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중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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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내가 죽으면 반드시 이 곳에 묻어라. 다시 능묘를 만들지 마라."[3]
吾死 必葬於此. 不須更作陵墓.
《삼국사기》에 기록된 임금의 유언.
고구려의 제4대 군주. 대무신왕이 죽자 태자(뒷날의 모본왕)의 나이가 어려 즉위했다. 《삼국사기》에는 대무신왕의 동생이자 유리명왕의 아들이라고 했고, 《삼국유사》에서는 대무신왕의 아들이자 모본왕의 동생으로 적었다. 하지만 후자가 맞다면 태자가 어려서 즉위했다는 말이 모순이니 오기로 보인다. 일반적으로는 《삼국사기》의 기록에 따라 대무신왕의 동생으로 알려져 있다.
2. 성씨 논란[편집]
《삼국유사》의 기록에 따르면 성이 해씨라고 한다. 이름이 '해색주'(解色朱)라 실제로는 고씨가 아니라 해씨라는 설이 있다.
3. 내정[편집]
5년 동안 재위했는데 좋은 일은 하나도 없었다. 자연 재해 때문에 민심도 흉흉했고 잠우락부(蠶友落部)의 10,000여 가가 한나라의 낙랑군에 귀부했다.
한 가지 특이한 점이 있다면 석굴에 매장된 것이다. 민중원에서 사냥하다가 스스로 석굴에 장지를 정했다고 한다. 민중원에 능을 썼다고 왕호도 '민중왕'이 되었다.[4] 그런데 재위 4년차에 왕이 사냥을 나갔다가 그해 7월, 자기가 죽으면 동굴에 묻어달라고 하더니 바로 다음해에 죽는다. 지병이나 노환이 있어 이미 오늘 내일하고 있었다면 사냥을 나가지 않았을 가능성이 크니 아마 사냥을 나갔다가 부상을 입어 얼마 안돼 죽은 것이 아닌가 싶다.
4. 《삼국사기》 기록[편집]
《삼국사기》 〈민중왕 본기〉
一年冬十月 민중왕이 즉위하다.
一年冬十一月 민중왕이 대사면을 실시하다.
二年春三月 민중왕이 잔치를 베풀다.
二年夏五月 홍수로 백성이 굶주려 창고를 열어 구제하다.
三年秋七月 왕이 노루를 잡다.
三年冬十一月 남쪽 하늘에 혜성이 나타나다.
三年冬十二月 겨울의 국내성에 눈이 오지 않다.
四年夏四月 민중원에서 사냥을 하다.
四年秋七月 왕이 석굴에 장사지내달라고 하다.
四年秋九月 동해사람이 고래 눈을 바치다.
四年冬十月 10,000여가가 낙랑군으로 가서 후한에 투항하다.
五年 민중왕이 붕어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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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형인 대무신왕이 4년에 태어났고 아버지 유리명왕이 18년에 사망하였으므로 출생년도는 대략 5년에서 18년 사이로 사망 시 나이는 많아봐야 40대 초중반일 것이다[2] 마선구석묘자석굴 추정[3] 옛날에는 왕릉을 만든다 하면 강제징용, 강제이주 등으로 인해 그 일대가 아주 쑥대밭으로 변했다. 그래서 민심이 매우 안 좋을 수밖에 없다. 대무신왕의 능을 만들 때 백성과 지방 유력층들의 반발을 느낀 민중왕이 자기 능은 동굴에 작게 만들라고 한 것으로 보인다.[4] 민중왕뿐만 아니라 고구려 왕들 중에는 장지의 이름을 따서 왕호가 기록된 이들이 많다. 예를 들어 모본왕, 고국천왕, 중천왕, 서천왕, 미천왕, 고국원왕, 소수림왕, 고국양왕 등이 모두 장지가 왕호가 된 경우이다. 또한 유리명왕과 보장왕은 이름을 그대로 써붙인 경우이고, 차대왕과 신대왕은 다음 왕, 새로운 왕이라는 뜻이다. 다른 경우로는 장수왕(長壽王)이 있는데 오래 살아서 장수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