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종(고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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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제11대 대왕
문종 | 文宗

파일:external/blog.joins.com/49b5193eb27f4.jpg
경릉 전경
출생
1019년 12월 29일
고려 개경 안복궁[1]
(現 경기도 개성시)
즉위
1046년 6월 24일
고려 개경 정궁 중광전
(現 경기도 개성시 만월동)
사망
1083년 9월 2일 (향년 63세)
고려 개경 개성부 정궁 중광전
(現 경기도 개성시 만월동)
능묘
경릉(景陵)
재위기간
고려 낙랑군
1022년 7월 5일 ~ 1046년 6월 24일 (23년)
제11대 대왕
1046년 6월 24일 ~ 1083년 9월 2일 (37년 7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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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
개성 왕씨

서() → 휘()
부모
부왕 현종
모후 원혜왕후
형제자매
6남 8녀 중 4남
배우자
인평왕후, 인예왕후
자녀
13남 7녀
종교
불교

촉유(燭幽)
묘호
문종(文宗)
별호
성조(聖祖) / 문조(文祖)
시호
장성인효대왕(章聖仁孝大王)
명대강정인효대왕
(明戴剛正仁孝大王)[1]
봉호
낙랑군(樂浪君)
절일
성평절(成平節)

1. 개요
2. 묘호, 시호, 별호
4. 가족관계
5. 평가
6. 태묘 악장
7. 기타



1. 개요[편집]


비서성교감(秘書省校勘) 경정상(慶鼎相)을 권지직한림원(權知直翰林院)으로 삼았다. 중서성에서 아뢰기를, “경정상은 철장(鐵匠)[2]

의 후예로 청요직을 제수하는 것은 마땅치 않으니, 청컨대 삭제하소서.” 하니, 왕이 이르기를, "순무를 캐면서 뿌리로써 판단하지 말라[3]고 하였으니, 대개 그 쓸만한 것을 귀하게 여긴 것이다. 경정상의 재주와 식견이 쓸만한데, 어찌 세계(世系)[4]만을 문제 삼겠는가?” 하고는, 윤허하지 않았다."

문종 11년(1057) 정유년(正酉年) 7월. ㅡ '출신이 천한 경정상의 중용을 반대하는 중서문하성의 간언을 뿌리치며'


"제서(制書)를 내려 이르기를, “동북 변방(東北邊) 15주(十五州) 밖(外)의 번인(蕃人: 번국의 백성)들이 잇달아 귀부(歸附: 토지를 바치며 복종)해 오면서 우리 군현(郡縣)에 편입시켜 달라는 간청이 지금에도 끊이지 않으니, 이는 실로 종묘와 사직의 신령 덕분이다. 재신(宰臣)으로 하여금 먼저 종묘와 사직에 사유를 고하게 하고, 멀고 가까운 번인들이 모두 귀순하기(畢納)를 기다려서 주현(州縣)을 넓혀 정한 뒤에 몸소 종묘와 사직에 감사를 행하려고 한다. 그 행례(行禮)와 태자가 대행하는 의식 절차를 유사(有司)는 자세히 논의하여 보고하도록 하라.” 라고 하였다."

문종 27년 4월 3일 中. 《고려사》

고려의 제11대 대왕이자 해동천자. 묘호는 문종(文宗), 시호는 인효대왕(仁孝大王). 는 휘(徽), 는 촉유(燭幽).

거란을 격퇴하고 제도를 정비하여 인종 대까지 지속될 황금기의 발판을 마련한 아버지 현종 시절부터 형들인 덕종정종이 잘 이끌어온 고려의 전성기를 이어받아 고려사를 넘어 한국사의 몇 안되는 최전성기를 열어젖힌 성군이자 명군이었다. 문종 치세 37년 동안 고려는 사회, 경제, 외교, 문화 등 모든 부분에서 눈부신 발전을 이루어 여진, 탐라, 일본호족들을 아우르던 해동천하를 완성시킬 수 있었다.

대다수의 여진 제번(諸藩)을 복속시켜 그곳에 고려의 행정구역인 11개의 주(州) 등을 설치하였으며 동여진이 대항하여 일으킨 반란마저 평정함으로써 고려의 기미주 지배 영역을 포함한 간접 영토·영향권 범위를 최대로 확장시켰다.[5] 즉 문종 시대는 그야말로 주변 사방의 모든 세력들이 끊임없이 안으로 귀부해 오던 고려 황금기의 절정이었다.

물론 문종도 재위 기간에 문벌귀족들의 힘이 막강해져서 문벌귀족 사회의 폐해를 초래했다는 실책 또한 제기되지만, 문종 개인에게만 책임을 묻는건 결과론적인 단편적 해석이고, 보다 장기적인 고려사 전체의 역사 구조적 문제로 봐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


2. 묘호, 시호, 별호[편집]


태자 순종이 올린 공식 묘호는 '문종'(文宗). 고려의 최전성기를 이끌었던 군주였으니 묘향산 보현사 비문엔 '성조'(聖祖)라고 기록되어 있다. 제16대 예종이 명의태후에게 올린 <시책문>엔 '문조'(文祖)라고 표현했다.[6]

시호는 두 개가 전해지고 별호도 많다.
  • 《고려사》 <문종 세가> -총서-:
    • 장성인효대왕(章聖仁孝大王)
  • 《고려사》 <문종 세가> 마지막 조:
    • 명대강정인효대왕(明戴剛正仁孝大王)
시호를 줄여 부를 땐 태자 순종이 올린 시호만 부른다. 그래서 '문종 인효대왕'(文宗 仁孝大王), 더 줄이면 '문종 인효왕'(文宗 仁孝王)이다.
  • <의천 묘지명>:
    • 문종 인효성왕(文宗 仁孝聖王)
<의천 묘지명>이 위 약칭에 미칭을 붙여 '문종 인효성왕'(文宗 仁孝聖王)이라 높혀 불렀다.
  • 묘향산 보현사비:
    • 성조 문왕(聖祖 文王)
제17대 인종 대에 지어진 보현사비엔 묘호를 높혀 부르고, 원 묘호를 시호로 하여 '성조 문왕'(聖祖 文王)으로 불렀다.
  • 별호:
    • 문종이 재위하던 중에 제작된 <이자연 묘지명>엔 문종을 '성황'(聖皇)이라 부르고 있다.
    • 역시 문종 재위 중에 만들어진 부석사 원융국사비에선 문종을 '황상'(皇上), '태평천자'(泰平天子)라고 불렀다.
    • <이정 묘지명>에선 '오황'(吾皇), '제'(帝)로 등장한다. 더불어 태자 순종은 '저황'(儲皇), 황족들은 '친왕'(親王)으로 등장한다.


3. 생애[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문종(고려)/생애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4. 가족관계[편집]


  • 제1비: 인평왕후 김씨 - 현종의 딸
  • 제2비: 인예왕후 이씨 - 이자연의 딸. 국청사의 창건자
    • 순종
    • 선종
    • 숙종
    • 대각국사 의천
    • 상안공 왕수
    • 도생승통(道生僧統) 왕탱(王竀)
    • 금관후 왕비
    • 변한후 왕음
    • 낙랑후 왕침
    • 총혜수좌(聰慧首座) 왕경(王璟)
    • 적경궁주 - 부여공 왕수[7]와 혼인
    • 보령궁주 - 낙랑공 왕영[8]과 혼인. 왕후가 아닌 공주임에도 능호가 있다. 능호명은 '온릉(溫陵)'
    • 조졸한 공주
    • 조졸한 공주
  • 후궁: 인경현비 이씨 - 이자연의 딸
    • 조선국 양헌왕 왕도
    • 부여공 왕수
    • 진한공 왕유 - 문정왕후[9]의 아버지
    • 조졸한 공주
    • 조졸한 공주
  • 후궁: 인절현비(仁節賢妃) - 이자연의 딸
  • 후궁: 인목덕비(仁穆德妃) - 김원충의 딸
    • 조졸한 공주


5. 평가[편집]


현종(顯宗)·덕종(德宗)·정종(靖宗)·문종(文宗)께서는 부모가 자식에게, 혹은 형이 동생에게 왕위를 잇게 함으로써 근 80년 동안 국가의 전성기를 이루었다. 또한 문종은 근면과 검약을 실천하고 현명한 인재를 등용했으며, 백성을 사랑하여 가능한 한 관대한 형벌을 부과했고, 학문을 숭상하며 노인을 공경했다. 자격없는 자에게 관직(名器)을 맡기지 않았으며, 자신과 친한 사람이라고(近昵) 실권을 주지 않았다. 아무리 가까운 인친일지라도 공로가 없으면 상을 주지 않았고, 측근의 아끼는 신하라도 죄를 지으면 반드시 벌을 내렸다. 환관과 급사의 수가 10여 명에 불과하고 내시(內侍)는 반드시 공로와 재능이 있는 자를 가려 임명했는데 이 또한 20여 명에 지나지 않았다. 이로 인해 쓸모없는 관리가 줄어 일이 간편해졌으며, 비용이 절약되어 나라가 부유해졌다. 나라의 창고에는 해마다 곡식이 계속 쌓이고 모든 백성들이 풍요를 누리니, 당시 사람들이 '태평성대\'라고 찬양했다.

송나라에서는 매번 왕을 칭상하는 조서를 보내 왔으며, 요나라에서는 해마다 왕의 생일을 축하하는 사신을 보내곤 했다. 심지어 동쪽의 왜국에서도 바다를 건너 보배를 바쳤으며, 북쪽의 오랑캐들도 자발적으로 투항해 와 우리 국적을 얻고 거주지까지 받았다(受廛). 그러므로 임완(林完)은 문종을 두고, ‘우리나라의 어질고 성스러운 임금’이라고 칭송했다. 다만 개경 부근의 한 개 현(縣)의 치소를 옮기면서 을 세운 일은 비판의 소지가 있다. 그 웅장한 건물은 궁궐보다 사치스럽고 높다란 성벽은 개경의 성벽과 같았으며 황금으로 탑을 쌓는 등, 모든 것들을 그에 준하게 했던 것이다. 이런 일은 나라를 망친 양무제(蕭梁)의 어리석음에 견줄만한데, 문종은 후대에 자신의 덕행을 찬미하는 자가 이 점을 탄식하게 될 것을 미처 알지 못했던 것이다.”

고려 말의 대학자 이제현의 논평.


현종(顯宗)이 중흥의 공을 이룬 덕분에 종묘와 사직이 안정을 되찾았으며 문종(文宗)이 태평성대의 통치를 펼치니 백성과 만물이 모두 화락하게 되었습니다.

김종서. 《고려사》 전문 中


우리나라는 문물과 예악이 흥행한 지가 이미 오래되었으며 장삿배가 연이어 내왕하여서 값진 보배가 날마다 들어오니, 중국교통하여도 실제로 소득은 없을 것입니다. 거란과 영구히 절교하지 않을 터이면 송나라와 교통함은 마땅하지 않습니다." 하니 따랐다.

고려사절요문종 12년


"문종 시절에는 백성 모두가 행복하게 살았다." 라고 평했다.

세종의 명으로 편찬된 《고려사》 전문 中

문종의 재위 기간 동안 고려는 나라가 부유해지고, 불교유학의 조화가 이루어졌으며 외교적으로도 북송, 요나라, 일본과의 사이에서 중심추를 잘 잡아 외침이 없었으니, 이 시기 문화적으로 다양한 발전을 이루어낼 수 있었다.

문종의 4남인 대각국사 의천북송에 밀항 유학 뒤 천태종을 도입해 고려 불교를 새로운 국면으로 이끌었고, 해동공자 최충도 이 시기의 인물로 유학 또한 흥성하게 된다.

보통 명군이라고 불리는 사람들도 상당수는 재위 기간이 길수록 후반부에 혼란이 일기 쉬운데 문종은 재위 후반부로 접어들어도 정치적인 문제가 발생했다는 기록이 거의 남아있지 않은데다 나라에 일이 생긴 것은 여진족 침입을 막아냈다 정도 뿐이었다. 재위 기간도 37년으로 고려에서는 제23대 고종(46년) 다음으로 긴 재위 기간을 자랑한다.

이처럼 한국사에 손꼽힐만한 태평성대를 만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일반인들 사이에서 문종의 일반적인 인지도는 업적에 비해 낮은 축에 속한다. 사극에라도 나오면 대중적 인지도가 올라가지만 이 시기는 작가들도 잘 몰라서인지, 아니면 알지만 소재가 없어서인지, 어쨌는지 잘 나오지를 않는다. 물론 사극에서 고려시대 자체가 조선시대에 밀려 입지가 좁다.[10]

교과서에서도 고려의 태평성대 기간은 거란의 침공(여요전쟁)과 윤관여진정벌(동북9성) 사이에서 생략되며, 바로 문벌귀족의 폐해를 설명하고, 무신정권으로 넘어가는 등 은근히 소외받는 시기다. 교과서에서도 등장이 없으니 한국사능력검정시험이나 공무원 시험 등 일반인들이 주로 치는 시험에도 등장이 없다. 그래서 시험에서 가장 많이 등장하는 제6대 성종 대를 전성기로 아는 사람도 은근히 있는 편이다.

그래도 언급이 전무한 건 아니다. 경정전시과가 언급이 되기는 하지만 시험에는 제5대 경종시정전시과가 주로 출제되는 편이며, 문종의 이야기가 아닌 최충의 9재학당 설립 당시의 임금 정도로만 언급되는 편이다. 고려의 최전성기를 이끈 군주라는 언급은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6. 태묘 악장[편집]


고려 성종이 태묘를 만든 뒤, 태묘에 배향된 제왕들에게 바치는 악장, 즉 칭송의 노래가 만들어졌다. 예종 11년에 예종 기준 9묘(九廟)의 제왕에게 새로 바친 노래가 《고려사》 <악지>에 남아 있다.

예종 대 문종 왕휘의 찬가 제목은 <대명>(大明)이다. 네 글자 운구이다.

당신은 문왕(文王)[11]

과 맞먹으시니, 총명하시고 차고 넘쳤습니다.

민을 인자하게 이끄니, 창고가 꽉 찼고 억 개가 넘었습니다.

포정(布政)[12]

을 뛰어나고 넉넉하게 하시니, 신이 그 덕을 밝혔습니다.

경사가 운손(雲孫)[13]

에게까지 흐르고 하늘과 함께 끝이 없습니다.

아름답습니다! 밝고 밝은 아조(我祖)여.

무(武)와 함께 문(文)과 함께 공(功)과 은(恩)을 베풀었습니다.

즐거움이 궁정에 있으니, 여러 악기가 연주됩니다.

그리워하는 제 마음을 받아주시고 많은 편안한 도움을 주시옵소서.


주문왕과 비유하며 고려의 최전성기를 구가한 문종을 찬양했다. 백성의 삶이 가장 풍족했을 때니 다 찬 창고가 억 개가 넘는다며 극찬했다.


7. 기타[편집]




  • 문종 본인은 당시 기준으로는 장수했다고 할 수 있는 65세까지 살았지만, 아들들과 손주들은 그리 오래 살지 못했다. 그나마 3남 숙종이 50줄을 넘긴 52세라는 나이로 아버지 다음으로 장수하기는 했지만, 사실 52세라는 나이도 당시 기준으로 봐도 장수했다고 보기에는 좀 무리가 있는 편.

  • 동문선》에 태자 순종이 만든 <문종 인효대왕 애책>이 남아있다. 문종의 죽음은 붕어(崩於)로 표현되었다. 천자의 죽음을 '붕'(崩)이라 한다. 《고려사》는 제후의 죽음인 '훙'(薨)으로 표현했다. 《고려사》와 동일하게 7월 18일에 죽었으며 <애책>엔 추가로 신유시, 오후 5시~7시 사이에 붕어했다고 더 상세히 기록했다.

  • 거란이 국서에서 문종을 언급할 때 '주몽(朱蒙)의 후사', '일중유자'(日中有子)라고 불렀는데 주몽과 일중유자는 모두 고구려동명성왕 고추모를 의미한다. 비슷하게 아들 숙종도 삼한(三韓), 5부(五部)의 주인으로 불렸는데 5부는 옛 고구려의 순노부, 연노부, 관노부, 절노부, 계루부를 의미한다.

  • 당시 왕경인 개성부 우봉군[14]에 위치한 박연폭포와 관한 민담이 있다. 《고려사》 <지리지>에 따르면 문종이 폭포에 가 구경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폭포가 크게 흔들려 문종이 놀랐다고 한다. 호종하러 따라간 신하들이 분노해 폭포에 사는 용의 죄를 따지는 글을 써 물 속으로 던지자 용이 나와 사죄했다. 이에 신하들이 곤장을 쳤고, 용의 피로 인해 폭포가 붉어졌다고 한다.

  • 1047년 7월, 개경 개성부 장연현에 사는 문한(文漢)이란 사람이 자신이 신의 뜻을 받았다며 부모와 여동생을 살해하는 패륜 행각을 벌인 뒤 아이 4명을 추가로 살해하는 엽기적인 사건이 있었다. 소식을 듣게 된 문종은 곧바로 사이코패스 연쇄살인마인 문한을 체포한 후 처형하고, 그 수급을 저잣거리에 걸어 사람들이 보게 하였다. 또한 장연현 현령과 현위를 바로 파면시켰다. 기록에 남을 정도로 당시 큰 사건으로 받아들여졌던 것으로 보인다.

  • 아버지인 현종과 마찬가지로 아들 중 3명이나 보위에 오르는 진기록을 세웠다. 고려에는 이들 2명 제외하고도 태조 역시 아들 중 임금이 3명이나 있었다. 고려 이외의 국가들 중에서는 발해강왕이 아들 3명이 모두 임금이 되었다. 차이점이 있다면 현종의 아들들 3명은 바로 형제 상속으로만 왕위를 계승했는데 문종은 차남 선종은 형제가 아니라 장남인 헌종에게 계승시켰지만 문종의 3남 숙종에게 찬탈당해 왕위를 빼앗겼다는 정도이다. 즉, 현종의 세 아들들은 바로 왕위를 계승했는데 문종의 세 아들들은 중간에 헌종이 끼어있는 차이다.

  • 발해문왕하고 공통점이 많다. 시호부터가 같은 문(文) 자를 쓰는 데다가 2명의 재위 기간이 긴 것도 있다. 고려 문종도 37년이라는 장기 재위를 했지만 발해 문왕은 거기에 20년이나 더 얹어서 무려 57년간 왕좌에 있었던 먼치킨이었다. 기록이 없어서 그동안 뭐 하고 살았는지 모른다는게 문제지. 재위 기간 내내 무난해도 너무 무난한 태평성대를 지냈다. 너무 무난해서 오히려 주목을 못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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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양광도 수주 안산군은 《고려사》 <지리지> 기록이다.[2] 철을 채굴하고 제련하는 기술자.[3] 采篈采菲無以下體.
사람의 뿌리를 보고 그 가치를 판단하지 말라는 뜻이다.
[4] 족보 혹은 혈통.[5]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 https://db.history.go.kr/item/level.do?setId=3&totalCount=3&itemId=nh&synonym=off&chinessChar=on&page=1&pre_page=1&brokerPagingInfo=&types=&searchSubjectClass=&position=1&levelId=nh_015_0030_0030_0010_0020_0010&searchKeywordType=BI&searchKeywordMethod=EQ&searchKeyword=%EB%AC%B8%EC%A2%85+%EA%B8%B0%EB%AF%B8%EC%A3%BC&searchKeywordConjunction=AND (고려의 대여진 기미정책의 성공), ◎ https://db.history.go.kr/item/level.do?sort=levelId&dir=ASC&start=1&limit=20&page=1&set1&prevPage=0&prevLimit=&itemId=hn&types=&synonym=off&chinessChar=on&levelId=hn_034_0040_0020&position=-1# (公嶮鎭과 先春嶺의 위치 비정)[6] 《고려사》 <종실 열전> -숙종 후비- 발췌[7] 인경현비의 차남[8] 문종의 동복동생 정간왕 왕기의 아들[9] 문종의 손자인 예종의 제3비[10] 까놓고 말하자면, 명군이고 성군인 것이 작품의 재미를 보장해 주지는 않기 때문이다. 시청자들을 사로잡으려면 대규모 전쟁 신이 계속해서 나오든지 정치적으로 이리저리 뒤집히고 하든지 해야 하는데, 둘 다 해당이 없기 때문. 당장 조선시대 최고의 명군으로 칭송받는 인물인 세종만 해도 그 위상에 비하면 영화나 드라마에서 주역으로 등장하는 경우는 많다고 하기 어려운 편이다. 많이 나오는 건 그 아버지인 태종이나 둘째 아들인 세조 쪽인데 둘 다 정치적 격변이 있었던 경우에 해당하며, 시청률을 높이기 위해 무난하고 순탄했던 세종조에 이런저런 무리수를 둔 끝에 고증을 시원하게 말아먹은 대왕 세종 같은 문제작도 있다.[11] 서주 문왕 희창을 말한다. 문종의 묘호, 서주 문왕의 시호가 서로 같다는 걸 은유함.[12] 정치를 베풀다. 태봉국 철원성의 정전 이름도 여기서 따옴.[13] 머나먼 후손.[14] 지금의 황해북도 금천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