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하엘 발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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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 1976년 출생
- 1995년 데뷔
- 2012년 은퇴
- 드레스덴 출신 인물
- 독일의 축구선수
- 미드필더
- 켐니츠 FC/은퇴, 이적
- 1. FC 카이저슬라우테른/은퇴, 이적
- 바이어 04 레버쿠젠/은퇴, 이적
- FC 바이에른 뮌헨/은퇴, 이적
- 첼시 FC/은퇴, 이적
- 독일의 FIFA 월드컵 참가 선수
- 2002 FIFA 월드컵 한국·일본 참가 선수
- 2006 FIFA 월드컵 독일 참가 선수
- 독일의 UEFA 유러피언 챔피언십 참가 선수
- UEFA 유로 2000 참가 선수
- UEFA 유로 2004 참가 선수
- UEFA 유로 2008 참가 선수
- 1999 FIFA 컨페더레이션스컵 멕시코 참가 선수
- 2005 FIFA 컨페더레이션스컵 독일 참가 선수
- 중앙 미드필더
- 공격형 미드필더
1. 개요[편집]
독일의 전 축구 선수. 포지션은 미드필더였다.[5] 공격수가 아닌 미드필더였음에도 커리어 통산 193골[6] 을 기록했다.
선수 시절 카이저슬라우테른에서 1997-98 시즌 분데스리가 우승을, 레버쿠젠[7] 에서는 2001-02 시즌 UCL 준우승을, 바이에른 뮌헨에서는 3회[8] 의 분데스리가 우승을, 첼시에서는 2007-08 시즌 UCL 준우승 및 2009-10 시즌 PL 우승을 차지하였다.[9] 그리고 독일 대표팀에서는 암흑기에 빠진 대표팀을 이끌고 비록 우승은 못했지만 2002 한일 월드컵 준우승, 2006 독일 월드컵 3위, 유로 2008 준우승이라는 뛰어난 성과를 남겼다.
또한 UEFA 올해의 미드필더에 1회, UEFA 올해의 팀에 1회, 월드컵 올스타팀에 2회, 유로 토너먼트의 팀에 2회, 독일 올해의 축구 선수에 3회 선정되는 등 개인 커리어도 훌륭하다.
2. 선수 경력[편집]
3. 플레이 스타일[편집]
1990년대 후반부터 2000년대 중·후반까지 활약한 선수 가운데 파트리크 비에라, 클라렌스 세이도르프, 지우베르투 시우바, 제 호베르투, 에메르송, 스티븐 제라드와 함께 전술이해도가 뛰어난 선수로 꼽힌다. 말 그대로 만능이다. 그리고 재능 뿐만 아니라 실적 면에서도 뛰어났다.
그의 트레이드 마크는 페널티박스 밖에서의 묵직한 중거리 슛이다. 최고의 중거리 슈터를 꼽으라면 제라드, 스콜스, 램파드와 함께 최일선에 거론되는 인물이다. 또한 190cm 가까이 되는 큰 키를 이용한 헤더능력 역시 당대의 미드필더 중 최강이었다. 국가대표 커리어만 봐도 알겠지만, 98경기에 42골. 웬만한 월드클래스 공격수에 준하는 기록이다. 동독 유스 시스템의 산물답게 왼발로도 좋은 퀄리티의 킥을 구사한다. 수비형 미드필더, 중앙 미드필더, 공격형 미드필더, 윙어 등 모든 미드필더 위치에서 뛸 수 있는 선수. 전성기 때에는 대표팀이든 소속팀이든 그를 중심으로 전술이 짜였다. 괜히 그를 로타어 마테우스의 후계자로 부르는 것이 아니며, 전성기 시절엔 미드필드 플레이어 한정으로 루드 굴리트와 비슷한 포스를 보여준 선수라 보면 된다. 발락의 무시무시한 전성기가 더 오래 갔다면 마테우스, 사비, 지지와 비견되는, 그러니까 역대 최고의 중앙 미드필더 중 한 명이라는 평가를 받았을 것이다.
발락에게는 미드필더들이 갖춰야할 패싱력과 강력한 슈팅력, 단단한 피지컬과 많은 활동량, 팀의 중심이 되는 컨트롤 타워 능력이 있었다. 뛰어난 대인 수비, 태클 실력은 덤. 전성기 시절에는 약점이 없는 선수라고 평가되었으며, 컨디션이 좋은 날에는 발락 혼자만 중원에 세워놔도 상대편 중원을 씹어 삼킬 정도였다. 그는 드리블을 화려하게 하는 선수는 아니었고, 사실 그럴 만큼 민첩하거나 빠르지도 않았다. 하지만 적당한 발재간을 가지고 있어 두명 정도가 압박하면 그것을 탈압박으로 빠져나오는 능력도 어느정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시야가 넓고 판단이 빨라 볼을 끌다가 뺏기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 상대 선수를 제치는 데 힘을 들이지 않고, 다른 선수에게 패스를 내준 다음 자신의 적절한 위치를 찾아 들어간다. 이러한 유형의 선수들은 보통 피지컬적인 면에서 약점을 보이는 경우가 많은데 발락의 경우에는 마치 탱크같은 단단함을 갖춰 밀리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 정말 감독들이 좋아하는 스타일.
카드 수집으로 인한 결장은 프로통산 604경기[10] 중 경고누적으로 7경기, 퇴장으로 1경기 정도로 카드 관리는 괜찮은 편이다. 하지만 발락한테 단점이 있다면 시즌 내내 잔부상이 많았다. 많은 활동량과는 달리 잔부상이 많아 리그에서만 30경기 이상 출전한 경우가 3번[11] 정도 밖에 안된다.
팀의 중심 역할은 물론, 다른 선수를 돕는 위치에서도 충분히 빛이 났다. 예를 들어, 첼시로 이적한 발락은 이전처럼 폭발적인 공격력을 보이거나 스포트라이트의 중심에 선 인물은 아니었지만, 팀 동료인 프랭크 램파드가 제대로 활약할 수 있도록 중심을 잡아 주며 자신이 어느 위치에서든 뛸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였다. 발락의 공격능력이 램파드 못지않다는 것을 생각했을때, 램파드보다 처진 위치에서 그와 균형을 맞추어 뛰라는 감독의 요구를 완벽에 가깝게 실행해 낸 발락은 정말 다재다능하다고 볼 수 있다.
4. 평가[편집]
일반적으로 독일 축구의 최악의 암흑기로는 크게 1990년대 중후반 부터 2000년대 중반까지인데, 미하엘 발락이 절정의 기량이던 시기 같이 독일 축구를 지탱해야할 동료들이 대부분 부진하던 시기였다. 발락에 대한 평가는 과거 올드 독일 축구팬과 바이에른 뮌헨 팬들에겐 그야말로 암흑시대의 한 줄기 희망이나 다름 없었다. 발락의 기량이 절정이던 시절은 레버쿠젠 시절과 바이에른 뮌헨 시절로 보면된다. 첼시 시절엔, 제한된 임무와 더불어 서른 줄이 넘긴 나이로, EPL 무대에서 포스를 발휘하기 힘들었다. 그럼에도 08-09 시즌 기계축구의 중추로 마지막 불꽃을 태우기도 했으며 09-10 시즌에도 서른 경기 이상 출전하는 등, 팀 전력의 중추였다.
발락이 강렬한 임팩트를 보여준 경기는 뭐니뭐니해도 2002년 한일 월드컵 유럽 플레이오프에서의 우크라이나 전, 당시 독일은 우크라이나 원정에서 0-1로 끌려가던 상황에 발락의 동점골로 겨우 무승부를 이끌 수 있었고 2차전인 홈에서도 발락이 두 골을 넣으며 4-1로 우크라이나를 꺾고 월드컵 본선에 진출했다. 만약 발락이 없었더라면 독일 대표팀은 2002 월드컵 본선 진출에 실패할 수도 있었고, 이 경우 E조 톱시드자리는 잉글랜드가 대신 들어갈 수도 있었으며, 잉글랜드가 들어간 F조는 우크라이나가 대신 들어갔을 수도 있었다.
당시의 트렌드는 4-4-2와, 4-4-1-1, 혹은 4-2-3-1[12] 포메이션이 대세를 이루었고, 본래 독일은 4-4-2가 아닌 4-2-3-1 포메이션을 구현하려 했었다. 그리고 그러한 미들진의 열쇠는 플레이메이커에 메멧 숄, 혹은 세비스티안 다이슬러를 두고 더블 볼란치에 발라크과 예레미스, 혹은 프랑코 바우만과 카르스텐 라멜로프[13] 를 두며 중원을 구축하고, 죄우 노이빌레와 슈나이더, 혹은 프링스를 배치하려 했다. 그러나 독일은 타르낫과 보데의 노쇠화와 레흐머와 뵈르메의 부진으로 풀백이 고갈되고, 센터백인 노보트니와 메첼더는 틈만나면 부상을 찍으며 그렇잖아도 불안한 독일 수비진을 더욱 불안하게 만들었다. 그러다 보니 4-2-3-1은 고사하고 4-4-2를 쓰기에도 아뭐병스러운 상황. 이 상황에서 독일이 할 수 있는 건 결국 과거로 돌아가는 것 뿐이였다. 90년대 바이언이 재현한 강력한 선 수비 카운터 어택인 5-4-1 축구까지 구현하며 발악하지만 결국 독일의 이러한 발악 속에 빛을 발휘한 건 미하엘 발락 뿐이였다.
본래 발락은 포백앞을 보호하고, 2차 저지선 역할을 함과 동시에 안정적인 경기조율만 했으면 됐었다. 2선의 메멧 숄이나 다이슬러가 건재하다면 굳이 팀의 코어를 발락에게 맞출 이유가 없지만, 알다시피 숄과 다이슬러는 로시츠키와 하그리브스의 선대라 할 수 있는 유리몸계의 전설. 어쩔 수 없이 팀 전체의 코어를 발락에게 맡길 수밖에 없었고, 4-4-2 포메이션에선 발락의 파트너를 찾기 위해 애를 썼지만, 기대를 모은 제바스티안 켈도 유리몸에, 브레멘의 전성기를 이끈 프랑코 바우만과 파비안 에른스트, 그리고 발락의 후계자라 불렸던 한노 발리티쉬는 국대에선 그야말로 WTF스러운 경기력으로 망했다. 게다가 풀백은 고갈됐었다. 덕분에 프링스는 억지로 라이트백에 배치했으며 게다가 노이빌레와, 슈나이더 역시 기대만큼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고, 주전 공격수 클로제는 이 시기 극심한 슬럼프에 빠지게 된다.
사실 발락이 분데스리가 내에서 일인천하로 군림한 건 아니다. 저 당시 분데스리가에는 프랑크 바우만, 파비안 에른스트, 요앙 미쿠, 팀 보로프스키의 강력한 미들진으로 중무장하여 03-04 시즌 더블을 달성한 베르더 브레멘이라는 강력한 라이벌이 있었고, 마찬가지로 베르바토프, 베른트 슈나이더, 바스튀르크 등이 버티는 레버쿠젠과 이 외에도 코비아쉬빌리, 마르셀루 보르동, 폴센, 하밋 알틴톱, 판데르, 바움요한 등 신구콤비로 무장한 샬케 04도 뮌헨의 독주를 저지할 만큼 강력한 전력을 보유하였다.
당시 독일 대표팀도 적극적인 선수기용으로 난국을 타개하려 애를 먹었으며, 가장 급선무인 것이 발락의 파트너와 고갈된 풀백자원을 찾는 것이였다. 필립 람이라는 걸출한 풀백을 찾는데 성공하지만, 크리스티안 판데르, 파트릭 오우오모엘라, 크리스티안 슐츠, 안드레아스 힌켈 등을 시험했음에도 신통치 않았고, 분데스리가에서 엄청난 모습을 보인 프랑코 바우만, 파비안 에른스트, 페트릭 마이질레, 시몬 치우머 등은 클럽에서와 달리 국대에서 최악의 모습을 보였다. 특히 루마니아전 1-5 대패의 경기에서 루디 푈러는 과감히 발락을 배제한 채, 에른스트와 바우만의 중원조율을 기대했으나, 전반에만 4골이나 먹히면서 그야말로 망했다. 결국 2006년 독일이 전형적인 4-4-2 포메이션이 가다듬어 질 때까지 독일의 모든 팀 코어는 발락에게 몰빵할 수밖에 없었고, 실제 독일 월드컵 개막 직전까지 독일 팬들이 대표팀에게 거는 기대치는 매우 낮았다. 하지만 본선에서 발락과 프링스의 중원 조율이 빛을 발휘하고, 그 동안 불안했던 독일의 포백의 안정화가 맞물려서 4년전 대회보다 경기력면에서 더 좋은 모습을 보이면서 3위로 대회를 마무리 했다.
정리하자면, 암흑기로 접어든 독일 축구에서의 구원자 등장 + 2002 월드컵 예선과 본선에서의 활약 + 그리고 그 포스를 이후에도 계속 선보이는 뛰어난 실력이 발락에 대한 평가가 높은 요인이었고, 이를 기반으로 발락의 전성기 시절 최악의 독일 대표팀을 꾸역꾸역 이끌면서 독일 축구의 암흑기에서도 2002 월드컵 준우승, 2006 월드컵 3위, 유로 2008 준우승 등 데이터적인 면에서 독일 대표팀을 꾸준히 우승후보로 유지시켜 준 난세의 영웅으로 떠오르게 된다.
5. 기록[편집]
5.1. 대회 기록[편집]
- 1. FC 카이저슬라우테른 (1997~1999)
- 분데스리가: 1997-98
- FC 바이에른 뮌헨 (2002~2006)
- 첼시 FC (2006~2010)
- 프리미어 리그: 2009-10
- FA컵: 2006-07, 2008-09, 2009-10
- 풋볼 리그컵: 2006-07
- FA 커뮤니티 실드: 2009
5.2. 개인 수상[편집]
- UEFA 올해의 미드필더: 2001-02
- UEFA 올해의 팀: 2002
- FIFA 월드컵 올스타팀: 2002, 2006
- FIFA 월드컵 도움왕: 2002
- FIFA 컨페더레이션스컵 실버슈: 2005
- UEFA 유로 토너먼트의 팀: 2004, 2008
- 독일 올해의 축구 선수: 2002, 2003, 2005
- 키커 올해의 남자: 2002
- 키커 올해의 미드필더: 2001-02, 2002-03, 2005-06
- 키커 올해의 팀: 2001-02, 2002-03, 2004-05, 2005-06
- 독일 올해의 골: 2008
- 독일 이달의 골: 2002년 9월, 2006년 2월, 2008년 6월, 2009년 3월
- FIFA 100: 2004
- FIFA XI: 2002
- ESM 올해의 팀: 2001-02
- 바이어 레버쿠젠 세기의 스쿼드: 2004
- 독일 축구 명예의 전당: 2020
5.3. 수훈[편집]
- 성 조지 훈장: 2013
5.4. 출전 기록[편집]
6. 여담[편집]
6.1. 콩라인[편집]
[14]
위 사진은 2007-08 시즌 챔피언스 리그 결승전 승부차기에서 존 테리가 결정적인 실축을 한 직후 좌절하는 발락의 모습이다.
뛰어난 선수임에도 불구하고 어째서인지 뛰는 팀마다 준우승을 하는 경우가 굉장히 많아 콩락이라는 불명예스런 별명이 붙어있다. 특히 01-02 시즌 레버쿠젠이 분데스리가 준우승, DFB-포칼 준우승, UEFA 챔피언스 리그 준우승으로 콩레블 달성, 추가로 독일의 2002 한일 월드컵 준우승으로 쿼드러플 러너업이라는 한 시즌 4콩의 위업을 달성한 적이 있다. 심지어 개인 기록도 따지면 리그 득점, 공격 포인트도 2위였기에 6콩이다.
그 외에도 UEFA컵과 유로 등 굵직한 대회에서 모두 준우승을 차지했다는 것을 감안하면 실로 대단한 콩라인. 이후 2008년에도 소속팀 첼시의 프리미어 리그 준우승, 리그 컵 준우승, UEFA 챔피언스 리그 준우승 + 독일의 UEFA 유로 2008 준우승으로 또다시 쿼드러플 러너업을 달성하는 기이하고도 놀라운 업적을 달성했기도 했다. 이벤트성이 있는 커뮤니티 실드까지 포함하면 5콩 기록했다.
그렇다고 해서 우승한 적이 없는 것은 아니다. 바이에른 뮌헨 시절 챔스를 제외하고 리그와 포칼 등 우승컵을 밥먹듯이 들어올렸고, 09-10 시즌 첼시에서 뛰며 프리미어리그, FA컵의 더블을 달성하기도 했다.[15] 그런데 위의 사진에서 보다시피 2002년과 2008년의 4연준 임팩트가 너무 강해서 주목이 덜 된 것 뿐이고[16] , 한창 분데스리가와 첼시에서 날아다닐 때의 챔스와 UEFA컵을 비롯한 유럽 대항전을 한 번도 우승한 적이 없는 것과 독일 대표팀에서 활약했던 시절 국가대항전에서 한 번도 우승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6.2. 첼시 사랑[편집]
레버쿠젠과 뮌헨, 독일 국대에서 빼어난 활약을 펼쳤지만 첼시에 대한 사랑은 남다르다.[17] 아쉽게도 첼시가 바이언을 승부차기끝에 누르고 빅이어를 들었을 때, 발락 본인은 1년 재계약을 박차고 나가 다시 친정팀인 레버쿠젠에 있었기에 첼시의 역사적인 순간을 함께하진 못했다. 첼시에서 함께 뛰었던 월드클래스 선수인 존 테리, 페트르 체흐, 디디에 드록바, 마이클 에시엔, 데쿠, 안드리 셰브첸코 등과 아직도 친분을 유지하고 있다. 첼시에서 감독까지 한 친구는 발락에게 선수들이 훈련하는 모습을 소개하며 토크를 나누기도 했다.
첼시가 16/17 시즌을 우승하자 보인 반응이다. 이쯤 되면 엠버서더 하나 챙겨줘야 한다는 반응.
첼시가 다시 빅이어를 드는데 성공하자 이를 곧바로 축하했다.
첼시 소속으로 5년간 영국 생활을 했기 때문에 영어에 능숙하다.[18] 본인의 이름인 'Michael'을 독일어로는 '미하엘', 영어로는 '마이클로 상황에 따라 유연하게 말한다.
6.3. 여기가 차붐의 나라입니까?[편집]
2002 FIFA 월드컵 한국·일본 당시 발락은 독일 국가대표팀의 일원으로서 토너먼트 16강전부터 준결승까지 한국에서 경기했는데, 한국 입국 직후 가진 인터뷰에서 "여기가 차붐의 나라입니까? 꼭 와 보고 싶었습니다. 그는 나의 우상입니다."라고 말했다.[19][20] 이 인터뷰를 통해 차범근의 위엄이 재확인되었고, 한편으로는 '여기가 XX의 나라입니까?'라는 드립의 시초가 되었다.[21]
“Is this Tscha Bum’s country? I’ve always wanted to come here. Cha is my idol.” (영어)
Ist das das Land von Tscha Bum? Ich wollte immer hierher kommen. Cha ist mein Idol. (파파고: 영어 → 독일어)
2007년 첼시 미국 투어중 수원 삼성과의 친선전에서 차범근과 만난 발락
6.4. 흑역사[편집]
6.4.1. 사생활[편집]
국내팬들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나, 불륜남이다. 바이에른 시절 동료인 크리스티안 렐[22] 의 그녀인 다니엘라 아우마이어와 관계를 가졌던 것으로 알려졌다.
다만 이 사건은 복잡한 게, 렐의 그녀는 원래 슈바인슈타이거의 여친이었지만 렐과 양다리를 걸치다 적발, 이후 렐의 그녀가 되었는데[23] 또 발락과 불륜을 저지른 것이다. 렐은 피해자로 보이지만 또 애매한게, 원래 여자 문제로 좋은 소리 들은 적이 없는 사람이 갑자기 만삭 상태에서 내 여친의 배 속에 있는 게 누군지 모르겠다며 언론에 공표한 것이다.[24]
이 사건으로 인해 발락은 부인[25] 과 별거 상태에 들어갔으며[26] 결국 2012년 말엽 쯤에 이혼했다. 그러나 독일 외 팬덤에선 거의 알려지지 않고 기사도 몇 건 없는 것으로 보아 이혼과정에서 별다른 잡음은 일어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아무튼 현재는 화해했다.
2014년부터 2019년까지 레바논계 영국인 여자친구인 나타샤 타누스와 교제했다. 나타샤는 미모의 금융업계 종사자로 도이체방크와 골드만삭스에서 근무했었다.
2022년 6월 빌트지에 발락이 21세 연하의 모델 소피아 슈나이더한과 교제 중이라는 기사가 실렸다. 슈나이더한은 고인이 된 발락의 아들 에밀리오의 친구로, 장례식장에서 만나서 친분이 생겼다가 관계가 발전하였다고 전해진다.
6.4.2. 과속운전[편집]
레버쿠젠에서 은퇴한 뒤인 2012년 10월 17일, 발락은 스페인 카세레스 주에서 과속운전으로 적발되어 체포됐다. 당시 발락은 제한속도 120km를 한참 넘긴 시속 211km로 차를 몰았다고 한다. 이튿날 즉결심판에 넘겨져 벌금 1만 유로[27] 와 면허정지 2년 처분을 받았지만 발락은 해당 조치를 거부해 재판까지 갔다. 발락은 변호사를 통해 "나는 현재 직업이 없으며 그에 따라 소득도 없다", "유명 축구 선수가 꼭 돈을 많이 버는 건 아니다"[28] 라며 벌금을 1천 유로로 감세해 달라고 했다가 비난과 질타만 받아야 만 했다. 해당 사건은 재산비례벌금제, 엄밀히 따지면 서양의 일수벌금제(Day-Fine)의 예시로서 종종 언급되고 있다.
6.4.3. Pray for Italy[편집]
2002년 월드컵에서 이탈리아 국가 대표팀은 한국에 패하고 16강에서 탈락한다. 같은 대회 4강에서 독일은 발락의 결승골로 한국에 승리를 거두고 결승전에 올랐고, 이탈리아는 자국 대표팀만 만나면 설설 기던 독일이 한국을 격파했기 때문에 상대적 위안을 얻을 수 있었다. 하지만 후술할 사건으로 인해 이탈리아가 독일축구 대표팀, 그리고 발락에 대해 가지는 적대감이 극에 달하게 된다.
아주리 징크스란 고유 명사가 생길 정도로 독일 축구 대표팀은 이탈리아 축구 대표팀만 만나면 제 기량을 발휘하기가 어려웠다. 게다가 2006년 독일 월드컵 4강전에서 이탈리아 축구 대표팀을 맞아 직접 출전한 발락은 팀이 연장 접전 끝에 패하고 이탈리아가 결승전에 올라가는 상황을 직접 겪으면서 이탈리아에 대한 반감을 노골적으로 드러내 왔었다. 그 반감이 극에 달한 것이 2018년 월드컵 유럽 예선이었고 악명 높은 천적이 2018년 월드컵 본선에 나갈 수 없게 되자 매우 통쾌해 했었다. 그 마음을 Pray for Italy[29] 라는 트윗으로 표현했는데, 해당 트윗은 수많은 이탈리아인들에게 크나큰 분노를 안겨주었다. 결국 수많은 이탈리아인들이 분노하고 전세계 축구팬들이 너무 심한거 아니였냐고 글을 달자 발락은 자신의 트윗을 곧바로 지웠다.
하지만 결국 독일이 더 수치스러운 역대급 대참사를 당하자 이탈리아인들이 Pray for Germany[30] , Pray for Ballack[31] 이라며 반격에 나섰다. 또한 자기들이 독일 땅에서 우승을 차지한 사실을 일깨운 건 덤이고.[32]
“궁금하면 “여기서 이탈리아인들의 “반격을 읽어보길 바란다
이탈리아인들의 통쾌함을 나타내주는 글들
“What did you just said?? 👊🎉🎉🎉😂😂Germany worked so hard to qualify in #WC2018 just to be eliminated from #Sweden indeed 😂 You Germans will never learn that first you play, and then you talk 😉 all the defeats against Italy had to teach you something! #KORGER #GermanyOut”
너 뭐라고 말했었지? 독일은 정말 열심히 해서 2018 월드컵에 들어갔지만 스웨덴에게 탈락 당할뻔했었지. 언제나 이탈리아에게 패하면서 뭔가를 가르쳐줄 때까지 너의 독일은 절대로 배우지 못할거야!!
“Months ago u said pray for Italy 😂😂 pray for your fxxxing team now hahahahhahaha #Corea ♥️”
몇달전에 너가 이탈리아를 위해 기도한다고 했는데 너의 빌어먹을 팀을 위해 기도해.
“Yes, you won in the semifinal with them, but not with us in 2006🇮🇹 See you in euro 2020, as always you won't beat us #WORLDCHAMPIONS2006”
그래, 넌 2002년에 한국하고 준결승전에 이겼지만 2006년 우리한테 졌어. 유로 2020 때 또 만나자 너희 독일은 우리를 항상 이길 수 없을거니.
7. 기타[편집]
무신론자이다. 이는 발락이 어린 시절을 국가 무신론의 영향 아래 있었던 공산주의 국가 동독에서 보냈기 때문이다.
한편 이 무신론이 그의 등번호에 영향을 주기도 했다. 그는 커리어 대부분을 13번으로 지냈는데, 인디펜던트 와의 인터뷰에서 해당 비화를 밝혔다. 발락이 레버쿠젠에 입단했을 때 13번 유니폼은 기피대상이었다. 크리스트교에서 13이 갖는 부정적 의미, 그 번호의 전 주인이 바로 독일의 레전드 스트라이커 루디 푈러라는 부담감 때문이었다. 발락은 푈러에 대한 존경의 의미와 자신의 무신론적 철학, 그리고 다른 선수들에 대한 배려[33] 를 담아 13번을 받았다. 그리고 바이에른 뮌헨과 첼시, 그리고 국가대표팀에서까지 그 번호를 사용하다 은퇴했다. 그 후 독일 국대에서는 토마스 뮐러가 이 등번호를 물려받고 남아공 월드컵과 브라질 월드컵에서 맹활약하였다.
우울증으로 자살한 로베르트 엔케의 죽음을 매우 슬퍼했다. 엔케는 발락처럼 동독 태생이었고, 1살 차이인 친한 형동생 관계였다. 발락은 당시 상황을 회고하며 '사람들은 모두 약점을 갖고 있으며, 이를 받아들여야 한다(People have weaknesses, we should accept it.)'라고 엔케의 죽음으로부터 배워야할 점을 언급했다.
미드필더로서 갖춰야 할 6가지 요소로 '리더십', 창조성, 패스 능력, 태클 능력, 체력, 득점력을 꼽았다. 또 각각의 요소에 통달한 선수로서 리더십은 에메르송, 창조성은 지단, 패스는 차비, 태클로는 예레미스, 체력은 에시엔, 득점력은 램파드를 각각 꼽았다. [34]
2010년 남아공 월드컵때 본인은 부상으로 불참하자 필립 람이 대신 주장역할을 하였는데 여전히 본인이 국가대표 주장이라고 밝혔다. 출처
현지 시각 2021년 8월 5일, 미하엘 발락의 둘째 아들인 '에밀리오 발락'이 18세의 나이에 교통사고로 요절해 참척을 겪고 말았다.
8. 미하엘 발락에 대한 말, 말, 말[편집]
발락은 훌륭한 리더이다. 그는 진정한 캡틴이며, 모든 사람들에게 인정받았고, 결정적인 상황에 관여할 수 있다.
2002년 월드컵 이후 팀의 성공에는 발락의 몫이 크다. 그는 한 시대에 남았고, 주장으로서 항상 팀을 위해 헌신했다.[35]
발락은 중요하고, 또 위대한 선수다. 그는 엄청난 기술을 가지고 있으며, 최고의 선수들 중 하나다.
동독 태생인 발락이 독일 대표팀의 주장이 됐고, 이를 통해 독일은 하나가 될 수 있었다.
발락의 체취(Body Odor)가 정말로 지독해서 그 주변에 붙어있질 못했을 거다. 레몬이나 데오드란트를 더 써야 했는데, 그것도 (수비수가 못 다가오게 하려는) 전략이었던 걸 누가 알았겠나![36]
9. 어록[편집]
“You can always go out early with a bad team, but not with a team like this one!! Honest assessment must start !!!”
나쁜 팀이었다면 빠르게 짐싸는게 맞지만, 이 팀으로는 용납할 수 없다!! 여과없는 평가가 시작되어야 한다!!!
“Leadership? Personality? Mentality?”
통솔력? 개성? 사고?[37]
2018년 6월 27일, 2018 FIFA 월드컵 러시아 F조 〈대한민국 vs 독일〉 경기 후 발락의 트윗#
“요하힘 뢰프 감독은 2018 러시아 월드컵 이후 자진 사퇴를 했어야 했다.”[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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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9 UEFA 네이션스 리그에서 독일이 리그B로 강등당한 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