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노스(백야극광)

제 이 부러진 뿔에 신경을 쓰신다 해도 괜찮습니다. 주변에 저처럼 머리에 부러진 뿔이 자라난 사람이 있다면 누구든 불안할 테니까요. 아... 사과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저와 피가 이어진 혈육들도 이런 제 외모를 숨김없이 혐오했습니다. 호기심이든, 두려움이든 사람이 지닌 평범한 감정인 것이죠. 그래서 저는 이 뿔이 왜 부러지게 된 이유를 설명해 드리는 데 거리낌이 없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저는 이 뿔이 부러지며 새 삶을 얻었으니 말입니다.
그때 안데르센 가문의 가주님은 아직 [주인님] 이 아니라 저의 [목표] 였습니다. [스승님] 역시 그때는 저의 [스승님] 이 아닌, 가주님의 베테랑 집사셨고요. 저는 칼을 들고 안데르센 가문의 가주님을 향해 달려들었지만, 베테랑 집사에게 저지당해 옷깃도 스치지 못했습니다. 이 뿔도 그때 집사님이 부러뜨리신 것이죠. 저는 제압당한 채 바닥에서 패자가 맞게 될 결과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은 제가 암살자라는 사실을 눈치챘지만, 가주님께서는 저를 [집사의 경솔한 제자] 라고 칭해 주셨습니다. 가주님의 목숨을 노렸던 제 행동을 눈감아 주신 겁니다. 그리고 잘려 버린 뿔 반쪽과 저의 못난 과거는 그날 이후로 제 곁을 떠났습니다.
　

조종사 님께서 제 과거에 그렇게 흥미를 보이실 줄은 몰랐군요. 그러시다면 더 이야기해 드리겠습니다.
아인 혈통을 지닌 저는 빈민굴에서 태어났습니다. 형은 가족들을 배부르게 먹이려고 저를 암살자 조직에 팔아넘겼지요. [운명의 손] 이 떠민 것처럼, 저는 저를 사랑하는 이가 하나도 없는 가족의 품에서 암살자 조직으로, 그리고 조직에서 받은 의뢰를 통해 안데르센 가문으로 떠밀렸던 겁니다.
아무튼 저는 조직의 임무에 실패했고, 주인 어르신께서는 제가 한 짓을 눈감아 주셨습니다. 그리고 스승님은 제게 떠날 건지, 그곳에 남을 건지 선택하라고 하셨죠. 저는 망설임 없이 안데르센 가문에 남기로 했습니다. 안데르센 가문에서 지내며, 저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오롯한 나 자신으로 대우받는 느낌이 어떤 것인지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처음으로 저의 삶도 타인에게 존중받고, 환영받아도 되는 생동감 있는 삶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죠.
드디어 [운명의 손] 의 장난에서 벗어나, 제가 속할 곳에 도달했던 겁니다. 이런 제가 주인 어르신과 스승님의 은혜에 보답할 방법은 오직 [안데르센 가문에 충성을 다하는 것] 입니다.

　

니나 아가씨와 그분의 집사인 제가 잠시 사이가 멀어졌던 때를 아직 기억하고 계셨군요. 심려를 끼쳤습니다. 이제 와서는 모든 오해가 풀렸지만, 니나 아가씨께서 저를 멀리하시게 된 [그 사건] 은 앞으로도 평생 잊을 수 없을 겁니다.
암살자 조직에서 생활했던 저에게 피비린내 나는 일상은 무척 당연했습니다. 무감각해질 정도로 말이지요. 어느 비오는 날, 저는 예상치 못하게 주인 어르신을 해치려던 암살자를 발견했습니다. 그리고 그 암살자를 [처리] 한 후 급히 주인 어르신의 안전을 확인하러 갔고, 마음이 급했던 터라 제 옷깃과 머리카락, 그리고 뺨에 묻은 것이 빗물인지 상대의 피였는지 신경을 쓸 겨를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 상태로 아가씨와 마주치게 될 줄은 미처 생각지 못했습니다. 아가씨께서는 가만히 서서, 몸을 부들부들 떠시곤 비명을 지르며 그 자리를 떠나셨습니다. 그때까지도 상황을 파악하지 못했던 저는 계속 아가씨의 이름을 불렀지만, 당연하게도 아가씨께서는 돌아봐 주시기 않았습니다. 그러다 번개가 쳤고, 그제야 저는 창문에 비친 제 무시무시한 꼴을 보게 됐습니다. 얼굴이 피범벅이더군요. 그날 이후로 아가씨께서는 저를 차갑게 대하기 시작하셨습니다. 심지어는 저를 피하셨지요. 하지만 이보다는 제 불찰로 아가씨께서 저의 꼴사나운 모습을 보게 만들었다는 사실이 더 후회스러웠습니다. 앞으로 그런 실수는 두 번 다시 저지르지 않을 겁니다.
　

제게 [완벽] 한 집사라고 말씀해 주신 겁니까?
영광이지만, 집사로서 저는 아직 갈 길이 멉니다. 주인님께 복종하는 것은 물론, 접객부터 정보 수집, 그리고 암귀를 저지하고 처치하는 것까지... 모두 기본 중의 기본입니다. 집사로서 업무를 볼 때면 부득이하게 암살자 때 했던 일과 비슷한 일을 해야 할 때가 있지만, 지금은 그때와는 전혀 다른 마음가짐으로 임하고 있습니다. 이제 저는 안데르센 가문을 위해 움직이고 행동합니다.
안데르센 가문의 사업을 지키기 위해, 스승님을 도와 가문에 일어난 내란을 잠재웠던 적이 있습니다. 스승님이 안 계신 지금은 제가 안데르센 가문의 집사 중 발언권이 가장 높습니다. 제게는 주인 어르신을 보좌하는 것 이외에도 아가씨를 이끌어 드려야 하는 소임이 있습니다. 아가씨께서 홀로서기를 하고 싶어 하신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만, 집사로서 안데르센 가문의 차기 가주가 되실 분의 안전을 지키는 것을 최우선으로 둘 수밖에 없습니다.
예? [니나 아가씨께 미움을 받는다고 해도 괜찮아?] 라고 물으신 겁니까? 괜찮지는 않습니다... 가슴은 아프겠지만, 저도 각오했습니다. 아가씨께서 진정으로 홀로 서실 수 있는 그날이 오기 전까지는 저도 물러서지 않을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