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긍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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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대통령장 약장.png
건국훈장 대통령장 수훈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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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민긍호2.jpg

본관
여흥 민씨[1]
출생
1865년[2] 1월 1일
한성부
(현 서울특별시)
사망
1908년 2월 29일[3][4] (향년 43세)
강원도 원주군
상훈
건국훈장 대통령장 추서

내가 일본에 투항하면 일본 치하에서 지위가 높아지고 부귀가 8역적[5]

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음을 모르는 바 아니다. 그러나 나의 뜻은 나라를 찾는 데 있으므로 강한 도적 왜(倭)와 싸워서 설혹 이기지 못하여 흙 속에 묻히지 못하고 영혼이 망망대해를 떠돌게 될지라도 조금도 후회하지 않는다.

--

- 강원도 관찰사가 귀순 권유를 했을 때 이에 대한 거부 답신


1. 개요
2. 생애
3. 기타
4. 참고 자료



1. 개요[편집]


구한말의 군인이자 의병장으로 활동한 독립운동가이다.

2. 생애[편집]


민긍호는 1865년 1월 1일 한성부(현 서울특별시)에서 아버지 민치봉(閔致鳳)과 어머니 원주 원씨 사이의 1남 3녀 중 외아들로 태어났다.#

1897년 군에 입대한 민긍호는 1907년 고종의 강제 퇴위와 일제의 군대 해산을 보게 된다. 이 무렵 1연대 1대대장 박승환의 자결과 장병들의 봉기 소식을 들은 대한제국군 원주진위대 특무정교(特務正校) 민긍호는 원주진위대의 병사들을 불러모아 봉기를 결의한다. 민긍호는 모인 장병들에게,

"나라에 병사가 없으면 무엇으로 나라라 할 수 있겠는가, 군대 해산 명령에 복종할 수 없다."


라고 말하며 병사들을 지휘하여 원주읍의 우편소, 경찰분견소 등을 공격해 장악한다. 또 군수물자를 조달하는 일본군과 싸워 수십명의 일본군 사상자를 내고 격퇴시켰고, 이에 일본군 본대가 보병 2개 중대와 공병 1개 소대로 구성된 진압부대를 파견했으나 주민들의 지원 하에 전투를 벌여 진압부대를 물리친다.

민긍호의 의병부대는 편제와 지휘체계가 잘 구성되어 있었고 이강년 등 다른 의병부대와도 협력하는 관계를 유지하는 등을 발판으로 70여차례의 전투에서 거의 승리하였다. 또 원주, 여주, 이천, 홍천, 충주 일대에서 100여회의 전투를 벌여 전과를 올린다. 이러한 명성으로 13도 창의군이 형성되어 서울 진공작전을 펼칠 때에도 관동창의대장을 맡는 역할을 한다.

그러나 1908년 2월 27일, 원주 강림 박달치에서 일본군과 밤새 전투하던 민긍호의 부대는 탄환이 바닥나면서 촌락이 점령당하고 민긍호도 붙잡힌다. 중간 지휘관들이 다음 밤에 바로 구출작전을 개시했고, "우리 대장 민씨는 있는 곳에서 소리 지르라!"고 외치며 죽기살기로 싸웠다. 놀란 일본군은 민긍호를 그 자리에서 사살한 뒤 퇴각, 2월 29일에 순국하고 만다.

1907년 8월 5일에 의병부대를 만든 민긍호는 순국하기 직전까지 7개월동안 100차례가 넘는 전투를 겪었다. 거의 이틀에 한번 꼴로 전투를 벌인 것과 마찬가지이다.


3. 기타[편집]



1954년 북부지구경비사령관 권준 준장의 주도로 묘소를 이장하고 추모비를 건립하였다.

사후 공적이 인정되어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된다.

민긍호 사후 그의 가족들은 연해주로 이주했는데, 1930년 스탈린의 강제이주정책으로 카자흐스탄 쪽에 가게 되었다. 다행히 후손들은 거기에 정착하는데 성공했다. 후손 중 유명 인물로는 데니스 텐이라는 피겨 스케이팅 선수가 있었으나 안타깝게도 강도가 휘두른 흉기에 찔려 25세의 나이로 일찍 세상을 떠났다.


4. 참고 자료[편집]


  • 정상규 저. <잊혀진 영웅들, 독립운동가>. 휴먼큐브. 2017년. 126~128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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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입암공파 27세 호(鎬) 항렬.[2] 독립유공자 공적조서 및 독립기념관 소장 『여흥민씨가보』에는 1865년생으로 기재되어 있으나, 근래 들어 나온 여흥민씨세보에는 1884년생으로 기재되어 있다.[3] 음력 1월 28일.[4] 여흥민씨세보에는 7월에 별세한 것으로 기재되어 있다.[5] 을사오적과 더불어 몇 명의 역적들이 추가된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