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군의 일본군 전사자 사체 훼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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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년 전 애리조나 피닉스에 사는 20세 전시 노동자 내털리 니커슨이 몸집 크고 잘생긴 해군 대위와 작별 인사를 나눌 때, 대위는 쪽바리 한 명을 보내주겠다고 약속했다. 지난주 내털리는 대위와 그의 친구 13명의 서명이 적힌 인간 머리뼈 하나를 받았다. 머리뼈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이 녀석은 좋은 쪽바리야. 뉴기니 해변에서 주운 죽은 쪽바리지." 선물을 받고 놀란 내털리는 머리뼈에 도조라는 이름을 붙였다. 군은 이러한 행동을 강하게 거부했다.

1944년 5월 22일자 라이프 34~35p에 실린 금주의 사진. 애리조나에서 전쟁에 동원된 여성 노동자가 그녀의 남자친구가 선물로 보낸 일본인 두개골에 감사의 편지를 적고 있는 모습이다.


1. 개요
2. 내용
3. 원인
4. 후폭풍
5. 기타


1. 개요[편집]


영어: American mutilation of Japanese war dead
일본어: 米軍兵による日本軍戦死者の遺体の切断

제2차 세계 대전 기간 동안 있었던 전쟁범죄 중의 하나로, 미군태평양 전쟁 중 전사한 일본군들의 시신을 훼손하여 두개골 등의 유골을 갈취한 사체 훼손 행위, 그리고 때론 살아 있는 일본군 포로의 신체를 훼손하여 신체부위를 갈취한 고문 행위다. 전쟁이 얼마나 인간성을 무참히 파괴하는지 보여주는 일례로 소개되고 있다.


2. 내용[편집]


태평양 전쟁에 참전한 미군 중 일부는 적 일본군의 신체 일부를 기념품으로 여겨 수집하기도 하였다. 이 중 가장 일반적으로 행해진 행위는 금니를 취득하는 것이었는데 소지하기 간편하고 약간의 금전적 이득도 챙길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정도에서 그치지 않고 신체를 훼손하고 그 일부를 전리품으로 간주하거나 장식품 및 장난감으로 사용하는 경우도 있었다.

가장 대중적으로 수집된 것은 일본군의 두개골인데 이러한 두개골들은 trophy skull로 칭해졌으며 이미 백골화된 유골을 취득하기도 하였으나 유체를 훼손, 절단하여 인위적으로 수집하기도 하였고 목을 푹 삶아서 살점을 발라낸 뒤 유골만 떼가기도 할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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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의 두개골로 전면을 장식한 미군 차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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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집한 일본군 두개골을 들고 해맑게 웃고 있는 미군 병사들

이러한 '트로피' 수집행위는 의외로 널리, 공공연하게 행해졌는데 이미 이러한 인체 수집 행위는 전쟁 중에도 미국과 일본 양쪽에 언론 매체를 통하여 널리 알려진 사실이었다. 일본군의 팔뼈로 만든 편지칼이 당시 미국 대통령이었던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선물로 보내지기도 하였는데 당연히 루스벨트 대통령은 이 선물을 반환하였다.

"(중략) 하지만 그 일본인은 죽지 않았다. 그는 등을 심하게 다쳤으며 팔을 움직일 수 없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숨이 끊어지는 순간까지 저항했을 터였다. 그 일본인의 입은 커다란 금니로 번쩍였고, 그를 생포한 자의 목표는 그것이었다. 그는 케이바 나이프를 이의 뿌리에 고정시키고 손바닥으로 손잡이를 내려쳤다. 일본인이 그를 때려대며 몸부림쳤기에 칼날은 이에서 미끄러져 그의 입 깊숙히 파고들고 말았다. 해병은 일본인에게 욕설을 내뱉고는 칼로 귀 끝까지 뺨을 찢었고, 고통스러워하는 일본인의 아래턱에 발을 받치고는 다시 이를 뽑으려 했다. 피가 일본인의 입에서 쏟아져 나왔고, 그는 끄르륵 소리를 내며 몸부림쳤다. 나는 그를 고통에서 해방시켜 달라고 소리쳤으나 대답으로 돌아온 것은 욕설뿐이었다. 다른 해병이 달려와 그의 뇌에 총알을 박아넣어 주었고, 그의 고통을 그렇게 끝내 주었다. 그는 불평하다가 개의치 않는 듯 기념품을 계속해서 뽑아냈다."

[ 영어 원문 펼치기 · 접기 ]
But the Japanese wasn't dead. He had been wounded severely in the back and couldn't move his arms; otherwise he would have resisted to his last breath. The Japanese's mouth glowed with huge gold-crowned teeth, and his captor wanted them. He put the point of his kabar on the base of a tooth and hit the handle with the palm of his hand. Because the Japanese was kicking his feet and thrashing about, the knife point glanced off the tooth and sank deeply into the victim's mouth. The Marine cursed him and with a slash cut his cheeks open to each ear. He put his foot on the sufferer's lower jaw and tried again. Blood poured out of the soldier's mouth. He made a gurgling noise and thrashed wildly. I shouted, "Put the man out of his misery." All I got for an answer was a cussing out. Another Marine ran up, put a bullet in the enemy soldier's brain, and ended his agony. The scavenger grumbled and continued extracting his prizes undisturbed.

태평양 전선에 투입된 미군 해병 유진 슬레지의 회고록에서



더 퍼시픽에서 재현된 위 사건. 역시 끔찍한 장면이지만 실화보다는 조금 덜 적나라하게 묘사되었다.[1]

심지어 살아있는 일본군 포로나 부상자를 묶어 놓고 금니를 빼거나, 입을 찢거나, 귀를 자르거나, 코를 도려내는 등 신체를 훼손하여 '기념품'을 챙기기도 한 고문 행위도 이루어졌다.

단순한 시체훼손뿐만 아니라 시체를 수습하는 일본군을 폭사시키기 위해 시체에 부비트랩을 설치하거나 식량이나 보급품에 부비트랩을 장착한 뒤 전장의 잘 보이는 곳에 버려두어 일본군의 접근을 유도하는 행위도 이루어졌다.[2]

물론 미군 측에서도 이러한 행위가 야만적인 행위라는 것을 인식하고 있었고 1944년 미군 측에서는 이러한 행위를 1929년 제정된 병자와 부상자에 대한 제네바 협약에 대한 위반으로 규정하고 해당 범죄를 저지른 미군 병사에 대하여 처벌하겠다고 공표하였지만 그럼에도 이러한 행위가 완전히 근절된 것은 아니었다.


3. 원인[편집]


당시는 전세계가 총력전에 휘말렸던 만큼 세계적으로 인종에 대한 편견과 증오가 만연했고 미국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때는 흑인뿐 아니라 이민 온 지 얼마 안 된 유럽인이나 재미 아시아인, 특히 미국과 전쟁하던 적성국가 출신 이민자들[3]은 말할 것도 없었으며 일부 인종주의적 성향이 강한 소수의 백인들은 황인종을 백인과 동등한 인간으로 취급하길 거부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경향은 전쟁이 시작되면서 인종주의적 편견이 포함된 프로파간다가 적극적으로 행해지면서 더욱 증폭되었다. 이로 인하여 일부에서는 일본군을 자신들과 동등한 인간으로 취급하길 거부하는 인식이 있었다. 가뜩이나 2차대전기 일반병사로 동원된 20대 청년들은 대부분 대공황 시기에 태어나 대부분이 망가진 유년생활을 보내다가 징집되어 태평양, 유럽 전선으로 보내졌으니 그 분노는 이루 말할 것이 없었다.

또 일본의 진주만 공습으로 인한 선제공격으로 일본에 대한 미국의 분노는 상당한 수준이었다. 이미 그때 백악관 행정명령 9066호까지 발효되었기 때문에 일본계 미국인들에 대한 신변구속 등의 행위는 합법적이기까지 했다. 그렇게 강경해진 국내 분위기를 타고 태평양 전쟁에서 실제로 맞닥뜨린 일본군은 미군에 절대 자비로운 군대가 아니었으며 일본군의 미군 전사자 사체에 대한 훼손 행위는 가히 어마어마한 수준이었다. 이러한 일본군의 행위는 속속히 미국에 전달되어 보도되었다. 유진 슬레지의 저서에서도 펠렐리우 전투 당시 미군 전사자의 사체에 대한 일본군의 참혹한 시신 훼손 만행이 언급되며[4] 아버지의 깃발이라는 도서에도 포로가 된 해병대원 랠프 이그나토프스키(Ralph Ignatowski)를 총검으로 찔러 죽이고 팔뚝에 있는 해병대 문신을 훼손한 후 그 해병대원의 성기를 잘라 입에 쑤셔넣고 두개골을 부수고 팔을 절단하는 등 일본군의 끔찍한 시체 훼손 만행이 나온다. 이러한 분노의 표출 방법 중 하나가 미군도 보복 차원에서 일본군 전사자에 대한 시체훼손을 자행한 것이다.

4. 후폭풍[편집]


이러한 행위는 당연히 일본군의 귀에도 들어갔고 일본군은 귀축영미의 만행을 보라는 식으로 대대적으로 선전하였다. 이로 인하여 일본측 민간인들은 미국에 대하여 극도의 공포심을 가지게 되었고 미군의 상륙작전 때 공포심에 사로잡힌 민간인들이 집단자살을 하기도 하였다.


5. 기타[편집]



  • 동남아 전역에서 일본군과 싸우던 영국군, 호주군, 네덜란드군도 이 행위를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5]

  • 시간이 지나 1960년대 일어난 콩고 분쟁에서도 백인 용병단들이 죽은 게릴라들의 해골로 차를 장식하는 등의 비슷한 행동들을 했으며, Africa Addio라는 다큐에서도 해당 장면들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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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맨 마지막의 칼을 쥔 슬레지의 행동이 압권이다. 이제 이런 것도 다 질렸다는 듯이 칼을 내려놓는다. 정황상 해도 되는 것이 맞나 고민하다가 멘붕이 온 듯하기도 하겠지만 칼을 잡은 모양으로 봐서 아마 일본군 대검만 뽑고 있었던 듯.(병사와 슬레지의 파지법을 비교해 보자. 병사는 칼에 체중을 싣고 있지만 슬레지는 연필 잡듯 잡고 있다.)[2] 물론 이러한 행위는 일본군 측에서 먼저 자행했으며 이를 보고 열받은 미군이 똑같이 돌려준 것이다.[3] 독일계 미국인, 이탈리아계 미국인, 일본계 미국인.[4] 슬레지와 동료 해병들은 머리, 사지, 성기가 잘려나간 참혹하게 훼손된 미 해병 시신 3구를 목격하게 되었고 이 사건을 계기로 슬레지와 동료 해병들은 일본군에 대한 어떠한 연민도 가지게 되지 않게 되었으며 미 해병이 보복으로 같은 행위를 저지르거나 일본군 포로를 잡지 않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고 증언했다. 또 전 해병 참전 군인이었던 로무스 발튼 버긴도 나무에 묶인 채 총검 연습용으로 쓰인 미 해병의 시신과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토막이 난 미 해병의 시신을 보고 전후까지도 일본군을 증오하게 되었다고 증언했다.[5] 일본군은 영국군, 호주군, 네덜란드군 포로도 매우 잔혹하게 다루었으며 포로로 잡은 인도인 부대를 총검으로 찔러 학살하는 사진도 있다. 때문에 영국군과 인도 제국군, 호주군, 네덜란드군도 일본군에 대한 극심한 증오를 품어 일본군의 시체를 끔찍하게 훼손하거나 포로를 학살하거나 학대하는 등의 보복행위가 빈번했다. 아일랜드, 동아프리카 식민지, 인도 등 영국에 강한 반감을 품었던 지역 출신의 영국군 병사들이 일본군의 야만스러운 만행을 보고 빠르게 영국보다 일본을 더 증오하게 되었다는 유명한 일화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