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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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태종의 장인 | 원경왕후의 부친
여흥부원군(驪興府院君) 문도공(文度公)
민제
閔霽

출생
1339년(충숙왕 복위 8년)
사망
1408년 10월 13일[1] (향년 68 ~ 69세)[2]
(음력 태종 8년 9월 15일)[3]
봉호
여흥부원군(驪興府院君)
시호
문도(文度)
본관
여흥 민씨

중회(仲晦)

어은(漁隱)
부모
아버지 - 민변
어머니 - 양천현부인(陽川縣夫人) 양천 허씨 허백(許伯)의 딸
부인
삼한국대부인(三韓國大夫人) 여산 송씨 송선(宋璿)의 딸(1342 ~ 1424)
자녀
슬하 4남 4녀
장녀 - 조박의 처(1355 ~ ?)
차녀 - 삼한국대부인 민씨(1357 ~ ?)[4]
3녀 - 원경왕후
4녀 - 교하 노씨 노한(盧閈)의 처[5]
장남 - 민무구
차남 - 민무질
3남 - 민무휼
4남 - 민무회




1. 개요[편집]


여말선초의 인물.

민변의 아들로 희비 윤씨의 외사촌이다.[6] 민개의 형이며 원경왕후, 민무구, 민무질, 민무휼, 민무회의 아버지. 태종스승이자 장인. 태조의 조카인 이천우와 다섯째 아들인 태종의 장인이면서 겹사돈인 것을 보면 대단한 외척 가문이다. 사후 아들이 모두 사위 손에 죽는 비극이 일어난다.

조선의 제4대 임금이자 최고의 성군으로 꼽히는 세종대왕의 외조부이다.


2. 생애[편집]



2.1. 고려시대[편집]


여흥 사람으로 성품이 온화하고 인자하면서 맑고 소박해 사치를 싫어했다. 독서를 좋아했으며 1번만 읽어도 바로 기억할 정도로 명석했다고 하며 특히 역사에 뛰어났다. 사위인 이방원도 민제에게서 학문을 배우기도 했다.

1357년 4월 19세의 나이로 과거에 급제해 국자직학에 임명되었고 춘추검열로 선발되었다가 1362년 예문관, 1363년 통례문지후, 1366년 전리좌랑, 1371년 예부직랑, 1372년 전리정랑과 지제교, 1373년 성균사예, 1375년 전의총랑과 성균사성, 1382년 판전교시사, 1387년 지춘주사가 되어 선정을 베풀었다.

1388년 판소부시사와 예문관제학에 임명되고 봉익대부의 품계에 올랐으며 8월에 전공판서로 옮겼다가 예의판서 동지춘추관사 상호군이 되었다. 1389년 판도가 되었다가 7월에 전리, 9월에 개성윤 상의밀직사사 겸 예의판서가 되었다. 1390년 첨서밀직사사 겸 도평의사사가 되었고 세자 좌빈객을 겸직했다가 1392년에 한양판윤이 되었다.


2.2. 조선시대[편집]


고려멸망하고 조선이 건국되자 7월에 자헌대부 예문춘추관 태학사에 임명되었다. 1394년 정당문학 동판도평의사사 수문전학사에 임명되었다가 겨울에 명나라에 하정사로 파견되었으며 돌아와서 삼사우복야 보문각대제학에 임명되었다. 1398년 정헌대부가 더해졌다가 옮겨서 보국숭록대부 여흥백 영예조사 겸 판봉상사농시사 수문전 태학사가 되었다.

젊어서 예를 안다고 알려져 숭록대부가 되어 예조를 겸직했다가 1399년에 지공거가 되고 겨울에는 판삼사사가 되었으며, 1400년 3월에 수충보조공신에 봉해지고 보국숭록대부 문하우정승 판도평의사사병조사 겸 판상서사사 보문각태학사 감예문 춘추관사 영경연사 여흥백으로 작위가 올려졌다. 4월에 좌명공신으로 고치고 9월에 좌정승으로 옮겼으며, 11월에 태종이 즉위하고 원경왕후가 중전이 되자 순충(純忠)이라는 호를 받으면서 여흥백에 봉해졌고, 1401년에는 순충동덕보조찬화공신의 호가 내려져 여흥부원군(麗興府院君)에 봉해지게 된다.

하지만 1402년에 정종의 만류로 취소되었지만 태종이 가례색까지 설치하려는 시도까지 하며 의빈 권씨를 후궁으로 들이고, 이후 몇달 뒤인 4월에 이러한 태종의 행동을 문제삼은 상소가 올라왔는데 그 표현이 문제가 되어 논란이 된다. 그런데 이 상소를 올린 이 중 한명이 민제의 문생이었던 전가식이었고, 그가 상소를 올리기 전에 민제에게 사실 확인을 한 것이 순군부에서 국문을 받던 중에 밝혀지게 되어 그 이후로 문생과 거리를 두게 된다.[7] 거기다 7월에는 관리 추천을 잘못해서 윤곤, 이공효와 함께 탄핵당하기에 이르는데[8], 다만 그 해 8월에는 태종이 원경왕후와 함께 그의 집에서 잔치를 하였고, 11월에 조사의의 난이 일어났을 때는 태종이 직접 출전하면서 그를 수성도통사에 임명하여 도성 수비를 맡기고 떠났으며, 태종 6년인 1406년 12월에도 그의 집에서 태종과 원경왕후, 그리고 왕자들까지 참석한 잔치가 열리는데, 이 때 후술되었듯 태종과 서로 말을 놓는 모습을 보이기도 하는 등 원만한 모습을 보여준다. 그러나 아들인 민무구와 민무질이 태종의 양위 소동 당시 보였다는 반응이나 과거에 한 발언들, 그리고 당시 세자였던 양녕과 명나라 황녀 간의 혼인 문제와 연관된 것 등이 문제가 되어 두 아들이 유배형에 처해지면서 비극이 시작된다.


2.3. 말년[편집]


1407년 아들들인 민무구과 민무질을 살리기 위해 먼 지방에 유배보낼 것을 요청해 각각 여흥, 대구에 유배되도록 했으며, 1408년 9월, 병으로 눕다가 향년 70세로 사망했다.[9] 묘소는 북한에 있으며, 현 북한의 행정구역을 기준으로 하면 개성시 광수리에 있다.


3. 여담[편집]


  • 상술한대로 사치를 싫어하는 소탈한 성격의 소유자인데, 이에 관한 일화가 김창윤이라는 사람이 집필한 《조선왕조 사람들》에 실려있다. 민제는 태종의 장인이 되어 부원군 작위를 받았지만 이를 내세우기를 꺼렸다. 그래서 항상 사치를 멀리하고, 퇴근하고 오면 평상복으로 갈아입고 이웃 사람과 바둑두는 것으로 소일하고는 했다. 근데 어떤 녹사 하나가 민제의 집에 찾아갔다가 그가 없어서 이웃집에 왔는데, 그의 얼굴을 몰라서 민제를 보고도 알아보지를 못했다. 그래서 민제에게 무례하게 굴면서 외모를 놀렸다. 이에 그는 짐짓 모르는 척하며 부원군을 찾아왔다는 녹사에게 자기는 부원군이 될 수 없냐고 묻자 "암탉은 울지 못하고 수탉은 알을 못 낳지."라며 비웃었는데, 이웃 사람이 뒤늦게와서 "부원군 나리를 기다리게 해서 죄송하옵니다."라고 사죄하자 녹사는 그대로 빤스런했다는 일화가 있다.

  • 아들들의 이름이 '무구(無咎, 허물이 없다)', '무질(無疾, 병이 없다)', '무휼(無恤, 가여움이 없다)', '무회(無悔, 후회가 없다)'로 '無~(~가 없다)' 돌림인데, 각 글자 자체들은 모두 부정적인 의미이지만 그걸 이어서 '~가 없다' 식의 긍정적인 의미로 지은 게 특이하다. 즉, 이중부정으로 이름을 지은 셈이다.[10] 물론 아들들의 최후를 보면 이름대로 살지는 못했다.

  • 조선의 개국공신들 중 한 명이자, 이방원의 킹메이커인 하륜과 개인적인 친분이 있었다. 하륜은 진보적 정치인으로 명망이 높았던 정도전에 비견되는 강경한 급진주의자라서, 민생 안정을 위한 각종 개혁 정책을 불도저처럼 밀어붙여서 진행나간 덕택에 이후에도 자신이 왕으로 옹립한 이방원에게 엄청난 신임을 얻었다.[11][12] 문제는 이를 위해 기득권 세력과의 충돌도 불사하는 강직한 성격의 소유자였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그가 정치적으로 화를 당할 것을 우려한 민제가 "그러다가 정도전 꼴이 나겠네그려."라고 충고하니, 하륜은 태연작약하게 "운명은 하늘이 정해주겠지."라고 담담하게 이야기했다. 근데 정작 정치적으로 박살이 난 쪽은 민제였고,[13] 하륜은 죽을 때까지 부귀영화를 누리다가 천수를 누리고 편안하게 눈을 감았다.

  • 아들 민무구 형제가 유배당하기 전에 왕이 된 태종이 원경왕후와 왕자, 공주들을 대동하고 민제의 집을 찾은 적이 있었는데 분위기가 좋았는지 태종은 민제를 '사부님'이라 부르고 민제 역시 태종을 '이 선달'이라고 부르며 연회를 즐긴 적도 있었다.[14] 어찌 보면 조선 역사상 신하의 신분으로 합법적으로 공식 석상에서 왕에게 말을 놓았던 인물인 셈.[15]

  • 자신의 동생 민개와 나이차이가 무려 22살이나 차이가 난다.


4. 대중매체[편집]



4.1. 용의 눈물[편집]


배우는 송재호.[16] 역사적 모습 그대로 매우 온화하고 소박한데다가 강직한 인물로 나온다. 국왕하인[17]장인으로서 충분히 권력을 휘두를 수 있는 위치에 있음에도 줄곧 권력다툼에 관여하지 않고 사위에게 따끔한 충고도 아끼지 않으며 이 왕비가 된 이후에도 권력을 휘두르지 말라며 마구 꾸짖는 대쪽같은 모습으로 나온다. 사위가 왕이 되기 전의 권력다툼에서도 사위를 지지하기는 하지만 하륜을 소개시켜주거나 정안군에 대한 공세에 부동의하는 수준이지 본격적으로 상대와 배틀을 벌이는 수준은 아니다. 이러한 모습은 민제 자신이 정치인보다는 학자 스타일에 가까워서 권력에 초연한 것도 있었지만 왕자의 난을 겪으면서 태종이 외척 정치를 극도로 경계하고 있음을 일찌감치 파악하여 가문의 안위를 걱정했던 점도 반영된 것이었다.[18] 덕분에 아들들이 권력을 휘두르려고 할 때 언제나 엄격한 스승이자 아버지로서의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태종도 그런 장인을 존중하며 따끔한 충고도 겸허하게 수용하는데 오죽하면 태종이 입버릇처럼 하는 말이 "자신이 가장 존경하는 사람이 바로 장인어른"이라는 소리다.[19]

한양으로의 재천도 이후 세월이 흐른 2부 시점에서는 나이가 들어 병석에서 자리보존하는 처지였고 민무구민무질이 권력에 취해 갈수록 방자하게 구는 것에 몇 번이고 따끔하게 꾸짖었다. "전하께서는 물항아리에 물을 7홉만 부으시는 분이다. 그 물이 8,9흡 상승할 경우 물항아리를 깨뜨리시는 분이다. 너희는 물이 아예 물항아리 밖으로 넘치고 있어."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무구와 민무질의 태도는 바뀐 것이 없으며 결국 그로 인해 민제의 사망 직전 아들들이 숙청당하고 딸 원경왕후도 비참하게 몰락하면서 민제의 우려는 현실이 되었다. 그 신호탄이 된 이방원의 첫 양위 파동에서 하륜이나 이숙번도 태종의 정확한 심중을 몰라 난감해하던 차에[20] 유일하게 그 진위를 예측하고 있었고 이런 때 민무구와 민무질이 원경왕후를 찾아갔다는걸 알고 경악한다. 이후 아들들을 불러 가문이 멸문지화의 위기에 처했다고 말하며 유일한 희망은 하륜 뿐이라 말하지만 그 때 하륜이 좌정승 자리에서 물러난다[21]는걸 알고 절망한다. 결국 두 형제가 직위가 박탈되고 유배형에 처해지자 집안에 사람의 발길이 끊기는 지경에 처했다. 그러나 그 피도 눈물도 없는 이방원도 민제가 살아있을 때는 차마 민무구와 민무질 형제를 사사하지 못했고 민제를 대할 때는 극진한 예우를 갖춰 대했다. 민제가 죽기 직전에 실제 역사대로 태종에게 제발 자신의 아들들을 내쳐달라고 간청하는 상소문을 올리자 역시 장인어른이시라며 탄복하는 장면 또한 나온다. 죽기 전 충녕대군이 심온과 결혼한다는 소식을 듣고 "심온 그 사람도 참 불안하겠구나. 왕실의 사돈이란게 결코 편한 자리가 아니거늘..."이라고 말하며 동병상련의 형태로 우려하는데 그 우려도 현실이 되었다.

이성계가 세상을 떠나자 병석에 누운 몸에도 불구하고 상복을 입고 매일 곡을 하다가 병세가 악화되어 임종을 눈앞에 두게 된다. 원경왕후와 그 아래 대군들의 필사적인 호소로 귀양에서 일시 풀려난 민무구와 민무질 형제가 찾아오자 그 둘에게 "전하는 이미 너희들을 용서할 생각이 없으니 지금이라도 낙향하라"고 말하고 여전히 그 진위를 이해하지 못하는 네 아들들에게 "이 집의 문을 걸어닫고 한양에 다시는 얼씬도 하지 않는 것만이 이 가문을 지킬 길"이라는 당부를 끝으로 숨을 거두고 만다. 민제 본인은 당대의 존경받는 대학자였지만 민무구와 민무질의 죄인 이미지 때문에 여기저기 부고를 돌렸음에도 문상을 오는 사람이 없다시피 한 상황이었다. 그나마 온 건 생전의 친분으로 온 하륜, 두 형제에게 죄가 없다고 공개적으로 주장한 이지성, 부원군에 대한 예의 차원에서 온 태종 일가 뿐. 이 때는 그나마 최소한의 제동을 걸어줄 존재였던 이성계가 앞서 세상을 떠난터라 이방원은 철저하게 민씨 집안을 숙청하고 만다. 민제의 상이 끝나자마자 두 형제를 제주도로 유배보내 버렸고 이에 반발하는 양녕대군의 탈선이 심해지자 아예 둘을 사사할 것을 결정하고 만다. 민무구와 민무질이 사사되기 전날 민무질의 에 나타나 "이제 갈 때가 되었다"고 슬프게 말했다고 하며 이후로 종종 이방원이 민제와 그 자식들을 비교하며 디스하는 가운데 민무구와 민무질 형제를 사사하는 과정에서 중전과 갈등을 빚을 때에도 용포를 잡은 부인과 실랑이를 하다 패대기치며 "장인어른의 반만 빼어닮았어도! 부끄럽다!"하고 소리지르는 장면이 있다. 하지만 심온은 딱히 민씨 형제들처럼 권력을 휘두르지도 않았는데 집안이 멸문지화를 당한 것을 살펴보면[22] 과연 원경왕후와 동생들이 얌전히 지냈다고 해도 가만 놔뒀을까?[23]


4.2. 정도전[편집]


2014년 KBS 드라마 <정도전>에서는 배우 안승훈[24]이 연기했다. 드라마 조선 건국 후인 후반부에 들어서는 시점에서 심효생 등과 함께 등장하기 시작하는데 <용의 눈물>과 다르게 권력욕을 부리는 것으로 묘사된다.

사위 이방원을 음으로 양으로 지지하고 대권을 잡는 데 적극적으로 협력하는 모습으로 역사와는 달랐다. 정사에도 하륜과 이방원의 접점이 되는 것이 팩트이긴 하나, 정도전에서는 사위가 책사를 얻게끔 적극적으로 엮어주기도 하고 딸 군부인 민씨와 함께 조준을 자기 편으로 설득하기도 한다. 정도전을 명나라가 트집잡을 때 정도전을 명나라에 보내라 말하려다가 하륜에게 제지당한다. 조영무와 함께 정도전에게 직접 가서 말다툼을 하는 등 아들 민무구, 민무질 등과 같은 결의 인물로 그렸다.


4.3. 육룡이 나르샤[편집]


2015년 SBS 드라마 <육룡이 나르샤>에서는 배우 조영진이 연기했다. 해동갑족의 수장격 인물로 나오지만 그에 대한 자부심이 지나쳐서 사돈인 이성계와 사위인 이방원을 일족으로 보지 않을 정도이며 딸에게도 이 점을 분명히 할 정도였다. 실제로 사위인 이방원이 폭탄으로 협박을 해야할 정도의 정적 관계에 놓이는 모습들이 나오기 때문에 역사적 모습과는 상당히 괴리가 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장인의 그런 모습과 아내인 원경왕후가 부부와 가족 관계가 아니라 그런 냉혹한 정치적 파트너 관계로 있는 것을 보면 장차 앞으로의 미래를 볼 때 이방원이 왜 그리 처가댁을 개박살을 내놨는지 보여주는 행보를 이해할 수 있을 정도라고 하겠다. 이성계가 위화도 회군으로 주도권을 장악한 후에는 이방원의 요청에 따라 도당에 입성하여 혁명파를 지원하고 이성계가 낙마한 후에는 사돈을 걱정하는 모습을 보이는 등 점차 이방원과 가까워지는 모습을 보인다. 조선 건국 후에는 하륜과 함께 이방원 파로 활약한다.


4.4. 태종 이방원[편집]


2021년 KBS 드라마 <태종 이방원>에서는 배우 김규철[25]이 연기했다. 극 중에서는 '예의판서' 역으로 시작하는데 우왕의 명을 받은 군사들이 들이닥치고 정국이 혼란해지자 "만일을 위해 우왕과 최영에게 협조하는 시늉이라도 하자"고 제안하나 부인 송씨와 딸 민씨의 설득에 의해 결국 무기를 숨기고 협조에 동참하지 않는다. 숫제 무장 느낌이 나던 <정도전>과 숙청을 안 당하는게 이상할만큼 야심을 드러내던 <육룡이 나르샤>의 묘사에서 벗어나 역사 속 학자의 이미지로 돌아왔다 여겨졌으나, 이쪽도 이방원의 쿠데타의 정치적 기반을 만들어 놓는 등 적극적으로 가문의 번영을 위해 애쓰는 모습을 보이면서, 권력에 대한 욕망이 존재함을 드러냈다. 다만 자신의 권력욕 보다는 문주로서 가문을 더 번창시키는 데에 더 중점을 두고, 이방원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도록 노력하는 등 용의 눈물 시절의 이미지도 절충되어 있다. 더불어 1차 왕자의 난에서 민제의 공적이 대거 늘어나 훗날 태종의 민씨 숙청의 필요성이 생겼다.

전체적인 행적들은 민제(태종 이방원) 참조.


4.5.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편집]


태조, 정종실록, 태종실록에서 등장하는데 태조, 정종실록에는 조연에 불과해서 별로 등장이 없었지만 태종실록부턴 주연으로 등장하기 시작한다. 그는 생전에 바둑을 두면서 민무구, 민무질에게 “주상께선 우릴 좋게만 보시지는 않는 것 같다며 모두들 자중해라.”라면 충고를 했다. 이후 1408년에 70세를 일기로 세상을 뜨면서 등장종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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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율리우스력 10월 4일.[2] 연 나이 69세.[3] 세는나이 70세.[4] 이천우의 정부인.[5] 노사신의 할머니.[6]충정왕의 외당숙에 해당된다.[7] 태종 2년 5월 11일 계사 1번째기사[8] 태종 2년 7월 11일 임진 1번째기사[9] 여담으로, 민제 본인이 숨지기 4개월 전에는 사돈인 이성계가 먼저 세상을 떠났다.[10] 민제의 조카들(민제의 동생 민개(閔開)의 아들들)의 이름 역시 '불해(不害, 해로움이 아니다)', '불탐(不貪, 탐욕이 아니다)'인데, 민제의 아들들과 비슷한 방식으로 이름을 지었다.[11] 몰라서 그렇지, 이방원도 자기랑 정치적으로 대립했던 정도전은 물론, 자기 아들인 세종 못지않은 급진적 개혁론자였다.[12] 신문고를 설치한 것도 하륜의 업적이다. 당시 조정에서 신문고 제도의 현실적인 효용성에 의문을 제기하는 의견이 빗발치자, 그래도 백성들이 국가에 직언할 수 있는 창구가 있어야 한다는 이유로 그냥 밀어붙였다.[13] 본인은 무사했으나, 아들들이 전부 사사되었다.[14] 태종실록 12권 태종 6년 12월 10일자 기록으로 기록에서는 임금이 매우 즐거워하여 서로를 부르기를 잠저때(=태종이 왕이 되기 전)와 같이 하였다며 민제가 임금을 선달이라 하고 임금이 민제를 사부라 하였다고 기록하였다. 다만 이 때도 뭔가 있긴 했는지 잔치가 파하고 태종이 돌아가는데 민제가 문 밖에 나와 전송하니 태종이 들어가라고 했지만 민제는 황공해하며 들어가지 못하며 말 앞으로 나아가 섰는데 무질이 이에 아버지가 물러나셔야 임금께서 돌아간다고 하자 민제는 네가 어찌 아느냐 말하고 기록은 결국 민제는 공읍하여 물러나지 않았고 임금은 10여보를 걷다가 말에 올랐다는 것으로 끝난다.[15] 고려의 사회적 통념에서 장인도 아버지였고 유학적으로 스승은 아버지와 같았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말을 놓은 것이 이상할 일은 아니다. 물론 일단 두 사람은 군신관계인지라 진짜로 말을 놓은 상황인건 좀 굉장하다. 당장에 세조 시절에는 정인지가 세조를 너라고 불렀다고 조정이 발칵 뒤집어졌다. 정인지는 원로대신일 뿐 거사를 함께 치른 동기도 아니고 사적인 혈연·인척 관계도 없는데다가 사저가 아니라 조정에서 벌어지는 술자리에서 만취하여 한 것이니 격이 다르긴 하다. 결정적으로 태종-민제의 관계는 아직 세조 때처럼 왕조가 어느 정도 안정되고 나서가 아닌 왕조 극초기이고 장인-사위 관계를 고려 시절에 맺었기 때문인 점이 크게 작용한다.[16] 1998년 KBS 드라마 <왕과 비>에서는 세종 역.[17] 파일:졸지에 신분강등 된 민제.jpg
용의 눈물 자막팀의 실수로 졸지에 자기 사위의 하인이 돼 버렸다(...)
[18] 무인정사 당일, 이복동생 방석의 세자책봉에 찬동한 대신들을 도륙하는 방원의 모습을 보며 일찌감치 왕실의 외척인 자신의 가문의 운명도 직감한 듯 굉장히 어두운 표정을 짓는 것으로 나온다. 다만 이를 일찌감치 예감했으면서도 자식들에게 시원스럽게 설명해주지 않는다. 늘 자중하라고 말하면서도 왜 자중해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설명하지 않으니 자식들도 시청자들도 답답하기만 할 노릇. 물론 설명한다고 쉽사리 알아들었으리라는 보장도 없고 사실 본인도 권력을 과하게 탐하던 사람은 언젠간 최후가 비참하다는 역사적 교훈만을 알았을 뿐이지 구체적으로 그게 어떻게 나타날지는 몰랐을 것이다. 아들들 성정을 보면 자세히 말해주면 되려 이방원을 경계하다가 우려하던 일만 더 앞당길 수 있을수도 모르기도 했다. 작품 외적으로 보면 뭘 하더라도 자식들이 사위에게 죽었다는 역사적 사실을 바꿀 수는 없었을 것.[19] 실제로 가장 존경하는 사람은 아버지인 태조겠지만 그건 당연한 일이라 언급할 필요도 없었던듯. 혹은 태종이 아버지를 대하는 태도가 존경을 뛰어넘은 외경의 경지라 그랬을지도 모른다.[20] 양녕대군의 경우 이 소동으로 누군가 또 숙청될거라 예상은 했지만 그것이 자신의 외숙들이 되리란 것까지는 아직 모르다가 양위 철회 후 감을 잡게 된다.[21] 태종이 세 정승들을 불러 민무구와 민무질에 대해 숙청을 암시했을 때 조영무와 함께 아량을 베풀어달라고 변호하다가 이제 좀 쉬어야겠다는 말과 함께 조영무와 함께 정승 자리에서 물러나게 되고 만다.[22] 심온의 집인 청송 심씨여흥 민씨만큼 명문가였고 무엇보다 심온의 아버지는 이성계가 공양왕을 옹립할 때 함께하던 9명 중 1명인 심덕부다. 동생도 고관직에 올랐고 본인도 처세를 잘해서 주변의 평판이 좋았기에 이방원으로서는 자기 사후 외척들이 난립을 걱정하지 않을 수가 없었을 것이다.(민제도 심온과 마찬가지였으나 그의 아들들인 민무구와 민무질은 누이와 자기들의 공만 믿고 방자하게 행동하였다. 민제는 개국공신이 아니었으나 심덕부는 고려 말부터 조선 건국에 큰 역할을 하던 사람이었으니 비교 대상이 되지도 않았다.)[23] 실제 민제의 3남과 4남인 민무휼과 민무회는 형들과 달리 딱히 죽을 짓을 한 것도 아닌데 죽였다. 죽인 이유도 고작 "언젠가 좋은 날이 올 것"이라고 한 말을 꼬투리 잡아 역모를 꾀한게 아니냐고 몰아붙여 죽였다. 이미 윗형제들을 죽인 이후였고 자신을 원망하는 원경왕후까지 고려한다면 훗날을 도모할 수도 있기 때문에 처벌을 준비해버린 것 같다.[24] 2002년 SBS 드라마 <야인시대>에서는 이화룡 역, 2004년 KBS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에서는 녹도 만호 정운 역.[25] 2003년 KBS 드라마 <무인시대>에서는 의종 역, 2015년 KBS 드라마 <징비록>에서는 도요토미 히데요시 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