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비 탬블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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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축구 관련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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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비 탬블링
Robert Victor Tambling
생년월일
1941년 9월 18일
국가대표
파일:잉글랜드 국기.svg잉글랜드
출생지
잉글랜드 서섹스주 스토링턴
Storrington, Sussex, England
포지션
스트라이커
신장
173cm
유소년 클럽
해번트 타운 FC
첼시 FC (1957~1959)
클럽
첼시 FC (1959~1970)
크리스털 팰리스 FC (1970~1973)
코크 셀틱 (1973~1977)
워터포드 (1977~1978)
샴록 로버스 (1978~1979)
코크 앨버츠 (1978~1979)
매니저
코크 셀틱 (1974~1977)
코크 시티 (1984)
크로스하븐 FC
국가대표
파일:잉글랜드 축구 국가대표팀 로고.svg 3경기 1골 (잉글랜드 / 1962~19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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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코드가 교체되기 직전인 첼시 FC 역대급 짤, 자신을 뛰어넘기 직전 프랭크 램파드와 함께[1]

1. 개요
2. 선수생활
2.2. 그 이후
2.3. 국가대표
3. 은퇴 이후
4. 수상과 기록



1. 개요[편집]



20세기 첼시 FC의 최다득점 선수

리그기록 한정 첼시 FC 최다득점 선수[2]


바비 탬블링은 첼시 FC크리스탈 팰리스 FC를 대표하는 인물로 2013년 5월 11일 프랭크 램파드가 기록을 갱신하기 이전까지 47년간 첼시의 최다 득점레코드인 202골을 가지고 있었지만. 바로 이틀 뒤 2013년 5월 13일 37라운드에서 202번째 골과 203번째 골을 성공시켜 역사는 새롭게 갱신되었다. 런던에서의 생활 이후 아일랜드로 건너가 다양한 클럽에서 뛴 후 리그 오브 아일랜드11 이라는 명예팀에서도 뛰었다.


2. 선수생활[편집]



2.1. 첼시 FC[편집]


어릴적부터 레딩 FC, 울버햄튼 원더러스, 블랙풀 등 여러 팀에서 유스팀으로 뛰었고, 그 중 스카우터 지미 톰슨과 테드 드레이크에 눈에 띄어 1957년 15세의 나이로 첼시와 사인하게 된다. 그 후 2년 뒤인 1959년 웨스트햄 유나이티드와의 데뷔전에서 득점을 터뜨리며 팀을 3-2 승리로 이끄는 환상적인 데뷔전을 치렀다. 그 후 차차 출전시간을 늘려나가다가 AC 밀란으로 떠난 지미 그리브스의 공백을 매꾸는 첼시의 주포로 자리매김한다. 토미 도허티 밑에서 탬블링은 좋은 모습을 보여주었고, 첼시가 61-62시즌에 잠시 강등되었지만 62-63시즌에 단숨에 복귀하는 데에 일조하며 60년대 초반 5시즌 동안은 무지막지한 활약을 보여주었다. 또한 파트너인 배리 브릿지가 토트넘으로 떠나갔지만 차후 15년간 첼시의 골문을 지킨 수문장 피터 보네티테리 베너블스를 데려오며 특히 64-65시즌은 레스터 시티 FC를 상대로 3-2의 혈전을 벌이는 와중에 탬블링의 득점으로 리그 컵도 얻게되고, 맨유와 우승경쟁까지하며 클럽 두번째 리그타이틀을 가져올 수 있는 기회까지 눈앞에 둘 수 있게 된다.

하지만 그것과 별개로 첼시 내부 상황은 도허티와의 능력과는 별개로 잉글랜드 선수들의 프로페셔널함은 무척 부족했고, 그것을 고깝게 여기던 도허티와의 충돌이 잦았었다. 그러던 중 블랙풀과의 원정에서 통금시간 문제로 선수를 8명이나 벤치에도 앉히지 않고 집으로 돌려보냈고, 그결과 6:2로 대패를 당하며 3위로 마감했다.

도허티 감독과 선수진들이 화해하며 일단락되는 것 같았으나 그 후 도허티 감독은 그 선수들을 차례대로 방출했고 1967년 토트넘 홋스퍼 FC와의 FA 컵 결승전에서 바비 탬블링이 85분 만회골을 넣었으나 도허티와의 불화로 빠져나간 지미 그리브스테리 베너블스가 가세한 토트넘 핫스퍼에게 2-1로 진 후 도허티 감독은 경질되고만다. 그 후 탬블링도 2시즌 정도는 준수한 폼을 보여주었지만 서른이 가까운 나이에 폼을 회복하지 못하고 시즌 중반 겨울 크리스탈 팰리스로 이적한다.


2.2. 그 이후[편집]


4만 파운드에 팰리스로 옮겨가서 첫 반시즌은 3경기만 출전하는 등 그다지 좋은 기록은 아니었지만, 중간에 클래스를 한 번 보여준 적이 있는데, 1971년 영국-이탈리아 컵 대회 도중 주세페 메아차 원정에서 인테르에게 홀로 2골을 박아넣으며 팀을 2-1로 승리로 이끌었다.

1973년 탬블링은 아일랜드로 이주했는데, 전 첼시 동료인 패디 멀리건의 조언에 따라 코르크 셀틱에 입단했고 그 시즌 7골을 넣으며 우승에 일조하며 74-77시즌 동안은 선수 겸 감독으로도 활동했다.그 후 아일랜드 내에서 샘록 로버스 FC, 워터포드, 코르크 앨버츠 등 조금씩 옮겨다닌 후 79년 은퇴한다.


2.3. 국가대표[편집]


그는 국가대표 운이 좋지 못했는데, 1962년 11월 21일 웨일즈와의 경기, 1963년 2월 27일 프랑스에게 5-2로 패배한 경기 중 한골을 득점, 유고슬라비아와의 경기에서 총 3번밖에 출전하지 못했다.

아일랜드 이주 후에는 리그 오브 아일랜드 11이라는 명예대표팀에서도 뛰었다.


3. 은퇴 이후[편집]


1984년 코르크 시티의 감독 임무를 잠시 수행하기도 하고, 크로스해븐에 거주하며 아마추어 팀 크로스해븐 FC를 관리하는데 도움을 주고 있다고한다.

2012년 첼시 올해의 선수상 시상식에서 팀의 레전드로 특별 공로상을 수상했다. 여기서 그는 여전히 첼시 FC를 응원하고 있다고 말하며 건재함을 과시하였다.

참고로 위키백과의 바비 탬블링 문서는 한국어 위키백과의 20만번째 글이 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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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밤 훈련장에 가끔씩 방문해 첼시 선수들과 대화를 나누기도 한다.

4. 수상과 기록[편집]


첼시 FC
우승 : 1964-65
준우승 : 1966-67
준우승 : 1962-63,

코르크 셀틱
  • 아일랜드 리그
우승 : 1973-74

시즌
클럽
소속 리그
리그

리그컵
대륙대회
합계
경기
득점
경기
득점
경기
득점
경기
득점
경기
득점
잉글랜드
리그
FA 컵
리그 컵
유럽
합계
1958-59
첼시 FC
퍼스트 디비전
1
1
-
-
-
-
-
-
1
1
1959-60
4
1
-
-
-
-
-
-
4
1
1960-61
24
9
1
0
3
3
-
-
28
12
1961-62
34
20
1
2
-
-
-
-
35
22
1962-63
세컨드 디비전
40
35
4
2
-
-
-
-
44
37
1963-64
퍼스트 디비전
37
17
2
2
1
0
-
-
38
19
1964-65
33
15
5
4
7
6
-
-
45
25
1965-66
26
16
6
5
-
-
10
2
42
23
1965-67
36
21
7
6
3
1
-
-
46
28
1967-68
24
12
5
3
1
0
-
-
30
15
1968-69
38
17
5
1
3
0
4
1
50
19
1969-70
7
0
-
-
-
-
-
-
7
0
총 합계
302
164
36
25
18
10
14
3
370
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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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프리미어리그 34라운드 스완지시티와의 홈경기 후의 사진이다. 물론 좌측이 바비 탬블링이고 우측이 프랭크 램파드이다. 이날 램파드는 1골 1도움, 전반 44분에 페널티킥으로 득점에 성공한 램파드는 본인의 201번째 첼시 골을 기록하였을 뿐만 아니라 이날 첼시 선수로서 뛰는 400번째 프리미어리그 경기 출전과 본인의 800번째 경기 출전을 기록했다. 또한, 램파드는 앤디 콜 이후 처음으로 프리미어리그에서 38개의 클럽을 상대로 골을 넣은 선수가 되었다.[2] 리그한정으로는 164골로 1등, 램파드는 147골로 케리 딕슨과 공동 2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