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라이 학살

덤프버전 :

주의. 사건·사고 관련 내용을 설명합니다.
이 문서는 실제로 일어난 사건·사고의 자세한 내용과 설명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해당 사건 당시의 사진[ 펼치기 ]
파일:My_Lai_massacre.jpg
[주의][사진설명]
My Lai Massacre (영어)
Thảm sát Mỹ Lai (베트남어: 慘殺美萊, 참살미래)

1. 개요
2. 배경
3. 학살
3.1. 폭로와 처벌
4. 이후
5. 기타



1. 개요[편집]


파일:ra663.jpg
미라이 학살의 피해자들 중 일부. 해당 민간인들은 사진이 찍힌 직후 전부 살해당했다. 오른쪽의 블라우스 단추를 여미는 여성은 사진 촬영 전 성폭행을 당한 직후였다.[1]

나는 이 일이 허구이길 바란다고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미라이 학살을 조사한 참전 용사 윌리엄 윌슨(William Wilson) 대령

베트남 전쟁 중이던 1968년 3월 16일베트남 공화국 꽝응아이성 미라이에서 미군이 저지른 학살 사건.

이 학살로 비무장 상태의 민간인들이 347명(미국 측 집계)에서 504명(베트남 측 집계)가량 희생되었으며 희생자의 상당수는 여성, 어린이, 그리고 아기 등 비전투원이었다.

이 사건으로 22명의 미군이 해당 전쟁범죄에 가담한 혐의로 기소되었으나 윌리엄 캘리 중위만 유죄 판결을 받았으며 종신형을 선고받았으나 1971년 가택연금으로 감형되었으며 그마저도 3년 뒤에 해제되었다.

명목상 군사 작전 중 민간인이 희생된 것조차 아니라 말 그대로 민간인들을 향한 직접적이고 일방적인 학살이었기 때문에 미라이 학살은 전세계에 큰 충격을 불러왔으며 이 사건으로 인해 미국 내 베트남 전쟁 반대 여론은 더욱 강해졌다.

2. 배경[편집]


당시는 구정 공세 직후, 미군의 반격 작전 중이었다. 격렬했던 구정 공세를 격퇴하면서 분노한 미군은 대대적인 반격으로 잃어버린 지역들을 빠르게 수복하면서 각지에서 베트콩을 격파, 섬멸하고 있었다. 그러나 경험해 본 적이 없는 치열한 전투가 반복되며 미군 역시 인명피해가 컸다.

문제의 학살을 저지른 미합중국 육군 제23보병사단(아메리칼 사단) 11여단 20보병연대 1대대 C중대는 전선에 투입된 지 불과 4달밖에 지나지 않았으며 구정 공세 이후 반격작전에서만 중대원 5명이 전사한 상태였다고 한다.

한편 이와 별개로 사단 사령부는 구정 공세로 빼앗겼던 지역에 대한 수복작전을 준비했다. 피점령지구를 되찾는 것은 군으로서는 당연히 해야 할 일이었고 수복 대상에는 손미 마을에 포함된 미라이 마을이 포함되어 있었다. 미군은 작전 당시 미라이 마을을 핑크빌(Pinkville)이라는 코드네임으로 불렀는데 베트콩 동조자들로 의심되는 마을이라 그런 이름이 붙었다는 이야기가 퍼졌지만 23사단 참전용사 출신 작가 팀 오브라이언에 의하면 단순히 미군 군사 지도에 시가지를 의미하는 밝은 분홍색으로 칠해져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3월 15일 반격 명령을 받은 20보병연대 1대대는 작전회의를 통해 A, B 두 중대가 미라이 마을을 포위하고 C 중대가 마을로 진입하기로 했다. 베트콩 및 그 동조자로 의심되는 사람은 모조리 사살 및 체포하라는 지시가 함께 내려졌다.


3. 학살[편집]


"나는 미라이 지역이 썩 기분 좋은 동네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고, 부대원들도 '붉은 동네'라는 소문을 들어서 어느 정도는 알고 있었다. 그런데 막상 마을에 들어가 보니 사람들이 살고 있지 않아서 썰렁했다. 연기가 피어나는 곳이 있어서 혹시 사람들이 살고 있지 않나 하고 경계했지만, 지뢰가 터져 사람들이 죽은 자리라는 것이었다.[2]

미라이라는 동네 터 외에는 아무것도 공격할 것이 없었다. 이미 주민이나 베트콩도 없는 상태에서 그곳은 썰렁한 마을, 벼만 촘촘히 심어 놓은 논, 폭격으로 생긴 분화구, 구제 불능의 가난만 남아 있는 동네가 되어 있었다. 우리는 더 할 일이 없어서 부서진 가옥들을 불태우고 동굴들을 폭파시켜 버렸다."

베트남 10000일의 전쟁 p.489~490에서 병사 팀 오브라이언의 증언 발췌

3월 16일 C 중대가 미라이 마을로 진입했으나 이미 베트콩 및 그 동조자는 다 도망간 상태였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이 경우 상식적으로 보면 마을을 불태우고 주민들을 강제 소개한 다음 조사에 들어가는 게 상식이다. 그런데 미 육군 장병들은 가옥들을 수색하는 과정에서 남은 사람들을 모두 끌어냈다. 그 다음 묻지마 학살이 시작되었다.

학살에 참여한 40명 이상의 군인들은 논과 수풀에서 눈에 보이는 사람들에게는 성별과 나이 상관없이 무차별적으로 총기를 난사했으며 사람들을 총검으로 찌르거나 참수하는 방식으로도 죽였고 총을 쏘기 전에 신체를 절단하고 살해하기도 했다. 그리고 군인들은 민간인들을 그룹으로 모으고 M79 유탄발사기를 쏘거나 우물에 던진 후 그 우물에 수류탄을 던지기도 했으며 도망치는 여성어린이들까지 추격해서 사살했고,갓난아기를 품에 안은 여성까지 봐주지 않고 살해했다.[3] 그리고 일부 여성 희생자들은 집단 성폭행성고문을 당했으며[4] 가장 어린 성폭행 피해자는 12세였다.[5] 그리고 학살 과정에서 군인들은 미라이 마을에 있던 가축까지 모조리 죽이고 마을의 집들을 불태우기까지 했다.

더 어처구니없는 것은 이런 민간인 학살을 도망치는 적군 사살로 처리했다는 것이다. 물론 게릴라의 특성상 민간인으로 위장한 이들이 많고 개중엔 여성들도 많았으니 그렇다 쳐도 학교 다닐 나이도 되지 않은 아이들마저 게릴라로 치부한 것은 분명 잘못되었다. 어린아이가 게릴라의 일원인 경우가 실제로 있기는 했다. 철 들지도 않았을 어린 나이임에도 주변 분위기 등으로 인한 (사회적) 압력으로 동조하게 되어 적극 참여하는 경우도 있다. 도의적 문제와 현실적 문제가 상충하여 복잡한 사안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 학살이 정당화되는 것은 아닐 뿐더러 애초에 이 사건은 아이들이 베트콩에 동조한다는 물증도 없이 마구잡이로 학살했다는 점에서 변명의 여지가 없다. 또 성폭행과 같은 전쟁범죄 앞에서는 '민간인처럼 보이는 게릴라들에 시달렸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는 변명을 늘어놓기 적절하지 않았다.

학살은 그걸로 끝난 것이 아니어서 작전완료 보고 직후 도착한 증원부대가 인접한 미케 마을에서 학살을 저질렀다. 단 4시간이라는 이 짧은 기간 동안 두 마을을 합쳐서 학살된 민간인의 숫자는 약 347명에서 504명 사이로 추정된다. 베트남에 있는 선미 학살 박물관에서는 총 504명이 학살되었다고 한다. 박물관에 있는 비석에는 504명(남성 231명+여성 273명[6])의 이름이 다 적혀 있다.[7] 참고로 당시 미라이 마을에는 고작 507명만 거주하고 있었다.

당시 미 육군 항공대의 OH-23 정찰 헬리콥터를 조종하며 상공을 비행하던 항공준사관 휴 톰슨 주니어(Hugh Thompson, Jr.)와 승무원인 상병 로렌스 콜번(기관총 사수) 및 상병 글렌 안도레타 세 명이 민간인 학살 현장을 목격하고 경악해서 생존한 민간인 구출을 단행했다.

이 과정에서 C 중대와 통신으로 치고받고 싸운 톰슨 준위는 열받아서 콜번 상병에게 캘리 소대원들이 방해할 경우 사살해도 좋다는 지시를 내렸고 총기로 대치하면서 민간인 구출을 강행했으며 최종적으로 아이 중심으로 서너 명의 민간인을 구출하는 데 성공했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777px-OH-23_inflight_colour_photo.jpg

0H-23은 정찰 용도의 소형 헬기였기 때문에 서너 명을 구조하는 것이 한계였다.

그리고 캘리 소대의 한 병사는 민간인 학살에 가담하지 않기 위해 일부러 발에 총을 쏜 후 적 무기를 3개만 노획하기도 했다.

3.1. 폭로와 처벌[편집]


당시 23사단에 있었으며 켈리 소위의 명령을 받고 미라이 학살에 가담한 육군 병사 폴 메들로는 다음과 같은 증언을 방송에 출연해 남겼다.

방송 진행자: 어떤 사람들이었죠? 양민, 여자, 아이들이었나요?

폴 메들로: 양민, 여자, 아이들요.

방송 진행자: 아기도요?

폴 메들로: 아기도요.

폴 메들로: 캘리 소위가 와서 그랬어요. 저들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지? 그래서 전 '예' 라고 했죠. 당연히 전 감시하라는 말인 줄 알았어요. 갔다가 10분에서 15분 후에 다시 돌아오더니 켈리 소위가 여태 안 죽이고 뭐 했어? 라고 그랬어요.

방송 진행자: 당신은 그때 몇 명이나 죽였나요?

폴 메들로: 전 자동화기를 쐈는데, 그냥 마구 갈겼습니다. 너무나도 빨리 지나가서 몇 명이나 죽였는지는 모르겠어요. 아마 10명에서 15명 정도 죽였을 겁니다.

방송 진행자: 양민, 여자, 아이들을요?

폴 메들로: 양민, 여자, 아이들요.

방송 진행자: 아기도요?

폴 메들로: 아기도요.

폴 메들로: 내가 왜 그랬냐고요? 전 명령을 받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건 마치 그땐 정당한 일을 한다고 생각했어요. 정말로요! 전우를 잃었거든요. 정말, 정말 친했던 친구 바비 윌슨요. 그게 마음에 걸렸어요. 그게 마음에 걸려서요. 그러고 나니 속이 후련했어요. 하지만 그날 이후로 그 사건이 나를 괴롭혔어요.

방송 진행자: 젊고 능력 있고 용감한 미군이 노인과 여자, 어린이, 아기들을 한 줄로 세우고, 냉혈한처럼 쏴 죽인다는 걸 많은 선량한 미국인은 받아들이기 힘들 것 같은데, 어떻게 설명하시겠어요?

폴 메들로: 모르겠습니다.

PBS 다큐 베트남 전쟁 8화

미라이 학살 사건은 군부의 엄격한 통제로 1년간 철저히 은폐되었다. 국방부는 이 사건을 은폐하려고 했으나 사진기자 로널드 해벌(Ronald Haeberle)이 찍은 학살 당시의 사진이 "라이프(Life)" 지를 통해 1969년 세상에 공개되고 프리랜서 기자인 시모어 허시(Seymore Hersh)에 의해 학살이 폭로되었다.

아이러니하게도 미라이 학살이 세상에 폭로된 1969년은 미국의 닉슨 대통령이 단계적으로 베트남에서 지상군을 단계적으로 철수를 실행하던 시점이자 북베트남의 지도자이자 독립운동가인 호치민이 사망한 해이기도 하다.

미군은 즉시 1대대 주요 지휘관과 사병, 상급부대 지휘관들을 조사하기 시작하면서 상급부대에서부터 이미 마을을 초토화시키라는 명령, 확 쓸어 버리라는 명령 등이 나왔음이 확인되었다.

그러나 정작 체포된 장교 14명 가운데 형사처벌을 받은 이는 사건 당시 현장지휘자였던 소대장 윌리엄 로우 캘리 주니어(William Laws Calley Jr; 1943. 6. 8. ~ ) 육군 보병소위 단 한 명뿐이었다. 상급부대의 명령은 명확한 학살 명령임이 증명되지 않은 점을 들어 관용어구 내지 오해로 넘어갔다.

부대원의 증언 중에는 학살 전날에 이미 학살 명령이 있었다는 말도 나온다. 부대원과 상급 장교의 증언이 일치하지 않는데 실제 상급부대에서 직접적으로 학살을 언급했을 가능성보다는 부대원이 죄를 공유하기 위해 거짓 증언을 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파일:external/media.npr.org/william-calley-1971-0f3244cb88f1889add2e7825d424bac86c836ce4-s40-c85.jpg

육군 정복 차림의 캘리 소위.

파일:external/dicksworld.files.wordpress.com/calley-2.jpg

현재의 캘리.

캘리 소위는 지휘력이나 지적으로 장교로서 부적합한 인물로서 전문대학(community college)조차 낙제한 학습 부진아였다. 이후 사회 밑바닥에서 여러가지 직업을 전전하다가 육군에 자원입대했다. 훈련병 시절 우수한 성적 덕분에 캘리는 바로 사관후보생(Officer's Candidate)에 지원할 수 있었고 소위로 임관했다.

그러나 캘리는 독도법 등 장교가 익혀야 할 가장 기본적인 지식조차 제대로 갖추지 못했을 만큼 심각하게 무능했다. 그나마 성격이라도 좋았으면 다행이었겠지만[8] 그는 인성도 엉망이었고, 소대 내에서의 지도력, 통솔력이나 평판도 형편없어서 일부 소대원들은 캘리 소위에 대한 프래깅을 모의할 정도였다.

사고를 친 캘리 소위는 민간인 학살 혐의로 종신형을 선고받았지만 1971년 리처드 닉슨 미합중국 대통령이 가택연금으로 감형시키더니 그마저도 3년 뒤에 해제되었다. 이는 미국이 진짜 민주주의와 자유의 나라냐며 맹렬한 비판에 직면하는 원인이 되었다.

일반적인 시각으로 캘리를 희생양으로 보는 경향이 있으며 사건을 지나치게 확대한 책임은 분명히 있었다. 단순히 높으신 분의 명령만 수행한 것이 아니라 그 이상의 행위는 분명히 책임이 있었고 윗선에서 덮어줄 영역을 넘어선 것이었다.

실제로 非육군사관학교 출신인 캘리가 벌인 만행 때문에 미군 장교 선발 기준이 강화되었다. 원래 미군 장교 중 Green to Gold(간부사관) 제도는 사병 시절 훈련성적을 보고 우수하면 바로 뽑아 줬으나 오직 윌리엄 캘리 한 사람으로 인해 3년의 유예기간이 생겨 버렸고 그 기간 동안의 고과성적으로 사관후보생 지원자를 뽑도록 Green to Gold(간부사관)의 인사규정이 변경되었다.


4. 이후[편집]


이 사건으로 미국의 여론은 들끓어오르기 시작했고, 안 그래도 심화되던 베트남 전쟁 반대 여론이 확산되는 계기가 되었다. 1969년 11월 대한민국 언론사인 중앙일보에도 보도되었을 정도다.1969년 중앙일보 기사

당연히 북베트남은 반미 선전에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미국도 잘못한 게 명백해서 적극적인 반박은 못 하고 그나마 미국 정부는 민간인 학살이 잘못되었다는 점을 분명히 하고 있으며 단지 개별 소부대의 만행이니 오해하지 말아 달라고 해명하는 정도였다.

이 사건은 미국의 베트남 전쟁에 대한 명분을 완전히 날려버렸고, 미국인들에게 커다란 충격을 주었다. 결국 68운동의 뒤를 이은 미라이 학살로 여론이 극단적으로 악화되어서 베트남 전쟁에서 미국이 손을 떼는 계기 중 하나가 되었다.

이 사건이 폭로된 후 미국에 반전 여론이 급격하게 퍼졌을 뿐 아니라 대학가 역시 반전 분위기가 만연했다. 우드스탁 같은 콘서트에서는 반전적인 가사를 담은 노래들이 불리기 시작했다. 히피들이 사용하던 평화의 심볼이 이때 등장하기도 했다.

학살로부터 40년이 지난 후 윌리엄 캘리는 뒤늦게 참회한다고 했다. 전후 미라이 학살 20주년을 맞이해 제작된 미국 다큐멘터리에 불명예 전역 후 사업가로 변신해 고급차를 타고 다니는 캘리의 모습이 나와서 파문이 일어났다.

한편 C 중대와 마찰을 빚어 가면서 민간인 구출에 나섰던 톰슨 준위와 두 승무원들은 1998년에 비전투 분야에서 용감한 행위를 한 육군 장병에게 수여되는 군인훈장(Soldier's Medal)을 받아 그 공로를 치하받았고 톰슨 준위는 준사관에서 장교로 신분전환하여 육군 항공소령까지 진급 후 전역했다.

군인훈장은 명예훈장보다는 급이 몇 단계 아래인 훈장으로, 어디까지나 군인이 전투 공로가 아닌 인명구조 등의 공로로 수상할 수 있는 훈장 중 최고 명예이다. 이들 중 안도레타 상병은 미라이 학살 며칠 후 출동 중 타고 있던 헬기가 피격되어 전사한 지 오래라 사후 추서되었다.

사건을 정리하면서 톰슨 소령에게 육해공의 항공근무자들이 모두 받을 수 있는 비행무공십자장(Distinguished Flying Cross.)도 수여되었다. 그런데 톰슨 소령이 받은 이 훈장의 증서에 적힌 내용이 가관인데 미군과 베트콩의 교전에 휘말려 부상당한 베트남 어린이들을 안전하게 구출하여 미월(美越)관계에 기여하였다는 내용이었다. 결국 톰슨 소령은 화가 나서 훈장을 집어던져 버렸다고 한다.

이후 톰슨 소령은 계속 정찰 헬리콥터 조종사로 복무하다가 몇 번씩이나 격추되었고 마지막 격추에서는 척추를 다쳐서 재활을 하게 되었다. 도중에 미국 국회의원들로부터 전우들을 팔아넘긴 배신자 소리를 듣고 괴한에게 살해 협박을 받는 고생을 하다가 연금 수혜기간을 겨우 채우고 예편했다. 예편 이후에는 베트남을 찾아가 자신이 구해낸 소녀와 해후하였고 소녀는 '그날 자신을 구해주어서 정말 고맙다'고 말했지만 톰슨은 오히려 '정말 미안하다'고만 말하며 눈물을 감추지 못했다.

5. 기타[편집]


미국은 베트남 전쟁을 전개하는 과정에서 적잖은 전쟁범죄를 자행했다. 참고로 주월미군 총사령관이었던 윌리엄 웨스트모어랜드(William Westmoreland)는 베트콩이 장기적으로 통제하는 곳에 살고 있는 민간인을 무장한 전투원으로 간주하는 정책을 채택했으며 1965년 9월 MAC-V의 지침 전문인 525-3은 공산주의 세력이 일시적으로 지배하든 전혀 지배하지 못하든 간에 그러한 민간인 보호는 인구 밀집 지역에만 적용했다. 실제로 웨스트모어랜드는 자유사격지대가 설립된 시점에서 '남아있는 누구도 적 전투원으로 간주해라!', 그 지역에서의 작전은 '민간인 희생자에 대한 두려움 없이 행해질 것이다!'라고 서술했다.# 미군 전쟁범죄에 대해 알아보려면 베트남 전쟁/미군의 4.5 문단 참조.

이 사건이 부사관이 소대장을 해야 하는 이유라는 주장도 나왔다. 소대장 보직을 장교에게 맡기는 원칙을 고수하다 보니 부적절한 장교까지 소대장을 맡긴 결과 이 사단이 났다는 것이다.

실제로 군대에는 소대장이 엄청나게 많다. 1개 대대만 해도 15명에 달한다. 수색소대장, 화기소대장, 통신소대장 포함. 1개 연대에 100명이다. 본부중대에 수색소대가 배속되어 있는 대대와는 달리 연대는 본부중대와 수색중대가 분리되어 있다. 게다가 경우에 따라서는 연대급부터 사령부 경호 용도로 사용되는 경비소대가 생기며 1개 사단은 500명에 달한다. 사단 이상의 경우는 예하에 포병, 공병 등 다른 병과들도 많이 생기기 때문에 보병만으로 따졌을 때 삼각편제임에도 실제 예하 부대는 기하급수적으로 많아진다.

부사관을 소대장으로 쓰고 있는 독일 연방군의 사례[9]를 본받아야 한다며 소대장은 무조건 부사관으로만 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같은 소대장이라도 장교 소대장과 부사관 소대장은 임명 루트가 아예 다르다.

장교 소대장은 사관후보생 내지는 사관생도 훈련만 받고 바로 소대장으로 들어오는 반면 부사관 소대장은 일반 사병에서부터 쭉 올라오고 하다못해 병과 부사관의 신분이 분리되어 있는 대한민국 국군조차 분대장부터 시작해[10] 올라온다. 그렇기 때문에 부사관 소대장은 장교 소대장과는 달리 이미 분대장 유경험자라는 얘기다.

리더십에 관하여는 당연히 부사관 소대장이 더 뛰어날 수밖에 없다. 대대 이후의 부대부터는 참모들의 보좌를 받기 때문에 서로 협동하는 리더십이 발동되며 그래서 독일 연방군에서는 소대장 경험이 없는 대대장이 부임해도 임무 수행에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이다.

다만 저런 사건을 겪었음에도 미군은 여전히 육군과 해병대의 전투부대 소대장은 중위 혹은 소위에게 맡기고 있다는 걸 감안하면 제도 자체의 문제가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미군은 이 사건 이후 검증된 사병에게만 장교 지원자격을 부여하므로 3년의 복무기간 이외에도 Coporal로 진급에 성공해야 Green to Gold의 자격이 주어지지 아무리 오래 복무했어도 계급이 Private이면 Green to Gold의 지원자격이 없다.

그래서 오랫동안 부사관을 하다가 30대 후반에 Green to Gold를 지원해 장교가 되는 인원들도 많으므로 미군 장교는 대한민국 국군 장교처럼 무조건 20대에 사관후보생으로서의 교육만 받은 장교밖에 없다고 볼 수는 없다.

저학력자를 검증 없이 소대장 자리에 올려놓은 게 문제였다는 주장도 있다. 현대 한국군처럼 적성검사를 이용해 몇 배수 정도로만 걸러 놓았어도 캘리 소위는 당연히 장교로 임관할 수 없었다.

[주의] 학살당한 피해자들의 시신이 모자이크 없이 나온 사진으로 상당히 잔인할 수 있음[사진설명] 해당 사진은 미국 종군기자 하벌(Haeberle)이 찍은 사진이다. 하벌이 사진을 찍은 현장에만 최소 102명의 민간인 시신들이 널려 있었다.[1] "Report of the Department of the Army Review of the Preliminary Investigations into the My Lai Incident"[2] 반면 전략촌 전술을 중시했던 한국군은 부비트랩이 있다 싶으면 주민을 돕는 척하다가 끝까지 시간이 오래 걸리더라도 마을을 틈새 없이 포위해서 숨어있던 베트콩을 투항시켰다.[3] 심지어 데니스 콘티(Dennis Conti)가 재판에서 증언한 바에 따르면 많은 여성들이 아이들을 보호하기 위해 아이들 위에 몸을 던져서 아이들은 처음에는 살아 있었는데 '걸을 수 있을 정도로 나이가 많은' 아이들이 일어나자 윌리엄 캘리 중위가 그 아이들에게 총기를 난사했다고 한다. 덤으로 캘리는 2살짜리 소년이 도랑에서 기어나오자 그 소년을 도랑에 다시 밀어놓고는 총을 쏴 죽이기도 했으며 캘리 휘하의 군인들은 모유를 수유받는 아기와 갓 태어난 아기를 총살하기도 했다.[4] 심지어 출산 예정일이 임박한 임산부까지 강간하고 총검으로 배를 가르기도 했다.[5] Brownmiller, Susan (1975). Against Our Will: Men, Women and Rape. Simon & Schuster. pp. 103–05. ISBN 978-0-671-22062-4.[6] 임산부 17명 포함[7] 참고로 학살 피해자 중 절반이 넘는 259명이 20세 미만이었는데 정확히는 13~19세는 49명, 8~12세는 91명, 4~7세는 69명, 3세 이하는 50명이었다. 그리고 84명은 20~30대였으며 101명은 40~50세였고 60명은 60세 이상이었다.[8] 상급자들 앞에서 소대원들의 편을 들어주는 소대장은 어느 정도 자질이 떨어지더라도 소대원들의 지지를 받을 수 있다. 적어도 소대원들이 그를 '아군'으로 믿을 수는 있으니까.[9] 러시아군소련군도 준위와 부사관이 소대장 보직을 맡을 수 있었다.[10] 민간에서 바로 들어온 초임 하사는 간부 분대장을 하며 중사는 되어야 부소대장이 된다.


파일: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__CC.png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2023-11-28 23:21:50에 나무위키 미라이 학살 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