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정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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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정계
민주정의당계

형성
1979년 ~ 1980년
해체
2016년[1]
수장
전두환, 노태우
정부
대한민국 제5공화국
노태우 정부
정치적 이념
권위주의적 반공주의
국민보수주의
국가주의
혼합 체제
경제적 이념
경제적 자유주의
국가자본주의
주요 정치인
박태준
김윤환
이춘구
이한동
이종찬
박철언
이상득
강재섭
박희태


1. 개요
2. 활동
3. 구성



1. 개요[편집]


1990년 3당 합당 이후에 생겨난 용어로 민주자유당 내의 구 민주정의당 출신 국회의원들을 일컫는다. 주로 통일민주당 출신의 민주계 국회의원들과 대립 구도를 설명할 때 많이 쓰였다.


2. 활동[편집]



2.1. 민주정의당 창당[편집]


12.12 군사반란 이후 하나회 중심으로 창당된 민주정의당은 구 민주공화당의 재산과 인재풀을 모두 흡수한다. 박정희계김윤환[2], 박준규[3]를 중심으로 전향한 인물이 많으며, 여기에 전두환을 비롯해서 노태우, 정호용, 권정달, 권익현, 이춘구 등의 신군부 인사들이 이 주류를 형성하였고 하나회 인사들은 100% 민정계로 분류된다. 이외에도 신군부가 새 인물 발탁을 명분으로 검찰 출신들(이한동 등)과 신군부에 협조적인 관료(고건 등), 대학교수(김종인[4])들을 상당수 영입하였다. 소수지만 유신 시절에 야당을 하던 인사들이 민정당에 참여하기도 했다. 이재형[5], 채문식, 윤길중, 오세응이나 김정례, 나석호 같은 경우.[6]

전두환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99.1%를 득표하며 대통령이 되고, 제11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도 이기며 기반을 다졌다. 다만 대부분의 야당인사들은 출마조차 할 수 없었으며, 국군보안사령부가 신군부에 협조적인 야당인사들을 대상으로 공작하여 만든 관제야당만이 있을 뿐이었다.[7] 어쨌든 이겼으니 꽤 순항했고 경제도 호황이라 지지율도 나쁘지 않았으나 국민들은 민주화를 원했고 12대 총선에서 신한민주당-민주한국당 선거 공조로 사실상 패배했다.

이후 6월 민주항쟁이 크게 일어나자 전두환 정부6.29 선언을 통해 제13대 대통령 선거를 앞둔 직선제 개헌이 이루어지게 되지만 경제 호황, 유신 정권 등 박정희 정권 출신 인사 흡수와 부동의 대경권 유권자를 기반으로 건재한 득표율을 올렸다. 다만 민주정의당 내에서 전두환계와 노태우계 간의 알력 다툼이 있었는데, 최종적으론 노태우계가 이기며 전두환은 강제 정계 은퇴했고, 전두환계는 은퇴나 전향을 택했다. 어쨌든 노태우는 대통령으로 당선되고, 김영삼통일민주당, 김종필신민주공화당3당 합당을 추진하여 거대 여당 민주자유당을 창당했고, 이후에도 최대 규모를 자랑했던 거대 파벌이었다.[8]


2.2. 3당 합당 이후[편집]


3당 합당으로 탄생한 거대 여당 민자당 내의 민정계는 과거 민정당 시절과는 세력 구도의 큰 변화가 있었다.

우선 김영삼과 대립하던 민정계 내 반김의 대표격인 박태준이 1992년 14대 대선을 앞둔 민자당 후보 경선에서 이종찬이 김영삼에게 패하자 정계를 잠시 떠났고, 마찬가지로 이종찬 역시 탈당하여 새한국당을 차리면서 독자 출마를 선언하였다. 6공 시절 TK 기반 실세로 일컬어지던 박철언정호용 역시 문민정부 출범 이후부터 힘을 잃게 되었다.[9][10] 반면, 김윤환, 김용태, 김종호를 비롯한 경선 과정에서부터 김영삼을 지지했던 이른바 민정계의 '신 민주계' 세력은 문민정부에서 대거 요직에 중용된다.

3당 합당 이후 90년대 민정계의 세력 구도를 정의하는 데 있어 대다수 언론은 김윤환, 이한동, 이춘구 세 사람을 실세 3인방으로 꼽았다. 여기에 상대적으로 세가 약한 이춘구를 뺀 김윤환, 이한동을 두고 민정계의 양 거두, 양대산맥으로 일컫는 경우도 많았다. 특히 김윤환에 대해서는 민정계 최대보스라는 수식어가 줄곧 따라다녔다. 김윤환은 90년대 내내 자타공인 부동의 TK 맹주로 군림했고, 이에 비해 다소 열세였던 이한동은 수도권, 충청권, 강원권을 묶어 '중부권'으로 명명하여 적임자임을 자처했다. 당시 PK최형우, 신상우, 박관용 등을 위시한 민주계의 몫이었다. 김윤환, 이한동으로 양분되는 민정계의 세력 구도는 3당 합당 이후부터 시작하여 1997년 신한국당 대선 후보로 이회창이 선출되기 전까지 이어진다.

문민정부 시절 5.18 특별법 제정이나 전노 구속 등으로 인해 잠시 비주류로 밀려났던 민정계는 이회창 총재 체제에서 당직 전면에 기용되면서 부활을 알린다. 이회창과 손 잡은 민정계가 다시 주류로 올라선 반면, 민주계YS 퇴임 이후 급격한 세 감소를 겪는다. 이후 민정계는 이회창과 김윤환의 '연합 계보'로 유지되다가 둘의 관계가 틀어지면서 사실상 이회창계의 근간을 이루는 세력이 된다.

한편, 반 YS 노선을 선언하며 민자당을 탈당하여 자민련에 몸담고 있던 일부 민정계 인사들도 DJP 연합 구상에 따라 내각에 입성하기도 했다.

2000년 16대 총선을 거치면서 민정계 의원의 수는 다소 줄었지만 여전히 이회창은 사무총장, 원내총무, 정책위의장 등 고위당직에 민정계 인사들을 대거 내세웠고 이는 한나라당 내의 소장파들의 저항에 부딪히기도 했다. 그러나 2002년 16대 대선에서 이회창의 두번째 대권 도전이 실패로 끝나면서 민정계는 점차 설 자리를 잃어갔으며, 2004년 노무현 대통령의 탄핵 역풍 이후 17대 총선을 앞두고는 기존 보수 정치인들이 대거 불출마를 선언하거나 공천에서 배제되면서 민정계도 쇠퇴하였다.

그리하여 제17대 국회에서는 한나라당 의원 121명 중 민정계 출신은 이상득, 박희태, 강재섭 등 3명만 남게 되었다.[11]

이후 강재섭도 2008년 18대 총선에서 당대표임에도 불구하고 불출마하였으며, 이상득과 박희태는 6선 의원으로써 제18대 국회에서도 정치 생명을 이어갔지만 각각 구속과 돈봉투 파동으로 인하여 2012년을 끝으로 정계를 떠나게 되었다. 제19대 국회에서는 오랜만에 원내 복귀에 성공한 민정계 출신 강창희 의원이 국회의장 자리에 올랐다. 2016년 제20대 국회에서는 민정계 출신 김종인더불어민주당의 부름을 받고 비례대표로 원내에 입성하기도 했다.

자유민주주의민주화 운동에 적대적인 권위주의 이념을 강하게 가지고 있었다. 또한 반공주의 이념을 가지고 있었으나 전두환 파벌이 냉전적 반공주의라면 노태우 파벌은 소련과 중국 공산당과 수교한 북방정책으로 볼 때는 냉전적 반공주의는 아니고 지금의 반공주의에 더욱 가까웠던 것으로 보인다. 이외에 내셔널리즘적 특성이 있는 국민보수주의 이념이 기초적이었다.[12] 스펙트럼 상으로는 우익 ~ 극우 성향이다.


3. 구성[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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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공식적인 붕괴일은 자민련이 해체된 2006년이나 전두환과 노태우가 무너진 이후로도 이후는 친박친이(이상득계)와 계파를 공유하며 새누리당 말년까지 계파를 어찌어찌 연장한다. 그러나 이후 제20대 총선에서 대부분의 민정계가 공천 탈락 혹은 낙선, 불출마 등으로 인해 정계 은퇴를 하면서 역사속으로 사라지게 된다.[2] 사적으로는 전두환, 노태우와 친구 사이였다.[3] 단, 제5공화국 때는 정치규제를 당하였고 1987년 입당하였다.[4] 김종인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이 더불어민주당 비대위원장 시절 비난을 받았던 원인 중 하나가 바로 민정당 출신이라는 것이다.[5] 대림산업 오너 일가로 박정희 정권 시절에는 신민당 부총재까지 지낸 야당 거물이었다.[6] 민정당 창당 당시 군사정권의 여당이라는 이미지를 희석시키기 위해 재야 및 야당계 인사들의 영입에 적극적이었다. 그 중엔 의열단에 가담했던 유석현은 창당발기위원장을 맡기도 했다. 당시 재야인사 및 야당거물들의 영입은 이회영의 손자인 이종찬이 주도하였다.[7] 제1야당인 민주한국당은 2중대, 제2야당인 한국국민당은 3소대라고 불렸을 정도였다. 여기서 1대대가 민정당이었다. 민정당에 공천신청한 인사를 보안사가 조정하여 야당 후보로 출마시킬 정도였으니, 이때의 야당이 얼마나 있으나마나한 것이었는지 알 수 있다. 당시 민한당 참여를 권유받은 신상우는 아무리 구색맞추기용 이라고 해도 그래도 야당은 있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참여했다고 훗날 이야기했다.[8] 통일민주당 출신은 민주계, 신민주공화당 출신은 공화계라고 불린다.[9] 반김 성향의 민정계 인사들은 이후 1995년 김영삼과 멀어진 김종필과 손을 잡아 자유민주연합을 창당한다.[10] 다만 정호용은 한 때 김영삼의 지지를 선언했던 사람이었다.[11] 본 문서에서는 민정당 당적을 갖고 있던 모든 인물을 기재하고 있지만 본래 언론에서 쓰였던 ‘민정계’의 의미는 민정당 출신 국회의원만을 의미한다. 2006년, 홍준표 의원도 오마이뉴스와의 인터뷰에서 한나라당 내의 민정계 의원은 세 명뿐이라고 언급한 적이 있다.[12] 도널드 트럼프, 홍준표친홍계가 추구하는 대중적 국민보수주의와는 거리가 아주 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