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티아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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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개요
1.2. 생애
1.3. 대중매체에서의 밀티아데스
2. 32대 교황멜키아데



1. 페르시아 전쟁 당시 고대 그리스의 군인[편집]



1.1. 개요[편집]


파일:external/static.panoramio.com/32057506.jpg
마라톤 평원에 있는 그의 동상.
고대 그리스명장. 페르시아 제국으로부터 아테네를 구한 그리스의 영웅.


1.2. 생애[편집]


페르시아 전쟁 당시 아테네명장으로 활약했다. 마라톤에서 페르시아군에 맞서 싸우자고 아테네 시민들에게 주장하였으며, 이로 인해 성사된 마라톤 전투에서 칼리마코스와 함께 대승을 거둔다. 열세였던 병력으로 당대의 그리스군답지 않은 공세적 전술을 펼쳤으며, 그의 과감한 전술은 그리스군 특유 중장보병의 강력함과 시너지를 이루어 페르시아군을 혼란에 빠뜨리게 하였다.

동양과 서양 문명권간 최초의 충돌에서 대승을 거두었다는 점에서 굉장히 높은 평가를 받아 역사학자인 풀러(John Frederick Fuller)는 "마라톤 전투 이후부터 세계 역사는 서양이 지배하게 되었다"라고 주장하기도 하였으니[1] 밀티아데스의 위상을 쉬이 짐작할 수 있다. 몽골, 오스만 : ?? 동유럽은 서양이 아니라 카더라 당연히 역사에 있어서 시대의 승자는 몰라도 역사 자체의 승자는 있을 수 없다.

허나 이러한 눈부신 전공에도 불구하고 밀티아데스는 훗날 파로스 섬 공략에 나섰다가 실패하고 중상을 입는다. 게다가 아테네로 귀환했을때 의회에서 탄핵을 받아 공금 횡령 혐의로 기소되어[2] 수감되었다가 상처가 악화되어 옥사하는 비극적인 최후를 맞았다.[3] 그의 아들인 키몬 역시 페르시아 전쟁 이후 친(親) 스파르타 보수파 정치가로 활약하다 페리클레스를 비롯한 민주파에 의해 밀려나고 말았다.


1.3. 대중매체에서의 밀티아데스[편집]


토탈 워: 아레나》에서 그리스 문화권의 지휘관으로 나온다. 자세한건 해당 문서 참고.


2. 32대 교황멜키아데[편집]


해당 문서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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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제국주의 시대 서양 사학계의 시각이다.[2] 파로스 섬 공략은 밀티아데스가 반드시 해야한다고 의회를 설득한터라 기대가 컷는데 실패하여 의회는 충격이 매우 컷다. 그러다보니 그의 반대파가 밀티아데스한테 책임을 물어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사형을 선고할 죄목이 없어서 이걸로 했던 것.[3] 사형을 선고받았으나 항소하여 고액의 벌금을 내는 벌금형으로 감형되었다. 하지만 다리의 상처가 악화되어 썩어갔고 결국 감옥에서 사망하고 만다. 그에게 선고된 벌금은 사후 아들 키몬이 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