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르자 나자프 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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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rza Najaf Khan (영문 통용표기) / मिर्ज़ा नजफ खां (힌디어 표기) / میرزا نجف خان (페르시아어 표기.[1])
1723년 ~1782년 4월 26일

1. 소개
2. 생애



1. 소개[편집]


무굴 제국장군이자, 정치가. 원래는 이스파한 태생의 페르시아인으로, 사파비 왕조의 왕족이다.


2. 생애[편집]


나디르 샤가 사파비 왕조를 멸망시키고 아프샤르 왕조를 창건하자(1736), 13세의 미르자 나자프 칸은 누나와 함께 페르시아를 탈출해 북인도로 망명한다. 그 후 무굴 제국에 임관하고, 아와드 나와브이자 무굴의 대재상(힌두스탄의 대재상)까지 올랐던 같은 페르시아계 망명자 사프다르 장의 도움을 받아 무굴 중앙정계로 진출한다. 같이 망명한 나자프 칸의 누나는 아와드 나와브 가문의 남자와 결혼하였다.

1764년 10월, 무굴 황제 샤 알람 2세를 따라 무굴-아와드-벵골 연합군과 영국 동인도회사가 맞서 싸운 북사르 전투에 종군하였으나, 전투의 패색이 짙어짐에 따라 군대를 이끌고 돌아와 무굴군의 재건과 동인도회사와의 휴전 협상에 주력하였다. 이후 무굴 제국은 잠시 수도 델리를 아프간계 로힐라족 세력에 점령당하나, 1771년 마라타 연합의 도움으로 황제 샤 알람 2세는 델리로 귀환한다. 무굴 제국은 미르자 나자프 칸의 지휘 하에 필사적으로 최신 총포와 군사기술을 도입하고 유럽인 군사 전문가를 고용하여 군사적 근대화를 이룩한다.

이때부터 무굴 제국은 다시금 강성해진 군대로 미르자 나자프 칸이 죽는 1782년까지 기존에 대립하던 로힐라족을 비롯하여 펀자브시크교도들과 바랏푸르바랏푸르 왕국에 대해 공세로 전환하게 된다. 특히 1779년 무굴 제국이 시크-로힐라 연합군에 맞선 전투에서는 나자프 칸의 군대가 5천이 넘는 적군을 죽이는 대승을 거두었다. 이에 어느 정도 북인도에서 영토와 권위를 회복한 무굴 제국은 직접적인 알력이 없는 남인도의 군주들(마이소르의 하이다르 알리, 카르나타카 나와브 무함마드 알리 칸 등)에게서는 외교적으로 권위를 다시 인정받는다. 무굴 제국 최후의 부흥기였다.

1782년, 미르자 나자프 칸이 사망할 당시 무굴 제국은 그의 노력으로 펀자브의 수틀레지 강에서 아그라 남쪽의 밀림에 이르는 지역, 갠지스 강에서 라자스탄자이푸르 왕국에까지 영향권을 회복한 상태였다. 나자프 칸은 사후 델리에 있는 사프다르 장의 묘 근처에 함께 묻힌다. 델리 서쪽 근교에는 나자프 칸의 이름을 따서 그가 건설한 '나자프가르'(Najafgarh)라는 도시가 있다.

나자프 칸의 사후, 나자프 칸의 부장들이 서로 무굴군의 통수권을 두고 대립하던 와중 마라타 연합의 신데 가문이 개입하여 부장들을 모두 제압하고 무굴 제국을 다시 마라타의 영향권 하에 두게 됨으로써 무굴의 짧은 부흥기는 끝나게 된다. 이후 무굴은 다시는 군사적으로 굴기하지 못하였고, 뒤로 20년간 마라타의 보호국, 그 이후 50년간은 영국의 보호국으로서 존속하다 멸망한다.

[1] 페르시아어 표기를 한글 통용표기로 옮기면 미르저 나자프 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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