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통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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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배경
3. 정책과 실효성
4. 폐지
5. 기타


1. 개요[편집]


1920년대 일본 제국의 조선 식민통치 시책을 말한다. 문화 통치()는 일본 제국3.1 운동 이후 무단 통치의 한계를 느끼고 조선인들의 불만을 누그러 뜨리고자 실시한 식민지 통치 정책이다. 조선인 언론과 집회를 허가하고 무단통치의 상징과도 같았던 헌병경찰제가 보통경찰제로 개편된다.

유화정책의 효과로 일제강점기를 통틀어 친일파가 많이 나온 시기이기도 하다. 특히 이광수를 비롯한 수많은 지식인과 독립운동가들이 소극적 또는 적극적 친일파로 변절한 시기이기도 했다. 당시 민족주의 계열에서 문화통치를 부른 표현인 '민족분열통치'가 문화통치의 본질을 요약했다고도 볼 수 있다. 따라서 요즘 일선 학교 한국사 수업시간에는 민족분열통치 내지 기만적 문화통치 혹은 이른바 '허울뿐인 문화통치'로 부르는 사례도 늘고 있다.


2. 배경[편집]


1910년 경술국치 이후 일본 제국은 조선인들의 대대적인 반발을 의식하여 '무단 통치'라는 강경한 탄압 정책을 펼친다. 조선총독부의 주도 하에 총독부 기관지를 제외한 모든 언론들이 폐간됐으며 집회 역시 금지됐다. 또한 육군 헌병경찰로 동원하여 치안을 유지하였으며 태형과 같은 전근대적인 처벌제도를 도입하면서 한국인들의 저항 역량을 약화시키는데 모든 힘을 기울인다.[1]

하지만 이런 일제의 강경책으로 쌓여있던 조선인들의 저항심리는 1919년 3.1 운동으로 대폭발을 일으켰고, 일본은 더 이상 무력에만 의지해서만은 조선을 통치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리게 된다. 이는 3.1 운동 외에도 그 여파로 벌어진 제암리 학살사건과 같은 유혈 진압 때문에 당시 일제가 국제사회의 시선을 의식하는 중이기고 했고, 식민지 조선 뿐 아니라 일본 본토에서도 온건한 민주주의를 강조하는 다이쇼 데모크라시가 진행되던 무렵이라 강경파들의 입지가 좁아지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측면도 있었다.

동시에 이런 상황에서 군, 귀족, 관료 등 그 어떤 연줄도 없고 귀족 작위도 거부한 언론인 출신의 '평민 재상' 하라 다카시 총리가 문민 내각을 수립하여 식민지 조선과 대만에도 문민 정치를 이행하려 했다. 이렇게 한반도의 강경한 독립운동과 일본 내지의 온전한 문민 내각, 다이쇼 데모크라시 등의 상황이 맞아떨어져 신임 조선 총독에 육군이 아닌 해군 출신 사이토 마코토 대장을 보냈고, 하라 내각은 식민지에도 문화 통치를 시작했다. 당시 해군은 육군보다 조금 더 온건했기 때문에 비록 문민 총독은 아니더라도 강경파 육군을 견제할 수는 있었다. 사이토 총독이 군복 대신 양복을 입은 이유도 이 때문이다.


3. 정책과 실효성[편집]


  • 문관의 조선 총독 부임을 가능하게 함
그러나 1945년 광복까지 조선 총독을 거친 8명의 인물들은 모두 군 출신이었고, 그 중에서도 사이토 마코토 총독을 제외하면 모두 육군 출신이었다.[2] 일본 역대 내각들이 군부 통제를 위해 문민 총독을 임명하려고 시도했으나 결과적으로 실패했는데, 일본군이 조선의 지정학적 가치를 들어 군부가 훼방을 놓았기 때문이다.[3][4]

  • 보통경찰제 실시
조선인들의 가장 심한 반발을 산 정책 중 하나였던 태형제를 폐지하고 헌병경찰제를 보통경찰제로 전환하였다. 하지만 헌병이 치안 유지에서 손을 떼는 대신 경찰이 그만큼 늘어나서 실질적으로는 크게 바뀐 것도 없었다. 전환 시점에서 증원된 경찰관 숫자만 대략 6,800명이다. 이중에서 일본 본토에서 전속한 인원이 1,500명, 헌병에서 2,000명 정도를 전환받고 나머지는 신규로 채용했다고 한다. 담당자의 회고에 의하면 갑자기 규모를 늘려야 하는데 마침 경제가 호황이라 지원자가 별로 없어서 자질이 부족한 인원도 받을 수밖에 없었고, 일본 본토의 각 경찰서에서도 그다지 쓸모없는 자들을 처리할 기회로 이용하는 바람에 이때 증원된 인원들은 대체로 질이 좋지 않았다고 한다. 하여튼 이후로도 경찰력이 계속 강화되면서 1920년대 이후 경찰의 수는 1910년과 비교하여 3배 이상 증가하였으며 특히나 독립운동을 탄압하기 위해 사복경찰(형사)까지 동원하였다. 더불어 특별고등경찰 제도를 실시했다.

  • 언론, 출판의 자유 보장
총독부에서 한국어로 된 언론 출간을 허용했고 이 때 조선방송협회가 개국하였고, 조선일보, 동아일보가 창간됐다. 그러나 검열을 통해 총독부의 심기에 거슬리는 논조의 기사를 작성하면 기사 삭제는 기본이고 언제든지 정간명령이 떨어질 수 있었다. 그렇지만 이에 굴하지 않은 기자들도 제법 있었기 때문에[5] 기자들이 코렁탕을 먹는다든지, 몇 주 동안 정간당한다는지 하는 일이 꽤 자주 있었다. 어쨌든 이전에 비해서는 출판의 자유가 상대적으로나마 보장됨에 따라 억눌려있던 문인들의 창작활동도 무척 활발해져서, 1920년대는 일제강점기 문예사에서 소위 리즈시절로 꼽히는 시기이다. 1910년대는 종교서적 외에 문학서적 출판을 허가받기가 녹록치 않았으며[6] 1930년대 중반 후부터는 한국어 작품 저술조차 어려워졌다. 문화통치 시기에 《폐허》, 《백조》, 《개벽》과 같은 문예동인지가 활발히 출판됐으며 시 분야에서는 서정주의가, 소설 분야에서는 리얼리즘이 두드러지는 성과를 보였다. 설렁탕을 사왔는데 왜 못 먹니

도, 부, 면에 자문기관 성격의 평의회나 협의회를 설치하고 이들 기관의 의원 일부를 선출직으로 정하면서 한국인들의 지방자치 참정권 보장을 천명했다. 하지만 지역 자문기관 의원 선거권과 피선거권은 25세 이상 국세 5원 이상을 납부하는 경제력 있는 성인 남성에 한해서 주어졌으며, 참정권을 가진 사람은 기업가·지주·일본인·고위급 민정문관·지식인 일부 등 부유층에 불과했다. 나머지 대다수의 조선인은 소학교 교육조차도 받지 못했을 정도로 경제력이 열악한 상황이었기에 피선거권은커녕 선거권조차 가지지 못했다. 그리고 일본에서 다이쇼 개혁 일환으로 25세 이상의 남성에게 보통선거권이 부여되었을 때에도 조선 지역 자문기관의 선거제도는 개혁되지 않았다. 그리고 이렇게 '선출'된 도평의회, 부협의회, 면협의회는 보고를 받고 자문을 하며 제안을 하는 정도의 권한을 가진 자문기관에 불과했다. 정기적으로 회의를 개최하며 지방행정 당국자의 보고를 받고 지방행정 당국자에게 자문과 제안을 할 수 있다는 점은 허영심이 많은 조선인 부유층에게 썩 매력적이었다. 하지만 평의회니 협의회니 하는 기관들은 본질상 행정을 감시하며 견제하는 권한 자체가 없고 지방행정당국의 들러리 역할을 벗어날 수 없는 지역 버전 중추원이었다. 예산권도 없었거니와 자문과 제안은 지역 당국자가 무시하면 그만이었던 것이다. 총독부는 권한은 별로 없지만 명예는 있는 지역 자문기관 의원직에 조선인 부유층과 지식인의 진출을 유도하여 친일 세력으로 양성하고자 했다. 현대 대한민국 지방의회는 이 당시의 '지방의회'를 인정하지 않는다. (당시에도 존재하고 지금도 존재하는 지역의) 각 지방의회 홈페이지에서 '초대', '1대'로 찾아보면 1952년 지방선거 혹은 1956년 지방선거로 당선된 의원들이 표시된다.

이 시기 경제정책은 농업에서는 일본 본국 내 쌀 부족 현상을 메꾸기 위한 산미증식계획이 대표적이다 볼 수 있겠다. 또한 일본 본국 내 여러 문제점들을 해결하기 위해 회사령 폐지, 관세 철폐를 단행하였고, 일본인 은행을 늘리기 위한 신은행령 발표도 이 시기에 있었다. 다만 해당 정책들도 민족 자본의 형성보다는 일본 자본의 한국 침투를 용이하게 해주는 결과로 가져오게 된다.


4. 폐지[편집]


문화 통치는 일본 본토에서 다이쇼 데모크라시가 붕괴되고, 군부 세력의 입김이 강해지는 1930년대 들어 서서히 변하기 시작한다. 여기에 대공황의 크리가 겹치면서 일본 군부는 2.26 사건만주사변을 일으키는 등 정부의 통제를 벗어나 제멋대로 폭주하기 시작한다. 이후 1937년 중일전쟁, 1941년 태평양 전쟁이 터지면서 군부가 정계를 장악한 일본은 조선인 정체성을 없애고 일본인으로 동화하기 위해 창씨개명, 등으로 대표되는 민족 말살 통치로 노선을 전환했다. 일부에서는 일본이 계속 문화통치를 유지했더라면 지금과는 매우 양상이 달랐을 것 이라는 의견도 존재한다. 일례로 조선인(한국인)이 독립될 때 정체성을 일본인으로 알아 만세 대신 반자이를 외쳤다는 것은 유명하다. 어떻게보면 일본은 '강압적으로만 나가서 망했다고 봐도 무방하다.


5. 기타[편집]


겉으로는 자비로운 척 하지만 실제로는 더 세뇌시키는 기만 정책인 것에서 착안, 규제를 푸는 척 하면서 뒤로는 더 조이는 것을 문화 통치라고 비꼬기도 한다. 여기에 만족한 사람들과 전혀 만족하지 못한 사람들이 서로 갈라져 싸우면서 의견이 분열되는 바람에 관리자들이 욕을 덜 먹으면 금상첨화. 가령 완장들이 독재를 하는 특정 커뮤에서 불만이 쌓이면 금지어나 차단을 적당히 해제하는 척 하면서 독재를 계속하고 유저들을 이간질하면 문화 통치 하냐며 까인다.

또 문화 통치라는 표현을 사용하는 경우는 일본의 오타쿠 문화가 한국에 들어와 한국 오타쿠들이 춤추는, 유튜브나 그런 사이트에서 관련 영상이나 그런 게시물 등을 보면서 우스갯소리로 이런게 내선일체이고 바로 문화 통치라고 하면서 비꼬는 의미로 사용하는 경우이다. 예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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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한국인이 일제강점기하면 흔히 떠올리는 사진 중 하나인 '칼 차고 수업 진행하는 교사' 역시 이 시기의 일이다.[2] 문화 통치를 시행한 사이토 마코토 역시 군인이었다. 그나마 다른 점이 있다면 다른 총독들은 모두 육군 출신이었지만 사이토만 유일하게 해군 출신이었다는 것.[3] 일본령 대만에는 조선과 달리 1920년부터 문관 총독이 부임할 수 있었다.[4] 흔히들 "문민 총독 임명 생각은 애시당초 없었으면서 그저 조선인들 달래려고 그런 시늉만 한 거잖아?!"라고들 알려졌지만 문화 통치를 처음 도입한 하라 다카시 내각부터 다카하시 고레키요 내각, 기요우라 게이고 내각, 가토 다카아키 내각, 와카쓰키 레이지로 내각, 하마구치 오사치 내각 등 모든 문민 내각들의 제1순위 과제가 바로 미쳐 날뛰는 군부를 통제하는 것이었다. 기만 통치로 알려진 것과 달리 이들은 절대로 문민 총독 임명을 시늉만 할 생각이 아니었다. 조선이라는 그 중요한 식민지를 군부가 마음대로 해쳐먹고 있는 꼴은 저들도 눈 뜨고 볼 수 없을 지경이었다. 문민 총독 임명에 실패한 가장 큰 이유는 전술한 대로 군부가 조선에서의 영향력에서 손 떼기 싫어했던 것이 가장 컸다.[5] 특히나 이 시기 기자들 중에는 막 한국에 유입된 사회주의 사상에 경도된 이들이 꽤 많았다.[6] 1917년 이광수의 《무정》이 출판되는 등 원천적으로 봉쇄되어있지는 않았지만 허가 받기가 후와 비교해서 용이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