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오딩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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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중북부 허베이성의 지급시. 베이징에서 서남쪽으로 120km, 스자좡에서 동북으로 100km 떨어진 평야에 위치한 도시이다. 현재 인구는 무려 1200만명으로 중국에서 9번째로 큰 도시이다. 바오딩의 명칭 保定(보정)은 수도를 보호한다는 뜻이며, 원나라 대에 붙여진 이름이다.
1250년에 세워진 다치거 (대자각 大慈阁)
석기시대부터 사람이 거주하였으며, 당시 유적인 난좡더우 유적(南庄头遗址) 및 댜오위타이 유적(釣鱼台遗址)[3] , 야오좡 유적(要庄遗址)이 여기서부터 화베이유전지구까지 이어져있다. 하상시대에는 부산(釜山)[4] 이라고 불리었으며, 요 황제의 고향으로 내려오고 있다.
춘추전국시대에는 연나라부터 조나라, 중산국이 이 땅을 통치하였으며 바오딩에는 연나라의 별도(別都)[5] 인 연하도(燕下都)가 위치해 있었다. 이후 진나라 시기에는 상곡군(上谷郡), 한나라 시기에는 중산군(中山郡)과 탁군(涿郡)[6] 소속이었으며 북위 시기에는 북평군(北平郡) 관할로 있었다. 581년 수나라는 이 곳의 이름을 청원(淸苑)으로 바꾸었는데 이 이름은 1958년 청원현(清苑县)이 폐지될 때까지 쓰였고, 2015년 구(區)의 이름으로 부활하였다.
송나라시기에는 나름 중요하게 다루어졌는데, 그 이유는 바오딩에 조광윤의 조부인 송 익조 조경(赵敬)의 능인 정릉(靖陵)이 위치 해 있기 때문이었다. 해당 능은 현재도 그대로 있으며, 현재는 전국중점문물보호단위로 지정되어있다. 금나라 시기에는 순천군절도사(顺天军節度使) 관할지역었다. 이후 명나라가 바오딩에 보정부(保定府)를 설치하였고, 청나라 때에는 더욱더 중요해져서 직례성(直隷省/현 허베이성河北省)의 중심지가 되어 1958년까지 성도(省都)의 역할을 했다. 또한 옹정 연간에 지어진 유명한 도서관인 연지서원(莲池书院)에서 알 수 있듯 행정 중심지일 뿐만 아니라 학문의 중심지이기도 했다. 한국사와의 관련점으로는 임오군란으로 흥선대원군이 끌려와 유폐되기도 한 곳이 바로 여기다. 철도가 도입되고는 1905년 개통된 징한철도(京汉铁路: 베이징~우한)가 통과하여 교통의 중심지가 되었다.
중화민국 북양정부의 직례성의 치소였으며, 중일전쟁 당시에는 일본군의 주요 거점이었다. 중화인민공화국이 수립되고 나서도 톈진이 직할시로 승격되고 스자좡으로 성도가 옮겨지는 1958년까지 허베이성의 성도였다.
바오딩은 인민해방군의 제 38 기계화 사단의 주둔지이기도 하며, 풍력 발전 단지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화학 공업 도시로서 중국 최악의 스모그로 악명높은 곳이다. 시가지를 두른 6km의 명대 성벽과 연지서원, 그리고 도시 인근의 청서릉 (청동릉은 탕산(唐山)에 위치한다)이 유명한 관광지이다.
중국정부는 하베이성 바오딩시 동부에 2017년 부터 슝안신구(雄安新区) 라는 국가급개발특구로 대규모의 새로운 행정도시를 건설중이다. 안신현(安新县), 슝현(雄县), 룽청현(容城县) 세 현에 걸쳐 있고 3단계 개발후 예정 면적은 서울 면적의 3.3배 규모인 2000 km2. 개발전에는 인구 115만의 농촌이었다. 중국 국가주석 시진핑의 pet project로 베이징, 텐진과 가까운 곳에 선전시, 상하이 푸둥신구 개발 성공에 이은 신시대 중국특색 사회주의식 도시개발을 추진중이다.
1. 개요[편집]
중국 중북부 허베이성의 지급시. 베이징에서 서남쪽으로 120km, 스자좡에서 동북으로 100km 떨어진 평야에 위치한 도시이다. 현재 인구는 무려 1200만명으로 중국에서 9번째로 큰 도시이다. 바오딩의 명칭 保定(보정)은 수도를 보호한다는 뜻이며, 원나라 대에 붙여진 이름이다.
2. 역사[편집]
1250년에 세워진 다치거 (대자각 大慈阁)
석기시대부터 사람이 거주하였으며, 당시 유적인 난좡더우 유적(南庄头遗址) 및 댜오위타이 유적(釣鱼台遗址)[3] , 야오좡 유적(要庄遗址)이 여기서부터 화베이유전지구까지 이어져있다. 하상시대에는 부산(釜山)[4] 이라고 불리었으며, 요 황제의 고향으로 내려오고 있다.
춘추전국시대에는 연나라부터 조나라, 중산국이 이 땅을 통치하였으며 바오딩에는 연나라의 별도(別都)[5] 인 연하도(燕下都)가 위치해 있었다. 이후 진나라 시기에는 상곡군(上谷郡), 한나라 시기에는 중산군(中山郡)과 탁군(涿郡)[6] 소속이었으며 북위 시기에는 북평군(北平郡) 관할로 있었다. 581년 수나라는 이 곳의 이름을 청원(淸苑)으로 바꾸었는데 이 이름은 1958년 청원현(清苑县)이 폐지될 때까지 쓰였고, 2015년 구(區)의 이름으로 부활하였다.
송나라시기에는 나름 중요하게 다루어졌는데, 그 이유는 바오딩에 조광윤의 조부인 송 익조 조경(赵敬)의 능인 정릉(靖陵)이 위치 해 있기 때문이었다. 해당 능은 현재도 그대로 있으며, 현재는 전국중점문물보호단위로 지정되어있다. 금나라 시기에는 순천군절도사(顺天军節度使) 관할지역었다. 이후 명나라가 바오딩에 보정부(保定府)를 설치하였고, 청나라 때에는 더욱더 중요해져서 직례성(直隷省/현 허베이성河北省)의 중심지가 되어 1958년까지 성도(省都)의 역할을 했다. 또한 옹정 연간에 지어진 유명한 도서관인 연지서원(莲池书院)에서 알 수 있듯 행정 중심지일 뿐만 아니라 학문의 중심지이기도 했다. 한국사와의 관련점으로는 임오군란으로 흥선대원군이 끌려와 유폐되기도 한 곳이 바로 여기다. 철도가 도입되고는 1905년 개통된 징한철도(京汉铁路: 베이징~우한)가 통과하여 교통의 중심지가 되었다.
중화민국 북양정부의 직례성의 치소였으며, 중일전쟁 당시에는 일본군의 주요 거점이었다. 중화인민공화국이 수립되고 나서도 톈진이 직할시로 승격되고 스자좡으로 성도가 옮겨지는 1958년까지 허베이성의 성도였다.
바오딩은 인민해방군의 제 38 기계화 사단의 주둔지이기도 하며, 풍력 발전 단지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화학 공업 도시로서 중국 최악의 스모그로 악명높은 곳이다. 시가지를 두른 6km의 명대 성벽과 연지서원, 그리고 도시 인근의 청서릉 (청동릉은 탕산(唐山)에 위치한다)이 유명한 관광지이다.
3. 경제[편집]
중국정부는 하베이성 바오딩시 동부에 2017년 부터 슝안신구(雄安新区) 라는 국가급개발특구로 대규모의 새로운 행정도시를 건설중이다. 안신현(安新县), 슝현(雄县), 룽청현(容城县) 세 현에 걸쳐 있고 3단계 개발후 예정 면적은 서울 면적의 3.3배 규모인 2000 km2. 개발전에는 인구 115만의 농촌이었다. 중국 국가주석 시진핑의 pet project로 베이징, 텐진과 가까운 곳에 선전시, 상하이 푸둥신구 개발 성공에 이은 신시대 중국특색 사회주의식 도시개발을 추진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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