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얀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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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미얀마는 동남아시아에 위치한 국가다. 방글라데시, 인도, 중국, 라오스, 태국과 국경을 접하고 있으며 인도양의 연안국이기도 하다. 수도는 네피도(, Naypyidaw)이다. 네피도의 본래 명칭은 핀마나(, Pyinmana)로 내륙의 작은 지방 도시였다. 흔히 알려진 양곤(, Yangon)은 최대 도시이기는 하나 이전의 수도이다. 2005년에 먼저 핀마나로 행정 수도를 옮기고, 2006년 네피도로 개칭하여 공식적으로 수도가 됐다.
2. 국가 상징[편집]
2.1. 국호[편집]
정식 국호는 '미얀마 연방공화국( / Pyidaunzu Thanmăda Myăma Nainngandaw)'이다. 미얀마 군사 정권이 20년 만에 2010년 11월 7일에 실시하는 총선거를 앞두고 국기와 정식 국호를 변경했다. 이전의 국호는 '미얀마 연방'이었다. 1988년 미얀마로 개칭하기 전에는 '버마'라고 불렸다. 따라서 이 나라의 국호는 아직도 뜨거운 감자이다. 영국 등 꽤 많은 국가가 지금도 버마(Burma)라고 부르고 BBC World News도 버마라고 부른다. 한편, 미국 CNN International은 미얀마(Myanmar)라고 부른다.
과거 국호였던 '버마'는 미얀마에서 다수를 차지하는 민족인 버마족의 명칭에서 따온 것이다. 이 때문에 여러 민족을 아우른다는 의미에서 미얀마 연방 공화국으로 바꾼 것이지만, 미얀마라는 표현의 어원도 결국 버마이기 때문에 다민족성을 표방한다는 근거가 전혀 없다는 지적이 있다. 무엇보다, 1989년 미얀마 연방공화국으로 국호를 개칭할 때 그에 관여한 대부분 사람들이 언어학적 지식이 있는 사람들이 아니라 군부에서 지정한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군부의 독단적인 행위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대표적으로 버마 민주화의 상징인 아웅 산 수 치는 버마라는 단어를 사용해달라고 주장하고 있다.
특히 미국에서는 미얀마라고 안 부르고 그냥 버마로 부르고 있다. 이는 정통성에 관한 논란에서 비롯된 것인데, 미얀마가 군부에 의해 임의로 개칭된 국호라는 이유로 군부를 인정하지 않겠다는 언론들이 주로 버마라고 부른다. 따라서 미국에서도 버마와 미얀마로 부르는 언론사들이 따로 있다. 아웅 산 수 치가 방한했을 때, 국내 언론사들에게 미얀마를 버마로 바꿔달라고 요청했다.
한국의 경우 과거에는 꽤나 오랫동안 버마라고 부르다가 미얀마로 고쳤고, 민주화 운동을 하고 있는 국내 체류 미얀마인들은 현재의 공식 명칭인 미얀마는 독재 군사정권이 일방적으로 붙인 이름이므로 버마라고 표기해 달라고 주장한다. 그들은 국기를 사용할 때도 옛날 국기(아래의 버마 연방 국기)를 사용한다. 경향신문은 2007년부터 국내 언론사 중 최초로 미얀마의 표기를 버마로 바꿨다. #
그런데 버마와 미얀마 중 어느 쪽이 옳다고 단언하기가 어렵다. 원래 이 나라의 이름은 미얀마였는데, 영국이 식민지배를 하면서 버마족의 이름을 따와 버마라고 바꾼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독재정권이 바꾸었으니 미얀마라는 호칭을 부정해야 하는가 하는 것은 논란의 소지가 있다. 또 버마 민족의 민족주의를 부정하는 이름이란 점에서도 양날의 검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미얀마 또한 어원은 버마족에 두고 있다. 오히려 영어판 위키피디아 해당 문서에 서술된 바에 의하면 '버마'가 '미얀마'에서 변성된 것으로, '버마'든 '미얀마'든 버마족을 지칭한다는 점에서는 같다. 일본에서는 '버마'를 표기시 비르마(ビルマ)라고 쓴다. 한때 한국에서는 일본 매체의 영향으로 버마를 '비르마'라고 표기한 사례 역시 숱하였다고 한다. 또, 인하대학교 사학과 최병욱 교수의 저서 『동남아시아사』에 따르면 1102년 버마족의 이웃이었던 몬족의 비문에 버마족을 지칭하는 표현으로 'Mirma'란 표현이 등장한다고 한다. 중국의 역사서에는 이를 음차한 듯한 '면전(緬甸)'이란 표기가 등장한다.
몇몇 맞춤법 검사기는 버마라는 국호가 예전의 이름이라 하여 일괄적으로 미얀마라고 수정하는데, 그래서 사마귀의 다른 이름인 버마재비가 '미얀마재비'가 되기도 한다. 결국 아웅 산 수 치 여사가 집권했지만 미얀마든 버마든 상관없다고 밝히면서 국호는 그대로 유지될 듯하다.
정치적 논란과는 별개로, 미얀마라는 국호 자체는 남만의 한자 蠻과 동계어로 추정된다. 상고한어 발음으로는 므론(mron)으로 재구되는데, 이는 미얀마의 옛 발음인 므란마( / mranma)와 매우 유사해서, 상나라나 주나라 때의 고대 한족들이 버마인의 조상격 민족과 접촉한 흔적으로 추정된다.
특이하게도 영어 정식 국호가 Republic of the Union of Myanmar로 of가 2번 들어간다. 통상적으로 연방공화국이나 연합공화국은 독일처럼 Federal Republic을 사용하거나, 브라질처럼 Federative Republic을 사용하거나, 탄자니아처럼 United Republic을 사용하는데, 미얀마는 유독 Republic of the Union이라는 다소 희한한 방식을 사용하고 있다.
2.2. 국기[편집]
영국의 식민지배에서 독립 후 버마 연방 시기부터 사용했던 국기. 1948년 1월부터 1974년 3월까지 사용되었다.
버마 사회주의 연방 공화국부터 1989년 출범한 미얀마 연방 시절까지 사용했던 국기. 파랑은 평화와 성실함을, 빨강은 용기와 단호 그리고 독립을 위한 혈투를, 하양은 청순함과 미덕을 상징하고 파랑 바탕에 있는 톱니바퀴와 벼이삭은 이 나라가 농업 국가임을 상징하는 것과 동시에 농업을 통한 근면, 성실, 노동을 뜻하는 문장이다. 속뜻으로 농민과 농업 그리고 쌀 생산지임을 뜻하기도 한다. 얼핏보면 청천백일만지홍기와 비슷하다. 이 때문에 예전에는 국제적인 체육대회가 열리면 대만 측에서 미얀마 국기를 흔들곤 했다. 왜냐하면 중국의 압력으로 자국의 국기를 반입할 수 없자 대신에 이와 비슷한 미얀마 국기를 들고와서 흔들면서 본인들의 애국심을 표출했다.
현행 국기. 미얀마 군사정부가 총선을 앞둔 2010년 10월 21일에 바꾼 국기로, 1943-45년에 사용된 국기인 가로 삼색기에 꼰바웅 왕조의 국장이었던 공작새 문장 대신 오각별을 넣은 도안이다. 이전까지 사용된 국기와 공통점은 흰색 별이 유일하다.
오각별을 국기의 가운데에 배치할 때 오각별의 중심은 오각별의 외접원을 그리고 그 원의 가운데를 기준으로 하는 게 보통이다. 그렇게 해야 오각별의 뿌리가 되는 가운데 정오각형의 중심축과도 맞는다. 미국의 성조기나 북한의 인공기 에티오피아의 국기 등 모두 그렇게 디자인했다. 하지만 미얀마의 국기의 별은 단순히 별꼭지의 가장 위와 아래의 가운데를 중심으로 잡았다. 다시 말해 외접원이 아닌 외접사각형의 가운데를 잡은 것. 때문에 오각별이 국기의 가운데에 있지 않고 조금 아래로 내려온 느낌이 든다. 이것은 가나 국기의 별도 마찬가지.
국기의 황/적/녹 배열이 리투아니아와 같으나 리투아니아의 국기에는 별이나 문장이 포함되어 있지 않다. 그리고 황/적/녹 색깔이 미얀마 국기가 좀 더 밝은 색이다.
2.3. 국장[편집]
자세한 내용은 미얀마/국장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2.4. 국가[편집]
자세한 내용은 세상이 끝날 때까지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3. 인구 및 민족[편집]
국토 면적은 약 67만 6578km²로 남한의 약 6.7배이고, 인구도 5457만 7997명(2023년 기준)로 남한보다 약간 더 많다. 미얀마인의 인구 구성은 버마족이 약 68%, 샨족이 9%, 카렌족이 7%이며 기타 소수민족도 16%에 이른다. 나라 크기에 비해 민족 구성이 대단히 다양해서, 무려 135개나 되는 소수민족이 산다. 공용어는 미얀마어지만 소수민족들의 언어들도 많이 쓰이는데, 그 수가 242개나 되어 세계 민속학자들의 단골 연구지역이기도 하다. 그리고 영국의 식민지였던 영향으로 영어도 주요 외국어로 지정되었다.
지방행정은 일곱 주(states, )와 일곱 성(regions, : 과거에는 divisions)로 나뉜다. 성(省) 지역은 버마족이 중심인 지방들이고, 주(州) 지역은 소수민족이 중심인 지방들이다. 주는 카친주, 카야, 카인, 친, 몬, 라카인, 샨 주가 있고, 성은 양곤, 사가잉, 타닌타리, 바고, 마과이, 만달라이, 아예야와디 성이 있다.
3.1. 인도계 미얀마인[편집]
대영제국은 미얀마를 식민통치하는 와중에 농지 개간 및 도시 인프라 확대 차원에서 많은 인도계 주민들을 미얀마에 정착시켰다. 남아프리카 공화국, 스리랑카, 트리니다드 토바고, 피지 등 다른 대영제국 식민지에 정착한 인도인들은 주로 타밀나두 지방의 수드라와 불가촉천민으로 고향에 농사 지을 땅이 없는 가난한 소작농들이 많았던 반면, 미얀마에 정착한 인도인들은 주로 아삼 지방과 마니푸르 지방의 브라흐민과 크샤트리야 등 상위 카스트 출신이 많았다. 대영제국에서 버마인들을 견제할 목적으로 힌두교도 소수민족들에게 힘을 실어주기 위한 정책이었을 수도 있다.
주로 양곤 시에 정착한 힌두교도 상인들은 버마 현지인들을 불가촉천민 취급을 하며 통혼은커녕 사람 취급도 하지 않았는데, 나중에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일본군들이 미얀마에 진주해오자 이들 중 상당수가 인도로 도망가서 다시 돌아오지 못하고 있다고 한다. 한때는 양곤 시 인구의 다수가 힌두교도였지만 2차대전과 그 이후 버마의 독립을 계기로 거진 다 떠나버렸고, 현재 미얀마에 거주하는 인도계 힌두교도 및 미얀마계 힌두교도 숫자는 통계에 따라 다르긴 하지만 1~2% 내외이다.
양곤에 정착한 힌두교도들과 달리 인도 동부에서 온 무슬림들은 버마 현지인 여자들을 현지처나 첩으로 삼는 경우가 많았다. 힌두교에서는 외국인과의 통혼을 금기시하는 반면 이슬람에서는 무슬림 남성과 비무슬림 여성과의 결혼을 권장하는 편이다. 이에 버마인 승려들과 민족주의자들은 여기에 위기 의식을 느끼고 무슬림들을 전부 씨를 말려버려야 한다고 벼르게 되었다. 힌두교도들은 이 무슬림들을 열등인종 취급하고 무시하는데, 무슬림들은 버마 현지인 여자들을 첩으로 삼으니 버마인들 입장에서는 이가 부득부득 갈릴만 했다. 원래 이슬람에서는 무슬림 남성과 기독교인, 유대교인 여성과의 통혼은 권장하는 반면 무슬림 남성과 불교, 힌두교도 여성과의 통혼은 허용하지 않는다. 양곤 시에 정착한 무슬림 상인 상당수는 정식 결혼을 올린 것이 아니라 몰래 애인삼아서 현지처를 둔 것이었다. 아직까지도 해결되지 않는 로힝야 난민문제의 발단은 버마인들이 느낀 이러한 위기 의식에서 시작되었다. 현재 로힝야를 제외한, 미얀마의 무슬림 인구 대부분은 무슬림 남성과 버마 현지인 비무슬림 여성의 혼혈을 조상으로 두고 있다.
시크교도 군인들도 적지 않은 수가 대영제국의 군인으로 양곤 시에 정착했으나 현재는 거의 다른 곳으로 이동한 상태이다.
4. 소수민족 문제[편집]
동남아 여러 나라들이 그러듯이 소수민족들에 대한 차별과 탄압이 극심하다. 소수민족들이 당하는 차별의 예가 소수민족들이 사는 지역에는 전기가 제대로 들어오지 않고 도로도 포장되어 있지 않을 정도로 인프라가 열악하다. 특히 군부 소유의 기업들이 소수민족들의 지역에 있는 자원들을 가져가며 막대한 돈을 버는데도 소수민족들에게는 돈을 단 한 푼도 쓰지 않고 열악한 인프라를 개선해주지도 않는다. 또한 불교 사원에 대한 건축 허가는 잘 해주지만 기독교와 이슬람교에 대해서는 건축 허가는 제대로 해주지 않는다. 가장 나쁜 것이 소수민족 반군들과의 전쟁 과정에서 군경이 반군과 아무 상관이 없는 소수민족 민간인들에게 학살, 강간, 고문, 약탈, 강제노동을 저지르며 이에 대한 조사와 처벌도 하지 않는다.
그런데 소수민족 차별, 탄압에서 세계적으로도 미얀마는 특히 심각하게 부각되는 편이다. 영화 람보 4만 해도 미얀마가 저지르고 있는 소수민족 탄압의 악랄함을 잘 보여주고 있다. 특히 람보 4는 미얀마의 소수민족 탄압을 보여준 것 때문에 현재 미얀마에서 상영 및 수입 금지까지 했다. 사실 미얀마의 주류민족인 버마족과 소수 민족들 간의 갈등이 폭발한 계기는 영국의 식민 통치 시기의 소수 민족 우대 및 민족, 종교간 분열 정책인데, 이원복 교양만화 <가로세로 세계사> 2권에 따르면, 미얀마 민족분쟁 근본 원인이 영국의 '국경선 멋대로 긋기'라고도 해석했다. 미얀마 인구의 다수를 점하고 있음에도 사회적으로 천대를 받던 버마족이 독립 이후 미얀마 사회의 주도층으로 부상하면서 소수민족들에 대한 차별과 보복이 자행된 것이다. 이걸 참다못한 각지의 여러 소수민족들이 버마족에 대항해 무기를 집어 들었고 곧바로 내전이 시작되었다. 특히 소수민족 반군들은 게릴라전과 테러로 저항하여 미얀마 정부에게서 가장 골치 아픈 문제다.
카친족, 기독교를 믿는 한족[4] , 카렌족, 아라칸족, 샨족, 몬족, 와족, 친족[5] , 나가족 등의 소수민족들은 미얀마에 대한 반감이 강하며 주류민족이자 불교도인 버마족의 갈등이 노골적으로 심하다. 그중 아라칸족은 미얀마에서 분리 독립하거나 아예 인도에 편입하길 원하는 경향이 강하다. 또 무슬림인 로힝야족은 버마족은 물론 다른 소수민족들과도 갈등을 빚고 있다. 즉 다른 소수 민족들은 버마족 vs 각 소수 민족의 갈등 형태지만 로힝야족은 버마족 + 모든 소수민족들 vs 로힝야족의 형태로 대립하고 있다. 이들은 전세계적으로 220만 명이 사는데 미얀마에 130만 명이 살고 방글라데시, 인도, 사우디, 파키스탄에도 살고 있다.
미얀마의 독립과 함께 시작된 내전은 아직 현재 진행 중이기는 하나, 미얀마 정부와 굵직한 반군들 사이에 개별적인 휴전 협정이 타결된 이후로는 차츰 잦아들고 있다. 2022년 현재 어느 정도 민주화된 미얀마에서는 라카인족, 샨족, 몬족, 카친족, 카렌족 등의 전통적인 반군 조직들과의 예전처럼 큰 교전 소식은 없다. 버마족과 여러 소수민족들 간에 증오와 앙금은 여전히 남아있지만 이들은 미얀마 역사의 오랜 부분을 부대껴 살아왔고 같은 상좌부 불교 문화권이다. 일부 카렌족과 카친족의 기독교 계열 반군과는 여전히 대립하고 있지만 8, 90년대에 비하면 매우 완화됐다. 하지만 일부 소수민족에 대해서는 미얀마 정부에서 아직도 매우 적대적인 입장을 유지하는데 대표적으로 무슬림인 로힝야족에 대한 인종 청소 문제가 있다.
미얀마 정부는 로힝야족을 아예 인도, 방글라데시로 추방시키기는 등 자국 내에서 완전히 쫓아내야 할 대상으로 본다. 처우 개선은 전혀 없이 무슬림에 대한 차별정책을 강화하고 군대를 주둔시켜 모스크를 강제로 철거하거나 불교 사찰로 개조하는 등의 행위로 국제사회로부터 심한 비난을 받으며 무슬림의 격렬한 반발을 부른다. 이 차별과 탄압은 지금도 현재 진행형이다. 공립학교 또한 불상을 두고 불교 교육만 시킨다. 그런데다가 무슬림인 로힝야족 다수는 실업자라서 경제적 어려움에 시달린다. 이러다보니 로힝야인들의 불교와 미얀마 정부에 대한 증오는 깊다. 결국 과격 이슬람 세력이 이들에게 무기를 제공하며 로힝야 무장단체들이 결성되어 테러가 벌어졌다. 이렇게 헬게이트가 열렸음에도 미얀마 정부는 그저 군대투입과 같은 강경책으로만 나가며 억압만 일삼으며 각종 전쟁 범죄를 저지른다. 여기에 무슬림의 추방을 강행하는데 여기 거주하는 무슬림은 반발하고 있으며 반군의 보복으로 불교도 버마족들을 공격하고 죽이면서 당연히 이주하려는 사람이 뚝 줄었고 치안은 악화한다.
하지만 로힝야족 문제는 단순히 미얀마 정부만의 잘못은 아니다. 2012년에 일어났던 무슬림과 불교도 간의 폭력 사태도 로힝야족 남자가 불교도 여자 어린이를 집단 성폭행하고 산 채로 불태워 죽였고 당시 피해자 가족 등은 가해자를 처단하겠다고 가해자를 내놓으라고 로힝야족에게 요구했지만 그걸 거부하고 모욕을 줬다. 또 로힝야족은 영국이 버마를 식민지화한 후 영국의 보호 아래에서 부를 축적해 버마족 입장에선 영국에 빌붙어 이득을 취하는 민족으로 앞잡이 같은 인식이고 당시에는 로힝야가 버마족을 차별했다. 이는 영국 식민지 시절 당시 카친족이나 카렌족, 샨족 등도 마찬가지다. 그리고 로힝야 무장단체가 이슬람 과격 단체의 지원을 받고서 최근에 결성된 것도 아니다. 시작은 1948년에 미얀마가 독립한 지 몇 달 되지 않아 수천 명의 불교도들을 축출하면서 발생한 반란이다. 또 이후로도 1994년 한 마을을 습격하여 폭탄을 설치하여 주민에게 부상을 입히고 2014년 국경 경찰 4명을 살해하고 2016년에는 수백 명의 로힝야족 남성이 칼과 화기류로 무장하고 국경 경찰 초소를 공격해 9명을 살해하고 2명을 사로잡고 상당수의 화기와 탄약을 탈취하는 등 지난 몇십 년 간 로힝야족 무장 단체는 계속 존재했고 말썽을 부렸다.
비이슬람 계열인 카친족, 카렌족 등의 일부 반군 조직도 여전히 미얀마 정부와 투쟁하며 유혈 사태를 일으키고 버마족을 보복 살해하며 저항할 정도로 원수지간이다. 다만 카친족과 카렌족은 미얀마 정부군에게 탄압받아도 최소한 미얀마 정부에서 자국민으로 인정하지만 로힝야족은 그마저도 없다.
4.1. 미얀마 내부갈등[편집]
자세한 내용은 미얀마 내부갈등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5. 지리[편집]
국토의 중앙을 길이 2,170km인 에야와디(이라와디)강이 관통하는데, 강 유역에 평원이 펼쳐져 있다. 그 주변을 아라칸 산맥과 샨 고원 등 산지가 둘러싼 모양새인데, 최북단에는 해발 5,881m로 만년설로 덮인 동남아 최고봉 카까보라지(Hkakabo Razi)산이 있다. 그러나 2013년 미국인 앤디 타이슨이 이끄는 등산대는 근처에 있는 감랑라지(Gamlang Razi)산이 11미터 정도 더 높다고 발표하면서 카까보라지를 성스러운 산으로 받들던 미얀마에서 난리가 났다. 미얀마는 세계 최초로 이 산을 등정한 사람이 일본인(1996년 오자키 타카시(尾崎隆)와 티베트인 셰르파 2명이 등정)이고 이후 외국인이 연이어 올라간 것에 불만을 품었다. 그래서 2014년 8월, 미얀마인으로만 이뤄진 등산대를 보냈으나 이들은 조난당해 2명이 행방불명되어 사망처리되었고, 구조 헬리콥터까지 추락하여 조종사 1명이 죽으면서 등정에 실패했다. 게다가 이 과정에서 장비도 개판이고 제대로 준비를 하지 않은 채로 그냥 올라간 게 드러나서 미얀마만 개망신당했다. 현재도 두 산 중 어느 쪽이 더 높은지 논란이 있다. 산이 워낙 험해 제대로 측정이 어렵다. 감랑라지산을 1970년 처음 오른 러시아 등산대는 여길 5,691m로 측정했다가 나중에 재측정하니 5,870m가 나오기도 하고 5,892m가 나오는 등, 측정할 때마다 결과가 달랐기 때문에 아직은 카까보라지 산이 동남아 최고봉으로 통한다.
동쪽엔 길이 2,815km인 살윈강이 흐르지만 워낙 절묘하게 산 속만 흐르는지라 에야와디강만큼 중요하지는 않다.
옛 수도이자 최대 도시인 양곤은 남부에, 행정수도인 네피도는 중부에, 역사도시인 만달레이는 북부에 있다. 그 북쪽은 동남아시아의 일반적인 풍경과 전혀 다른 티베트에서 이어지는 고산지대며, 반대로 남쪽의 길쭉하게 말레이 반도 입구까지 내려가는 지역은 동남아시아 어디 가도 안 꿀릴 맑은 인도양의 해변이 아직 덜 개발된 채 산재해 있다. 옆나라 태국을 보면 세계적 관광대국의 조건은 갖추고 있지만 정권이 못 받아줘서 지금 같은 상태인 것이다.
버마의 기후는 건기와 혹서기, 우기로 나뉘며 여타 동남아지역과는 비슷하나 비교적 대륙성 기후를 띄고 있다. 한국의 겨울 즈음인 건기에는 밤엔 춥고 낮엔 따뜻하며 건조하고, 한국의 봄 무렵에는 극도로 뜨거운 날씨가 이어지다 5월에서 6월쯤 오면 우기가 찾아와 적게는 한국의 여름과 비슷한 800mm 정도부터 많게는 5,000mm를 넘는 많은 비를 뿌린다.
에야워디강 상류 지역은 열대가 아닌 아열대 기후라 건기의 밤엔 온도가 0도 가까이 내려가며 혹서기 때 같은 때도 그렇게 온도가 높지 않다. 만달레이 등의 중류 지역은 강수량이 1000 mm가 안 되는 곳도 흔할 정도로 건조한 지역이다. 혹서기에는 극도로 뜨겁고, 뻐꼬꾸처럼 강수량이 620mm까지 떨어지는 지역도 있다.
양곤이 있는 에야워디강 하류 지역은 강수량이 2,500mm 정도로 많고 1년 내내 더운 편이다. 이 지역은 삼각주가 펼쳐져 있어 인구가 밀집했다.
서북부 해안의 시뜨웨 등의 라카잉 지역과 남동부 해안의 드웨 등의 뜨닝다이 지역은 바람과 산맥의 영향으로 강수량이 아주 많아 5,000mm를 넘긴다. 마지막으로 따웅지 같은 고산 지대는 1년 내내 온화한 고산기후를 띈다.
그리고 인도판과 유라시아판이 맞물려 있는 지역 특성상 지진이 비교적 잦은 편이다. 이로 인해 고대 불교유적 붕괴 및 파손 피해가 자주 발생한다.
5.1. 행정구역[편집]
자세한 내용은 미얀마/행정구역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미얀마는 7개의 주, 7개의 도, 1개의 연방구역, 1개의 자치도, 5개의 자치부로 구성되어 있다.
6. 역사[편집]
자세한 내용은 미얀마/역사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7. 정치[편집]
1948년 영국으로부터 독립한 후 아웅 산의 반 파시스트 인민자유동맹(AFPFL)이 총선에서 승리해 연방제 정부가 수립된 이래 양원제, 서구식 다당제 하에서 선거가 이뤄젔다. 그러나 공산당 및 소수민족 간의 정치 갈등과 경제 혼란 등이 겹쳐 1962년 네 윈이 일으킨 1962년 버마 군사반란 이후 1988년까지 버마 사회주의계획당(BSPP)이 '버마식 사회주의'를 제창하며 일당 독재를 했다. 물론 민주주의 국가로서 구색을 갖추려고 의회도 만들었으나 BSPP의 승인을 받은 인사만 출마가 가능하다.
그러다가 1988년에 터진 8888 항쟁을 계기로 소 마웅이 이끄는 국가법질서회복위원회(SLORC)가 군부 내에서 쿠데타를 터뜨려 네 윈을 권좌에서 몰아냈고, 1992년부터 탄 쉐 장군이 집권한 후 1997년에 기존의 SLORC에서 개편하여 국가평화발전위원회를 조직하고 2011년까지 여기를 중심으로 또 군사독재를 했다.
아웅 산 수 치의 민주화 투쟁과 2007년 민주화운동 등을 계기로 2008년부터 일단 자유선거가 치러저 표면적으로 민주화가 되었으나 실상은 탄 쉐 장군과 군부가 지지하는 통합단결발전당(USDP)이 부정선거 논란속에 압승하고 정치를 좌지우지 했다. 2015년 자유선거에서 아웅산 수지의 국민민주연맹(NLD)이 승리하여 정권을 교체했다.
양원제 국가다. 2008년 개정된 헌법에 따라 미얀마 군부가 상하원 전체의석의 25%를 지명한다. 미얀마의 정부수반은 중임 가능한 5년 임기의 부통령 3명을 각 원과 의회 군부가 1명씩 선출하고, 연방의원 전원이 3명의 부통령 중에서 1명을 미얀마 대통령으로 선출한다. 특히, 군 최고사령관이 임명하는 국방장관, 내무장관, 국경장관은 현역 군인이 장관 직을 수행할 수 있다.
군부의 의석으로 인해 군부가 국가의 통치에 미치는 영향이 엄청나며 문민통제가 이루어지지 않아 정부가 군부를 제대로 통제하지 못하다보니 이로 인한 문제가 굉장하다. 심지어 미얀마군의 통수권자는 대통령도, 국가고문도 아닌 미얀마군 최고사령관이다. 국방부장관의 임명도 최고사령관이 한다.[7] 미얀마 정부는 군에게 협조를 요청할 권리만 있으며 군이 이를 거부할 경우 그 어떤 제재방법도 없다. 오히려 쿠데타 압박을 가하기에 정부가 군의 명령을 따르는 구조다. 내로라 하는 군사독재 국가들도 대개 문민통제가 현실적으로 작동하지 않는 것이고 일이 수틀리더라도 군부 지도자가 통수권을 가진 대통령 직을 꿰차며 독재를 하지, 이처럼 대놓고 통수권을 군부가 가지고 있는 것은 매우 이례적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사항을 개혁하기 위해 개헌하고 싶어도 헌법상 75%의 동의를 받아야만 개헌할 수 있기 때문에 군부가 25%지명을 하는 현재 사실상 개헌이 불가능하다. 물론 설령 75%의 동의가 있다 하더라도 물리력을 지닌 군부가 쿠데타를 일으키면 그만이며, 실제로 그런 일이 일어났다.
언론탄압도 심각한데 2023년 기준 언론자유지수가 173위에 불과하며 정부가 언론과 기자에 대해 각종 탄압을 일삼고 있다.#, # 게다가 인터넷까지 검열하며 정부와 군부를 비판하기만 하면 체포하기도 했으며,# 특히 탄 쉐 시절인 2005년 이전까지만 해도 홈페이지 개설 및 호스팅이 금지됐다가 이후 조금씩 풀어줬지만, 구글, 핫메일, 야후 등 주요 포털사이트를 차단했다. 2019년에는 군부를 비판하던 연극인이 실형을 선고받은 바 있다.
7.1. 2021년 쿠데타[편집]
자세한 내용은 2021년 미얀마 쿠데타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2021년 2월 1일 국가고문 아웅 산 수 치와 윈 민 대통령이 사실상 구금되었다는 보도가 나왔다. 또 다시 쿠데타가 벌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미얀마군은 총선 참패 이후 쿠데타를 일으키겠다는 주장을 공공연히 해왔다.
7.1.1. 국가행정위원회[편집]
미얀마군 최고사령관 민 아웅 흘라잉 대원수가 정권을 장악했으며 1년간 국가 비상사태를 선포했다. 민 슈웨 부통령은 대통령 권한대행이 되어 내각을 개각했으며, 민 아웅 흘라잉 최고사령관은 국가행정위원회를 결성했다.
쿠데타 발생 이후 2월 2일 민 아웅 흘라잉 대원수는 군정을 실시하기 위하여 국가행정위원회(State Administrative Council)를 조직하였으며, 16명으로 구성되어 있다. 구성원은 현역 군인과 USDP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 국가행정위원회 위원장 : 민 아웅 흘라잉 대원수. 미얀마군 최고사령관
- 국가행정위원회 부위원장 : 소 윈 원수. 미얀마군 부사령관
- 국가행정위원회 위원 : 미야 툰 우 대장. 미얀마 국방장관
- 국가행정위원회 위원 : 틴 아웅 산 대장
- 국가행정위원회 위원 : 마웅 마웅 쪼 대장
7.1.2. 미얀마 내전[편집]
자세한 내용은 미얀마 내전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2021년 군부가 아웅 산 수 치를 구금하고 실권을 장악한 군사 쿠데타에 반발해 미얀마에서 벌어진 내전이다. 1988년 8월 8일부터 9월 16일까지 있었던 8888 항쟁에 빗대어 22222 항쟁(2021년 2월 22일)이라 부르기도 한다. 이외에도 봄 혁명() 등 여러 명칭이 있다.
평화주의를 고수하며 시위 등을 통해 군사반란을 반대하는 뜻을 펼치는 시민들을 군경이 지속적으로 살해하는 등, 군 반란세력이 양보와 타협을 끝끝내 거부하고 폭동적 시위진압을 고수하자 끝내 시민들도 저항권을 발동시키면서 자체적으로 무장하기 시작했고, 5월 5일, 미얀마 시민방위군이 창설되면서 내전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2021년 9월 7일에 반군부 민주진영인 국민통합정부가 군부에 공식적으로 전쟁을 선포하였다.
8. 경제[편집]
자세한 내용은 미얀마/경제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9. 교육[편집]
미얀마의 근대적인 교육 여건은 영국령 시기, 일본령 시기에 확립되었다.
현대의 미얀마의 학제는 유치원,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이다. 9월에 입학한다.
유치원은 대도시를 중심으로 소재해 있으며 수가 적어 대부분의 아동은 사원에서 글을 익힌다. 유치원은 2년제로 4세에 입학하여 5세 중반에 졸업한다.
초등학교는 대부분 국공립이며 중소도시에서도 접근성이 높다. 다만 의무교육이 아니라 소정의 수업료를 낸다. 초등학교는 5년제로 5세에 0학년으로 입학하여 10세에 4학년으로 졸업한다.
중학교는 국공립과 사립으로 나뉜다. 사립 중학교는 대도시를 중심으로 있으며 부유한 집안의 학생이 많다. 중학교는 4년제로 10세에 5학년으로 입학하여 13세에 8학년으로 졸업한다.
고등학교는 복선형인데 대학 진학을 위한 인문계 고등학교와 취직을 위한 직업계 고등학교로 나뉜다. 인문계 고등학교의 명칭에는 지역명과 숫자가 있는데 숫자가 그 지역내 고등학교의 순위다. 즉 양곤 제1고등학교는 양곤 지역 최고의 고등학교다. 인문계 고등학교는 미얀마 전국에 200개 정도며 이 학교 입학을 위한 경쟁이 매우 치열하다. 직업계 고등학교는 국공립과 사립이 섞여 있으며 대도시와 지역 중심지를 중심으로 있다. 고등학교는 기본적으로 2년제나 일부 인문계 고등학교는 3년제다. 고등학교는 15세 혹은 16세에 졸업한다.
대학입학 시험을 3월에 실시하며 국공립 인문계 고등학교 졸업(예정)자만 응시할 수 있다. 시험 과목은 버마어, 영어, 수학, 화학, 물리학, 생물학, 지리학, 역사, 경제학이며, 각 과목마다 2개의 논술형 문제가 출제된다. 연간 80~100만명의 인원이 응시한다.
전국적으로 163개의 대학이 있으며 미얀마의 헌법에는 각 주에 인문계대학 1개, 기술대학 1개의 설치 의무가 있다. 미얀마 대학의 학사 과정은 4년제다.
미얀마의 대학 중 일부는 영국령 식민 시기에 설립된 유서 깊은 학교다. 대표적인 대학이 양곤대학, 양곤경제대학, 양곤외국어대학이다. 지방 주 지역에도 식민 시기 설립된 명망 있는 대학이 있다. 이러한 대학은 반식민지 운동의 중심지였고 이후에는 민주화 운동의 중심이었다. 실제로 네 윈 정권에서는 대학에서 민주화 운동을 할 것을 염려해 학내에서 영어 사용을 금지하고 종합대학은 분리시켜서 강제 분산했다. 또 대학 교육 기간을 2~3년으로 축소했다. 위에 기술한 양곤대학, 양곤경제대학, 양곤외국어대학도 원래 하나의 대학이었으나 이 때 분리한 것이다.
미얀마는 본래 동남아시아 지역에서 꽤 수준 높은 대학 교육으로 인근 국가에서 많은 유학생이 찾았으나 네 윈 정권의 이러한 대학 탄압 정책으로 대학 교육 수준이 급추락했다. 이후의 군사 정권에서도 이러한 정책은 오히려 강해져 대학 경내 외부인 출입 금지, 부정기적인 강의 진행, 입학생 모집 중지 등의 조치를 2011년까지 수십년 간 지속한다.
2011년 탄 쉐 정권이 퇴진하고 대학 교육이 정상화한다. 대학 교육 기간을 4년 이상으로 법제화하고 강의 시수 확보가 안정적으로 이뤄졌다. 다만 대학 경내의 외부인 출입 금지는 지금도 여전해 출입문과 건물을 드나들 때 학생증 검사를 꽤나 철저히 한다. 구내식당도 마찬가지라 재학생이 아닌 경우에는 식사를 할 수 없는 경우가 많다.
현재 미얀마 대학 내 주요 교수 언어는 영어다. 강의, 과제, 논문 작성 등에서 영어를 기본적으로 쓴다. 특이한 점은 미얀마 내 대학 교수의 90%가량이 여성이다. 이는 미얀마 내 특유의 출세 지향적 문화와 관련이 있는데, 남성이 박사 학위를 받는다 해도 남성들은 학자가 되기보단 공무원이 되거나 기업에 가고자 하는 경향이 매우 강하기 때문이다.
10. 군사[편집]
자세한 내용은 미얀마군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살생(殺生)을 금한 불교(상좌부 불교) 교리를 지키려는 불교 신도들의 시위로 1977년 3월 2일 징병제를 폐지하였다. 그러나 탄 쉐의 군사 독재 정권 하에 있는 상황이라 소년 등을 상대로 불법 징병이 이루어지다가 2011년 1월 17일 경 다시 공식적으로 징병제를 시행하였다.
11. 외교[편집]
자세한 내용은 미얀마/외교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12. 사회[편집]
12.1. 언어[편집]
공용어는 미얀마어로 지정되어 있다. 미얀마어는 동남아시아에서는 유일하게 한국어처럼 SOV 어순을 따르는 언어다. 또한 성조 역시 캄보디아를 제외한 인도차이나반도 국가 중에선 제일 적어서 3개뿐이다. 미얀마도 다민족국가라서 샨어, 카렌어 등 각 소수민족 언어가 병용된다. 그 외에도 예전에는 영국의 지배를 받아서 영국의 영향으로 영어도 쓰인다.
그리고 간단한 한국말 정도는 익히는 사람이 많은데, 물론 중급 이상으로 학습하는 경우는 그렇게까지 많진 않지만, 그래도 드라마, 영화, K-POP 덕질을 하기 위해서 한국어를 공부하거나 미얀마 내 한국 기업이나 한국으로 취업하고자 한국어를 공부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이는 미얀마인들의 정서가 한국인들과 비슷한 부분이 의외로 많아서 그렇다고 한다.
12.2. 종교[편집]
그리스도교와 이슬람을 비롯하여 여러 종교가 있지만, 상좌부 불교의 영향력이 압도적으로 강하다. 미얀마 문화에서 불교가 차지하는 비중은 상당하여, 특히 남자들은 일생에 한 번이라도 절에 들어가 스님이 되어야 할 정도다. 전체 인구 중 88%가 불자이다. 생활에서나 문화에서나 불교의 영향이 곳곳에 보인다. 거리에 나가면 아침마다 시주를 받으러 다니는 승려들을 많이 볼 수 있다. 절을 젊은이들의 만남 장소나 공동체 모임 장소로도 많이 사용하며, 미얀마 남자들은 성인식 차원에서 몇 주 혹은 몇 달간 삭발을 하고 절에 들어가 불공을 드림이 문화적인 통과의례다.
근데 최근 들어서는 이런 것을 귀찮게 여겨 생략하는 청년들이 늘었다고 한다. 또, 추문에 시달리거나 소비지향주의에 많이 물든 땡중들이 문제가 되기도 했다. 또는 정식으로 비구계를 받으면 여러 가지 계율을 지켜야 하므로, 일부러 평생 사미로 머무는 사람들도 꽤 있다고 한다.
불교의 영향으로 그리스도교의 10계처럼 상좌부 불교의 5계를 일상적으로 지킨다. "살생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거짓말하지 말라, 술과 마약을 삼가라." 그러나 도덕적으로 교육을 잘 받지 못한 시골 사람이나, 가축을 도축하는 등 어쩔 수 없는 경우를 합리화하려고 각종 변명을 붙이는 경우가 많다.
미얀마 내 불교 종파는 선불교나 명상과 같은 일반인들도 참여하기에 어렵지 않은 특징을 내세운 신흥 종파도 두각을 드러내며, 불교계 각종 이슈는 비교적 자주 뉴스에 오르내린다.
일반 학교 교사들 또한 전문적인 지식뿐만 아니라 미얀마 문화와 불교 문화를 함께 가르치는 전인적 교육을 해야 한다는 사명감이 있기 때문에, 미얀마인들을 어릴 때부터 깊이 있게 불교 문화에 스며든다.
절에서는 대승불교와 성격이 많이 다른 상좌부 불교 문화가 많이 살아있다. 대승불교만 알고 지내던 사람들에게는 미얀마 절에서 금박을 붙이고 연꽃을 합장한 손에 끼우는 등 행위가 많이 낯설다.
불교가 존숭받는 나라답게 미얀마의 절들은 정말 크다. 보통 절들이 대학 캠퍼스만 한 경우도 적지 않고, 각종 역사적인 절들과 도심 곳곳에 자리한 절들 외에도 새로 창건하는 절도 상당히 전국에 많다.
불교의 영향력이 워낙 강하기 때문에 불교는 법률로도 보호를 받는다. 미얀마에서 불교를 존숭하지 않는 행위까지 법적으로 처벌받는 범죄다. 예를 들어 불교 사찰에는 신발을 벗고 들어가야 하는데 신발을 벗지 않고 들어갔다가 종교행사방해죄로 경찰서에 끌려간 외국인 관광객의 사례가 있다. 또한 몸에 불상 문신을 한 네덜란드 관광객이 종교모독죄로 추방당한 예도 있다. 불교적 그림이나 불상은 불교의례로만 사용되어야 하며, 악의적인 표현이 없다고 하더라도 비불교적인 용도로 사용함 자체를 불교에 대한 모욕으로 간주하는 것이다. 외국인 입국자들이 주의해야 하는 부분이지만 미얀마의 불교가 종교 근본주의 수준으로 문제가 많다는것을 알 수 있다. 이곳 상좌부 불교 승려나 불교도들은 자신들이 붓다의 진설을 그대로 보존하였다고 믿어서 이에 대한 자부심이 강하다.[8] 미얀마 불교의 특징은 이웃한 캄보디아 등의 국가[9] 에 비해 《청정도론》의 영향을 많이 받은 사마타 및 위빠싸나 수행자 수가 많다는 것이다.
미얀마 사람들은 토착 신격인 낫(Nat)도 함께 섬긴다. 낫은 대부분 불교 전래 이전 미얀마의 토착신이나, 한을 품고 죽은 역사 인물이나, 옛 미얀마에서 잠시 위세를 떨쳤던 대승 불교의 보디사뜨와(보살)들이 변형되어 민간신앙에 편입된 것이다. 이들은 상좌부 불교와 결합하여 불법(붓다담마)를 수호하는 신장처럼 대접받는다. 낫을 섬기는 주술사는 대개 여장남자인데 '낫거도'라고 불린다. 이들은 한국 무속신앙의 굿과 비슷한 '야다야(yadaya)'[10] 라는 주술의례를 행하는데, 다양한 이유로 행하지만 대개 액땜의 성격이 강하다.[11] 야다야는 수비학적 성격이 강하며, 특히 숫자 9를 영험하게 여긴다. 외세와 민주화 세력을 두려워하는 미얀마군 장성들도 낫 신앙에 대한 의존도가 매우 커서, 낫을 마치 자기들의 수호신처럼 여긴다. 현재 수도인 네피도 곳곳에도 온갖 낫들의 채색 동상이 세워져 있다.
불교 사원에 모셔진 불상 중 일부는 매우 특이하게 생겼다. 이 경우 주술사가 특정 정치인, 군인 등 세력가의 안위를 위해 제작에 관여한 것일 가능성이 높다. 2020년 미얀마 종교부에서는 이러한 '신비주의'적 불상을 대대적으로 철거할 것을 요구하였으나 이듬해 쿠데타가 일어나면서 흐지부지되었다.
한편 서부 및 북부 산악지대를 중심으로 영국 식민 시절에 들어온 기독교를 믿는 민족들도 많으며 방글라데시와 접한 서부 라카인 주에는 로힝야라고 불리는 영국 식민 시절에 미얀마로 이주한 벵골인 무슬림들의 후손들도 많다. 다만 로힝야는 기원이 기원인지라 미얀마 정부의 조직적인 박해를 받는 중이다. 벵골계 무슬림 주민들 중에서도 그나마 덜 박해받는 이들은 벵골인과 미얀마 토착민의 혼혈이거나, 순혈 벵골인이지만 로힝야족이라는 정체성이 없는 이들이다.
12.3. 치안[편집]
2010년대 도시 기준으론 제법 좋은 편으로, 경범죄 발생률도 낮았다.[12] 미얀마 사람들도 자비를 강조하는 불심으로 어디 가서 안 밀리는 나라답게 대체로는 온화하고 친절한 편이다. 그래도 엄연히 여행 유의 국가이며 국경 지대 등 일부 지역들은 철수 권고 지역으로 발령되어 있다. 게다가 2021년 미얀마 쿠데타 이후로는 자국민들도 군부에 저항하다 학살당하는 상황이라 안전하다고 보긴 어렵다. 군부에 대항하는 시민군들도 무장하기 시작하면서 사실상 내전 상태다. 즉, 함부로 미얀마 갔다가 재수없으면 미얀마군이나 시민군에게 총 맞고 죽을 수도 있다.(...)
특히 샨주 동•북부 지역과 까야주는 법적 강제력이 있는 여행금지 지역이다. 중국-태국 접경 지역은 위험하고 외국인 출입 금지 지역은 가지 말아야 할 것이다. 샨주 남부 지역의 태국-라오스와 인접한 국경지대는 그 유명한 골든 트라이앵글로 불리며 과거 쿤사의 마약 카르텔 군벌들이 정부군과 교전하면서 악명을 날렸다. 쿤사가 은퇴하고 그 일대가 카지노, 관광 단지로 개발되면서 치안 상태는 많이 좋아졌으나, 21세기 들어 또 다시 마약 군벌들과 중국계 마약 조직들, 삼합회들이 그곳 일부 지역에서 마약을 생산한다고 한다.
크게 보면 군부vs민주화 세력간 충돌, 주류민족(버마족)과 기타 소수민족들과의 충돌 문제가 있고, 간혹 불교와 이슬람교 간의 종교적 충돌이 일어나기도 한다.
12.4. 의식주[편집]
동남아시아의 여러 나라들처럼 여기도 기후가 온화하다보니 각종 채소, 곡식들을 많이 재배하는 나라 중 하나이다. 그래서 채소 요리가 발달되었으며, 물론 고기 요리도 있는데 주로 생선, 닭고기 요리가 발달되었다. 태국 요리, 인도 요리와도 비슷한 특징을 보이고 있다. 대한민국에서는 인천 부평역 근처에서 미얀마 요리를 맛볼 수 있다. 부평역 근처는 미얀마 불교 사원이 있어서 대한민국에서 미얀마인들이 가장 많이 거주하는 곳이다.
남자의 가웅바웅이라는 전통 터번, 론지라는 남녀 공용 전통 치마가 유명하다. 타나카라는 미용을 위한 하얀 전통 화장품도 유명하다. 가웅바웅은 격식을 차린 행사에서 종종 등장하나 론지나 타나카는 그렇지 않은 경우에도 보이기도 한다.
12.5. 문화[편집]
미얀마의 기간방송으로는 MRTV(Myanmar Radio and Television), MWD(Myawaddy TV)가 있다. MRTV는 국영방송으로, 영국 식민시절인 1946년 개국한 유서 깊은 방송국이다. 텔레비전 방송은 1980년부터 시작했으며 1997년 지금의 이름으로 바뀌었다. MWD는 특이하게 미얀마군이 운영하는 군영 방송으로 총 6개의 채널이 있다. 미얀마라는 나라가 군부가 지배하는 선군정치에 가깝다 보니 군부 방송이 전국 중앙방송으로 기능할 수 있는 것이다.
민영방송은 대표적으로 포에버 그룹이 MRTV와 합작하여 세운 MRTV-4 채널이 있다. 소프트 파워가 빈약한 미얀마이지만 드라마를 비롯한 TV 프로그램을 꾸준히 자체제작하고 있다. 그 외 방송국들은 주로 해외 프로그램들을 수입해 방영하는데 보통 중국,인도,태국 같은 옆 나라 또는 한국 등지에서 많이 들여온다. 한국 드라마는 20여년 전부터 미얀마에서 방영되고 있으며 현지인들 사이에서 인기가 좋다. 특이한 점으로 한국 드라마 중 사극의 인기가 높은데 군부 측에서 사극에 매우 호의적이라고 한다.
미얀마의 신문은 국영 신문인 미얀마 알린, 더 미러, 글로벌 뉴라이트 오브 미얀마(영자지), 군부 신문인 더 먀와디만 발행되고 있다. 그 전에는 미얀마 나우, 더 이라와디 등의 민영 신문들도 있었으나 쿠데타로 강제 폐간되어 지금은 독립언론 형태로 이어나가고 있다. 영자신문은 그 정도가 덜하지만, 미얀마어본 국영 신문과 군부 신문은 기사를 전산화하는 일이 매우 드물며, 웹사이트에 들어가 봐도 종이 신문의 스캔본만 공개한다. 내수용 신문에 실린 텍스트가 외부로 유출되는 것을 극히 경계하는 것으로 보인다. 일간지에 대해서는 엄격하게 검열하며, 주간지는 정치 관련 보도를 자제한다는 점으로 인해 언론 통제를 느슨히 하는 편이었다. 하지만 2021년 이후로는 이마저도 경색되었다.
모든 통신수단은 미얀마 통신정보기술부(MCIT)가 주관하며 미얀마우편통신공사(MPT)가 독점해왔으나, 2013년 카타르 우레두, 2014년 노르웨이 텔레노르가 각각 진출하여 균열이 깨지기 시작했고 2018년 베트남 비엣텔이 군부 측과 합작해 '미텔'을 개통했다.
영국 식민지 시절부터 1885년 '전신법'을 필두로 1934년 '무선전신법', 1996년 '컴퓨터과학발전법', 2004년 '전자상거래법' 등을 만들어 ICT 체계를 구축했고, 2013년 전신법과 무선전신법을 합쳐 '통신법'으로 개편했다.(관련 논문) 1999년 전화접속 방식으로 상용 인터넷 서비스를 개시하여 2000년대 이후 ADSL, IP Star, McWill, Wimax(무선) 등으로 확대했다. 2000년대만 해도 컴퓨터와 모뎀 값이 비싸 서민들은 엄두도 못 냈으며 주로 정부 및 군부에서 쓰였으나, 2011년 민주정부 수립과 시장개방 이후 스마트폰의 보급 등으로 조금씩 확산되었다.(참고) 다만 2021년 쿠데타 직후 2022년 텔레노르, 우레두 등이 미얀마에서 발을 뺐다.
언론통제가 심하다. 언론자유지수 기준 중국과 비슷한 수치를 기록하고 있으며 민주화 시절에는 약간 나아졌으나 군부 쿠데타 이후에는 다시 원상복귀되었다. 대표적으로 뉴스는 사실상 어용방송인 MRTV와 MWD TV에서만 보도될 수 있으며 당연히 내용은 흘라잉 사령관이 무엇을 했다, 미얀마군이 PDF 테러리스트를 체포했다 등 땡흘뉴스 일색이다. 해외 소식은 서방매체 출처를 배제한 채 CGTN, RT 같은 중국/러시아쪽 매체를 통해서 주로 인용되고 있다.
태국의 송끄란처럼 미얀마에도 매년 4월에 하는 물 축제가 있다. 띤잔(, Thingyan)이라 불리는 설날인데, 사실 송끄란과 띤잔, 라오스의 삐마이()는 동아시아의 구정처럼 세 나라가 공유하는 명절이다.
폭죽을 터트리는 중국과 비슷하게 큰 소음으로 마를 쫒아내는 풍습이 존재한다. 이 때문에 민주화 운동 당시 냄비나 깡통을 두드려 악마(군부)를 몰아내자는 시위가 이어지기도 했다.
12.6. 기타[편집]
중국인들이 8을 좋아하듯 미얀마인들은 유난히 숫자 9를 좋아한다. 대표적으로 미얀마 국영 라디오 방송국 주파수는 999 kHz에 할당되었고, 1990년대 이전에는 45짯, 90짯 지폐가 통용되기도 했다. 마이크로 버스로 합승 택시 영업을 하는 운전기사들도 승객이 9명이 되면 자리가 남아도 출발하고, 출발시간이 되어도 승객 수가 9명이 안 되면 9에서 모자라는 수만큼 가축, 심지어 돌이라도 싣고 출발한다.
태국보다 더 에이즈 문제가 심각해 2006년 기준으로 환자 수가 25만 명이다. 감염원은 병원 의료기기와 주사기 돌려쓰기 등이다. 군부독재 시기 동안 이 문제는 방치됐고, 1993년까지 콘돔 사용이 허용되지 않아 이 문제가 심화되었다. # 2019년 6월 18일에 미얀마의 한 여성의사가 비키니를 입은 사진을 SNS에 올린 것으로 해고당하자 논란이 일어났다. 그녀는 뉴욕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미얀마는 성차별이 심각하다고 밝혔다.#
인도차이나반도 내륙에 위치한 국가중 유일하게 NTSC-M을 채택했다. 참고로 내륙에 있는 국가들은 전부 PAL-D/K를 채택하였다. 디지털 방송 규격으로는 필리핀을 제외한 다른 국가들과 같이 DVB를 채택했다. FM방송의 경우 ITU-R2(87.7 - 107.9MHz/200kHz)를 채택한 필리핀, 타이완과 다르게 ITU-R1(87.5 - 108.0MHz/100kHz), R3(87.0 - 108.0/100kHz)를 채택했다.
13. 단위[편집]
미터법을 공식 도량형으로 채택하지 않았다. 그래서 미얀마는 비(非)미터법 3개국 중 하나다. (나머지 2개국은 미국과 라이베리아) 게다가 전 세계에서 미얀마 혼자 쓰는 (동아시아의 척관법과 비슷한) 전통적 도량형을 독자적으로 사용한다. 그래서 시장에서 물건의 무게를 잴 때 g이나 kg가 아닌 베익따( 1.666kg)를 주로 사용한다. 다만, 미얀마를 식민통치한 영국의 영향으로 현재의 미얀마 단위계는 야드파운드법과 어느 정도는 호환되고 공식적으로는 야드파운드법과도 혼용한다. 한 예로 미얀마 도로의 표지판에서 라틴 문자가 병기된 부분을 잘 보면 거리 단위를 마일로 표기한다.
2011~2013년 사이에 대외무역 장벽의 완화를 이유로 미얀마 역시 미터법을 도입하려는 움직임이 있었지만 무산되었다.
그러나 미국과는 달리 야드파운드법이나 미얀마 단위계 사용이 체계적으로 잡히지 않아서 그런지 해외 진출한 기업들은 자사 제품의 치수를 그냥 미터법으로 표기하는 경우가 많다.
시간대도 UTC+6½라는, 이상한 시간대를 미얀마 혼자서 사용하는데, 의도적으로 태국과의 단절을 위해 그런 것으로 추정된다. 미얀마는 경도상으로 봤을 때 UTC+6이나 UTC+7을 쓰는 것이 훨씬 합리적이기 때문.
14. 스포츠[편집]
다른 동남아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축구가 가장 인기가 많고 프로 리그를 운영 중이다. 1970년대에만 하더라도 아시아권에서 축구 강호였고 한국이나 일본도 고전하던 나라였으나, 현재는 동남아시아에서도 최약체로 전락해버렸다. 그냥 세계적으로 아예 최약체 수준이다. 자세한 건 미얀마 축구 국가대표팀을 참고할 것.
축구 인프라는 아시아에서 하위권이었으나 2010년대 들어 발전을 꾀하고 있다. 2011년까지 AFC프레지던트컵에 참가했으며 2012년부터 AFC컵에 참가하고 있다. 2010년 AFC프레지던트컵에서 야다나르본 FC가 키르기스스탄의 도르도이 비슈케크를 1-0으로 꺾고 우승한 기록이 있다. 최고 인기팀은 최대도시 양곤에 위치한 양곤 유나이티드로 매 경기 구름 관중을 동원한다.
그 외에는 역시나 다른 동남아국가와 마찬가지로 세팍타크로가 인기가 많다.
2014년 인천 아시안게임에서 금메달 2개, 은메달 1개, 동메달 1개를 세팍타크로종목에서만 획득했다.
14.1. 전통 무술[편집]
렛웨이라는 무에타이 비슷한 전통무술이 있다. 이 무술의 특징은 무에타이에서는 쓰지 않는 여러 박치기 기술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자세한 것은 문서 참고.
격투기 수준 높은 싱가폴 One Championship에서 라이트헤비급 전 챔프가 미얀마인 aung la n sang이었다. #
14.2. 관련인물[편집]
15. 관광[편집]
양곤의 쉐다곤 파고다
바간 유적
만달레이 언덕
미얀마 내 정세 악화 및 시위로 인해, 2021년 4월 2일부터 대한민국 외교부는 미얀마 전 지역에 출국권고를 발령하였다. 그리고 2023년 11월 25일 샨주와 까야주에, 2024년 5월에는 라카인주에 여행금지 경보가 발령되었다.
대한민국 여권 소지자는 전자비자를 발급받아 양곤 국제공항을 포함한 5곳을 통해 입국할 수 있다. 비자 발급엔 왕복 티켓과 미얀마 정부에서 승인한 호텔 예약증서가 필요하며 이 외에도 코로나 백신 증명서, 외국인 대상 미얀마 건강보험을 준비해야 하며 입국 후 신속항원검사 또한 받아야 한다.
예전에는 국경지대 마을에 한정하여 잠시 다녀오는 것 외에는 육로로 입국할 수 없고 비행기로만 입국해야 했다. 2013년 8월에 태국 - 미얀마 간 4개 국경으로 외국인이 육로로 이동할 수 있도록 허용했다.에어아시아에서 쿠알라룸푸르-양곤, 방콕-양곤 구간을 저렴하게 판매하는 중. 2012년 9월 대한항공에서 인천 - 양곤 노선을 취항했고 2012년 12월에는 아시아나항공도 양곤에 취항했던 적 있지만 2016년 3월 1일부로 철수했다. 여행자수표나 신용카드 등의 사용은 어렵고, 구겨진 달러는 받지 않으므로 달러 지폐는 신권을 구비해 가는 것이 좋다. 미얀마 주요 도시에 ATM이 보급되었다.
과거에는 입국비처럼 강제로 1인당 300달러를 날강도 수준이던 공식환율로 태환 짯을 환전해야 하는 법률이 있었다. 그래서 짧게 체류하는 관광객에게는 악재였다. 현재는 관광업에 악재라 해서 폐지되었다. 외국인들이 많은 주요 관광지에서 환전하는 가게를 흔히 접할 수 있는데, 물론 가게마다 환율이 다르다! 100달러가 제일 좋고 낮은 단위일수록 손해이므로 신중히 교환하자. 달러나 짯 모두 받는 경우가 많지만 무조건 짜트로 낸다고 해서 이득이 절대 아닌 경우가 많다.
여행자들에게는 옛 수도이자 제1도시인 양곤, 제2도시이자 사가잉, 잉와 등 근교에 볼거리가 많은 만달레이, 고대 도시 바간, 소수민족인 샨족의 생활터전인 고산 지대의 인레호수 등이 유명하며, 그 외에도 북부 정글지대나 남부 나팔리 해변 등이 속속 외국인에게 개방되고 있다. 도시간의 이동은 버스(주로 야간 버스로 밤새 이동한다)나 비행기를 통해 한다. 그외 이동의 90%가 택시다. 참고로 택시비는 전부 흥정해야 한다.
대한민국에 특히 잘 알려진 유명한 관광지로는 양곤의 크고 아름다운 황금 탑 쉐다곤 파고다나 고대도시 바간이며 대한항공에서 밀어주고 있는 우베인 다리는 만달레이 근교인 아마라푸라에 위치한다. 바간은 천년 전 바간 왕조의 유적인 약 2800개가 넘는다는 파고다(탑)들이 장관이다. 앙코르 와트와 함께 유네스코에서 지정한 세계 3대 불교 유적지로 유명하다. 유적지 보존을 위해 외국인에게 지역입장료를 받는다. 미얀마 국민들은 불교를 보편적으로 믿는 데다가 파고다를 세우기를 최고의 공덕으로 여기기 때문에, 미얀마 국토 전역에 지금도 새로운 파고다를 많이 세우곤 한다.황금바위 짜익티요도 독특한 풍경으로 나름 유명한데 교통이 별로 좋지 않아서 아직은 숨겨진 보석 취급.
미얀마인들 또한 성격이 나쁘지 않고 여행자들에게 친절한 편이다. 현지인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을 일은 거의 없다. 택시 같은 경우도 일단 어디로 가면 추가요금 내야 한다고 미리 양해를 구한다! 멋대로 가놓고 돈 더 요구하질 않는다! 요약하자면 여행 인프라가 잘 되어있지 않아 다소 불편하지만 하지 말아야 할 것만 삼가면 상당히 안전하게 배낭여행을 즐길 수 있다. 미얀마에는 인도계 사람들이 많이 사는데, 인도계를 조심하라는 말이 여행자들 사이에서 돈다. 물론 전부 다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확실히 인도계가 좀 더 대하기 불편한(...) 경향이 있다. 실제로 경험한 바에 의하면 시내에 돌아다니며 환전해주는 인도계 사람들이 있는데, 돈을 접어놨다가(...) 두 번씩 센다든가 하는 식으로 사기를 치는 경우가 종종 있다.
미얀마는 특히 유럽 사람들이 선호하는 여행지다. 순박하고 친절한 사람들과 각종 천혜의 자연환경, 광범위한 고대유적들이 만나 다양한 즐거움을 느낄 수 있다. 태국과 달리 지역이 너무 커서 비행기로 이동해야 하며 각 지역마다 문화유적 보호를 위한 입장료를 받고 있는 점, 외국인에 대한 호텔 숙박비 등의 차별이 있어 물가에 비해 저렴하게 이용하기는 어려우나 그덕분인지 라오스나 태국의 저질 장기체류자가 없어 더 천혜의 여행지로 남았다고도 볼 수 있다. 육로가 개방된 지 얼마 안 된 시점에서 많은 배낭여행자들이 태국에서 건너오므로 외국인에게 순수하고 친절한 미얀마 사람을 볼 날도 많이 남지 않았다.[14]
이런 점 때문인지 한때 아웅 산 수 지 여사는 외국에다 "절대 버마에 관광 오지마라, 당신들이 관광을 하면서 뿌리는 돈으로 군사독재정권의 살을 찌우는 결과가 생긴다."라고 얘기한 적도 있다.
미얀마 여행시 주의사항은 아직까지 크고 작은 시위가 일어나고 그 시위에 휘말린다면 신변 안전에 보장을 신경쓰라는 것이다. 이 해당 사항은 자신이 여행도 여행이지만 여행 겸 특수 목적으로도 온 언론인들이 주로 해당된다. 대다수 일반인들은 시위 문제에서 손 떼고 여행만 하는 게 미얀마 시위에 참여하는 국민들에겐 안타깝지만 낫다. 그러니 그 근처는 안 가는 것이 좋다. 도와주고 싶은 마음이 들기는 해도, 한국인들도 시위에 동참한 홍콩과는 규모부터가 이미 다르다.
특이사항으로는 영국의 식민 지배를 받았고 이웃 국가들인 인도, 방글라데시, 태국이 좌측통행을 함에도 1970년부터 우측통행을 하고 있다는 거다. 본래는 영국의 영향으로 좌측통행을 했으나, 1970년에 영국 식민지 시절의 잔재를 청산한다는 명목으로 윗동네인 중국 및 인도차이나 반도 3국과 같은 우측통행으로 바뀌었다. 실리적으로는 당시 미얀마가 사회주의 국가였는데 미얀마와 국경을 맞대면서 좌측통행을 하는 인도와 방글라데시 그리고 태국이 모두 자본주의 경제체제라서 이들과의 단절 및 윗동네의 사회주의 국가인 중국과의 친선관계 강화를 위해 중국과 같은 우측통행으로 바꿨다는 해석이 있다.[15] 그러나 제대로 된 준비가 부족한 상황에서 갑자기 바꾼 탓에 핸들이 오른쪽에 있는 자동차로 우측통행을 하는 기형적인 교통환경이 되어버렸다. 이 때문에 일본, 태국 등 좌측통행 국가로부터 우핸들 자동차를 수입해야 했고, 우측통행 국가로부터 좌핸들 자동차를 수입하는 경우는 극소수였다. 그나마 최근에는 미얀마 정부가 우측통행에 적합한 좌핸들 자동차를 많이 보급하기 위해 일본, 태국 등 좌측통행 국가로부터 자동차 수입을 금지하고 한국, 중국 등 우측통행 국가로부터의 자동차 수입만 가능하게 했다.[16] 다만 기존에 이미 수입한 우핸들 자동차는 여전히 타고 다닐 수 있다.
2018년 8월부터 인도와의 국경 2곳(Tamu-Moreh / Rihkhawdar-Zokhawthar)이 외국인 여행자에게 개방되었다. 인도 북동부 임팔로 육로로 넘어갈 수 있게 되었고, 이로써 몇 년 전에 시행된 미얀마-태국 육로국경 개방까지 해서 육로로 인도와 동남아를 오갈 수 있게 되었다. 마음만 먹으면 한국에서 중국으로 배를 탄 뒤 여기를 지나 이란, 튀르키예, 유럽까지 비행기를 한 번도 안 타고 육로로 가는 것도 과거엔 미얀마가 폐쇄국가라 불가능했다. 동남아 관광 뒤 다시 중국으로 올라오더라도 외국인은 티베트 쪽으로 가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고, 그렇다고 더 위로 올라가 카자흐스탄을 가게 되면 중앙아시아 관광을 원치 않을 경우 효율성이 매우 떨어진다 그래서 이젠 가능해졌나 했더니.. 이젠 건너편 파키스탄의 발루치스탄주가 위험지역이라 불가능해졌다. 정 육로로 유라시아를 횡단하려 한다면 위쪽 러시아나 중앙아시아 쪽으로는 가능하다.
16. 대중매체에서[편집]
람보 4: 라스트 블러드에서 존 람보의 주요
아라크니드의 디노포네라(아라크니드)도 미얀마 출신의 미얀마인 캐릭터.
켄간 아슈라의 '요로이즈카 사파인' 이라는 캐릭터가 바로 렛웨이 기반의 미얀마인 선수로 나온다. 성우는 히야마 노부유키
17. 여담[편집]
북한과의 악연이 있다. 그것도 대한민국을 상대로 한 북한의 해외 테러 건으로. 자국 내에서 벌어진 아웅 산 묘소 폭탄 테러 사건이 그것이고, 대한항공 858편 폭파 사건 역시 미얀마 인근 인도양 상공에서 폭파가 일어났다.
2018년 3월 3일, 미얀마 출신 노동자 윈톳쏘씨가 한국인 4명에게 장기를 기증한 후에 세상을 떠났다. 윈톳쏘씨는 작업 중 사고로 뇌사에 빠진 상태였으나 가족들의 동의하에 장기를 기증하게 되었고 한국 정부로부터 지원받은 장례 지원금 또한 기부되었다고 한다.#
2008년 사이클론 나르기스로 인해 심각한 피해가 났다.
미얀마는 아침에 하루종일 먹을걸 만들어 놓고 많아 보이게 차린다고 한다. 그리고 조금씩 나눠 먹는다고 한다. 어느날 한국인을 초대 했는데 차려 놓은걸 전부 먹어버려서 우린 저녁에 뭐 먹지?라며 난감했다는 일화가 있다.#
TV 방송을 꽤나 늦은 1979년에야 시작했다. 이때는 양곤에서 시범 방송만 한 후 1980년 6월 3일 정규 방송을 시작했다.
18. 관련 링크[편집]
- Justice For Myanmar: 미얀마의 정의와 인권을 촉구하는 글로벌 비정부기구로, 2020년 9월 1일부로 교통통신성에 의해 미얀마 내에서 차단됐지만 github 기반의 미러 사이트를 더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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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Pyidaunzu Thanmăda Myăma Nainngandaw [pjìdàʊɴz θàɴməda mjəmà nàɪɴŋàɴdɔ\][2] 버마어 문장을 직역하면 "해탈을 위해서는 필요한 노력을 부지런히 해야 한다"라는 뜻이다. 미얀마어 단어 (솅무, hrang-hmu)는 상좌부 불교에서 '해탈'을 뜻하는 팔리어 어휘 bodhi의 번역어에서 유래하며, 점차 '행복'을 뜻하는 단어로도 사용되었다.[3] 공식적인 것은 아니지만 사실상의 국화로 여겨진다. 미얀마인들이 가장 선호하는 꽃들 중 하나이기도 하다.[4] 18세기 이후 이주한 화교와 북동부 코캉 일대의 한족, 이렇게 두 부류가 있다.[5] 인도 미조람에 거주하는 미조인과 가까운 민족이다.[6] 2021년에는 1.02점으로 1점대를 유지했었지만 2022년에 0.73점으로 떨어지면서 아프가니스탄과 함께 0점대를 기록한 국가가 되었다.[7] 즉 중앙정부와 군사정부가 따로인 바쿠후같은 상황이 생긴것이다.[8] 이는 스리랑카도 마찬가지다.[9] 이곳의 출가자들은 교학 위주로 공부하며, 재가자가 오히려 참선을 많이 한다.[10] 어원은 산스크리트 어휘인 얀트라(yantra)이다. 동계어로 태국의 수호부적 역할을 하는 문신 '싹 얀'이 있다.[11] 상좌부 불교 경전에서는 주술로써 업을 피해갈 수 없다고 가르치지만, 야다야는 '선업을 쌓음으로써 악업을 중화시키는 의식'이라는 둥 여러 합리화와 함께 미얀마에서 계속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액땜을 위해서는 동물을 잡아서 제물로 바치거나, 액운이 닥치기 전에 미리 액운에 관련된 언행을 시뮬레이션하는 등의 의식을 행한다.[12] 사실 경범죄 발생률이 낮은 건 곳곳에 사복 경찰이 깔려있기 때문도 있다. 아니 대놓고 쪼리 신고 돌아다니는 제복 경찰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물론 이들이 깔려있는건 치안도 치안이지만 시위를 차단하려는(...) 목적도 있다.[13] 동남아의 여러 무술과 마찬가지로 무에타이와 원조 시비가 붙는 무술 중 하나로 헤드기어나 글러브를 사용하지 않는다.[14] 사실 전혀 이상한 건 아니다. 세계 여행을 하는 사람들은 한국 기준으로 한국 기준으로 중국 - 베트남 - 캄보디아 혹은 라오스 - 태국 - 미얀마 -인도 로 해서 중앙아시아나 중동을 통해 유럽이나 아프리카로 가기에 미얀마는 길목 중 하나이기도 하다. 유럽에서 오는 경우는 그 반대다.[15] 실제로 미얀마의 군용차량은 중국의 영향으로 미얀마의 민간차량과 달리 절대다수가 좌핸들 자동차다.[16] 이로 인해 한국산 중고 버스들이 미얀마에 많이 유입되어 이제는 국내에서 보기 힘들어진 자일대우버스 BF 등 80~90년대 생산 차량이 현지에서 굴러다니는 걸 종종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