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대혁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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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无产阶级文化大革命(무산계급문화대혁명)[5]당, 국가, 인민에게 건국 이래 가장 심한 좌절과 손실을 가져다준 마오쩌둥의 극좌적 오류이며 그의 책임
건국 이래 약간의 역사 문제에 관한 당의 결의
중국공산당 제11기 제6차 중앙위원회 (1981년 6월)
the Great Proletarian Cultural Revolution[6]
무산계급 문화대혁명, 약칭 문화대혁명은 1966년부터 1976년까지 10년 동안 중국에서 일어난 대규모 파괴 운동, 친위 쿠데타, 내란이다. 한국에서는 간단히 '문혁' 이라고도 부른다.[7] 일명 20세기판 분서갱유. 중국 내에서는 우회적으로 십년동란(十年动乱) 등으로 부르기도 한다. 명분과는 달리 실상은 대약진 운동의 실패로 권력이 약화된 마오쩌둥(毛泽东)의 권력 투쟁, 즉 사욕으로 일어난 사태에 불과하다. 또한 대약진 운동과는 달리 수천 년 문화재까지 상당수 회복할 수 없도록 파괴되었다. 문화대혁명에 대한 평가는 중국에서 공식적으로 극히 부정적인 사건으로 명시하고 있으며 그 책임을 마오쩌둥의 책임이라고 단언하고 있다. 다만, 동시에 일부 중국 국민들 중에서는 문화대혁명을 마오쩌둥보다는 장칭(江靑) 등 4인방과 린뱌오(林彪)의 탓으로 돌리려는 경향도 존재한다.[8]
자국의 문화를 자국민[9] 들이 스스로 멸절시키려 한 전례가 드문 대사건으로, 공산주의 체제의 내재적 폭력성과 경직성, 그리고 현실적 한계를 예시할 때 킬링필드, 대숙청, 대약진 운동, 고난의 행군, 차우셰스쿠의 인구 정책과 함께 빠짐없이 언급되는 역사적 사건 중 하나이기도 하다. 과장을 보태면, 보이는 것은 홍위병과 마오쩌둥만 제외하고 모조리 때려 부쉈다.[10] 세계적으로 존경받는 인물인 공자, 동아시아에서 신으로 추앙받던 관우의 묘를 비롯해서 수많은 문화재들까지 훼손했으니 그 정도를 알 수 있을 것이다.[11] 이 10년 동안의 운동으로 인해 중국의 온갖 지식인들과 수천 년의 문화재가 상당수 희생되었으며, 그 대상이 누구인지 무엇인지는 겨우 남아 있는 기록으로 추정해야 할 정도이다.
문화라는 말과 혁명이라는 말에는 긍정적인 뉘앙스가 담겨 있어 오해를 부를 수 있으나, 문화대혁명은 표현과 달리 사실 국가의 역사와 문화를 완전히 파괴한 초규모의 반달리즘이자 절대 반복되어선 안 될 집단 광기이다. 문혁 시기에는 다양한 사상들이 모순적으로 뒤섞여 표출되었기에 사회학적으로 흥미로운 연구 주제로 손꼽히기도 한다. 특히 반봉건을 외치며 마오쩌둥을 봉건적으로 신격화하고, 그 마오쩌둥은 반제국주의를 외치면서도 중소 분쟁이 일자 재빨리 노선을 바꿔 미국과 협상하고 오히려 국수주의를 반동으로 치부하는 행패를 보였다. 문혁의 악영향은 지도부 대부분이 조롱과 유배를 당하는 피해를 입은 중국 공산당도 인지하고 있기에 현재까지도 흑역사로 인식되고 있다.
2. 설명[편집]
"마오쩌둥은 1966년 이념의 성전을 발동함으로써 중국 전역을 뒤흔들었고 혁명정신을 되살리려 했다. 마오쩌둥은 학교의 문을 닫아버렸고, 학생들로 하여금 홍위병이 되어 ‘부르주아 전문가’로 일컬어졌던 교사, 교장, 교수들에 대항하는 혁명투쟁을 벌이도록 선동했다. 이 혁명운동은 사회전체를 혼란에 빠뜨렸다. 병원에서는 의사들이 화장실 청소를 하도록 강요당했고, 청소부들이 환자를 돌보았다. 홍위병들은 ‘자본주의의 길로 가고 있다’면서 정부와 당의 간부들을 공격하고 군부대의 무기고에서 탈취한 무기를 들고 싸움을 벌였다. 1969년에 인민해방군이 질서를 회복하기 전까지 온 나라가 사실상 무정부 상태 직전까지 치달아 있었다.”
판도라의 상자 : 중국 - 수잔 셔크(p.19~20)
"의심할 여지 없이, 무산계급 문화대혁명 중에 무산계급 신사조, 신문화, 신풍속, 신습관이 반드시 지주들과 기타 착취 계급의 구사상, 구문화, 구풍속, 구습관 이런 부패한 것들을 대체할 것이다. 위대한 마오쩌둥 사상으로 무장하여 떨쳐 일어선 중국 인민은 반드시 온갖 잡귀신을 쓸어버릴 것이다."
중앙문혁소조장 천보다
한자 문화권에서는 "문화 혁명(文化革命)" 또는 더 줄여서 "문혁(文革)"이라고도 한다. 원래 내세운 목표는 파사구(破四舊)라 하여, 낡은 사상[舊思想], 낡은 문화[舊文化], 낡은 풍속[舊風俗], 낡은 관습[舊習慣]을 타파(打破)하여, 사회주의 리얼리즘적인 이타주의적이고 자기 희생적인 사회주의 문화를 창조하자는 것이었으나, 결과적으로는 그저 역사적인 문화 검열 사건이자, 전국 단위로 실행된 대규모 반달리즘이 됐을 뿐이다.
주요 골자는 "옛 것은 모조리 숙청하자. 문화, 교육, 정치, 가족 등 모든 것을." 중국이란 넓고 오래된 나라에서 전국 규모로 일어난 이 사건의 이름은 문화'대혁명'이지만 그 실상은 문화'대숙청', 문화'대파괴'였다.
이때 일어난 파괴의 수준은 분서갱유 같은 전승국에 의한 패전국 "문명 파괴"였다고 보면 된다. 단, 외국의 문명이 아니라 자국의 문명을 파괴한 게 코미디.[12] 앞서 언급했듯 모든 성공한 정치적 행위가 그러한 것처럼 문화대혁명의 명분 또한 "이제 경제, 정치 분야의 혁명이 완수되었으니, 그보다 상부 구조인 문화를 개혁할 단계다"라는 듣기 좋은 것이었으나, 문제는 이에 따라 구체제의 봉건적, 권위적인 관료제, 위계 질서와 같이 조금이라도 보수적이거나 우파적인 것과 관련된 모든 것을 파괴하고자 했다는 것이다.
중국사에서는 분서갱유, 문자의 옥 등의 반달리즘이 여러 번 있었지만, 문화대혁명이 중국 문화 전체에 끼친 피해는 분서갱유와 문자의 옥을 훨씬 능가한다. 분서갱유와 문자의 옥은 적어도 자국의 문화산업까지 파탄 내진 않았다. 중국이 고전 문화 산업에선 아직까지 우위를 점하고 있으나 문화대혁명 때문에 이마저도 유교 관련 기록물들을 유교문화가 꽤 남아있는 한국이나 역사적으로 중국과 앙숙인 베트남에서 역수입하고 있는 실정이고 당연히 현대 대중 문화 면에서는 엄청난 열세를 면치 못하고 있다.
이 문화대혁명식 반달리즘의 진수는 문화재 파괴 뿐만 아니라 문화 예술 관련 인사들에 대한 대규모 린치에도 있다. 주변에 문화 예술 쪽으로 종사한다는 사람이 있으면 무조건 집에 쳐들어가서 "게으름뱅이"라는 터무니없는 죄를 뒤집어씌워 두들겨 팬 뒤, "현실 체험"이라면서 집단 농장에 감금하고 노예처럼 부려먹었다. 이러니 다른 국가들이 전부 제각기 대중 문화를 발달시켜가던 20세기 후반에, 중국의 대중 문화는 그런 단계를 전혀 밟을 수가 없었다.[13]
이 사건이 이런 식으로 "혁명"이라는 이름을 쓰면서도 실상은 그저 포스트 아포칼립스식 대폭동 비슷하게 흘러간 이유는 이 사건이 벌어지게 된 뒷배경 자체가 처음부터 극히 불순했기 때문이다. 문화대혁명 당시의 중국 정부는 대외적으로는 이 사건을 마치 프랑스 혁명의 동양판쯤으로 선전했다.[14] 서구 지식인들도 진실을 알기 전까지는 진짜로 이렇게 믿기도 했다.
문화대혁명의 광기가 중국을 뒤덮었던 시기에는 중국공산당의 높으신 분들이라도 예외가 될 수 없었다. 대표적인 피해자로는 류사오치와 덩샤오핑을 들 수 있다. 당시 당의 고위 간부였던 시진핑의 아버지 시중쉰이 순식간에 몰락했고 시진핑 자신도 량자허촌으로 하방되어 토굴집에서 살면서 궂은 일을 도맡아 하면서 힘든 생활을 견뎌내야 했다고 한다.[15]
마오쩌둥이 이렇게 노욕의 끝판왕으로 사는 동안의 중국의 경제성장도 침체되었다. 우선 1967년과 1968년도에 마이너스 5.7%, 4.1%의 경제성장률을 기록하며 류사오치 시절의 경제회복의 성과를 까먹었다. 1969년과 1970년에는 홍위병이 하방되어 사회혼란이 어느 정도 진정되고 농어촌 개발이 진행되어 16%, 19%의 경제성장률을 기록하기도 했지만 1970년대 초중반에 경제성장이 2.3%까지 내려앉는 등 냉온탕을 오갔다. 결국 대만과 홍콩이 비교적 안정적으로 경제성장을 유지하면서[16] 중국의 경제력을 급속히 따라잡았고 중국은 잠재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면서 후진 개도국으로 남게 되었다. 1960년 세계경제력 순위에서 중국은 세계 5위를 차지했고 1965년에는 6위를 기록했는데, 문화대혁명이 일어난 이후로는 서독과 이탈리아, 브라질 등에게 따라잡혀서 1976년에는 10위로 떨어지게 되었고, 1981년에 13위를 기록함으로써 정점에 달했다.[17] 그것도 그나마 인구증가율이 높아서 유지했지 그게 아니었으면 얼마나 더 떨어졌을지 모를 일이다.
결과적으로 문혁의 후유증이 수습되고 나서야 본격적으로 경제성장에 힘을 쓰게 되었다. 문화대혁명이 휩쓸고 간 직후의 풍경은 요즘 코드로 비유하면 거의 매드 맥스급 포스트 아포칼립스를 연상케 하는 수준이었다. 조선족 중장년층 사이에서도 당시 중국의 상태와 달리 북한은 그나마 잘나가던 리즈시절이어서 질 좋은 물건 좀 얻어올려고 북한으로 갔다는 증언을 할 정도로 막장이었다.
3. 배경[편집]
대약진 운동의 결과로 3천만~5천만 명에 달하는 중국 인민들이 아사[18] 하고 경제가 나락으로 추락하는 파멸적인 결과가 초래되자 이를 강행한 마오쩌둥의 권위는 추락하여 사실상 2선으로 후퇴하면서 국정에서 배제되었다. 대신 류사오치가 국가주석직을 승계해서 중국공산당 총서기[19] 덩샤오핑과 함께 실용주의 정책을 펼쳐 중국 인민들의 호평을 듣게 되자, 마오쩌둥은 류사오치와 덩샤오핑의 영향력이 점점 커지면서 자신이 뒷방 늙은이 신세[20] 가 될까봐 초조해했다.
물론 이 시기에도 마오쩌둥은 국부로서 절대적인 카리스마를 가지고 있었고, 중국공산당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으로 군통수권을 쥐고 있었으므로 그 누구도 그를 거역하려고 하지는 못했다. 대장정과 국공내전을 통해서 마오쩌둥은 중국 공산당 내에서는 신과 같은 수준의 권위를 얻었기에 마오쩌둥이 사망할 때까지 그 누구도 마오쩌둥에게 정면으로 도전하지는 못했다. 문제는 마오쩌둥 본인이 대약진 운동이라는 엄청난 대삽질을 저질렀기 때문에 다시 정치 일선에 전면으로 나설 수 있을 만한 명분이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 불을 붙인 게 펑더화이였다. 1959년 루산회의에서 펑더화이는 마오쩌둥이 밀어붙인 삼면홍기(三面紅旗)[21] 에 대해서 "총노선은 옳았으나 대약진 운동과 인민 공사는 잘못되었다."라고 비판했다. 물론 펑더화이의 이 발언은 마오쩌둥을 생각해서 한 충언이었으나, 초조해져 있던 마오쩌둥에게 이 소리는 굉장히 귀에 거슬리고 고깝게 들릴 수밖에 없었다.
사실 펑더화이의 비판은 비판이라는 단어로 표현하기에는 매우 완곡한 표현으로 이루어진 한 통의 개인 편지였다. 단순히 "총노선은 옳았으나 대약진 운동과 인민공사는 잘못되었다." 라는 표현이 있었던 것이 아니고 매우 상세한 설명과 예시를 들어가면서 칭찬과 부족한 점을 차분한 어조로 언급했던 것이다. 그 예로 "전 인민들의 철강생산 중에 수많은 흙으로 만든 용광로를 만들어 많은 자원과 인력을 낭비하였다. 이는 당연히 커다란 국가적 손실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이 운동을 통하여 전국의 지질에 대하여 대규모 조사를 하였고, 또 적지 않은 관계 부문의 전문가를 양성하였으며, 많은 간부들도 이 운동 기간 중 단련을 하였다는 점은 소득이라고 할 수 있다." 같은 평가가 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마오쩌둥이 펑더화이의 비판을 받았다는 것에서 너무 감정적인 사실 왜곡은 조심해야 한다.[22] 하지만 수신인인 마오가 최고 권력자였다는 점을 감안해 볼 때 사실 칭찬은 한 톨도 없는 게 맞긴 했다. 전국의 지질조사나 전문가 경험치 획득 등은 그냥 있는 사실만 쓰자니 잘못했다는 말밖에 없어서 듣기 좋게 집어넣은 빈말일 뿐이고, 마오가 그걸 못 알아들을 만한 위인도 아니었다.[23]
어쨌든 마오는 이 편지를 읽고는 펑더화이에게 "이 자산계급 민족주의자야!"라는 거의 폭언에 가까운 말을 쏟아내었고, 펑은 잔뜩 쫄아 깨갱하면서 물러나야 했다.[24] 결국 이로 인해 펑더화이는 실각하고, 마오는 자신의 최측근인 린뱌오를 펑더화이의 후임 국방부장으로 임명하였다.
게다가 삼면홍기(三面紅旗)에 긍정적이었던 류사오치 조차도 고향 후난성을 시찰한 후 상상을 초월하는 사태를 보고 경악해 7천인 대회를 소집하여 마오의 주장인 공9과1의 평가를 정면으로 뒤집고 "천재지변이 3할이면 인재가 7할이다."라며 마오를 정면으로 비판했다. 분노한 마오는 류사오치의 말을 막으면서 실패는 일부 지역에 국한된다고 반박했지만, 류사오치는 오히려 성공이 일부 지역에 국한될 뿐이라고 맞서고 마오를 개인적으로 만나 역사가 심판할 것이라고 소리를 지를 정도로 격렬하게 맞섰고 논쟁을 하며 싸웠다. 둘은 곧 진정하고 화해하기는 했지만 마오는 류사오치가 자신이 죽은 후에 중국에서 수정주의를 이끌 중국의 니키타 흐루쇼프라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고 한다.
류사오치는 1959년 4월 27일 국가주석에 올라 당 총서기 덩샤오핑과 함께 정돈사업이라 불리는 경제개혁을 추진하며 강제적인 집단화 추진 정책이던 인민공사(人民公社)를 일부 후퇴시키고, "생산보다 구매가 더 좋고, 구매보다 대여가 더 좋다."라는 말을 남기며 도회 상업 중시, 대외적 균형에 초점을 맞춰 실용적인 경제정책으로 마오의 자급자족 경제정책을 대체하려 했다.
사실 마오쩌둥도 공동식사를 비롯하여 자신이 제시한 과격한 집산화 정책이 터무니없고 오히려 악효과만 많은 것임을 인정하고 있었지만 자신이 죽고 나서 스탈린처럼 위상이 격하될지도 모른다는 공포에 사로잡혀있었다. 결국, 마오쩌둥의 눈에는 류사오치와 덩샤오핑은 중국에서 자본주의 노선을 부활시키려는 '주자파'로 보였을 뿐이었다.
류사오치는 자신이 마오쩌둥의 뒤를 이어서 중국을 영도할 새로운 지도자라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서 마오쩌둥을 뒷방 늙은이로 만들고 자신이 실세가 되려 했다는 얘기가 있지만 실은 마오쩌둥의 정풍운동이나 반우파 투쟁을 벤치마킹하여 공포정책을 반대파를 숙청함으로 당내에 입지를 확보하려는 것이 류사오치의 생각이었다. 이 과정에서 류사오치는 <공작조>를 조직하여 대약진 운동의 참혹한 실패로 정권과 체제에 의심과 회의를 보이는 민중을 가혹하게 탄압했는데 그중에서도 제일 집중적으로 타격당한 인물들은 바로 베이징의 대학생들이었다.
특히 칭화대학의 학생 콰이다푸는 공개적으로 류사오치를 비판했다가 류사오치에게 우경 기회주의자로 몰려서 조리돌림을 당해야 했다. 이 때문에 학생들 사이에서는 류사오치 정권에 대한 극도의 불만과 분노가 퍼졌는데 마오쩌둥은 이를 노리고 학생들에게 접근, 콰이다푸 등 학생들을 영웅으로 내세우며 류사오치를 비판했다. 여기에 장칭과 천보다, 린뱌오 등 당내 좌경세력이 마오쩌둥을 결사옹위하며 덩샤오핑과 류사오치에 대한 비난을 쏟아부으며 류사오치 세력을 회치기 위한 준비가 착착 갖춰졌다.
3.1. 건국 초기 사회 불안과 대약진 운동의 실패[편집]
1949년 국공내전 승리 이후 공산당이 중국 대륙을 장악하게 되었다. 지식인 계층으로부터 농촌 민주주의자 소리를 들으며 부패한 장제스 독재 정권의 완벽한 대체제로 인식되던 공산당은 많은 기대를 받았지만 마오쩌둥의 중화인민공화국은 오히려 장제스 정권보다도 더한 독재와 부패를 보여주었다.
흔히 공산화 이후 1949년~1957년까지는 대약진 이전의 평화기로 인식되는 경우가 일반적이지만 이 시기는 공산당이 지배하는 상층 구조의 창출, 토지 개혁, 집산화, 전매제 실행 등의 무리한 정책의 시행으로 인하여 인민들의 고통이 극에 달했으며 이전에 없던 종교와 외국인, 자본가들에 대한 난폭한 공격이 진행되던 시기였다. 토지 개혁 과정에서 70~200만 명이 학살당했으며 집산화, 전매제에 저항하는 여러 봉기 진압과 종교에 대한 탄압 등을 계산해보면 공산화 초기에만 최대 400만 이상이 정권에 희생되었다.
대약진 운동 시기에 나타난 통계 조작, 장부 조작 등에 대해서 관료들이 국민당 시절의 개버릇 못 준 것이라고 해석하는 경우가 있으나 국민당 시절 공무원들의 경우, 50년대 초반부터 대대적으로 숙청당해 공산당 출신 하부조직들로 대체된 상황이었고 지도자 비위 맞추기 위한 통계조작 같은 것은 모든 독재국가에서 관리가 없으면 나타나는 일반적 현상이며 공산당이라고 부패가 없을 것이라고 착각하면 안 된다. 더욱이 아직까지 구시대의 관습에 젖어있던 공산당 간부들이 지역의 집단농장에서 마치 봉건영주처럼 군림하는 사례들도 보고되어 마오쩌둥이 이들에 대한 숙청을 지시할 정도였다.
아무튼, 이러한 공산정권의 모습에 실망하여 전국 각지에 반발이 빗발쳤고 흐루쇼프의 스탈린 비판에 자극받은 마오쩌둥이 실시한 “백화제방(百花齊放) 백가쟁명(百家爭鳴)” 운동에서는 전 지식인, 학생, 노동자, 농민에 국영언론들까지 거의 비난에 가까운 어조를 쏟아내며 '장제스가 나았다!'고 외치는 지경에 이를 정도였다. 이 시기의 학생들의 반정부 운동이나 노동쟁의는 국민당 시절의 가장 거센 반정부 시위를 아득히 뛰어넘는 수준이었다.
경악한 마오쩌둥과 공산당은 즉각 반우운동을 진행하여 대숙청을 감행해 당과 국가 내 반대파들을 완전히 숙청하면서 싹쓸이를 해버렸다. 여기서 마오가 모든 직장과 기관에 10~20%의 우파가 숨어있다고 구체적인 수치까지 제시하는 통에, 의무적으로 모든 기관이 직원의 10%가량을 해고해야만 했다.
그 다음에 찾아온 것은 대약진 운동이었다. 대약진 운동의 결과 수천만 명의 사람이 굶어죽고 어린이와 노약자를 잡아먹는 끔찍한 일이 벌어지며 중국 내부의 혼란은 극에 달했다. 사태가 이 지경에 이른 것은 현실을 경시한 공산주의의 이론적 문제도 있었지만 오랜 내전을 거치며 중국 공산당이 지나치게 조직화가 되었고, 민주집중제보다 한술 더 뜬 주석제의 공산당으로 초권력적(超權力的)인 집단이 되어 주석의 주장에 아무도 감히 반발할 수 없는 초권위주의적 정당으로 변한 것이 가장 컸다.[25] 모든 것은 상명하달로서만 이루어질 수 있었고, 민중이 주인이라던 공산당의 이상은 점점 훼손되기 시작했다.
여기에 중국이란 나라 자체가 워낙에 낙후된 농업국가[26] 이고 현대적이고 민주적인 감시시스템이 없던 만큼 광적인 혁명열기 + 사적인 이익을 탐하는 공산당원들의 부정축재 행위가 동시에 벌어졌다. 이후에 나타난 모습을 '다섯 가지 풍조의 만연'이라 하는데 공산주의 풍조, 허위과장 풍조, 강제 명령 풍조, 생산의 눈먼 지휘 풍조, 간부 생활의 특수화 풍조가 그것이었다.
이에 반발하여, 마오주의의 이상을 믿고 있던 공산당 내부 급진파와 혁명적 청년 공산주의자들, 급진적 마오주의자들은 이러한 이상을 다시 복원하기를 열망하고 있었다. 하지만 마오쩌둥의 뒤를 이은 류사오치는 안정화 대신에 대약진 운동의 결정적 책임을 '계급의 적'들에게 몰아서 수백만 명의 당원을 숙청하고 수만 명의 당원을 처형하고 현 사태에 반발하는 젊은 학생들을 마오쩌둥의 반우운동을 롤모델삼아 우파 기회주의자로 몰아서 마구 탄압하였다. 또한 이 시기 마오쩌둥이 중국공산당 주석, 중화인민공화국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이었지만 국가주석은 류사오치였고 중국 내 최고 직위인 주석이 두 명이 되어있었다. 마오쩌둥이 주도한 대약진운동 실패로 국가주석으로서 류사오치도 위세가 상당히 올라갔으며 마오쩌둥이 수세에 몰리기 시작한 1962년 진행된 7천인 대회에서 마오쩌둥은 자아비판까지 해야하는 상황까지 몰렸다. 마오쩌둥에 지원 아래 앞서 탄압받은 집단들이 나중에 첫 번째 홍위병이 되어 마오쩌둥의 지원 사격하에 죽창을 류사오치와 덩샤오핑에게 돌리게 된다.
여기까지가 1960년대 초반의 이야기다. 이미 중국은 내부에서 기아와 숙청, 내부정화 활동, 보수파의 약진, 노선 갈등으로 부글부글 끓고 있었고 누군가가 불을 당기면 걷잡을 수 없이 펑하고 터질 상황이었다.
한편, 1960년대 초중반에 걸쳐 경제가 점차적으로 정상화되던 시기에 라디오 생산단가가 급속히 하락하여 라디오의 생산량이 급속히 올라가게 되었고, 중국에서도 트랜지스터 라디오가 널리 퍼지기 시작했는데[27] 이러한 미디어 환경의 변화와 결합하여 라디오가 문화대혁명을 위한 선전도구로 널리 활용되었고, 중국사회와 문화에 그야말로 막대한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3.2. 《해서파관(海瑞罷官)》과 조반유리(造反有理)[편집]
그런 가운데 전혀 예상치 못하게 《해서파관》이라는 한편의 연극이 거대한 화약고에 불을 당기고 만다. 1959년 당시 베이징 부시장이었던 우한(吳晗)은 역사학자로서의 지식으로[28] 연극 《해서파관》을 발표하는데, 이 연극은 명나라를 배경으로 해서라는 청백리 관리가 폭군 황제인 가정제에게 파직을 당한다는 내용이었다. 그럭저럭 잘 만든 연극이고, 연극을 발표하기 전부터 마오쩌둥은 해서를 높이 평가하며, "당원들은 해서를 본받아야 한다."고 말하기도 했으며, 처음 연극이 발표되었을 때, 마오는 "이거 괜찮네."라는 반응을 보였다. 그리고 애초에 이 연극을 제작하도록 의뢰한 사람이 바로 마오쩌둥 본인이었다.[29]
그러나 마오의 부인인 장칭과 야오원위안이 1965년, '문회보'라는 신문에 "이거 마오쩌둥 동지 돌려까는 내용 아닌가??"이라는 칼럼을 발표하면서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다. 장칭에 의하면, 해서는 펑더화이를 의미하며, 황제는 마오를 의미한다는 것이다. 한 마디로, 1959년, 루산 회의에서 실각한 펑더화이를 빗대서 쓴 연극이라고 주장했다.[30] 이것이 바로 해서파관 사건이다.
이것이 자신을 겨냥한다는 것을 직감한 베이징 시장 펑전은 이것을 (현실사회와는 무관한)학자들 사이의 학술토론으로 만들어서 어떻게든 파장을 축소하려 했지만 이미 마오쩌둥의 지시를 받은 저우언라이, 장칭, 야오원위안 등이 수많은 선전매체를 동원해서 맹공격을 퍼부었고, 아예 마오까지 직접 이 키배에 뛰어들어서, 1966년 5월 16일, 중국 공산당 중앙위원회 통지를 통해 펑전을 비판했다. 여기에 린뱌오가 "우리 마오님은 천재! 마오님 말씀이 무조건 다 옳아요!" 식의 일장연설을 했고, 7월 27일, 홍위병 대표단들이 "사회와 정치를 뒤집어 엎자!"라는 편지를 마오에게 보냈다. 이를 "조반유리(造反有理)"라 한다. 조반유리는 말 그대로, "반란이 일어나는 것에는 이유가 있다"는 뜻이다. 이 말은 홍위병의 반란에 정당성을 부여했다. 결국 펑전은 덩퉈, 랴오모사 등과 함께 숙청당했다. 자세한 것은 해서파관 사건 문서로.
마오는 젊은이들이 잘한다며 전적으로 지지한다고 밝히고, 8월 8일, 인민일보에 《사령부를 폭격하라-나의 대자보》라는 제목의 짧은 논평을 발표했다. 공산당 안의 우파를 척결하자라는 내용이었지만, 사실상 류사오치와 덩샤오핑에게 선전포고를 한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이때부터 문화대혁명이 시작되었다.
참고로 사건의 발단이 된 우한은, 문화대혁명 때 감옥에 갇혔다가 1969년, 옥사했다. 그는 문화대혁명이 끝나고 4인방이 실각한 뒤 복권되었다. 펑전 역시 문화대혁명 때 홍위병에게 탄압을 당했으나 목숨은 건지고 1979년 덩샤오핑 집권 이후 복귀했다.
4. 전개[편집]
홍위병들의 활동에 사실상 한없는 자유를 부여하자, 홍위병들은 날개 달린 듯이 다니고 「대륙의 기상」(…)을 보여주면서 각지에서 소위 「낡은 것」들을 모조리 파괴하고 다니기 시작했다. 절, 사당, 성당은 문을 닫거나 약탈되었으며, 베이징과 상하이에선 낡은 사상의 소유자들이라면서 사람들이 무차별로 홍위병들에게 붙들려 구타를 당했고, 심지어 살해당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공안들은 그걸 바라보기만 할 뿐이었다. 심지어 당시 공안 수장 셰푸즈는 "누가 맞아서 죽어도… 우리 소관이 아니다. 만약에 이렇게 때려죽인 사람을 구속한다면, 이것이야말로 과오를 범하는 것이다."라고 발언할 정도였다. 공안이 막으려고 해도 홍위병들이 워낙 살기등등해서 함부로 다가가기도 힘들었다는 말도 있다.[33]
마오쩌둥은 이런 사태를 보고 받고도 오히려
라는 망언을 한다.[34]히틀러가 더 잔인하지 않았나? 사람을 더 많이 죽일수록 진정한 혁명가가 되어간다.
16개조에선 "무력 쓰지 말고 좋게 말로 하자", 정확하게 말하면, "투쟁수단은 무투(武鬪)보다는 문투(文鬪)가 좋다"라는 말이 있긴 했지만, 그 말을 지키는 홍위병 따위 없었다. 뭐 언어폭력으로 사람을 죽이는 것을 봐선 말로 하기도 한 모양이다.
류사오치는 결국 국가주석직에서 물러나고 가택연금 상태가 되었다. 그리고 덩샤오핑은 당직에서 쫓겨나고, 이른바 재교육을 세 번이나 받고 난 뒤, 지방의 트랙터 엔진 공장에서 일하게 되었다. 덩샤오핑의 손에는 줄칼에 베인 흔적이 있는데, 이 트랙터 엔진 공장에서 얻은 상처다. 이후 그는 1973년, 저우언라이가 복귀시켜 줄 때까지 꼼짝없이 그곳에 있어야만 했다.
8월 22일, 마오는 아예 "홍위병이 뭘 하든 태클을 걸지 말라."는 내용의 교시를 하달했다. 이제 홍위병이 하는 일을 막으려는 자도 반혁명분자로 몰려서 숙청의 대상이 될 정도였다. 9월 5일에는 모든 홍위병들에게 베이징을 방문하도록 권장하는 통지문이 발표되었는데, 이때 베이징을 방문한 홍위병들이 무려 1,100만여 명에 달했다. 이때 마오는 "숙식 걱정하지 말라. 정부가 다 대준다!"라고 선언하기까지 했다. 사실상 국가재정으로 자기 사병들을 먹여주고 재워준 셈이었다.
10월 10일에는 린뱌오가 류사오치와 덩샤오핑을 주자파(走資派). 즉, 자본주의 노선을 추종하는 세력이라고 맹비난했으며, 펑더화이의 집에 홍위병들이 난입해서 명패를 채우고 거리로 끌고 다니는 사태가 일어났다.
이즈음 홍위병들의 숫자가 기하급수적으로 불어난다. 그리고 세대교체도 이루어진다. 초기의 시설 파괴, 유적 파괴를 주도했던 홍위병들은 보수파라고 불리며, 이들은 홍오류라 하여 대부분 고위 간부나 당 관료의 자녀들이었다. 그런데 홍위병 사이에 만연하던 혈통주의에 대해 중앙문혁소조장 천보다가 프롤레타리아 문화대혁명 중의 두 가지 노선이라는 연설을 발표하면서 핍박받던 흑오류, 회오류 출신 홍위병들이 대거 등장하는데, 이들은 "무투(武鬪)보다 문투(文鬪)를 하라!"라는 모토 하에 하방(下放) 활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한다. 이들은 조반파(造反派)라고 한다.
반드시 짚어야 할 점은 조반파와 보수파 홍위병은 절대 같은 선상에 놓고 평가할 수 없다는 것이다. 권력자의 자녀로 이루어진 보수파 홍위병과 달리 조반파 홍위병은 부모의 출신성분에 연좌되어 당간부와 지식인들에게 '혁명'을 당하며 핍박받던 집단이다. 조반파 홍위병이 행한 살육은 상당 부분 생존을 위한 투쟁이자 정당한 복수로서 참작할 부분이 많다. 만일 조반파 홍위병이 대항혁명에 참여하여 자신들을 향해 '혁명'하는 자들에게 저항하지 않았더라면, 끊임 없는 핍박 속에서 억울하게 쓰러지는 수밖에 없었다. 문화대혁명을 평가하는 공산당과 지식인들은 계급적 이기심에 의해 문화대혁명 이전에 당간부들과 지식인 계급이 '반동'에게 퍼붓던 '혁명'의 부조리함을 의도적으로 축소하고 은폐하며 조반파에게 최대한 많은 책임을 전가하려는 경향이 있다. 해가 바뀌어 1967년이 되자, 린뱌오와 장칭은 상하이를 장악하기 위해, 홍위병과 언론 등을 통해 상하이 지방정부의 고위직들을 맹비난한 뒤 숙청했다. 사실상 상하이 지방정부의 행정은 완전히 마비되었다. 이를 1월의 폭풍이라고 한다.
베이징에선 4인방과 박자가 잘 맞은 캉성이[35] 모두가 굶을 바에야 자본주의를 하자고 주장한 부총리 타오주를 반혁명분자로 몰아 숙청시켜 버렸다. 이제 공산당 내에서는, 자신의 정적 제거를 위해 상대방을 반혁명분자로 모함하는 일이 비일비재하게 되었다. 마오는 인민일보에 글을 발표하면서, 이들이 잘하는 일이라고 크게 칭찬했다. 이 시기 노동부 부장이었던 리리싼 역시 비정규직 제도를 도입했다는 이유로 자본주의적이라 공격을 받자 압박을 견디다 못해 결국 자살하고 말았다.
장칭은 문혁(文革)의 기운을 인민해방군에까지 퍼뜨리기로 결심한다. 그러나 중국 건국에 기여한 인민해방군의 여러 주요 장성들이 문화대혁명에 우려를 표하자, 4인방은 언론을 동원해 문혁을 비판한 장성들을 맹비난했고, 그들은 결국 홍위병들에 의해 조리돌림을 당한 뒤 실각하고 만다. 이를 2월 역류라고 한다. 이 과정에서 소련의 대숙청과 마찬가지로, 개국 원수로 추대된 최고위 장성들도 여럿 숙청되었다. 문혁 주도파였던 린뱌오는 당연히 해당되지 않았지만 펑더화이와 허룽은 이 기간 동안 홍위병들에게 구타와 조리돌림을 실컷 당한 뒤, 펑더화이는 비투회에 불려다니는 노리개로 전락했다가 암으로 사망했고, 허룽은 1966년 12월 30일 장칭이 칭화대학에서 허룽을 공개적으로 공격할 것을 요청하자 겁에 질려 저우언라이에게 중난하이에 거처를 마련해달라고 사정했으나 저우언라이는 거절했다. 결국, 허룽은 홍위병들에게 체포되어 고문과 조리돌림을 당했고 무죄를 증명하기 위해 단식하다가 1969년 6월 9일 사망했다. 그는 "나는 단지 마오쩌둥 주석이 한마디 말만 해주기를 바라오. '허룽은 나의 동지였다.'"라는 말을 아내에게 남겼다.
주더의 경우, 그나마 피해를 덜 봤지만 홍위병들로부터 군부 내에서 기어다니는 군벌 찌끄러기라는 욕을 듣고 있었으며 녜룽전, 쉬샹첸, 예젠잉, 천이는 2월 역류에서 문혁파에게 저항했다가 마오쩌둥이 장칭, 캉성, 천보다를 지지하는 통에 박살이 나서 쉬샹첸과 천이가 특히 큰 피해를 입었다. 천이는 공장 노동자로 하방조치당했다.
마오쩌둥은 3월 흑풍을 허용하면서 군부대가 홍위병을 진압하는 것을 허용하기도 했으나 2월 역류로 인민해방군 지도부 자체가 무력화되었으며 상하이 1월 폭풍 사건으로 불어닥친 탈권 현상으로 인해 군부대가 홍위병에게 약탈당하고 홍위병들이 군구 지도부 전체를 조리돌리며 군구 부사령관 급의 고급 장교들을 끌어내서 중태에 빠질 정도로 구타하는 사태까지 발생했다. 난징군구 총사령관 쉬스유는 백주대낮에 납치되어 베이징으로 압송되었고 해군총사령관 샤오징광도 납치당해 톈진으로 압송되어 홍위병들에게 조리돌림을 당하고 있었으니 이때의 혼란상은 이루 말할 길이 없었다. 각 지방의 군구들이 홍위병의 공격으로 박살이 나서 군구 사령관도, 총정치위원도 없는 곳이 많았다. 중국의 안보와 전시상황에 존립을 책임지는 인민해방군이 겨우 동네 학생 꼬맹이들 모아서 조직한 홍위병에게 털렸다는 건 이때 얼마나 나라의 기본틀이 무시당했는지 보여준다.
한편으로 무소불위의 권력을 누리게 된 홍위병들은 애초에 출신에 따라 보수파와 조반파로 나뉘어 있었고 원래부터 통일된 조직의 지휘를 받는 게 아니라 각 지방에서 자생적으로 생긴 조직인지라 한 지방이나 학교에도 여러 홍위병 분파가 존재했고 홍위병의 각 병단들은 자신들이 더 혁명적으로 옳다면서 키배라고 쓰고 온갖 병림픽을 벌였으며 급기야 중화기로 무장하고 서로 전쟁을 치렀다. 그리고 참다 못한 인민해방군이 출동해서 홍위병을 가리지 않고 때려잡기도 했다. 결국 1968년이 되자, 이제 더 이상 마오를 위협할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무소불위의 권력을 가진 마오는 결국 신격화되는 경지에 이르렀고, 이제 자신이 완전히 끝났음을 직감한 류사오치는 시골에 내려가 일개 농민으로 살게 해달라고 간청했지만 마오쩌둥은 이를 씹었다. 결국 그는 중병에 시달리고 있었음에도 방치되다가 사망했다. 이렇게 되자, 마오쩌둥 입장에서도 다시금 질서를 잡을 필요가 생겼다. 이 이상 홍위병이 날뛰는 것을 내버려두면, 마오의 권력까지 무너질 우려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결국, 마오는 다시 인민해방군이 홍위병보다 우위라고 선언을 하고, 홍위병들을 진압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홍위병을 하던 젊은이들은 소위 상산하향(上山下鄕) 운동으로 농촌으로 내려 보내서 홍위병들을 사실상 해체했다. 모토는 마오이즘의 핵심인 하방(下放) 활동이었다.
마르크스/레닌주의와 다르게 마오이즘은 도시 노동자가 아닌 농민을 혁명의 역량으로 파악했고, 이들 사이에서 전위대를 조직해서 도시를 포위한다는 것이 주요 전략이었다. 그래서 마오가 "니들 도시에선 혁명을 많이 했으니까, 이제 내려가서 농민들과 더불어 노동하면서 거기서도 혁명을 완성해야지?"라고 하니까, 순진한 홍위병들은 우루루 낚였다. 마오에게 실컷 이용당하고도 좋다고 농촌으로 추방당한 이들은 70년대 후반이 되어 마오쩌둥이 죽은 뒤에야, 다시 도시로 돌아와도 된다는 허락을 받았다. 어쨌든 이들이 도시에서 깽판을 치고 다니면서 중국의 경제성장률을 마이너스로 만들며 대만이 중국의 경제력을 따라잡게 공헌(?)한 것과는 다르게[36] 농촌에서 일하면서 문맹퇴치나 농업생산 증대에는 큰 역할을 담당했기에 농촌의 근대화가 어느 정도 진행되었다는 긍정적 효과가 있기는 했다.
4.1. 2인자가 된 린뱌오와 몰락[편집]
마오의 강력한 경쟁자였던 류사오치와 덩샤오핑이 각각 가택연금과 트랙터 노동자 신세가 되어버려 정계에서 사라져 버리고 난 뒤, 고령의 마오에게 후계문제가 화두로 떠올랐다. 마오는 자신의 최측근이자 문혁(文革)의 일등공신인 린뱌오를 사실상 후계자로 내정했다. 참고로 린뱌오의 공식 칭호는 마오의 충실한 전우였다.
마오는 린뱌오를 크게 신뢰했고, 모든 공식 행사에서 ‘마오 주석과 린 부주석’이란 식으로 호칭되었다. 사실 그럴 만도 한 게, 1962년, 중국-인도 국경분쟁 때 인도군을 물리친 공을 세운 데다, 마오의 충실한 사냥개가 되어 동네북 류사오치를 마구 물어뜯었기 때문이다.
린뱌오의 위상은 1969년 제9차 중국 공산당 중앙위원회에서 그대로 드러났다. 새로 구성된 정치국 상무위원에서, 린뱌오는 마오에 이어 제2인자 자리를 차지했다. 저우언라이는 4위로 밀려나 더 이상 린뱌오의 적수가 되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정치국 상무위원은 서열 순서에 따라 마오쩌둥, 린뱌오, 천보다, 저우언라이, 캉성 순이었다. 저우언라이는 천보다보다도 서열이 밀리는 굴욕을 당했다. 바야흐로 린뱌오의 시대였다. 하지만 린뱌오는 좀 더 확실한 미래 권력의 발판을 얻고 싶어 했다. 그래서 류사오치가 실각한 뒤, 폐지된 국가주석직의 복원을 추진했다. 마오를 국가주석에 앉히고 린뱌오가 국가부주석에 앉으면, 마오 사후에 자동적으로 린뱌오가 국가주석직을 승계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1969년 중국-소련 국경분쟁에서 린뱌오는 강경한 저항론을 주장하다가 마오쩌둥과 충돌했다. 소련이 핵공격까지 시사하자 엄청난 충격을 받은 마오쩌둥은 소련을 막기 위해 미국과 손잡아야 한다고 주장했고 예젠잉, 쉬샹첸, 녜룽전 등 원수들도 대부분 동의했지만 린뱌오는 인민해방군만으로 충분히 소련과 미국을 동시에 막을 수 있다면서 수정주의자를 막기 위해 제국주의자와 손잡을 수 없다고 반발했지만 마오쩌둥은 린뱌오를 정신 나간 대국 쇼비니스트라고 면박주면서 그를 데탕트 문제에서 배제하고 저우언라이, 예젠잉 등을 앞세워 헨리 키신저와 접촉했다.
위신에 타격을 입은 린뱌오는 천보다와 손을 잡고 자신의 지위를 다시 회복 하려고 시도했다. 그리고 1970년 8월 23일, 려산에서 열린 중국공산당 제9기 중앙위원회 제2차 전원회의에서, 천보다가 총대를 메고 국가주석직의 복원을 제안하는 발언을 했다. 그러나 마오는 천보다의 발언을 비난하면서 그를 정치국 상무위원에서 해임시켜 버렸다. 마오는 국가주석직 복원을 린뱌오가 자신의 권력을 찬탈하려는 시도로 생각했다. 사실 이런 의심에는 린뱌오의 실수도 불을 붙였다. 천보다의 발언이 비난받았음에도 린뱌오는 마오에게 승진시켜 달라고 징징댔기 때문. 결국 국가주석직 복원 시도가 무산되고 린뱌오는 무력감을 느꼈다. 린뱌오를 의심하기 시작한 마오는 린뱌오의 권력과 당내 영향력을 점점 줄이며 견제하기 시작했다.
이러자 초조해지기 시작한 린뱌오와 그의 측근들은, 결국 아직 남아있는 군권을 이용해 마오를 축출, 제거하기로 결정한다. 린뱌오의 아들인 린리궈가 린뱌오를 지지하는 군내 세력들과 함께 꾸민, 소위 571 공정이라 알려진 이 음모는, 마오를 제거하고 공군 폭격과 병력을 동원해 권력을 장악한다는 내용이었다. 다만, 571 공정에 린뱌오가 얼마나 개입했는가에 대해선 논란이 있다. 린뱌오가 직접 지휘했다는 말이 있는가 하면, 린뱌오보다는 아들 린리궈가 더 주도적이었다는 말도 있다. 자료가 불확실하기 때문에 정확하게 알 수는 없다.
정확하지는 않지만, 이 음모는 1971년 9월 8일부터 9월 10일 사이에 일어난 것으로 보인다. 이때 마오는 중국 남부를 기차로 순시 중이었는데, 일설에는 마오가 기차를 타고 가다가 습격을 당했다고도 하며, 또 다른 설에는 마오를 암살할 것이라는 음모가 있다는 첩보가 입수되어, 마오가 일정을 바꿔 암살을 피했다고도 한다. 어쨌든 이 시점에 음모가 있었던 것은 분명해 보이고, 어떤 시도였든 간에 결국 실패했다.
일이 틀어지자 린뱌오는 아들 린리궈와 가족들, 측근들과 함께 비행기를 타고 소련으로 망명하려 했다. 그러나 린뱌오 일행이 탄 비행기는 소련까지 가지 못하고, 몽골 상공에서 추락했다. 이를 9.13 사건이라고 한다. 린뱌오 일행이 탄 비행기의 추락원인도 불분명한데, 중국군이 미사일로 격추했다는 설과, 연료부족 혹은 기기불량으로 추락했다는 설이 분분하다.
린뱌오가 탄 비행기는 총알이 뚫지 못하는 특전비행기라서 아주 강한 미사일로 격추시켰다는 소문도 있으나, 물론 말이 안 된다. 비행기는 전차가 아니고, A-10 공격기처럼 장갑을 미친 듯이 두른 비행기마저도 기체에 구멍이 뻥뻥 나도 좀 더 오래 날 수 있는 정도지 총알 튕겨내는 게 아니다. 물론, 튼튼하게 만들면 보병용 소총 총알이야 튕겨내겠지만, 비행기에 그딴 장갑은 쓸 데가 없다. 미사일도 규격화되어 생산되는 물품이지, 아주 강한 미사일을 따로 순식간에 뚝딱 제조해서 쓴다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격추설 외의 정설은 린뱌오 일행이 하도 급하게 달아나느라 연료도 채우지 못하고 출발했기 때문에 연료 부족으로 중도에 추락했다는 것이었으나 2016년 해금된 몽골 기밀문서에 따르면 조종사의 실수였다고 한다. 기사
4.2. 4인방의 등장과 몰락[편집]
린뱌오가 사라진 뒤 마오의 후계자가 공석이 되면서, 마오는 앞날에 대해 크게 걱정하기 시작했다. 그런 가운데 딱히 후보자가 없자, 마오는 상하이의 당 간부였던 왕훙원을 중용하기 시작했다. 1972년, 중앙 정계로 진출한 왕훙원은 마오의 후광을 등에 업고, 1973년에는 공산당 부주석의 자리에까지 올랐고, 차기 후계자로 급부상해 나아갔다.
그런데 1973년, 저우언라이가 마오쩌둥에게 건의해 덩샤오핑이 다시 정계로 돌아왔다. 일각에선 저우언라이가 왕훙원을 견제하기 위해 덩샤오핑을 불러들였다고 보기도 한다. 덩샤오핑은 부총리직에 올라 정부 행정을 관장해 나아갔다.
이렇게 되자 문혁을 주도했던 장칭과 그녀의 추종자이자 선동 전문가인 장춘차오와 야오원위안, 그리고 왕훙원이 뭉쳐서 대놓고 저우언라이와 덩샤오핑의 안티임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이렇게 뭉친 넷을 바로 4인방이라 한다. 이들은 언론을 장악하고 저우언라이와 덩샤오핑의 경제 정책을 비난했다.
1973년 말, 4인방은 뜬금없이 비림비공운동을 전개해 나아갔다. 비림(批林)은 린뱌오[林彪] 안티, 비공(批孔)은 공자 안티라는 의미로, 중국에서 유교 문화를 일소하고 린뱌오의 역적 행위를 규탄하자는 내용이었지만, 사실상 이 운동이 겨냥한 것은 저우언라이였다. 마오가 사망한다면 후계자가 공식적으로 천명되지 않는 이상 저우언라이가 그 뒤를 물려받을 것이고, 저우언라이는 덩샤오핑에게 권력을 승계할 것이 불 보듯 뻔하다는 것이 이들의 판단이었다.
그러나 이들의 저우언라이 안티는 실효를 거두지 못했다. 대중들은 4인방의 안티 운동에 질렸고, 이들의 행동을 쓸데없는 것으로 여겨 관심을 가지지도 않았다. 게다가 대중들의 저우언라이에 대한 지지가 확고했기 때문에 실효가 없을 수밖에 없기도 했다. 그러자 이들은 목표를 바꿔 덩샤오핑을 공격했다. 덩샤오핑은 실용적 경제 정책의 추진으로 점점 영향력이 높아지고 있었다. 덩샤오핑을 공격한 것은 효과를 거두어서, 마오는 덩샤오핑의 정책을 "우파의 복권정책"으로 판단했고, 1975년 12월, 덩샤오핑에게 자아 비판서를 쓰도록 지시했다.
1976년 1월 8일, 저우언라이가 방광암으로 사망했다. 그는 대중들에게 확고한 지지를 받고 있었기 때문에 그에 대한 추모 열기는 뜨거웠다. 4인방은 자칫 저우언라이 추모 열기가 정치적인 폭풍으로 번질까 우려했다. 그래서 이들은 되도록 저우언라이 추모 열기를 끌어내리려고 안간힘을 썼다.
2월이 되자 4인방은 최후로 남은 정적 덩샤오핑을 끌어내리기 위해 애썼다. 그러나 4인방의 기대와는 달리 말년에 정신이 돌아왔던지, 마오는 4인방에게 권력을 주지 않고 그때까지 전혀 알려지지 않았던 화궈펑을 총리로 임명했다. 3월 말이 되자 중국 인민들은 천안문 광장에 모여 저우언라이를 추모했다. 4월 5일이 청명절(淸明節)이었기 때문에 이를 위한 것이었다.
저우언라이 추모는 곧 4인방에 대한, 더 나아가 문화대혁명, 마오쩌둥에 대한 비판과 성토로 이어졌다. 4월 5일이 되자 수십만의 군중들이 모여 4인방을 비난하는 집회를 열었다. 이 집회가 1차 천안문 사태이다. 4인방은 공안을 동원해 이들을 강제해산시키고, 미디어를 동원해 이 집회를 우파분자들의 책동이라고 선전하면서 그 배후가 덩샤오핑이라고 몰아갔다. 결국 4월 6일, 중앙위원회에서 4인방은 덩샤오핑을 성토했고, 덩샤오핑은 실각한 뒤 가택연금되었다. 이제 4인방이 모든 걸 장악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4인방의 천하는 오래 가지 못했다. 1976년 9월 9일, 마오쩌둥이 사망했다. 전 중국은 추모 열기에 휩싸였고, 공공기관은 1주일 넘게 문을 닫았다. 사망 직전에 마오는 화궈펑에게 "당신이 맡는다면 안심이다."(혹은 당신이 맡고 있으니 나의 마음이 편하오)[37] 라는 메모를 남겼다고 한다. 이게 사실이라면 사실상 마오가 화궈펑을 후계자로 지명했다는 의미다. 하지만 4인방은 화궈펑에겐 정치적 야심이 없고 기술이 부족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그러나 마오쩌둥이 사망하자 화궈펑은 4인방에게 제대로 뒤통수를 날렸다. 그는 실각했지만 영향력이 있던 덩샤오핑과 인민해방군의 지지를 받아, 10월 10일에 4인방을 전원 체포했고 이로써 문화대혁명은 막을 내리게 되었다.
5. 문화대혁명의 내용[편집]
대약진 운동에 이은 2단 콤보 크리티컬 히트로 중국을 혼란에 빠트렸다. 사람과 사람 사이는 서로에 대한 불신으로 점철되었고, 심지어 가족 간에도 서로를 믿을 수 없었다. 개인의 인권 같은 건 안중에도 없었다. 아버지가 마오쩌둥에 대해 아주 약간의 불만을 혼잣말로 중얼거리면 아들이 그것을 공산당에 보고하고, 홍위병들이 와서 아버지를 타도하는 식의 일이 비일비재했기 때문.
타도(打倒)란 말 그대로 때려눕힌다는 의미인데, 그냥 때려눕히는 게 아니라 이상한 모자[38] 에 '더러운 자본주의의 개' 따위의 글을 적어서 씌우고 사람들이 많은 광장에 결박해 놓은 다음, 묶인 사람을 사람들이 와서 한 번씩 강렬하게 비판한 뒤 구타를 가하고, 외양간이나 화장실 같은 곳에 가두는 것을 말한다.
당해본 사람들의 증언에 따르면, 평소 친분이 있거나 모르는 사람들에게서 언어와 신체폭력을 집단으로 겪고 나면 정신적으로 크나큰 상처를 입고 충격에서 헤어 나오기 힘들다. 피해자 중 자신은 아무런 잘못이 없다는 걸 증명하기 위해, 혹은 이런 끔찍한 세상에서 살고 싶지 않아서 자살하는 경우도 많았다. 아예 미쳐버린 사람도 부지기수. 한 예로, 소설 《낙타상자》를 발표하여 마오쩌둥으로부터 '인민 예술가'라는 찬사를 받았던 소설가 라오서는 그가 런던 대학교에서 일했었단 이유로 반동으로 몰린 후 공묘로 끌려가서 베이징 제8중학교에서 몰려나온 여중생 홍위병들에게 놋쇠 버클이 달린 혁대로 수없이 구타를 당하고 굴욕적인 사진이 찍히자 정신적인 충격과 분노로 인해 자신이 어릴 적 살던 집 근처의 연못에 투신자살했다고 한다.
또한 그런 피해자 대부분은 원래 고위급 직책을 가지거나, 권위 있는 지식인 등 중국 사회의 엘리트들이었다. 정신이 멀쩡한 엘리트들이 그렇게 미쳐나가고 죽어가며 투옥되었기 때문에 중국 사회의 수없이 많은 인재가 사라져 버렸다. 더욱 더 끔찍한 사실은 마오쩌둥이 "자살은 인민으로부터 자신을 분리하는 행위다." 라고 한 까닭에, 자살할 경우 그 사람은 장례식조차 공개적으로 치르지 못하고 쓸쓸하게 화장해야 했다는 점이다.
그리고 영국, 인도 등 일부 국가의 외교 공관들도 '반제국주의' 공격의 대상이 되었다. 대사관을 불태우고 직원들을 끌고 다니며 두들겨팬 것. 서방 대사관은 말할 것도 없고 소련 대사관도 수정주의자 소굴이라고 포위를 당했고 인도네시아나 케냐, 몽골 대사관도 공격의 표적이 되었다. 홍위병의 이러한 외교공관 공격 중에서 가장 스케일이 컸던 것이 1967년 주중 영국 대표부 점령 사건이었는데 홍콩의 67폭동을 홍콩 당국이 무력으로 진압하자 홍위병들이 흥분하여 영국 대표부를 점령, 대표부 직원들을 억류하여 폭행한 사건이다. 이로 인해 외교 문제가 발생했고, 나중에 심각한 국제적 고립에 몰려 혁명외교를 철회한 마오쩌둥은 방중(訪中)한 북한의 오진우에게 다음과 같이 발언했다: "어떤 이들은 기회에 편승하여 소위 조반(造反)을 시도했다. 베이징에 있는 영국대표부를 불사르고 (중략) 그런 사람들이 바로 국민당이다."[39]
극단적으로 문화대혁명에 앞장섰던 집단인 홍위병이 득세했는데, 이들은 대개 10~20대의 학생들이었다. 공통된 특징은 녹색 인민복과 모자, 무장 벨트, 마오쩌둥 어록을 착용한 채, 사람들에게 마구잡이로 죄명을 씌워서 때리고 부수고 빼앗는 것. 중국의 청소년 대부분이 홍위병에 가담했기 때문에 문화대혁명에 대한 소회는 각각 다르다. 어떤 사람은 이 시기를 그리워하는 사람도 있고, 어떤 사람은 재빨리 개념을 찾고 새 시대를 준비하다가, 개혁개방이 시행된 이후 외국에 나가서 성공한 사람도 있다. 따라서 간간이 반성을 하거나, 사과 글을 내는 홍위병들도 있긴 하다. 문화대혁명 관련 다큐멘터리를 보면 알 수 있다.
홍위병 대다수는 꿈에서 깨지 못해서, 나중에 마오쩌둥이 농촌에서 노동하며 배우자는 "상산하향(上山下鄕) 운동"을 제창하자, 그에 따라 모조리 시골로 내려갔고, 1980년대까지 그곳에서 사실상의 굴라그 생활을 하면서 인생이 사그라졌다.
사실 홍위병들의 입장에서는 그 당시가 자신들의 인생에서 가장 빛났던 시기였다. 홍위병 중 초기 보수파들은 제대로 교육을 받은 집단이었지만, 후기의 조반파(造反派)들은 대부분 못 배우고 가난한 계층이 대부분이었고, 그런 사람들에게 있어 문화대혁명은 자신들이 자산가와 지식인들의 위에 설 수 있었던 유일한 시기였던 셈. 그들은 실제로 평소 높은 위치에 있던 이들을 끌어내려 두들겨 패고 그들이 향유할 수 없던 예술과 문화, 유적들을 파괴함으로써 본인들이 기존의 권위를 타파하고 만인이 평등한 사회를 향해 나아가고 있다 믿었다.
하지만 홍위병들의 준동으로 만들어진 사회는 모두가 못 살고 모두가 못 배운 퇴보한 평등의 사회라는 점이 문제였다. 즉, 사회 전체가 다같이 추락한 것이다.[40] 자세한 내용은 본문 뒷부분의 "문화대혁명, 또 다른 기억"에 나온다.
게다가 홍위병들이 무슨 고대, 중세 시대에 농경민족 침략해서 교회나 절을 불태우면서 좋아하는 타민족 야만인들도 아니고, 자기들 문화재와 지식인, 전통문화를 다 부수고, 향촌 공동체나 사회는 물론 심하면 자기들 가족도 말아먹고는 그때가 자기들 인생에서 가장 빛났던 시기라고 회상한다는 것부터가 심각한 문제이다. 또, 권위타파와 만인평등이라지만, 문화대혁명 이후로 중국이 이 "모두가 평등해진" 상황을 어떻게든 벗어나려고 엘리트 계층을 재건하는 데 진땀을 뺐고 그 결과 현대 중국이 다시 "불평등"해졌으며, 그리고 현재 중국 공산당의 일당독재가 지속되는 중국에서 과연 권위주의가 타파되었는가를 생각해보면 그 "평등"도 허울뿐이라는 의견도 있다. 거기에다가 개혁개방 이후로 배금주의가 판을 치면서 다른 의미로 도덕관념을 상실했다는 의견도 있을 지경이다.
중국에서 부정적 의미로든 긍정적 의미로든 봉건적 잔재는 문화대혁명으로 완전히 사라졌다. 수천 년을 내려오던 향촌의 유교적 질서도 완전히 뿌리뽑혔다. 한국인이나 일본인들이 예절을 중시하는 것을 본 중국인들이 놀라면서도 부러워하는 이유도, 문화대혁명 시절에 이런 것들이 완전히 사라졌기 때문이다.
현재 중국에서는, 문화대혁명의 주요 책임을 마오쩌둥의 아내 장칭이 주축이 된 4인방과 린뱌오에게 떠넘기고 있다. 문화대혁명을 시작한 마오쩌둥도 책임이 크지만, "음모를 꾸민 반혁명분자들에게 이용당했다"는 게 대체적인 공식 결론이다. 중국 공산당에게 있어 근현대 중국의 아버지라고도 할 수 있는 마오쩌둥을 자신들의 입으로 직접 공격하여 현재 공산당의 집권 정당성마저 버릴 수는 없기 때문이다.
당시 마오쩌둥은 대약진 운동의 실패로 인해 권력 일선에서 퇴진했으나, 그 뒤를 이은 류사오치 등의 실용주의 정치가들이 실권을 잡고 예전 자신의 과오를 수정하는 모습에서 권력에서 소외되었다는 느낌을 받고 심한 분노와 권력욕을 느꼈다. 이에 아직 자신에게 남은 정치적 카리스마를 악용하여 정, 관, 군부의 권력 중심에 있는 이들을 숙청하고 권좌를 재확립하고자, 홍위병으로 대표되는 선동된 군중과 4인방, 린뱌오 등을 이용해 자신이 세운 국가를 자기 손으로 망가뜨린 것이다. 그러나 4인방을 숙청한 덩샤오핑 등은 마오쩌둥의 권위를 등에 업고 세력을 유지하기를 원했으며, 군중의 비난도 피하고자 죄과를 은근슬쩍 4인방에게만 물었다.
덩샤오핑 이후 중국 공산당 수뇌부를 비롯한 중국의 엘리트 중 이공계(理工界) 출신이 많은 것도 문화대혁명의 영향이 지대하다. 문화대혁명 때 인문계 및 사회과학계에 대한 공격이 너무 크다 보니, 상대적으로 깔 거리가 적은 자연과학 및 공학 계열로 인재들이 몰렸던 것. 물론 문화대혁명 당시 이과 인재들도 고생했지만 문과 인재들에 비하면 그나마 나은 수준이었다. 실제로 중국 공산당의 유력 파벌 중 중국 공산주의청년단(中国共产主义青年团)의 경우, 해외 유학 경험이 있는 이공계 인재들이 상당 부분을 차지한다. 중국의 인문학/사회과학은 이 때 피해를 너무 크게 입은 데다 이후에도 중국 정부의 검열로 인해 발전 속도가 느리다. 때문에 같은 중화권인 홍콩이나 타이완의 학계가 더 높이 평가를 받는다는 말이 나올 지경. 물론 상대적이 아닌 절대적으로 보면 문화대혁명 때 마오쩌둥이 경쟁은 엘리트들의 전유물이라고 시험을 제거하고 추천을 통해서 대학에 입학시켰기 때문에 이공계도 망하긴 했었다.[41]
게다가 그나마 문화대혁명이 10여년 만에 마오쩌둥 본인의 죽음과 함께 끝나서 망정이지 만일 문화대혁명이 그 이상으로 길게 이어졌다면 역으로 마오쩌둥 본인의 역사적 평가에도 악영향을 줄 수 있는 일이었다. 문화대혁명이 끝나고 덩샤오핑이 집권한 직후 과거 마오쩌둥의 치적을 평가하면서 "마오쩌둥 주석은 공칠과삼(功七過三)의 지도자였다"라고 의외로 조금이나마 치켜세워준 결정적인 이유가 마오쩌둥이 비록 문화대혁명이라는 대재앙을 야기하기는 했으나 적어도 그 이전에는 각 지역 군벌들의 전횡으로 사분오열 되어가던 중국 대륙에서 군벌주의를 청산하고 중국공산당 하의 단일정부를 성공적으로 출범시켰다는 점이었는데, 그나마도 문화대혁명 후기로 가면 각 지역의 홍위병 수장들이 국가정부의 통제를 벗어나 군벌화 되는 양상을 보여주고 있었다. 이런 점으로 보면 마오쩌둥 본인이 비교적 일찍 죽어서 망정이지 만약에 마오쩌둥이 계속 장수하는 바람에 문화대혁명이 끝없이 이어졌다면 중국 각 지역에 홍위병 출신 군벌들이 할거했을지도 모르는 일이고, 그랬다면 사태가 어떻게든 일부 수습된 이후 마오쩌둥에 대한 현대 중국인들의 평가 역시 그냥 천하의 개쌍놈 정도로 떨어졌을 것이다. 비록 모택동때문에 죽을뻔한 등소평이였지만 꽤나 정치적인 안목이 뛰어나다.
6. 학살[편집]
문화대혁명 10년 동안 중국에서는 최소 수십만 명, 최대 2천만 명에 달하는 엄청난 사람들이 희생당했는데, 학살에 가담한 사람들은 '반동분자'로 지목된 사람들에게 무자비한 구타와 채찍질, 총살, 교살, 칼로 찌르기, 절벽에서 떨어뜨리기, 생매장, 투석형, 익수, 참수, 다이너마이트에 묶은 후 폭파하기, 삶아 죽이기 등 다양한 방법들을 동원해 처형했으며, 여성들은 끔찍한 성고문을 당한 뒤에 처형되었다.[42][43][44][45] 또한 문화대혁명의 홍위병 하면 흔히 죽창이나 식칼 같은 것들을 생각하는데, 나중에는 홍위병들이 필요 없어진 마오쩌뚱이 의도적으로 이들간에 충성경쟁을 시키고 분열과 이간질을 부추겨 내전이 발발, 제각각 분열된 홍위병 파벌들이 각자 무기고를 털어 박격포와 고사포,장갑차까지도 등원해 중국 대도시 곳곳에서 시가전을 벌였다.호머 심슨: 헤헤헤. 이 사람 좀 봐. 마치 5000만 명을 죽인 작은 천사 같잖아. 그렇지? 당신 맞지?
심슨 가족 시즌 16에서 마오쩌둥의 방부처리된 시체를 보고 호머가 한 말.
- 문화대혁명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는 베이징 8월 폭풍 사건이 일어날 동안 베이징: 1966년 8월 18일부터 9월까지 10,275명이 사망했다. 특히 다싱구에서는 1966년 8월 27일부터 9월 1일까지 단 5일 동안 생후 38일밖에 안 된 아기와 80세 노인까지 포함해 공식 통계로만 325명이 살해당했다. 특히 8월 31일 단 하루 동안 100명 이상이 사망했고, 심지어 힘없는 노약자들과 어린이들이 가장 잔혹하게 살해되었다.[46] 게다가 홍위병들은 희생자들의 피로 문화대혁명을 찬양하는 문구를 벽에다 쓰는(!!!) 극악무도한 악행까지 저질렀다.[47][48][49]
- 후난성의 다오현: 1967년 8월 13일부터 10월 17일까지 총 4,519명이 살해당하거나 강제적으로 자살했다. 당시 학살에 가담한 사람들은 죽일 사람의 자식들에게 '부모님이 많이 아프니 가능한 한 빨리 와라'는 거짓 전보를 보낸 후 이 자식들이 오면 바로 가족들을 몰살했으며, 심지어는 태어난 지 10일(!!)밖에 안 된 신생아까지 "복수를 방지한다."는 명목으로 살해당했다. 그런데도 다오현에서는 문화대혁명이 끝난 후에 학살에 가담한 수천 명이 넘는 사람들 중 단 11명만이 징역 3~10년형이라는 솜방망이 처벌을 받아 마을 주민들이 항의하여 직접 베이징을 방문하는 일까지 있었다.[50][51]
- 후난성의 사오양현: 다오현의 학살의 영향을 받아 1968년 7월부터 9월까지 약 1,700명이 자살을 강요받거나 살해당했는데, 얼마나 많은 시체들이 강에 버려졌는지 시신들이 지역 정수장 내부의 수도 펌프를 막는 경우까지 생겨 주민들이 반년 동안 수돗물을 마시는 것을 거부할 정도였다. 게다가 후반부로 갈수록 학살은 그동안 쓰던 살해 방식이 "더 이상 살인자들에게 쾌감을 줄 수 없다." 는 이유로 더욱 끔찍해져만 갔다.[52]
- 장시성의 루이진시: 1968년 9월 23일부터 10월 초까지 "반역자를 찾는다."는 명목으로 문화대혁명 당시 통계로만 991명이 목숨을 잃었다.(강제적으로 자살한 699명 포함)[53]
- 광시 좡족 자치구: 문화대혁명 기간 동안 10만~15만 명의 사람들이 학살당했고, 한 가족의 아버지와 딸을 살해한 후 그 희생자의 아내와 딸을 강제로 자신의 아내로 취하기도 했으며, 심지어는 최소 137명이 식인 광풍의 피해자가 되었다. 참고로 식인 가해자 80%는 공산당의 간부였기 때문에, 이 식인은 민중들이 혼란상 속에서 벌인 것이 아닌, 중국 공산당이 조직적으로 실시한 것으로 여겨진다.[54][55]
Song Yongyi: Guangxi의 정부 기밀 문서에 따르면, 그 기간 동안 150,000명이 비자연적 원인으로 사망했습니다. 그 중 30,000명은 식별 가능한 신원이나 성별조차 없었습니다. 그들 중 95 %는 완전히 살해되거나 고문이나 학대의 결과로 사망했습니다. 무력 충돌로 사망한 사람은 5% 미만이었습니다. 또 다른 30,000명은 실종된 것으로 기록되었습니다.
RFA: 당신은 당신의 책에서 식인 풍습을 언급합니다.
Song Yongyi: 그 부자연스러운 죽음 중 많은 사람들이 혁명 대중에게 먹혔습니다. 광시의 독립 연구원들은 한 현에서 총 421명이 먹힌 것으로 집계했습니다. 광시의 27개 현에서 식인 풍습에 대한 보고가 있었습니다 . 이는 광시시 현 전체의 3분의 2에 해당합니다.
이른바 흑오류라고 불리는 한 남자는 그 자리에서 맞아 죽었습니다. 그에게는 11세와 14세의 자식이 있었습니다. 현지 관리들과 민병대들은 그런 사람들을 근절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두 아이를 죽였을 뿐만 아니라 먹었습니다. 광시성 푸베이현에서는 35명이 숨지고 먹혔습니다. Liu Zhengjian이라는 사람은 가족이 완전이 몰살됐습니다. 그의 17세 딸 Liu Xiulan는 9명에게 집단 성폭행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사람들은 그녀의 배를 찢고 그녀의 간과 가슴을 먹었습니다. 이런 사건들이 매우 많았습니다.
RFA: 왜 그런 일이 일어났다고 생각합니까?
Song Yongyi: 문화대혁명 때 이 정치운동은 기본적으로 법이 없었고 정치인들이 선동해서 서로 죽이고 있었습니다. 사람과 짐승의 경계가 점점 흐려지고 그 경계를 넘는 것이 매우 쉬워졌습니다. 지주에 대항하여 '투쟁'하고 사람을 죽이는 것은 정상이었습니다. 그 당시 모든 곳에서 일어났고, 군부, 당 간부, 민병대는 모두 토지 개혁 군중의 일부였습니다. 이런 일이 전국적으로 일어나고 있어서 식인 풍습이 광시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56]
- 내몽골 자치구: 1967년부터 1969년까지 1946년에 해산된 내몽골인민혁명당(PRP)에 협조한 것으로 몰려 약 35만 명이 구금되고 2만 8천 명이 살해당했다. 당시 내몽골 자치구에서는 글을 읽을 수 있는 사람들은 거의 살아남지 못했으며, 50종류 이상의 고문이 동원된 참상들은 "악몽에 시달릴 것 같을 정도로 끔찍하기 그지없었다." 고 전해진다.[57][58] 내몽골 인민혁명당 숙청 사건 항목 참조.
7. 문화에 끼친 악영향[편집]
자세한 내용은 문화대혁명/악영향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문혁으로 가장 피해를 많이 입은 부문은 단연 중국의 문화였다. 따라서 내용이 길기 때문에 하위 문서로 분리해 기술하였다.
8. 해외의 반응[편집]
바로 바다 건너 중화민국의 경우는 경악 그 자체였다. 중화문명의 계승자를 자처하며 전통과 문화를 강조하던 중화민국은 본토에서 중국 문명의 진수인 각종 문화재와 중국 사상 그 자체이자 거인 중의 거인인 공자 묘까지 때려부수는 대참상에 멘탈이 붕괴했다. 대만에서라도 중국문명을 사수해야 한다는 위기감이 고조되어 1966년, 쑨원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여 중화문명부흥운동을 거국적으로 시행하였다. 이는 중화문명을 수호하자는 민족적 결의와 더불어, 중화문명을 파괴하는 중공은 적법한 중화문명의 계승자가 아님을 주장하는 프로파간다로도 활용되었다.
같은 공산권 국가에 유교 문화권이었지만 중국과는 역사적으로 앙숙인 베트남 역시 문화대혁명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을 보였다. 특히 문화대혁명이 일어나던 1960년대 말 당시 베트남의 지도자였던 호찌민은 문혁 시기 중국에 갔다온 외교관들을 통해서 문혁 당시 중국에서 홍위병들이 저지르고 있는 만행을 보고받자 '이런 것은 인민을 위한 사회주의 정치가 아니다'라며 개탄했을 정도였다.[59]
하지만 그 이외의 지역에서는 문혁 당시만 해도 들어오는 정보가 없었기 때문에 유럽권에서는 문혁을 찬양하는 분위기가 지배적이었다.[60] 거기에 발맞추어 일본 신좌파들 중 일부 분파들은 문혁을 대단히 찬양했다.[61] 그러나 1970년대 들어, 보다 자세한 정보가 들어오기 시작하자, 그 뒤로는 이를 찬양하는 사람이 없게 되었다. 그래서 68운동에 영향을 끼치기도 했다.[62] 팔레스타인 해방 인민전선도 게릴라 군대답게 마오주의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이렇게 된 데는 당시 문혁의 기능 중 구습타파와 관료제 비판이라는 기능만 부각되어 선전되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어쨌든 당시 중국은 제3세계의 일원이었고, 그 중에서도 소련과 미국의 패권주의에 대항하는 한 축으로 기능했다. 공산당의 영도가 아닌, 농민을 중심으로 대중과 함께 하는 혁명이라는 캐치프레이즈는 당시 진보적인 지식인들에게 강한 인상을 주었다. 당시는 소련과 코민포름의 패악질에 전 세계가 질려있던 터라, 마오주의와 문화대혁명도 일종의 대안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래서 전공투의 도쿄대 점거 당시, 도쿄대에는 체 게바라와 마오쩌둥의 사진이 동시에 내걸렸고, 68운동 당시 소르본 대학교 정문에도 블라디미르 레닌과 마오쩌둥의 사진이 걸렸다.
비틀즈의 존 레논은 혁명에 대한 회의를 담은 Revolution 1이라는 노래에서 문화대혁명을 직접적으로 비판한 적이 있다. "But if you go carrying pictures of Chairman Mao, You ain't going to make it with anyone anyhow. [한글번역] " 여기서 이 'Chairman Mao'가 바로 마오쩌둥을 가리킨다.
한국에서도 비슷한 일이 있었는데, 리영희의 《전환시대의 논리》나 《8억 인과의 대화》[63] 등을 지금 읽으면, 문혁 찬양 대목에서 정신이 우주로 날아가는 걸 느낄 수 있다. 리영희는 나중에 이를 두고, "당시에는 문혁에 대한 자세한 정황을 알 수 없었다"는 식으로 해명했다. 그러나 당시 한국에서 북한과 중국에 관한 자료를 가장 많이 열람한 사람이 리영희 교수였고, 조선일보 재직 시에도 동북아시아권 전문가로 나름대로 인정을 받던 사람이 바로 리영희였다는 점에서 이는 아쉬운 일이다.[64]
좀 더 개념적으로 이야기를 한다면, 사실 유럽의 모더니즘과 문화대혁명은 사상적으로 뿌리가 같다. 카를 마르크스의 유물사관에 영향을 받은 것으로, 인간은 물질에 지배되는 존재이며, 새로운 문물이 나온 것은 새로운 시대이므로, 그에 맞는 새로운 문화가 있어야 한다는 논리다. 다만 유럽은 과거와 단절하긴 했어도 '파괴'하지는 않았으며, 새로운 문화를 창조했다. 중국은 그저 과거를 파괴하기만 했다. 예를들어 유럽의 신좌파,68세대도 온갖 병크도 많고 과오도 많이 남겼지만 그렇다고 루브르 박물관이나 퀼른 대성당을 불태우지는 않았다. 인간이 사상을 잘못 이해하고, 무분별한 선동을 가려내지 못하면, 어떠한 비극이 발생하는지 잘 보여주는 좋은 예가 되었다. 중국이 문화대혁명의 대혼란 속에서 입은 물질적, 정신적 피해는, 중국의 발전을 수십 년 늦추는 데 일조하였다.
또 이웃 북한은 겉으로는 중국의 문혁을 극좌주의라며 깠지만, 그 아이디어를 사실상 그대로 들여와 북한의 독재 체제를 견고하게 만드는 데 사용했다. 특히 김일성의 뒤를 이어 후계자로 내정된 김정일은 문화 부문의 지도를 시작하면서 정치 경력을 시작할 때, 장칭을 필두로 한 4인방의 문화 정책을 거의 그대로 따라 했고,[65] 거기에 주체사상으로 색을 입혀 독자적인 것처럼 꾸며냈다. 그리고 어느 정도 비판이 진행되어 잘못을 인정하고 고친 중국과 달리, 북한에서는 이것이 현재진행형이고, 지도자의 위대한 업적으로 찬양받고 있다. 현대 중국의 노년층들은 북한을 볼 때마다 문화대혁명의 기억이 떠오른다고 하는데, 1960~70년대에 창작된 북한의 가극들이, 21세기에 와서도 중국에서 순회공연을 벌이며 흥행하고 있는 것도, 이 시대에 대한 추억팔이의 일환이라고 할 수 있다.
9. 문화대혁명에 대한 다른 관점[편집]
물론 문화대혁명은 문화를 분명히 파괴한 전과도 있으며 지식인이 탄압당한 것 역시 맞지만 과연 그것이 문화대파괴니, 학살의 현장이니, 광기의 편장이니로 표현하기에는 문화대혁명의 시기는 길고 또 그 분파가 너무나 다양했다.관료특권계급의 사유화는 그들이 공동집권한 이후 그들 권력의 크기에 따라서 인민의 피와 땀을 강탈하고 공유제 사회의 필요한 생산을 독점하여 특권화하고 그 특권을 자본화하여 착취하는 것이다.
-중략-
"마르크스주의는 교조적인 것도, 정체되어 죽은 것도, 어떠한 불변함의 학설이 아니라 살아있는 행동의 지침이다."(레닌 전집[列宁全集] 17권 25쪽) 따라서 마르크스주의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단순 복술(점치기)가 아니라 행동이다.
中
이 당시에는 수많은 파벌들이 존재했다. 대표적으로 급진적 마오주의자들이였던 상하이 1월 폭풍 사건 등을 이끈 급진적 조반파, 마오쩌둥 그 자체를 숭배하는 성격에 가까웠던 주자파, 마오주의적 농촌체제가 아닌 보다 도시적인 체제를 원하여 조반파와 같이 연합했던 도시 노동자 등 그 파벌은 한 둘이 아니며 이들이 했던 행동, 원했던 방향은 모두 달랐다.
그리고 무엇보다 문화대혁명은 단순히 문화의 파괴만을 말했던 시기가 아니었고 새 문화의 창조의 장이기도 하였다.(물론 이것이 기존 문화가 탄압을 받지 않았다는 뜻이 아니다.) 특히 애니메이션과 리얼리즘 예술이 그 최고봉으로 울안에서 크는 죽순의 경우 중국 최초로 수목화 기법과 컷 아웃 기법을 사용한 애니메이션이였고 낭만주의적 사실주의 작품 또한 천이페이(陈逸飞)와 같은 인물 등을 대표로 발전하였다, 중국의 예술, 문화는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문화대혁명을 빼고는 그 발전사를 논할 수 없을 정도로 중요한 사건이고 갸오샤오화(高小华)의 작품처럼 문혁이 끝난 뒤에도 문혁이 남긴 예술적 영향을 완전히 무시하기 힘들다.
그리고 나아가서 문화대혁명은 거대한 민주주의의 장이기도 하였다. 이는 대약진운동이 스탈린주의적 중앙집권 개발로 변질됨에 따라 농촌은 물론 도시 노동자들이 이건 공산주의가 아니라 그냥 관료들의 자본주의 아닌가?라는 불만이 터저나온 것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즉, 우린 우리 농장, 우리 공장, 우리 마을을 우리 손으로 직접민주주의에 의거해 굴리는게 공산주의고 마오주의라고 배웠는데 니들 하는 꼬라지가 뭐냐?라는 불만심이 결국 대약진 운동으로 터지고 만 것이다.
특히, 문화대혁명 초기[67] 에는 도시 노동자와 농촌에서 상경한 농민들이 반수정주의라는 이름아래 뭉친 조반파가 그 주축이었는데 이들은 마오주의를 지지하면서 마오주의를 배반한 공산당과 마오쩌둥의 부패, 비리, 반민주주의적 관료독재 체제를 비판하며 그들이 독점한 권력을 대중에게 다시 돌려줘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마오쩌둥은 처음에는 이들과 함께 움직이며 무너진 자신의 권리를 되찾을 수 있다고 믿었고 주자파라 불리우는 마오쩌둥 자기 자신을 숭배하는 이들도 키워나가며 조반파를 견제하기 시작하였다.
양시광(楊曦光), 왕시져(王希哲)와 같은 조반파들은 공산당을 자본주의만큼이나 비판하며 민주주의란 대중이 공산당을 통제하여 관료의 대한 임명권, 해임권을 모두 쥘 수 있어야한다.라고 주장하며 진정한 민주주의는 생산수단의 공유화가 필수적으로 이루어저야한다며 관료주의를 격렬하게 비판하였고 천얼진(陈尔晋)의 경우에도 특권론(特权论)과 같은 문건을 작성하며 관료주의를 격렬하게 비판하였다. 즉, 문화대혁명의 가장 격렬한 논쟁점은 문화가 아니라 바로 관료주의와 공산당의 대한 대중의 역할이였다. 그러기 위해서 이들은 대학교육을 특권계급(특히 관료)가 아니라 노동자와 농민 모두에게 풀어야 한다고 주장하며 야학을 보급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노동자, 농민들이 일을 끝내고 충분한 교육을 받을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그 이후로도 사회생활과 전문교육을 합동시켜 학교에서부터 직접민주주의를 체험할 수 있게 만들었다. 대표적으로 교사의 대한 반대권이나 반박권을 학생에게 주어 교사가 절대적 권력을 가질 수 없게 만드는 일이 대표적이였다.
하지만 마오쩌둥과 주자파와 조반파간의 사이는 계속하여 나빠졌으며 상하이 1월 폭풍 사건을 시작으로 둘은 건널 수 없는 강을 건너버렸다. 조반파는 격렬하게 나아가며 아예 파리 코뮌을 토대로 한 상하이 코뮌을 건설하여 중화 최초이자 최후의 직접민주주의 사회를 건설하기 이르렀고 장춘차오와 같은 이들은 이러한 코뮌을 옹호하며 아예 인민해방군은 물론 공산당과 국가 그 자체를 폐지하여 완전한 무국가 무계급 공산주의 사회로 즉각 이행되어야한다고 주장하였다. 허나 마오쩌둥은 자신의 허락없는 중앙과 공산당에 반대되는 지방의 독단적 행태를 비난하며 상하이 코뮌을 강제로 상하이 인민위원회로 만들어 중앙에 복속하게 만들었고 마오쩌둥은 상하이 코뮌을 군사적으로 무너뜨렸고 조반파와 주자파는 전쟁관계에 놓이며 결국에는 주자파가 마오의 후원아래 조반파를 몰아내며 문화대혁명을 이끌었고 이들조차도 결국은 마오쩌둥이 하방시키며 문화대혁명이 끝이 났다.
물론 문화대혁명은 그동안 억압받았던 농민, 노동자들의 불만이 한꺼번에 터저나온 사건이기에 매우 급진적이고 준비되지 못하게 일어났다. 학교의 경우도 그들이 생각한 것과는 다르게 학구열에 불타는 교사와 학생간의 토론을 통한 발전이 아니라 농촌, 공장에서 이렇게 안되던데요?하며 무작정 이거 교육 개떡같이 한다고 하며 교육을 거부하는 일이 터저나왔고 직접민주주의적 원칙에 따라 만들어졌던 인민공사, 지방자치 역시 중앙의 개입과 미숙함으로 인해 어중간하게 이루어지며 이도저도 못한 채 공산당이 접수하는 등 온갖 시행착오와 사건이 터저나왔다. 실제로도 문화대혁명에서의 과장이 심하게 된 비판들 역시 바로 이 시기였다.
결국 문화대혁명은 1차 천안문 항쟁처럼 마오쩌둥이 홍위병을 이용하려함을 깨닫자 그들을 공격하였고 그들의 권위와 관료주의 아래 무너져 중화인민공화국은 그 이후로 계속하여 공산당 관료주의 체제가 이어지게 되는, 문화대혁명은 민주주의의 피눈물 섞인 비극의 장이 되어 끝났다.
이 문화대혁명의 유산은 2차 천안문 항쟁으로 이어지며 그 당시 조반파들이 말했던 대중이 당을 직접 통제하여 비리, 부정 부패를 없애자는 주장이 이어지며 문화대혁명의 유산이 계속해서 이어젔지만 현재 중국에서는 마오주의가 금지가 되었다.[68][69]
10. 이야기[편집]
- 덩샤오핑의 아들이 문화대혁명 당시 덩샤오핑 눈앞에서 창문 밖으로 내던져져서 이에 앙심을 품은 덩샤오핑이 이후에 야심찬 개혁, 개방 정책을 추진하게 되었다는 카더라 통신이 있긴 한데 그의 정책은 그렇게 단순한 동기에서 시작된 게 아니었다. 단, 홍위병들이 덩샤오핑의 장남 덩푸팡을 2층 베란다에서 집어 던지는 바람에 하반신 마비로 장애인이 된 것은 사실이다.[70]
- 영화 《마지막 황제》의 후반부에서 문화대혁명 장면을 볼 수 있다. 만주국 황제에 올라 전범이 된 아이신기오로 푸이는 교도소에서 징역형을 살고 '교화'된 후 사회로 나와 정원사가 되었는데, 거리를 지나가다 만나게 된 반동분자가 바로 그때의 교도소장(실제 인물인 김원은 조선족이었다고 한다)이었던 것. 선통제는 그래도 교도소에서 여러모로 마음 써준 그가 비참한 꼴이 된 것을 불쌍하게 여겼는지 '나쁜 사람이 아니다.'라고 옹호하면서 선처를 호소했지만 결국 외면당한다. 참고로 이 부분은 사실을 각색한 것이다. 푸이가 해당 교도소장인 김원을 변호해 준 것은 사실이나 문화대혁명이 일어날 당시 푸이는 병중에 있었고, 길거리에서 홍위병에게 내쳐진 일도 없었다. 다만, 일부 극단적 홍위병들이 푸이를 두고 "청나라 봉건 왕조에서 인민을 약탈하던 황제"라고 까대는 일은 적잖게 있었다. 그래서 병이 났는데도 병원에서 홍위병의 공격을 염려해 입원을 거부했고, 저우언라이 총리가 직접 신원을 보증해주고 나서야 입원할 수 있었다.
- 여담으로, 국공내전 때 중화민국(대만)이 타이완 섬으로 후퇴할 때, 미국에게 수송선 몇 척을 빌려 북경의 유물 대다수를 가져갔다.[71] 그래서 대만 타이베이의 국립고궁박물원에서는 3개월마다 유물을 순환해서 전시해야하며 해당 박물관이 보유하는 유물을 전부 보려면 6~8년을 기다려야 한다고 한다. 만약 이게 중국에 그대로 있었으면, 그 유물들은 모두 파괴되어 없어졌을 가능성이 높다.[72]
- 게다가 이 당시 문화대혁명으로 엄청난 중국 문화가 파괴된 반면, 대만에서는 '중화문명부흥운동'이라 하여 중국 문화를 연구, 보존하고 발전시키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인 덕에 그 성과 등에 힘입어 스스로를 중국 문명의 종주국이라 자부할 수 있게 되었다. 중국의 국력이 넘사벽으로 커진 현재에도 대만의 이러한 노력과 자부심은 여전히 진행형이다.
- 애꿎게도 개에 불과했던 차우차우도 이때 많이 학살당했다. 또한 다른 개들도 상당수 학살당했는데, 덩치만 크고 먹을 것만 탐낸다고 하여 쓸모없는 개들이라고 하여 덩달아 학살당했다. 우습게도 고양이가 쥐를 잡고 먹을 것도 적게 먹어서 개(다만 군견 같은 개들을 제외)보다 훨씬 쓸모 있다 하여 고양이들이 우대받았다. 물론 중국 황실에서 페키니즈 등의 애견을 호화롭게 기르는 일이 있곤 했던 역사의 영향도 있었을지 모른다.
- 덩샤오핑이 천안문 6.4 항쟁을 무자비하게 진압했던 이유도 문화대혁명의 트라우마에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 이외 4인방의 영어 표기인 갱 오브 포에서 이름을 따온 영국 펑크 밴드가 1970년대에 결성되기도 했다는 설이 있다.
- 삐삐 밴드 1집인 《문화혁명》이 문화대혁명에서 따왔을 거라 추측된다 카더라.
- 21세기에 와서는 중국홍객연맹이 추앙하고 미화하는 역사이기도 하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이는 반정부 행위에 속한다. 물론 중국 정부는 이들의 능력이 아까운지 적당히 눈감아주는 분위기이다.
10.1. 영화[편집]
중국 현대사에서도 중요도가 남다른 사건이고, 아직도 이 사건에 대한 해석이 분분하기 때문에 영화 주제나 소재로도 많이 등장한다.
장국영 주연의 영화 《패왕별희(覇王別姬)》에서는 후반부에 문화혁명을 다루고 있다. 홍위병들에게 붙잡혀서 자아비판을 강요당하는 주인공들의 모습은, 연기를 뛰어넘어 보기에 너무 안타까울 정도.
양가휘, 왕조현, 임정영이 주연한 '천년귀사(鬼幹部)'는 문화대혁명 당시에 악령을 공산당으로 빗대어 만든 작품이고 양가휘는 홍위병으로 출연한 작품이다.[73] 또한 서극 감독과 엄호 감독이 공동연출하고 양가휘가 엄호 감독과 함께 각본을 쓴 영화 '기왕(棋王)'에서도 문화대혁명 당시의 중국 상황이 잠시 등장하며 오프닝에서 마오쩌둥의 얼굴이 그려진 판넬을 부수는 장면이 나온다.[74]
장이머우 감독, 공리와 갈우 주연의 《인생(영화)》이라는 영화는 문혁만이 아니라 일본 침략 때부터 문혁까지 폭넓게 다루고 있기 때문에 중국 근현대사를 한 번에 알아보기 좋은 작품이다. 토법고로, 집단농장으로 대표되는 대약진운동과 홍위병으로 대표되는 문화대혁명과 같은 거대한 사건들을 배경으로 살아가는 가족의 이야기를 다룬다. 직접적으로 마오를 비판하지는 않지만, 시골 촌부의 눈을 통해 바라보는 마오 시대의 굵직한 사건들을 소소한 가족사와 엮어 그려내 문혁을 《패왕별희》만큼 비판적인 시각으로 바라본다.
반면 이들과 다른 시각으로 문혁을 바라보는 영화도 있다. 로그 원: 스타워즈 스토리에서 베이즈 맬버스역을 맡은 장원 감독의 《햇빛 쏟아지던 날들》에서는 성장기[75] 아이의 눈으로 문혁을 바라본다. 위에 언급된 영화들이 홍위병에 의한 무질서에 초점을 맞추었다면, 이 영화에서는 홍위병들이 상산하향한 후 무질서가 사라진 공간[76] 에서 일어난 평범한 일상에 초점을 맞추었다. 어느 쪽이든 문화대혁명이 중국과 중국인들에게 미치는 영향은 현재도 이어지고 있기 때문에 또 다른 영화인이 어떤 다른 시각과 해석을 다룰지도 흥미롭게 지켜볼 만 하다.
삼체에서도 매우 중요한 사건으로 다뤄진다. 문화대혁명으로 예원제가 비극을 겪지 않았다면 삼체인과의 전쟁 역시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11. 한국과 북한[편집]
이 사건으로 대한민국이 큰 이익을 봤다는 학자들도 있다. 류사오치가 중심이 된 실용주의 정책은 외부 자본을 대거 유입하고 내부 경제도 활성화시켜 이제야 겨우 경제 성장에 착수한 상황에서 모든 기회가 중국으로 빨려 들어가 한강의 기적이 좌절될 수 있었는데, 마오쩌둥이 때맞춰 나라의 근간을 무너뜨리고 나라 문을 걸어 잠그는 바람에 그런 사태를 맞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이라는 논리이다.
경제학계에서 "한국은 경제대국으로 가는 막차를 탔다."라는 표현이 있는데 이는 거진 문혁을 빗대어서 하는 말이다. 성장 단계에서 경쟁국가로 중국이라는 괴물을 피했다는 의미이다. 실제로 중국이 경제성장을 본격화한 1980~1990년대 당시, 동남아시아 주요국 역시도 고도 성장을 이어가며 한국의 뒤를 이은 신흥국으로 떠올랐으나 1997년 아시아 경제위기와 더불어 2000년대 이후 벌어진 태국, 필리핀, 인도네시아 등의 '산업 공동화' 현상이 벌어지면서 중진국 함정에 빠진 모습을 보여준다.
물론 이에 대한 반론도 있다. 1960년대는 아직 냉전의 절정기였기에 공산당 체제하의 중국에 대규모의 서방자본이 유입될 가능성은 거의 없었고, 게다가 서방이 중국 "대신" 한국에 투자를 결정할 정도로 한국의 여건이 좋았다거나, 동아시아에 투자처를 찾고 있었다는 전제 자체에도 당시 한국의 발전상황을 보았을 때 무리가 있다. 당시 아시아 투자에 있어 최우선적인 국가는 일본이었으며 그 다음을 보더라도 필리핀이 더욱 지명도가 높았다.
한국에서는 1960년 외자도입촉진법을 공표하는 등 외자를 유치하기 위한 노력이 시작되었으나, 여전히 규제가 심하고 정치적 불안과 외자유치 노력부족으로 1960~1965년까지 단 한건의 외자도 유치하지 못했다. 이후 1966년의 외자도입법을 기점으로 일본과의 국교정상화, 1970년 수출자유지역조치법 등 좀 더 외국 자본 유입을 촉진하려는 노력이 이어졌고, 결국 1970년대 초반에는 외국인 투자가 잠시 증가를 보였으나, 자본의 일본 편중이 심했고 자본이 실제로 정부가 원하는 중공업에 투자되지도 않았던지라 정부가 원하는 산업에 마음대로 투자할 수 있는 해외차관이 훨씬 선호되며 결국 1973년 다시 규제 정책으로 선회하게 된다.
중국의 문화대혁명으로 중국이 모든 면에서 크게 후퇴하여 이로 인해 한국이 경쟁자가 사라져서 한국이 반사이익을 봤다는 주장이라면 일리가 없지는 않겠지만, 한국의 발전이 오로지 중국의 경제적이나 사회적인 후퇴 때문에 가능했다는 주장 자체가 너무 극단적이라고 볼 수 있다.
또한 위에서도 조금 언급했듯 이 문화대혁명으로 인해 '중화 문명'의 유산이 중국 본토보다 한국에서 더 많이 남는 현상이 발생해버렸다. 가령 유교 서적, 의례 등도 중국 본토에 있던 게 워낙 많이 훼손된 바람에 한국 학계의 지원을 받아서 복원하는 형편이다.
한편, 북한의 경우 1966년 9월 15일자 <로동신문>을 통해 이 사건을 '좌파 기회주의'라고 비난하자, 중국 홍위병들은 오히려 분노하며 대자보를 통해 김일성과 그 측근들을 성토했다.[77] 김일성이 이걸 계기로 중소 관계가 나빠진 틈을 이용하는 것까지는 좋았는데, 제대로 된 경제 성장을 통해 소련 입장에서의 대(對)중국 견제에 필요한 기반으로 자신들의 지위를 바꾸고 남한과의 체제 경쟁에서 우위를 유지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미국과의 단독 전면전을 위한 군비증강과 우리민족끼리 산업화라는 어처구니없는 발상을 했고, 여기에 실질적인 전제군주제를 전면 도입하면서 나라 전체를 문혁 시절로 돌려놓았다. 실제로 문혁 시기를 보낸 중국인들은 북한을 보면서 향수를 느낀다고 한다.
문화대혁명으로 중국 영화계와 공연예술계가 쑥대밭이 되어버리는 바람에 1970~80년대에는 북한 영화나 가극이 중국에서 크게 인기를 끌기도 했다. 대표적으로 1970년대 중국에서 크게 히트를 친 혁명가극 《꽃 파는 처녀》가 있다. 영화로 먼저 제작되어 중국 전역을 돌며 상영될 당시 문화대혁명에 지친 중국인들의 문화적 갈증을 풀어주며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는데, 암표가 5~10배 가량 비싼 값으로 거래될 정도였다.
2000년대 이후 북한 예술단이 중국의 극장에서 공연을 할 때 중국인들이 공연을 구경하러 오는 이유가 중국 중, 장년층이 그 당시 중국에서 인기 있던 북한산 공연에 대한 향수가 있으며 당시 중국에서 상영하던 북한 영화, 가극에 등장하던 북한 배우들을 보기 위해 오는 것이다.
12. 문화대혁명의 비극들[편집]
“그 시절에는 나만 그렇게 고통스럽게 산 게 아니라 모든 사람이 다 그랬어. 나는 비참한 축에도 들지 못하지. 감히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얼마나 많은 비극적인 일들이 일어났는데! 문혁을 겪어보지 못한 당신 같은 외국인들은 아무리 많은 책을 읽었다 해도 절대로 알 수 없을 거야. 어떤 위대한 소설가라도 그런 끔찍하고 비극적인 이야기를 상상해서 쓸 수는 없다고. 나는 운이 좋아 94살까지 살아오고 있지만, 다시 그 시절로 돌아가라면 살 수 없을 것 같아. 어떻게 또다시 그런 인생을 견뎌내겠어.”
중국 공산당과 홍위병들 그리고 이들에 선동된 중국 시민들로 인하여 수많은 비극들이 발생했다.#
- 유명 작가 톈한의 아들은 자기 아버지를 ‘개새끼’라고 하며 비판 대자보를 쓰기도 했다.
- 볜중윈 부교장: 자신의 제자인 그 학교 학생 홍위병에게 고문과 구타를 당하다 죽었다. 당시 스승을 죽인 주범이자 당시 그 여학교 홍위병 지도부는 아래 항목, 문화혁명 부역자들 중 한 명이였던 쑹빈빈.
13. 문화대혁명 부역자들[편집]
중국 문화대혁명에 적극 협조한 자들은 ‘35/45세대’였다. 이들은 1935년에서 1945년 사이에 태어난 세대였다.
베이징 홍위병들을 지도한 조반파(造反派)의 5대 리더 중 4명이 35/45세대였다. 5대 영수는 베이징대 강사 녜위안츠(聶元梓·1921년생), 칭화(淸華)대 4학년 콰이다푸(蒯大富·1945년생), 베이징사대 조교 탄허우란(譚厚蘭·1937년생), 베이징항공대 4학년 한아이징(韓愛晶·1945년생), 베이징지질대 석사생 왕다빈(王大賓·1944년생)이였다.[78]
홍위병에 부역하여 대중들을 파멸과 광기로 이끌며 중국 사회를 세뇌시키고 비방하였던 대학생, 지식인들의 일부는 시간이 흐르자 하나둘씩 태세전환하며 오랜기간 자신들의 홍위병 경력과 홍위병 당시 만행들에 대해 침묵한다.
- 쑹빈빈(宋彬彬)[79]
정작 그녀는 개혁개방이 시작되자 우디르급 태세전환을 시전하여 미국으로 유학을 가서 1989년에 MIT에서 공학박사를 받고는 미국 매사추세츠에서 환경 분석관으로 일하다가 2003년에 본토로 돌아와 영국계 기술 개발 회사의 회장이 되는 등 출세가도를 착착 밟아나갔다.[81]
쑹빈빈은 홍위병으로 베이징사범대부속여자중학교의 문화대혁명을 주도하여 1966년 6월 2일 붙은 대자보에 참여했으며, 선생님들을 구타하는 폭력에 대해 수수방관[82] 하였다. 이에 볜중윈 부교장이 고문당하고 이후 몽둥이질에 맞아죽었는데# 이때 거행된 인민재판의 주동자 중 1명[83] 이었고,# 당시 잘못했다고 이후 소극적으로라도 사과를 한 것은 그나마 다행으로 보이지만, 쑹빈빈 역시 집회를 주도하고 군중의 광기를 유도하며 이후 인민재판 거행에도 영향을 끼친 주제에 부교장 살인 사건에 대해서는 자기는 억울하고 조사 결과 자기는 깨끗한 것으로 밝혀졌다고 주장한 것은 사과의 진심을 의심하게 한다.
대혁명 이후 수십년 간 침묵해오다가 2014년 1월 12일 문화대혁명 사과 열풍에 슬쩍 끼어들어서 면피성 사과를 한, 같잖은 사과 뿐이기에, 문화혁명 당시 학생들의 구타로 사망했던 볜중윈의 남편은 "쑹빈빈과 류진의 허위 사과에 대한 성명'"을 발표하며, 부인 볜중윈이 죽은 지 48년이 지났지만 당시 일을 계획하고 사람을 죽인 이들은 여전히 법을 어기고도 아무런 제재를 받지 않은 채 자유롭게 살고 있다고 비판했다.# 이후에는 10년 넘게 아무런 인터뷰도 하지 않으며 은둔 생활을 이어나가고 있다.
- 천샤오루(陳小魯)[84]
14. 현대 중국에서의 인식[편집]
당과 국가, 각 민족 인민들에게 심각한 재앙을 가져온 내란(给党,国家和各族人民带来严重灾难的内乱。)
1966년 5월부터 1976년 10월까지 진행된 '문화대혁명'으로 당과 국가, 인민은 건국 이래 가장 심각한 좌절과 손실을 겪었다.(1966年5月至1976年10月的“文化大革命”,使党、国家和人民遭到建国以来最严重的挫折和损失。)
백악관에서 (등소평과) 저녁식사 중 영화배우 셜리 맥클레인과 한 해프닝이 있었다. 맥클레인은 문화대혁명 당시 1970년대 초기에 중국을 방문했었으며, 모택동사상의 사회개혁 노력에 깊은 감명을 받았었다. 1979년 백악관에서의 저녁식사 중, 맥레인은 중국의 농장에서 야채를 키우는 교수를 만났을 때를 회상했다. 그녀는 대학교에서 연구를 중단하고 고된 노동을 하는 것에 슬픔을 느끼냐고 질문했고, 교수는 가난한 농부들과 함께 노동하며 배울 수 있기에 행복하다고 대답했다. 등소평은 이야기를 들은 후 잠시 멈춘 뒤, "그 교수는 거짓말을 했다"고 대답했다. 맥클레인은 충격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카터 대통령은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2008년에 이원복 교수가 중앙일보에 낸 교양만화 <세계사 산책> '역사의 상처' 편에선 세계적으로 치욕적인 금기어 중 하나로 언급됐는데, 만에 하나 중국인들과 역사 얘기를 할 시에 이 사건 얘기는 안 꺼내는 게 예의이다. 학교에서도 문화대혁명이 발생했다는 것과 함께, 중, 고등학교 역사시간에 문화대혁명과 대약진운동이 마오쩌둥의 실책임을 분명하게 언급하고, 이후에 끼친 영향까지 자세하게 가르친다. # 어문(중국의 국어) 과목에도 그 당시를 배경으로 한 소설도 가르치며 당시의 문제점을 자세하게 비판한다. 또한, 문화대혁명을 겪은 세대들이 점차 늙어가고 있기 때문에 젊은세대에서는 이미 지난 세대들의 일로 여기는 듯 하다.
중국의 공식언론에서는 문화대혁명이라는 단어도 꼭 따옴표를 붙여서 "文革" 또는 "文化大革命"이라고 한다. 원래 공산당 입장에서 혁명이란 단어는 긍정적인 것이어야 하지만, 워낙 문혁은 흑역사이기 때문에 이렇게 따옴표를 치는 것이다. 덩샤오핑 집권기의 개혁개방 이후로 국가 주석도 여러 번 바뀌고 사회가 점진적으로 바뀌며 현재 젊은 세대들은 문혁이 실책이라는 사실을 확실하게 배우면서 자란다. 현재 중국공산당 핵심세력이 바로 문화대혁명의 최대 피해자 중 하나[86] 임을 생각하면 앞으로도 긍정적으로 평가받을 일은 없을 것이다.
사실 이 사건도 천안문 6.4 항쟁처럼 철저하게 묻고 은폐하고 싶겠지만 알다시피 그 규모가 묻을 수 있는 수준을 한참 넘어섰기 때문에 인정하고 있다고 볼 수밖에 없다. 아직까지 생존해 있는 직접 관련된 사람들만 수천 만이 넘기 때문이다. 대신 가능한 한 언급하는 걸 피한다. 인터넷에서 문화대혁명에 대해 언급하면 복불복 확률로 삭제되는 정도.[87]
검열이 심한 중국 대표 포털인 바이두의 백과사전에서도 이례적으로 매우 자세하게 기술되어 있으며, "지도자들이 실수로 발발하고 반혁명세력이 착취해 당에 심각한 재앙을 안겨준 내전이었다","국가와 모든 민족이 극도로 고통스러운 교훈을 남겼다"라며 적나라하게 서술되어 있다.
15. 관련 인물과 사건[편집]
15.1. 관련 인물[편집]
15.2. 사건 목록[편집]
- 해서파관 사건
- 5.16 사건
- 베이징 8월 폭풍 사건
- 경험 대교류 운동
- 상하이 1월 폭풍 사건
- 경서빈관 대소동
- 2월 역류
- 3월 흑풍
- 7.20 사건
- 67폭동
- 주중 영국 대표부 점령 사건
- 상산하향 운동
- 키신저-저우언라이 회담
- 571 공정
- 9.13 사건
- 닉슨-마오쩌둥 회담
- 비림비공운동
- 정돈사업
- 천안문 사태
15.3. 기타[편집]
16. 관련 매체[편집]
문혁은 중국공산당에 있어서 지우고 싶은 악몽 같은 기억이라 학문적으로 다루는 것은 거의 금단의 영역이 되어 있다. 그러나 문화 예술적인 면에서는 흥미로운 소재이기도 해서 1970년대 종반에 문화대혁명의 부정적인 면을 본격적으로 다룬 단편소설 <반주임>과 <상흔>[88] 이 연재되어 엄청난 화제거리가 된 이래로 중국 현대사를 다루는 작품에는 거의 늘 언급되거나 시대적 배경으로 등장하며 해당 시기에 대해 다루거나 비판하는 드라마도 상당수 나와있을 정도다. 덧붙여서 홍위병 생활을 해봤거나 문혁 시기를 살았던 실제 경험을 다룬 후일담 문학들이 중국, 대만등 중화권에 1980년대 초반부터 엄청나게 쏟아져 나오고 있다. 10년 동안에 이렇게 전 인민들에게 집단적인 트라우마를 남길 수 있는 건, 이 사건이 얼마나 충격적이었는지를 말해주는 것이다.
그러나 현재 시진핑 정권이 들어서면서 부터는 문화대혁명에 관해서 일체 언급되지도 관련된 작품 출판도 금지되면서 현재는 중국에서도 이 시기를 바탕으로 한 시대극 작품이 나오지 않고 있다.
- 《마지막 황제》 - 마지막 부분에서 잠깐 나온다.
- 《5일의 마중》 - 영화가 처음 시작되는 장면에서, 문화대혁명 당시 70년대 초 중국이 묘사된다.
- 《늑대 토템》(소설, 영화) - 문화대혁명 당시 내몽골에 유배된 한 지식청년의 이야기.
- 《패왕별희》 - 문화대혁명은 이 작품 후반의 중요한 배경이다.
- 《허삼관 매혈기》, 《인생》, 《형제》 - 모두 중국 작가 위화(余華)의 작품으로, 《인생》은 장예모 감독이 주연한 영화화하기도 했다. 영화는 원작의 뒷부분을 생략해서 조금 뜬금없이 끝나는 감이 있긴 하지만, 한 가족이 중국 현대사의 큰 사건을 죄다 거치는 과정을 그리고 있어서 중국 현대사를 알고 싶다면 볼 만한 영화다. 이 영화에서 문혁은 주인공 가족에게 큰 슬픔을 가져다 주는 사건으로 나온다.[스포일러][89] 위화는 공산당에게 반체제 작가로 찍혀 있는 인물인데, 작품이 전반적으로 문혁 시기 전후를 배경으로 삼는 경우가 많다.
- 《푸른 연》 - 영화 후반부에서 나온다. 교장을 고발하고, 초등학교가 휴교했다고 좋아하는 주인공 철두와 그의 친구들이 언급하며, 이외에 비극적인 내용들까지 나온다.
- 《기왕》 - 자신이 진행하는 게임프로그램의 시청률이 떨어지게 되자, 문화대혁명 시기를 겪은 중국을 방문하여 게임왕을 찾는 이야기인데, 당시 문화대혁명 시대를 배경으로 한다.
- 《북경의 붉은 물결》- 문화대혁명이 끝난지 단 4년만에 등장한 대만영화로 당시 시대상을 잘 그려낸 영화이다.
- 《부용진》 - 개혁개방 후 1세대 중국 영화로, 문화대혁명의 잔상을 그리고 있다.
- 《붉은 스카프》 - 지앙지리의 자전적 성장소설. 어린 나이에 문화대혁명을 경험하며 사고를 바꾸면서도 과연 옳은 것인지 고민하는 청소년기의 작가 자신의 모습을 그렸다.
- 《인민을 위해 복무하라》 - 단순한 야설이 아니라 상관의 아내와 저지르는 불륜을 통해 시대상을 그리는 소설. 한국에서 북한을 배경으로 번안되어 영화화되었다.
- 《사람아, 아 사람아》 - 주인공들 모두가 대학생 시절 문화대혁명을 겪었고, 문화대혁명이 주인공들의 삶에 큰 영향을 미친다.
- 류츠신의 SF 《삼체》는 문화대혁명을 주요한 모티브로 삼고 있다. 어찌 보면 문화대혁명 때문에 그 나비 효과로 '그리고 세계는 멸망했다'가 되는 이야기이다(...).
- 《중국만세!》 - 장리자의 자서전으로, 문화 대혁명 이후, 침체된 중국에서 태어난 저자 장리자의 일생을 담은 이야기다. 주인공인 장리자는 홍위병에 의해 집기가 도난 당하고, 외할아버지를 잃고, 어머니는 누명이 씌여 구타당했으며, 본인은 어머니를 대신해 탄도학 연구소에서 대신 막노동을 하는 대략 이러한 스토리이다. 문화대혁명 전후의 이야기가 세세하게 담겨있으며, 몰입감도 있어서 한번쯤 읽어볼만 하지만, 이 책은 현재 절판 상태라 구하기 어렵다.
- 션판은 자신의 회고록, 《홍위병》에서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문화대혁명 전후의 중국 인민들의 삶을 실감나게 그려냈다.
- 영화 《몽상가들》에서, 주인공들이 마오쩌둥과 문화 대혁명을 두고 토론하는 장면이 나온다.
- 《나비부인》을 비꼰 《M.Butterfly》에서도 작품 전반에 걸친 배경이 된다.
- 중국으로 망명을 왔다 서양 문물의 탄압으로 인해 주인공이 홍위병들에 의해 막대한 피해를 받은 《레드 바이올린》이라는 작품도 있다.
- 《모닝 선》 - 해외에서 만든 다큐멘터리로, 당시 중국의 문화대혁명의 과정을 잘 보여주는 작품으로 국제다큐멘터리대회 대상을 수상했으며, EBS를 통해 국내에서도 방영되었지만, 중국 정부의 항의로 인해 시간도 기존보다 6시간 30분이나 늦어진 오전 4시 30분에 시작하는 등 1회성 방영으로 끝났다.
- 《붉은 기와, 검은 기와》- 차오원쉬엔의 성장소설
- 《대륙의 딸들》- 장융(1952)의 자전적 소설. 만주 군벌 시대부터 시작하여 일제치하, 내전, 토법고로, 제사해 운동등 중국내 온갖 병크가 다 나온다. 장융은 본인은 모택동에게 절대적 충성을 바치는 홍위병이였고 아버지는 쓰찬성에서 최고위급 간부였다. 그리고 간부답게 문혁 당시 최고 수준의 고문과 박해를 당해 결국 아버지는 비참하게 죽는다. 중간 간부인 어머니만 중간급의 고문을 당해 생명은 유지. 장융 본인은 영국으로 귀화하여 책 출판. 서구에서 워낙 베스트 셀러라 그쪽에서 문혁을 얘기할 때 꼭 언급되는 책이다. 물론 중국에선 금서조치.
- 중국 정권이 ‘안정 유지’를 위한 방어 조치를 지속하면서 종교를 암시하는 모든 단어가 제거되어 세속적인 당 선전 문구로 대체되고 있다. 신 문화대혁명: 종교적 내용 함의된 용어 금지돼 Bitter Winter, 2019-03-25
- 1960년대로부터 부활한 문화대혁명 수법이 대중과 형제, 신앙 내부 사이의 반목을 조장하여 신앙을 통제한다. 펑챠오(楓橋) – 반(反)종교 마오주의의 부활 Bitter Winter, 2018-12-27
- 한국의 소설 퇴마록에서는 아미파, 모산파, 화산파 등의 문파 중 일부가 한국에 적을 두고 있다. 문화대혁명 당시 여러 문파들이 크게 탄압받았고, 계승자들 중 일부가 가까운 해외인 한국에서나마 사문의 맥을 이으려 한 것이다. 아미파 같은 경우에는 신물인 청홍검까지 한국에 넘어왔으니 사실상 절멸한 상황이라 할 수 있고, 모산파는 중국에도 관련 인물이 등장한 것을 볼 때 중국 본토에서도 명맥이 유지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17. 같이 보기[편집]
- 마오쩌둥
- 대약진 운동
- 홍위병
- 반달리즘
- 정치극단주의
- 반지성주의
- 학살
- 성상 파괴주의
- 바미안 석불
- 분서갱유
- 2021년 중국 연예계 정풍운동
- 반수정주의
- 저 새는 해로운 새다
- 분청
- 메카시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