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러드 필모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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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합중국 제13대 대통령
밀러드 필모어
Millard Fillmore


파일:Fillmore.jpg

출생
1800년 1월 7일 (224세)
미국 뉴욕주 서머힐
사망
1874년 3월 8일 (향년 74세)
미국 뉴욕주 버팔로
재임기간
제12대 부통령
1849년 3월 4일 ~ 1850년 7월 9일
제13대 대통령
1850년 7월 9일 ~ 1853년 3월 4일
서명
파일:밀러드 필모어 서명.sv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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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
아버지 나다니엘 필모어 Jr.
어머니 포비 밀러드
배우자
아비게일 파워스 (사별)
캐롤리나 카마이클 매킨토시 (재혼)
자녀
아들 밀러드 파워스 필모어
메리 아비게일 필모어
학력
고졸
종교
개신교 (유니테리언)
신체
175cm
소속 정당
[[휘그당|

휘그당
]] → [[Know Nothing|{{{#!wiki style="display: inline; padding: 2px 3px; border-radius: 3px; background: #d99fe8; font-size: .9em"
미국당]]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Millard_Fillmore_by_George_PA_Healy,_1857.jpg

백악관 공식 초상화

1. 개요
2. 생애
3. 인물됨과 일화



1. 개요[편집]


미국의 제13대 대통령. 전임자 재커리 테일러의 급작스러운 사망으로 대통령이 되었다.

1800년생으로 초대 조지 워싱턴 이래로 이어진 18세기 태생 계보의 마지막 대통령이다. 후임자 프랭클린 피어스부터 19세기 출생의 계보가 시작되었고 그 뒤를 이은 제임스 뷰캐넌이 마지막 18세기 태생으로서 대통령을 지낸 이후로는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까지 쭉 19세기 출생자들이 대통령이 된다.


2. 생애[편집]


뉴욕주의 통나무집에서 태어났다. 부모가 재봉사였기에 어렸을 때 옷감 제작 기술을 배워 재단 견습을 했다. 고등학교 졸업 이후인 1819년부터 판사 월터 우드의 밑에서 법률을 공부했으며 결혼 후에는 버팔로 시에서 변호사로 사회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뉴욕 주 민병대 여단장으로 복무하기도 했다.

1828년 주의원으로 선출된 것으로 정치에 발을 들이게 되었으며, 그 후 하원의원으로 6년간 재직하다가 1844년 뉴욕 주지사에 도전했지만 패하였다. 대신 회계감사관이 되어 뉴욕의 금융 시스템 개선을 위해 노력하였고 1848년 부통령 후보로 지명되었다. 필모어를 내세워 인구가 많은 뉴욕주의 지지를 받는다는 전략이었고, 덕분에 그는 부통령에 당선되었다.

그런데 취임한지 1년여 만에 재커리 테일러 대통령이 사망하고 만다. 부통령이었던 필모어는 대통령직을 승계해 미국의 제 13대 대통령이 되었다.

대통령이 되자마자 중요한 문제를 결정해야 했는데 1850년의 타협안과 도망 노예법이 그것이었다. 그는 테일러에 비교해서 노예제에 관대해 보였지만, 실제로는 노예제에 관대하다기보다는 전형적인 도그페이스 북부 정치인으로써, 노예제가 도덕적으로 악하기는 하지만 연방정부가 규제할 사항이 아니라는 시점을 견지했다. 그는 부통령 시절 1850년 대타협에 대한 토론을 상원의장으로써 주재했고, 대통령인 테일러에게 만약 표가 50 대 50으로 갈린다면 타협에 찬성할 것이라 통보한 바 있다. 그래서 그는 대통령이 되자 1850년 대타협에 서명한다.

그렇지만 이 법은 문제가 있었는데, 도망 노예법은 남부의 노예 소유주가 맘대로 남의 주에 들어와 노예를 다시 잡아갈 수 있게끔 한 법이었다. 이에 대항해 북부가 이러한 노예주들이 들어오지 못하게끔 하는 법을 만드는 등 아수라장이 되자, 결국 이로 인해 북부의 지지를 잃게 되어 재선을 위한 두 번째 대선 후보가 되는 데 실패했다.

한편 그의 외교 정책은 기존과 달리 태평양, 특히 아시아에 치중되어 있었다. 매슈 페리 제독을 일본에 파견하여 쿠로후네 사건으로 일본을 강제 개항시킨 게 대표적이다(다만 일본과의 조약은 후임자인 피어스 때 체결되었다). 또한 프랑스의 나폴레옹 3세하와이 왕국에 관심을 보이자 먼로 독트린을 내세워 막아버렸다.

미국 국회의사당(캐피톨)을 지금의 모습에 가깝게 증축하도록 명령을 내린 인물이기도 하다. 그 유명한 돔이 바로 그의 시대에 설계되었고, 이후 십수년의 세월을 걸쳐 완성되었다.

백악관을 떠난지 3년 뒤인 1856년 휘그당 내 개혁파들이 공화당으로 떠나버리고 미국당의 후보로 출마했지만 표를 분열시키는 결과를 초래하기도 하였다. 이 선거에서도 패한 휘그당은 결국 역사 속으로 사라짐에 따라 그는 마지막 휘그당 출신 대통령이 되었다.

3. 인물됨과 일화[편집]


상당히 유머 감각이 없었다고 한다. 이는 옥탑방의 문제아들에서 방영되었다.

장로회인 아버지와 달리 그는 삼위일체를 부인하는 유니테리언이었다고 한다.

버팔로 대학을 창립하는데 공헌한 인물이기도 하다.

1853년 첫 아내이자 대통령 시절 영부인 애비게일이 죽은 후 1858년에 부유한 과부와 재혼을 하게 되었는데 새로 얻은 집이 꽤나 넓어서 한동안 그 지역 사교계의 중심지가 되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한 가지 재미있는 건 첫 아내 애비게일은 자신을 가르쳤던 교사였다고 한다. 사제결혼을 이룬 케이스. 실제로 애비게일이 필모어보다 2살 많다. 말하자면 미국 대통령 계의 난 선생이고 넌 학생이야인 셈?

남북전쟁 중에는 링컨을 지지했는데 이른바 '연방대륙군(Union Continentals)'를 조직하여 신병 모집과 전쟁물자 조달을 위한 자금운동모금활동을 벌였다. 그러나 전쟁이 계속되자 입장을 바꾸어 공화당링컨을 비판했고, 링컨 재선 때에는 그 상대 후보인 조지 매클레런을 지지했다.

링컨 전후의 대통령들이 그렇듯 전반적으로 대통령 인기 순위에서는 하위권에 머무르고 있다.[1] 해리 S. 트루먼은 그를 평하기를, "그는 페리 제독을 서부로 보내 일본을 개항시키는 위대한 일을 했지만 남북전쟁을 막는 것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하지 못했다."고 평가했다. 사실 트루먼은 프랭클린 피어스 문서에서도 보듯이 남북전쟁 직전 혼란기의 대통령들을 매우 신랄하게 비판했다. 실제로 미국에서는 거의 인지도가 없지만, 일본에서는 일본 개항으로 인해 인지도가 있다. 자국보다 외국에서 더 유명한 대통령들 중 한 명.

퇴임 후인 1855년에 영국옥스퍼드 대학교의 초청을 받아서 강연을 한 적이 있는데, 대학 측에서 그 기념으로 라틴어 명예 박사 학위를 주려고 하자, "저는 제가 모르는 분야의 학위를 받을 수는 없습니다."라며 정중히 거절했다고 한다.[2] 일자무식이면서도 명예 박사 학위받고 박사라고 자칭한 독재자놈들보다 수 억 배는 더 낫다[3][4]

역대 미국 대통령들 중에서 생일이 가장 빠르다.[5]

휘그당 출신 대통령들[6] 중 유일하게 버지니아주 출신이 아니다.[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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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그나마 최하위권은 하딩, 뷰캐넌, 존슨, 피어스 4명이 거의 독차지하는지라(...) 최하위권은 면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슬프게도 뒤에서 10위권을 면한 적은 단 1번도 없다. 타일러, 윌리엄 해리슨과 비슷한 처지.[2] 위에서 언급했듯이, 필모어는 가난한 재단사 집안에서 태어나서 고등학교까지만 간신히 마쳤다. 그래서 그는 라틴어에 능숙하지 못했다.[3] 반면에 앤드류 잭슨하버드 대학교로부터 라틴어 명예 박사 학위가 주어지자, 이를 덥석 받고는 라틴어 몇 마디를 읊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이는 와전된 것으로, 실제로는 "나는 학위를 받았으나 아는 문장이라고는 E pluribus unum(다수로 이루어진 하나, 미국의회의 표어이다), 이뿐이오." 라고 말했다. 이원복먼나라 이웃나라에서 잭슨과 필모어의 이 일화를 인용하며 "배우지 못한 열등감에 시달리던 잭슨에 비해 필모어는 적어도 자기 분수는 알던 모양이지?"라고 아주 잭슨을 모욕적으로 표현했다.[4] 라이베리아의 가난한 원주민 가정 출신이라서 정규 교육을 받지못했던 새뮤얼 케니언 도는, 1982년에 대한민국을 방문한 와중에 서울대학교로부터 명예 정치학 박사 학위를 받았는데 이걸 무척이나 자랑스러워해서, 이후에 수시로 이 학위를 내세워서 자신을 '도 박사'(Doctor Doe)라고 자칭하고 다녔다.[5] 반면 생일이 가장 늦은 미국 대통령은 17대인 앤드루 존슨이다.[6] 윌리엄 헨리 해리슨, 존 타일러, 재커리 테일러, 밀러드 필모어[7] 필모어는 뉴욕주 출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