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즈노 카즈토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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水野和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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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식 홈페이지

닛산자동차의 슈퍼카 GT-R의 개발주임이었으나 현재는 닛산에서 정년퇴임했다. 1952년 1월생이다.

나가노현 출신으로 나가노현 소재 공업 고등전문학교를 마치고 닛산자동차에 입사, 1980년대 닛산의 기술지향 프로젝트였던 901운동[1]의 영향을 받아 P10형 프리메라와 R32형 스카이라인의 차체 및 패키지 설계에 참가하기도 했다. 실제 1980년대 그의 위치는 바로 차체 셜계 및 패키징 설계였다.

1989년, 닛산의 모터스포츠 사업부인 NISMO(Nissan Motorsports International의 약자.)로 이동했는데 이 때 그룹 C 자동차 내구 레이스 팀 감독 겸 수석 엔지니어로 임명되어 데이토나 24시간 레이스와 르망 24시 등에 참전하였고 특히 1992년에 R91CP 경주차가 데이토나 24시간 레이스에서 우승[2], R92CP로 출전한 JSPC[3]와 스즈카 1000km로 전 경기 우승(클래스 우승 포함)을 차지했다. 1993년에 차량 설계 과장으로 차량 개발 센터에 복귀, 1997년부터 FR-L 플랫폼 개발 책임자로, 2000년부터 수석 차량 엔지니어[4]직에 있으면서 스카이라인(V35)와 페어레이디 Z(Z33), 인피니티 FX(FX35)[5] 등의 개발에 참여했다.

차량개발 주관을 맡던 도중 2004년 1월부터 닛산 GT-R R35의 개발주임을 맡게 되었는데, 미즈노가 이 자리에 오르기 전, 당시 사내에서는 닛산 GT-R을 개발할 때 종전처럼 FR-L 플랫폼을 통해 차를 개발하자는 이야기가 강세였지만[6] 미즈노 본인은 "그렇게 하면 닛산의 플래그십 모델이라는 이미지가 약해진다."라고 하면서 이를 반대하고, 개발주임을 맡지 않았지만..... 2003년 12월, 카를로스 곤 회장이 그에게 모든 전권을 맡기게 된다. 이때 개발 및 상품기획, 판매목표 수립 등의 모든 업무를 총괄하는 자리에 올랐다고.

이후 2012년 닛산에서 정년은퇴,[7] 촉탁직원으로 근무하다 2013년에 닛산을 완전히 나왔고, 1년동안 코단샤의 잡지인 베스트카에서 코너를 맡아 국내외의 차량을 평가하고 강연을 하는 등의 활동을 하다가, 2014년 9월부로 대만의 유론그룹(유륭그룹)산하의 브랜드 LUXGEN의 자동차개발 연구사인 화창자동차개발센터(華創車電技術中心, HAITEC)의 개발담당 부사장 및 동 법인의 일본지사 대표이사 COO가 되었다.HAITEC Jap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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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닛산자동차가 "1990년대가 되기 전까지 기술의 세계 1류를 목표로 한다."라는 목표를 가지고 실행한 계획. 당시 닛산은 차량 판매 수익의 감소로 고생하고 있었으며 이를 타개하기 위해 실행한 프로젝트였다. 그러나 버블 경제에서 계획된 이 계획은 버블의 붕괴로 인한 추락한 일본의 경제와 함께 실패로 돌아가버리고, 닛산은 이 위기를 극복하지 못하고 르노에 인수된다.[2] 드라이버는 하세미 마사히로, 호시노 카즈요시, 스즈키 토시오. 이 중 스즈키는 현재 노르드링이란 정비회사의 대표이다.[3] 전일본 스포츠 프로토타입카 내구레이스 챔피언십의 약어. 1992년을 끝으로 막을 내렸다. 후신은 재팬 르망 시리즈.[4] 일본에서는 차량개발주관이라 부른다. 영문 약어로는 CVE. Chief Vehicle Engineer의 약어다.[5] 현재의 인피니티 QX70.[6] 이 말은 종전의 스카이라인 GT-R처럼 만들자는 소리였다. 즉 종전 GT-R들은 닛산 스카이라인의 고성능 모델 포지션이었기 때문에 스카이라인을 만들면서 GT-R을 하나의 카테고리에 넣을 수 있었다.[7] 정년은퇴라고 하지만, 은퇴후 인터뷰에서 에둘러 표현하는 발언과 닛산 내부 소문을 보면 절반정도는 강요에 의해서 나간걸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