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정승
인조 ~ 경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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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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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정승 민암 閔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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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636년(인조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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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694년(숙종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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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사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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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
| 여흥 민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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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 장유(長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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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
| 차호(叉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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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
| 부친 - 민응협(閔應協, 1597 ~ 1663) 모친 - 풍산 김씨(豊山金氏) 김수현(金壽賢)의 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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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제자매
| 형 - 민희(閔熙, 1614 ~ 1687) 형 - 민점(閔點, 1614 ~ 16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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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인
| 경주 김씨 김계재(金季齋, 1637 ~ ?)[1] 김시진(金始振)의 딸로, 의혜공주의 외5대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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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녀
| 장남 - 민장도(閔章道, 1655 ~ 1694) 장녀 - 전주 이씨 이도문(李道文)의 처 차녀 - 여주 이씨 이덕유(李德裕)의 처 3녀 - 동복 오씨 오상유(吳尙游)의 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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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의
문관 관료.
1668년, 별시
문과에 을과로 급제한 뒤 지평, 승지, 함경도관찰사 등의 관직을 역임했다. 1680년 대사헌에 있었으나
경신환국으로
남인이 실각하자 파직되었다. 1689년
기사환국으로 다시 대사헌에 기용되었고, 이조판서 심재와 서인 김수항,
송시열을 탄핵했으며, 그들의 처벌에 대하여 강경한 입장을 고수했다. 이후 대제학, 병조판서를 역임한 후 1691년에 우의정이 되어 사은사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1694년 김춘택 등이
숙종의 폐비인
인현왕후를 복위하려는 음모가 있다는 고변이 있었다. 남인의 영수였던 민암은 훈련대장 이의징과 함께 옥사를 일으키려 했으나,
갑술환국이 일어나 제주도로
위리안치되었다. 이후
소론의 영수였던
남구만에 의해 탄핵당했다. 남구만은 민암을 죽이는 것에 대해서는 반대했으나, 1694년 숙종의 명에 의해 사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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