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부통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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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Vice President of the United States / VPI[1] do solemnly swear (or affirm)[2] that I will support and defend the Constitution of the United States against all enemies, foreign and domestic; that I will bear true faith and allegiance to the same; that I take this obligation freely, without any mental reservation or purpose of evasion; and that I will well and faithfully discharge the duties of the office on which I am about to enter: So help me God.[3]
[4]"나는 미합중국의 헌법을 어떠한 관념적 제한 혹은 회피를 목적으로 하지 않은 자유로운 의지로부터 또한 본인이 들어가게 된 정부의 의무에 대한 진정한 책임을 가지고 모든 적과, 외국과 국내로부터 진정한 믿음과 또한 같은 충성심으로 지키고 수호할 것을 진심으로 엄숙히 선서합니다."
미합중국 부통령의 취임 선서문[5]
미국 헌법에 의해 미국 대통령이 임기 도중 사망하거나 사임, 탄핵, 대통령의 직무를 수행하지 못할 상황이 생길 경우 대통령 자리를 승계하는 1순위 직책으로 미국 상원의장직을 겸한다.
현직 미국 부통령은 2020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당선된 제49대 카멀라 해리스로, 2021년 1월 20일 공식 취임하였다.
관행적으로 미국 대통령 선거 과정에서 부통령을 러닝메이트로 지명하여 활동하는 것을 Ticket이라고 표현한다. 미국 대선 부통령 토론회나 부통령 취임 이후에도 부통령 자리를 "Vice President Ticket"이라 부른다. 대통령 후보는 양당의 경선 과정에서 선출되는 자리라서 Ticket 대신 Nominee(후보)라고 부른다는 것이 차이점.
2. 상세[편집]
미국 부통령은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대통령 출마자의 러닝메이트로 함께 출마하며, 선거인단이 대통령 선거와 동시에 하는 부통령 선거로 선출한다. 부통령 출마 자격의 법적 근거는 각각 수정헌법 12조(선거인은 각각 자기 주에서 회합하여, 비밀 투표에 의하여 대통령과 부통령을 선거한다. 양인 중 적어도 1인은 선거인과 동일한 주의 주민이 아니어야 한다.)와 제22조가 규정한다. 부통령 출마자는 대통령 출마자와 마찬가지로 태생적 미국 시민권자이어야 하며, 만 35세 이상인 동시에 14년 이상 미국에 거주하여야 한다. 그리고 대통령과 다른 주의 주민이어야 한다. 예컨대 제46대 대통령인 조 바이든은 델라웨어 주, 부통령 카멀라 해리스는 캘리포니아 주 출신이다. 굳이 대통령과 부통령의 주를 다르게 한 것은, 선거인단이 대통령과 부통령 투표 양쪽 다 자기 주 출신 후보에 투표할 수 없는 규정 때문이다. 혹시 같은 당의 대통령과 부통령 후보 모두 같은 주 출신이면 그 주 선거인단은 대통령을 찍고 나서 (이미 자기 주 출신인 대통령에 투표했으므로) 같은 당이고 같은 주 출신인 부통령을 못 찍는 문제가 생기므로 이를 피하기 위한 것. 이 출신지는 출생지가 아닌 출마할 당시 등록된 거주지가 기준이기 때문에, 후보 중 한 명이 공식 출마 전 다른 주로 거주지를 옮기면 그만이다. 예를 들어 텍사스 주지사였던 조지 W. 부시가 딕 체니를 러닝메이트로 지명했을 때, 체니는 10년 동안 살아온 텍사스를 떠나 고향인 와이오밍으로 이사를 가는 식으로 해결했다.
미국 대통령과 미국 부통령의 출신 주를 다르게 설정하도록 한 것은 미국 헌법 제정 당시 건국의 아버지들이 버지니아 주, 매사추세츠 주, 뉴욕 주 출신 세 파벌로 싸우다가 생각해낸 타협안이라고 한다. 버지니아, 매사추세츠, 뉴욕 3개 대형주 출신이 자기네들이 정권 차지하려고 병림픽을 벌였는데 독립 초기 13개 주 중 나머지 10개 주 출신 정치인들이 "야 느그들만 다 해먹냐?"며 연합해 항의한 결과 대형주와 소형주를 나눠서 권력을 나눠주는 차원에서 대통령과 부통령의 출신 주를 다르게 설정했다고 한다.
대통령과 달리 부통령직은 3선 제한이 없다. 이론적으로는 부통령은 제한 없이 연임이 가능하지만 부통령의 특성상 현실화될 가능성은 없다시피하다.
원래 처음에는 따로 부통령 후보를 두지 않고 대통령 선거 때 1위가 대통령이 되고 2위가 부통령이 되는 구조였다. 2등이 두 명이면 상원의 비밀투표로 부통령을 결정했다. 이로 인해 대통령과 부통령의 당적이나 계파가 서로 달라 경쟁하는 일이 비일비재했었다.
초대 부통령 존 애덤스는 초대 대통령인 조지 워싱턴이 정당 없이 철저히 중립을 지켰기 때문에 이러한 문제가 덜했다. 하지만 제2대 부통령인 토머스 제퍼슨은 연방주의자인 애덤스의 정적이라 정쟁을 통해 애덤스의 재선을 막고 본인이 대통령에 올랐다. 물론 다음 부통령인 에런 버도 재퍼슨의 정적이었다. 애런 버는 골때린 사례인데, 제퍼슨과 같은 민주공화당 소속이면서 제퍼슨의 정적이었다. 대통령과 대립하는 부통령을 내리 2번 경험한 미국 의회는 2위 부통령 제도의 한계를 체감하고 1804년에 수정헌법 12조를 통해 대통령 선거제를 현행처럼 대통령과 러닝메이트로 출마하도록 법을 바꾸었다.
만약 부통령 후보 중 과반 후보가 없으면 대통령과 같은 방식으로 선거를 치르되, 각 주의 상원의원 2명이 한 표씩 행사해 부통령을 결정한다. 선거인단 투표로 대통령을 결정하기에, 이론상으로는 선거 결과에 따라 선거하지 않고 자신의 신념에 따르는 불충실한 선거인단이 일을 저지르면 결과가 바뀔 수도 있긴 하다. 미국 역사에서 상원이 부통령을 결정한 것은 단 한 번뿐으로 1836년 미국 대통령 선거 당시에 있었다. 선거인단 투표를 통해 대통령이 마틴 밴 뷰런으로 결정되고도 부통령이 그의 러닝메이트였던 리처드 멘터 존슨(Richard Mentor Johnson)으로 결정되지 못했는데, 이 때문에 부통령 선거가 상원으로 넘어갔고, 상원 투표에서 존슨을 부통령으로 선출했다.
3. 명단[편집]
- 볼드체는 대통령이 된 인물.
3.1. 승계 대통령과 부통령 출신 대통령[편집]
- 부통령에서 승계한 미국 대통령(이 경우 영어로 'accidental president'라고 한다)
참고로 부통령을 역임하고 대통령이 된 인물들 중 8년 이상 임기를 수행한 대통령은 토머스 제퍼슨이 유일하다.[19][20]
4. 권한[편집]
미국의 부통령의 수정헌법 제25조에 의거하여 대통령이 유고나 그 외의 이유로 대통령으로서 정상적인 임무를 수행하기 어렵게 되거나 또한 그렇게 판단될 경우에 부통령이 일시적으로 대통령의 권한을 대행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대통령의 가족이 납치되어[21] 수색명령을 내려야 하는데 대통령이 자신의 불안정한 심리 상태로는 올바른 판단을 내릴 수 없다고 생각하여 일시적으로 자기 권한을 포기한다면 부통령이 대통령의 일을 대행할 수 있다.[22]대통령이 면직되거나 사망하거나 사직하거나 또는 그 권한과 직무를 행하지 못하게 된 경우에는 대통령의 직은 부통령에게 귀속한다.
미국 헌법 수정 제25조
또한 대통령이 직무수행이 불가능하다고 부통령과 다수의 장관이 동의하고 임시 상원의장과 하원의장에게 공한을 송부하면 부통령이 대통령 권한대행을 할 수 있다. 물론 대통령이 직무수행이 가능하다고 증명하면 권한은 다시 대통령에게 돌아온다. 아래의 이미지나 가상의 부통령 같은 매체 속 부통령 사례에서도 바로 이 규정을 이용해 부통령이 대통령 직무를 중지시키려 하는 묘사가 종종 등장한다. 자세한 예시는 대통령 권한대행 문단을 참고할 것.
사망 또는 하야, 탄핵 등의 이유로 대통령이 유고 시에는 대통령 권한과 함께 직위도 승계된다. 대통령 권한대행이 아니라 아예 '대통령' 자리로 '승진'해서 전 대통령의 잔여 임기 동안 대통령직을 수행한다. 존 타일러 당시 부통령이 미합중국 사상 처음으로 대통령 사망으로 대통령직을 승계했을 때 이 권한을 두고 여러 해석이 나왔지만, 대통령직을 승계한 존 타일러 대통령이 앞으로 자신에게 '부통령' 또는 '대통령 권한대행'으로 온 편지는 열어보지도 않겠다고 선언하면서 대통령 승계로 굳었다.
미국의 부통령은 미국 상원의장(President of the Senate)직도 겸하는데, 평소에는 상원에서 의결권을 행사할 수 없다. 가능한 경우는 딱 하나, 상원에서 특정 법안 의결의 찬성과 반대가 동수일 때 상원의장이 의결 여부를 결정할 수 있다. 가부 동수 상황에서 부통령이 최종 결정하는 과정을 미국 의회법 용어로 Tie-Breaker라고 한다. 예를 들어 미국 상원 의석이 100석인데, 찬반이 딱 50:50 동수가 나왔을 경우 상원의장이 의결권을 행사하여 찬성, 반대 어느 한쪽의 손을 들어줄 수 있다. 캐스팅보트를 쥐고 있는 것이다. 실제로 캐스팅보트를 행사할 일이 없는 건 아니지만, 엄청 치열하게 다투는 법안이 아닌 이상 이렇게 정확히 반으로 갈리는 사례가 그렇게 많진 않고 사실 부통령 업무를 수행하기도 바쁘기에 부통령이 상원 의장으로서 활동할 일 자체가 별로 없다. 그래서 미국 상원은 바쁜 명목상 의장을 대신해서 다수당 최다선 상원의원을 상원임시의장(President pro tempore of the United States Senate)으로 두는데, 명목상으로만 임시의장이지 사실상 그냥 이 사람이 정식 상원의장이나 마찬가지다.[23]
다만 건국의 아버지들이 삼권분립이 깨질 우려를 감수하고서 부통령에게 이런 중책을 맡긴 이유는 참으로 맥이 빠지는데, 로저 셔먼이 한 말에 따르면 “부통령에게 상원 의장직이라도 맡기지 않으면 그는 실업자 신세가 될 것”이기 때문이라고. 헌법 제정 당시에도 반연방주의자 들이 강력하게 반대했던 부분 중 하나였는데, 2000년대 이후 상기의 사유로 부통령의 실제 의장으로서의 행동이 줄어 그들이 우려했던 사태는 발생하지 않았다.
5. 승계 단서[편집]
5.1. 세 번째 임기[편집]
4선의 프랭클린 D. 루스벨트 이후 개헌을 통해 미국 대통령은 3선, 즉 8년을 초과하는 집권이 법적으로 불가능하다. 하지만 부통령은 임기의 반(2년) 이상 재직한 대통령직을 승계를 한 경우에는 3선 출마가 가능하다. 쉽게말해 전임 대통령의 남은 임기를 다 채워도 재선에 두 번 출마하는 게 가능하다. 최대로 10년이 조금 안 되게(전임자의 잔여임기(2년 미만)+초선 4년+재선 4년) 재임할 수 있는 셈. 현재까지 이 조건을 만족할 수 있었던 유일한 승계 부통령은 존 F. 케네디를 승계한 린든 B. 존슨뿐이다. 그러나 베트남 전쟁에 따른 여론 악화로 당선 가능성이 별로 없어 두 번째 임기 이후 불출마를 선언했다. 게다가 유력후보인 로버트 케네디가 암살당하고 민주당이 분열되어 결국 리처드 닉슨이 승리했다.
3선 제한이 없었던 시절까지 포함하면 이 조건을 만족할 수 있었던 승계 부통령이 1명 더 있다. 워런 G. 하딩을 승계한 캘빈 쿨리지다.
- 쿨리지는 지지율이 괜찮은 편이었는데도 "I do not choose to run for President in 1928."이라는 짧은 메시지로 3선 포기를 선언했다. 아무튼 재선에 출마하지 않은 덕분에 대공황의 쪽박을 7개월 차이로 모면했다.
시어도어 루스벨트의 경우 첫 임기가 승계로 인한 임기였기 때문에 3선에 대한 정당성을 내세우며 3선을 도전하려고 했었다. 그러나 1908년 대선에서는 3선을 포기하면서 끝나는 듯 했으나 1912년 대선에서 독자출마를 했지만 우드로 윌슨 에게 패배하고 1920년 대선에도 공화당에 복당해 출마할 계획이였으나 경선이 공식화 되기도 전인 1919년 1월에 사망하면서 그의 3선은 없던 일이 됐다.[24]
리처드 닉슨의 사임으로 대통령직을 승계받은 제럴드 포드의 경우 닉슨에게 승계 받은 임기가 2년 165일 이였는데 이 경우 포드는 만약 1980년 대선에서 재선에 성공했더라도 반년도 안되는 기간 차이로 3선 도전은 못 했다.
5.2. 부통령 궐위 시의 새 부통령 선임[편집]
부통령이 재임 중 사직하거나 사망할 경우 혹은 대통령직을 승계할 경우 부통령을 새로 선임하는 제도는 부통령 제도가 만들어지고 꽤나 훗날에나 이루어졌다. 초기에는 부통령 궐위 상황에 대비한 헌법 조항이 아예 없었고, 재임 중 부통령이 사망하거나 대통령직을 승계해 부통령직이 공석이 되면 다음 대선 때까지 부통령직을 공석으로 남겨두었다. 첫 임기에 사망하면 재선에서 러닝메이트를 새로 뽑아 그를 대통령으로 뽑는 식으로 대응했다. 그래서 의외로 미국 역사상 부통령이 없던 시기도 꽤 된다(약 44~45년 간 없었다).제1절. 대통령과 부통령의 임기는 본 조가 비준되지 아니하였더라면 임기가 만료했을 해의 1월 20일 정오에 종료하고 상원의원과 하원의원의 임기는 동일한 해의 1월 3일 정오에 종료한다. 그 후임자의 임기는 그 때부터 시작된다.
제2절. 연방 의회는 매년 적어도 1회 집회한다. 그 집회는 의회가 법률로 다른 날을 정하지 아니하는 한 1월 3일 정오부터 시작된다(이하 생략).
(대공황 시절인 1932년 3월, 연초 레임덕을 막는 목적으로 발의되어 다음해 1933년 3월에 비준, 제5절에 따라 그해 1933년 10월 15일부터 발효된 수정헌법 제20조.)
부통령을 공석으로 비워두지 않은 최초의 대통령은 경이로운 4선을 달성한 프랭클린 D. 루스벨트이다.[25] 1940년 존 낸스 가너가 2번의 임기를 치른 후 (재선 상황이기도 했고) 당내 경선에서 루스벨트에게 밀리자 위의 수정헌법 20조에 따라 1월 20일에 미리 임기를 만료 했는데, 3선 당선이 결정된 상태였기에 러닝메이트였던 헨리 A. 월리스가 부통령의 임기를 이어받았다.
그런데 이 윌리스도 러닝메이트에서 떨어지자 4년 임기를 끝으로 45년 1월 20일에 임기 만료. 그를 이어받은 트루먼은 또 루스벨트가 죽자 승계하고 재선하였으며, 트루먼은 수정헌법 20조를 적용받는 첫 대통령이 되므로 역시 1월 20일에 물러나면서 대통령의 취임식은 이후 3월 4일에서 1월 20일로 당겨지게 되었다. 어차피 미국 대선은 언제나 11월 첫째 주 수요일이었으니 취임식이 당겨진다고 다를 건 없었고…
물론 이건 어디까지나 당선이 예정된 상황에서 미리 부통령직을 수행하게 하는 것이다. 이후로도 승계된 대통령은 부통령을 선임하지 않았는데, 이것이 고쳐진 건 1967년의 수정헌법 25조였다.
이 조항이 최초로 적용된 사례가 바로 다음 해인 1968년에 당선된 리처드 닉슨이란 게 충격적이다. 그의 러닝메이트인 스피로 애그뉴 부통령은 두 번째 임기를 시작한 1973년 10월 10일 비리로 사직을 했다. 2달여 뒤 의회의 추인을 받아 12월 6일 취임한 부통령이 제럴드 포드. 그런데 알다시피 리처드 닉슨 역시 1974년 8월 9일 워터게이트로 사임을 하면서(…) 포드가 승계하고 부통령은 다시 공석. 결국 4개월하고 10일 뒤인 그해 12월 19일 넬슨 록펠러가 추인받아 부통령직을 맡았다.[26] 결국 거의 1년 사이에 부통령이 두 번이나 갈려나갔는데, 이 두 사례만이 수정헌법 25조가 적용된 사례로, 이로서 제럴드 포드는 대통령 선거로 당선되지 않은 유일한 대통령이라는 앞으로도 쉽게 깨지지 않을 기록을 얻게 되었다.대통령이 면직, 사망 또는 사임한 경우에는 부통령이 대통령이 된다. 부통령의 직에 궐위가 있을 시에는 언제나 대통령은 부통령을 지명하고 그는 의회 양원의 다수결에 의한 추인에 따라 취임한다.(이하 생략)
이 부분은 의외로 중요한데, 선거로 선출되지 않았다는건 정통성 문제와 지지도 문제와 결부되어서 경쟁 야당의 공세는 물론 자당 의원들의 협력을 받기 어려울 수도 있기 때문이다. 당연하지만, 국회의원들이 "나는 선거에 출마하고 당선되면서 국민들에게 직접 정치적인 권한을 부여받았는데 부통령 당신은 국민들의 지지를 받지 않고 그냥 대통령 직위를 날로 먹지 않았느냐?" 라는 식으로 대들면 반박할 말이 없으니까 말이다.
그래서, 대통령의 궐위로 인해 권력의 승계를 부여받는 부통령은 대통령 후보와 같이 러닝메이트로 선거에 출마하여 국민들의 지지를 받아 당선되는 형식으로 합법적이고 민주적인 정당성을 얻어야 한다. 대통령의 궐위 시 부통령이 합법적으로 권한을 승계받아 대통령으로서 권력을 행사하는데, 러닝메이트 제도 자체가 "대통령인 내가 없어도 나랑 같이 선거에 출마해서 당선된 부통령이 뒤를 이어서 대통령 직위를 승계합니다." 라는 뜻이기 때문이다.
부통령 제도가 없는 대한민국에서 대통령 권한대행 1순위인 국무총리가 대통령직을 승계할 수 없으며, 권한대행에만 그치는 것도 국무총리는 선거로 선출되는 것이 아니라 대통령이 지명하는 직위이기 때문이다.
5.3. 임시 대통령(대통령 권한대행)[편집]
대통령의 건강이 위태로운 순간에도 유고 시를 대비해 예외적으로 대통령 권한대행을 맡긴 경우가 있다.
- 조지 H. W. 부시: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이 재임 중인 1981년 3월 30일, 암살 기도로 대수술을 치러야할 상황이었기에 레이건이 치료를 받고 완치될 때까지 임시 대통령이었다.
- 딕 체니: 조지 W. 부시 대통령이 재임 중인 2002년 6월 29일에 임시 대통령이었다. 이 경우는 상대적으로 별 것 아닌 이유였는데 결장암을 우려한 20분짜리 내시경 검사를 받는 2시간 동안만 임시 대통령이었다.[27] 딕 체니는 2기 임기 도중인 2007년 7월 21일에도 비슷한 사유로 2시간 동안 임시 대통령이었다.
- 카멀라 해리스: 조 바이든 대통령이 재임 중인 2021년 11월 19일에 건강검진을 받는 동안 임시로 대통령 권력을 이양받았다. 역대 세번째 임시 대통령이자 최초의 여성 임시 대통령.[28]
6. 병풍?[편집]
"The most insignificant office that ever the invention of man contrived or his imagination conceived."
"인간이 만들어낸 가장 하찮은 자리. 혹은 상상할 수 있는 가장 하찮은 자리."
존 애덤스, 미국의 초대 부통령이자 세계 최초의 부통령
"Not worth a bucket of warm piss"
"따뜻한 오줌 한 양동이의 가치도 없다."
부통령의 가장 큰 권한이 대통령 권한 승계 및 대행이라 대통령이 멀쩡하거나, 살아 있을 때는 정말 존재감 없는 자리다. 평소에는 대통령을 대신해서 이런저런 행사장에 참석해서 연설하거나, 외교적 격식을 갖추어야 하는 행사에 얼굴 내미는 역할을 한다. 쉽게 말해 의전 셔틀이다."The job of the Vice President is to go to weddings and funerals"
"부통령의 업무는 결혼식과 장례식에 가는것이다."
해리 S. 트루먼, 제34대 부통령이자 제33대 대통령
상원이 50 : 50으로 나뉘는 경우도 드물기 때문에 상원의장의 역할도 그렇게 많지 않다. 당장 바로 위에서 인용된 미국 초대 부통령 애덤스의 말을 보자. 조 바이든은 버락 오바마 정권의 부통령을 맡았던 당시 스티븐 콜베어의 콜베어 르포어에서 나라를 위해 희생한 용감한 전사들을 위해 핫도그 셔틀 역할을 하는 것이 부통령이 할 일이라고 농담을 치기도 했다. 바이든 본인은 부통령 재임 시절 병풍과는 거리가 멀었던 실세 부통령이었지만.
부통령의 권한 대행에 대한 법적 근거가 미비했던 우드로 윌슨 집권 시기에는 윌슨이 집무 불능 상태였는데 영부인 에디스 윌슨이 대행권을 스틸하는 사태까지 일어났었다. 원래는 부통령 토머스 R. 마셜이 대통령직을 승계해야 했지만 영부인이 대통령의 신변이상을 감추고 국정을 좌지우지 했던 것.
미국 정치 드라마 웨스트윙에 나온 농담도 이를 잘 표현하고 있다. "워싱턴에 사는 한 여성이 아들 둘을 잃어버리고 죽을 때까지 찾지 못했는데, 한 명은 원양어선 선원이 됐고 다른 한 명은 부통령이 됐다" 그리고 이 작품을 보다 보면 대통령한테 차이고 대통령 비서실장에게 차이는 불쌍한 부통령의 처지를 잘 알 수 있다.
제30대 대통령이 되는 캘빈 쿨리지가 워런 G. 하딩 대통령의 부통령으로 재직하던 시절 이런 농담 같은 일화도 있었다.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부통령이었던 해리 S. 트루먼은 대통령직 승계를 한 그제야 "대통령 각하, 맨해튼 프로젝트가 성공했습니다. 핵폭탄 한 방 일본에 쓸까요?"란 보고를 받았다고 한다. 전쟁의 가장 중요한 열쇠였던 것을 2인자인 부통령임에도 전혀 알지 못했던 것이다. 이 일을 겪은 트루먼이 기겁하고 부통령도 미국 NSC 상임위원으로 참가하도록 했기 때문에 향후 이런 일은 절대 없겠지만, 얼마나 부통령의 처지가 열악한지 잘 보여주는 일화이다. 특히 트루먼은 말이 러닝 메이트지, 정치적 타협의 결과로 앉은 경우였기 때문에[31] 백악관 내에서 의도적으로 따돌림을 당한 것이다. 전임 부통령이었던 FDR의 심복 월리스가 맨해튼 프로젝트에 깊이 관여한 것과 대비되는 부분.쿨리지는 부통령 재직 시절 가족과 함께 워싱턴의 뉴윌러드 호텔에서 거주했다. 어느 날 이 호텔에 작은 화재가 발생했는데, 호텔 측은 불상사를 방지하기 위해 모든 손님을 대피시켰다. 불이 진화된 후 쿨리지가 방으로 돌아가기 위해 계단을 올라갔는데 소방관이 길을 막고 "당신 누구요?"라고 묻자 쿨리지는 "Vice President[30]
"라고 답했다. 소방대원은 "올라가라"고 이야기했으나, 그 말을 한 직후 위로 올라가려는 쿨리지를 붙잡고 "잠깐, 당신은 어느 곳의 vice president요?"라고 물었다. 쿨리지는 의아해하며 "미합중국"이라고 답했는데, 소방관 왈 "당장 나오시오! 나는 당신이 이 호텔의 vice president(부회장)인 줄 알았잖소!"라며 쿨리지를 호텔 건물 밖으로 내쫓아버렸다고(...).
미디어에서의 대우도 박하다. 아무래도 대통령 궐위 시 가장 이득을 보는 직책이며, 병풍이라는 이미지 덕에 대통령에 원한을 갖고 배신하게 설정하기도 좋기 때문에 주로 대통령 암살 등을 꾸미는 등 음흉하게 등장한다. 대표적인 작품이 영화 아이언맨 3와 엔젤 해즈 폴른, 넷플릭스의 간판 정치 드라마였던 하우스 오브 카드의 시즌 2를 들 수 있겠다. 그리고 부통령이 주인공인 시트콤 Veep에서는 흑막이나 위엄 같은것도 없이 정말이지 2인자의 굴욕을 제대로 보여준다. 물론 다 그런건 아니고 기본적으로 부통령이 대통령의 동료인 만큼, 에어포스 원처럼 대통령을 무사히 구출하자 혹시 몰라서 써둔 권한대행 문서를 찢어버리고 웃는 멀쩡한 부통령도 있다.
6.1. 될 놈은 된다[편집]
그렇다고 부통령이 정말 아무 의미 없는 자리라고 절대 말할 수 없다. 일단 기본 직함인 (명목상)상원의장으로서 받는 캐스팅보트 역할을 실질적으로 수행할 일이 없진 않다. 미국 상원은 구성이 각 주 당 2명씩으로 딱 100명이고 6년 임기에 2년마다 3분의 1을 새로 뽑아 인사 회전이 느리기에, 상정한 법안에 대한 여야 입장이 첨예하게 다르거나 같은 당 내에서도 의견이 갈려서 의원 개개인이 소신대로 표를 행사하는 난리통이 가끔 터져서 확실히 50대 50이 나올때가 있다. 적어도 하원보다는 훨씬 빈번하게 나온다. 미국에서 이러한 이유로 부통령의 캐스팅 보트가 행사된 경우는 총 301번으로, 평균적으로 1년에 한 번 이상은 나온 셈이다. 이에 대해 조금 예시를 들자면, 클린턴 정부 초기 감세정책을 포기하고 누진세 강화로 가는 세제개편안이 정확하게 50 대 50이 나왔고, 당시 부통령인 앨 고어가 찬성표를 던져서 통과시켰다. 앨 고어는 4번의 캐스팅보트 역할을 수행했고, 조지 H. W. 부시는 7번, 딕 체니는 8번, 마이크 펜스는 13번, 카멀라 해리스는 현재까지 무려 33번의 캐스팅보트를 행사했다. 가장 많은 캐스팅보트를 행사한 부통령은 카멀라 해리스(33번)이며, 그 다음은 존 C. 칼훈(31번)이다.
또한 부통령이 없을 경우 하원의장이 대통령직을 승계하는데, 하원의장이 대통령과 다른 당이라면 힘 들이지 않고 정권교체가 일어난다. 한마디로 부통령은 여당의 정권 보호를 위한 일종의 보험같은 역할을 수행한다. 또 위에 언급한 웨스트윙을 예로 들자면 부통령이 스캔들로 사직하여 부통령직이 공석이 된 상황에서 대통령 직을 임시로 대행 시켜야 할 일이 생겼는데, 하원 다수당이 공화당이어서 민주당 출신인 대통령의 권한 대행을 공화당 소속인 하원의장이 승계해 극중에서 “미국 최고의 보수주의자에게 대통령직이 넘어간다”고 참모들이 한탄하는(…) 골때리는 상황이 있었다.
더불어 대통령으로 가는 코스나 마찬가지라 부통령이 된다는 것이 정치인의 입장으로서 결코 나쁜 것은 아니다. 오히려 할 일이 적기에 사고칠 일도 없고 어쨌거나 대통령 바로 밑 자리인 부통령직이 후일을 대비한다면 더 안정적일 수도 있다. 부통령의 기본 권한이 아무리 별로 없다고는 해도 유사시 대통령 자리를 대신할 수 있는데다 부통령 역시 대통령과 똑같은 선거인단이 뽑은 선출직이라는 끝내주는 정당성을 자랑하므로, 부통령 경험은 대통령 자리를 노릴 때 충분히 내세울 수 있는 경력이다. 대통령이 잘해서 지지율이 높으면 그대로 묻어갈 수도 있고, 못했다면 거리를 두면서 차기 대선을 노릴수 있는 높은 인지도의 자리인 것이다.
실제 사례로 부통령을 역임한 뒤에 대통령에 도전하거나 대통령이 된 사례가 꽤 있다. 특히 1960년대 이후로 부통령 역임자가 일단 당의 대통령 후보 경선에 출마하기만 하면 어지간해선 경선에 승리할 정도다. 일례로 리처드 닉슨, 휴버트 H. 험프리, 월터 먼데일, 조지 H. W. 부시, 앨 고어, 조 바이든이 있다.
선거인단 5명 차이로 대권을 놓친 앨 고어나, 세 번의 도전 끝에 대권을 거머쥐는 것까지는 성공했으나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불명예스럽게 사임한 리처드 닉슨, 그리고 레이건에게 525명 vs 13명으로 미국 역사상 두 번째로 큰 선거인단 차이수로 패배한 월터 먼데일도 부통령 출신이고[32] 당내 분열만 아니었으면 닉슨을 가볍게 이겼을 휴버트 H. 험프리도 부통령 출신.[33][34] 위에서 부통령직에 대해 궁시렁대며 씹어댄 존 애덤스는 미국 최초의 부통령이었고 부통령 경력을 마무리한 다음 곧바로 조지 워싱턴의 뒤를 이어 미국 2대 대통령이 되었다.
버락 오바마 정권에서 부통령을 지냈던 조 바이든 역시 2020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하여 대통령직에 올랐다. 부통령 퇴임 이후 정권을 내주었다가 재집권한 케이스는 닉슨에 이어 두 번째 기록이다.
20년 동안 정계에 몸담고 1996년에 대통령 후보로도 나왔던 밥 돌 상원의원도 1976년 제럴드 포드의 러닝메이트였고, 프랭클린 D. 루스벨트도 1920년 선거에서는 콕스의 러닝메이트였다. 그 해 승리한 워런 G. 하딩도 원래는 시어도어 루스벨트의 러닝메이트가 될 뻔 했다. 1919년에 그가 죽어서 대통령 후보가 되었지만, 주지사보다 부통령에 엮인 사람이 더 많을 정도.
그리고 대통령이 일부 권한이나 어느 정도 중요한 업무를 대행하도록 부통령에게 임의로 권한 일부를 위임해 주기도 하고, 부통령 자리가 실권은 없다지만 본인이 유능한 사람이고 정치적 입지도 높다면 그렇게 무시당하진 않으며 그게 심하면 오히려 정권의 실세로 등극하기도 한다. 물론 딱히 부통령에게 어디까지 위임을 해줘야 한다는 규정은 없기 때문에 영향력은 대통령과 부통령의 사정에 따라 다르다. 일반적으로 대통령과 정치적 사상/지향점을 공유하면서 대통령의 부족한 점을 보완하는 위치에 있는 부통령이라면 많은 권한을 위임받지만, 대통령과 정치적으로 대립하는 관계인데 정치적 이해관계에 의해서 부통령 후보가 된 경우는 완전히 뒷전 신세가 된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부터 부통령 권한 확대의 조짐이 보이기 시작했다. 상술하듯 부통령 시절 맨해튼 프로젝트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던 해리 S. 트루먼은 대통령이 되고 나서야 사실을 알고는 경악하여 부통령을 NSC 상임위원 중 하나로 지정했고, 고령인데다가 정치 경험이 일천했던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는 젊은 부통령 리처드 닉슨에게 국무회의 진행을 상당 부분 위임했다. 존 F. 케네디와 린든 B. 존슨 시절에도 백악관 내 다수의 소규모 프로젝트를 부통령이 지휘했다.
재미있는 점은, 존 낸스 가너와 해리 S. 트루먼 사이에 프랭클린 D. 루스벨트의 부통령이었던 헨리 A. 월리스는 핵무기 개발의 가능성을 검토하는 회의의 의장이 되는 등 미국 역사에서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실세 부통령이였다. 월리스 개인은 1948년 대통령 선거에서 진보당으로 독자 출마하여 2.6%를 득표해 4등이 될 정도로 상당한 능력을 가진 정치인이었다.[35] 2만 표만 더 얻었어도 트루먼의 낙선에 충분히 기여할 수 있었다. 그리고 관료로서도 정말 독보적인 인물로, 특히 미국의 막대한 농업 생산력 증진에 큰 업적을 남겼다. 월리스는 FDR의 제4기 임기의 부통령 경선에서 출마를 제지받지 않았지만, 당내 중진들은 "FDR의 의중은 트루먼에게 있다"라는 흑색선전으로 그를 저지시켰다. 훗날 중진 중 하나는 "여기 월리스를 대통령이 되지 못하게 한 자가 누워있다"라는 말을 남겼다.[36]
반면 트루먼은 "까가 없다"라는 이유로 당내 경선에서 1위였던 월리스와 2위까지 제치고 부통령이 된 인물이었다. 여하간 사람마다 다른거다.
6.2. 1977년 이후: 진정한 2인자로 부상[편집]
그리고 1970년대 이후로 오며 대통령이 맡아야 할 사안 중 특정한 의제를 대통령이 부통령에게 위임하여 처리토록 하는 방식으로 재량권을 주는게 거의 관례가 되었다. 미국이 초강대국이 되면서 미국의 역할과 비중도 덩달아 커지고 대통령의 업무 부담도 개인으로서는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가 되자, 대통령이 상대적으로 미흡한 분야를 뒷받침하면서 국정운영 전반의 안정감을 부여하는 역할을 맡는 것이다. 독재 국가의 독재자가 개인적으로는 격무에 시달리는 것을 생각하면 어느 정도 권한을 위임해 주는게 효율적인 것도 사실이고, 독재 국가도 아니니 위임 좀 해 준다고 정권이 무너지지도 않는다. 원래라면 대통령이 맡아야 할 국가의 막중한 정책 결정권을 위임해 주는게 다른 사람이라면 비선 인사라고 욕 먹을 수도 있지만, 둘 다 같은 선거로 뽑힌 이상 부통령의 정당성은 대통령 본인에 준하는 수준이므로 딱히 꿀릴 것도 없고 대통령 유고 및 궐위시 곧바로 대통령에 취임할 인재 중의 인재를 단순히 놀리는 건 그냥 혈세 낭비일 뿐이다. 그래서 이 시점부터 부통령의 실질적인 역할도 필연적으로 늘어났다. 얼마나 위임해 줘야 한다는 제도는 여전히 없어서 부통령이 보유하는 실권의 수준이 대통령 마음이긴 하지만, 각자가 가진 권한 정도는 다를지 몰라도 예전처럼 병풍 수준은 아니다.
이렇게 부통령의 역할이 커지면서, 대통령 후보들은 부통령을 지명할 때 본인의 단점을 커버해줄 수 있는 후보를 주로 지명하게 되었다. 보통 대통령 후보가 정치 경력이 긴 후보라면[37] , 정치 경력이 짧은 신성에 가까운 정치인을 부통령으로 지명하며, 반대로 대통령 후보가 정치 경력이 짧은 신성[38] 이라면 대개 정치 경력이 긴 정치인을 부통령으로 지명한다. 예를 들어 1992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늙은이 이미지에 고생하던 공화당의 조지 H. W. 부시 대통령 후보는 젊은 댄 퀘일 상원의원을 부통령 후보로 지명했다. 반면 매사추세츠 주지사로 진보적 입장이 뚜렷했던 민주당의 마이클 두카키스는 보수적이고 경제 경험이 풍부한 로이드 벤슨을 부통령 후보로 지명했다.
1977년 지미 카터가 대통령으로 취임하면서 부통령의 실권이 본격적으로 증가하기 시작한다. 카터는 조지아 주지사 출신으로 워싱턴 중앙 정계에서의 경험이 일천했기 때문에 미네소타의 3선 상원의원이었던 부통령 월터 먼데일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이외에도 먼데일은 잦은 외교 순방과 대통령과의 사적 친분 등을 바탕으로 '적극적인 부통령'이라는 새로운 모델을 제시한다. 오바마 대통령과 바이든 부통령, 트럼프 대통령과 펜스 부통령 등 현대 미국 정치에서 찾아볼 수 있는 당내 출신의 중량감 있는 2인자+조언가형 부통령의 선구자가 바로 먼데일인 것. 웨스트 윙에 부통령 집무실이 처음 생긴 것도 카터 임기 중이었다.
클린턴은 앨 고어에게 당시 미국경제 최대의 화두였던 신경제(New Economy)의 핵심인 정보기술산업(IT)과 관련된 업무결정권을 상당부분 위임하였다. 앨 고어의 경우는 2000년 대선에서 당내 보수파이자 후에 무소속으로 등장하는 유태계의 리버만을 러닝 메이트로 선정했다. 2004년, 부인이 대기업 오너 집안이었던 동부 지역 부자 출신 존 케리 대통령 후보는 노동자들과 친한 서민 이미지의 존 에드워즈에게 손을 내밀었다.
조지 W. 부시 시대의 딕 체니 부통령은 실세 부통령으로 이름을 날렸다. 이미 당선 이전에 아버지 부시 산하에서 국방장관을 지내기도 했던 그는 부시로부터 테러와의 전쟁 수행에 있어 광범위한 권한을 위임받아 활동하였다. 심지어는 아들 부시 재임 시절에는 대통령은 그냥 얼굴마담이고 딕 체니가 실권자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체니의 권한은 매우 컸다. 특히 딕 체니는 아버지 부시 때부터 함께 했던 인물인 만큼, 아들 부시로서는 그를 중용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비슷한 예로는 콜린 파월 국무장관, 도널드 럼즈펠드 국방장관 등. 다만 백악관 내 실상을 아는 사람들은 "딕 체니가 아들 부시의 커피 심부름을 해도 이상하다는 생각은 안 들었을 것이다"라면서, 의외로 아들 부시가 최고통치자인 것은 분명했다는 증언이 많다.[39]
오바마 때는 경선 2위였던 힐러리 클린턴이 부통령으로 고려되었으나 대신 국무장관 자리를 주었고, 부통령직은 7선 연방상원의원[40] 조 바이든이 뽑혔다. 존 매케인 진영에서는 세라 페일린 알래스카 주지사를 히든 카드로 내세웠고, 효과를 보는 듯 했으나 그녀의 망언과 멍청함이 드러나는 여러 행동으로 오바마-바이든을 추격하기는 개뿔, 지지도를 더 깎아 먹었다.[41] 버락 오바마의 부통령인 조 바이든도 국제관계 및 외교 분야를 전담하는 방식으로 대통령과 업무를 분담하였다.[42] 이후 힐러리 클린턴이 국무장관으로 들어오면서 영향력이 많이 약화되었지만 오바마 행정부 당시 복잡한 외교문제를 결정할 때는 오바마에 비해서 바이든이 적지 않은 권한을 행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바이든은 미국 역사상 5번째로 어린 만 29세에 정계에 진출하고 핵무기 감축 협상단에 끼어 브레즈네프 서기장을 만나는 등(1942년생, 1972년 당선)의 포스를 보이면서 기대를 제법 받았으나 국회에 나가서 오바마케어 관련 연설을 하는데 "Fucking great"[43] 발언을 하거나 코소보 내전 당시 "세르비아를 점령하고 독일이나 일본식으로 점령군 사령부를 세우자."는 등의 엽기적 발언으로 이미지가 좀 망가졌다. 그래도 실무 능력은 최상급이다보니 이제는 '쯧쯧 노인네 저거 또 저러네'라고 넘겨주는 분위기. 하지만 정가에선 계속되는 바이든의 실언으로 오바마의 지지율 하락을 막기 위해 2012년 선거에서는 부통령을 힐러리 클린턴으로 교체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라는 떡밥도 나돈 적이 있었다.
그 뒤를 이은 도널드 트럼프 정부의 부통령인 마이크 펜스 역시 2인자+조언자형 부통령으로 볼 수 있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당에서 아웃사이더라 당 내부 사정에 매우 어둡기 때문에 백악관의 비서진과 부통령, 각료들이 대통령의 추구하는 가치, 노선, 정책과 의중을 잘 파악하면서도 당내 사정에 밝고 당의 가치, 노선, 정책을 잘 이해하고 실천해야 하기 때문이다. 특히 부통령은 상원의장을 겸하기 때문에 의회에도 일정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어 대통령과 야당 또는 대통령과 집권당 내부의 불화로 정국이 꼬일 때 경륜이 풍부하거나 당의 가치와 노선, 정책을 잘 이해하고 있는 인사가 부통령이면 그가 막후에서 조정하여 정국을 풀어내는 사례도 종종 있다.
펜스 부통령의 경우 공화당의 전통적인 가치와 노선, 정책을 신봉하고 인디애나 주 연방 하원 6선에 해당 주의 주지사를 지내 당내 사정에도 밝을 뿐만 아니라 당내에서도 인망이 높아 트럼프를 보좌하는 부통령으로는 최고의 적임자였다. 심지어 트럼프에게 그다지 우호적이지 않은 폴 라이언 하원의장[44] 도 선거 당시 펜스가 부통령 후보로 지명되었다고 하자 트럼프와 펜스에게 큰 신뢰를 보였다. 당선 직후에 정권인수위원회 위원장이 되어 새정부 출범을 주도하여 실세로 군림했으며 트럼프와 의회의 중간다리 역할을 하면서 그에게 많은 조언을 하고 있다. 때때로 트럼프를 대신해 외교 분야에서의 업무를 위임받아 이를 수행하기도 한다. 2017년 3~4월에 한반도에서의 긴장이 높을 때 한국과 일본을 방문하여 북한의 도발을 억제한 점이 그 사례다. 민주당의 비슷한 사례로는 케네디의 부통령 린든 B. 존슨이 있는데 여기도 케네디의 젊은 나이로 당 내 파워가 약한 상황에서 노련한 존슨이 정치인들과 협상을 맡은 방식으로 업무를 양분했다.[45]
2020년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가 미국에서 대유행하자,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2020년 미국 대통령 선거 때문에 유세를 나가는 등 외부 일정을 소화해야 해서 대통령이 코로나 대응을 하지 못하게 됐다. 그러자 트럼프 대통령은 코로나19 대응에 관한 모든 통제권한을 마이크 펜스 부통령한테 위임하는 행정명령에 2020년 3월 1일 서명하였다. 2020년 3월 1일 이후 펜스 부통령이 백악관 코로나 상황실에 상주하며 모든 일처리를 도맡아 하는 등, 그야말로 역대급 업무와 책임에 파묻혀서 임기 마지막 해를 보냈다.
2020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부통령직에 당선된 카멀라 해리스는 대통령직 당선인인 조 바이든이 워낙 고령이라 바이든 본인은 자신의 전문 분야인 외교, 안보 업무만 책임지고 나머지 미국 내정 전반을 해리스 부통령한테 위임할 것이라는 추측이 많다. 특히 해리스 부통령은 인권 사업에 관심이 많아 이 분야를 책임질 것으로 전망 중이다.
7. 집무실과 관저[편집]
미국 대통령은 백악관에서 일하고 거주하지만 미국 부통령은 백악관에서 일하고 관저는 별도로 있어 이 관저에서 출퇴근한다. 미국 부통령의 관저는 워싱턴 D.C.의 미합중국 해군 부지 내에 있는 옵서버토리 서클 1번지[46] 이다. 이 건물은 본래 해군 천문대(United States Naval Observatory) 건물로서 지어진 것인데, 1920년대에 당시 미국 해군참모총장(Chief of Naval Operations)이 이 건물을 마음에 들어하여 직접 매입해 자신의 저택으로 사용했다. 이 저택이 공식 미국 부통령 관저가 된 것은 1974년으로, 원래 미국 부통령은 별도 관저 없이 워싱턴에 자기 집을 마련하고 거기서 출퇴근하는 형태였는데 존 F. 케네디 암살 사건 이후 미국 부통령의 경호 문제도 정치적 문제로 떠올라 의회에서 부통령을 위한 별도 관저를 마련해주기로 하였다. 이에 따라 해군 부지라서 경호가 상대적으로 용이한 옵서버토리 서클 1번지를 부통령 관저로 개조하여 1974년부터 관저로 쓰기 시작했다.
그러나 당시 부통령이었던 넬슨 록펠러는 이 관저를 자신의 주거지로 쓰지 않고 손님 접대용으로만 사용했다. 그래서 이 관저를 부통령 관저로 처음 쓴 부통령은 월터 먼데일이다. 그 뒤의 모든 부통령들은 이 관저에 거주했다.
한편 미국 부통령이 공식적으로 백악관을 집무실로 쓴 역사도 사실 얼마 되지 않는다. 그 전에는 '러셀 상원 사무실 건물'(Russell Senate Office Building)에서 상원의원들과 같은 집무실을 사용하였다. 백악관을 공식적인 부통령 집무실로 사용한 첫 부통령은 린든 B. 존슨이다. 백악관에 부통령 사무실은 이전부터 있긴 해서 존 C. 브레킨리지 같은 경우는 백악관으로 출근해서 집무를 봤다고 한다. 그러나 에이브러햄 링컨 대통령이 들어오면서 그 이후로는 백악관 내 부통령 집무실이 없어졌다가 생겼다가를 반복했다.
8. 기타[편집]
- 미국 정치사에서 부통령 직책의 역사적 기간은 대통령 직책의 역사적 기간보다 아주 조금 더 길다. 이것은 초대 부통령인 존 애덤스가 조지 워싱턴보다 당시 수도인 뉴욕에 9일 먼저(1789년 4월 21일) 도착하여 취임 선서를 했기 때문.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은 4월 30일 취임 선서를 하였으며, 두 사람 모두 1797년 3월 4일 퇴임했다.
- 조지 클린턴은 서로 다른 대통령(토마스 제퍼슨과 제임스 매디슨) 하에서 임기를 지낸 최초의 부통령이며, 역시 재직 중에 사망한 최초의 부통령이다. 그는 뉴욕 주의 초대 주지사였으며 건국의 아버지 세대에 들어가는 유명한 정치가이자 군인. 제퍼슨의 두번째 임기인 1805년 3월 4일부터 매디슨의 첫 임기 세번째 해인 1812년 4월 20일까지 재직했다. 이후 부통령은 11개월 여간 공석이었다. 제임스 매디슨은 두번째 러닝메이트인 엘브리지 게리[47] 도 1년 8개월 만에 사망하는 비보가 있었는데, 역시 남은 2년 4개월간 부통령이 공석이었다.
- 존 C. 칼훈은 1825년부터 1832년까지 존 퀸시 애덤스와 앤드루 잭슨 두 대통령 하에서 임기를 지냈다. 조지 클린턴에 이은 역사상 두 번째이자, 마지막 케이스. 심지어 두 대통령은 서로 정적이었으며, 첫 대선인 1824년의 경우 애덤스와 잭슨 모두 칼훈을 러닝메이트로 골랐다. 잭슨은 1824년 선거에서 이겼지만 과반을 차지하지 못해 대통령 결정 권한이 하원으로 넘어갔는데, 애덤스는 헨리 클레이와의 타협으로 선거인단 결과를 뒤집고 승리할 수 있었다. 그러나 칼훈은 애덤스와 잭슨 모두의 러닝메이트였으므로 부통령은 선거인단 투표에서 당선이 확정되었다. 한편 1828년 잭슨은 다시 현직 대통령인 애덤스에 맞서 재출마했고, 칼훈은 잭슨의 러닝메이트로[48] 선거에서 승리했다. 그러나 잭슨이 대통령이 된 후에는 주의 권리를 강조하던 칼훈과 잭슨은 불화를 일으켰으며,[49] 결국 러닝메이트는 교체되었고 잭슨은 마틴 밴 뷰런을 선임하여 재선했다. 칼훈은 임기를 3개월 남겨놓은 1832년 12월 28일 사임했다.
- 최단임 부통령은 최단임 대통령으로 1개월 만에 사망한 윌리엄 헨리 해리슨을 승계한 최초의 부통령 승계 대통령인 존 타일러다(1841년 3월 4일 ~ 4월 4일). 앤드루 존슨도 에이브러햄 링컨의 사망으로 재임 한달 열흘 만인 1865년 4월 15일로 임기를 마쳤다. 그러나 이런 승계 케이스가 아닌 최단명 부통령은 프랭클린 피어스의 러닝메이트 윌리엄 R. 킹이다. 그는 부통령이 되었을 때 심한 병을 앓았는데, 미국 의회의 특별 법령에 의하여 그가 요양 중인 쿠바 아바나 미국 영사관 앞에서 취임식을 가졌다. 그러나 차도가 없어 부통령을 지낸지 1달 보름만에 1853년 4월 18일 앨라배마 주 셀마에서 사망하였다. 이미 만 67세에 가까운 늙은 나이였다.(당대 2번째 최고령, 역대 4번째 최고령.)
- 사임한 최장임기 부통령은 위의 존 C. 칼훈[50] 이고, 사망한 최장임기 부통령은 4년 임기 만료를 5개월 앞두고 죽은 윌리엄 하워드 태프트 정부의 부통령 제임스 S. 셔먼이다. 그는 선거를 일주일 앞둔 10월 30일 사망했는데, 그의 사망으로 공화당 부통령 후보는 니컬러스 머리 버틀러[51] 로 급히 교체되었으나 당내 분열로 선거에서 압도적인 차이로 패했다. 승계한 경우 최장 임기 부통령은 2년 10개월의 린든 B. 존슨이다.
- 선거로 선출되지 않은 부통령은 제럴드 포드와 넬슨 록펠러 단 두 명이다. 수정헌법 25조에 따라 부통령이 공석이 될 시 대통령이 부통령을 지명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 그 이전 승계 대통령은 승계 임기 동안은 부통령이 없었다. 포드는 스피로 애그뉴의 사퇴로 리처드 닉슨이 지명했고, 록펠러는 닉슨의 사퇴로 포드가 대통령직을 승계하면서 지명했다. 애그뉴, 포드, 록펠러 세 사람은 한 임기(4년)에 부통령 세 명이라는 기록을 남기기도 했다.[52]
- 의외로 이렇게 다이나믹한 사건들로 8년 임기를 무사히 마친 운 좋은 부통령은 역사에 9명 뿐이다. 존 애덤스, 대니얼 D. 톰킨스[53] , 토마스 R. 마셜[54] , 존 낸스 가너, 리처드 닉슨, 조지 H. W. 부시, 앨 고어, 딕 체니, 조 바이든. 9명 가운데 4명이 80년대 이후인데, 이는 과거 미국 대통령과 부통령이 대다수 재선에 실패(혹은 포기)하거나, 암살, 질병 등에 많이 노출되었기 때문이다. 92년 이후 미국 정치가 양당이 8년씩 교대하는 식으로 상당히 안정되고 있다는 의미일 수도 있다. 사실 존 애덤스와 존 낸스 가너는 위에서 보듯 8년 임기를 꽉 채운 건 아니다.
- 가장 오래 산 부통령은 만 99세 생일 보름 전에 사망한 존 낸스 가너다(1868년 11월 22일~1967년 11월 7일). 한동안 1위를 했던 인물은 2위인 리바이 P. 모턴(1824년 5월 16일~1920년 5월 16일, 벤저민 해리슨의 러닝메이트, 만 96세 생일에 사망). 대통령을 지낸 부통령의 경우 가장 장수한 인물은 만 94세 6개월을 생존한 조지 H. W. 부시(전체 3위)이다(대통령으로선 2위). 뒤이은 기록 역시 역시 대통령을 지낸 인물로 4위는 93년 5개월 보름에 사망한 제럴드 포드(1913년 7월 14일~2006년 12월 26일), 5위는 93년 3개월을 생존해있었던(1928년 1월 5일~2021년 4월 19일) 월터 먼데일.
- 역대 49명의 부통령 가운데 22명이 대통령보다 나이가 많다. 하지만 그들 가운데 조 바이든을 제외하고 임기를 마친 후에 대통령으로 당선된 케이스는 없다. 예외가 린든 B. 존슨인데, 그는 승계 후 재선에 성공한 케이스.
- 취임 당시 가장 나이가 많았던 부통령은 만 71세 57일이었던 해리 S. 트루먼의 러닝메이트 앨번 W. 바클리(트루먼과 일곱살 차이). 대통령과 나이차가 가장 많았던 연장자 부통령은 버락 오바마의 부통령 조 바이든(오바마와 18년 8개월 보름 차이. 만 66세에 취임.)이다.[55] 대통령이 연장자일 경우, 제임스 뷰캐넌(만 66세에 취임)과 그 부통령 존 C. 브레킨리지(만 36세에 취임)는 나이차가 가장 많다(29년 9개월).[56]
- 최연소 부통령은 대통령과 나이차가 가장 많았던 존 C. 브레킨리지이다. 2위는 리처드 닉슨(당시 만 40세), 아버지 부시의 러닝메이트였던 댄 퀘일(당시 만 42세에서 보름 부족)[57] , 시어도어 루스벨트(만 42세 4개월)가 3,4위다.
- 리처드 닉슨은 최연소 부통령 2위를 포함한 여러 기록이 있다. 유일하게 임기중 사임한 대통령, 부통령이 사임한 대통령(미국 역사상 두 번 뿐이다), 최초로 부통령을 선임한 대통령, 유일하게 대통령에 당선된 전직 부통령[58] 등… 그리고 무엇보다 2014년 4월까지는 부통령 퇴임 이후 가장 오래 생존한 인물이었다. (현재는 2위) 닉슨은 퇴임 이후 12145일(만 33년 3개월)을 살았다. 역시 장수한 제럴드 포드는 11827(만 32년 4개월)일로 이 기록에서 3위.
- 퇴임 이후 가장 오래 살아있던 부통령은 카터 대통령의 러닝메이트였던 월터 먼데일인데, 2013년 6월 제럴드 포드의 기록을 깨고, 2014년 4월에는 리처드 닉슨을 깼다. 1981년 1월 20일에 퇴임하여 2021년 4월 19일 사망하기까지 퇴임 이후 40년 넘게 생존하는 기록을 세웠다.[59]
- 20세기 출생자들인 이 세 명을 제외하고 가장 퇴임 이후 오래 산 대통령은 1756년 생인 에런 버이다. 그는 만 45세에 취임한 후 4년을 재임했으며, 퇴임 후 11517일(만 31년 7개월)을 더 생존하고 만 80세 8개월에 죽었다.
- 상원의장직을 겸하다보니 대선 이후 간혹 묘한 상황도 생긴다. 미국 대선 시스템에서는 후보들의 선거인단 확보가 끝나고 이듬해 1월 선거인단 투표 결과를 의회에서 직접 선언한다. 만약 현직 부통령이 대선에 출마했다가 낙선했을 경우 본인의 낙선을 본인이 직접 선언하는 상황이 생기곤 한다. 케네디에게 패배했던 리처드 닉슨 부통령이 그러했고, 앨 고어도 그러했다.
- 임기 중 다른 사람을 총으로 쏜 부통령이 두 명 있다. 에런 버는 1804년 7월 11일 알렉산더 해밀턴과 그 유명한 결투를 하여 총으로 쏴 결국 그 상처로 죽게 만들었다. 딕 체니는 2006년 2월 11일 사냥하던 중 친구인 해리 휘팅톤에게 오발로 상처를 입혔다.
- 미국 부통령 권한을 이용해 적극적으로 악행을 저지른 인사도 있다.
- 에런 버는 부통령 임기 중에 상대당 쪽 거물인 전직 재무장관 알렉산더 해밀턴을 결투로 죽였다.
- 존 C. 브레킨리지는 자기를 부통령으로 뽑아준 나라에 대해 반역을 저질렀다. 남부연합의 전쟁장관이 된 것. 어쩌다 끌려들어간게 아니라 사우스캐롤라이나 주가 연방 탈퇴서를 제출하자 부통령직에서 사퇴한 후[60] 자기 고향인 켄터키를 남부연합에 가담시키려고 하고,[61] 아예 남부연합의 전쟁장관이 되기도 했다.
- 스피로 애그뉴는 병풍이라는 점을 이용해, 백악관 부통령 집무실에서 태연히 뇌물을 받다가 걸려서 사퇴했다. 공교롭게도 그 당시는 미국이 워터게이트 사건 으로 시끄러운 터라 제대로 처벌되지도 않았다. 애그뉴가 이 사건을 흘렸다는 의혹도 있을 정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