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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糜芳
생몰년도 미상
1. 개요
2.1. 유비 휘하에서
2.2. 손오로 배반
2.3. 손오에서
4. 미디어 믹스



1. 개요[편집]


후한 말과 삼국시대의 인물이며 미축의 동생, 미부인의 오빠로[1] 는 자방(子方).

형과 함께 유비를 따라 각지를 전전했던 인물이다. 그리고 사서에 따르면 관우를 배신한 인물이다.


2. 정사[편집]



2.1. 유비 휘하에서[편집]


조조가 서주를 장악했을 당시 미방은 팽성국의 상 자리를 받았는데, 팽성국이란 서주의 여섯 개 현을 아우르는 행정 단위이며 하나의 나라(國)로 분류된다. 상이란 국(國)의 최고 권력자.[2] 팽성은 서주의 행정중심지였다. 미방이 제안을 받아들였다면, 행정 중심지의 최고권력자가 되는 셈이었으나, 미방은 이 제안을 거부하고 형 미축과 함께 유비를 따라나섰다.[3]

이후 10여 년간 유비와 함께 방랑했으며, 유비는 입촉 직전 그를 남군 태수로 부임하게 하였다. 이 자리는 유비의 유일하다시피한 근거지를 맡은 것이다. 이는 그에 대한 유비의 신뢰를 단적으로 알 수 있게 하며, 단순히 그가 개국공신인 미축의 동생이자 미부인의 오빠여서 중임을 맡은 게 아님을 보여주며, 미축이 명예직에서 노는 동안 미방은 실무직에서 뛰었던 걸 보면 미축보다 더 능력이 있었다는 설도 있다. 조조가 자신이 출정할 때마다 본거지를 순욱하후돈에게 맡겼던 예와 마찬가지로 자신의 후방을 누군가에게 맡기는 일은 절대적인 신뢰 없이는 불가능하다. 조조가 친구였던 장막에게 후방을 맡긴 일과도 비슷하다. 미방처럼 씁씁한 뒷일이 발생한 것조차도 비슷하다.


2.2. 손오로 배반[편집]


이후 그는 형주 공방전 당시 관우가 북벌(번성공략전)을 실시할 때까지 남군 태수로 있었는데 이 지위는 관우의 바로 아래였으며, 실질적으로 또한 정치적으로 형주의 2인자 자리였다. 그런 그를 관우가 가벼이 여겼고 관우가 출군한 이래 미방, 사인은 군수물자를 공급했으나 그를 돕는 데 전력을 다하지 않자 관우가 ‘돌아가면 응당 죄를 다스릴 것’이라 하니, 미방과 사인은 모두 두려움을 품고 불안해하여 이에 손권이 은밀히 미방과 사인을 꾀자 미방과 사인은 사람을 시켜 손권을 영접했다.(정사 관우전)

그런데 정사 여몽전에는 미방과 사인 중 누가 더 문제의 주체인지 알 수 있는 기록이 있다. 여몽전 주석 오록의 기록에 따르면, '당초 남군성 내에 실수로 불이 나 자못 많은 군사기물을 태웠다. 관우가 미방을 질책하자 미방이 내심 두려움을 품었는데 손권이 이 일을 듣고 그를 꾀자 미방이 몰래 서로 화합했다. 그러다 여몽이 (남군을) 공격하게 되자 쇠고기와 술을 지니고 성을 나와 항복했다'라고 되어 있다. 즉 남군 태수인 미방이 자신이 관리했어야 할 군수물자를 실수로 상당히 많이 태워버린 사건을 벌인 것이었는데, 이는 번성공방전 전의 일이었다면 관우의 북벌을 늦추는 결과를 초래한 큰 실수였고 번성공방전 중에 벌어진 일이라면 군자에 차질을 불렀을 큰 실수였다. 이에 관우는 미방을 질책하였고 미방은 이를 두려워하여 그때부터 손권이 미방을 꾀어 내통한 것으로 기술되어 있다. 미축전에서도 미방이 관우와 같이 일을 맡아 처리했으나 두 사람은 개인적인 친분관계가 좋지 않았고 이에 두 마음을 품고는 모반하여 손권을 맞이했다고 나온다.

같은 개국공신이라고 해도 엄연히 상급자이며 이미 관우는 전장군[4]으로 임명되며 가절[5]을 임의받은 위치에 있었다. 그런 관우에게 미방은 누가봐도 처벌받을 만한 실수를 해서 입지가 불안한데 내심 불안했던 것이 크게 작용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일단 관우는 실제로 미방을 질책하거나 죄를 묻겠다고 한 적은 있어도 죽인다는 말은 한 적이 없다. 실제로 미방의 형인 미축은 관우도 무시할 수 없을 위치의 개국공신이니 말이다.[6]

이는 아무리 가절을 받았어도 관우가 일반적인 정신을 유지하고 있다면 또는 주변의 관리들이 일반적인 상식을 유지하고 있다면 미방이 이런저런 실수를 저질렀다고 해서 절대 관우가 함부로 죽일 수 없는 위치였기 때문이다. 미방은 유비가 임명한거라 관우 맘대로 그런 짓을 할 수가 없다. 유비가 서주에 처음 입성한 것이 194년이고 형주에서 조조에게 처참하게 깨진 것이 208년이고 입촉을 시작한 것이 211년이며, 제갈량의 후속부대가 출진한 것이 213년인데 미방의 배반은 219년이다. 미방 입장에서는 아무것도 없는 군벌을 능력과 인품 하나 믿고 전재산을 바치면서 고향과 안정된 지위를 떠나 25년 동안 사선을 넘나들며 따른 셈이다.

다만 관우가 중대한 일을 처리하는 과정 중에 미방을 질책한 것은 일을 세심하고 사려깊게 처리했다고 하기엔 어려운 일이다. 물론 미방 스스로가 나중에 동오에서 떳떳치 못하게 지내듯이 그렇다고 배반하는 것이 훨씬 더 어이없는 일이 맞지만, 아무리 관우가 사방장군에 가절 등 권위가 올라갔다 해도, 마치 배우자의 지위가 만년에 얼마나 올라간들 오래 동고동락해 온 상대편 배우자들이 별로 기죽지 않듯이 10년 전 형주 당양에서 죽을 고비를 넘기던 미방에게는 큰 상관없는 일이었을 것이다. 마치 황충과 관우가 직위로는 비슷한 반열에 올랐어도 촉 내부에서 그 둘의 위상이 전혀 다르듯이. 그런 입장에서 서주의 대호족 출신으로 직위 재산 고향 등 모든 것을 유비에게 던진 미방이 아무리 유비랑 친밀해도 유비가 아닌 유비의 부하이자 떠돌이 무부 출신의 관우에게 질책을 받는다는 것은 굴욕감과 동시에 이젠 자신이 이곳에서 필요 없는 것이 아닌가 하는 위기감을 줄 수 있는 문제다.[7] 관우 입장에선 미방이 지난 세월 동안 그런 고난을 이겨가며 충성했으니 설마 질책했다고 배신하겠느냐 생각할 수도 있는 문제이긴 하지만, 어쨌거나 이런 만약의 사태를 고려하지 않은 인선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한편으론 이건 관우를 어떻게든 깎아내리고 미방을 옹호하기 위해 우호적으로 본 것이고, 실제 기록만 보면 미방은 관리감독 소홀로 최전선 군수물자를 태워먹고 관우에게 질책 들은 이후에 제2의 기회를 받았음에도 벌 받을걸 두려워해서 적국인 오나라와 내통해서 자기 상사를 죽게 만든게 맞다. 애초에 전쟁 중에 군량을 제대로 공급하지 못한 것은 보통 죄가 아니며, "돌아가서 죄를 물을 것"이란 건 지극히 당연한 경고이자 마땅한 조치이다. 오히려 형이 개국공신이란 이유로 어물쩍 넘어가는게 올바른 조치가 아닌 것이다. 이걸 두고 마치 중요한 순간에 관우가 멀쩡한 미방을 협박한 것처럼 묘사하는 것은 관우에 대한 지나친 폄훼다. 관우는 '죄를 저질렀으니 죄를 묻겠다'는, 군법에 따르면 당연한 말을 했을 뿐이다.[8]

어쨌거나 관우는 이들에게 후방에서의 지원을 맡기고 벼르던 북벌을 시작했다. 그리고 관우의 번성 포위망이 서황에 의해 무력화되었다. 여몽이 이끄는 오나라 군이 남군으로 진군해오자 결국 항복을 택한 사인을 본 미방은 미리 준비해 둔 쇠고기와 술을 지니고 성을 나와 항복했다. 호삼성은 초병이 비록 잡혀 묶였어도, 만약 미방과, 사인의 반심이 없었다면, 관우는 오히려 듣고 알 수 있었다고 했다. 연의와는 다르게 이미 오나라 측과 내통한 사실이 있는 것을 생각하면 미방은 사인보다도 악질이다. 사인은 적어도 처음에는 공안을 지키고 항복사절도 만나지 않으려다가 내응이 있다는 말 때문에 투항하여 사로잡혔다. 근데 여몽전 등의 문헌에 따르면 이 내응의 주체가 미방인 것이다. 이를 보면 형주가 이리 쉽게 넘어간 연유에는 미방의 책임이 훨씬 크다는 점을 알 수 있다.[9] 오죽했으면 우번이 연회 중에 여몽에게 남군에서 미방 혼자만 투항했으니 안심할 수 없다는 말을 했고 실제로 여몽이 남군 내부의 저항세력을 분쇄해야 했을 정도다.[10]

항복의 여파는 매우 컸다. 미방이 제 임무를 다했다면 번성 포위망 와해로 완과 허도까지 노리는 북벌은 실패로 돌아갔지만 촉의 형주 방면 총사령관 관우와 그가 이끄는 군대는 면수를 장악하고 양양 포위를 더 굳건히 유지해 양양은 연락이 끊겨서 함락되기 직전이었다. 적어도 후방 방어선이 무력화되지 않았다면 관우군은 성과를 올리고 귀환할 수 있었을 것이고 만약 방어선이 뚫려서 설사 오군에게 형주를 내주더라도 유비가 있는 익주로 퇴각할 시간적 여유가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미방의 무기력한 항복으로 인하여 위로는 위군이, 아래로는 오군에게 포위된 관우의 군사는 사기를 잃었고 관우와 관평은 목숨을 잃었으며, 형주는 오나라의 영토로 편입되고 만다.

형인 미축은 촉에서 명예직이나마 실세 제갈량보다도 높은 대우를 받았다. 미방의 누이는 생전에는 유비의 부인이었다. 그런 개국공신 중 한 명에 외척이었던 미방이 너무나 맥빠지게 항복했기에 당시 의 우번도 믿지 않을 정도, 우번은 사인이나 반준과 다르게 미방에 대해서 대놓고 비꼬기까지 했을 정도였다. 관우가 형주에 대비를 해놓은 걸 손권과 내통을 하면서 무력화 시킨 미방에 대한 책임이 가장 크다고 오나라에서도 인정하고 있었다는 얘기다.[11] 은근히 다들 넘어가는 거지만 미방 역시 유비를 따라다니는 공신으로서 형주 관리에 있어선 유비가 믿고 맡긴 2인자로 남군태수로서 관우가 자리를 비우면 바로 그 자리를 대신 책임져야 하는 당사자였다. 결국 미방 역시 항복이 공사구분 없는 온당치 않은 이유였기 때문에 오나라에서 기죽어 지내야만 했던 것.

그가 항복하자 그의 형인 미축은 부끄러움에 시름시름 앓다가 죽어버렸다. 계한보신찬에서는 투항 후에 개인적인 감정으로 국가를 배신했다는 이유로 위와 오에서 비웃음을 당했다고 한다. 또한, 계한보신찬에서는 미축과 미방을 나란히 언급하면서도 그들의 이름에 달리는 존칭을 달리하였는데, 미축은 '자(字)'를 붙여서 '미자중(子仲)'이라고 존칭했지만 미방은 존칭없이 이름 그대로 '미방'이라고 칭했다.


2.3. 손오에서[편집]


손오에 항복한 이후 괜찮은 관직을 얻어 잘 산 듯하다. 그러나 항복한 인물인 만큼 평가가 썩 좋진 않았던 모양으로, 우번에게 조롱당한 기록이 있다.[12] 이후 하제와 함께 진종의 반란 토벌에 참여한 기록을 마지막으로 더 이상 어떠한 사서에서도 등장하지 않는다. 그냥저냥 살다가 조용히 죽은 것으로 보인다.

미방이 손오에 와서 남긴 유일한 기록인 진종의 반란 토벌인데, 자신이 유비를 버리고 손권에게 돌아선 처지에서 손권을 버리고 위나라로 귀순한 진종을 친 것은 꽤나 재미있는 인선이었다.

다만 우번과의 일화를 보면 최소한 내통한 것에 대한 부끄러움은 있었던 모양이다.


3. 연의[편집]


정사에서의 행적과 비슷하다. 관평이나 유봉과 세트로 잡졸, 잔당 처리 담당이며, 간손미에도 못 미치는 등 비중이 적고 전공도 높지 않지만, 그래도 은근히 단역으로라도 자주 노출된다. 관우에게 처벌을 받을 때 미방이 받았을 당혹감에 설득력을 부여하고, 오에 투항할 때 상당한 구신이 투항하는 것으로 보이게끔 한 나관중의 빌드업이 돋보이는 부분이다.

연의에서는 후일 유비가 극대노하여 무려 70~75만이라는 대군을 이끌고 이릉에 쳐들어와 이릉 대전을 일으켰을 때, 유비군의 기세가 흉흉하여 오나라가 위태위태하자 겁을 집어먹고는 역시 같은 처지였던 사인에게 자신과 함께 다시 유비에게 돌아가자고 설득하는데 촉으로 돌아가면 유비가 죽일까봐 불안해하는 사인에게 내 여동생은 촉제의 부인이었고 아두는 내 조카니 용서해 줄 것이야.[13]라고 말하며 같이 촉으로 돌아가지만 유비의 분노가 워낙 대단한데다 저런 걸 감안해도 용서받기에는 지은 죄가 워낙 무거웠기에[14] 유비는 이들이 돌아오자마자 곧바로 그를 참수한다.

그나마 아래 코에이 삼국지에선 무장 취급이라도 받지만 연의에선 고람유벽을 죽인 장면에서 '유일한 무장이었던 유벽이 죽자 유비는 직접 칼을 빼들고...'라고 묘사되며 무장 취급도 못 받는다. 물론 미방도 무관은 무관이었지만 백전노장 유비보다 개인 전투력이 강했던(혹은 맹장 고람과 그나마 한 판 붙어볼만하던) 인물이 전직 황건적이던 유벽 하나 뿐이었다는 추측도 가능하다. 또한 재상 제의도 받고 서주에서 손꼽히는 부자집 사람이던 미방이 굳이 그렇게 강했을 이유도 없었다.

한편 장판파에서는 조조군의 공격으로 인해 아수라장이 된 상황에서 유비와 떨어졌다가 다시 합류하면서 조운이 조조군 쪽으로 달려가는 것을 보았다면서 조운이 배신했다고 일러바친다. 물론 당시에는 조운이 적의 한복판에 뛰어드는 것은 자살행위 내지는 투항행위로 볼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당시 상황을 목격한 장수라면 충분히 할 수 있는 이야기이기는 했다. 장비 또한 조운이 투항했다고 처음에 의심한 모습을 보아도 그렇다. 정사에도 이 대목은 있으나 일러바친 사람이 미방이라는 언급은 없다.


4. 미디어 믹스[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미방/기타 창작물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1] 미축, 미방, 미부인 삼남매 모두 생년 기록이 없어 미축이 첫째이지만 미부인과 미방 둘 중 누가 더 연상인지는 확실하지 않다.[2] 정확하게는 군국제 체제에서 국(國)에 봉해진 왕(王)은 따로 있고, 상(相)이 행정을 책임진다. 전한 초기까지는 문자 그대로 한 나라(왕국)의 재상으로, 제후왕을 보좌하는 자리였다. 그러나 오초칠국의 난 이후로 번국의 재상을 중앙에서 임명했고, 전한 중기부터는 번왕에게 번국의 관리들을 다스리지 못하게 했기 때문에 후한대에는 그냥 태수와 동급의 지방 관료직일 뿐이었다.[3] 조조가 중히 예우할 정도의 유비 세력 내에서의 위치와, 그런 예우에도 유비를 따른 그의 충성심은 높이 평가 받을 만하다. 그러나 그 예우가 미방 개인의 능력이 뛰어났기 때문이라고 여겨지지 않는다. 당시 유비는 조조의 객장과 같은 입장이었는데, 그를 완전히 잡아두기 위해 좌장군직에 군사까지 내어준 사람이 조조였다. 유비의 세력을 와해시키기 위해 그 수하들에게도 이런저런 관직을 줬다고 하는데, 이것이 조조의 본심이었다고 여기기는 어렵다. 가령 조조는 좋은 말로써 유종을 천거했지만 정작 그의 본심은 개, 돼지와 같다는 것이었다.[4] 연의에선 오호대장군이다.[5] 관리의 생사여탈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권리다.[6] 미축과 미방의 집안은 대대로 서주의 알아주는 부자였으며, 미축은 여동생을 유비에게 시집보내고 모아둔 재산을 모조리 털어서 떠돌이 신세인 유비를 스폰서해줬다. 아무리 유비가 능력자라도 어떤 지원도 없는 떠돌이 신세로는 한계가 있기 마련이다. 괜히 미축이 제갈량보다 높은 직위에 올라간게 아니다. 한마디로 제갈량이 유비의 미래를 만들어줬다면 미축은 당시 아무것도 없는 유비에게 자신의 인생을 바쳐 유비의 현재를 있게 해준 일등 공신인 셈이다.[7] 현대 기준으로 바꿔 보면 미방은 스폰을 해주던 이사장 동생이자 이사였었는데 망했어도 헤드헌팅을 거부하고 끝까지 믿으며 운명을 함께해 무일푼인 유비를 회장님 만들어 놨고 회장 친한 동생이자 창업 주요 공신이였던 관우가 사장이 되었는데 미방이 그 밑에서 부사장이 된다면, 분명 불화가 일어나기 쉬운 되게 어렵고 미묘한 관계다. 미방이 유비보고 따라갔지 관우보고 따라간 것은 아니며, 이사장 동생 시절에는 끽해야 유비 부하 중에 대빵인 관우가 일 잘하니까 유비를 믿을 만한 요소 중에 하나다 정도였는데 어느새 그보다 하급인 부사장 취급이니 말이다.[8] 인간관계나 인사관리의 갈등, 어려움은 현실에서 수두룩하며 삼국지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미방, 관우와 완벽히 들어맞는 사례는 없지만 몇몇 요소가 비슷한 사례는 많은데 심배와 허유의 사례도 예시가 될 수 있다. 허유의 가족이 부정부패를 저질러서 심배가 그 가족들을 체포했다. 그 결과 격렬한 위기감을 느낀 허유가 조조에게로 항복해 관도대전에서 조조가 이겼다. 관우가 상관으로서 당연한 일을 했다고 하는 논리대로라면, 심배 역시 부정부패한 고위관료의 인척을 체포한 것이고 그 결과 한창 급박한 전장에 있는 고위직을 자극해서 배신에 이르러 최중요기밀이 누설된 것이다. 관우를 옹호하는 얘기대로라면 부정부패는 큰 잘못이고 자기 할 일을 했을 뿐인 심배에게 아무 잘못이 없게 된다. 관우가 잘못이 없듯이 심배가 당연히 할 일을 했을 뿐이었다. 또 하나의 예시로 들 수 있는 것은 바로 관우의 몰락에 상당히 큰 지분을 가지고 있는 유봉과 맹달이다. 유봉이 상용으로 부임한 이후 신탐과 맹달이 이반했다. 물론 이반한 것은 미방이 잘못한 것처럼 신탐과 맹달의 잘못이다. 하지만 유봉은 아무튼 끝까지 충성했으니 잘못이 없다고 할 수는 없다. 또 반대로 잘 된 사례가 있다면 바로 정보와 주유다. 주유와 정보가 좌우도독이 되었을 때 정보는 최고참인 자신과 주유가 동등하다는 것에 화가 나서 불복했다. 하지만 주유는 계속 인내하면서 마음을 너그럽게 쓰고 공손한 태도로 정보를 감화시켰다. 나이 많은 정보가 아예 처음부터 주유가 싫어서 뻗댔다는, 인간관계로서는 꽤 해결하기 어려운 상황이지만 나이 어린 주유가 인품을 통해 인간관계를 잘 처리했다. 만약 주유가 관우처럼 평소 건방진 언행을 하고 다녔다면, 관우가 화가 나서 손권에게 오소리 담비쉑이니 하는 건방진 소리를 한 것처럼 주유도 화가 나서 그렇게 입으로 뱉고 다녔다면 정보와 화합이 되지 않았을 것이다. 이런 사례들은 관우 미방과 모두 일치하지는 않지만 부분적으로는 꽤 동일한 점이 있으며 결국 원칙을 따지면서 불화하기 시작하면 망하고 원칙과 자존심을 조금 굽히고 화합하면 쉽게 간다. 하급관리들이나 원칙대로 딱딱 따지면서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것이 커다란 미덕이지, 하급관리와 이런 전쟁의 책임자들은 상당히 다르다고 할 수밖에 없다. 그것을 단적으로 표현해주는 말이 바로 송양지인이다. 조그만 수준, 개인, 사적인 자리에서의 원칙이나 도덕이 많은 사람들을 책임지는 큰 자리에서와 동일하게 통용될 수는 없다.[9] 관우가 오의 침략에 대비해 봉화대를 건설했으나 여몽의 계책으로 무쓸모가 되었는데 이 봉화대가 단순히 기습공격으로 전부 무력화되는게 상식적으로 말이 되질 않는다, 관우가 추가병력을 차출했으나 봉화대 운영병력은 남겼으니까. 거기다 관우가 바보도 아니고 아무리 교병계에 넘어가 방심했다지만 기습이라는 위험을 예상 못했다는것은 개연성이 맞지 않는다. 우번이 사인에게 했던 말대로 안에서 내응이 없고서는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관우의 억울함을 부각하기 위해서 미방 한 명만 항복했고 나머지 남군의 사람들은 아니었다 식으로 말한다면 마찬가지로 미방 혼자만의 배반으로 봉화대를 무력화시킬 순 없다.[10] 오죽했으면 미방이 후방에서 고의적으로 사보타주를 했다는 설도 있다. 상관 쌀 탈취라든가 익주와의 연락문제 같은 게 미방이 전부 어깃장을 놔 발생하지 않았을까 하는 것. 그러나 형주 전체도 아니고 고작 당시 유비령 형주의 역량만으로 관우가 대대적인 원정을 나선 상황에 밥만 먹어대고 감시인력까지 필요한 3만의 추가포로가 더 발생했다는 것은 애초에 보급의 신으로 불리는 인물들을 데리고 와도 제대로 된 보급이 가능할지 의심스러운 상황이다. 또한 삼국지 시기 이런 최종책임자들은 수많은 속임수를 쓰고 거짓말을 하고 살인, 방화, 약탈, 강간 등을 일삼아왔다. 그래도 이들을 좋게 평가하는 것은 결국 최종목적이 그게 아니라 평화와 안정 등 다른 대의명분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이들의 평가는 최종결과에 크게 의지하는 편이다. 관우 역시 이런 기준에 벗어날 수 없고, 행정과 국방에 대한 최종책임은 관우에게 있다. 미방이 악질인 것과는 다른 얘기이며 사실 2인자로 있는 미방을 배신하게 만들라는 것도, 실제 역사에서 미방이 배신했으니까 할 말이 없는 것이지 이게 무슨 임무라고 생각한다면 일반적으로 생각하며 차라리 죽이는 게 쉽지 상당히 어렵고 매우 어이없는 일이다. 역사를 관찰하는 입장에서 아쉬운 일이 있다면 배신했다는 얘기를 들었으면 촉한의 고참멤버들은 관우와 미방의 캐릭터나 관계를 알고 있었을테니 뭔가 마음속에 오는 게 있었을텐데 그런 논평이나 언급이 아예 없는 것이다. 이상한 일은 아니지만 말이다.[11] 합비공방전 당시 합비에 있던 장료, 이전, 악진은 서로 굉장히 사이가 나빴지만 결국 적이 처들어오자 일단은 사적인 일을 공적인 일에 묻고 넘어갔었다. 오나라에도 감녕과 능통이라는 원수지간이 있었지만 두 사람이 전쟁터 등 공적인 자리에서 문제를 일으켰다는 기록은 없다. 사적인 감정을, 그것도 본인 실수로 저지른 일로 처벌받는다 하여 사적인 감정을 가지고 배신한 미방이 비교되는 부분이다.[12] 싸움꾼 기질이 강했던 우번은 손오의 여러 인물을 비판했던 기록이 많다. 미방과 비슷한 이유로 우금도 조롱당한다. 하지만 우번의 이러한 행동은 우번이 손권의 미움을 사는 계기가 되었다. 우금은 촉한과의 대결을 앞두고 협력하던 조위의 장수였고 미방은 손오 입장에선 형주를 가져다 바친 공신인데 손권의 만류에도 박대했으니, 손권 입장에선 본인의 권위을 무시한다는 인상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적당한 선에서 까고 손권이 미방을 감쌌으면 우번이 채찍, 손권이 당근 역할을 했다고 할 수 있으나 우번은 그냥 트집 잡아서 극딜을 한 거다.[13] 그리고 여기서 언급은 안 되지만 개국공신 미축이 자신의 형이니 미축을 봐서라도 용서해줄 거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14] 이들은 군수물자도 태워먹고 병량보급도 제대로 안 했고 이들이 항복한 덕에 관우와 관평이 죽었고 형주까지 넘어가 버린것을 생각하면 도저히 용서받을 수가 없는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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