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하엘 슈마허/선수 경력

덤프버전 :

1. 개요
2. 유소년 시절
3. 조던 그랑프리
4. 베네통 포뮬러
4.1. 1991 시즌
4.2. 1992 시즌
4.3. 1993 시즌
4.4. 1994 시즌
4.5. 1995 시즌
5. 스쿠데리아 페라리
5.1. 1996 시즌
5.2. 1997 시즌
5.3. 1998 시즌
5.4. 1999 시즌
5.5. 2000 시즌
5.6. 2001 시즌
5.7. 2002 시즌
5.8. 2003 시즌
5.9. 2004 시즌
5.10. 2005 시즌
5.11. 2006 시즌
6. 1차 은퇴 이후
7. 은퇴 번복, 메르세데스 GP로 F1 복귀
7.1. 2010 시즌
7.2. 2011 시즌
7.3. 2012 시즌
8. 기록
8.1. 슈마허의 서킷 별 우승 목록



1. 개요[편집]


미하엘 슈마허의 선수 경력을 정리한 문서.


2. 유소년 시절[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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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다른 애들이 쓰다가 쓰레기통에 버린 타이어들을 다시 모아서 그걸 가지고 카트를 탔다. 그 애들은 이탈리아에서 타이어를 사다 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들보다 빨랐고, 그 애들은 내 모습을 보면서 어리둥절했다."


무려 4세 때 아버지가 만들어준 카트[1]에 탄 것을 시작으로 일찌감치 레이싱의 재능에 눈을 뜨고는 1983년 독일의 카트 경기 라이선스[2]를 획득하고는 1984년 독일 내 카트 챔피언쉽에서 우승한 것을 시작으로 1987년에는 유럽 카트 챔피언이 되었고 1988년에는 포뮬러 포드와 포뮬러 쾨니히[3]에 진출해 2위와 챔피언을 하나씩, 1989년에는 독일 포뮬러 3로 진출해 3위, 이듬해인 1990년에 우승. 1991년에는 포뮬러 1에 진출하는 쾌속진격을 보인다. 우승을 못한 해의 경우도 실은 이 레이스 저 레이스 문어발식으로 출전해 출전한 횟수가 적은 것들이 대다수.


3. 조던 그랑프리[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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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Michael Schumacher 1991 Jordan.jpg
F1 데뷔 이전까지 자우버-메르세데스의 소속으로 스포츠카 내구 레이스에 참가하고 있던 1991년, 당시 조던의 드라이버였던 베르트랑 가초[4]가 징역형을 선고받아 이탈함으로써 테스트 드라이브에서 인상적인 모습을 보였던 슈마허는, 조던이 자우버에게 위약금 15만 달러를 지불하는 조건으로 슈마허를 벨기에 그랑프리에서 F1에 데뷔시키는 데 성공한다. 스파-프랑코샹 서킷을 실제로 달려본 경험이 없던 슈마허는 자신의 접이식 자전거로 트랙을 주행하며 레이아웃을 익혔고, 퀄리파잉에서 7위를 차지하며 관계자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이는 조던의 1991 시즌 최고의 퀄리파잉 성적이였으며, 그의 팀 메이트 안드레아 데 체사리스를 능가했다. 독일 언론들은 "스테판 벨로프 이후 최고의 재능"이라며 극찬했다. 비록 레이스에서는 클러치 고장으로 인해 첫 랩에 리타이어했지만, 패독에 좋은 인상을 남긴 데뷔전이였다.


4. 베네통 포뮬러[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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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Michael Schumacher 1995 Benetton.jpg


4.1. 1991 시즌[편집]


1991 벨기에 그랑프리에서 인상적인 데뷔전을 치룬 슈마허는 나머지 1991 시즌을 보낼 팀으로 베네통을 선택한다. 조던은 이에 대해 가처분 신청을 했지만 슈마허와의 최종적 계약 절차가 진행되지 않았기 때문에 기각되었다. 남은 1991 시즌 6개의 레이스 중 4개의 레이스에서 포인트를 획득했으며, 그 중 최고의 성적은 이탈리아 그랑프리에서의 5위였다. 이는 그의 팀 메이트이자 3회 월드 챔피언인 넬슨 피케보다 앞선 순위였다.


4.2. 1992 시즌[편집]


1992 시즌은 차량의 지상고를 유동적으로 제어하는 액티브 서스펜션을 비롯한 각종 전자장비로 무장한 윌리엄스 FW14B를 모는 나이젤 만셀과 리카르도 파트레제가 시즌을 지배하였다. 하지만 슈마허는 멕시코 그랑프리에서 3위로 완주하며 개인 통산 처음으로 포디움에 올랐으며, 지난해 데뷔전을 치뤘던 벨기에 그랑프리에서는 비가 오던 상황에서 타이밍 좋게 드라이 타이어로 교체하며 본인의 첫 레이스 우승을 거두는 데 성공한다.

그는 1992 시즌 드라이버 챔피언십에서 압도적인 성능의 FW14B를 몰았던 파트레제에 3점 뒤진 3위를 차지했으며, 이는 3회 월드 챔피언 아일톤 세나보다도 앞선 순위였다.


4.3. 1993 시즌[편집]


1993 시즌의 슈마허는 포르투갈에서의 1승, 그리고 이를 포함해 포디움에 9번 올랐으나 나머지 7개의 레이스에서는 모두 리타이어하였다. 52점을 획득하며 시즌을 4위로 마쳤다.


4.4. 1994 시즌[편집]


1994 시즌 초반의 슈마허는 스페인 그랑프리에서 기어박스의 고장으로 5단 기어밖에 작동이 되지 않아 2위를 차지하기 이전까지 4연승을 올리며 챔피언십을 리드하고 있었다. 산마리노 그랑프리에서는 FIA가 베네통의 차량 B194에서 트랙션 컨트롤로 간주되는 전자장비를 발견했지만, 이것이 레이스에서 실제로 작동했는지에 대한 증거는 없었기 때문에 이에 대한 처벌은 받지 않았다. 하지만 베네통은 FIA가 처음으로 조사를 실시할 때 비협조적인 태도를 보였기 때문에 이에 대해 10만 달러의 벌금이 부과되었다.

영국 그랑프리에서는 포메이션 랩 도중 데이먼 힐을 추월해 페널티를 받았지만 무시하였고 곧바로 실격되었으며, 레이스 2회 출전 정지까지 받아 이탈리아와 포르투갈 그랑프리에 참가하지 못했다. 또한 슈마허는 산 마리노 그랑프리에서 발견된 스키드 블록의 비정상적인 마모로 인해 또 한번 실격당하며 이는 데이먼 힐이 슈마허와의 포인트 격차를 줄이는 데 매우 도움을 주며 최종전 호주 그랑프리에서 슈마허와 힐은 단 1점의 차이를 둔 채 레이스를 치루게 되었다.

36랩에서 일어난 충돌은 현재까지도 매우 논란이 짙은 충돌이며, 슈마허는 영국 언론에게 매우 거센 비난을 받았지만 스튜어드들은 레이스 중에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사건으로 판단하고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이 사고로 인해 두 드라이버 모두 탈락하여 슈마허는 1994 시즌에 개인 통산 첫 월드 챔피언 타이틀을 가져가게 된다.


4.5. 1995 시즌[편집]


매우 어수선했던 1994 시즌과는 달리 1995 시즌의 베네통과 슈마허는 매우 성공적인 한 해를 보내게 된다. 챔피언십 순위 2위를 차지한 데이먼 힐과의 점수차는 33점이였으며, 슈마허의 개인 통산 두번째 월드 챔피언은 물론, 베네통은 첫 컨스트럭터 월드 챔피언까지 차지하는 데 성공한다. 슈마허는 17회의 레이스 중 9승, 11포디움에 올랐다. 특히 벨기에 그랑프리에서는 16위로 출발했지만 추월에 추월을 거듭해 결국 우승하였다.
Benetton B195


5. 스쿠데리아 페라리[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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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Michael Schumacher 2004 Ferrari.jpg

맥라렌에서 우승하면 많고 많은 드라이버중 그저 하나가 되겠지만 고전을면치못한 페라리 레이스카를 타고 우승하면 넌 전설이될거야

니키 라우다 당시 페라리 컨설런트이자 前 페라리 챔피언


5.1. 1996 시즌[편집]


1995년 압도적으로 챔피언이 된 슈마허는 흥미를 잃었는지 새로운 도전을 위해 타 팀으로 이적을 결심한다. 맥라렌, 윌리엄스 등 당시 쟁쟁항 강팀들이 수많은 제의를 건냈지만 니키 라우다에게 설득당하며 1979 시즌 이후로 드라이버 챔피언을 배출하지 못한 페라리로 이적한다.파일:217D3367-DB7B-4521-B57B-233E7467CD7F.webp
슈마허는 베네통과의 계약이 만료되기 1년 전에 팀을 떠났으며, 베네통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하던 로스 브런과 로리 번을 페라리로 끌어들인다.
당해 페라리는 챔피언십에 도전하기에는 현저하게 떨어지는 성능은 물론, 심각한 신뢰성 문제로 인해 슈마허는 16개의 레이스 중 7개의 레이스에서 리타이어를 해야만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드라이버 챔피언십에서 3위를 차지했으며, 컨스트럭터 챔피언십에서도 슈마허의 이전 소속팀인 베네통을 제치고 2위를 차지하는 데 도움을 준다. 몬자의 티포시들 앞에서 당당하게 우승했으며, 웻 컨디션에서 펼쳐진 스페인 그랑프리에서는 3위로 달리는 선수까지 백마커로 만들며 압도적인 우승을 차지하기도 했다.


5.2. 1997 시즌[편집]


매우 발전한 페라리의 F310을 타게 된 미하엘 슈마허는 윌리엄스의 자크 빌르너브와 1997 시즌에 치열한 타이틀 경합을 벌였다. 빌르너브가 2, 3라운드 브라질과 아르헨티나에서 우승하며 시즌 초반을 이끌었지만 슈마허는 5라운드 모나코 그랑프리부터 8라운드 프랑스 그랑프리까지 3회의 우승을 하며 챔피언십을 이끌기 시작했다.

1994 시즌과 마찬가지로 1점의 우위를 점한 채로 스페인의 헤레즈에서 열리는 마지막 라운드에서 슈마허는 안쪽으로 추월을 시도하는 빌르너브에게 매우 고의성이 짙은 추돌을 유발했으나, 본인만 자갈밭으로 빠지고 빌르너브는 약간의 손상만 입은 채로 레이스를 완주하며 1997 시즌의 월드 챔피언 또한 빌르너브에게 넘겨주게 된다. 또한 2주 후에 열린 청문회에서는 슈마허의 고의성이 인정되며 슈마허는 1997 시즌의 드라이버 챔피언십 포인트를 F1 역사상 최초로 몰수당하며 실격처리 된다.


5.3. 1998 시즌[편집]


윌리엄스의 경쟁력이 크게 후퇴하고 맥라렌의 미카 하키넨이 슈마허의 주요 경쟁자로 떠올랐다. 맥라렌의 MP4/13은 프리시즌 테스트부터 상당한 성능을 보이며 1, 2라운드에서 하키넨의 우승을 도왔으나, 이후 페라리가 크게 향상되며 시즌 중반부터 5승을 하며 하키넨을 뒤쫓기 시작한다. 또한 페라리는 프랑스 그랑프리에서 1-2 피니시를 하며 1990 시즌 이후로 8년만에 1-2 피니시에 성공하기도 했다. 그리고 이탈리아 그랑프리에서 슈마허가 우승하며 동점까지 가기도 하는등 하키넨과 막판까지 치열한 경쟁을 하였고 마지막 2경기까지 챔피언십 경쟁을 끌고오는데 성공한다. 파일:C0929C91-8FFF-48C4-A761-11043A34B8F9.jpg
하지만 불운하게도 폐막전인 일본그랑프리에 레이스를 리드하던중 타이어에 펑쳐가나버리며 다시 한번 월드 챔피언 달성에 실패한다.

영국 그랑프리에서는 슈마허의 규정의 허점을 이용한 플레이가 논란을 일으켰다. 슈마허는 세이프티 카 상황에서 자신의 백마커였던 알렉산터 우즈를 추월하며 10초 스탭 앤 고 페널티를 부과받았다. 하지만 선두에서 달리던 슈마허는 끝까지 페널티를 수행하지 않다가 마지막 랩에 페널티를 수행하러 피트로 들어왔지만 페라리의 피트 박스가 결승선 이후에 있었기 때문에 그의 우승은 유효했다.

폭우 속에서 진행된 벨기에 그랑프리에서는, 2위와 40초 이상의 격차로 순항하고 있었으나, 심한 스프레이 현상으로 인해 시계가 제한되어 있는 상황의 슈마허가 자신에게 한 바퀴 뒤쳐진 백마커인 데이비드 쿨싸드의 뒤를 그대로 들이받았다.[5] 매우 화가 난 슈마허는 맥라렌의 차고로 달려가 쿨싸드가 나를 죽이려 했다고 비난했다. 하지만 이는 당시 백마커였는데도 레코드 라인 바깥으로 비키지 않은 쿨싸드의 명백한 잘못이며, 쿨싸드 본인 또한 5년 후에 그것이 자신의 실수였다고 인정했다.


5.4. 1999 시즌[편집]


1999 시즌 페라리는 1982 시즌 이후 17년만에 컨스트럭터 챔피언을 차지하는 데 성공하지만, 슈마허는 8라운드 영국 그랑프리에서의 브레이크 고장으로 인한 심각한 충돌 사고로 다리가 부러져 6개의 레이스를 결장해야 했다.

파일:DFD819E8-B6E8-4ACE-9A38-71C87DA3452F.jpg 파일:사고로실려가는슈마허.jpg

하지만 복귀 직후의 말레이시아 그랑프리에서는 2위와 1초 차이로 폴 포지션을 차지했으며, 에디 어바인의 드라이버 챔피언 등극을 위해 그를 보조해줬지만 마지막 라운드 일본 그랑프리에서 또 다시 하키넨이 챔피언을 차지하게 된다. 슈마허는 다리 부상으로 인해 1/3에 가까운 레이스를 결장했지만 드라이버 챔피언십에서 5위를 차지했다.


5.5. 2000 시즌[편집]


슈마허는 첫 3경기에서 3연승을 올렸지만 하키넨은 1, 2라운드 연속 리타이어, 3라운드에서도 2위를 하며 시즌 초반을 이끌었다. 하지만 9, 10, 11라운드에서 3연속 리타이어를 하며 하키넨이 격차를 줄일 틈을 주기도 했다.

이런 슈마허의 부진 때문인지 많은 팬들과 언론들은 미하엘 슈마허의 실력에 의구심을 드러내기 시작했으며, 슈마허와 페라리의 조합에 회의적인 반응이 나타나기도 했었다. 하지만 슈마허는 이러한 압박속에서도 무너지지않고 폼을 회복해 챔피언 결정전을 마지막 라운드인 일본 그랑프리까지 끌고가는 데 성공한다.

퀄리파잉부터 슈마허와 하키넨의 경쟁은 치열했는데, 슈마허가 폴 포지션을 잡았지만 레이스에서 스타트가 좋았던 하키넨이 레이스 선두를 꿰차면서 2000 시즌 역시 챔피언을 놓칠 위기에 처했지만, 슈마허는 그와 페라리의 주 특기인 다회 피트스탑 작전을 실시해 두 번째 피트스탑 이후 하키넨보다 앞서 나와 레이스의 선두를 탈환하는 데 성공했고 그대로 우승에 성공해 1979 시즌 이후 마침내 페라리에게 드라이버 챔피언십 타이틀을 안겨준다.
Ferrari F1-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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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년만에 페라리에게 드라이버 타이틀을 안겨주다.

5.6. 2001 시즌[편집]


슈마허는 2001 시즌에 다시 한번 우승하며 개인 통산 네 번째 월드 타이틀을 차지하였다. 기록적인 시즌 9승을 올렸으며, 맥라렌의 매우 심각한 신뢰성 문제로 인해 페라리와 슈마허는 2001년에 상당히 압도적인 시즌을 보내게 된다. 2위 쿨싸드보다 58점 앞선 123점으로 시즌을 마쳤으며, 이는 지난 시즌보다 15점이나 향상된 수치이다.
Ferrari F2001

9.11 테러 직후 개최된 이탈리아 그랑프리에서는 노즈를 검게 도색하고 스폰서 로고를 제거한 추모 리버리를 사용하였다.


5.7. 2002 시즌[편집]


슈마허는 2002 시즌 매우 기록적인 한 해를 보낸다. 17개의 레이스 중 모든 경기에서 포디움에 올랐으며 이 중 우승은 11개였다. 드라이버 월드 챔피언은 당연하게도 슈마허의 것이였으며, 이는 6개의 레이스를 남겨둔 상태에서 확정되었다. 이는 현재까지도 가장 많은 레이스 갯수를 남겨둔 채로 챔피언을 확정한 기록이기도 하다. 드라이버 챔피언십 2위이자 그의 팀 메이트인 바리첼로보다 67점 앞선 144점으로 시즌을 끝마쳤다.

하지만 오스트리아 그랑프리에서 약간의 논란이 있었다. 레이스 내내 선두를 유지하던 루벤스 바리첼로가 팀 오더를 받고 마지막 랩에 슈마허에게 1위 자리를 넘겨준 것이다. 비록 이는 스포팅 레귤레이션을 어긴 것은 아니였지만 팬들을 분노케 했으며, 팀의 이러한 행동은 스포츠맨십과 관중에 대한 존중이 부족했다는 의견도 등장했다. 특히 슈마허는 오스트리아 이전 5개의 레이스 중 4번 우승했으며, 오스트리아에서 바리첼로가 레이스를 전반적으로 매우 훌륭하게 이끌었기에 슈마허는 바리첼로를 포디움에서 1위 자리로 올려두기도 했다. 이 소동으로 인해 페라리는 100만 달러의 벌금을 부과받아야 했다.

슈마허가 챔피언을 확정지은 이후 열린 미국 그랑프리에서는 슈마허가 바리첼로에게 자의로 1위 자리를 넘겨주기도 했다.[6] 시즌이 끝난 이후 FIA는 "경기 결과에 지장을 주는 팀 오더"를 금지했지만 2011 시즌에 해제되었다.
Ferrari F2002


5.8. 2003 시즌[편집]


이 해 FIA는 조금 더 다양한 챔피언십 경쟁자를 만들기 위해 기존엔 6위까지만 포인트를 부여하던 시스템을 8위까지 포인트를 부여받게 수정했다. 이 규정으로 인해 키미 라이코넨은 2003 시즌 단 1승만으로 슈마허와의 챔피언십 경쟁을 이어나갈 수 있었다.

페라리와 슈마허의 가장 큰 경쟁자는 윌리엄스와 맥라렌이였다. 슈마허는 첫 두 경기에서는 포디움에 오르지 못했으며, 3라운드 브라질 그랑프리에서는 충돌에 연루되어 리타이어하였다. 그 사이에 그의 가장 강력한 챔피언십 경쟁자였던 키미 라이코넨은 1라운드에서 3위, 2라운드에서는 본인의 첫 그랑프리 우승을 거두어 슈마허보다 16점 앞서나가며 그를 긴장케 했다.

이후 산마리노 그랑프리에서는 슈마허의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사건이 있었다. 이에 따라 슈마허 형제는 레이스 참가를 고민했으나 결국 참가했고 미하엘은 우승, 랄프는 4위를 하며 좋은 결과를 냈다.

산마리노 이후 스페인과 오스트리아에서도 연승을 올리며 치열한 챔피언십 경쟁을 이어나갔다. 13라운드 헝가리 그랑프리 직후 슈마허는 몬토야와 키미를 상대로 각각 1, 2점 앞선 상황에서 FIA는 타이어 폭을 측정하는 방법에 대한 규정을 수정했다. 페라리의 타이어 공급사인 브릿지스톤은 문제가 없었지만, 윌리엄스와 맥라렌의 타이어 공급사인 미쉐린은 신속하게 타이어를 재설계해야 했으며, 슈마허는 이를 틈타 이탈리아와 미국 그랑프리에서 우승한다. 몬토야는 미국 그랑프리에서 페널티를 부과받아 최종전 일본 그랑프리에서는 키미만이 슈마허와 경쟁할 수 있었다.

최종전 일본 그랑프리에서는 라이코넨이 우승을 차지해도 슈마허는 단 1점만 확보하면 되는 상황으로 상당히 유리한 위치를 점하고 있었다. 슈마허는 레이스 초반 타쿠마 사토와의 충돌로 프론트 윙이 파손되어 하위권까지 내려앉았으나 다시 순위를 회복하는 데 성공해 8위로 완주. 판지오의 5회 월드 챔피언 기록을 뛰어넘으며 드라이버 월드 챔피언십 횟수 단독 1위 자리를 차지하였다.
Ferrari F2003-GA[7]


5.9. 2004 시즌[편집]


치열한 경쟁을 경험한 지난해와는 달리 슈마허는 다시 한번 기록적인 한 해를 보낸다. 개인 통산 7번째 월드 타이틀은 물론, 7라운드 유럽 그랑프리부터 7연승을 달리며 4경기를 남긴 벨기에 그랑프리에서 챔피언을 확정지었다. 6라운드 모나코 그랑프리에서의 리타이어가 아니였다면 13라운드 헝가리 그랑프리까지 13연승을 올렸을 가능성도 충분했다.

2002시즌의 11승을 뛰어넘어 18전 13승을 기록해 2022 시즌 막스 베르스타펜이 해당 기록을 경신하기 전까지 단일 시즌 최다승 기록을 보유하고 있기도 했다.

또한 당해 페라리의 차량인 F2004는 2017년에 차량 규정이 바뀌기 전까지 순수 랩타임으로 봤을 때 가장 빠른 F1 차량이였다. 또한 당시의 그루브 타이어는 현재의 하드 타이어만도 그립이 못한 점과, 당시의 퀄리파잉 플라잉 랩은 레이스 첫 스틴트에서 실을 연료를 그대로 싣고 달려야 했으므로 당대 폴 포지션의 랩타임 기록은 F2004의 한계치가 아닐 가능성이 크다.

강력한 깡출력의 3.0 V10 엔진과 500kg대 무게를 가진 F2004와 훨씬 발전된 공기역학 기술로 제작된 메르세데스 W11이 동일한 서킷에서 같은 슬릭 타이어를 끼우고 연료통을 비운 상태로 달렸을 때 어떤 차량이 더 빠를까는 모터스포츠 팬들에게 좋은 설정놀음 거리이기도 하다.

파일:DYbR1YeWAAIw2FQ.jpg
7 VOLTE CAMPIONE DEL MONDO[8]
SIMPLY THE BEST


5.10. 2005 시즌[편집]


한 세트의 타이어로 레이스를 완주해야 하는 해괴한 규정이 도입되었다. 이는 다분히 페라리와 브릿지스톤을 저격한 규정이였으며, 이로 인해 페라리의 F2005는 F2004보다 한 단계 발전한 엔진을 장착했음에도 챔피언십 경쟁에서 멀어진 채 고전하는 모습을 바라만 봐야 했다. 반면 미쉐린은 이 규정에 적응해 상당히 괜찮은 성능의 타이어를 만들어내어 미쉐린을 사용하는 팀의 페르난도 알론소키미 라이코넨이 타이틀 경쟁을 벌였던 시즌이다.

슈마허에게 있어 2005 시즌에서의 가장 주목할 만한 순간은 산마리노 그랑프리에서 있었던 알론소와의 경쟁이다. 재급유 시대 슈마허와 페라리가 매우 즐겨 사용하던 전략을 이 경기에서도 사용한다. 퀄리파잉에서 연료를 많이 싣고 달려 첫 스틴트를 길게 가져간 다음, 앞서 달리던 차들이 피트에 간 사이 연료량이 줄어 차량이 가벼운 상태로 페이스를 미친듯이 끌어올려 피트스탑을 하고 나왔을 때 상대 차량보다 앞으로 나오는 전략이다.

슈마허는 이 경기에서도 기계처럼 전략을 수행하는데, 3위로 피트에 진입해 3위로 복귀한다. 단 한 스틴트 만에 11위에서 3위로 점프해버린 것이다. 2위로 달리던 젠슨 버튼이 백마커를 만나 쩔쩔매는 사이 추월에 성공했고, 알론소는 버튼과 슈마허가 경합을 벌이는 사이 두번째 피트스탑을 마치고 3위로 나와 차량이 무거운 상태였기 때문에 클린에어 상태에서 몇 랩 더 주행한다.

슈마허가 두번째 피트인을 하고 복귀했을 때 알론소와의 간격은 얼마 차이가 나지 않았다. 슈마허는 두번째 피트스탑 직전까지도 패스티스트 랩을 연달아 작성할 만큼 페이스가 최고조였지만 알론소는 그렇지 못했다. 곧바로 알론소의 꼬리에 붙었고 약 10랩간의 치열한 접전을 벌였지만 당시엔 DRS가 없어 가까이 붙어도 추월이 쉽지 않았기 때문에 우승은 알론소가 차지하게 되었다.

당해 슈마허의 유일한 그랑프리 우승은 미국 그랑프리로, 인디게이트로 인한 미쉐린 사용 팀들의 부재로 인한 반쪽짜리 승리였다. 당시 페라리 듀오는 1-2 피니시를 일구었지만 별다른 세레모니 없이 트로피만 받고 그냥 들어가버렸다.


5.11. 2006 시즌[편집]


2006년 시즌에는 차량의 규정이 대대적으로 바뀐 해였다. 3.0L V10 엔진 규정이 폐지되었고, 2.4L V8 엔진으로 다운사이징이 진행되었다. 또한 인디게이트를 일으킨 주범이였던 레이스 도중 타이어 교체 금지 규정이 삭제되었다. 이 덕분에 페라리와 슈마허는 다시 챔피언십 타이틀 경쟁자로 복귀하게 된다.

슈마허는 첫 세 경기에서 2위, 6위, 리타이어를 하며 알론소에게 17점 뒤졌지만 산마리노와 유럽에서 우승하며 페라리와 본인이 다시 챔피언십을 두고 싸울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또한 산마리노에서 차지한 폴 포지션은 개인 통산 66번째로, 아일톤 세나의 65회 폴 포지션 기록을 경신하며 최다 폴 포지션 보유자가 되기도 했다.[9]

모나코 그랑프리 퀄리파잉에서는 또 한번 논란을 일으켰는데, 그의 강력한 타이틀 경쟁자 알론소가 플라잉 랩을 돌던 중, 라스카스 코너에서 차량을 세워버린 것이다. 이 또한 고의성이 인정되어 슈마허는 퀄리파잉 기록이 모두 삭제당해 맨 뒤에서 출발해야 했지만, 극악의 추월 난이도를 자랑하는 모나코에서 5위로 완주하는 데 성공한다.

9라운드 캐나다 그랑프리에서 슈마허는 알론소보다 25점 뒤진 상태였지만 직후 프랑스, 미국, 독일에서 3연승을 올리며 11점차로 좁힌다. 15라운드 이탈리아 그랑프리에서 우승한 후 슈마허는 기자회견에서 은퇴를 발표하기도 했다. 이탈리아 이후 중국에서 개인 통산 91번째이자 마지막 우승을 차지하며 챔피언십 선두를 차지한다. 하지만 17라운드 일본 그랑프리에서 선두로 달리던 슈마허는, 2000년 프랑스 그랑프리 이후 6년만에 엔진 고장으로 인해 리타이어하게 된다. 이로 인해 알론소가 우승을 차지하며 챔피언십 경쟁의 판도는 알론소에게 매우 유리하게 뒤바뀌어 버린다.

마지막 라운드인 브라질 그랑프리에서 슈마허는 퀄리파잉에서의 연료 압력 문제로 인해 Q3 플라잉 랩을 돌지 못하고 10그리드에서 출발해야 했다. 레이스 초반 6위까지 올라섰지만 6랩 첫 코너에서 지안카를로 피지켈라와의 충돌로 인해 왼쪽 뒷바퀴에 펑처가 발생했다. 첫 코너에서 사고가 발생해 피트까지 매우 먼 길을 운전해 피트스탑을 마친 슈마허는, 레이스 리더이자 팀메이트인 펠리페 마싸에게 70초 뒤진 19위로 떨어졌지만 무려 4위로 완주하는 기량을 보여주며 페라리와의 마지막 레이스를 매우 좋은 모습으로 끝마치게 된다.


6. 1차 은퇴 이후[편집]


이후 페라리의 어드바이저 역할과 F1 차량의 개발에 참여하면서(카트에서 포뮬러 쾨니히로 넘어갈 무렵 미캐닉 역할도 함) 취미로 라이더 생활을 했으며 은퇴를 했어도 건재한지 2009년에는 펠리페 마싸가 헝가리 그랑프리에서 스프링을 헬멧에 맞는 사고로 부상을 입고 시즌아웃을 당한 동안 대타로 돌아올 뻔 했다.[10]

은퇴 이후의 일인데 공항에 가려고 택시를 탔는데, 비행기 시간이 빠듯하여 비행기 시간을 맞추기 위해 택시기사에게 자신이 운전해도 되겠느냐고 정중하게 부탁한 이후, 자기가 택시기사를 공항까지 모셔다 드렸다. 관련 기사. 심지어 이때 운전한 택시는 보통 승용차도 아닌 승합차인 미니밴 오펠 비바로였는데 이 물건을 갖고 시속 163 km까지 밟았다고 한다. 대충 우리나라로 치면 현대 스타렉스 2세대나 기아 카니발 1세대 콜밴을 가지고 어지간한 차들 바르고 다녔단 이야기다[11]. 택시기사 왈 "절대 불가능할 것 같은 코너에서도 속도를 줄이지 않았다"라고 말했다. 참고로 이후 슈마허는 택시비 60 유로에 더불어 100 유로 팁까지 줬다고. 기사가 돈 내야 할 듯

페라리에서 은퇴 선물로 페라리 FXX를 선물로 받았다.[12]

축구를 좋아하며[13] 축구선수들과도 친분이 있어 시간이 있으면 자국에서 열렸던 UEFA 챔피언스 리그 경기나 월드컵을 참관하는가 하면, 세계 올스타 자선축구경기에도 참가하여 뛰어난 실력을 보여주었다.[14]


7. 은퇴 번복, 메르세데스 GP로 F1 복귀[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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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Michael Schumacher 2011 Mercedes.jpg
2010년 무성한 소문 끝에 결국 메르세데스 GP 소속으로 복귀했다. 마이클 조던처럼 다른 팀들을 충격과 공포에 몰아넣을 것인지 아니면 "두번은 만나지 말았어야 했을" 것인지...

은퇴할 때도 본인은 은퇴하고 싶지 않았으나 페라리가 은퇴 선언을 한 거나 마찬가지라 복귀할 거란 예상이 많았는데 결국 복귀. 페라리에게 해준게 얼마나 많은데

7.1. 2010 시즌[편집]


2010년 3월 14일 1전인 바레인 그랑프리에서 무난하게 6위를 기록했다. 그 탓에 "이제 슈마허도 한물갔네"라는 반응과 은퇴한지 몇 년만인데 오자마자 저 등수를 냈다는 점에서 "실력은 여전하네"라는 반응이 나왔으나, 2010 시즌 대부분 종합성적은 간신히 10위권에 턱걸이 하는 정도로, 팀메이트인 니코 로즈버그보다도 하위의 성적을 거뒀다.

사실 2010년의 메르세데스 차량인 W01은 2009년 브런 GP의 BGP-001의 개량형이고 이것도 일단 2009년 챔프인 젠슨 버튼을 위해 개발된 것이어서, 슈마허와는 잘 맞지를 않는다는 의견도 있고 아무래도 은퇴 후 3년여만에 복귀라 아직 실력 발휘가 제대로 안 되고 있을 가능성도 있다. 하지만 팀메이트인 니코도 타 팀에서 이적한 해이기 때문에 차에 대한 부적응이라는 점에서는 비슷한 상황이라 전설급 기록을 세운 드라이버 치고는 많이 실망스러운 것이 사실.

팀을 슈마허의 개성으로 물들이고 성과를 거두는데 시간이 걸린다고 하더라도[15] 슈마허의 나이를 생각하면 유망주인 로즈버그에게 그런 투자를 하는게 더 이득일지도 모른다.


헝가리 GP에서는 루벤스 바리첼로의 추월 시도를 막으려고 그의 차를 벽에 몰아붙이는 위험한 주행을 보였으며, 결국 이 때문에 다음 레이스인 벨기에 GP에서 10그리드 페널티를 받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1그리드에서 시작해 7위로 마치는 저력을 보여주며 포인트를 확득해 냈다.

이래저래 좀 힘든 상황이지만 2010년 한국 GP에서는 강우로 인해 세이프티 카가 4번이나 나오는 예측불허의 수중전중 탑랭커를 다투던 레드불의 마크 웨버가 코너중 스핀으로 리타이어, 제바스티안 페텔이 46랩중 엔진 과열로 차체에 불이 나며 리타이어하는 등 이변이 속출하는 와중에도 끝까지 버티며 예선 9위로 시작해 4위로 한국 GP를 마쳤다. (2명 추월, 나머지 앞 쪽 선수들은 리타이어.)

파일:external/graphics8.nytimes.com/27iht-srschumacher-span-articleLarge.jpg
그리고 2010년 19R 아부다비 GP에서는... 예선 8위에 비교적 피치를 올려 달리는가 싶더니 스핀을 하는 망신을 당하고, 뒤에서 달려오던 포스 인디아의 비탄토니오 리우치가 슈마허의 차량을 덮쳐 하마터면 스틱스 강을 건널 뻔했다. 그래도 유명했던 성깔은 나이를 먹어 변했는지 자기 차량을 덮친 리우치를 챙겨주는등 상당히 여유있는 모습을 보여줬다.[16]

19R까지 72포인트를 획득해 시즌 9위로 시즌을 마무리했다. 9위면 잘한 것 아니겠냐 싶은 사람도 있겠지만, 8위 로버트 쿠비차와 9위 사이가 나름 넘사벽(64점 차이)이라는 점과 과거에 압도적으로 다른 드라이버들을 발라버리던 슈마허라는 점에서 "다시 만나지 아니했음이 나았을..."이라는 말이 나올 상황.


7.2. 2011 시즌[편집]


해가 지나 2011년이 되어 초반에는 역시나 했는데...시즌 후반으로 갈수록 나아졌다.[17]

개최지
스타팅 그리드
경기결과
누적 포인트
호주
11
리타이어
0
말레이시아
11
9
2
중국
14
8
6
터키
8
12
6
스페인
10
6
14
모나코
5
리타이어
14
캐나다
8
4
26
유럽
8
17
26
영국
13
9
28
독일
10
8
32
헝가리
9
리타이어
32
벨기에
24
5
42
이탈리아
8
5
52
싱가포르
8
리타이어
52
일본
8
6
60
한국
12
리타이어
60
인도
12
5
70
아부다비
8
7
76
브라질
10
15
76

8R 유럽 그랑프리까지의 종합 순위는 10위다... 14R 싱가포르 전까지 봐도 종합순위는 8위.

하지만, 경기 중단을 고려할 정도의 엄청난 폭우 속에서 치뤄진 2011년 캐나다 GP에서 경기 후반까지 2위를 지키면서 레인마스터가 아직 죽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비가 개이고 노면이 마르면서 아 망했어요 별 저항도 못해보고 순식간에 4위로 주저 앉는 모습. 이 경기 이후로 다들 슈마허가 아니라 메르세데스 W02를 까기 시작했다. 각주를 보면 알 수 있지만, 빗속의 경기는 차의 스펙 차이보다는, 드라이버의 능력에 더 좌우된다. 아직 전성기 만큼은 아니지만 경쟁력있는 차만 주어진다면 해볼만 할 듯.

그런데 2011 시즌 후반기 슈마허가 살아나고 있다.

스파-프랑코샹 서킷에서 벌어진 벨기에 GP에서는 불운하게 시작하였다. 예선에서 정비불량으로 예선을 치루지 못해 꼴지인 24그리드에서 출발했다. 하지만 먼치킨급의 스타트로 시작하자마자 첫 랩에 15위까지 올라가는 위엄을 보이며 차근차근 다른 드라이버들을 추월해갔다. 레이스 후반엔 팀 동료인 니코 로즈버그를 추월하며 5위로 골인하는데 성공!

이탈리아 GP에서도 카메라는 슈마허를 비추기에 바빴다. 슈마허는 8그리드에서 출발했는데, 스타트와 동시에 또 먼치킨급 스타트를 보이며 3위까지 치고 올라가 2위인 페르난도 알론소를 위협했다. 물론 메르세데스 W02의 퍼포먼스는 형편없었기에 알론소와의 차이는 벌어졌지만, 4위로 뒤따르는 루이스 해밀턴의 공격을 수없이 방어해 냈다. 스트레이트가 많은 몬차 서킷의 특성상 뒤에 있는 해밀턴이 DRS + KERS로 수없이 공격했음에도 꿈쩍하지 않고 20랩 가량 블로킹하는데 성공했다. 결국 추월당하지 않았느냐고 반박할 수 있지만, 차량 퍼포먼스의 차이가 분명한 가운데 정상급 드라이버를 막아내는 것은 슈마허의 능력을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겠다. 게다가 루이스 해밀턴은 스파-프랑코샹에서도 똑같이 슈마허에게 꽤 많은 시간을 블로킹당한 전적이 있기 때문에 슈마허의 능력을 더더욱 돋보이게 만들 수 있었다.[18]

파일:attachment/sch123_1.jpg
싱가포르 GP에서는 사고를 당하며 리타이어했다. 9위로 달리던 중 앞서가던 세르히오 페레스를 추월하려다가 페레스의 리어와 슈마허의 프론트 윙이 충돌하면서 노즈가 들리는 사고로 리타이어했다.[19]

스즈카 서킷에서 열린 일본 GP에서는 Q3에서 플라잉 랩을 돌지 않았지만 아웃랩을 돌았기 때문에[20] 8그리드를 차지한다. 레이스에서는 다시 좋은 스타트를 보이며 6위로 점프하고 좋은 타이밍에 핏스탑한 결과[21] 잠시나마 선두에서 달려보기도 했고, 최종적으로는 페라리의 마싸를 막아내며 6위로 레이스를 마치고 8포인트를 얻었다.

그러나, 2011년 한국 GP에서는 "작년에 있었던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다."라는 말과는 별개로 2회차 예선 때 녹아웃을 당하고, 본선에서는 비탈리 페트로프와 충돌하면서 리어 윙이 심각하게 파손, 결국 리타이어되는 불운을 겪는다. 이로서 영암에서 슈마허가 2년 연속 완주를 하는 것은 불가능했고 팬들은 아쉬움 속에 눈물을 흘렸다. 이쯤되면 화가 나서 인터뷰에서 소리를 꽥꽥지를만도 한데 한선육교를 건너면서 씨익 미소를 보이는 슈마허의 대인배스러움에 전 세계 모두가 '역시 경력은 그냥 먹는게 아니다'라고 생각하게 만들었다. 이후 인터뷰에서도 '그럴 수도 있지. 신경 안 쓴다' 같은 투로 말해서 대인배의 칭호를 획득했다.

그 후 인도 GP에서는 안정적인 레이스를 펼치며 팀메이트 니코 로즈버그보다 앞서는 5위를 기록하고[22], 아부다비 GP에서는 작년에서의 안 좋은 경험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7위를 기록하며 나쁘지 않은 성적을 보였다.

최종전 브라질 GP에서는 아이르통 세나의 조카 브루노 세나와 컨택을 하며 타이어 펑쳐가 나는 손해를 봐 15위를 기록하며 슈마허의 2011 시즌이 마감되었다.


7.3. 2012 시즌[편집]


2011 시즌 후반부 상승세를 탄 슈마허의 2012 시즌은 기대되었고, 실제로 개막전 호주 GP 퀄리파잉에서 4위를 하며 드디어 지난 2년동안의 설움을 딛고 좋은 성적을 거둘수 있으리라는 설렘을 가지게 만들었으나, 정작 본 레이스에서는 10랩 정도밖에 달리지 못하고 기어박스의 이상으로 리타이어하였다.

2R 말레이시아 GP에서는 복귀 후 첫 퀄리파잉 3위를 기록하며 또다시 설렘을 가져다 주었으나, 역시 본 레이스에서 한 바퀴도 돌기 전에 로터스의 로맹 그로장과 충돌해 순위 손해를 엄청나게 보았고, 스콜로 레이스가 한번 중단됐다 다시 재개된 이후에도 포인트권 밖에서 레이스를 이어가다가 제바스티안 페텔의 타이어 펑쳐와 파스토르 말도나도의 엔진 블로우로 겨우 10위까지 올라가 1포인트를 따낸다.

3R 중국 GP에서도 역시 3위를 차지하였으나, 퀄리파잉 2위 루이스 해밀턴이 기어박스를 바꿔 5그리드 페널티를 받으며 2위로 출발하게 되 적어도 포디움, 잘하면 우승 까지 기대되었으나, 스타트에서 팀메이트 니코 로즈버그가 로켓스타트로 치고 나가버렸고, 슈마허는 맥라렌,로터스 등을 방어해 내는 역할을 계속 수행하며 2위를 달리고 있던 도중 피트스톱을 했는데, 여기서 오른쪽 타이어의 휠넛을 제대로 조이지 못하고 보내버린 피트크루의 통한의 실수가 나오며 다시 리타이어.
그 뒤 니코 로즈버그의 F1 데뷔 이후 첫 우승을 쓴웃음을 지으며 지켜보았다.

4R 바레인 GP에서는 팀의 판단 착오와 차의 이상, 그리고 앵그리버드 헤이키 코발라이넨의 예상 외의 스피드로 슈마허가 Q1에서 탈락해버리게 된다. 게다가 기어박스를 바꿔 5순위 하락한 23위에서 출발하게 되었다. 하지만 레이스에서는 사건사고 없이 무난한 레이스 운영을 보여 13계단 상승해 10위로 1포인트를 얻었다.

5R 스페인 GP에서는 Q3 진출에는 성공했으나 Q3에서 랩타임을 기록하지 않으며 9위에서 출발하였다. 레이스 스타트를 잘 했고, 5위였던 세르히오 페레스가 타이어 펑쳐가 나 스타트 상황에서 6위로 치고 올라갔으나, 첫 피트스톱을 하고 난 몇 바퀴 뒤 피트스톱을 하지 않고 버티고 있던 브루노 세나를 추월하려 DRS를 쓰고 달리던 중 브루노 세나의 리어윙을 박고 슈마허와 세나 둘 다 리타이어해 버렸다. 복귀 후 리타이어를 하더라도 어지간해선 화를 내지 않던 슈마허도 이때만은 팀 라디오로 "Idiot!"이라는 말을 남기고 스티어링을 집어던졌다. 결국 이 사고로 슈마허에게 내려진 처분은 모나코 GP에서 5순위 강등이었다. 이 사건은 세나의 애매한 방어행동과[23] 슈마허의 브레이크 타이밍 미스가 맞물려 팬덤에서 갑론을박이 벌어지기도 했다.

그런데 6R 모나코 GP 퀄리파잉에서 폴 포지션 차지라는 대사고를 쳤다. 복귀 후 첫 폴 포지션은 물론, 햇수로는 6년만의 폴 포지션이라고 한다. 이로 인해 황제의 재림을 만천하에 보여주었지만, 스페인 GP에서의 5순위 하락 페널티로 아쉽게 출발은 6위에서 하게 된다. 그런데 레이스가 시작하자마자 출발 과정에서 5위 알론소에게 밀린 4위 로맹 그로장과 말레이시아에서의 충돌을 반복했고, 슈마허는 계속 진행해 2계단 하락한 8위에서 키미 래이쾨넨의 뒤꽁무니를 계속 쫓았지만 여유치 않은 도중 슈마허는 피트 스톱 타이밍을 늦게 가져가 타이어의 문제로 고전하던 키미 래이쾨넨 등을 제끼고 슈마허가 7위가 된 와중 레이스 중후반에 연료 공급 계통의 문제로 슈마허의 페이스가 상당히 처지고, 결국 토로 로쏘의 베르뉴와 포스 인디아의 디 레스타와 휠켄베르크에게 추월당하였다. 그리고 피트로 돌아와 또다시 리타이어...

7R 캐나다 그랑프리에서는 9그리드에서 출발했으나 그 이상 치고 나가지 못하다가 40랩 이후에 리어 윙에 문제가 발생, DRS가 전개된 상태에서 윙이 닫히지 않아 시케인에서 숏컷을 하는 모습을 보였다.[24] 결국 피트인을 하였는데 피트 크루들이 여러명이 붙어 리어윙을 닫으려고 안간힘을 썼으나 열려있는 리어윙은 꿈적도 하지 않는 모습을 보여주며 결국 리타이어.

8R 유럽 그랑프리에서는 2번째 퀄리파잉에서 아쉽게 12그리드를 차지했다.[25] 발렌시아 서킷은 시가지 서킷인데다 마땅한 추월포인트도 거의 없어 별 다른 성과를 내지 못할 것으로 예상됐으나 이게 웬걸, 장에릭 베르뉴헤이키 코발라이넨의 충돌로 인해 세이프티 카가 나오면서 상황이 급변하기 시작했다. 선두에서 달리던 제바스티안 페텔로맹 그로장이 연달아 리타이어하고 슈마허는 레이스 후반부터 앞선 차량을 차례차례 추월하기 시작해 5위까지 올라왔는데 56랩에서 3위 싸움을 벌이던 해밀턴 마저 말도나도의 무리한 주행으로 인해 사고로 리타이어하고 말았다. 최종순위는 3위. 인터뷰에서 말하길 슈마허 본인은 레이스에 집중하느라 자신이 몇위인지 조차 몰랐다고 한다. 게다가 복귀후 사상 최악의 시즌을 보내던 와중에 오랜만에 포디움에 오르는 모습을 보며 슈마허의 팬들은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는 후문.

유럽 GP 종료 시점에서 17포인트로 13위에 오른 후 계속해서 포인트 짤짤이를 거둬 13전인 이탈리아 GP (43포인트로 11위를 기록. 만년 하위권인 신생 3팀[26]과 부대끼고 있던 상황은 벗어났으나 아직까진 갈 길이 멀기만 하다.[27] 2010 시즌과 2011 시즌에서 부진했던 퀄리파잉의 성적을 레이스 운영으로 메우던 상황이었는데 2012 시즌에서는 본인의 실수보다 차량의 결함으로 인한 리타이어가 대부분이라 더욱 아쉬움이 남고 있다. 이러한 불운[28]을 딛고 재기할 것인가, 아니면 이후로도 하락세가 지속되는가를 지켜보는 것이 2012 시즌의 관전 포인트가 될 것이다.

일본 GP를 앞두고 소속팀 메르세데스 GP가 루이스 해밀턴과 2013 시즌 계약을 맺으면서, 결국 슈마허는 2012 시즌을 마지막으로 은퇴를 선언했다.


코리아 그랑프리에서는 Q2에서 0.05초 차이로 젠슨 버튼의 Q3 진출을 막았고, 10위로 출발하게 되었다. 하지만 레이스에서는 메르세데스의 차량의 한계를 드러내며 레이스가 진행되며 점점 순위가 하락하여 13위로 노포인트를 기록했다.

파일:M.SCH 2012 브라질.jpg
그리고 2012년 11월 26일, 브라질 GP를 마지막으로 다시 한번 은퇴를 선언하며 F1에서 마지막으로 완전히 은퇴한다. 당시 3연챔을 눈앞에 둔 페텔을 앞으로 보내주는 장면도 포착되어 더욱 만감이 교차되기도 하였다.


8. 기록[편집]



  • 시즌 챔피언 총 7회(1994~1995년, 2000~2004년)
역대 공동 최다. 50년대의 전설 후안 마누엘 판지오가 5회, 현역 최다인 루이스 해밀턴의 7회와 공동 1위
  • 레이스 우승 총 91회
역대 2위. 루이스 해밀턴이 104회로 1위, 제바스티안 페텔이 53회로 3위
  • 포디움(시상대) 155회 오름
역대 2위. 루이스 해밀턴이 165회로 1위, 제바스티안 페텔이 121회로 3위
  • 폴 포지션(예선 1위) 총 68회
역대 2위. 루이스 해밀턴이 103회로 1위
  • 폴 투 윈(예선 1위→ 우승) 40회
역대 2위. 루이스 해밀턴이 58회로 1위
  • 패스티스트랩(서킷 최고 랩 타임) 77회 기록
역대 최다. 루이스 해밀턴이 53회로 2위


8.1. 슈마허의 서킷 별 우승 목록[편집]


서킷 이름
우승 연도
비고
국립 몬차 자동차 경주장
1996, 1998, 2000, 2003, 2006
해밀턴과 최다 우승 타이
상하이 인터내셔널 서킷
2006
마지막 우승
실버스톤 서킷
1998, 2002, 2004

스즈카 서킷
1995, 1997, 2000, 2001, 2002, 2004
최다 우승
세팡 인터내셔널 서킷
2000, 2001, 2004

호세 카를로스 파시 서킷
1994, 1995, 2000, 2002

앨버트 파크 서킷
2000, 2001, 2002, 2004
렉스 데이비슨과 최다 우승 타이
바르셀로나-카탈루냐 서킷
1995, 1996, 2001, 2002, 2003, 2004
최다 우승
모나코 서킷
1994, 1995, 1997, 1999, 2001

스파-프랑코샹 서킷
1992, 1995, 1996, 1997, 2001, 2002
첫 우승, 최다 우승
바레인 인터내셔널 서킷
2004

질 빌르너브 서킷
1994, 1997, 1998, 2000, 2002, 2003, 2004
해밀턴과 최다 우승 타이
뉘르부르크링
1995, 2000, 2001, 2004, 2006
최다 우승
헝가로링
1994, 1998, 2001, 2004

느베르 마그니-쿠르 서킷
1994, 1995, 1997, 1998, 2001, 2002, 2004, 2006
해밀턴과 단일 그랑프리 최다 우승 타이
엔초 에 디노 페라리 자동차 경주장
1994, 1999, 2000, 2002, 2003, 2004, 2006
최다 우승
인디애나폴리스 모터 스피드웨이
2000, 2003, 2004, 2005, 2006
호켄하임링
1995, 2002, 2004

오카야마 인터내셔널 서킷
1994, 1995
스털링 모스와 최다 우승 타이
A1-링
2002, 2003

에스토릴 자동차 경주장
1994

헤레스 서킷

후안 이 오스카 갈베스 자동차경주장
1998


[1] 슈마허의 아버지 롤프 슈마허는 지역 카트 클럽의 카트 수리공이었는데, 집안이 매우 가난했었지만 아들래미가 레이싱을 하겠다는 걸 말리지는 않았다. 오죽하면 집을 카트장 옆으로 이사까지 했으며 슈마허의 어머니는 그곳에서 샌드위치를 팔았다고 한다. 게다가 독일의 카트 라이선스 규정때문에 연령 제한이 낮은 나라로 가기까지 했다.[2] 독일에서는 카트 라이선스가 14세부터이다.[3] 포뮬러 레이스의 하위단계로 포뮬러 3의 아랫급, 현재의 포뮬러 4 정도로 보면 된다.[4] Bertrand Gachot (1962~). 1990년 12월 런던에서 한 택시와 사고가 났는데, 그 택시기사에게 최루탄를 뿌린 사건 때문에 상해와 불법 무기 소지로 체포되어 18개월 징역형을 받았다. 본인은 택시기사가 본인의 멱살을 잡아 자기방어 용도로 CS가스를 사용했다고 주장했다. ("Driver used CS gas 'in defence'", 런던 더 타임스, 1991년 8월 15일, 5페이지), 이후 F1 대신 르망 24시로 무대를 옮겨 그 전설의 마쓰다 787B를 타고 1991년 르망 24시에서 우승하였다.[5] 이 상황에서 앞바퀴가 통째로 날아간 슈마허는 안전지대에 차를 세울 수도 있었지만 그 상태로 차를 피트까지 몰고 들어오기도 했다.[6] 이때 바리첼로와 슈마허의 간격은 0.011초로, 이는 F1 역사상 두 번재로 가까운 1, 2위간 간격이다.[7] 당해 세상을 떠난 페라리의 모기업 피아트의 회장 지오바니 아녤리를 기리기 위해 그의 이니셜 GA를 이름에 추가하였다.[8] 이탈리아어로 "7회 세계 챔피언". 개인 통산 7번째 월드 챔피언을 확정지은 2004 벨기에 그랑프리에서 촬영되었다.[9] 이는 루이스 해밀턴의 103회, 그리고 아일톤 세나가 상당히 단기간에 65회를 기록한 것과 비교했을 때 비교적 뒤떨어져 보이지만 이는 슈마허가 활동하던 시기의 퀄리파잉 규정이 둘과는 달랐기 때문으로, 세나와 해밀턴의 전성기 시절 퀄리파잉의 룰은 연료통을 비운 상태로 플라잉 랩을 도는 것이 허용되었지만, 슈마허의 경우 플라잉 랩을 돌 때 레이스 첫 스틴트에서 사용할 연료량을 그대로 싣고 달려야 했기 때문에 폴 포지션보다는 레이스에서의 전략을 중점적으로 두고 퀄리파잉을 진행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였다. 특히 슈마허는 상술했듯 첫 스틴트에서의 연료량을 상당히 많이 가져가는 전략과 맞물려 폴 포지션 횟수가 비교적 적은 편이다.[10] 모터사이클 경주에서 입은 목부상이 낫지 않아 결국 무산되었지만...[11] 이런 상용차들은 디젤 엔진이 달리는데, 디젤 엔진은 저회전 토크는 강하지만 고회전에 약해 속도를 내기 어려운 편이다. 또한 내구성과 실용성에 초점을 맞추므로 더더욱 고속 주행에 적합하지 않으므로 승용차로 163 km/h로 주행한 것과 크게 다르다.[12] 미하엘 슈마허가 요구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참고로 FXX 제작에는 슈마허도 참여했다.[13] 1. FC 쾰른의 팬이며, 쾰른이 이적 자금이 부족해 루카스 포돌스키 영입에 어려움을 겪자 팬들이 이적료 일부를 모금해 부담했을 때에도 참가했다.[14] 2002년 루이스 피구 재단 vs 세계 올스타 자선경기에서 뛰어난 패싱을 보여주며 도움 해트트릭을 기록했고 구석을 파고드는 날카로운 오른발 킥으로 골 포스트를 맞추는 위협적인 모습을 보여 사람들을 놀라게 했지만, 아쉽게도 득점은 하지 못했다. 직접 봐서 기억한다. LUIS FIGO FOUNDATION 5-5 UNICEF ALL STARS[15] 과거 베네통에서 페라리로 이적 후 이른바 슈마허 사단이 완성되어 전대미문의 시즌 제패를 일군 2000 ~ 2004 시즌의 모습을 보기까지는 시간이 많이 필요했다.[16] 이 사고를 계기로 차량의 노즈 높이에 제한이 생겨 2012 시즌부터는 대부분 계단식 스텝노즈를 사용하게 되었으며 이는 오리너구리 노즈라는 악명을 듣게 되었다. 여담이지만 2012년 스파에서 그로장이 유발한 대형 사고 이후 해당 규정은 더 강화되었고, 차량 하부 플로어로 들어가는 공기를 포기할 수 없었던 팀들의 고육지책에 의해 존슨 노즈라고 불리는 기괴한 노즈들이 등장하게 되었다.[17] 호주~영국 GP까지는 5위 안에 1번밖에 못 들었지만, 독일~브라질 GP까지는 5위를 3번이나 기록했다. 하지만 리타이어도 2번 더 많다[18] 조금 자세한 이야기를 적자면, 스파와 몬차에서 메르세데스 W02는 다운포스를 거의 포기하고 직선에서의 스피드만을 극단적으로 중시한 세팅으로 나섰다. 따라서 최고속도는 맥라렌과 거의 비슷했거나 우위에 있었고, 해밀턴의 DRS + KERS 공격에 KERS로 대항하며 라인을 내주지 않을 수 있었다. 말은 쉬워 보이지만, 이런 세팅은 다운포스가 부족하기 때문에 차의 안정성이 낮고, 코너에서 조금의 실수만 있어도 탈출 속도 차이로 인해 추월당할 수 있다. 하지만 슈마허는 그 불안정한 차량을 가지고도 절대 실수하지 않았다. 현실이 이니셜D보다 더한 세상[19] 2010 시즌 발렌시아에서 웨버가 당한 사고와 비슷한 느낌이다.[20] 플라잉 랩을 도는 것만 랩타임으로 인정된다. 피트를 나와서 한 랩을 도는 것을 아웃랩이라고 하고, 플라잉 랩 후 피트로 들어가기 위해 도는 랩을 인랩이라고 한다.[21] 피트스탑하고 얼마 있지 않아 세이프티 카가 선언되었다.[22] 사실 슈마허의 인도 GP 5위는 해밀턴과 마싸의 컨택의 영향이 더 컸다.[23] 규정상 방어를 위한 움직임은 1회로 제한되어 있다. 하지만 세나의 경우 확실하게 움직이지 않고 갈팡질팡하는 모습을 보였다.[24] DRS는 리어윙을 열어 차체의 다운포스를 줄여 속력을 얻는다. 속력을 위해 안전성을 맞바꾸는 방식이라 만약 DRS를 사용한 상태에서 코너를 돌 경우 그대로 스핀하게 된다. 그런데 당시 퀄리파잉에서 DRS를 열고 코너를 공략하던 레드불에게는 안 통하는 이야기라서 결국 예선에서도 DRS는 DRS 구간에서만 사용할 수 있도록 규정까지 바뀌었다.[25] 유럽 GP 퀄리파잉은 Q2가 가장 치열했는데 1위부터 10위까지의 격차가 0.2초 밖에 차이 나지 않는 치열한 접전이 벌어진 상황이었다.[26] 케이터햄, 마러시아, HRT. 그나마 케이터햄의 경우 2012 시즌에 단 1포인트라도 획득하는 것을 목표로 만반의 준비를 했으며 이를 위한 헤이키 코발라이넨의 노력 또한 가장 두드러졌으나... 베르뉴 ㅅㅂㄹㅁ[27] 일단 팀메이트인 로즈버그조차 13전 기준으로 슈마허보다 40점이 앞서있고, 13전 시점으로 1위가 179점 (알론소), 142점 (해밀턴), 141점 (래이쾨넨), 140점 (페텔), 132점 (웨버), 101점 (버튼), ...[28] 1R 기어박스 이상으로 리타이어, 2R 충돌로 고생, 3R 타이어 문제로 리타이어, 4R 맹구 기어박스로 고생, 5R 충돌로 리타이어, 6R 연료 공급 계통 이상으로 리타이어, 7R DRS 고장으로 리타이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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