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하엘 슈마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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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하엘 슈마허의 우승 경력



2007년~2012년 레이스 오브 챔피언스 네이션스 컵 우승팀
파일:Race of Champions logo.jpg
2006 - 생드니
파일:핀란드 국기.svg 핀란드
헤이키 코발라이넨
마르쿠스 그뢴홀름

2007 - 런던 ~ 2012 - 방콕
파일:독일 국기.svg 독일
미하엘 슈마허
제바스티안 페텔
[1]
[2]
2014 - 부시 파크
파일:덴마크 국기.svg파일:노르웨이 국기.svg 노르
톰 크리스텐센
페터 솔베르그



독일의 前 F1 드라이버


파일:미하엘 슈마허 프사1.jpg

이름
미하엘 슈마허
Michael Schumacher
출생
1969년 1월 3일 (55세)
{{{-2 독일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 주 쾰른 현
라인에르프트크라이스 군 휘르트[1]}}}
국적
독일 파일:독일 국기.svg
신체
키 174cm[2]
소속
드라이버
조던 그랑프리 (1991)
베네통 포뮬러 (1991~1995)
스쿠데리아 페라리 말보로 (1996~2006)
메르세데스 GP (2010~2012)
기타
스쿠데리아 페라리 (2007 / 어드바이저)
가족

아내 코리나 베슈
딸 지나 마리아 슈마허
아들 믹 슈마허
동생 랄프 슈마허
1. 개요
3. 평가
3.1. 그의 사기 캐릭터 전설
4. 가족
5. 여담
6. 다큐멘터리
7. 커리어
8. 연도별 성적



1. 개요[편집]


파일:DYbR1YeWAAIw2FQ.jpg
7 VOLTE CAMPIONE DEL MONDO[3]
SIMPLY THE BEST

독일 출신의 전 레이싱 드라이버. 별명은 붉은 남작.(The Red Baron)


2. 선수 경력[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미하엘 슈마허/선수 경력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3. 평가[편집]


현세에 실존했던 먼치킨 인물을 꼽자면 꼭 한 번씩은 들어간다. 한때 수많은 드라이버들이 아일톤 세나를 보며 드라이버의 꿈을 키웠듯이 현재 활동 중인 드라이버들은 슈마허를 보고 자란 드라이버들이다. 따라서 많은 드라이버들이 올 타임 레전드를 뽑으라면 세나와 함께 양대산맥을 이루는 드라이버다.[4]

단순히 차만 잘 모는 것이 아니라 전략을 이해하는 높은 스포츠 지능[5]을 가졌으며, 피드백에 굉장히 신경 쓰는 모습을 보이고, 관찰력도 매우 뛰어나며[6] 차량 개발에도 직접적인 관여를 했다. 특히 사람들이 입모아 말하는 슈마허의 숨겨진 강점은 바로 팀 메이킹과 리더십. 자신을 중심으로 팀을 빌드업하는 것으로 크루들을 단결하며 사기를 높이고 결국 이것이 성공을 좌우한다는 것이다. 실제로 슈마허는 1994, 1995 시즌에 월드 챔피언을 연속으로 차지한 후, 1990년대 초반부터 중위권으로 전락해버린 페라리에 자의로 입단해 차량 개발에 직접적으로 관여하며 페라리를 다시 상위권 팀으로 도약시키는 데 중추적인 역할을 하였다.[7]

3.1. 그의 사기 캐릭터 전설[편집]


  • 첫 우승한 레이스는 1992년 12번째 레이스였던 벨기에 GP. 1년 전 F1 데뷔전을 치렀던 스파 서킷에서 슈마허는 감격적인 첫 우승을 기록한다. 비가 내리던 상황에서 30랩 째에서 트랙을 벗어나 타이어에 이물질이 묻어 그립이 떨어지자 레인 타이어에서 슬릭 타이어로 타이어를 교환했는데, 타이밍 좋게 비가 그쳐 선두 자리를 꿰차며 여유있는 우승을 차지한다.

  • 너무나 유명한 1994년 스페인 그랑프리. 경기가 절반이 채 지나지 않았을 때 5단 기어 외에는 모든 기어가 작동이 안 되는 치명적인 변속기 트러블이 발생하였다. 그런데 이 상태로 30랩 이상을 달려서 2등으로 완주해 포디움에 섰다. 5단만으로도 피트인은 물론, 저속코너에서 재가속까지 하는데 시동 한 번 꺼트리지 않고 페이스를 냈다는 이야기다.[8][9]

  • 슈마허는 전성기 동안 수많은 명경기를 연출했지만, 그 중에서도 단연 압권은 1998년 헝가리 그랑프리다. 당시 맥라렌 메르세데스맥라렌 MP4/13제바스티안 페텔이 2010년부터 2013년까지 4년간 독재하던 시절의 레드불 르노, 루이스 해밀턴이 7번째 챔피언을 달성하던 시기의 메르세데스만큼이나 말도 안되는 성능을 보여줬고, 페라리의 F300은 간신히 맥라렌 뒤 꽁무니를 쫓아가는 수준이었다. 그래서 당시 퀄리파잉을 보면 맥라렌 듀오가 1-2위를 차지하고 슈마허가 3위를 기록하는 경우가 상당히 많았다. 이 경기도 마찬가지였고, 레이스 중반까지 슈마허는 3위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벽 없는 모나코"로 불릴 만큼 악명 높은 헝가로링의 추월 난이도 특성을 이용해 당시 페라리의 테크니컬 디렉터였던 로스 브런은 유명한 3 스톱 작전을 시행한다. 일부러 두 번째 피트스탑을 짧게 가져가고, 상대적으로 가벼운 차량으로 페이스를 확 끌어올리며 순위를 올린 후, 세 번째 피트 스톱을 진행한 뒤 트랙에 선두로 복귀하는 방법이다. 그리고 놀랍게도 슈마허는 2번째 피트스탑 직후 18랩동안 맥라렌 듀오보다 25초나 더 빨리 주행하면서[10] 선두 자리를 꿰찼다.[11] 마지막 피트스탑을 하고도 미카 해키넨과 쿨사드를 유유히 앞서면서 '재급유 시대'의 기념비적인 경기를 우승으로 장식했다. 로스 브런의 탁월한 작전과 슈마허의 놀라운 작전 수행능력이 빛을 발했던 경기다.[12]

  • 2002년 시즌에는 총 17번의 레이스가 있었는데 슈마허는 17번 모두 포디움에 섰다. 당연히 모든 레이스 완주.[13] 그 중 우승이 11회. 두 말할 필요도 없이 F1 역사상 가장 위대한 시즌이라고 불린다.

  • 2004년 프랑스 그랑프리에선 멀쩡한 사람은 절대 안 쓸 4스탑 전략을 사용하고 우승했다. 상술한 1998 헝가리 그랑프리와 비슷한 원리였다. 당시 프랑스 그랑프리가 열리는 서킷은 매그니 쿠어 서킷이였는데, 이 서킷 역시 헝가로링 못지 않게 높은 추월 난이도와, 저단 재가속이 매우 중요한 저속 코너들이 많은 서킷이였다. 르노의 R24는 페라리 F2004보다 뒤쪽에 치중된 무게 배분과 페라리보다 회전수는 낮지만 토크가 좋은 엔진이 매그니 쿠어 서킷에서 두각을 나타내게 했다. 이러한 점은 레이스 스타트 상황에서도 이점으로 작용했기 때문에[14] 추월 난이도가 매우 높은 매그니 쿠어 서킷에서 이러한 작전을 사용한 것이다.

  • 2003년 오스트리아 그랑프리에서는 피트 스톱 주유 중에 차에 불이 붙었다. 불길이 순식간에 터져서 놀랄 수 있는 상황이었는데 슈마허는 가만히 있고 소화기로 불을 끄자마자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바로 출발했으며 이 소동으로 인하여 약 15-20초 정도의 타임로스가 있었지만, 그날 결과는 우승했다.[15]

  • 2003년 캐나다 GP에서는 브레이크 고장으로 경기 대부분을 오로지 브레이크 없이 기어 조작을 이용한 엔진 브레이킹만으로 우승을 했다. 질 빌르너브 서킷 자체가 브레이크를 많이 써야 하는 곳임을 생각하면 굉장히 놀라운 결과였다.

  • 2006년 브라질 그랑프리. 은퇴를 선언하고 마지막 레이스였기 때문에 엄청난 관심을 받았던 대회였다. 위에도 적혀있듯이 근성의 레이스였으며 챔피언십 리더 페르난도 알론소와는 포인트 10점 차로 슈마허가 우승, 알론소가 리타이어해야만 동점이 되고 우승 횟수에서 앞서는 슈마허가 챔피언이 되는 산술적인 상황. 허나 전날 예선 Q3에서 기어박스 트러블로 예선 10위에 그친 데 반해 알론소는 2위를 차지했다. 사실상 챔피언은 물 건너간 셈이었다..[16] 그러나 슈마허는 10위에서 출발해 레이스 초반 계속된 추월을 거듭하던 중 6랩 1번 코너에서 슈마허의 왼쪽 뒷바퀴와 지안카를로 피지켈라의 프론트 윙이 접촉해 펑처가 나고 만다.

파일:racefansdotnet-21-10-22-00-15-17-10.jpg
너덜거리는 타이어로 리타이어를 해야 정상일 상태에서 억지로 피트인을 하고는 꼴찌로 내려앉았는데 거기서부터 형 왔다 쇼가 시작되었다. 레이스 중반부 두번째 피트스탑을 한 후[17] 바로 다음 랩에 패스티스트 랩을 찍었다.[18] 레이스 종료 직후 멈춰선 슈마허의 차량을 카메라가 잡아주었는데, 걸레를 넘어서 휠밖에 남지 않았다고 봐도 좋았을 정도였다. 많은 이들을 뭉클하게 만들었었다. 피지켈라와의 접촉으로 인한 피트스탑 후 트랙에 복귀했을 때는 백마커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최종 순위는 4위를 기록했다.


4. 가족[편집]


  • 2003년 이몰라 서킷의 산마리노 그랑프리를 앞두고 어머니가 돌아가신 일이 있었다. 당시 슈마허 형제는 그랑프리 출전을 두고 고심을 했지만 결국 이몰라 그랑프리에 출전 후 우승을 했다. 레이스가 끝나고 파크 파르메에 차를 세우고 조용히 흐느끼는 슈마허의 모습은 모든 F1 팬들을 울렸었다.

  • 같은 직업을 가지고 있었던 동생 랄프 슈마허가 있다. 형과의 비교만 아니면 제법 우수한 드라이버였지만, 넘사벽 커리어를 가진 친형에게 묻힌 감이 없지않아 있다.

  • 1995년 부인 콜린느와 결혼해 딸 마리아와 아들 믹을 낳았다.

  • 아들 이 독일 F4[19] 데뷔전에서 우승을 차지했다.[20] 그리고 F4 시리즈 챔피언을 차지, 2017년부터 유로피언 F3에 출전한 믹은 결국 F3 참가 2년 만에 2018년 F3 유럽 챔피언십에서도 우승을 차지하였다. 2019년부터는 F2에 진출하여 준수한 성적을 내던 중,[21] 2020년 12월 6일, 2020년 F2 챔피언에 등극하는 데 성공하였다. F3, F2 모두 첫 해에는 부진하였지만 둘다 이듬해에 챔피언을 달성하였다는 점이 인상적이었으며 2021시즌 믹이 하스의 시트를 얻어 F1에 데뷔했고, 이듬해인 2022시즌까지 하스 소속으로 F1에 참가했다. 2021 시즌엔 팀 자체가 툭하면 19, 20위를 맞는 최하위권 팀이 되어버려 두각은 나타내지 못하였다. 2022시즌에는 팀의 상황이 좀 나아졌으나 믹의 잦은 사고 유발로 팀 재정에까지 악영향을 끼치며 좋지 않은 모습을 보여주다가 결국 2023시즌에는 정규 시트를 잃고 메르세데스의 리저브 드라이버로 전락하였다. 넬슨 피케 주니어, 니콜라스 프로스트와 비슷하게 아버지의 재능에는 미치지 못함이 드러난 셈이다.

  • 딸 지나 슈마허는 승마 선수로 데뷔하였는데, 2021년 11월 11일 아버지의 페라리에서의 업적을 기리는 뜻의 퍼포먼스를 선보였다. 공교롭게도 페라리의 상징도 앞발을 든 말이다. # 자신은 드라이버로, 말은 F1 레이스 카로 분장시키고 피트 스탑을 재현하였다.


5. 여담[편집]


  • 진성 축빠인데다가 고향이 쾰른인지라 1. FC 쾰른을 응원하였다. 실제로 2002년에 쾰른의 회원이 되어 재정적으로도 후원을 하였다.

  • 일반적으로 운전 잘하는 사람의 대명사처럼 쓰인다.

  • 드라이빙 스타일 자체는 매우 스무스하다. 하지만 1990년대에 배틀할 당시 고의충돌 의혹으로 인해 상당히 거친 주행을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고의충돌 의혹이 몇 가지 있는 점을 제외하면 대체적으로 부드럽다. 스티어링을 자주 조작하면 타임로스가 일어난다고 생각하는 스타일의 주행이다.

  • 집중력이 굉장히 좋은 편이다. 특히 재급유 시대[22]에 전성기를 보낸 만큼 연료 적재량이 많이 소모되어 차량이 가벼워진 상태에서 급격히 페이스를 끌어올리며 하위 드라이버와의 격차를 벌리거나 상위 드라이버를 따라잡는 일이 많았다. 특히 앞서가는 드라이버보다 핏스탑을 한 번 더 하는 대신 가벼운 차량으로 패스티스트 랩을 경신하며 핏스탑 작전으로 추월하거나[23] 핏스탑 횟수는 동일하게 가져가되 핏스탑 즈음해서 페이스를 끌어올려 순위를 역전시키는 경우[24]가 꽤 많았다. 다만 타이어의 마모가 타 드라이버들보다 약간 심한 편인데, 슈마허의 장점은 바로 그러한 부분까지도 자신의 실력으로 커버한다는 점이다. 2008년에 타이어 관리 능력이 부족한 편이였던 루이스 해밀턴이 슈마허의 이런 스타일을 몇 번 따라하여 핏스탑을 한 번 더 가져가는 방식을 종종 취했었으나 이 방식으로 우승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이런 점에서 '재급유 시대'에 가장 최적화된 드라이버는 슈마허 뿐이였다고 봐도 무방하다. 다만 은퇴 후 복귀한 10~12년 동안엔 재급유 금지, 폭이 좁아진 프론트 타이어에 대한 적응 부족, 무엇보다 나이로 인한 실력 감퇴로 인해 자신의 본 모습을 전혀 보여주지 못 했다. 특히 경기가 진행될수록 랩 타임이 계속 떨어져 노화로 인한 집중력 부족이 상당히 심해진 것으로 보였다.[25]

  • 시속 360km/h의 속도로 주행하면서 경쟁 드라이버들의 주행과 전광판에 뜨는 랩 타임 기록을 동시에 볼 수 있을 정도의 뛰어난 동체 시력을 지녔다고 한다. 그 정도의 고속 주행에서는 시야각이 크게 좁아지는데도 저런 짓이 가능하다는 말이다.

  • 그의 모습을 본뜬 레고 미니 피규어가 레고 레이서 시리즈 8144, 8389, 8672 제품으로 출시된 적이 있었다.

  • 일본의 애니메이션 신세기 GPX 사이버 포뮬러의 등장인물인 나이트 슈마허의 캐릭터 모티브다.[26] 물론 혼자 포뮬러 1의 각종 기록들을 갈아치운 실제 슈마허가 더 사기 캐릭터 레벨. 당시 애니메이션 제작을 위해 자료 수집차 F3 서킷을 방문한 제작진들이 그 날 인상적인 주행을 보여준 드라이버를 보고 인상에 깊게 남아서 이름을 따왔다고 하는데, 그게 바로 미하엘 슈마허였다고. 사이버 포뮬러 TV & 더블원이 나온 1991~1992년 즈음에 미하엘 슈마허는 F3에서 대단한 활약을 선보여 F1으로 승격해 시즌 12위와 3위를 차지한 매우 유망한 신인 정도의 취급이었는데, 사실 TV판의 슈마허도 강자로 취급되긴 했지만 '어? 저 고글 쓴 드라이버 누구지? → 님 좀 짱인듯' 정도의 취급이라 이러한 묘사도 딱히 틀린 것은 아니다. 어쨌든 제작진들도 슈마허의 F1 데뷔가 예상보다 훨씬 빨리 이루어진 것에는 놀랐다고 전해진다.[27] 만화보다 더 만화 같은 일을 해냈다.


  • 전설적인 F1 드라이버 아이르통 세나를 제외하면 분야가 약간 다르긴 하지만 WEC 2회 우승자 재키 익스나 티모 베른하르트, 그리고 WRC를 9년 연속(2004~2012)으로 제패한 세바스티앙 로브[28]가 간접적인 비교대상으로나 가능할 정도다.

  • 이렇게 먼치킨이라서 생긴 문제점이 있는데, 많은 경기의 우승을 독점하고 나서 사람들로부터 F1 경기가 너무 재미가 없어졌다는 평을 듣게 됐다는 점이다. 박진감 넘치는 경기를 해야하는데도 불구하고 항상 2위부터 꼴찌까지만 우왕좌왕 하는 것 때문에 개최주가 500만 달러의 손실을 입은 것이다. 항상 같은 인물이 1등만 하니까 오히려 개최하는 입장에서는 독이 된 셈이다.

이는 농담으로 넘어가기 힘든 점이 실제로 슈마허 개인의 인기에 의존하던 F1은 슈마허가 은퇴하면서 굉장히 큰 위기를 맞이한 시기가 있었다. 결국 팬들을 되찾기 위해 각종 규정을 변경하면서 차의 출력을 올려 인기는 회복했지만, 그에 비례해서 차의 개발비 또한 올라갔기 때문에 많은 F1 팀들이 이 시기에 F1을 떠나야 했다.

  • 활동 내내 상당한 패션 테러리스트로 유명했다. 할리 데이비슨 바이크와 미국 서부극 스타일의 팬이기도 했는데, 다른 사람들이 볼 때 영 본인과 잘 어울리는 스타일은 아니었다는 평이다. 베네통의 프랜차이즈 스타였다는 것을 생각하면 상당히 아이러니한 사실이다.

  • 2010년에 제바스티안 페텔과 함께 처음으로 방한한 적이 있다.

  • 비공식적으로 독일에서 가장 빠른 총알택시 기사가 된 적이 있다. 2007년 독일에 갈 일이 있어 일을 보고 비행기를 타러 택시를 타고 공항에 가는데, 비행 시간에 늦을 것 같자 운전사와 교대하고 자신이 직접 운전했다고 한다. 최고 속도가 시속 163km였다고 한다.#

  • || 파일:070F2AEB-972A-4013-AAB9-18B0F021858F.png ||



2013년에는 스키 사고를 당해 혼수 상태에 빠져 의식을 잃자 슈마허의 마지막 소속 팀이였던 메르세데스 F1 팀이 그를 응원하기 위해 2014년 W05부터 2016년 W07까지 #KeepFightingMichael 문구를 부착하였다. 2017년부터는 메르세데스에서 앞으로의 자유로운 메시지 사용을 위해 부착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6. 다큐멘터리[편집]


50세 생일을 맞아 그의 전기 영화인 '슈마허'가 발표될 예정이었으나 제작 과정에서 개봉이 연기되었다.

이후 2021년 9월 15일에 넷플릭스 독점 공개로 스트리밍되는 것이 확정되었다. 아들이 열심히 자기 인스타에 홍보하였다.

7. 커리어[편집]


출전 횟수
308경기
월드 챔피언
7회[29] (1994, 1995, 2000, 2001, 2002, 2003, 2004)
그랑프리 우승
91회[30]
포디움
155회[31]
폴 포지션
68회[32]
패스티스트 랩
77회[33]
첫 경기
1991년 벨기에 그랑프리
첫 그랑프리 우승
1992년 벨기에 그랑프리
마지막 그랑프리 우승
2006년 중국 그랑프리
마지막 경기
2012년 브라질 그랑프리


8. 연도별 성적[편집]


시즌
시리즈

경기
우승
폴포지션
패스티스트 랩
포디움
포인트
순위
1988
유로피언 포뮬러 포드 1600
유프라 레이싱
4
1
1
0
3
50
2위
독일 포뮬러 포드 1600
7
3
0
0
5
124
6위
포뮬러 쾨닉
회커 스포트웨건서비스
10
9
1
1
10
192
1위
1989
독일 포뮬러 3
WTS 레이싱
12
2
2
0
7
163
3위
유로피언 포뮬러 3 컵
1
0
0
0
0
-
NC
마카오 그랑프리
1
0
0
0
0
-
NC
1990
월드 스포츠카 챔피언십
팀 자우버 메르세데스
3
1
0
1
3
21
5위
독일 포뮬러 3
WTS 레이싱
11
5
6
4
7
148
1위
유로피언 포뮬러 3 컵
1
0
1
1
0
-
NC
마카오 그랑프리
1
1
0
0
1
-
1위
DTM
HWA AG
1
0
0
0
0
0
NC
1991
월드 스포츠카 챔피언십
팀 자우버 메르세데스
8
1
0
2
2
43
9위
DTM
작스피드 레이싱
4
0
0
0
0
0
NC
일본 포뮬러 3000
팀 르망
1
0
0
0
1
6
12위
포뮬러 1
팀 7UP 조던
1
0
0
0
0
4
14위
베네통 포뮬러
5
0
0
0
0
1992
16
1
0
2
8
53
3위
1993
16
1
0
5
9
52
4위
1994
14
8
6
8
10
92
1위
1995
17
9
4
8
11
102
1위
1996
스쿠데리아 페라리
16
3
4
2
8
59
3위
1997
17
5
3
3
8
78
실격
1998
16
6
3
6
11
86
2위
1999
10
2
3
5
6
44
5위
2000
17
9
9
2
12
108
1위
2001
17
9
11
3
14
123
1위
2002
17
11
7
7
17
144
1위
2003
16
6
5
5
8
93
1위
2004
18
13
8
10
15
148
1위
2005
19
1
1
3
5
62
3위
2006
18
7
4
7
12
121
2위
2010
메르세데스 GP
19
0
0
0
0
72
9위
2011
19
0
0
0
0
76
8위
2012
20
0
0
1
1
49
13위


9. 논란 및 사건사고[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미하엘 슈마허/논란 및 사건사고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1] 쾰른으로부터 남서쪽으로 6km 정도 떨어져 있는 마을이다.[2] 이 정보가 확실하지는 않다. 174cm로 알려진 루이스 해밀턴보다 큰 모습을 보였고, 176cm로 알려졌던 페텔, 세나와 비슷한 모습을 보였다. 아무래도 오래전에 측정한 기록에, 그 이후로 업데이트가 되지 않은 모양이다.[3] 이탈리아어로 "7회 세계 챔피언". 개인 통산 7번째 월드 챔피언을 확정지은 2004 벨기에 그랑프리에서 촬영되었다.[4] 슈미를 넘버원으로 치는 대표적인 예는 바로 동향 후배인 제바스티안 페텔 있다.[5] 이게 굉장히 중요한 것이, 당시 전략 책임자인 로스 브런이 내놓은 작전 중 많은 것이 모 아니면 도인 경우가 많았다.[6] 한 경기에서 서킷의 나머지 부분에서는 흠 잡을 데 없는 기록을 보였지만 마지막 섹터에서 팀메이트인 에디 어바인보다 느린 기록이 나오자 방법을 강구하기 위해 혼자 머리를 싸매며 끙끙거렸다고 한다. 결국 어느샌가 어바인의 주행을 정확히 카피해 완벽한 주행을 선보였다고 한다.[7] 그러나 철저하게 슈마허를 위주로 팀이 운영되었다보니 당시 페라리의 세컨드 드라이버였던 루벤스 바리첼로는 이래저래 고생을 많이 했었다.[8] 참고로 1991년 브라질 GP 당시 아일톤 세나는 6단 기어만 작동하고 나머지는 문제가 생긴 상황에서 순전히 6단 기어만으로 남은 구간을 완주했다. 그나마 당시 세나는 6~7바퀴 남았으니 망정이지, 슈마허는 정말 최악이었다.[9] 당시 슈마허는 개막전인 브라질 GP의 우승을 시작으로 파죽지세의 4연승을 기록하고 있었다. 만약에 스페인 GP에서 기어박스 트러블이 발생하지 않았다면, 슈마허는 F1 역사상 전무후무한 개막전부터의 7연승을 기록했을지도 모른다(뒤이은 캐나다, 프랑스 GP에서도 우승을 차지했다).[10] 랩당 1.3초. 페라리의 작전을 본 맥라렌은 당시 2위로 달리고 있던 데이비드 쿨싸드를 불러들였지만 결국 순위를 빼았겼다.[11] F1에서 랩당 1초 정도가 차이가 난다는 것은 거의 토끼와 거북이의 경주만큼이나 절망스러운 간격이다.[12] 이런 패턴으로 슈마허가 우승한 경기는 베네통 시절부터 있었는데 94년 프랑스 GP-유럽 GP, 95년 태평양 GP, 99년 산 마리노 GP 등이 있다. 과거 재급유가 허용되던 시절에 루이스 해밀턴이 이를 따라한 적이 있었으나 한번도 우승에 성공한 적은 없었다. 오로지 슈마허만이 가능했던 일이다.[13] 그는 완주를 누구보다 중요하게 생각했던 드라이버다. 일반적인 생각과는 다르게 모터스포츠에서는 완주라는 것이 쉽지 않다. 아무리 드라이버가 뛰어나도 차가 말썽을 부릴 수도 있고, 차가 좋아도 피트스탑에서 문제가 생길 수도 있고, 여기까지 극복을 하더라도 오버페이스로 주행하는 다른 드라이버와 충돌을 할 수도 있다.[14] 르노는 이 프랑스 그랑프리 외에도 폭발적인 스타트 장면을 자주 보여준 바 있다.[15] 퀄리파잉에서는 탑3 팀의 기록이 1초 내로 모인다. 15초 차이면 이미 우승은 물 건너갔다고 봐도 무방한데 시간을 씹어먹었다고 밖에는 설명이 불가능하다.[16] 이는 바로 전 라운드였던 일본 그랑프리에서 슈마허가 엔진 블로우로 인해 시즌의 판도가 해당 경기에서 우승한 알론소에게 매우 유리하게 뒤바뀌었기 때문이다.[17] 이때 경기 끝까지 주행할 수 있을 양의 연료를 주입했다.[18] 연료통이 가득 찬 상태에선 차량의 무게가 무겁기 때문에 패스티스트 랩을 찍기 어렵다.[19] F1을 지망하는 어린 드라이버들을 위한 레이스 카테고리이다. 이 시리즈에는 후견인 제도가 있어서 멘토 역할을 하도록 되어 있는데, 올해 독일 시리즈에는 슈마허의 멘티였던 제바스티안 페텔이 지정되어 있다. 페텔은 이와 관련한 인터뷰를 하며 믹과 미하엘을 언급했다고 한다.[20] 하지만 믹은 아버지의 후광으로 인한 시선이 워낙 부담스러웠는지, 자신의 레이싱 커리어 초반엔 어머니의 성인 Bestch를 쓴 적이 있다.[21] F2에서의 소속 팀은 프레마 레이싱. 중요한 건 프레마 레이싱은 페라리 소속 팀이다.[22] 1994~2009년. 슈마허는 2006년까지 활약.[23] 대표적으로 1994년 프랑스-유럽 GP, 1995년 태평양 GP, 1998년 헝가리 GP, 1999년 산 마리노 GP, 2004년 프랑스 GP[24] 슈마허의 우승 경기 중 절반 정도가 이에 해당할 정도인데 대표적인 예로 00년 산 마리노 GP, 06년 중국 GP 등이 있다[25] 실제로 노화로 인한 집중력 저하는 노장 드라이버들에게 꽤나 흔한일이다. 최근의 사례로는 키미 라이코넨이 페라리 2기때 가장 지적받았던 부분으로 롱런 페이스에서 팀메이트 제바스티안 페텔에게 현저히 밀린다는 점이 있었을 정도다.[26] 나이트 슈마허는 Knight Shoemach로 표기해서 실제 미하엘 슈마허와는 스펠링이 약간 다르다.[27] 이를 리스펙트 하는 차원에서 TVA 극후반 나이트 슈마허가 속한 팀을 당시 진짜 슈마허처럼 베네통으로 설정했으며, 카멜 컬러의 베네통 레이싱 슈트를 착용한 모습도 나온다.[28] 로브는 9년 연속으로 우승하다가 이젠 의욕이 떨어졌는지 2013년부턴 스팟 참전했다. 우승 횟수로나 연속 우승 기록으로나 슈마허 그 이상. 슈마허가 서킷의 제왕이라면 이쪽은 서킷을 제외한 모든 도로의 제왕이라고 불릴 정도다.[29] 루이스 해밀턴과 역대 1위.[30] 역대 2위. 1위는 103회를 기록한 루이스 해밀턴.[31] 역대 2위, 1위는 191회를 기록한 루이스 해밀턴.[32] 역대 2위, 1위는 103회를 기록한 루이스 해밀턴.[33] 역대 1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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