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미사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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未斯欣
(381[1]/393[2]~433)

1. 소개
2. 생애
3. 기타
4. 가계


1. 소개[편집]


신라 초기의 왕족으로, 성은 김씨이며 내물 마립간삼남이자 눌지 마립간의 동생이다. 미사흔은 삼국사기에 기록된 이름이고, 삼국유사 기이편에서는 미해(美海) 혹은 미토희(未吐喜)[3]로 나오고, 왕력편에서는 미흔(未欣)이나 미질희(未叱希)라고 나온다. 일본서기에는 미질기(微叱己) 또는 미질허(微叱許)로 기록돼 있다. 일본서기에 적힌 가나 표기로는 '미시코 ミシコ'이다. 이러한 호칭들은 전부 같은 고유어 이름을 다른 방식으로 음차한 것으로, 실제 발음은 *misikan 혹은 *misikuy로 추정된다.


2. 생애[편집]


아버지 내물 마립간의 말년인 400년경, 백제, , 가야의 삼국 연합군에게 신라가 전격 침공당해 나라가 망하기 일보 직전으로 몰리자 신라는 고구려에게 구원 요청을 하게 된다. 이에 광개토대왕이 5만 대군을 보내 연합군을 격파하고 신라를 가까스로 구원했지만, 그 대가로 신라는 사실상 고구려의 속국으로 전락해 버렸다. 내물 마립간은 전쟁의 충격으로 몸져 누웠고, 그로 인해 392년부터 고구려에 인질로 가 있던 실성이 귀국해 내물의 아들들을 제치고 화백회의에서 마립간으로 추대되었다.

실성은 고구려에 오래 지냈던 사람이니만큼 사실상 친고구려파라고 볼 수 있다. 더 나아가 일각에서는 신라에서 입지도 미천하여 고구려로 볼모로 간 실성이 왕이 된 것에 초점을 두어, 그가 고구려의 세력을 등에 업어서 즉위했다고 해석하는 경우도 많다. 그리고 눌지, 복호, 미사흔 3형제는 전왕의 아들들이니 실성의 최대 정적이었을 것이다.

미사흔은 실성이 즉위하고 겨우 1달이 지난 402년 3월 일본과 화해하기 위해 고위 귀족으로서 일본에 인질로 보내졌는데, 사실 인질을 보내는 이유는 '너희에게 거슬리는 짓은 하지 않겠다'라는 뜻이기에 이 약속이 지켜지지 않는다면 인질은 죽을 것이다. 그러나 실성 입장에서 미사흔은 일본에서 죽어도 별로 손해가 되지 않는 상황이었다. 일본에 선심 쓰는 척도 하고, 전왕의 아들들을 신라 밖으로 보내 세력을 약화하여 사실상 숙청시키려는 목적이었던 것으로 생각된다.[4]

그러다 실성이 재위 16년 만인 눌지에게 살해당하고, 눌지가 왕위를 되찾아 즉위했다. 친형 눌지는 당연히 미사흔을 빼내오고 싶었고, 결국 박제상을 시켜 418년 가을에 신라로 구출해 왔다. 그러나 박제상 본인은 탈출하지 못하고 왜왕에게 들켜 갖은 고문 끝에 죽었고, 박제상의 이 같은 충정에 보답하고자 그의 차녀를 미사흔의 아내로 맞아들였다. 자세한 사항은 문서 참조.

433년(눌지 마립간 17년) 5월에 죽어 서불한에 추증되었다.


3. 기타[편집]


  • 삼국사기》에서는 자비 마립간의 왕비가 그의 딸이라고 나오나 《삼국유사》에서는 다르다. 자비 마립간의 왕비의 아버지를 설명하는 부분에서는 파호 갈문왕 또는 미질희 각간으로[5], 자비 마립간의 아들인 비처 마립간의 어머니의 아버지를 설명하는 부분에서는 미흔(未欣) 각간이라고 나온다. 그래서 미사흔과 동일 인물이라는 가설과 복호와 동일 인물이라는 가설이 공존하고 있다.

전자의 근거 중 하나는 미흔이 미사흔의 다른 명칭으로 보인다는 것이고 후자의 근거는 당대 표기로 '복'과 '파'가 혼용된 점과 미사흔이 사후 갈문왕으로 추증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 중에서 1번 언급된 파호 갈문왕(김복호)의 딸보다 서로 다른 사서에서 3번 언급된 미흔(미사흔)의 딸과 혼인했을 가능성을 더 높게 보는 편. 파호 갈문왕은 왕의 장인이 아닌 사탁부의 수장으로서 갈문왕에 봉해졌는데, 이를 일연이 착각하여 왕의 장인으로 기록했다는 가설도 있다.

아니면 자비 마립간이 즉위 이전에 김복호의 딸과 혼인했을 가능성도 배제하기는 어렵다. 그러다 즉위 이전에 김복호의 딸이 죽고 즉위 이후 미사흔의 딸과 혼인하게 되면서 이런 섞인 기록이 나올 수도 있는 것이다. 실제로 자비 마립간은 즉위 이후에 혼인을 하는데 생각보다 늦은 나이에 혼인을 한 셈이 되어서 그것을 감안해야 할 듯 보인다. 이후 소지 마립간의 부인 선혜부인은 그의 손녀가 된다. 이 쪽도 김복호의 손녀가 왕비라는 기록도 남아 있는데 이 역시 김복호의 손녀가 우선 왕비가 되었다가 일찍 죽고 미사흔의 손녀가 왕비가 되었을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다.

  • 내물 이사금의 5세손(현손자)인 거칠부가 미사흔의 후손이라는 주장도 있는데 미사흔과 잉숙(내숙)이 마립간의 왕비를 배출했고 둘 모두 최종 관직이 각간이었다는 점에서 제기된 가설이다. 거칠부는 각간 김잉숙(仍宿)의 손자이자 이찬 김물력(勿力)의 아들인데 만약 거칠부가 미사흔의 후손이라면 증손이며 김잉숙이 미사흔의 아들이 되겠다.


4. 가계[편집]


  • 조부: 이벌찬 말구(末仇)
  • 조모: 휴례부인(休禮夫人) 김씨
  • 부친: 내물 마립간
  • 모친: 보반부인 - 내례희부인(內禮希夫人)이라고도 한다. 미추왕의 딸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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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삼국유사 기준. 다만 기년이 잘못 기록된 것으로 보인다.[2] 삼국사기 기준. 10세(만 9세)에 인질로 보내졌다는 삼국유사의 서술을 토대로 보완.[3] 토(吐)는 질(叱)의 오기로 보인다.[4] 다른 나라의 역사 속에서도 비슷한 사례를 찾아볼 수 있다. 일례로 묵돌만 해도 자기 동생을 후계자로 세우려는 두만의 음모로 인질로 보내졌고, 장양왕 역시도 왕손 시절 진나라에서 입지가 강하지 못하여 조나라에서 인질 생활을 했다.[5] "一作▨叱希角干"에서 ▨질희(▨叱希)를 미질희(未叱希)로 판독하는 가설에 입각하여 해석한 것이다. 실제로 중종 때의 판본인 순암수택본에서는 마멸된 글자 위에 '未'가 가필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