 않은 것은 사실이며 집권 기간 동안 처가인 풍양 조씨에 러브콜을 보낸 흔적도 없다. 효명세자는 1827년(순조 27년) 2월 9일부터 대리청정에 들어가서 1830년(순조 30년) 5월 6일 죽는데 그 동안 김유근, 김이교, 김이재 등 안동 김씨들은 고위 관직을 다 해먹었다.


  • 고종은 그의 양자로서 즉위했기 때문에'(입승대통/立承大統)' 여러 차례 시호존호를 올렸다. 그래서 문조의 최종적인 정식 시호는 아래와 같은데 황제라는 칭호를 제외하고 자그마치 113자.[23] 체원찬화석극정명성헌영철예성연경융덕순공독휴홍경홍운성렬선광준상요흠순공우근탕정계천건통신훈숙모건대곤후광업영조장의창륜행건배녕기태수유희범창희입경형도성헌소장치중달화계력협기강수경목준혜연지굉유신휘수서우복돈문현무인의효명익황제(體元贊化錫極定命聖憲英哲睿誠淵敬隆德純功篤休弘慶洪運盛烈宣光濬祥堯欽舜恭禹勤湯正啓天建通神勳肅謨乾大坤厚廣業永祚莊義彰倫行健配寧基泰垂裕熙範昌禧立經亨道成獻昭章致中達和繼曆協紀剛粹景穆峻惠衍祉宏猷愼徽綏緖佑福敦文顯武仁懿孝明翼皇帝)






4. 어진[편집]


파일:익종어진1.png
파일:attachment/hwomyung123.jpg
부산 용두산 대화재 당시 반소된 문조(효명세자)의 어진들
현재 남아있는 어진들은 모두 면복본(冕服本)으로, 왕세자의 면류관곤복인 8류면 7장복 차림으로 되어 있다. 위 어진들 중 오른쪽 어진의 경우 1826년(순조 26년)에 모사된 것으로 표제 안쪽에 추가된 붉은색 제첨은 1899년(광무 3년), 고종에 의해 문조 익황제로 추존된 이후에 추가된 것이다. 왼쪽 어진은 오른쪽부터 타버리기 시작하여 오른쪽에 있던 표제가 불타버린 탓에 누구의 어진인지 불분명하지만 크기와 표현의 방식 등이 오른쪽의 어진과 거의 동일하며, 특히 바닥에 깔린 화문석과 발받침의 형태도 매우 유사하기 때문에 현재 학계에서는 이 어진1900년(광무 4년)에 오른쪽 어진을 모사한 익종의 면복본 어진으로 보고 있다. 왼쪽 어진은 훼손이 심한 탓에 보존처리만 하고 그동안 국립고궁박물관의 지하 깊은 수장고에 보관되어 있었다가, 2019년 하반기에야 공개되었다.

어진들은 복식 연구에서 있어서 매우 귀중한 자료이지만, 한국전쟁 이후인 1954년 12월에 발생한 부산 용두산 대화재로 인해 초상화가 불에 탔을 때 하필이면 세로로 불탄 것이 얼굴을 포함해 타버리고 나머지만 남아서 복구가 불가능하게 돼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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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원보감에 실린 문조 초상화
열성어진에 실린 문조 초상화
살아서나 죽어서나 운 없는 건 아버지와 판박이라서, 순조의 초상화는 원유관에 강사포를 착용한 것이라 이 또한 문조의 초상화 못지 않게 중요한 자료이지만 이 그림도 얼굴 부분이 불탄 통에 역시 복구가 불가능하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위 그림인 선원보감과 열성어진의 초상화가 남아 있다는 것인데 문제는 보다시피 아들 헌종처럼 사망한 연령에 비해 상당히 노안인 얼굴이라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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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원된 문조의 모사(慕寫)한 어진
이 어진은 권오창 화백이 불에 탄 부분에 얼굴 부분을 그려넣어 복원한 바 있다. 그러나 얼굴을 상상한 상상화인 관계로 문화재표준영정으로 지정되진 않았고, 권 화백이 개인 소장하고 있다.


5. 가계[편집]


순조순원왕후적장자로 태어났다. 형제로는 동복 여동생 명온공주(明溫公主), 복온공주(福溫公主), 덕온공주(德溫公主)와 이복 여동생 영온옹주(永溫翁主)가 있다. 동복 남동생도 있었으나 일찍 죽었다.


5.1. 친가(전주 이씨)[편집]



  • 친증조부 : (추존)장조 의황제(莊祖 懿皇帝) 이선(李愃)
  • 친증조모 : (추존)헌경의황후 홍씨(獻敬懿皇后 洪氏)
    • 조부 : (추존)정조 선황제(正祖 宣皇帝) 이산(李祘)
    • 조모 : (추존)효의선황후 김씨(孝懿宣皇后 金氏)[24]



5.2. 외가(안동 김씨)[편집]


  • 외고조부 : 증 의정부좌찬성(贈 議政府左贊成) 김달행(金達行)
  • 외증조부 : 증 영의정 서흥부사(贈 領議政 瑞興府使) 김이중(金履中)

  • 외조부 : 영안부원군 충문공(永安府院君 忠文公) 김조순(金祖淳)
    • 외조모 : 청양부부인 심씨(靑陽府夫人 沈氏)
      • 큰외삼촌 : 돈령부판사 문정공(敦寧府判事 文貞公) 김유근(金逌根)
      • 둘째외삼촌 : 증 이조판서(贈 吏曹判書) 김원근(金元根)
      • 셋째외삼촌 : 돈령부영사(敦寧府領事) 김좌근(金左根)
        • 셋째외숙모 : 정경부인 윤씨(貞敬夫人 尹氏)
          • 외조카 : 좌찬성 광주부유수(左贊成 廣州府留守) 김병기(金炳冀)
      • 첫째이모 : 부인 김씨(夫人 金氏)
        • 첫째이모부 : 판관(判官) 남구순(南久淳)
      • 둘째이모 : 부인 김씨(夫人 金氏)
        • 둘째이모부 : 판한성부윤(判漢城府尹) 이겸재(李謙在)
      • 막내이모 : 부인 김씨(夫人 金氏)
        • 막내이모부 : 이긍우(李肯愚)


5.3. 처가(풍양 조씨)[편집]


  • 장인증조부 : 경상도관찰사 병조판서 문익공(慶尙道觀察使 兵曹判書 文益公) 조엄(趙曮)
  • 장인조부 : 지중추부사 숭록대부 효문공(知中樞府事 崇祿大夫 孝文公) 조진관(趙鎭寬)

  • 장인 : 풍은부원군(豊恩府院君) 조만영(趙萬永)
  • 장모 : 덕안부부인 송씨(德安府夫人 宋氏)
    • 첫째처남 : 성균관대사성 서장관 조병구(成均館大司成 書狀官 趙秉龜)
    • 둘째처남 : 병조판서 이조참판 효헌공(兵曹判書 吏曹參判 孝獻公) 조병기(趙秉夔)
    • 첫째처제 : 부인 조씨(夫人 趙氏)
      • 첫째동서 : 의정부좌참찬 대사헌(議政府左參贊 大司憲) 이인설(李寅卨)
    • 둘째처제 : 부인 조씨(夫人 趙氏)
      • 둘째동서 : 경상감사 공조판서 효간공(慶尙監司 工曹判書 孝簡公) 유치선(兪致善)
    • 막내처제 : 부인 조씨(夫人 趙氏)
      • '''막내동서 : 김석현(金奭鉉)


5.4. 배우자 / 자녀[편집]




문조의 왕자


[ 펼치기 · 접기 ]
순번
작호

생몰기간
모후
비고
1남
왕세손
王世孫



1827년 ~ 1849년
신정익황후
24대 국왕



6. 저서 / 문화재[편집]



6.1. 관련 저서[편집]


  • 《경헌집(敬軒集)》 12권, 시집 모음
  • 《담여헌시집(淡如軒詩集)》, 시집 모음
  • 동궐도(東闕圖)》
  • 《경헌시초(敬軒詩草)》
  • 《학석집(鶴石集)》 6권, 문집


6.2. 관련 문화재[편집]




7. 대중매체[편집]


사극에서 잘 다뤄지지 않는 시기를 살았기 때문에 미디어에서 다뤄진 일은 드물다.

  • 네이버 웹소설 《구르미 그린 달빛》에서는 가상의 여주인공 홍라온과 궁중 로맨스를 이루는 왕세자 이영으로 등장한다.
    • 2016년 KBS 드라마 《구르미 그린 달빛》에서는 배우 박보검이 연기했다. 드라마에서는 문조를 모티브로 한 캐릭터이며 한자 이름이 다르게 표기되었는데, 여기서는 죽지 않고 살아서 아들 헌종 대신 순조 다음 왕이 된다.[26]



  • 주간 신(神)에서는 이산이 주간 신이 된 한국인 김철수에게 요청하여 소현세자가 효명세자로 환생하여 태어났고, 원 역사의 순조가 될 왕세자 이공을 폐하고 이영을 왕세손으로 삼아 왕위를 이으며 영조, 광조[27] 못지 않은 위대한 업적들을 세웠고, '대한(大韓)'이라는 황제국이 되었음을 선포했으며, 종국에는 입헌군주국을 선포하였다. 사후 문조(文祖)라는 묘호를 받았다.


8. 관련 문서[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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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종(宗)' 자를 쓴 기존 묘호 '익종'을 '조(祖)' 자를 쓴 묘호로 격상하고자 하니 태조의 직계 조상 추존왕 중에 익조(翼祖)가 이미 종묘에 모셔져 있었기 때문. 다만, 묘호에 있던 '익(翼)' 자는 묘호 대신 시호에 넣어 익황제(翼皇帝)라고 하였다. 대한제국 황제로서 묘호를 문조로 격상하여 추존했음에도 보통은 이전에 받은 묘호인 익종이나 효명세자로 부르는 경우가 더 많아서 유명하다.[2] 순조실록》 12권, 순조 9년(1809년, 청 가경(嘉慶) 14년) 8월 9일 (정유) 2번째기사. #.[3] 순조실록》 12권, 순조 9년(1809년, 청 가경(嘉慶) 14년) 8월 15일 (계묘) 1번째기사. #.[4] 순조실록》 12권, 순조 9년(1809년, 청 가경(嘉慶) 14년) 8월 15일 (계묘) 3번째기사. #.[5] 순조실록》 16권, 순조 12년(1812년, 청 가경(嘉慶) 17년) 7월 6일 (병자) 1번째기사. #.[6] 경종은 사친 희빈 장씨궁녀에서 승은을 받은 승은 후궁인 시절 태어나 결국 인현왕후양자 자격으로 이 되었고, 영조는 궁중 무수리로 추정은 하지만 출신을 명확히 알 수 없는 숙빈 최씨 소생으로 왕세제 책봉 당시 부랴부랴 나이 차이가 얼마 안나는 계비 인원왕후양자가 되어 겨우 왕위에 오를 수 있었다. 효장세자승은 후궁도 아닌 일개 왕자의 첩에게서 나서 중전 정성왕후 슬하로 입적했고, 사도세자궁녀 출신 승은 후궁이던 영빈 이씨 소생으로 역시 중전정성왕후양자였다. 정조는 사도세자의 정실인 혜경궁 홍씨의 소생이지만 아버지동궁 시절에 태어났고 그마저 생부모를 살아 생전 왕비추존하지 못했다. 순조간택 후궁수빈 박씨 소생으로 중전 효의왕후 슬하에 양자로 입적했으니 정조를 제외하고는 그나마 나은 편이다.[7] 순조실록》 22권, 순조 19년(1819년, 청 가경(嘉慶) 24년) 3월 20일 (임자) 1번째기사. #.[8] 순조실록》 22권, 순조 19년(1819년, 청 가경(嘉慶) 24년) 10월 14일 (계묘) 1번째기사. #.[9] 정조가 세손시절에 1775년(영조 51년), 대리청정을 하던 선례를 말한다.[10] #.[11] 경종폐세자하려던 노론은 오히려 좋아하였다.[12] 근데 이 사람은 세손의 작은 외할아버지이다. 외할아버지 홍봉한의 이복동생. 자기 형의 외손자를 반대한 것.[13] "신(臣) 등은 모두 합문(閤門) 밖에 모여서, 내려온 비망기를 삼가 보고는, 기뻐서 발을 구르고 춤추면서 앙달(仰達, 우러러 여쭘)할 바를 형용할 수 없었습니다." - 순조실록》 28권, 순조 27년(1827년, 청 도광(道光) 7년) 2월 9일 (을묘) 4번째기사. #.[14] 이런식으로 충성심 테스트과 함께 권력 기강을 잡기 위해서 아버지라고 볼 수 없을 정도로 세자아들이 아닌 왕위에 대한 도전하는 위험인물로 생각하여 늘 괴롭히곤 했는데, 대표적으로 태종, 선조, 영조 등이 있다.[15] 대리청정이나 양위 등 민감한 사안은 자칫 '불충(不忠)' 문제로 걸고 넘어지거나 심하면 역모죄로도 치부될 수 있기 때문에, 하라고 해서 덥석 받아들여서는 절대 안 되었다. 아무리 어느 정도 합의가 된 사안이라고 해도 자신은 권력에 뜻이 없다는 식으로 한두 번은 석고대죄를 하며 정중히 거절하는 것이 미덕이자 의무였으며, 조선많은 왕들이 이걸 가지고 소위 '충성심 테스트' 내지는 '권력 기강을 잡기 위한 수단'으로 써먹기도 했다.[14] 위에서 신하들이 반대하는 경우가 많았던 이유는, 신하들도 적극 반대하는 행동을 보이지 않으면 불충 문제로 곤욕을 치룰 수 있었기 때문.[16] 이러한 점은 순조와 증조부인 영조가 극명히 차이를 보인다. 영조의 사례를 보자면, 영조는 아들 사도세자가 뭐라도 독단적으로 행동하면 월권이랍시고 신하들 앞에서 대놓고 아들을 흉보고, 또 언제는 국사를 논할 때 자신에게 물어봤다고 그거 하나 결단치 못한다고 크게 면박을 주는 등 대리청정하는 세자에게 기대는커녕 다 세자 탓이라고 일삼았다. 애초에 영조순조와 달리 진심으로 대리청정을 맡기려던 게 아니라 아들을 테스트해보고 대놓고 면박을 주려는 의도가 강했기 때문.[17] 순조실록》 31권, 순조 30년(1830년, 청 도광(道光) 10년) 5월 6일 (임술) 3번째기사. #.[18] 근데 이 사람은 효명세자의 부친 순조의 대리자라는 탈을 쓴 정순왕후천주교를 믿었다는 이유로 귀양을 보냈었다.[19] 효명세자의 친동생으로 대군(大君)에 봉해지기 전에 요절했다.[20] 순조의 유일한 서녀로, 어릴 때부터 몸이 불편하여 말을 못 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이복오빠인 효명세자가 굉장히 아낀 여동생이었다.[21]아전김조순과의 면담을 요청했다가 거부되자 뛰어들어 김조순의 서제부, 종 2명, 주모를 베어버렸다.[22] 순조실록》 29권, 순조 27년(1827년, 청 도광(道光) 7년) 5월 24일 (기해) 1번째기사. #.[23] 원래는 체원찬화석극정명성헌영철예성연경융덕순공독휴홍경돈문현무인의효명대왕의 34자였다. 그러나 1863년(음력 즉위년), 1868년(고종 5년), 1875년(고종 12년)과 1876년(고종 13년), 1878년(고종 15년), 1883년(고종 20년) 음력 1월(임오군란 직후 / 신정왕후 조씨 왕대비 즉위 50주년), 1886년(고종 23년) 11월, 대한제국추존 황제로 재추존한 뒤에는 1890년(고종 27년) 10월, 1892년(고종 29년) 1월(조선 건국 500주년), 1902년(광무 6년)인(고종 즉위 40주년) 등 10차례에 각각 8자씩 80자를 추가했다.[24] 친할머니는 정조의 간택 후궁인 현목수비 박씨이다.[25] 1848년(헌종 14년)에 태어나자마자 요절하였다.[26] 다만, 헌종도 지지 기반이 없는데도 재위 말년을 보면 알겠지만 혼자서 안동 김씨 세도를 흔들리게 만드는 모습을 보여주었다.[27] 원 역사의 정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