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토 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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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역대 미토 번주
3. 메이지 시대 이후 역대 미토 도쿠가와 가문 당주


1. 개요[편집]


도쿠가와 가문의 고산케 중 하나로, 현재의 이바라키현 미토시.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아들 도쿠가와 요리후사가 미토성(水戸城)을 차지했었고 미토 번을 세우기도 하였다. 이후에 막부 말기 때까지 도쿠가와 가문이 직접 미토를 통치했었다. 때문에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관련된 사찰 등 여러 유적들이 많이 보인다. 도쿠가와 뮤지엄도 이곳에 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유품들이 다수 전시되었는데, 가장 인기있는 전시품으로는 도쿠가와가 썼던 검의 도신인 쇼쿠다이키리 미츠타다가 있다. 대개 이것을 보러 방문하는 사람들이 많다.

고산케 중에서는 가격으로나 고쿠다카로나 가장 아래 대우를 받아,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쇼군 자리는 오와리나 키슈 도쿠가와 가문에서 나오도록 하고 미토 도쿠가와 가문은 이를 보좌하라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하지만 막부 수도 에도에서 가장 가깝기도 해서 중앙에서의 실질적인 영향력은 상당했다. 참근교대를 수행하지 않고 계속 에도에 머무를 의무가 있어 재정난으로 고생하는 경우가 많았으며, 쇼군의 보좌 역할을 수행하기도 했다. 정식 직함은 아니지만 속칭 부쇼군(副将軍)으로 불리기까지 했다.

'대일본사'를 편찬하는 등 번주 가문에서 일본 역사 및 국학 연구를 지원했으며, 유학을 숭상하는 가풍이 있었다고 한다. 이는 막말 존황양이 사상의 기반이 된 소위 '미토학'의 정립으로 이어졌다. 또한 미토 사무라이들은 사상적으로 완고하고 비타협적인 태도로 악명이 높아 1860년 사쿠라다문밖의 변으로 안세이 대옥의 책임자 이이 나오스케를 참살하는 데 주도적 역할을 했다. 이후 탈번 낭인들이 양산되어 일본 곳곳에서 존황양이 테러 활동에 나서기도 했다.

막부말, 무진전쟁쯤 되면 번주와 지도부는 좌막파인데 하급무사들은 오히려 존황양이파의 정신적 고향이라 할만큼 유신지사들을 많이 쏟아냈고, 양쪽 모두 한국인들에게도 익숙한 고지식한 성리학자들이라 결국 좌막파, 토막파 번갈아가며 서로 피의 숙청을 벌이다가 최악의 타이밍에 좌막파가 재집권, 결국 실질적으로 존황론의 사상적 틀을 만들고도 신정부한테 찍혀서 토벌당한 눈물나는 역사가 있다.

가문이 번창하여 에도 시대는 물론 19세기 말 메이지 유신 이후, 심지어 현대에 이르기까지 남계 후사가 전혀 끊기지 않고 이어져 내려왔으며[1], 오히려 많은 아들들이 대가 끊긴 다른 가문에 양자로 입적했다. 대표적인 예가 고산쿄 히토쓰바시 가문을 이은 도쿠가와 요시노부. 심지어 막말로 가면 미토 본가에 더해 쇼군 요시노부, 고산케의 오와리 도쿠가와가, 고산쿄의 히토쓰바시가와 시미즈가까지 모두 미토 가문 출신 양자 또는 그 후손들로 채워질 정도가 되었다. [2]

일본 옛이야기의 주인공인 미토 고몬, 도쿠가와 막부 마지막 쇼군인 도쿠가와 요시노부가 미토 도쿠가와 가문 출신이다.


2. 역대 미토 번주[편집]



3. 메이지 시대 이후 역대 미토 도쿠가와 가문 당주[편집]


  • 도쿠가와 아츠요시
  • 도쿠가와 쿠니유키[3]
  • 도쿠가와 쿠나나리
  • 도쿠가와 나리마사[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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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물론 양자를 받아온 적이 있긴 하지만 그것도 미토의 지번이자 분가 중 하나인 사누키 타카마츠 번에서 가주의 친조카 또는 종손자(조카의 아들)뻘 되는 친척을 양자로 받아서 초대 요리후사의 혈통 자체는 끊어지지 않았다. 본가뿐 아니라 미토의 분가인 타카마츠, 모리야마, 후츄, 시시도 마츠다이라의 4개 지번 또한 직계가 끊긴 경우는 있어도 그때마다 미토 본가 또는 미토계 분가에서만 양자를 받아들여 후사를 이었기 때문에 이들 가문 또한 미토 본가처럼 여전히 요리후사의 혈통이 이어지고 있다.[2] 최종적으로 에도 막부가 무너지고 화족제도 도입 이후 작위를 수여받은 구 도쿠가와 성의 친번 가문 중 미토 계 혈통의 당주를 받아들인 역사가 없는 곳은 후작가인 구 고산케 키슈와 백작가인 구 고산쿄 타야스, 단 2가문뿐이었다.[3] 이 사람의 대에 대일본사(大日本史)가 완성되었다.[4] 現 미토 도쿠가와 가문 당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