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예지트 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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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만 제국 제8대 파디샤
바예지트 2세
بايزيد ثانى
II. Bayezit


파일:external/www.gazetadita.al/14303886_1227863453933093_1160979338_o.jpg

출생
1447년 12월 3일
오스만국 데모티카[1]
(現 그리스 동마케도니아 트라키주 에브로스현 디디모티호)
사망
1512년 5월 26일 (향년 64세)
오스만 제국 하브사 아브라르
(現 튀르키예 마르마라주 에디르네도 하브사)
묘소
이스탄불 바예지트 2세 영묘
재위기간
오스만 파디샤
1481년 5월 22일 ~ 1512년 4월 24일
서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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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메흐메트 2세
어머니
에미네 귈바하르 하툰(출신: 알바니아인 / 프랑스인 추정)
형제자매
4남 4녀 중 장남
후궁
귈바하르 하툰 (출신: 둘카디르 왕조[1])
자녀
셀림 1세를 포함한 8남 14녀
종교
이슬람 (수니파)
이명
정의제 (Adlî)


1. 개요
2. 생애
2.1. 즉위 전
2.2. 즉위와 내전
2.3. 통치
2.4. 퇴위와 사망
3. 기타
4. 대중매체



1. 개요[편집]


파일:John Young - Bajazet (Bayezid) II (c1447-1512) called Adli the Just Sulta - (MeisterDrucke-231854).jpg

오스만 제국의 제8대 술탄이자 2대 파디샤. 메흐메트 2세의 장남이자 셀림 1세의 아버지. 별칭인 Adlî는 '정의제' 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이 별명은 아버지의 친유럽 성향[2]을 거부하고 이슬람 율법을 가르치는 학교나 종교재산 원상회복, 모스크 건립 등의 활동을 한 결과 붙은 별명이라고.[3]

이름을 부르는 법은 바예지트 1세와 동일하다.


2. 생애[편집]



2.1. 즉위 전[편집]


즉위 이전의 기록에 대해서는 많이 남아있지 않다. 터키 전설에 따르면 그의 어머니가 된 후궁프랑스에서 납치된 공주였다고 하지만, 확인은 되지 않는다.[4]

메흐메트 2세 말년에 상당히 말을 안 들었다고 하는데, 자신에게 반하는 자에게는 살벌하기 그지없었던 '정복제'에게 개기고도 무사했다는 건 이미 상당한 수준의 권력을 가지고 있었다는 걸 뜻한다. 메흐메트 2세는 독살당했다는 의혹도 있다.

2.2. 즉위와 내전[편집]


1481년, 바예지트 2세는 오스만 술탄들 중에서는 상당히 독특한 환경에서 즉위했다. 바로 동생인 이 상당한 실권을 가지고 버티고 있었다는 것이다.[5] 이스탄불에서 고관 및 관리들의 지지를 받고 즉위한 바예지트 2세와 이집트 원정군을 끌고 귀환한 젬이 부르샤에서 내전을 벌였고, 바예지트는 이를 격파했는데....

동생이 구호기사단에게 튀었다.

이 '동생이 언제 돌아와 술탄직을 요구할 지 모른다' 는 문제는 바예지트 2세를 끝끝내 발목잡았으며, 때문에 '동생 좀 잘 붙잡아 주십쇼' 하면서 구호기사단교황[6]에게 꼬박꼬박 뇌물을 먹여야만 했고[7] 이 때문에 주력 부대를 본토에서 멀리 밖으로 움직이는 일은 꺼리게 되었다.[8]

이 골치아픈 동생은 프랑스왕 샤를 8세의 이탈리아 원정 때 교황청에서 프랑스로 인도되어 원정에 동행해 나폴리에 이르렀다가 1495년 나폴리 감옥에서 사망했다.[9] 이는 바예지트 2세에게 걸려 있던 족쇄를 풀어준 셈이 되었지만 이를 우려한 교황청의 은폐 공작으로 인해 바예지트 2세는 자신의 동생이 확실히 죽은 건지 확인할 수 없었다.


2.3. 통치[편집]


대외적으로 바예지트 2세는 아버지의 정책을 이어받긴 했지만 친정을 벌인다거나 주력부대를 장거리 원정보내는 일은 꺼렸다. 우선 동생인 젬 문제도 있었고, 메흐메트 2세 때에 거의 매년 전쟁을 벌이다 보니 나라 살림이 넉넉하지 못했기 때문. 게다가 대외적으로도 유럽에는 헝가리의 마지막 현군이라 일컬어지는 마차시 1세와 그가 창설한 강력한 상비용병군인 '검은 군대'(Black Army)가 버티고 있었고, 페르시아 방면에서는 이스마일 1세에 의해 사파비 왕조가 건국되어 발목을 잡았다. 물론 이집트 맘루크 왕조도 만만찮은 적수이긴 마찬가지였다.

이런 상황에서 바예지트 2세가 주적으로 삼은 건 베네치아였다. 1483년 헤르체고비나를 점령해 베네치아령 달마티아에 대해 압박을 이어갔으며, 1499년 ~ 1503년 베네치아와 전쟁을 벌여 코로네와 모도네, 두라초 등을 확보하며 앞마당인 에게 해에서 베네치아의 세력을 약화시켰다. 이를 위해 해군력을 부지런히 증강시켰는데, 이는 언제 돌아올지 모르는 동생에 대한 대응책도 겸하는 것이었다. 또한 아버지가 미처 복속시키지 못한 몰다비아 공국을 복속시키고 다뉴브 강 하구부터 드네프르 강 하구까지 이어지는 흑해 북안을 장악하여 크림 칸국과의 연계도 강화했다.

근동 일대에서는 아버지 대에 대부분의 영토를 잃고 겨우 숨만 붙어있던 카라만 왕조를 멸망시켜 아나톨리아 상당 부분을 평정했고[10] 맘루크 왕조와 교전을 벌여 국경선을 확정짓는 등 꾸준히 동쪽으로 팽창해 나아갔으나, 시아파를 기조로 하는 사파비 왕조의 건국과 충돌로 인해 곤란을 겪었다.

서유럽에서는 그라나다 왕국의 지원 요청에 응해 소규모나마 함대를 보내[11] 스페인 해안지대를 약탈하기도 했지만, 전세를 뒤집을 수는 없었다.

그외에 내치 분야에서는 모스크, 대학, 병원, 교량 건설 등에 상당한 시간을 투자했고, 철학과 법학, 문학을 적극 지원했으며, 아버지가 몰수했던 종교 재산들을 되돌려주었고, 이베리아 반도로 보냈던 원정 함대에게 명령해 스페인에서 떠나려는 유대인이나 무슬림을 받아주기도 하고 앞으로 개인적으로 망명해 오는 경우 내치지 말고 모두 받아들이라고 지시했다.[12]

2.4. 퇴위와 사망[편집]


1509년 코스탄티니예를 덮친 지진 이후 바예지트 2세는 급속도로 노쇠한 모습을 보였고[13], 이에 자식들은 차기 술탄직을 노리며 내전을 벌이기 시작했다. 본래 바예지트가 후계자로 낙점했던 인물은 장남인 아흐메트(Ahmet)였지만[14], 페르시아 사파비 제국의 사주를 받아 시아파 신비주의자들이 일으킨 반란인 샤 쿨루(Shah Kulu)의 반란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인망을 잃었다.[15]

한편 이와 같은 무렵, 셀림은 바예지트에게 자신의 임지를 루멜리아, 즉 발칸 반도로 옮겨주기를 요구하고 있었다. 이는 당연히 유사시에 코스탄티니예에 먼저 들어가기 위한 것이었지만, 그가 임지로 받은 곳은 저 북쪽에 위치한 변방.[16] 결국 셀림은 코스탄티니예 부근을 지나가던 중에 임지로 향하기를 거부하고 눌러앉아 버렸고, 그를 반역으로 여긴 바예지트는 군사를 보내 셀림의 군대를 제압했다. 이에 셀림은 크림 칸국으로 잠시 망명했다가 크림 칸국에게서 군사를 빌려 곧 귀환했고[17], 거기에 예니체리들이 동조하면서 압박을 가했고 결국 바예지트는 셀림에게 양위하여 셀림이 셀림 1세로써 술탄이 되는 것을 바라보게 된다.[18]

제위에 오른 셀림은 부황을 역대 오스만 황제들이 즐겨 방문하던 사냥터이자 별궁이 있는 디메토카(Dimetoka)로 옮길 것을 명했으나, 바예지드는 이곳으로 가는 도중에 서거했다. 공식적으로는 실의에 빠져 죽었다고는 하나 셀림 1세가 독살한 것이라는 의혹이 상당히 짙다. 애비를 독살했다는 의혹을 받더니 자식에게 독살당했다는 의혹도 받는군.


3. 기타[편집]


  • 파일:에디르네 터키 1.jpg
에디르네의 바예지트 2세 단지

  • 아버지인 바예지트 2세가 동생 문제로 끙끙 앓는 것을 지켜본 셀림 1세는 자신의 동생들 뿐만 아니라 조카까지 모조리 참살하는 살벌한 행위를 벌였다. 사실 술탄 즉위 이후 경쟁자 살해는 오스만 제국의 4대 술탄인 바예지트 1세 때에 처음으로 벌어졌으며[19][20], 위의 각주에서도 언급했듯이 메흐메트 2세는 이를 법제화해 버린다. 이후 13대 술탄인 메흐메트 3세에 이르기까지 형제 살해가 계속되기에 이런 살벌함이 셀림 1세만의 문제는 아니며 셀림 1세는 오히려 법대로 한 것일 뿐이다.[21].

4. 대중매체[편집]


어쌔신 크리드 : 레벨레이션에선 언급은 많긴 많은데 콘스탄티노플을 떠나 아예 어딘가에 은둔해버리고 나오지 않는다고 한다. 맨 끝에 나오는 셀림과는 달리 결국 끝까지 나오지 않는 맥거핀이다.

일본의 소설가 시오노 나나미의 작품들에서는, '창업주인 아버지 메흐메트 2세의 업적을 정착시키는 데에만 열중한 인물' 이라거나, 그보다도 못한 평가로 '아버지 메흐메트 2세의 업적을 정착시키는 것만도 힘에 부쳐한 인물' 이라는 식으로 묘사된다. 하지만 결코 그렇지가 않은데, 이미 소개했던 것처럼 바다에서는 베네치아의 영토를 적지 않게 빼앗았으며 육지에서는 헤르체코비나를 점령했다. 바예지트 2세 시대의 오스만 제국이 상대적으로[22] 영토를 많이 확장하지 못한 것은, 동생인 젬이 십자군을 이끌고 쳐들어온다는 가능성을 아예 배제할 수 없었으므로 군사활동을 벌이기가 더 조심스러웠던 데다 아버지가 허구헌 날 전쟁을 벌였던 탓에 국고에 큰 부담이 갔기 때문에 일부러 대규모 전쟁을 삼갔기 때문이다. 또한, 바예지트의 군사적 재능이 다소 떨어진다는 것[23]도 원인이 될 수 있을 듯. 시오노 나나미의 이런 박한 평가는 바예지트가 그녀가 그토록 물고 빠는 베네치아를 밀어 붙인것에 대한 악감정도 한 몫 했을 수 있다.

오스만의 술탄이 되었다에서는 주인공의 아버지로서 등장, 확실히 명군으로 칭송받는 군주답게 범상치 않은 모습으로 나온다. 이 세계관에서는 주인공 유수프의 등장으로 마음이 급해진 셀림에 의해 원역사보다 빨리 제위를 찬탈당하며 그 뒤 실의에 빠져 방에만 있다 이스탄불 대지진때 치명상을 입게 되고 결국 유수프를 보고 그와 마지막 인사를 나눈 뒤 죽게 된다. 그래도 여기서는 대지진의 원흉이라는 낙인이 찍힌 건 셀림 1세가 된 덕에 말년의 이미지는 사라진 어찌보면 대체역사의 수혜자.

이탈리아에서 살아남기에서도 등장. 여기서는 바뀐 역사의 피해자 포지션인데 우선 동로마 제국이 재건되며 아버지의 업적이 삭제되어버렸고[24] 이후 유럽으로 튄 동생 젬이 서방과 맘루크의 지원에 힘입어 다시 한 번 반란을 일으키는 통에 아나톨리아 대부분을 상실하고 거기다 제국 수호 전쟁을 일으킨 동로마에 맞서다 본인이 포로로 잡혀 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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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그리스 동쪽 에디르네 근처에 있다.[2] 단순히 '친유럽 성향' 이라고만 하면 유럽의 여러 국가들과 두루 친했다고 오해할 수 있는데, 어디까지나 문화 한정.[3] 역대 오스만 제국의 황제들 가운데 유독 내정에 관심을 많이 기울였기 때문이라고도 한다. 즉 아버지가 만들어놓은 각종 법과 제도가 잘 돌아가나 어쩌나 눈에 불을 켜고 감시했다는 이야기.[4] 역대 술탄의 부인들 중에는 유럽 출신들도 있는 데다 부왕이 친유럽적 성향인 만큼 어머니가 터키가 아닌 유럽이거나 혹은 다른 외국 출신일 가능성이 있다. [5] 오스만 제국에서는 술탄이 죽은 뒤 자식들끼리 다음 술탄 자리를 놓고 겨루는 관행이 있었는데, 메흐메트 2세는 이를 법제화한다('술탄이 된 자는, 그의 형제들을 모조리 제거하라').[6] 구호기사단은 나중에 이 거물급 인질을 교황청으로 넘긴다. 오스만 황자의 신병을 확보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교황이, 자신에게 넘길 것을 요청했기 때문. 당시 교황이었던 인노첸시오 8세는, 젬을 가톨릭으로 개종시켜 십자군을 이끌게 해, 결과적으로 오스만 제국을 유럽에서 몰아내려는 원대한 꿈이라고 쓰고 망상이라고 읽는다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젬은 끝끝내 가톨릭으로 개종하지 않아, 십자군도 물 건너 갔다.[7] 롱기누스의 창으로 알려진 성유물을 교황 인노첸시오 8세에게 선물한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 성 베드로 대성당에는 롱기누스의 커다란 조각상과 함께 이걸 기념하는 명문을 조각상의 대좌에 새겨놨는데, '교황 인노첸시오가 튀르크의 폭군으로부터 받은'이라고 적었다(…).[8] 이때 교황이였던 알렉산데르 6세는 이 인질의 가치가 날이 갈수록 올라간다는 것을 꿰고 있었고, 때문에 바예지트 2세가 몇 번이나 '좀 죽여달라'고 뒷돈을 주는 걸 그냥 먹튀했었다고 한다.(...)[9] 감옥에 있었다고는 하나 귀한 인질이니 만큼 '황제 같은 죄수 생활' 을 누렸다고 한다.[10] 아나톨리아 전체를 정복한 건 아들인 셀림 1세 때의 일이다.[11] 1485년부터 1491년까지 맘루크 왕조와 전쟁 중이라, 대군을 파견하기는 어려웠다.[12] 실제로 이것 때문에 스페인은 남 좋은 일만 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으며, 바예지드 스스로가 신하들에게 "그대들은 감히 페르난도를 현명한 군주라 하지만, 그는 자신이 통치하는 나라를 가난하게 만들고 짐의 제국을 부유하게 하는구나!" 라고 했다고도 전한다. 다만 당시 스페인 군주들은 가톨릭 왕이라는 정체성이 왕권의 주요 근거라 일정 부분 어쩔 수 없던 측면도 있었다.[13] 상술되어 있듯이 독실한 무슬림이었고, 아버지 대에 수립된 여러 법과 체제가 유지되도록 하는 데 엄청나게 노력했다. 그런데 그렇게 30년 가까이 재위하고 난 뒤에 찾아온 게 지진이라면, 내가 지금까지 도대체 뭘 해 온 건가 하는 생각에 빠지기에 딱 좋다. 게다가 이 때의 지진은 그냥 가볍게 흔들리고 만 정도가 아니라 오스만 역사가들이 "최후의 심판의 축소판이더라" 라는 식으로 기록하게 만든 큰 지진으로, 모스크 100채 이상, 가옥 1000채 이상, 콘스탄티노플 성벽의 탑 50채 가량에 피해를 입혔다. 진도는 대략 7.0에서 7.5 정도였던 것으로 추정되며, 인명 피해는 기록이 부족해 정확히 집계되진 않지만 적어도 천 명에서 많게는 13000명 가량까지로 추정되고 있다.[14] 오스만 제국의 황위 계승법에 따르면, 황제가 죽은 뒤 여러 황자들 가운데 가장 먼저 수도 코스탄티니예에 입성하는 자가 다음 황제로 즉위하게 되어 있었다. 그리고 황자들은 한 사람도 예외 없이 아나톨리아 반도의 중요 도시의 총독직을 지내며 제왕교육을 받도록 되어 있었는데, 이 말은 어느 황자를 어느 도시로 보내는가를 보면 후계자로 누구를 생각하고 있는가 하는 점을 알 수 있다는 말이 된다. 당연히 후계자로 낙점된 황자는 코스탄티니예 코앞으로, 영 아니다 싶은 아들은 먼 변방으로 보낼 테니.[15] 이후의 제위 분쟁을 생각했는지, 반란 진압보다도 휘하 병력 보존에 연연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로 인해 그와 함께 진압군을 이끌었던 재상이 전사하는 등 적지 않은 피해를 입었고, 이는 예니체리들이 그가 아닌 셀림을 지지하게 만드는 결정적인 계기가 된다.[16] 문자 그대로 국경지대였다. 위에서 각주로 소개했듯이 황자들은 아나톨리아 반도로 파견되지 루멜리아로 보내지지는 않았는데, 셀림의 생각을 읽은 바예지트가 강수를 둔 것.[17] 셀림의 아내 중 하나인 아이셰 하툰은 크림 칸의 공주로 처음엔 메흐메트에게 시집왔다 자식없이 그가 죽자 메흐메트의 이복형제인 셀림에게 재가하여 딸 셋을 낳았다. [18] 이후 아흐메트는 아나톨리아 반도를 근거지로 반란을 일으키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셀림이 친히 이끄는 군대에게 진압당하고 붙잡혀 처형된다.[19] 3대 술탄인 무라트 1세도 이복형 이브라힘과 이브라힘의 어머니, 이복동생 할릴을 처형했다. 할릴의 어머니는 동로마 제국의 요안니스 6세 칸타쿠지노스의 딸(2대 술탄 오르한에게 시집 와 아들까지 낳았음에도 개종하지 않은 기독교도)이었으므로 처형하지 않고 모국으로 돌려보냈다.[20] 2대 술탄 오르한도 하나뿐인 이복동생이 형님에게 왕위를 양보하고 수도원으로 들어가 형제살해없이 계승이 이뤄졌다는 기록과 달리 경쟁자인 남자 형제가 둘 이상 있었고, 어느 순간 기록에 등장하지 않는 것으로 보아 오르한에게 처형당했을 가능성이 높다는 연구결과가 있다.[21] 그나마 다행인 건진 모르겠지만 셀림은 친아들까지 죽이진 않았다. 셀림의 아들이자 뒤를 이은 쉴레이만은 정말 운이 좋게도 외아들이었기 때문. 셀림은 쉴레이만 이외에 하티제 술탄, 베이한 술탄, 샤 술탄, 파트마 술탄, 셰자데 술탄 등을 낳았는데, 이들은 모두 딸이었다.[22] 아버지아들, 손자 대에 비해[23] 물론, 어디까지나 상대적으로 그렇다는 것. 사실, 앞뒤에 포진한 군주들이 군사적 능력이 먼치킨급이던 메흐메트 2세와 셀림 1세이니 비교하는 것 자체가 말이 안된다...[24] 다만 오스만은 동로마재건을 인정하는 순간 선대인 메흐메트 2세의 업적 삭제가 공인되는 것이고 그로 인한 황실 권위 추락을 피할 수가 없기에 인정을 하지 않고 동로마를 베네치아 군주국이라 부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