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륵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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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문화재청 CI_상하.svg
익산 미륵사지
益山 彌勒寺址
Mireuksa Temple Site, Iksan




분류번호
대한민국 사적 제150호
소재지
전라북도 익산시 금마면 기양리 32-2
분류
유적건조물 / 종교신앙 / 불교 / 사찰
면적
12,958,688 ㎡
지정연도
1966년 6월 22일
제작시기
백제 무왕 40년(639)
관리자
(관리단체)

익산시
유네스코 세계유산
파일:유네스코 세계유산 로고(흰 배경).svg
이름
한국어
백제역사유적지구
영어
Baekje Historic Areas
프랑스어
Aires historiques de Baekje
국가·위치
대한민국 전라북도 익산시
등재유형
문화유산
등재연도
2015년
등재기준
(ii)[1], (iii)[2]


파일:Mireuksa.png


파일:미륵사지.jpg

미륵사지

1. 개요
2. 역사
2.1. 왕흥사와 미륵사
2.2. 서동과 무왕
2.3. 백제 이후 미륵사의 역사
3. 명칭
4. 구조
4.1. 동탑
4.2. 서탑
4.2.1. 붕괴 원인 조사
4.2.2. 해체 보수 계획
4.2.3. 보수 공사
4.2.4. 평가
5. 찾아가는 방법
6. 대중문화 속의 미륵사
7. 여담
8. 외부 링크
9. 사적 제150호



1. 개요[편집]


전라북도 익산시 미륵산 기슭에 위치했던 삼국시대 백제의 사찰. 백제 무왕이 639년 창건했다는 기록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동 설화와 관련되어 여러 이견이 나오며 설왕설래하는 상황이다.

파일:attachment/Mtemplesky02.jpg
미륵사 복원 모형.

백제의 절로는 최대 규모의 호국사찰이다. 신라황룡사처럼 백제를 대표하는 이며, 고구려금강사와 함께 삼국시대의 각 나라를 대표하는 절이라고 할 수 있다.[3] 또한 가장 거대한 백제 석탑이 있는 절터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 커다란 절은 지금은 터만 남아, 반쯤 남은 미륵사지 석탑과 당간지주만 휑하니 서 있다.

1966년 미륵사가 있던 자리(익산 미륵사지)를 정부가 사적 제150호로 지정했으며, 관련 유적으로는 마룡지[4]왕궁리 유적 등이 있다.


2. 역사[편집]


삼국유사에는 미륵사와 관련된 설화가 2번 나온다. 하나는 법왕이 부여에 처음 짓기 시작해서 무왕이 마무리를 했다는 것과, 나머지 하나는 서동이 무왕이 되어 선화공주와 함께 용화산 아래에 만들었다는 이야기다.

하루는 왕[5]

이 부인과 함께 사자사(獅子寺)에 가다가 용화산(龍華山) 아래의 큰 못가에 이르자, 못 가운데서 미륵 삼존(彌勒三尊)이 나타나므로 수레를 멈추고 경례(敬禮)하였다. 이를 보고 부인은 그 곳에 큰 절을 세우면 좋겠다고 하였다. 왕이 허락하고 지명법사(知命法師)에게 가서 못을 메울 것을 물었더니, 신력으로 하룻밤에 산을 무너뜨려 평지를 만들었다. 미륵 삼상(彌勒三象)과 회전(會殿), 탑(塔), 낭무(廊惫)를 각각 3곳에 세우고 액호(額號)를 미륵사(彌勒寺)라 하니, 진평왕은 백공(百工)을 보내서 도왔다. 지금까지 그 절이 남아 있다.

삼국유사》 서동 설화 중


미륵삼상은 미래불인 미륵이 3번 설법하여 미래의 중생을 모두 제도한다는 용화삼회설에 입각한 것이다. 전, 탑, 낭무를 각각 3곳에 세우고 미륵사라고 하였다는 것은 기록과 실제 미륵사 터의 흔적이 일치한다. 이 때문에 익산의 미륵사가 무왕이 세운 절이라는 설이 있다.

미륵사 3원 가람 디지털복원도 문화유산기술연구소 제작

2.1. 왕흥사와 미륵사[편집]


왕흥사의 터가 부여군에서 발굴되기 전에는 미륵사와 왕흥사 사이의 관계에 대해 여러 의견이 오갔다.

법왕(法王)이 부여에 왕흥사(王興寺)를 처음 짓기 시작하고, 무왕(武王)이 35년에 걸쳐 왕흥사를 완성하니 이 절이 미륵사다.

삼국유사》 3권 흥법(興法) 법왕금살(法王禁殺)편


왕흥사의 별명을 미륵사라고 한다면, 익산의 미륵사와 부여의 미륵사가 같이 존재했던 셈이다. 그러나 삼국사기에는 법왕이 600년에 왕흥사를 창건했다는 기록이 있다. 왕흥사와 미륵사의 관계를 헷갈리게 하는 기록이다.

二年 春正月 創王興寺 度僧三十人

2년(600) 봄 정월에 왕흥사(王興寺)를 창건하였고, 30명이 승려가 되기를 허가하였다.

삼국사기》백제본기 권27 법왕


2007년에 발견된 왕흥사 사리함에는 왕흥사가 삼국사기에 기록된 600년보다 23년 앞선 577년에 창건되었다는 명문이 있다.

丁酉年二月 十五日百濟 王昌爲亡王 子爲刹本舍 利二枚葬時 神化爲三

정유년 2월 15일 백제왕 창이 죽은 왕자를 위해 절을 세우고 본래 사리 2매를 묻었을 때 신의 조화로 셋이 되었다.

《왕흥사 사리함 음각문》


백제왕 창이 바로 위덕왕이고, 위덕왕 재위시기 중 정유년은 서기 577년이다. 따라서 왕흥사 창건주는 무왕이 아니다. 이미 당대에도 기록에 오류가 있었던 것이다. 부여의 왕흥사 창건은 무왕과 전혀 관계가 없음이 명확해졌다.


2.2. 서동과 무왕[편집]


<서동요>의 서동 설화가 실제인지, 서동이 진짜 백제 무왕이었는지는 아직까지도 확실한 답이 안 나오는 문제이다. 물론 지금까지는 백제 무왕이 서동이라는 것이 정설이었고, 7세기에 무왕이 미륵사를 창건했다고 보았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 여러가지 새로운 정황이 나오면서 점점 서동이 실제 역사의 무왕이란 설은 정설의 자리를 위협받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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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체 중인 미륵사지 서탑의 기초. 가운데 있는 돌이 첫 번째 심주석(心柱石)

파일:attachment/Mtemplescript04.jpg
사리병과 금제사리봉영기[6]

미륵사지 서탑(서쪽의 석탑)을 해체하던 중 2009년 1월 첫 번째 심주석(心柱石)[7] 안에 봉안된 사리병[8]과 금제사리봉영기, 구슬 등 사리장엄구[9] 9900여 점이 나왔다. 학자들은 만약 유물이 나온다면 심초석에서 나오리라 예상했기 때문에, 심주석에서 유물들이 쏟아져 나오자 상당히 놀란 반응을 보였다. 이때 나온 유물 중 특히 주목받은 것이 바로 사리봉영기로, 금판에 음각하여 주칠(朱柒: 붉은 칠)한 글씨로 미륵사 창건에 관한 기록을 새겼다. 봉영기의 뒤편에 새긴 글씨에는 주칠이 대부분 사라졌다. 발굴팀은 아직 주칠한 글씨가 제대로 마르지 않은 상태에서 봉영기를 안에 넣어 봉안했고, 천수백 년 동안 습기에 시달리며 뒤편 글씨에 있던 안료가 녹아내렸다고 판단했으며, 녹아내린 안료는 사리공 바닥에 있었다.

파일:attachment/Mtemplescript.jpg

금제사리봉영기金制舍利奉迎記 원문
(앞면)
竊以法王出世隨機赴
感應物現身如水中月
是以託生王宮示滅雙
樹遺形八斛利益三千
遂使光曜五色行遶七
遍神通變化不可思議
我百濟王后佐平沙乇
積德女種善因於曠劫
受勝報於今生撫育萬
民棟梁三寶故能謹捨
淨財造立伽藍以己亥
(뒷면)
年正月卄九日奉迎舍利
願使世世供養劫劫無
盡用此善根仰資 大王
陛下年壽與山岳齊固
寶曆共天地同久上弘
正法下化蒼生又願王
后卽身心同水鏡照法
界而恒明身若金剛等
虛空而不滅七世久遠
并蒙福利凡是有心
俱成佛道
가만히 생각하건대, 법왕(法王)께서 세상에 출현하시어 근기(根機)에 따라 부감(赴感)하시고, 중생에 응하여 몸을 드러내신 것은 마치 물 가운데 비치는 달과 같았다. 이 때문에 왕궁(王宮)에 의탁해 태어나 사라쌍수(娑羅雙樹) 아래에서 열반에 드셨는데, 8곡(斛)의 사리(舍利)[10]를 남겨 삼천대천세계(三千大天世界)를 이익되게 하셨다. 마침내 찬란히 빛나는 오색(五色)(사리)으로 7번을 돌게 하였으니,[11] 그 신통변화(神通變化)는 불가사의(不可思議)하였다.
우리 백제왕후(百濟王后)는[12] 좌평(佐平) 사택적덕(沙乇積德)의 딸로서 오랜 세월[광겁曠劫] 동안 선인(善因)을 심으시어 금생에 뛰어난 과보[승보(勝報)]를 받으셨다.[13] (왕후께서는) 만민(萬民)을 어루만져 기르시고 삼보(三寶)의 동량(棟梁)이 되셨다.[14] 때문에 삼가 깨끗한 재물을 희사하여 가람(伽藍)을 세우고, 기해년(己亥年) 정월 29일에 사리를 받들어 맞이하셨다.
원하옵건대, 세세(世世)토록 공양하여 영원토록[겁겁(劫劫)] 다함이 없어서 이 선근(善根)으로 우러러 대왕폐하(大王陛下)의 수명은 산악과 나란히 견고하고, 왕위(王位[寶曆)][15]는 천지와 함께 영구하여, 위로는 정법(正法)을 크게 하고 아래로는 창생(蒼生)을 교화하는데 도움이 되게 하소서. 다시 원하옵건대, 왕후의 몸에 나아가서는,[16] 마음은 수경(水鏡) 같아서 법계(法界)를 항상 밝게 비추시고, 몸은 금강(金剛)과 같아서 허공과 같이 불멸(不滅)하시어, 칠세(七世)를 영원(永遠)토록 다함께 복이(福利)를 받고, 모든 중생들이 다함께 불도(佛道)를 이루게 하소서.
번역문 출처: 김상현, "금제사리봉영기", 익산 미륵사지 석탑 사리장엄, 국립문화재연구소 (2014), 59.

봉영기 덕분에 미륵사는 백제 무왕 재위 기해년(639)에 창건되었음이 확실해졌다. 왕흥사와 달리 이쪽은 무왕의 재위와 일치한다. 게다가 법왕의 재위기간이 599년부터 600년이기 때문에 무왕이 대략 35년 이상 공사를 해서 639년에 세워졌다고 하면 말이 된다! 즉 삼국유사에 있는 충청남도 부여군 왕흥사와 얽힌 기록은 잘못 섞이긴 했어도 익산 미륵사의 역사와 관계가 있었다.

그러나 이 경우에는 전라북도 익산시 미륵사에 얽힌 기록이 문제가 된다. 일단 창건은 무왕이 한 것은 확실하지만 공사의 시작은 법왕이 한 것이 아닌가 의심스럽게 되었다. 물론 법왕의 재위가 워낙 짧았기에 사실상 무왕의 의도대로 공사가 진행되었을 가능성도 다분하니 큰 오류는 아니다.

하지만 진짜 크게 문제가 되는 부분은 왕후다. 기록에 의하면 무왕이 미륵사를 세운 이유는 왕후가 사찰 창건을 요청했기 때문이다. 사리봉영기에 따르면 무왕의 왕후는 좌평 사택적덕의 딸 사택씨이다. 사택적덕은 백제의 귀족 가문인 대성팔족 중 사택씨 가문의 인물로 후기 백제에서 왕후를 배출할 만큼 권력이 막강했다고 추정한다. 이 정도 대형 사찰을 지을 정도면 어마어마한 권력과 재산이 뒤따라야 한다. 결국 사택왕후는 원래부터 백제 사람이기 때문에 미륵사를 창건한 무왕이 신라의 선화공주와 결혼했다는 설화와는 맞지 않아 '서동 설화'와 '서동요'가 거짓일 가능성이 커졌다.

서동 설화가 단순한 픽션이었다고 하면 간단한 일이지만, 불국사 창건 설화처럼 허구 속에 진실이 섞였을 수 있고 워낙 인기 있는 이야기이기 때문에 많은 연구자들은 다른 쪽으로 해석하려 노력한다. 그래서 '무왕의 왕후가 2명 이상이 있었는데, 사택왕후는 선화공주가 일찍 죽고 새로 들어온 후처'라는 해석도 나왔다. 정실왕후 1명에 그 외는 모두 후궁 체제는 조선시대부터 정립된 것이고 고대에는 정실왕후가 여러 명인 사례도 많았다. 당시 왕의 결혼이란 곧 정치적 활동이기도 했음을 감안하여 여러 왕후를 두었다고 보더라도 크게 무리한 해석은 아니다. 국내 안정을 위해 호족의 딸을 아내로 맞아들이고, 동시에 이웃 국가의 왕족도 아내로 맞아들이는 것 역시 당대 기준으로는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닌 것.

아무튼 서동이 무왕이라고 가정하면 '무왕의 왕후는 신라의 선화공주이거나 호족 사택 집안의 딸이거나 둘 중 하나여야 하고, 하나가 맞으면 다른 하나는 틀렸다.'고 보는 것은 현대적인 결혼관을 바탕으로 당시 왕의 결혼을 이해하려 드는 오류일 수도 있다. 게다가 해당 발굴 결과 당시 미륵사의 구조가 (서동 설화를 소개한) 삼국유사의 내용과 일치하고, 건설 시기도 무왕 연간임이 확인되어 삼국유사의 무왕 및 서동, 선화공주 관련 설화의 신빙성이 오히려 높아졌다고 보는 관점도 있는 터라 더욱 그렇다.

당시의 상황을 상상 또는 가정해 보자면, 선화공주의 요청으로 짓기 시작한 사찰이 백제 내의 정치적 투쟁의 결과로 사택비의 공적으로 둔갑했다거나, 삼국 통일로 신라의 정통성이 확립된 시기의 인물인 일연이 사택비의 공적을 선화공주의 공적으로 흡수했을 수도 있다. 여하간, 정확한 것은 알기 어려우나 '사택비가 무왕의 왕후'라는 것이 '선화공주는 왕후가 아니다'라고 직결되지 않으므로 아직은 단정할 수 없다는 것.

그러나 사리봉영기가 발견됨으로써 선화공주설의 신빙성이 크게 낮아졌음은 사실이다. 또한 미륵사의 구조가 삼국유사의 내용과 일치한다는 점이 서동 설화의 신빙성을 높여주었다는 데 모든 사람들이 동의하는 것은 아니다. 만약 일연 및 해당 내용을 전한 사람들이 미륵사에 대한 정보를 오로지 서동 설화를 통해서만 알 수 있었다면 서동 설화 전체의 신빙성이라는 측면에서 평가할 수도 있겠지만, 일연의 시대까지도 미륵사는 멀쩡하게 남아있었기 때문이다. 즉 미륵사 창건주에 대해서는 설명을 엉터리로 했다더라도, 미륵사의 구조에 대해서는 일연 당시 현존하는 미륵사의 형태를 보고 정확히 묘사할 수 있다.

한편 서동의 정체를 두고도 다양한 주장이 다시 떠올랐다. 아예 서동이 무왕이 아니라 5세기 동성왕(479-501) 등 다른 인물일 가능성도 있다.

2016년 무왕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익산의 쌍릉 대왕묘 출토 유물들을 일본인들이 발굴한 지 99년 만에 재조사해보니 20대~40대 사이 여성의 치아 유골과 신라제 토기가 확인되었다. 무왕 시기에 신라 왕실 여인이 시집온 것 자체는 사실일 가능성이 높다는 연구 결과가 나왔다.# 하지만 신라 양식 토기는 당대 보편적이었고, 이것들이 꼭 신라산이라는 보장은 없다는 반박이 곧장 제기되었다. 이후 무왕의 인골임이 판명되었다. 무왕(백제)/생애 항목 참조.


2.3. 백제 이후 미륵사의 역사[편집]


창건 이후 미륵사의 역사는 자세하지 않으나 단편적인 사료들로 비추어 볼 때 통일신라, 고려시대는 물론, 조선시대 초까지는 사찰이 유지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미륵사지에는 당간지주[17]가 남아있는데, 이것은 통일신라의 기법으로 보인다. 따라서 불교가 융성하던 통일신라 시기에도 미륵사는 꾸준하게 유지보수, 증축되었던 것으로 보인다.[18]

신라 성덕왕 18년(719) 9월 금마군 미륵사에 벼락이 쳤다는 기록이 삼국사기에 있고, 성덕왕 29년(730) 6월에 뇌진이 쳐서 '서쪽 석탑'이 반쯤 무너졌으므로 옛 모습대로 고쳐놓았다는 기록이 연려실기술에 있다.

"고려 태조 5년(922) 고려승려 혜거가 미륵사탑을 개탑했다." 하는 내용이 혜거국사 비문에 있다. 또 미륵사지에서 출토된 기와에는 980년, 1267년, 1317년, 1330년에 해당하는 명문이 있다. 기와의 연도는 그해에 새 기와로 보수했다는 흔적이다. 또한 미륵사지에서 고려청자 파편도 무수히 수습되었기 때문에, 고려시대에도 사찰의 명맥은 계속 이어졌음을 알 수 있다.

이후 조선시대에도 태종 7년(1407) 나라에서 여러 고을의 자복사찰을 정할 때 다른 사찰들과 함께 자복사찰로 지정되었으므로 이 때까지만 해도 사찰이 건재하였음을 알 수 있다. 조선 초 16세기에는 신증동국여지승람과 양곡집에 미륵사지 석탑 기록이 나오는데, '석탑의 규모가 동방 최대'라는 말은 여기서 나온 문구다. 다만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는 석탑은 언급하되 절 자체를 두고는 말하지 않으므로, 빠르게 추정한다면 조선 초기에 지금과 비슷하게 석탑만 남고 사찰은 소실되었을 수도 있다.

이후 18세기 무렵 편찬된 와유록에 미륵사의 폐허를 보며 쓸쓸한 감정에 잠기는 사설시조가 있으므로, 조선 시대의 어느 시점에서 망한 듯하다.[19] 와유록에는 17세기 이전에 벼락에 의해 석탑이 무너졌다는 기록도 있지만, 기록과는 달리 석탑의 구조를 살펴본 결과 석탑의 1층 부분에서 구조에 이상이 생겨 상층부가 붕괴되었을 수 있다는 설이 나왔다. 또한 석탑을 지으면서 강도 보완을 위해 군데군데 흙을 채워 넣었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흙이 씻겨나가자 점점 탑이 흐트러지다가 무너졌으리란 설도 있다. 이후의 기록은 전해지지 않고 있으며, 미륵사 역시 재건되지 못하고 폐사지로 남아있었다.

절이 사라진 후에는 서탑과 당간지주만 남은 채 일대에 경작지와 민가가 조성되었고, 그나마 남은 서탑의 반쪽마저 무너질 위기에 처하자 일본인들이 콘크리트를 잔뜩 부어 구조를 안정시켰다.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임시조치라 오래 유지될 수는 없었다. 이후 1974년에 동탑의 터를 발굴한 것을 시작으로 1980년부터 1996년까지 절터 전체에 대한 발굴조사를 진행하였고, 1991년부터 1993년까지는 동탑을 복원했지만 동서 양쪽의 탑의 형태가 똑같다는 증거가 나오지 않았다는 고증 문제, 기계로 깎은 화강암 때문에 유적과의 이질감이 너무 커졌다는 재질 문제 등으로 비판이 끊이지 않았다. 결국 '문화재를 이런 식으로 복원하면 안 된다'는 반면교사의 사례가 되었다. 이후 그나마 남은 유적들을 문화재로 지정하여 미륵사지 석탑이 국보 제11호, 미륵사지당간지주가 보물 제236호, 절터 전체는 사적 제150호가 되었다.

1999년부터는 콘크리트로 범벅이 된 서탑을 해체하기 시작했다. 동탑을 반면교사로 삼았는지 작업은 매우 신중하게 이뤄졌는데[20], 속도가 하도 느려서 2007년에는 혹시 비용을 횡령한 것은 아닌지 감사를 받기도 했지만 그런 사실은 없었다. 해체 작업은 2010년까지 진행되었고, 그 과정에서 서동요 진위 여부 논란에 불을 지핀 금제사리봉영기 등 사리장엄이 심주석에서 발굴되기도 했다.

해체와 조사가 완료된 후에는 붕괴 원인에 대한 조사가 이뤄졌지만 명확한 결론에는 도달하지 못했고, 복원 과정에서도 층수나 형태를 두고 약간의 대립이 있었다. 기나긴 토론 끝에 복원 형태는 흔히들 알던 형태를 최대한 구현하기로 했고, 석재 역시 원래 있던 것들을 최대한 쓰기로 해 대략 80% 정도를 충당할 수 있었다. 공사는 2015년 12월에 시작되었고, 당초 계획은 2017년 11월 완공 예정이었으나 조금 연장되어 2018년 6월에 복원공사가 완료되었고, 그 후 주변 정리를 거쳐 이듬해 4월 30일에 준공식을 개최하였다.

미륵사지 정비와 서탑 복원 준비가 한창이던 2015년 7월, 미륵사지가 인근의 왕궁리 유적과 공주시, 부여군의 다른 백제시대 유적들과 함께 백제역사유적지구라는 이름으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이로 인해 미륵사지의 학술적 가치가 상승하였으며, 그 덕분인지 미륵사지의 한 켠에 있었던 미륵사지 유물전시관이 2019년 초에 국립익산박물관으로 이름이 바뀌었으며, 서탑이 복원공사에 들어갔을 때에는 복원이 완료되면 관광객의 유입이 늘어날 것이라 판단했는지 익산 관내를 비롯한 전라북도 서북부의 유물들을 한데 모아 전시하고 관리할 수 있도록 바로 옆에 새로운 건물을 짓기 시작했다. 옛 전시관은 어린이박물관과 보존과학 시설로 바꿔 내년 개관하고, 장기적으로는 교육·문화 행사가 열리는 복합문화단지로 나아갈 계획이라고.

그 후 2020년 1월 10일, 국립익산박물관이 새로운 건물에서 개관하였다.


3. 명칭[편집]


미륵사는 명칭에서 드러나듯 미륵신앙과 관련된 절이다. 불경에 따르면 미륵은 수미산 위쪽 도솔천(兜率天)에 거하지만, 석가모니가 열반하고 56억 7천만 년 뒤 인간들이 사는 사바세계에 현신한다. 미륵은 지상에 나툰 뒤 부처로서 용화수(龍華樹)라는 나무 아래에서 단 3번 설법하여 모든 중생이 깨달음을 얻게 한다고 한다. 미륵이 도래한 세상을 용화세계(龍華世界)라 부르는데, 마치 이상향과 같아 사시사철이 화창하고 사람들은 모두가 평등하고 화목하게 지낸다고 한다. 현실의 고난에 스러지던 사람들은 죽어서 미륵이 있는 도솔천에 태어나거나,[21] 또는 미륵불이 가까운 미래에 현세에 내려오기를 바랐다. 이러한 바람에서 미륵불신앙이 탄생하여 널리 유행하였다. 익산 미륵사지의 뒷산 이름이 지금은 '미륵산'이지만 고서에 따르면 옛 지명은 '용화산(龍華山)'이었다. 용화수 아래 미륵이 있듯, 용화산 아래 미륵사가 있도록 배치한 것이다.

미륵사 역시 이러한 신앙과 관련이 있었을 것이다. 당시 백제는 몰락의 길을 걷는 중이었다. 수도를 2번이나 옮겼지만 외세의 위협은 사라지지 않았고, 국력을 키우기에는 상황이 여의치 않았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지배층이건 민초건 미륵불에 매달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금당에는 미륵불상을 모시고 금당의 지하에는 물을 채울 수 있도록 만든 것이 미륵불이 내려오기를 바라는 의도를 반영한 것이라는 가설은 이러한 추측에서 비롯되었다. 미륵사는 규모가 장대하거니와 거대한 탑도 3기나 배치하여 공력을 기울였으므로, 웬만큼 강한 권력이 없다면 세울 수 없을 절이었다. 무왕 시기에 이런 절을 지은 데에는 부처의 힘으로 나라가 도움받기를 바랄 뿐만 아니라 약해지는 왕권을 강화하려는 목적도 있었던 듯하다.


4. 구조[편집]


파일:attachment/mrtempleplan.jpg
미륵사 가람배치도

가람 배치와 면적에서 거대한 규모를 자랑한다. 가람은 사찰, 사찰 건축물이 배치된 형식, 즉 탑이 1개가 있고 금당이 1개가 있으면 1탑 1금당식이라고 하는데, 미륵사는 다른 백제시대의 절들인 왕흥사나 정림사 등이 1탑 1금당인 것과는 달리 3탑 3금당식으로 건물들을 지었다. 정확히는 1탑 1금당을 나란히 3중으로 배치한 삼원식의 형태로, 문-탑-금당이 하나의 공간을 형성했다. 3군데 공간은 회랑으로 구분되지만 뒤편의 강당에 이르러서는 다시 합쳐진다. 이러한 배치는 왕이 용화산 밑 연못을 지나갈 때 연못에서 미륵삼존이 나타났다는 창건설화와 연관 있는 듯하다. 통일신라시대 사찰의 보편적인 양식인 쌍탑식, 황룡사나 청암리사 등의 1탑 3금당식과는 달리 3탑 3금당식은 현재까지는 미륵사지가 유일하다.

이러한 가람배치는 동양 고대가람 연구에서 밝혀진 바 없는 새롭고도 특수한 가람이다. 그동안 백제의 가람은 그동안 1탑 1금당이 일렬로 늘어선 것이 전형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미륵사가 새로운 형식을 따르는 가람으로 확인된 것이다. 좀더 구체적으로 미륵사지 가람배치를 보면, 북서 방향에 중원을 배치하여 남에서부터 중문, 좌우로 복도에 가까운 남회랑·목탑·금당을 배치하고, 주위는 동회랑·서회랑·북회랑으로 둘렀다.

미륵사에는 중앙에 목탑이, 동서 양쪽으로 석탑이 있었으리라 추정한다. 학자들이 처음에는 석탑을 7층짜리라고 추정했지만, 근처 동탑지에서 새로운 파편[22]이 발견되어 9층이라고 설을 바꾸었다. 목탑의 정확한 높이는 알 수 없지만 비율 등으로 봐서 석탑과 같은 9층이라고 추측한다. 중앙에 있는 탑이 양쪽의 쌍 석탑보다 층이 낮은 것은 좀 이상하기 때문이다. 목탑의 높이는 약 60 m 정도로 상당히 크고 높았다고 추정한다. 하지만 관련 기록이나 석축 등이 제대로 남지 않아 많은 부분이 추측일 뿐이다. 아무튼 지금은 홀로 남은 석탑으로 유명하니… 세월이 무상하다.

석탑은 한반도에 석탑이 들어와 만든 초기 작품인 듯하다. 목탑의 형태를 직설적으로 모방하여 과도기적인 원초적 형태라고 평가를 받는다. 일반적으로 새로운 무언가를 도입할 때는 일단 기존에 존재하던 재료나 방식으로 시도해 보는 경향이 있는데, 예를 들면, 파르테논 신전처럼 초기에 세워진 석조 건축물은 목조 건축의 구조를 장식으로 따라한 모습이 보인다. 이 미륵사지 석탑 이후에 세워진 한국의 석탑들은 계속 크기가 작아지며 독자적인 양식이 생겼다. 백제시기의 유물로 남은 또다른 석탑인 정림사지 석탑이 훨씬 작고, 신라감은사석탑불국사 석탑으로 작아지는 등 시간이 지날수록 표현이 간결해지고 크기는 점점 작아진다. 그런데 미륵사지 석탑과 정림사지 석탑의 조영 시기가 불확실하고, 백제 석탑은 이 둘밖에 제대로 남지 않았으므로 진짜 원초적인 형태인지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들도 있다.

미륵사지 석탑이 정말 그 당시 양식이었는지는 확신하기 힘들다. 탑의 구체적인 형태과 내력에 대한 기록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현재 미륵사지의 두 석탑 중 동탑은 고증은 뒷전으로 미루고 2년 만에 올린 것이고, 서탑은 해체 작업을 하던 중에 개축의 흔적이 발견되었다. 이 때문에 백제시대의 원형을 추정하는 데 애로사항이 꽃폈다. 이후 서탑을 복원하고 붕괴 원인을 조사하는 과정에서도 외형 면에서는 동탑을 참고해야 했다.

목탑신라 황룡사와 비견할 만하다. 황룡사가 미륵사보다는 먼저 창건되었지만, 정작 얼굴마담인 황룡사 9층 목탑은 미륵사 창건 이후에 완성되었기에 미륵사가 창건할 때 목탑을 세웠다면, 미륵사 목탑이 더 먼저 세워졌을 가능성이 있다. 특히 백제의 아비지가 황룡사 9층 목탑의 건설을 도왔다는 기록을 보면 정황상 그러했을 가능성이 높아진다. 바로 미륵사지 목탑은 황룡사 목탑의 프로토타입일 수가 있다는 것. 백제 장인들은 신라, 일본까지 건너가서 건축물을 만들 정도로 기술이 뛰어났기 때문인데, 일단은 미륵사 창건 당시에 신라에서도 인력이 파견되었다는 설화도 있으니 추측의 영역이다. 추후에 발굴조사를 하다가 목탑지 인근에서 기와를 잔뜩 발굴했는데, 대부분이 백제시대와 통일신라시대였고 8-9세기 이후 기와는 출토되지 않으므로 목탑의 소실시기를 짐작케 해 준다. 또한 목탑지 기단의 북쪽에서 1 ~ 1.5m 떨어진 곳에 기와가 일정한 선을 이룬 채 출토되었다. 목탑이 모종의 이유로 무너질 때 해당 방향으로 쓰러진 듯하다.

현재의 목탑 모형과 복원안은 2021년 미륵사 학술심포지엄 : 미륵사 복원고증 기본연구의 성과와 과제 참고. 5*5칸 평면규모, 동서 석탑과 동일하게 초반석과 장초석이 있는 구조, 약 31m 높이의 탑신, 9층 층방식의 하앙구조를 기준안으로 잡고 있다.

각 탑의 북편에는 금당[23] 격 건물이 하나씩 있음이 확인되었다. 이들 탑과 금당을 한 단위로 구분하는 회랑이 있어 동쪽은 동원, 서쪽은 서원, 중앙은 중원이라고 삼원식 가람형태임을 알았다. '삼원식'이라고 하는 것은 마치 절이 3개가 모인 듯하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 이는 미륵하생경을 기반으로 한 미륵신앙을 반영한 것이다. 미륵이 이 세상에 내려와 3회 설법을 하여 모든 중생을 구제하기 때문이다. 또한 각 금당의 터에서는 특이하게도 경주의 감은사지처럼 기단에서 지하 구조가 발견되었다. 감은사지는 인근의 문무대왕릉과 관련이 있다는 이유가 제시되었지만, 미륵사는 아무런 기록도 전해지지 않으므로 조성한 이유 역시 모른다. 현재로서는 혹시 미륵불이 하늘에서 지상으로 내려오길 바라는 마음에서 만든 구조가 아닌가 추측하는 정도일 뿐이다. 또는 서동요에 서동의 아버지가 용이라는 내용이 있으므로 용 신앙과 관련 있지 않을까 추측하는 이들도 있다.

강당지와 승방지에서는 공통적으로 방들을 띄엄띄엄 두고 그 사이를 바깥과 안을 오갈 수 있는 복도로 사용했던 흔적이 확인되었다. 강당 자체에는 방 2개가 있었다고 확인했는데, 발굴조사 결과 방 크기가 계속 크기가 변했다고 추측한다. 강당의 양쪽에는 동서승방과 이어지는 접랑지가 있고, 북쪽 중간에는 북승방으로 연결되는 복도 시설의 초석이 남아있다. 면적은 부여 능산리사지의 금당보다 2배 가까이 넓지만, 광대한 면적에도 불구하고 석축이 잘 남아 연구에 편리했다.

승방은 강당의 좌우에 위치했던 동서승방과 강당 뒤편의 북승방으로 구성되었는데, 동서승방의 터에서 각각 2개 1조인 방이 4조씩 발견되었다. 또한 동승방 터에서는 불완전하긴 했지만 구들과 아궁이의 흔적이 발견되었고, 그 밖에도 도자기, 불에 탄 곡식 등 여러 생활유물들이 발굴되었다. 특히 남쪽에서 출토된 항아리들 중 하나에 미륵사 명문과 연도가 새겨져 유물들의 편년을 확인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또한 북쪽 기단 외부에서는 지붕 끝에 올리는 장식인 치미가 출토되어 승방의 규모가 어느 정도였는지 추측할 수 있었다.

북승방은 미륵사지 내의 단일 건물로는 가장 큰 규모로, 구조는 동서승방과 비슷하며 방의 구성 방식 역시 똑같지만, 개수는 8개로 좀 더 많았다. 북승방지의 서편에서는 후대에 증축한 흔적이 발견되었는데, 승방과는 평면구조가 달랐다. 조사를 통해 발견한 물품들로 보아 이곳은 물건들을 만들던 공방 혹은 창고로 쓰였던 장소로 판단되었다. 그 외에도 남동쪽 모서리서는 통일신라시대에 쓰인 듯한 자그마한 우물이 발견되었다.

이외에도 서승방지의 서쪽에서 발견된 공방지와 좀 떨어진 곳에 있는 조선시대 건물지가 있는데, 공방 유적은 인근의 왕궁리 유적이나 부여군의 능산리 사지에서도 발견되는 유적으로, 이곳 공방지의 숯 층에서는 동물 뼈와 쇠 찌꺼기가 발견되어 바깥에서 가져온 쇳덩어리를 녹여 도구를 만들던 곳이라고 추측한다. 이곳에서는 그 밖에도 기와, 토제 도가니 등 9세기경의 유물들이 출토되었다. 조선시대 건물지는 발굴 전에도 흔히들 '법당 밭'이라고 부르던 곳이다. 고려시대부터 이곳에 건물을 지었으며 조선시대에도 유지되긴 했지만 규모가 많이 줄어들었다. 금당과 중문, 부속건물의 터가 발견되었고, 명문 기와와 1500년대 후반의 백자 등 유물 등 여러 편이 출토되었다. 아마도 그 무렵 전성기를 맞고 1600년대 무렵 불이 나서 폐사가 되었다고 추정한다.


4.1. 동탑[편집]


파일:SAM_6348.jpg

반쪽이나마 탑의 형체는 유지되고 있었던 서탑과 달리, 미륵사지 동탑은 사진과 기록을 남기기 시작한 근현대에는 이미 땅에 묻힌 기단부를 제외하고 완전히 소실된 뒤였고, 탑의 부재만이 이리저리 흩어져 있던 상황이었다. 당시 미륵사지 주변에는 민가가 여럿 있었고, 그들 입장에선 탑의 터는 그저 돌무더기에 불과했기에 여러 곳에서 돌들을 가져가 필요한 데 쓰면서 많은 부재들이 소실되었다. 이 부재들은 추후 탑의 층수를 바로잡는 데 기여했다.

동탑이 저렇게 복원된 사연은 이렇다. 1970년대 들어 무령왕릉이 우연히 발견되면서 전국의 고대 유적 정비가 유행처럼 번졌고, 당시 박정희 정권도 이를 적극적으로 지원하기 시작했다. 특히 경주시의 신라 문화재들에 대한 보수 및 복원 사업이 진행되자, 익산군(당시)에서는 "미륵사지 석탑도 저렇게 해야 하지 않겠느냐"는 의견이 나왔다. 당시 미륵사지 석탑은 일제가 임시조치로 부어놓은 콘크리트 때문에 상태가 영 아니었기에, 어떻게든 손을 볼 필요가 있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당시로서는 기술 수준과 예산이 매우 부족했기에 섣불리 시도할 수 없었고, 그러던 중 1974년부터 1975년까지 원광대학교 마한백제문화연구소에서 미륵사지를 조사하던 중 동탑의 터를 발굴해냈다.[24] 하지만 석탑 복원까지는 가지 못했기에 미륵사지 석탑 복원은 익산군의 숙원사업이 됐고, 그러던 차에 미륵사지 석탑 복원을 대통령 선거 공약으로 내세운 노태우가 당선되었다.

대통령이 된 노태우는 공약대로 미륵사지 석탑을 복원하려 했는데, 서탑을 복원하자니 당시로서는 여러 문제로 인해 복원하려다가 되려 훼손시킬 염려가 컸다. 이에 차라리 터만 남은 동탑을 복원하여 나중에 서탑을 해체한 후 복원할 때 참고할 수 있도록 하자는 의견이 나왔고, 큰 반발 없이 수용되어 얼마 지나지 않아 동탑이 복원 대상으로 낙점되었다. 그 후 탑을 어디다 복원할지 정하는 과정에서 탑의 터를 훼손시키지 않기 위해 현재의 국립익산박물관 자리에 탑을 복원하자는 얘기가 나오기도 했지만, 멀쩡한 터가 있는데 왜 다른 곳에 복원하냐는 격렬한 반발에 부딪히면서 본래의 자리에 복원하기로 했다.

공사는 1991년에 시작되어 1993년에 완료되었다. 복원 전부터 학계의 논란이 일었던 동탑의 복원은 끝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아 크나큰 비판 여론에 부딪히게 되었는데, 당시 거의 모든 문화재위원들이 고증이 불가하다며 반대했지만 졸속으로 복원되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복원된 동탑의 형상은 반쯤 쓰러진 서탑의 모습과 사방에 흩어져 있었던 부재들을 연구한 결과물인데, 미륵사의 두 석탑이 쌍둥이처럼 닮았다는 내용은 어느 기록에도 없다. 불국사석가탑다보탑처럼 두 석탑이 서로 전혀 다른 모습일 수도 있고, 불국사만큼은 아니라도 예를 들면 높이 또는 층수가 달랐거나, 모습이 서탑과 약간 다를 수도 있는데 동탑 복원은 그걸 무시하고 무작정 서탑과 똑같은 모양일 거라 단정하고 시작해 버린 것이다. 그리고 고대의 석조물은 돌을 정으로 일일이 쪼아 만든 거친 맛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턱없이 부족했던 예산[25] 때문에 복원할 때 하얀 화강암을 기계로 깎아내어 탑을 쌓았고, 결국 기존의 서탑과 부조화가 심하고, 표면 질감이 너무 매끈하여 상당히 부담스러운 건축물이 되었다. 이를 두고 유홍준은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에서 '허망과 허상의 복원탑'이라 하였다.

미륵사지 동탑이야말로 20세기 한국 문화재 복원 최악의 사례로 기록될 겁니다.

그걸 보고 있노라면 다이너마이트로 폭파시켜 버리면 좋겠다는 사람도 있을 정도니까요.

유홍준, 2004년 미륵사지석탑(서탑) 해체 조사보고회에서


다만 당시 동탑 복원에 참여했던 문화재 복원 관계자의 말을 들어보면 그들도 많은 고충이 있었다. 터의 부재를 조사해보니 미륵사지 뒤편 미륵산 및 익산 각지에서 채굴했음이 밝혀져, 최대한 원형대로 하기 위해 돌을 운반해왔다. 그런데 돌은 정말 최상급이었으나, 문제는 질이 너무 좋아서 정으로 10~15번 쪼면 다시 갈아야 할 지경이었다는 것이다. 석수가 일일이 쪼는 전통방식대로 했다간 최소 20년 이상 걸린다는 결론이 나왔으며, 이를 완전히 재현하려면 예산이 부족할 뿐만 아니라 익산 지역의 숙원사업 자체가 좌초될 수 있었다.

이에 복원이 아니라 북한식 개건(開建)에 가까운 작업이 됨을 알면서도 어쩔 수 없이 현대적인 방식을 사용했다고 한다. 2020년대 이후에는 문화재 복원의 원칙이 생겨 유럽에서 대성당을 건설할 때마냥 수십 년 세월이 걸린다 해도 이해해 줄 수 있지만, 개발도상국을 벗어나 중진국에 접어든 지 얼마 안 된 당시 시점엔 국민정서상 용납이 안 되었고, 경제 발전에 쓸 비용을 수십 년 세월 동안 탑 하나에 투자하는 것이 어려웠다.

그런 동탑도 1993년 세워진 지 벌써 31년이 지났다. 그 동안 탑신과 상륜부에는 때가 타고 달아놓은 풍경은 떨어지는 등 점차 낡아가면서, 초창기의 지나치게 새 것 같은 현대적이고 인공적인 모습에서 점점 주변 풍경에 동화되었다.[26] 또한 복원공사 중인 서탑으로 미륵사지를 소개하긴 좀 그랬는지, 서금당지 안에서 찍은 동탑이 그동안 미륵사지를 소개하는 이미지로 사용되곤 했다. 물론 2019년 5월부로 서탑이 복원공사를 마치고 공개되었으니, 얼마 안 가 바뀔지도 모르는 일이다.

'문화재'가 아닌 '복원품'이기에 딱히 보호받지 않으므로 탑 안으로 들어가 볼 수도 있다. 내부도 복원된 서탑과 같은 실내 구조로 만들었기 때문에 '이런 느낌'이라고 체험하기 딱 좋다.

서탑처럼 사리함이 존재했는지는 불명. 백제 당시에 있었다 하더라도 천 년이 넘는 세월이 흐르며 동탑은 거의 없어지다시피 해체되었기 때문에 소실되었을 것이다.

탑을 복원하면서 원 부재 중 35개를 추려 복원에 사용했는데, 탑을 둘러보면 보이는 유난히 거뭇거뭇한 부분들이 그것들이다.

4.2. 서탑[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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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문화재청 CI_상하.svg
익산 미륵사지 석탑
益山 彌勒寺址 石塔

분류번호
대한민국 국보 제11호
위치
전라북도 익산시 금마면 기양리 97번지
분류
유적건조물 / 종교신앙 / 불교 / 탑
수량/면적
1기
지정연도
1962년 12월 20일
제작시기
백제시대 후기 7세기

서탑은 영조 32년(1756)에 간행된 익산 읍지인 금마지(金馬志)에 기록된 바에 의하면 당시에도 동방에서 가장 높은 석탑으로 알려져 있었으며, 서쪽 면이 벼락에 맞아 파괴되긴 했지만 그 이상은 무너지지 않았다. 이후에도 별다른 보수 없이 계속 방치되었다가 1915년에 벼락에 맞아 또 다시 파괴되었다. 또 다른 이미지

1910년 미륵사지 서탑의 동측면(좌)과 서측면(우)

서탑을 해체 복원하던 도중 확인한 결과, 이 시기의 서탑은 측면에 보강한 석축에 간신히 기대고 있던 수준이 아니라 스스로의 구조를 유지할 수 있을 정도로 튼튼했다고 한다. 그러나 당시 상태는 말 그대로 '붕괴 일보 직전'이어서, 그대로 놔두면 수십 년 내에 붕괴가 일어날 것이 분명했다. 국립미륵사지유물전시관 초대 관장을 지낸 이병호 국립중앙박물관 전시과장에 따르면 1910년 세키노가 찍은 사진을 보면 6층 옥개석이 달랑거리고 있어서 큰 태풍 한번 불면 쓰러질 정도로 위태로운 상황이었다고 한다. 이에 일제는 자체적인 판단에 따라 콘크리트로 석탑을 보수하였는데, 엄밀하게 말하면 복원이 아니라 임시로 보존 조치를 한 것이다. 콜로세움이 무너지지 않게 콘크리트로 가벽을 만든 것과 비슷하다.

일제 시대 보수된 미륵사지 서탑의 동측면

당시의 콘크리트는 첨단 자재로 여겨졌기에 당시 일본은 자기네 문화재를 복원할 때도 콘크리트를 많이 사용했다. 오사카 성나고야 성 복원에도 썼으며, 심지어 일본인들이 가장 존경하는 임금인 메이지 덴노쇼켄 황후 내외의 무덤에도 콘크리트로 봉분을 만들어 씌울 정도였다. 아무튼 이건 의도 자체가 나빴다기보다는 당시 기술력의 한계로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27] 하지만 이는 큰 부작용을 낳는다.

어디까지나 임시 조치였고 제대로 보수되지 않았기 때문에 콘크리트 땜질 후에도 탑은 여전히 불안정했다. 이에 문화재청은 석탑을 완전히 해체한 뒤 다시 쌓아올리기로 결정을 내렸고, 2001년부터 본격적인 공사에 들어갔다. 그리고 드디어 2019년 4월 30일, 총 18년에 걸친 복원이 완료되어 완전히 공개되었다. #





4.2.1. 붕괴 원인 조사[편집]


탑을 해체하며 탑의 내부 구조를 알 수 있게 되자 '과연 서탑은 왜 이 지경이 되었나' 하는 연구가 시작되었다. 기존에는 '미륵사지 석탑은 목탑의 외형을 돌로 재현하기 위해 많은 부재를 사용했는데, 그 막대한 하중이 탑의 기단에 영향을 줘 무너졌다'거나, 또는 '탑의 강도를 보완하고자 보충한 토사가 유실되어 무너졌다'는 설이 있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설에 불과했기에 해체작업 중에 대체 어쩌다 탑이 붕괴되었는지를 알아내고자 했는데, 이를 위해 동탑의 외형과 서탑의 내부 구조를 따와 시뮬레이션용 모형을 만들었다. 붕괴 시뮬레이션은 탑이 무너질 만한 여러 원인을 상정하여 진행하였다.

  • 처음에는 지진이 지목되었다. 역사 속 지진들과 다른 곳의 지진들을 종합 분석하여 규모 5.8의 지진으로 탑을 흔드는 시뮬레이션을 해보니, '심주가 S자 모양으로 뒤틀리고 상층부부터 무너지기 시작하여 결국에는 심주가 붕괴되면서 탑 전체가 폭삭 내려앉는다'는 결과가 나왔다. 이처럼 '지진 때문에 탑이 무너질 수 있다'는 결과가 나오자 지진으로 붕괴되었나 했지만, 시뮬레이션 결과와 실제 석탑의 붕괴 형태가 달라 지진은 원인에서 제외되었다.

  • 다음 원인으로 지목된 것은 벼락이었다. 실제로 '탑이 벼락을 맞았다'는 기록이 몇 번 있기에 나온 주장이다. 벼락을 맞아 이곳 저곳 무너졌다고 가정하여 탑의 부재들을 빼내는 시뮬레이션을 해보았더니, 빠진 곳의 위에 있는 부재들 무게 때문에 그 부분이 불안정해지고 결국 붕괴되었다. 하지만 이 역시 붕괴원인은 아닌 듯했다. 벼락은 주로 상층부에 균열을 일으키고 그 범위도 좁다. 미륵사지 석탑처럼 면 단위로 붕괴되려면 탑의 대부분이 벼락에 맞아야 한다. 그리하여 벼락 역시 붕괴 원인에서 제외되었다.

  • 다음으로 지목된 원인은 '지반의 부등침하로 탑이 기울어지고, 기타 요인으로 부재가 약해졌다'는 것이다. 다만 이것들도 원인으로 확정되진 않았다. 땅이 기울어진 것을 발견하긴 했지만, 기울어진 방향이 현재 탑이 쓰러진 방향과는 반대였다. 내구성 저하 문제도 확답이 어려웠다. 일부 부재가 여러 요인으로 인하여 내구도가 약화되어 그 부분만 약간 무너질 수는 있지만, 탑 전체 부재의 내구성이 동시에 떨어지기란 불가능에 가까웠다. 실제로도 탑의 절반은 무너져 내렸지만 나머지는 나름대로 잘 버텼다는 기록이 있다. 마지막에는 위의 원인들을 복합적으로 적용시키는 방법을 써 봤는데, 하나만 있어도 무너질 것을 여러 개를 썼으니 탑은 당연히 무너졌지만, 저번처럼 가상의 붕괴형태와 실제의 붕괴형태가 달라 복합적인 원인으로 인한 붕괴 역시 원인에서 제외되었다.

  • 미륵사지 박물관장의 해설에 따르면, 이렇게 튼튼했던 탑은 아마도 인위적인 도굴 때문에 반쯤 무너졌을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 역시 심증만 있지 물증은 없기 때문에 원인이라고 확언할 수는 없다.

결국 왜 무너졌는지에 대해서는 명확한 결론을 내지 못하고 조사가 종료되었다. 21세기 지금도 왜 미륵사지 석탑이 무너졌는지 원인을 찾기 위한 연구를 진행하고는 있는데, 여러 원인이 복합된 것으로 추정만 할 뿐 뾰족한 진전이 없다.


4.2.2. 해체 보수 계획[편집]


서탑은 시간이 지나며 더욱 흉물스러워졌고, 향후 붕괴될 우려가 있어 국가문화재위원회가 1999년 4월 해체보수정비를 결정하였다. 전라북도1998년부터 2000년까지 미륵사지석탑보수정비를 위한 준비부터 석탑해체보수정비를 위한 가설 덧집 공사 등의 공정을 완료하였고 2001년 10월부터 국립문화재연구소는 본격적인 해체 보수 정비를 추진하였다.

미륵사지 석탑 해체보수정비사업은 1998년에 시작하여 2007년에 완료할 계획이었으나, 동양 최대의 석탑이며 국보 제11호인 점을 감안하여 신중하게 해체하였고 백제 창건 당시 건축기술을 조사하기 위한 학술연구를 병행하면서 당초 계획보다 늦어져, 국가문화재위원회는 7년 늘어난 2014년까지 해체보수정비사업을 완료하기로 결정하였다.# 이 과정에서 웃지 못할 일이 일어났는데, 공사가 계속 늦어지니까 검찰에서 미륵사 보수팀이 예산을 횡령했다고 의심해서 수사한 것이다. # 실제로는 그런 일은 없었고 단지 복원 작업에 워낙 시간이 많이 걸린 탓이었다. 일제가 들이부은 콘트리트 185톤을 제거하면서, 석탑에 사용된 원석과 붙은 콘크리트는 치과용 드릴로 갈아 제거했다고 한다.

탑을 원래대로 9층까지 복원하는지, 이전에 남아있던 6층까지 복원하는지도 논란이 되었다. 일단 6층으로 복원하기로 결정하고 나니 또다시 딜레마가 생겼다. 허물어진 부분을 새로 복원해 대칭형 6층탑을 만들지, 아니면 1915년 콘크리트 보존 처리 이전의 허물어진 상태를 살려 비대칭으로 복원할지 다시 문제가 된 것이다. 결국은 허물어진 모습의 부분 복원으로 결정되었다.# #

복원 형태를 결정한 뒤에는 기초 토층의 보강 방안을 연구했다. 상술했듯 기초 토층은 상당히 견고한 채였으므로 석탑을 6층까지 복원해도 괜찮다는 결과가 나왔지만, 탑의 기단 내부의 토층은 장기적인 구조적 안전을 장담하기 어려운 상태였기에 보강이 필요하므로 연구를 실시했다. 그 결과 판축 작업으로 보강하면 설계하중 요구치 지지력을 요구치의 2배 이상을 얻을 수 있고, 여름철 우기에도 별 문제가 없다고 판단했다. 또한 판축 작업으로 땅을 다질 때 무기질 재료를 보충하면 구조적 안정성을 올릴 수 있지만 실제 문화재 수리에는 사용한 선례가 없기에 신중하게 접근해야 한다는 결과가 나왔다.

앞서 말한 대로 2009년에는 미륵사지 서탑 안에서 사리병과 금판 모양의 봉안 기록이 발견되었다.[28] 사리병에는 연꽃, 당초, 인동초 무늬가 정교한 음각으로 가득 새겨져 있다. 주경미 부경대학교 연구교수는 "항아리나 무늬 양식 등에서 6세기 중엽의 부여 왕흥사지 사리병을 계승하면서도, 당시 중국 수나라에서 유행했던 사리함 문양 제작 기술까지 독창적으로 응용했다.", "백제금동대향로에 필적하는 백제 공예품의 걸작"이라고 말했다.

한편 익산시에서는 오래전부터 미륵사탑뿐만 아니라 미륵사 전체를 복원(중건)하려는 시도를 해왔는데, 2010년 이후로는 미륵사 복원과 관련한 이렇다 할 이야기가 없고, 최근의 고도보존육성사업 내용에는 '미륵사지 정비'로 나온 것을 보아 하니 아무래도 미륵사 복원의 꿈은 접은 듯하다.#[A] 다만 이후에도 복원될 가능성은 있다.

백제의 궁궐(?) 형식인 백제문화단지가 조성/복원되자, 이에 라이벌 의식을 느낀(…) 경상북도, 경주시 측에서 신라의 궁궐이었던 경주 월성 복원을 추진 중이다. 그런데 사실 경주의 신라왕경 복원 프로젝트는 방폐장 유치 보상금 3천억 원이 있었으니 가능한 사업이다. 당장 단기(?) 프로젝트인 월정교 복원이 235억, 경주읍성 복원이 600억 원 규모의 사업이고, 황룡사 복원이 2900억 원, 월성 복원사업은 무려 9450억(!)이라는 막대한 돈이 들어간다. 방폐장 보상금 3천억으로 우선 월정교나 황룡사 같은 중단기 프로젝트를 추진하고, 이를 바탕으로 서라벌 전체의 복원을 중앙정부에 제시했으니 먹히는 것이다. 역시 최소 천억 단위 예산이 들어갈 미륵사 복원을 이런 밑바탕이 없이 추진한다면 제대로 추진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익산도 뭐 하나 유치해야 경주가 저준위 방폐장을 유치해서 3천억이니 익산은 고준위 방폐장(!!)[29]을 유치하지 않는 이상 답이 없을 듯.


4.2.3. 보수 공사[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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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격적인 공사의 시작은 2014년에 실시한 기초보강 공사였다. 일단 초반석을 놓기 위해 기존의 토층을 정리하고 현황 기록을 위한 3D 스캔을 진행한 뒤 기준선을 설치하였다. 이후 하부 토층을 평탄화시키기 위한 다짐 작업을 실시하고, 이후 양생을 거쳐 2014년 10월 초반석 12개가 모두 안전하게 설치되었다. 설치가 안전하게 잘 되었음을 확인한 다음에는 거푸집을 설치하고 판축 작업을 실시하였으며 중간중간 그 상태를 확인하였다. 모든 작업이 끝난 후 실시한 검사에서는 창건 당시 기단 지지력의 3배를 확보했다는 결과가 나왔다. 기단 조성이 완료된 뒤에는 1층 부분을 조립했는데, 이 과정에서 해체 때 발견한 사리를 심주석 사리공에 다시 봉안하였다.

부재는 기존의 부재들을 모두 사용했다면 좋았겠지만, 손상된 것이 꽤 많아 결국 새로운 석재들을 투입해야 했다. 새로운 석재들은 기존의 부재와 최대한 흡사한 석재를 선정하였고, 그 중에서도 까다로운 심사를 2번 통과한 것들만 부재로 사용될 수 있었다. 석재 가공 역시 기계를 일체 쓰지 않고 직접 가공하였으며, 가공에 필요한 공구들은 현장에 설치한 대장간에서 직접 제조했다. 기존 부재들은 보존처리를 거쳤는데, 일단 깨끗하게 세척한 뒤에 균열이 어느 정도인지 파악하였다. 부재에 균열이 있으면 석재가 절단될 수 있기 때문에 여러 가지 방법으로 균열을 메웠다.

기본적인 균열의 충전에 사용된 것은 에폭시 수지로, 균열만이 아니라 표면 박리나 공동 등 위험의 가능성이 보이는 것들은 모두 에폭시 수지로 충전하였다. 미세 균열은 금속 보강재를 사용하였는데, 부재의 훼손을 최소화하고 동시에 보강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 부재의 상태에 따라 처리 기준을 달리하였다. 훼손된 부재 중에서도 그나마 괜찮은 부재들은 티타늄봉을 삽입하고 모자란 부분은 새로운 석재로 조각하여 접합한 뒤, 원형에 맞춰 가공하여 탑의 부재로 사용되었다. 이렇게 기존 부재들을 최대한 사용한 결과, 복원에 필요한 부재의 약 80% 정도를 기존 부재로 충당할 수 있었다.

이후 2015년 12월에 미륵사지 석탑 복원 착수식이 거행되었고, 공사 완료 시점은 2017년 11월로 예정되어 있었다. 2017년 4월에는 복원 과정을 참관하러 캄보디아앙코르 유적 복원 담당자들이 방문했다.# 그 후로도 시간이 흘러 예정 기한이 다가왔지만 복원에 대한 신중론이 대두되면서 공사 기한은 거듭 늦춰지고 있었다.

복원 공사가 2018년 6월 20일 완료되었다. 본래는 2018년 12월에 모든 작업을 마치고 일반인들에게 공개할 예정이었지만 2018년 11월 10일부터 2019년 3월 23일까지 현장 구조물 철거 및 주변 정리를 마치고 일반에 공개하기로 하였다. 그리고 4월 30일 오후 2시, 국립문화재연구소 주관으로 준공식을 개최했다.


4.2.4. 평가[편집]


사실 사진만 보면 매우 깔끔하기에 졸속 복원이 아니냐는 우려도 있을 수 있으나, 화강암 경화제로 세척 및 보호 피막 형성 처리를 10년 동안 서서히 해 640년 조성 당시 재질, 그 당시의 새 돌을 재현한 것이다. 가공 직후의 돌을 갖다 끼운 것이 아니다.

미륵사지 석탑의 옛 모습은, 그냥 돌무더기가 우르르 쌓여있는 나무 없는 서낭당 같은 모습이었다. 그걸 가지고 어떻게 해서든 끌어올려 기존의 모양으로 만들어 놓은 건데, 신축이니 뭐니 할 것은 없다. 심지어 저 보수 작업의 80%는 기존 자재이고 20%만 인근에서 가져온 석재이다. 미륵사지 서탑 복원은 일제가 바른 콘크리트를 10년 넘게 치과용 드릴로 하나하나 걷어내고 사용할 수 있는 기존 부재는 가능한 한 모두 사용하였으며 15년 이상 걸린 정밀한 작업이었다.

복원은 기존에 석탑을 이루고 있던 부재 가운데 다시 사용하면 구조적으로 문제가 생길 수 있는 것은 걸러내고, 티타늄 봉 삽입으로 최대한 살릴 수 있는 부재들은 살려내어 안정성을 꾀하였다. 이미 착수 시점에서 붕괴 문제가 있었고 지반침하까지 발생하고 있어서 지반까지 모조리 들어내고 다시 다진 것이 현재의 구조물이다.[30] 또한 거의 매년이라고 할 수준으로 국립문화재연구소에서 복원 중에 뭐가 나왔는가, 복원이 얼마나 진척되었고 앞으로 어떻게 복원할 것이라는 보고서가 작성되었다. #

2019년 3월 21일 감사원에서 '국가지정문화재 보수복원사업 추진실태' 보고서를 발표하며 석탑 상, 하부의 적심이 달라진 점과 공사 도중 석재 사이에 넣는 충전재를 변경한 점에 대해 지적하고 이것이 부적정했다며 주의 조치를 한 바 있으나, 문화재청의 해명을 통해 재심의가 이루어졌다.

  • 석탑 상・하부 적심이 달라진 점과 문화재청 해명
감사원의 조사 결과, 새로 가공한 석재를 사용한 석탑 하부와 기존 석재를 사용한 상부의 축석이 다르게 맞춰져 위아래의 적심이 다른 부분이 지적되었다. 이에 대해서 문화재청은 다음과 같이 표명했다.

* 익산 미륵사지 석탑의 내부 상·하 적심의 구성이 달라진 것은 석탑의 구조적 안정성 확보와 역사적 가치 보존을 함께 고려하여 나타난 결과입니다.
* 석탑의 보수과정에서 석탑 내부 상·하 적심의 구성이 달라진 것은 사실입니다. 석탑의 1~2층은 당초 설계와 같이 대부분 신석재로 채워 견고히 하였으나, 3층 이상에서는 전문가 자문과 문화재위원회 검토 등을 거쳐 구석재를 재활용하여 보수하였습니다.
* 석탑 해체 후 설계 시 적심의 구성에 대한 다양한 검토가 있었으나, 상부하중의 분배, 외부부재와의 일체화 구성 등을 고려하여 적심을 대부분 신석재로 채워 견고히 하는 것으로 계획되었습니다. 다만, 2016년 적심의 신석재 과다 사용과 기존 적심석의 역사적 가치 보존에 대한 문제가 논의되어 전문가 자문과 문화재위원회의 검토 등을 거쳐 상·하 구성이 달라졌습니다.

익산 미륵사지 석탑(국보 제11호) 감사원 감사결과 관련 보도 참고자료, 문화재청 2019-03-21.

이어 감사원의 주의 요구에 대한 재심의 청구에서는 다음과 같이 상세히 해명하였다.

계획설계(2011년) 및 실시설계(2012년) 시 석탑 외형뿐만 아니라 내부 적심에 대해서도 구석재 위주, 구석재와 신석재의 혼용, 신석재 위주 채움 등 다양한 구성 방안에 대한 전문가들의 사전검토가 있었고, 3층 이상 적심 구성 변경 또한 2016년 자문위원회와 문화재위원회의 사전검토를 거쳐 결정하는 등 원형의 석탑 내부 축석 방식에 대한 구체적인 검토 없이 계획을 수립하거나 변경한 것이 아니다.

또한, 해체 과정에서 확인된 석탑 내부의 적심은 파손이 심하여 원형 자체를 정의하기 어렵고 석탑 내부 상·하 적심의 구성이 다르게 된 것은 충분한 검토 절차를 거쳐 저층부의 구조적 안정성 확보와 기존 적심석의 역사적 가치 보존을 함께 고려한 결과로 석탑 내부 상·하 적심의 구성이 다르게 된 것만으로 일관성 없이 수리되었다거나 원형을 훼손하였다고 볼 수 없다.

감사원 재심의 청구 이유 중 "1) 원형의 석탑 내부 축석방식 검토 미흡 지적 관련"[31]

  • 충전재 변경과 문화재청 해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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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감사원 2019-재심-3 관련 표 1.png}}}||

석재 사이의 틈을 메워주는 충전재를 복원 초기에는 실리카퓸 충전재로 사용하였으나, 정확한 검토 없이 황토 배합 충전재로 변경했다는 지적이 제기되었다. 이에 대해서도 문화재청은 다음과 같이 표명했다.

* 충전재(무기질재료)는 공극 채움을 통해 석탑의 구조적 안정성을 크게 향상시키는 역할을 하며, 배합 재료의 변경은 석탑의 구조적 안정성에 큰 영향이 없습니다.
* 석탑을 구성하는 부재 사이의 공극에 충전되는 흙, 석회 등 기존 재료의 단점을 극복할 수 있는 재료들을 개발하여 공사 초기에는 성능이 가장 우수한 실리카퓸 배합 충전재를 사용하였으나, 시멘트와 유사하다는 우려 등으로 사용범위를 축소하였습니다.
* 황토 배합 충전재는 실리카퓸 보다는 성능이 낮은 편이지만 흙, 석회보다는 훨씬 안정적이며 성분, 색상 등이 기존의 흙과 유사하여 문화재에 가장 적합하다고 판단하였습니다.

익산 미륵사지 석탑(국보 제11호) 감사원 감사결과 관련 보도 참고자료, 문화재청 2019-03-21.

마찬가지로 재심의 청구에서는 다음과 같이 상세히 해명하였다.

문화재는 각각의 양식, 구조, 노후 정도 등이 다르기 때문에 정확한 구조계산이 불가능에 가까워 수리설계 시 구조계산을 의무화한 규정이 없고, 실측설계업자에 의한 변경 설계도서의 제출은 늦어졌으나 석탑에 대한 실측 및 조사연구를 장기간 수행한 국립문화재연구소에서 기본도면을 제공하여 조립을 진행한 것은 「공사계약 일반조건」 제19조 제3항의 설계변경 완료 전 우선시공 가능 규정과 공사 중지로 인한 품질저하(공사 중지 시 석탑의 가공, 조립, 공극 충전 등 본 현장에 특화된 기능공들의 생계를 위한 이직이 불가피하여 기술 단절 및 품질 저하 우려), 소모성 예산 낭비 방지 등을 고려한 적극적 업무수행이었다.

또한, 황토를 배합한 무기질재료는 개발 당시 실험연구를 통해 기존의 흙, 석회보다 훨씬 안정적인 성능을 갖는 것으로 나타났고 축기부 토층보강방안연구(2011년), 기초 보강방안연구(2013년)에서 석탑 기초부 보강에 사용해도 충분히 안전한 것으로 확인되어 성능이 검증되지 않았다고 단정할 수 없으며, 무기질재료 충전재는 석탑의 구조적 안정성을 향상시키는 역할을 하기 때문에 배합재료를 실리카퓸에서 황토로 변경한 것은 구조적 안정성에 큰 영향이 없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견해이다.

감사원 재심의 청구 이유 중 "2) 축석방식 변경에 따른 구조안정성 미검토 지적 관련"[32]

문화재청은 해당 복원에서 제기된 지적들에 대하여 위와 같이 반론하며, 구조적 안전성을 담보하였다. 또한 설계 변경은 국립문화재연구소에서 설계변경도서에 준하는 도면을 작성하여 시행하였다는 점을 강조하였으며, 문화재 실측 설계업자의 설계 변경도서를 기다리면서 발생하는 소모성 예산 낭비, 공사 중지 시 우려되는 공사품질 저하 등을 막기 위한 불가피한 조치였다고 밝혔다. 이어 앞으로 안전 점검을 실시할 것이며, 2016년에서 2018년까지의 석탑의 변위계측 모니터링 결과 이상이 나타난 바 없다고 발표했다. #

이에 2020년 5월 28일, 감사원은 재심의를 통해 주의요구 조치를 취소하였다. 보수공사에 문제가 없다는 것이다. 다만 이후 감사원이 지속적으로 모니터링 하고, 미륵사지 복원 관련해서 예산 심의도 깐깐하게 한다. 뭐 하나라도 걸려라 하는 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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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감사원 2019-재심-3 관련 본문 1.png}}}||

…(전략)…문화재연구소가 익산 미륵사지 보수정비사업 과정에서 구체적인 검토 없이 계획을 수립하였다가 이를 변경하였다고 보기 어렵고, 계획을 변경하여 적심의 상·하부가 다른 형태로 축석되었다는 것만으로 일관성이 없어 잘못되었다고 보기는 어려운 바 (재심의) 청구 이유 1항은 이유 있고, 청구 이유 2항은 문화재연구소가 「문화재수리 등에 관한 업무지침」 제4조 등에 규정된 설계 후 시공절차에 따르지 않은 점은 있으나 문화재연구소의 업무처리가 「감사원법」 제34조의3 제1항 및 규칙 제5조 제1항의 적극행정면책 요건을 충족하는 것으로 판단되어 이유 있으며, 이 건 주의요구와 함께 구조계산 등을 거친 실측설계도서 없이 축석된 부분에 대하여 구조 안정성 검증 후 그 결과에 따라 적절한 조치방안을 검토하도록 통보한 점 등을 고려할 때 별도로 주의요구를 할 필요성은 적다고 보여진다.

감사원 재심의결정 2019-재심-3(2018-특정-76), 주의요구(익산미륵사지석탑보수부적정)에 관한 재심의청구



5. 찾아가는 방법[편집]


  • 익산역에서 온다면 익산역 사거리의 대한통운 정류장에서 익산 버스 41, 41-1, 60, 60-1, 60-3을 타면 된다. 다만 60번 계통은 금마공용버스터미널에서 대기하기에 41번 계통이 더 빠를 수 있다. 아니면 터미널에서 환승하던가.
  • 주말과 공휴일에는 익산역 앞에서 시에서 운영하는 순환형 시티투어버스를 타면 된다.
  • 시외버스나 고속버스를 타고 온다면 익산역 앞에 있는 시외버스 정류장에서 내려서 위의 익산역과 같은 방법으로 버스를 타면 된다.
  • 시간대를 맞출 수 있다면 익산시외버스터미널에서 여산, 봉동 등으로 가는 좌석버스(222-1,555)를 타고 중간 경유지인 금마면의 금마공용버스터미널에 내려서 시내버스로 갈아타도 된다. 위에 언급한 모든 버스들이 금마공용버스터미널에서 미륵사지 앞 정류장까지 운행한다.
  • 자가용으로 온다면 고속도로 톨게이트는 호남고속도로 익산IC가 가장 가깝다. 익산 IC에서 미륵사지까지는 약 9 km로 10~15분 남짓 걸린다.


6. 대중문화 속의 미륵사[편집]


  • 바람의 나라미륵사. 석탑과 금당 건축물 등 시설물을 나름대로 고증했다.
  • 시인 신동엽의 서사시인 금강(19장)에서는 주인공 금마와 하늬가 미륵사지 석탑 앞에 서서 바라보는 장면을 묘사한다.

7. 여담[편집]


  • 미륵사지 석탑 덕분에 익산시의 유적지들 중에서는 가장 잘 알려진 곳이다. 익산시의 CI에도 들어가 있을 정도.
  • 인근의 왕궁리 유적이 사람이 없어 휑한 것과는 달리 늘상 사람들로 붐비는 편이다.
  • 2000년 10월 미륵사지를 보수정비하던 중 익산 미륵사지 금동향로가 발견되기도 했다.
  • 기와를 구웠던 가마의 터로 보이는 곳이 2군데 있다. 동탑 옆에 있는 곳은 고려시대의 흔적이고, 절터 뒤편에 있는 진회색 건물로 보호받는 곳은 조선시대의 흔적이다. 미륵사가 조선시대까지는 노릇을 했음을 보여주는 유적이다.
  • 미륵사지 석탑 복원과 국립익산박물관의 건립 등등 여러가지 사업으로 관광객이 많아지자 익산시에서 유적지 전방의 10만 8천여㎡ 부지에 총 386억원을 들여 관광지 조성 사업을 벌이기로 했다. 일단은 부족한 주차 시설을 보충하는 것을 시작으로 전통문화 체험관, 관광안내소, 편의시설 등이 들어올 예정으로, 2022년 8월 7일 모든 공사를 마치고 정식으로 개장하였다.
  • 2020년 익산 미륵사지에서 기와를 물들인 '녹유'가 나와서 세간의 이목을 끌었다. # 그래서 같은 해 11월까지 특별전을 열었다.#


8. 외부 링크[편집]




9. 사적 제150호[편집]



익산 기양리에 있는 백제 때의 절터이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백제 무왕 때 왕이 왕비와 사자사(師子寺)에 가던 도중 용화산 밑의 연못에서 미륵삼존이 나타났는데, 왕비의 부탁에 따라 이 연못을 메우고 3곳에 탑, 금당, 회랑을 세웠다고 한다. 기록에 따르면 미륵사는 백제 무왕 때 지어져 조선시대에 폐사되었음을 알 수 있다.

절의 배치는 동·서로 석탑이 있고 중간에 목탑이 있으며, 탑 뒤에는 부처를 모시는 금당이 각각 자리한다. 이것이 복도(회랑)로 구분되어 매우 특이한 가람배치를 하고 있다. 금당의 규모는 앞면 5칸·옆면 4칸이고 바닥에는 빈 공간이 있는데, 이것은 바닥마루의 습기에 대비한 것으로 보인다. 고려·조선시대 건물터에서 온돌시설이 발견되어 온돌의 발전과정을 연구하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된다.

출토된 유물로는 기와·토기·금속·목재 등 다양하며 글자를 새긴 기와도 많이 발견되었다. 서쪽 금당 앞의 석탑은 국보 제11호로 지정되었는데, 현재 남아있는 석탑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목조건축의 기법을 사용하여 만들었다. 무너진 뒤쪽을 시멘트로 보강하였던 것을 2019년에 최종적으로 보수정비를 마무리하였다. 현재 국립익산박물관에는 미륵사의 복원된 모형이 전시되고 있다.

미륵사는 신라의 침략을 불교의 힘으로 막고자 지은 호국사찰로서, 백제가 망할 때까지 중요한 역할을 했던 곳으로 여겨지는 역사적 가치가 큰 곳이다.

[1] 오랜 세월에 걸쳐 또는 세계의 일정 문화권 내에서 건축이나 기술 발전, 기념물 제작, 도시 계획이나 조경 디자인에 있어 인간 가치의 중요한 교환을 반영[2] 현존하거나 이미 사라진 문화적 전통이나 문명의 독보적 또는 적어도 특출한 증거일 것[3] (황룡사 담장 밖에서부터 동궁과 월지까지 이어지던 광장을 황룡사 부지에서 제외한다면), 황룡사보다 미륵사가 부지 면적은 2배나 더 넓다. 이는 황룡사는 경주시 시내 한복판에 지어진 사찰이지만, 미륵사는 당시 텅 비어있던 산자락에 앞뒤로 길게 늘어선 부지에 지어진 사찰이었기 때문. 이에 중심가람 영역 이외에도 진입로와 후원 부분에 많은 별도의 건물 영역이 있었다. 다만 건물 크기는 황룡사에 크게 밀린다. 같은 백제의 사찰 중에서도 건물 하나하나의 규모는 왕궁리 유적 동쪽의 제석사가 더 크다. 일례로 미륵사지 목탑지 한 변의 길이는 18.56m이나 제석사지 목탑지는 21.2m이다. 그나마 목탑지가 황룡사에 비벼볼만한 건물이고, 다른 건물들은 황룡사와 비교가 안 된다. 물론 미륵사 건물도 엄청 크지만. 이렇게 된 이유는 미륵사는 3원 양식을 채택하여 탑도 3개, 금당도 3개가 있었므로 각 건물의 규모는 거대한 절 부지 면적에 비해서는 작아진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우리나라에서 석탑양식을 처음으로 창안해 낸 미륵사의 어마어마한 역사적 의의가 줄어드는 것은 아니다.[4] 쌍릉에서 3km 정도 떨어진 곳에 있는 연못. 무왕의 어머니가 이곳의 과 인연을 맺어 무왕을 낳게 되었다는 전설이 전해져 내려온다. 현재는 연동제란 이름의 저수지로 쓰이고 있으며, 익산시서는 이곳을 공원으로 정비할 계획을 짜고 있다.[5] 삼국유사는 무왕이라 기록했다.[6] 사리봉영기가 중앙에 있는 사리병의 남쪽에 놓였다. 즉 이 사진은 심주석의 북쪽에서 남쪽으로 찍은 것이다.[7] 심초석(心礎石)은 탑의 중앙기둥을 받치는 주춧돌, 심주석(心柱石)은 심초석 위에 올리는 돌 기둥이다. (물론 기둥이 나무라면 심주석은 없다.) 미륵사지 석탑은 심초석 위에 레고처럼 네모나게 다듬은 돌을 차곡차곡 올려 기둥을 만들었는데, 그중 심초석 바로 위에 있는 심주석에서 유물이 나왔다.[8] 부처의 유해에서 나왔다는 사리 등을 담은 용기[9] 불교에서는 사찰이나 법구 등을 화려하게 장식하고 꾸민다는 의미로 장엄(莊嚴)이란 말을 사용한다. 그러므로 사리장엄구란 '사리를 꾸미는 도구'란 뜻이다. 사리병 등도 당연히 사리장엄구이다.[10] 원문에선 유형(遺形)이라 하였는데 사리를 가리키는 다른 말이다.[11] 불교에서 사리를 모신 탑을 예배하는 방법은 합장하고 탑을 중심으로 시계 방향으로 도는 것이다. 탑을 자기 오른쪽에 두고 3번을 돈다 하여 우요삼잡(右繞三匝), 줄여서 요잡(繞匝)이라고 한다. 사리 주변을 '돌게 했다'는 표현은 그래서 나왔다. 단, 사리봉영기에서는 3번이 아니라 7번을 돈다고 하였다.[12] 번역문의 출처인 국립문화재 연구소의 보고서는 이 부분에서 우리말 번역을 '황후'라 하였지만, 봉영기 원문은 王后가 분명하므로 '왕후'라고 바로잡는다. 다른 부분에서는 다 '왕후'라 하였는데 이상하게 여기서만 번역자가 '황후'라고 잘못 썼다.[13] 쉽게 말하면 '우리 왕후께선 까마득한 전생부터 공덕을 많이 쌓으신 덕에 현생에서 귀한 몸이 되셨다.'는 것이다.[14] 삼보(三寶)란 불교의 3가지 귀의대상(불법승)을 가리키지만, 불교를 가리키는 의미로도 쓰인다. '삼보의 동량이 되셨다.'는 말은 '불교의 든든한 후원자/지지자가 되셨다.'는 의미로 해석하면 적절하다.[15] 한자 원문은 보력(寶曆)인데 군주의 위, 또는 그 치세를 가리킨다. 문화재연구소의 보고서에선 보력을 풀어서 왕립(王位)이라고 옮겼는데, 왕위(王位)를 잘못 썼다고 판단하여 본 항목의 인용문에서는 바로잡는다.[16] 원문은 왕후즉신(王后卽身)이다. 번역자는 동국대학교 사학과 김상현 교수인데, 김 교수조차도 즉신(卽身)이란 표현을 어찌 해석해야 할지 몰라 번역문을 좀 뭉개었다. 김 교수의 글에 따르면 존칭어 당신(當身)이란 뜻일지도 모른다 생각하였지만 '몸에 나아가서는'이라고 옮겼다 하였다.[17] 불교 사찰에서 깃발의 일종인 '당간'을 세우기 위한 지지대로 쓰이는, 1쌍의 돌기둥 같은 구조물.[18] 신라백제 출신 승려 경흥을 나라의 어른(國老)으로 임명하는 등, 불교를 통해 백제 유민을 회유하려는 정책을 펼쳤다. 인접한 익산 왕궁리 유적도 통일신라에서 사찰로 계속 운영되었다.[19] 16세기 말 임진왜란 때에는 전라도 내륙 지역에서도 남원성 전투, 웅치 전투, 이치 전투 등 큰 전투가 벌어지긴 했지만 왜군이 익산까지는 침범하지 않았던 것 같다. 또한 병자호란 때에 익산은 교전 지역이 아니었으므로 임진, 병자 양란으로 인한 소실 가능성은 낮다. 꼭 전란으로 소실된 게 아니라도 유교 국가를 표방하여 숭유억불 정책을 펼친 조선에서는 더 이상 지방의 대형 사찰 운영을 지원해주지 않았으므로, 수백년 동안 자연히 재정난으로 절이 문을 닫았을 수 있다. 특히 미륵사는 원래 백제의 국가 사찰로 만들었기 때문에 규모가 너무 커서 관리도 힘들었을 것이기 때문이다.[20] 콘크리트를 뜯어내기 위해 치과용 도구까지 사용했을 정도라고 한다[21] 아미타불이 있다는 서방정토에 태어나길 바라는 신앙과 다르다.[22] 노반: 탑의 꼭대기에 있는 상륜의 한 부분[23] 불상을 모시는 건물[24] 그 덕에 1980년부터 미륵사지를 본격적으로 발굴할 수 있었다.[25] 본래 견적은 60억 정도였지만, 반영된 예산은 29억이 전부였다. 이마저도 원래는 23억이었다가 더 준 것이다.[26] 과거 동탑을 대차게 비판했던 전 유홍준 문화재청장도 개정한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에서 나름 봐줄만해진 동탑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27] 당장 우리나라만 해도 2010년 광화문을 제대로 복원하기 전까지 있었던 1960년대 말에 세운 광화문은 콘크리트 복원이었다.[28] 이 기록에 등장한 좌평 사택적덕과 사택비는 드라마 계백에 등장하기도 했다.[A] 원 기사 삭제로 비슷한 기사 첨부[29] 쉽게 말해 원자력 폐연료봉이다. 비슷한 방폐장이 바로 온칼로.[30] 이는 삼국시대 당시엔 미륵사지 바로 근처까지 바다가 들어와 있었기 때문이다. 바닷가 바로 인근의 뻘밭을 매우고 지었기 때문에 수천년이 지나도 지반이 안정되질 못한 것이다.[31] 인용근거 저작권법 제7조(보호받지 못하는 저작물) 및 제24조의2(공공저작물의 자유이용).[32] 인용근거 저작권법 제7조(보호받지 못하는 저작물) 및 제24조의2(공공저작물의 자유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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