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실리 4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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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Vasili_IV.png

출생
1552년 9월 22일
루스 차르국 니즈니노브고로드
사망
1612년 9월 12일 (향년 59세)
폴란드-리투아니아 라바주 고스티닌
(現 폴란드 마조비에츠키에주 고스티닌군 고스티닌)
묘소
대천사 성당
재위기간
루스 차르
1606년 5월 19일 ~ 1610년 7월 1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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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문
슈이스키 가문
이름
바실리 이바노비치 슈이스키
(Васи́лий Ива́нович Шу́йский)
아버지
이반 안드레예비치 슈이스키
어머니
마르파 표도로브나
형제자매
드미트리, 안드레이, 이반, 아그라페나
배우자
엘레나 미하일로브나 슈이스키 (1580년 결혼 / 1592년 사망)
마리아 뷰노소바로스톱스카야 (1608년 결혼)
자녀
안나, 아나스타샤
종교
러시아 정교회


1. 개요
2. 생애
3. 여담



1. 개요[편집]


루스 차르국차르.


2. 생애[편집]


그의 가문인 슈이스키는 류리크 왕조의 방계이며, 첫 번째 가짜 드미트리를 폐위시키고 차르가 되었다. 그러나 일찍이 가짜 드미트리의 난이 일어났을 때 드미트리를 지지했던 행적 때문에 백성의 지지를 얻지 못했고, 두 번째 가짜 드미트리의 반란 및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침략을 받았다.

이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 스웨덴 국왕 칼 9세에게 코렐라[1] 지역까지 내주어가면서 도움을 요청했으나 스웨덴에 구원 요청을 한 것이 결국 발목을 잡아 연방의 왕 지그문트 3세가 직접 개입[2]하는 단초를 제공했다.

결국 스웨덴 구원군도 스타니스와프 주키에브스키(Stanisław Żółkiewski 1547~1620)[3]가 이끄는 윙드 후사르에게 대패해 바실리 4세는 바르샤바까지 잡혀가 지그문트 3세에게 항복[4]한 뒤, 러시아로 돌아가지 못하고 폴란드 바르샤바 근처 고스티닌 성에 유폐된 채 죽음을 맞았다.


3. 여담[편집]


[1] 현 러시아 프리오제르스크 일대.[2] 지그문트 3세는 본래 스웨덴 국왕 요한 3세의 맏아들로 스웨덴 국왕 시기스문드였으나 폴란드 왕국 야기에우워 왕조 공주 출신인 어머니의 영향으로 가톨릭으로 자라 종교 개혁 이후 루터교회 국가였던 스웨덴에서 어려움을 겪었고, 결국 국왕 부재시 권한을 두고 숙부인 칼 공작과 충돌해 스웨덴 왕위에서 폐위당한 상황이었다. 이후 연방의 모든 대외 정책 초점을 스웨덴 왕위 탈환에 맞추어 폴란드-리투아니아 귀족들로부터 많은 지탄을 받았다.[3] 나중에 제2차 빈 공방전에서 포위를 푸는 얀 3세 소비에스키의 외증조할아버지.[4] 이때 폴란드 국왕 지그문트 3세한테 무릎을 꿇고 절까지 한 치욕을 당했다. 아래의 그림이 그때를 묘사한 상상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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